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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06 -- 어느 일요일 오후 사무실에서...

일요일 오후, 늦은 아침을 먹고 잔무를 처리하려고 출근했다. 바빠서 못했던
일을 정리하고 있는데 다른 직원에게 전화가 왔다.


“홍보자료를 찾는다는 전화가 왔었는데 ○○씨가 있어서 오라고 했다”고 한다.
“알았다”고 했지만 자기가 전화 받았으면 자기가 알아서 할 일이지 어려운
일도 아닌데 굳이 담당자에게 넘기나 싶다.

그 직원이 얄밉기는 했지만 전화한 사람이 오죽했으면 일요일까지 자료를
찾으러 다닐까 싶어 케비넷을 뒤져보았다. 아마 초등학생이 직업에 대한
숙제를 하려고 그럴 것이다.

회사 홍보업무를 8년 넘게 했어도 쉬는 날에 무언가를 찾아 준다는 건 사실
귀찮은 일이다.

브로셔(사진과 설명이 있는 홍보자료)와 홍보책자를 준비하고 한 30분이나
지났을까?
아버지 손에 이끌려서 초등학교 2-3학년 정도의 자그마한 체구의 남자
아이가 사무실에 들어왔다. 작은 키에 긴 잠바를 입고 들어온 아이는 옷
때문에 더 작아보였지만, 고운 피부와 추울까봐 목도리와 마스크를 한
것으로 보아 부모들이 꽤나 애지중지 키우겠다 싶다.

아버지에게는 간단히 인사하고 아이에게는 모른 척하고 “무엇이 필요하니?”
하고 물어봤다. 역시나 꼬깃꼬깃 접은 A4용지를 펴면서 우리 회사의 하는
일에 대해서 물어본다.

“저기요~, 학교에서 직업에 대해 알아오라고 해서요.....”
이런 아이의 모습을 보면 귀찮은 마음이 사라지고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싶어진다.

우선 알기 쉽게 사진이 있는 브로셔를 보여주며 천천히 설명을 해 주었다.
일단 사진을 보더니 아이의 눈이 달라진다. 주눅 든 듯 웅크려 있던 아이가
손가락으로 사진을 가리키며 보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내 사진을 짚던
손가락을 거두며 “영어네...”하고 얼굴을 찡그린다.
-우리 회사 브로셔는 한글과 영어가 같이 있다-

순간 당황스러웠지만 바로 위에 한글이 있다고 알려주며 급히 아이의
호기심을 돋우려 했다. 하지만 아이는 못 볼 걸 본 듯 굳은 인상이 풀어지지
않는다.
옆에서 지켜보던 아버지도 당황스러웠는지 한글이 있다고 아이를
안심시켰지만 아이는 변함이 없다.
할 수 없이 한글로만 된 홍보자료를 꺼내 보여주며 설명을 했더니 아이가
다시 관심을 갖는다.

한 장 한 장 넘기며 보여주는데 분명히 한글로 된 자료인데 아이는 작은
글씨로 된 설명문을 보면 “영어...”라고 읊조리듯 말하며 거리를 둔다.
“영어 아니야~”하고 말하면서 혹시나 싶어 곁눈질로 설명문을 보았지만
분명히 한글로 된 설명문이다.

얼마나 영어에 스트레스를 받았으면 영어가 아닌 작은 한글에도 영어
단어로 착시현상을 일으키는 걸까?
이런 당황스런 경우는 처음이다. 어떻게든 아이의 관심을 돌리고 싶어서
책장을 넘기고 잘 설명해도 별로 귀담아 듣지를 않는다.


하는 수없이 마무리를 하면서 피리기념품을 주니까 그제야 얼굴이 펴지고
신기한 듯 이리저리 살펴본다.
달래듯 아이에게 여러 가지 기념품을 쥐어주고 배웅해 주었지만 마음속이
개운하지 않다.
아이 아버지를 보니 그렇게 영어를 가르치려고 애 쓸 것 같지 않아
보이는데 초등학교 3학년 어린이가 벌써부터 이렇게 영어에 주눅 들어있나?

오렌지에서 어린쥐로 시작하는 이 정권의 초등학교 영어교육이 생각난다.
영어를 잘 해야 국제경쟁력이 있다고 어렸을 때부터 몰아붙이고, 영어를
못하면 이 사회에서 매장시킬 듯 윽박지르고 있다.
이런 교육이 아이들을 주눅 들게 만들고 착시현상까지 일으키는 걸 저
위에 있는 사람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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