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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와 국제주의, 탈국가적 상상력 ①

마르크스주의와 국제주의, 탈국가적 상상력

백 승 욱 (중앙대 사회학과)

 

I. ‘국제주의인가 야만인가’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어느 때보다 국제주의 문제를 다시 부각시키고 있다. 개별 국가의 틀 속에서 풀 수 없는 문제들이 늘어가고, 국가들 자체가 문제로 부각되고 있으며, 각종 분할의 선들이 늘어나면서 단결과 통일을 향한 운동의 전환이 국제주의의 이름의 새로운 보편성의 요구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은 이런 요구와 일치하기보다는 오히려 배치되는 모습으로 나타나, 현 시기에 국제주의를 향한 집단적 움직임은 전혀 전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고 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국제주의인가 야만인가’는 그 어느 때보다도 현실을 바꾸어 가기 위한 가장 중요한 구호일 수밖에 없는데, 이 글은 마르크스주의의 역사를 통해 국제주의의 쟁점이 어떻게 형성, 변화되어 왔으며, 현재 국제주의가 어떤 함의를 가지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본론에서 논의할 핵심적인 쟁점들을 사전에 정리해 두고 시작하기로 하자.
  우리가 국제주의를 개별 국가를 넘어서는 더 큰 단결과 통일의 틀로 사고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국제주의를 ‘국가에 대한 반대로서 반(反)국가 일반’의 언사라고 볼 수는 없다. 다시 말해서 국가에 반대하고, 국가를 거부하는 사고가 그 자체로서 국제주의로 표상되는 것은 아니다. 이 때문에 국제주의의 쟁점은 사실 매우 복잡해지는데,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에서 보자면, 국제주의가 쟁점이 되던 시기에 중요하게 부각된 바 있던 쟁점 중 하나는 아나키즘과에 대한 반대였고, 마르크스주의보다 훨씬 더 반국가의 입장에 선 아나키즘이 현실적으로는 더 국제주의적이었다고 할 수 없는 점도 이 문제를 복잡하게 만든다.
문제가 이처럼 복잡해지는 이유는 무엇보다 국제주의는 국가라는 쟁점, 그리고 노동자계급의 분할이라는 쟁점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좀 더 앞서 나가서 다시 말해 보자면, 마르크스주의 역사에서 국제주의, 좀 더 명확하게 말해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는 자본의 분할에 대응한 ‘프롤레타리아’ 통일 경향을 향한 언사였다. 그리고 이 문제는, ‘프롤레타리아’와 ‘자본에 의한 노동의 분할’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 매우 상이한 그림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쟁점이다.
  우선 문제는 노동에 앞서 그보다 먼저 훨씬 더 ‘국제주의적’인 것은 자본이라는 점에서부터 나온다. 세계시장을 무대로 벌어지는 자본축적은 이미 장기16세기에 걸쳐 세계경제로서 자본주의 세계체계가 등장하던 시절부터의 끝없는 자본축적의 특징이었다. 이런 점에서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자본의 국제주의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와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그에 앞서 세계를 통일적으로 구성하고 지배하는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자본 축적의 범위는 늘 초국경적이었다.
  그런데 역사적 자본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초국경적이라는 자본 축적의 일반적 특성은 구체적 역사적 맥락 속에서 다른 교차점을 만나 복잡해진다. 그것은 영토주의적 경향이 매개되면서 나타나는데, 영토주의적 경향의 매개 없이 자본은 진정한 초민족적 자본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세계경제를 향한 자본들간의 경쟁 때문에, 대자본들은 세계경제에서 더 큰 몫을 향한 싸움을 벌이고, 이 싸움에서 유리한 지위를 차지하기 위한 자본들간의 경쟁은 더 강한 국가를 배경으로 한 정치․군사적 투쟁을 항상 수반하였다. 따라서 자본의 초국경적 팽창은 늘 영토주의적 논리와 자본주의적 논리의 변증법적 교직 속에서 진행되어 왔으며, 이것이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에 독특성을 부여했다. 자본의 국제주의는 늘 자기 자신의 한계로 작용했는데, 특히 헤게모니 국가에 의해 새로운 자본축적과 국가간체계의 질서가 수립된 시기에는 비교적 안정적으로 초국경적 자본축적이 작동하지만, 그 헤게모니의 쇠퇴와 새로운 헤게모니를 둘러싼 경합이 벌어지는 시기에 들어서면 초국경적 자본주의의 논리는 개별국가들로 이루어진 국가간체계에 기반한 영토주의의 논리와 충돌하게 된다.
  그렇지만 자본축적의 전지구적 위기나 또는 자본축적의 지역적 위기 속에서 발생하는 정세에 대응하는 노동자계급의 운동은, 자동적으로 국제주의를 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자본의 국제주의가 자본의 본성상 출현하는 것이었다면, 노동자계급의 국제주의는 달성해야할 목표로서만 표명되고, 그리고 그것이 달성된다는 것은 다시 말해 자본주의의 지양임을 표명하는 것임을 뜻하였다.
  이는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자본과 노동의 관계가 대칭적이지 않음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자본과 노동은 거울상이 아니고, 자본의 직접적 부정이 노동은 아니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노동은 자본과 동일한 형태의 국제주의를 형상화해 낼 수는 없다. 이는 ‘자본의 추상화, 노동의 구체성’라는 비대칭성의 문제로 나타난다(이에 대해서는 에티엔 발리바르, "대중들의 공포: 맑스 전과 후의 정치와 철학", 도서출판b, 2007, 297쪽을 볼 것). 이 두 쌍은 서로가 서로의 조건이 된다. 자본은 자본일반이라는 특징 속에서 추상화됨으로서만 등장한다. 그리고 자본축적의 조건이 재생산되는 것은 국가를 통해 그 자본주의의 지배계급이 통일됨으로써만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자본의 추상화와 통일성은 그 축적의 측면과 지배의 측면에서 모두 관찰된다. 이에 비해 그 반대 측면에서 노동은 분할됨으로써만 자본축적을 가능하게 만든다. 노동의 통일은 자본의 지양이며, 자본축적은 분할된 노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노동이 분할됨으로써만 노동은 자본에 포섭될 수 있으며, 자본의 지배를 받게 되고, 그럼으로써 착취될 수 있다. 그 분할선은 성별, 인종, 지식, 국적에 따를 것이며(그리고 많이 인식되면서도 많이 경시되는 것으로서 중심-주변의 분할), 국가는 여기서 늘 한편에서 지배계급을 통일시키는 동시에 피지배계급을 분할하는 장치로서 작동한다. 그 작동은 특히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를 통한 분할된 ‘국민’이라는 허구적 동일성의 형성 속에서 잘 드러난다.
  노동자계급의 국제주의가 프롤레타리아 통일성의 경향을 지칭한다는 말은 이처럼 분할된 구체적 노동자들의 존재조건들을 넘어서는 통일적 경향의 수립이 자본에 의한 노동의 지배를 넘어서는 길임을 반복해 말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렇게 파악된 노동자계급의 국제주의는 결국 새로운 보편성의 형성에 다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계급의 국제주의는 국가 대 반국가라는 단순화한 구도로 형상화할 수 없다. 그것은 국가일반의 부정이라기보다는 ‘국가의 전화’를 요구하는데, 왜 그런가 하면 이미 국가에 의해 재생산되는 분할된 노동자들의 존재조건이 국가를 거부함으로써 극복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렇게 이해된 국제주의는 국가 ‘외부’에서 사고하는 논리라기보다는 국가의 ‘경계’에서 사고하는 논리로 규명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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