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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의 국가주의, 탈국가적 상상력 ②

II.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와 국제주의

 

  여기서는 역사적 자본주의 속에서 역사적으로 유지·변천해 온 마르크스주의가 국제주의라는 쟁점을 어떻게 제기해 왔고, 또한 어떤 아포리아들에 부딪혀 왔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늘 국제주의는 단순한 구도 속에서 제기되어 온 것은 아니고, 당시의 매우 구체적 정세와 연관된 구체적 쟁점 속에서 문제로 등장하였다. 이는 국제주의의 쟁점이 국가인가 반국가인가라는 단순한 쟁점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분할을 넘어서는 통일적 경향을 형성할 수 있느냐라는 쟁점으로 등장했고 매시기 이는 매우 구체적 정세 속에서 제기되는 쟁점이었기 때문에 그 대응 방식과 쟁점은 시기별로 매우 상이하게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다루는 쟁점들은 마르크스주의 역사의 모든 쟁점을 다 다루는 것은 아니고 몇 가지 중요한 주목되는 쟁점들을 다룰 것이다.

 

1. 프랑스혁명과 보편적 권리

 

  역사적으로 재해석된 프랑스혁명은 마르크스주의의 국제주의에서 매우 중요한 출발점이 된다. 그것은 프랑스혁명 자체가 민중혁명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하나의 이유와, 프랑스혁명과 더불어 보편적 권리라는 쟁점이 본격화되었다는 또 하나의 이유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이유가 결합되는 지점은 보편적 권리로서 ‘평등-자유’라는 쟁점이 제기되었다는 점에서 발견된다. 평등은 자유가 있을 때만 가능하며 자유는 평등이 있을 때만 보장된다는 자명한 논리로서 ‘평등-자유’는 그렇지만 현실 속에서는 그 권리가 특정 공동체의 일정한 경계 속에 봉합된다는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 한계가 늘 그 평등-자유의 논리에 의해 부정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평등-자유’는 그 자체로 늘 진정한 국제주의적 확장을 가능케하는 경계부정의 논리로 작동한다.
  현실에서 이 ‘평등-자유’ 테제를 한정된 공동체 속에 유예하고, 그 다음 단계로 평등과 자유를 분리 시킨 후 평등과 자유의 함의를 보수적으로 한정하는 논리가 작동하게 된 것은, 프랑스혁명이 발발하게 된 조건과 무관하지 않은 유럽의 세력균형이라는 ‘보수주의적 국제주의’(또는 국가간관계의 현실주의)와 그리고 프랑스혁명의 지양 속에서 자리잡은 영국 중심의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의 영향력 확대라는 맥락 속에서였다.

 

2. 「공산주의자 선언」과 「독일이데올로기」의 계기 --계급의 등장, 그리고 지배의 비대칭성

 

  보수적 또는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와 다른 노동자계급 또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가 쟁점이 된 것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출현과 더불어서였다. 「공산당선언」은 자본주의 시대에 대한 분석을 통해 국제주의가 ‘형제들의 유대’라는 모호한 구호로부터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로 넘어가게 됨을 선언하였다. 국제주의는 이제 초계급적 언사로부터 떨어져 나와서, 계급의 ‘발견’과 더불어 계급으로 분할된 세계 속에서 특수하지만 그 때문에 매우 보편적인 함의를 지니는 담론으로 등장하게 된다. 「공산당선언」은 한편에서 자본에 의한 세계의 통일화의 경향과 다른 한편에서 노동자계급의 궁핍화와 분할이라는 비대칭성(그렇지만 또한 대칭성)의 쟁점에서 출발하고, 이 때문에 현실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국제주의의 책임을 자본이 아니라 노동에 안기는 것이 정당함을 주장하는 논리를 전개한다(즉 자본의 국제주의는 이미 주어진 것으로서의 조건이며, 반면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는 달성되어야 하는 목표로서).
  그런데 이 「선언」의 시기에는 매우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상이한 논리들이 공존하고 있고, 그것이 사실상 국제주의의 난점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선언」은 한편에서 생산의 사회화와 노동자계급의 궁핍화라는 논리를 통해 노동자계급 동질화의 주장을 전개한다. 이것이 사실 노동자계급의 국제주의가 가능할 수 있는 논리적 기반이 된다. 그렇지만 이보다 앞선 시기에 같은 저자 중 한 명인 엥겔스의 주요한 저작인 "영국에서 노동자의 상태"는 매우 중요하지만 그 이후 오랫동안 묻혀버린 쟁점인 ‘아일랜드 노동자’와 그에 의한 영국 노동자계급 내부의 분열이라는 쟁점을 제기한다. 마르크스에게 덜 두드러졌고, 엥겔스에 의해 훨씬 더 부각된 이 아일랜드 노동자라는 쟁점은 후기 엥겔스의 이데올로기론에 대한 고민까지 이어지는 계기였다고도 생각해 볼 수 있는 쟁점이며, 자본의 통일성과 노동의 분열이라는 비대칭성에 대한 최초의 주목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이주노동자라는 쟁점은 그리 사소한 것만은 아니었던 것이, 「선언」에서 노동자계급 통일성의 두 가지 논리인 생산의 사회화와 노동자계급의 궁핍화는 현실 속에서는 세계경제의 공간적 분할을 따라 지역적으로 상이한 지역에 배정됨에 따라, 국제주의의 형성을 막는 지역적으로 노동자계급 존재형식의 공간적 분리와 그에 따라 사회운동의 대응형태의 지역적 이질성으로 이어지게 된다.
‘계급’은 발견되고 등장하자마자, 국가와 인종에 의해 분할된 존재로 인식되지 않을 수 없었고, 그에 따라 이러한 계급의 통일성과 국제주의라는 쟁점은 아포리아로 작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3. 제1인터내셔널과 아나키즘 -- 지배의 비대칭성과 국가장치

 

  「선언」에서 "자본"에 이르는 과정은 자본의 추상화에 좀 더 초점을 맞추면서 이런 노동자의 내부적 분할의 동학을 설명하는 논리를 추가해 가는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동시에 이 시기 마르크스는 차티즘에서 출발하여 각종 노동조합 결성으로 이어지는 노동자계급의 대중운동의 중요성에 점점 더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중요하게 등장한 쟁점 중 하나가 아나키즘의 문제였다. 그것은 처음에는 프루동주의에 대한 대립으로, 그리고 나중에는 바쿠닌주의에 대한 대립으로 제기되었다.
  두 경우 모두 아나키즘이 국가를 무시하는 또는 국가를 우회하는, 그럼으로써 결국 국가의 물질적 존재성과 그 작동을 해체시키지 못하는 무능력을 문제삼는 것이 쟁점이었다.
  두 경우 모두 국가는 계급 재생산의, 그리고 자본주의적 축적의 생산과 재생산의 필수적 고리임이 문제가 되었다. 따라서 국가 ‘외부’라는 사고, 또는 국가를 우회한다는 사고는 결국 국가를 넘어서지 못하고 매우 국가적인 구도 속에서 진행되는 계급의 재생산을 다시 반복할 뿐임이 두드러지게 강조되지 않을 수 없다. 이 점은 특히 파리코뮨과 그에 수반해서 제기된 ‘국가장치’라는 쟁점, 그리고 국가의 ‘전화’라는 쟁점 속에서 드러난다.

 

4. 제2인터내셔널과 1차대전 -- ‘국민적 동일성의 형성을 넘어’

 

  제1인터내셔널에서 제2인터내셔널로 이어지는 시기는 운동의 발전임과 동시에 운동에 새로운 질곡이 발생하는 시기였다. 그것은 ‘국제노동자협회’라는 개인들의 연합체 수준의 운동이 <독일사회민주당>이라는 매우 잘 조직된 정당에서 출발해 전세계적 정당조직의 기반을 가지는 운동으로 확산되면서 ‘진정한’ 인터내셔널로 발전하는 시기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에서 ‘국가적’ 특성보다는 ‘초민족적’ 성격을 강조한 제1인터내셔널이 민족당에 기반한 민족당들의 국제적 연합체인 제2인터내셔널로 전환되면서,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국가간체계 내의 모순들이 사회운동들 사이의 모순으로 곧바로 이전될 가능성을 늘려간 시기이기도 하다.
  모순은 1차대전이 발생하면서 증폭되었고, 전쟁공채에 동조하는 좌파가 늘어나면서 문제가 된 ‘조국방위’ 구호가 결국 제2인터내셔널을 붕괴시키기에 이르렀다.
  1차대전이 촉발되자, 유럽의 사회주의자들은 전쟁에 대한 태도를 놓고 분열되었는데, 다수가 자국의 운동을 살리기 위해서는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국가를 보호하는 것이 우선이라는데 동의를 하게 되었고, 그것이 결국 국제주의를 붕괴시켰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결성된 찜머발트 좌파는 국제주의를 다시 내걸었고, 이는 러시아 혁명에서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라는 구호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 모순 속에서 등장한 1차세계대전은 노동자계급 국제주의에 새로운 계기를 던져준 것도 사실이다. 특히 이 시기는 ‘제국주의’라는 시대 규정을 둘러싼 논쟁과 더불어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피압박인민들로 국제주의의 전선이 확대된 시기였다. 이는 19세기 영국 중심의 세계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에 대한 전지구적 대응이라는 맥락에서 독해될 수 있는데, 여기서는 세가지 쟁점이 동시에 시기적 규정성으로 제기되었다. 첫 번째는 자본주의의 전지구적 위기라는 쟁점, 두 번째는 제국주의에 대한 반대라는 쟁점, 세 번째는 평화라는 쟁점이었다. 사회주의혁명과 식민지해방운동이 같은 동시대적 과제로 제기될 수 있던 것이 이 시기 국제주의의 매우 독특한 맥락이었다.
  「선언」에서 제기되었으나, 구현되지 못한 국제주의가 현실성으로 등장한 것은 이 시점이었는데, 그 이유는 「선언」이 강조하였지만 공간적으로 실현이 분리되어 나타난 특징들이 이 시점에 이르러서는 모순의 응축 속에서 공간적으로는 상이한 맥락이 작동하더라도 전지구적으로는 하나의 전선을 형성해 낼 수 있는 조건이 등장하였기 때문이었다.
  한편 이 쟁점들을 정리해 낸 방식은 상이했고, 그리고 이런 모순들이 러시아혁명과 ‘사회주의 혁명’관을 형성한 배경이 되었지만, 회고해 볼 때 그것은 오히려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민주주의’라는 쟁점으로 제기될 수 있는 것이었고, 그리고 그것은 두드러지게 평화와 소비에트라는 매우 중요한 쟁점과 조직을 제기하는 것이었다.

 

5. 러시아혁명과 중국혁명 -- ‘사월테제’와 「임박한 파국」의 대립

 

  20세기초 세계자본주의의 모순은 여러 가지 형태의 이른바 ‘사회주의혁명’으로 귀결되었다. 그 모든 ‘사회주의혁명들’은 모두 세계혁명으로 발언되었고, 추진되었지만, 그 과정은 세계혁명으로 귀결되지 않았고, 일국사회주의론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결국 사후적으로 이들 혁명은 혁명후 국가들을 세계체계의 주변부에서 반주변부의 위치로 상승시키는 효과를 낳고, 그 효과를 충분히 발휘한 후 이들 국가를 다시 세계경제에 핵심적 동력으로 다시 ‘접궤’(接軌)시키는 것으로 역설적으로 끝맺음하게 되었다.
  이 과정은 다음 부분에서 이야기할 미국헤게모니의 확립과정과도 긴밀한 연관성을 갖는데, 이 과정을 통해 20세기적인 국가주의-발전주의쌍이 자리를 잡게 된다.
  그러나 이 과정이 자동적인 것은 아니었고, 여기에는 이를 고착화하게 되는 내적으로 대립적인 상이한 두 가지 사고의 대립이 공존해 있었다. 러시아혁명의 과정에서 보자면 이는 레닌의 사고 속에서 나타나는 ‘4월테제’와 「임박한파국, 그것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사이의 대립 속에서 드러난다.
  후기 레닌에게서 나타나는 이행기론의 쟁점은 세 가지 상이한 저작들 속에서 등장한다. 첫 번째로 ‘사월테제’는 소비에트라는 쟁점을 제기하며, 두 번째로 "임박한 파국"은 이행의 물적 토대라는 쟁점을, 세 번째로 "국가와 혁명"이나 “프롤레타리아 독재 하의 정치와 경제” 같은 글들은 사회주의 하의 모순의 문제, 그리고 국유화와 사회화의 구분이라는 쟁점을 제기한다.
  여기서 두 번째 저작인 "임박한 파국"은 다른 저작들과 다소 모순적인 관계에 놓인다. 특히 ‘사월테제’는 소비에트를 특권화하고, 당은 중심적 위치에 놓이지 않고, 이에 적합하게 당의 사업을 전환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사월테제’ 이후의 레닌의 저작들은 당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성장전화’의 청사진을 제시한다는 차이점을 보인다. 이런 점에서 ‘사월테제’는 이례적인 저작이며, 사실은 이 테제가 발표된 당시나 그 이후 모두 체계적인 오해의 대상으로 남았던 저작이다.
  ‘사월테제’에는 정리해 보자면 세 가지 내용이 포함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첫째로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라는 구호가 핵심이 된다는 점, 둘째로 당의 위상은 소수파이며, 소비에트에 대한 지지에 일관성을 가져야 한다는 점, 셋째로 국유화에 부차적 중요성만 부여한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그런데 ‘사월테제’이후 10월혁명으로 가는 과정에서 볼세비키의 현실적 집권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사월테제’의 쟁점은 뒤로 밀려나면서 오히려 "임박한 파국"의 문제제기가 전면에 부각된다.
"임박한 파국"은 사회주의와 구분되는 민중민주혁명의 시기를 명시화하는 방식으로 독해되었다. 여기서 레닌은 "두 가지 전술" 시기와 다르게 이행강령의 중요성을 부각시킨다. 특히 핵심은 조건이 붙은 국유화 강령이었다. 그것은 세 측면의 내용을 갖는다. 첫째는 독점자본의 국유화가 사회주의로 가는 물질적 토대가 된다는 점, 둘째는 민주주의적 요구들이 최소강령에서 이행강령으로 전환되는 제국주의 시대의 규정들로 인정된다는 점, 셋째는 그 결과 사회주의에 대한 ‘성장전화’론이 등장한다는 점이었다.
  이렇게 규정된 레닌의 이행기론은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일정한 비판의 준거점을 보여주는 동시에, 사회주의로 성장전화와 여기서 민중민주주의 혁명의 불가피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일정한 선긋기의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 시기 레닌의 논지는 우클라드론의 전제에서 나온 결론들이었는데, 쟁점은 그럼 국유화란 무엇인지, 국유화된 부분은 사회주의적인 우클라드인지라는 질문이 다시 제기된다. 특히 ‘사월테제’와 더불어 수면위로 부각되었던 이행기의 ‘정치’라는 쟁점은 이 시기에 다시 수면 아래로 잠복한다는 문제가 숨겨져 있었다. 물론 이후 레닌이 줄곧 강조했듯이 국유화와 사회화는 구분되며, 현실 사회주의 하에서 사회화의 과제는 미해결로 남아있다는 쟁점이 남아있음에도, 국유화 우위의 사회주의 해석이 일반적으로 정착되는 효과가 생겨나게 되었다.
이런 구도에서 볼 때 국독자론은 사실 일국일공장제의 기반이 될 수 있었는데, 전국에 대한 경제통제가 가능하다는 생각, 그리고 이는 전 산업이 아니라 일부 핵심 부문만 국유화하더라도 가능하다는 생각에 의해 이 구도는 강화될 수 있는 것이었다.
  네프 시기 들어 이데 대한 일정한 사고의 전환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이 시기에 소비에트에 대한 강조가 복권되지는 않았다. 이 시기에는 혁명이 강요한 자기제약이 작동하였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일단 일정에 오른 혁명을 실패로 돌릴 수 없다는, 그리고 장악한 국가권력을 유지해야 한다는 자기 제약이었다. 그 때문에 ‘사월테제’는 부활하지 않고, 대신 현실적 문제에 대한 조치로 당내 정풍과 대중민주주의에 대한 강조가 등장한다. 그 결과 관료제의 문제는 모호하게 남으며, 잉여가치 전유 메카니즘의 질적 구조의 문제, 또는 다시 말하자면 자본주의적 노동 분할의 내적 구조에 대한 문제제기는 은폐된다. 결국 소비에트의 우위 대신 당이 지도하는 대중의 재교육 사업이 중요한 방식으로 등장하는 것으로 정리된다.
  그러다 보니 대중 조직과 관련해 ‘당,’ ‘소비에트’, ‘노조’ 셋이 동시에 문제되고, 이들 사이의 관계 또한 문제가 되었지만, 결국 당의 우위 하에 다른 두 가지 조직의 문제제기가 봉쇄되는 결과가 발생한다. 1920년대 초반의 구도에서 대중조직의 발전의 제약은 세 가지 조직 발전의 억압으로 나타난 바 있는데, 소비에트, 레드 페트로그라드, 수병반란이 그 세 측면을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것이 중국혁명에서도 마찬가지로 발견된다는 점이다. 이는 1927년 마오의 「호남성 농민운동 조사보고」와 1930년대말 이후의 신민주주의론 사이의 대립에서 유사한 형태로 발견된다. 마오에게 잊혀졌던 이 쟁점이 다시 등장하는 것은 1960년대 문화대혁명과 더불어서인데, 문화대혁명 시기에 이 「호남성 농민운동 조사보고」가 주요 저작으로 다시 광범하게 학습되었던 것도 우연은 아니다. 문화대혁명의 국제적 영향력의 전파도 이런 점에서 다시 재해석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
  여기서 잠시 중국혁명의 길의 독특성에 대해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이후 동아시아에서 국제주의의 문제를 논의할 때 중요해지는 부분이다. 여타 사회주의 국가의 성립과정의 경험에서는 기존의 국가의 위기 속에서 대안적 정치세력으로 사회주의 정당이 출현하여 짧은 정치적 이행과정을 거쳐서 새로운 집권세력으로 등장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중국의 경우는 구국가의 붕괴 이후 사실상의 국가부재 상태가 오래 지속되었고, 그 속에서 새로운 국가보다 먼저 오히려 당이 건설되었고, 이 당이 새로운 국가를 건설해갔다는 특징을 안고 있다. 이는 중국공산당이 여타 사회주의 정당에 비해 대중적 토대가 강하다는 것을 보여줄 뿐 아니라, 왜 중국에서 당의 존재가 국가의 존재와 거의 동일시 되는지, 중국에서 여러 가지 정치적 위기가 출현함에도 왜 당이라는 경계를 넘어서기 어려운지를 설명해 준다.

 

6. 미국헤게모니와 발전주의

 

  19세기말의 영국식 자유주의의 위기는 20세기 30년대 미국의 뉴딜과 더불어 미국식 20세기 자유주의가 재탄생하면서 극복되었다. 사실 미국이 새로운 헤게모니로 부상하는 것은 미리 예측할 수 있던 것은 아니었다.
  19세기 영국 중심의 자유주의가 노골적인 유럽중심주의를 드러내는 ‘문명론적 자유주의’라고 한다면, 20세기 미국자유주의는 전세계의 ‘미국화’의 가능성과 필수성을 역설하는 ‘발전주의적 자유주의’로 등장한다. 그 발전의 단위는 국가가 되며, 그 국가의 관리학으로서 사회과학의 포괄적 중요성은 미국 헤게모니와 더불어 증가한다. 19세기까지 국가들 사이의 관계의 구체적 질서가 없이 외형상 ‘세력균형’이라는 보수적 국제주의나 자유시장경제라는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에 내맡겨져 있던 것에 비해, 20세기는 명시적으로 UN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자유주의적 국제주의 ‘정치’질서를 만들어 냈다.
  그 영향은 생각보다 매우 광범하였다. 한 예로 사회주의 국가들의 혁명과정에서도 그 영향은 두드러지는데, 중국 혁명의 경우에도 1930년대 줄곧 관철되어 나타나던 세계혁명적 관심이 1940년대 들어서는 줄어들면서 대신 ‘미국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의 증가와 더불어 일국사회주의의 가능성에 대한 언사가 눈에 띄게 늘어나기 시작한다. 그만큼 발전주의-국가주의 담론은 사회주의에 폭넓게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이후 이런 ‘미국화’의 영향력은 전지구적으로 폭넓게 확산되며, 그것이 결국 20세기를 넘어선 이후 국제주의의 재형성의 질곡으로 작동하게 된다.
  또한 냉전시기 이후에도 이런 미국 중심의 발전주의적 질서의 재편은 매우 중요해졌는데, 심지어 이러한 상황 속에 등장한 다양한 형태의 제3세계주의조차 국제주의라기보다 국가주의에 핵심적으로 포섭된 부분적 국제주의로서 나타났다. 다만 이런 제3세계주의는 중심-주변 문제를 징후로서 포착해낸 점을 무시할 수는 없다.

 

7. 평화를 향한 대장정

 

  사회주의와 국제주의 사이의 모순은 처음에 두드러지지 않다가 냉전질서가 자리를 잡아가면서 점점 더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소련의 국가 존속의 논리에 세계혁명의 논리를 종속시켰다는 비난이 곳곳에서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그 정점은 군사적 논리로 혁명의 논리를 대체하는 데서 발견되었다. 미국의 위협론에 대응하는 논리로서 핵개발이 정당화되면서 이 문제는 좀 더 두드러졌다.
  2차대전 종전 후 핵무장과 핵무기에 대한 반대운동이 세계적으로 확산되지 못한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소련의 핵무장이었다. 소련은 1949년 핵실험에 성공하였고, 미국 핵보유에 대한 억지력을 갖기 위해 핵무장을 정당화하였다. 한국전쟁 과정에서 핵폭격 위협에 노출된 중국 또한 핵개발을 추진하였으며, 중소분쟁이 가속화하는 과정에서 핵보유의 논리를 더욱 정당화하여 1964년 핵실험에 성공하였다.
  여기서 모두 핵보유는 ‘국가생존’의 차원에서 정당화되었으며, 소련의 핵보유는 소련이나 소련 외부에서 모두 사회주의 운동이 핵무장에 반대하는 싸움을 전재할 수 없는 자기무력화의 원천으로 작용하였다. 무엇보다 ‘사회주의 조국을 방위’해야 하기 때문에 핵무기 개발을 용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자기파괴적이었다. 핵보유는 결국 국가간체계의 논리를 사회주의 국가들에 깊숙이 내장시키는 핵심 기제로 작동하였으며, 국가권력의 논리가 대중보다 우위에 서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문제는 핵보유가 대중운동을 희생하는 대가로 국가를 생존시키고 국제주의를 억압하는 계기이자 논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반대로 국가권력의 지속성을 위험에 노출시킬 수 있더라도 운동을 소생시키고 국제주의로 나아가는 길은 봉쇄되었던 것이다. 세력의 비대칭성을 운동을 통해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간체계의 동학을 통해 쉽게 세력균형의 틀 속에 들어감으로써 비대칭성을 극복할 수 있다는 환상이 커졌던 것이다. 그 가장 극단적 사례로서 초대형 수소폭탄 개발 프로젝트인 ‘짜르 봄바’의 개발은 그 역설을 가장 잘 보여준다. 짜르봄바는 소련을 보호한 것이 아니라 결국 체르노빌 사건으로 이어지는 출발점이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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