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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어린이] 어린이와 게임 - 게임, 타자가 필요한 오락

계간 창비어린이
2010. 3. 봄호.

 

어린이와 게임 - 게임, 타자가 필요한 오락

이광석

필자는 미국에서 한 9년간 유학생활을 했다. 오랜 세월 타지에서 지내다보니 가족들과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그 누구보다 상대적으로 아들과 시간을 많이 보냈다. 유학생 가족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지내는 학교 생활에서 가족이 주는 안식은 절대적이다. 하루종일 영어 스트레스에 입과 귀가 쥐나려할 때 아이와의 놀이와 휴식은 오아시스와 같은 여유를 줬다. 그렇게 살다 귀국해선 먹고사는 일이 뭐 그리 바쁜지 아들과 지내는 일이 가뭄에 콩나듯 하다. 좋았던 그 시절을 되돌아보면, 미국에서 유학생 부모들, 특히 아빠와 자녀들간의 관계는 대체로 건전하게 보였지만 대개 미국식 소비문화의 틀 안에 갇혀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헐리웃의 흥행주기와 스케줄에 따라 어린이들과 부모들이 함께 움직인다. 알면서도 그냥 이에 반응해 움직일 수밖에 없는, 가족의 놀이 법칙같은 것이 존재한다. 그 상황을 잠깐 들여다보자.

어린이들의 원초적 게임들


먼저 헐리웃이 특정의 화제작을 띄우기 위해 바람을 잡으면, 대개 소비자들은 의도한 바를 알면서도 넘어간다. 예를 들어, 2011년 5월이나 개봉한다는 <스파이더맨4>가 당장 몇주 뒤 개봉한다고 치자. 때가 오면 텔레비전은 개봉을 앞두고 연일 관객몰이하느라 광고에 불이 난다. 이는 한국에서도 비슷하다. 잘 보이지않던 연예인들이 갑자기 이 채널 저 채널 자주 등장한다면 십중팔구 이들은 영화 홍보 도우미다. 반면 어린이들에게 영화 개봉의 바람잡이 역할은 영화에 등장하는 캐릭터 인형들이 담당한다. <스파이더맨 4>가 개봉된다면 아마도 1, 2, 3 시리즈들에 출현했던 왕년의 캐릭터들이 보관 창고에서 먼지털고 나와 다시 상점 가판에 깔리고, 그들과 더불어 스파이더맨의 치명적 라이벌들인 ‘블랙캣’, ‘리저드’, ‘카니지’(Carnage) 등 새로운 캐릭터들이 추가로 늘어날 것이다.


  어린이들의 영화에 등장하는 하나의 시리즈물에도 캐릭터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수십 가지가 훨씬 넘는 나무로 만든 토마스 기차와 그의 친구 기차들을 생각해보라. 캐릭터 하나 사줄 때마다 등골이 휜다. 사실 이도 수백수천이 넘는 ‘스타워즈’ 영화 캐릭터에 비하면 상당히 양호한 편이다. ‘포켓몬’, ‘디지몬’, ‘유희왕’, ‘드래곤볼’, ‘나루토’ 캐릭터 게임 카드는 어떠한가. 마치 편의점의 껌처럼 아이들을 유혹하는 문방구 품목들이다.

  어린이들이 처음 벌이는 게임은, 사실 디지털 시대의 게임 유형보다는 이들 장난감 캐릭터나 카드를 양 손에 들고 펼치는 상황극이다. 초등학교 5학년인 내 아이는 아직도 한 1년남짓 팔다리가 너덜해 다 떨어진 ‘파워레인저’ 캐릭터 둘을 갖고 “푸쉬, 피웅, 피웅” 침을 튀기면서 이것들에 싸움을 붙여가며 논다. 올해 해를 넘기면서 뭔가 작심했는지 우리 아이는 쓰레기통에 그 너덜한 파워레인저들을 내던져버렸다. 그래도 아이의 손때를 타 만질만질한 그 녀석 둘을 마주하고 이내 버릴 수 없어 서랍 속 깊이 간직했다 보여줬더니 우리 아이가 날아갈 듯 기뻐해 놀란 적이 있다. 마치 이산가족 상봉이라도 한 것처럼, 우리 아이는 그 닳아빠진 캐릭터들을 집어들고 다시 침을 튀겨가며 놀고 지낸다. 이렇듯 캐릭터들의 실제 상황극은 아직도 우리 아이들을 지배하는 최고의 게임이다.


  비디오 게임의 사회적 효과들 


  하던 얘기를 계속 해보자. 이렇게 헐리웃이 장난감 업체들과 캐릭터로 한껏 분위기를 띄우면, 대개 어린이들은 영화 개봉일이 올 때까지 카운트다운에 돌입한다. 사실상 집안으로 들어가보면 카운트다운은 아이 대신 부모가 더 열심히 하는 경우가 많다. 보호자라는 명분으로 부모는 아이를 데리고 영화를 관람하고 아이보다 더 즐거워한다. 영화 관람후 후유증은 어른보다 아이들에게 더 오래 간다. 대개 어린이들은 관람후 다시 캐릭터 수집에 몰두하고 상황 게임에 한층 몰입한다. 관람했던 영화가 조만간 디브이디(DVD)로 출시되면 아이들은 이를 사달라고 조른다. 성화에 못이겨 구입한 디브이디를, 아이들은 질릴 때까지 반복  시청하며 즐긴다. 이것이 헐리웃의 가내 경제심리학이다.

   예서 하나 더. 어린이들이 영화 관람후 보다 본격적으로 그 여운을 즐기는 방식이 또 있다. 진짜배기 게임이다. 미국에선 주로 게임 콘솔, 즉 하드웨어를 구입해 즐기는 비디오 게임이 대세다. 크리스마스 때면 아이들의 최고 선물은 단연 마이크로소프트의 ‘엑스박스(Xbox)’,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PS)’, 그리고 닌텐도가 만든 ‘위(Wii)’ 등이다. 다들 게임 콘솔들이다. 필자의 유학 시절 아들과 즐겼던 놀이의 대부분 시간은 이들 비디오 게임을 같이 즐기는데 쓰였다. 만약 <스파이더맨4> 게임이 콘솔용으로 시장에 나오면, 손으로 쥐고 놀던 캐릭터 인형들의 상황극은 종료되고 화면 위 캐릭터들간의 격투신으로 바뀐다.

   콘솔 게임은 비용이 쏠쏠하게 많이 든다. 게임 콘솔을 위해 한번 구입하는 가격은 아무 것도 아니다. 매번 게임 타이틀 출시에 맞춰 구입하는 비용이 훨씬 더 크다. 정말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경우다. 가정 경제의 지출 내역이 뭔지 알게 무엇인가. 그저 아이는 새 게임 타이틀을 사면 그것의 전체 스토리를 마칠 때까지 집중한다. 스토리가 없는 격투 게임인 경우에는 질릴 때까지 한다. 후자는 친구나 아빠랑 벌이는 격투가 대체로 많고, 전자의 경우엔 이들과 협업해 공동의 과제를 푸는 식이다. 어느 한쪽이 지건 이기건, 진행될수록 부자지간에 정이 드는 것도 효과 중 하나다. 아이의 생일 때나 집에 친구들이 놀러오면 주로 재미삼아 하겠지만 일종의 그들만의 ‘의식’(ritual)인양 비디오게임을 수행한다. 게임이 그들간 의식이 되면, 이미 스토리의 일부를 앞서 깬 친구들은 뒤따르는 아이들의 멘토이자 스승이 된다. 결국, 헐리웃의 돈벌이를 위해 고안된 홍보-캐릭터상품-영화-디브이디-게임 등으로 연결되는 연쇄 고리는 가족의 여가 생활을 부정적으로 구성하면서도, 일견 부모와 아이 그리고 아이들 사이에 새로운 소통의 관계를 생성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입맛이 다른 게임들


  게임들에 따라 입맛도 천차만별이다. 어떤 장르인지 어떤 콘솔을 쓰는지에 따라 즐기거나 빠져드는 정도가 다르다. 게임보이와 같은 휴대용 게임은 차량 이동 중 막간을 이용해 즐길 수 있는 야참형 콘솔이다. 비디오 게임은 앞서 본 것처럼, 친구, 가족 등과 함께 즐기기에 좋다. 좋은 점이라면 새 비디오 게임 타이틀을 사줘도 어린이들의 중독성은 대체로 일주일이면 가라앉는다. 즉 게임 내러티브를 얼추 다 깨고 읽으면 아이가 그제서야 정신을 깬다. 그 때까진 게임하는 아이보다 부모가 패닉 상태에 이른다. 요새 한창 유행하는 개콘의 남보원에서 유행하는 말, “괜히 사줬어, 사주지 말걸 그랬어”라는 후회가 몇 번이고 밀려온다. 이 상황을 보내면 대개 어린이들은 평정을 찾는다.

   내 아이의 경우 비디오 게임 타이틀을 사주는 것이 뜸해지면서 아빠를 통해 컴퓨터 게임을 배우고 즐기기 시작했다. 일단은 상대적으로 구입 비용이 저렴하다. 각종 게임을 컴퓨터에 내려받아 수행하는 컴퓨터 게임은 사실상 두 손 위에 조이스틱 대신 컴퓨터 키보드를 잡는 경우라 보면 무방하다. 서로 닮았으나, 비디오 게임의 경우 아무래도 그래픽 구현이 좀 떨어지긴 한다. 하지만, 이도 게임을 다 끝날 때까지 “괜히 깔아줬어”라는 부모들의 후회를 끝없이 밀려오게 한다는 점에선 비슷하다. 이도 사나흘 정도면 아이의 중독성은 정상 수치로 복귀한다. 내 아이를 관찰한 경험이다.


  

 

물론 어린이들이 게임이 일상이 될수록 어지간한 그래픽이나 상황 설정에 무감각해가는 경우가 점차 늘어난다. 예를 들어, 1인 슈팅 게임인 임무수행(Call of Duty) 시리즈가 최근 현대전 4탄까지 나왔는데, 게임이 일상인 어린이들에게 2차 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1, 2탄은 별 감흥을 주지 못한다. 머리에 철모쓰고 단발식 소총을 들고 등장하는 60년대 ‘전우’를 연상시키는 그래픽보다는, 최첨단 무기와 위성 미사일이 불을 뿜는 최신 용병전 정도가 되야 어지간히 재미가 붙는다. 게임의 그래픽 강도나 내러티브의 세밀함에 대한 어린이들의 적응력은 이처럼 대단히 빨라진다. 그러다보니 어지간한 애니메이션 영화도 우습다고 쳐다보지도 않는다. 애니메이션이면 무조건 신기해하던 때와는 다르다. 이렇듯 영상 과잉 노출로 감성이 무뎌질진 모르겠으나, 달리 보면 영상을 해독하는 감각에 변별력이 상승하는 측면도 동시에 존재한다.

 
  게임에 중독된 어린이?


  한동안 내 아이는 게임방 열병을 겪었다. 마치 놀이동산 가자고 보채는 아이처럼 게임방을 가자고 내게 졸랐다. 방과후 한두번 친구들이 가자고 제안했는데 아무래도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집으로 서둘러 돌아왔던 터였다. 내 아이의 머릿속에 게임방은 무서우면서도 선망의 곳이었다. 어디서 얘길 들었는지 게임방엔 나쁜 아저씨들이 입에 담배물고 잘못하면 돈도 뺐는 악의 소굴로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당시 아이의 마음 한구석에는 그 곳에 가는 친구들이 부러웠던 모양이다. 이유는 게임방에선 원하는 게임을 실컷 할 수 있고 왠지 롤러코스터같은 짜릿함이 거기 가면 있다는 기대치 때문이었다. 내 아이는 자신의 두려움을 없애는 방법으로 아빠를 택했다. 나를 대동하여 게임방에 갔으면 했다.

   아들을 통해 나 또한 머리털나고 처음 오락실에 친구들이랑 가슴을 콩닥거리며 들어섰던 기억을 떠올린다. 하필 그날 어머니 친구분이 고속터미널 근처 오락실에 있는 나를 정말 말도 안되는 막장드라마의 우연처럼 발견하시고 어머니께 고변하신 적이 있었다. 이윽고 어머니께 정신없이 회초리로 맞던 기억이 생생하다. 왜 그 땐 그리도 어른들이 막을수록 하고 싶었는지. 중독과 열병은 결국 욕망의 과도한 통제 때문에 빚어지는 효과가 아니던가. 어머니의 과도한 체벌에 대한 반발 심리일까? 어른이 된 난 흔쾌히 아들과 게임방에 몇 번 같이 갔다. 다행히 동행의 효과인지 뭔지 우리 아이는 게임방에 흥미를 잃고 더 이상 가잔 소리가 없다.

   요샌 아이가 인터넷 게임을 하면서 좀 색다른 경험을 하고 있다. 진정 말로만 듣던 심한 게임 중독 증세를 보였다. 일순간에 붙었다 가라앉을 것으로 보였던 게임에 대한 집착이 오히려 점점 늘어났다. 얼마전 아들에게 애둘러 물었다.

요새 왜 그리 ‘버블파이터’에 정신 못차리는데?
잘 몰라
왜 몰라. 비디오 게임보다 뭐가 재밌는데?
잘 몰라. 그냥 더 재밌어.
그냥 재밌어?
여럿이서 함께 하는 거라서 재밌어.
야, 미국에서도 ‘룬스케이프’(Runescape, 롤플레잉 게임의 일종) 하면서도 잠깐 재미로 잘 놀더구먼. 왜 그렇게 게임을 계속 해대는데?
룬스케이프는 롤플레잉만 하지만, 버블파이터는 여럿이서 슈팅하면서 놀 수 있어.


  아이들은 우선 단순히 타자와 함께 노는 것에 생동감을 느낀다. 스크린만 보고 하는 비디오 게임과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본다. 게다가 상대팀들을 교란하고 싸우기 위해 살아있는 여럿이 편을 먹고 지네끼리 소통하는 상황이 재밌다고 여긴다. 실제로 온라인 게임이 중독성에서 단연 뛰어나다는 점을 나름 감지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내 아이만은 이미 게임으로 단련되어 중독증에 항체가 생겼다고 보았던 터였다. 게임이 잘 안풀리면 식구들에게 신경질도 점점 늘었다. 자발적으로 책읽고 조용히 그림 그리는 시간들이 점차 줄어들었다. 게임하는 시간을 줄여 거짓말하기도 하고, 어른들이 외출후 들어오면 후다닥 컴퓨터를 끄는 모습도 보였다. 결국 집을 나설 때 컴퓨터에 패스워드를 걸고 게임을 지우는 수도 썼지만 무의미했다.


   이런 아이를 보면서 갑자기 브루스 윌리스 주연의 영화 <서로게이트 Surrogates>가 떠올랐다. 인간들은 구질구질하고 나약하고 늙어가는 신체를 대신할 자신의 싱싱한 대리인(서로게이트)이 행세하는 세상에서 시들어간다. 마치 인터넷에 연결된 수많은 롤플레이어들처럼 인간들은 무기력하게 누워 이들 껍질뿐인 대리인들을 조정하며 인생을 살아간다. 우리 아이의 게임 중독에서 서로게이트에 의존해 점점 노쇠해가는 영화속 서로게이트형 인간의 모습까지 볼 정도로 상태는 심각했다. 열병은 심했고 오래 걸렸으나 가족의 노력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스스로도 온라인 폐인이 되가는 느낌이 들었는지, 서서히 게임을 줄여나가는 법을 배워 갔다. 자연 책 읽는 시간이 늘었고, 다른 콘솔용 게임도 함께 즐기는 여유를 가지기 시작했다. 


  게임하는 어린이들


  게임에 빠져드는 어린이들을 볼 때마다 줄곧 생각나는 예술 작품이 있다. 국내에도 잘 알려진 호주의 시각예술 작가인 페트리샤 피치니니의 설치 작품들인 [우리는 한가족] 시리즈다. 그녀의 작품에선 미래 기술 현실에 대한 긍·부정의 이중적 시각이 교차한다. 기술이 미치는 해악을 경계하면서도 삶의 일부가 되고 삶의 진실이 되가는 인간 보편의 기술에 대한 긍정의 시선이 교차한다. 무엇보다 작품에 등장하는 게임보이를 즐기는 아이들의 얼굴은 반백이 지난 얼굴들이다. 고작 내 아들 나이만한 아이들이 한참 ‘삭은’ 얼굴로 게임에 몰두하는 모습은 짐짓 겉만 보면 누구나 소름 돋기 마련이다. 또한 그녀의 작품 속에서는 상상하기도 싫은 유전 조작의 돌연변이들이 인간의 애완 동물이 되고 한 식구가 된다. 아이들은 생명과학의 진보로 인해 얻은, 쭈글쭈글하고 허연 피부를 가진 강아지 비슷한 새 생명체와 놀고 장난친다. 그 새로운 과학과 생명의 혼합 속에서 태어난 돌연변이 생명체들은 그들 스스로 생식해 또 다른 가족을 형성한 채, 어미가 새끼에게 젖을 물린다. 과학적 성과에 있어서 부정의 메타포인 반백과 돌연변이가 피치니니의 작품 속에서는 우리 모두가 함께해야할 ‘한가족’으로 묘사된다. 어쩌면 피치니니는 새로운 과학과 디지털 문화에 대해 선입견에 사로잡힌 부모 세대들의 마음 속 생각을, 흉측한 애늙은이와 돌연변이를 통해서 투영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홀로 아빠의 서재에서 인터넷 게임을 몇 시간이고 집중하는 내 아들에게서 피치니니의 작품 속 아이들을 보며 흠칫 놀란 적이 있다. 하지만, 그런 아들의 모습에 그저 불안감만 엄습하진 않는다. 게임은 내 아이와 어린이들의 새로운 놀이 방식이라 믿고 싶다. 다만 온라인 게임이 다른 게임들과 달리 아이들에게 열병 주기가 좀 길 뿐이다. 게임하는 어린이들에게서 반백의 얼굴도 보지만, 아직은 게임이 그들에게 주는 긍정의 문화에 더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온라인 공간을 통해 아이들은 말초적이고 자극적인 것에 쉽게 동화되기도 하지만, 스토리 전개를 통해 서사 규칙을 배우고 타인과 소통하고 그들과 관계 맺는 과정을 습득하고 가상의 상황에 따른 전술을 짜는 법 등을 스스로 터득하기도 한다. 이는 디지털 시대의 어린이들이 추구하는 새로운 문화 경험이다. 그들에게는 가상공간의 ‘세컨 라이프’가 현실의 삶만큼 일상이 되고, 게임방이 우리 세대의 만화방만큼 안락하고, 게임이 놀이터만큼 하루 한두번쯤은 꼭 들러야하는 곳이 된다. 피치니니가 게임하는 애늙은이들에게서 그 양가성을 함께 보고 모두 끌어안은 것처럼, 이제 어른들도 게임하는 아이들에게서 두려움의 시선을 거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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