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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0/06/21
    20100621 -- 자전거가 생겼다.
    땅의 사람
  2. 2010/04/19
    20100405 -- 다시 군대에 갔다.
    땅의 사람
  3. 2009/12/20
    20091206 -- 어느 일요일 오후 사무실에서...
    땅의 사람
  4. 2009/09/20
    20090901 -- 삶과 죽음(3)
    땅의 사람
  5. 2009/09/20
    20090813 -- 기다림(1)
    땅의 사람
  6. 2009/08/10
    20090807 -- 상도(商道)는 없고 상도(商盜)만 있다.(2)
    땅의 사람
  7. 2009/06/22
    20090614 -- 지리산에 갔다와서...(3)
    땅의 사람
  8. 2009/04/20
    20090403 -- 김연아, 스포츠 그리고 고려대
    땅의 사람
  9. 2009/03/23
    20090225 -- 마을버스 타기(4)
    땅의 사람

20100621 -- 자전거가 생겼다.

자전거가 생겼다.

2년정도 현관앞에 박스도 뜯지않고 모셔둔
경품으로 받은 자전거를 결국 오늘 개봉했다.
(물론 자전거포에 가서 돈주고 조립했다.)
당시 상품으로 받을때는 가을이라서 조립하더라도
겨울이 바로 오니까 자전거 타기가 힘들것 같아서 뜯지도 안았다.
그리고 사무실이 멀리 있어 탈 기회도 별로 없었다.
하지만 시간을 더 지체했다간 아예 녹슬어 못타면 어쩌나 싶어
휴가 내고 하루 쉴때 기어이 조립을 했다.

사실 자전거는 초등학교때부터 타서 선수급은 아니지만 못타지는 않는다.
몇 번 자전거를 구해 볼까 생각도 했지만 장난아닌 가격에 엄두가 안나
포기를 몇 번 했었다.
그러다가 운이 좋아 자전거를 경품으로 받았고
사무실도 가까워져서(버스로 20분) 큰 맘 먹고 조립을 한 거다.
(자전거 조립+짐 실을 받침대(끈 포함)+자물쇠+내부 부속교체로 12만원 지출)

여기저기 둘러보면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자전거타기와는 많이 다르다.
일단 나는 자전거는 단거리 이동용 수단이다. 레져용이 아니다.
그래서 보기 민망한 쫄쫄이 바지도 안 입고 머리모양 망가지는
괴물머리같은 헬멧도 안 쓸거다.(있기는 있다.)
그저 가까운 재래시장 갈때나, 상황봐서 출퇴근용으로 타고 다닐꺼다.
가끔 헌책방 쇼핑때도 쓰면 좋겠다.

이상하게 사람들은 자전거 사면 보호대라든지 쫄쫄이 바지라든지 거의
선수급 장비를 갖추려고 한다.
물론 신체보호용이야 필요하겠지만 신체보호를 할 만큼 위험하게
안타면 된다. 자전거 도로가 없으면 차도보다는 인도로 가고
속도는 걷는것 보다 빠르면 좋지, 장거리를 몇시간(일) 걸려
자전거 타고 가고 싶지 않다.

차를 운전하다 보면 알지만 제일 위험한 상대방이 오토바이와 자전거다.
그걸 아는 내가 그런 위험을 주면서 자전거를 타고 싶지 않다.
그건 빨리 자전거 전용 도로를 만들라고 정부나 시에 요구해야 할 사항이지
내가 목숨걸고 차도로 다니면서 시위하고 싶지 않다.


자전거포 아저씨가 그런다.
"그래도 쓸만한 자전거를 경품으로 받았는데 ***도 하시고
&&&도 하시는게 좋을 것 같은데요."
(자전거 메이커도 모르는 나에게 이것 저것 추천한다.
외국산 부품이라는 것도 강조하면서...)
"운전자가 허접해서 괜찮습니다."
마지 못해 부품 하나는 교체했지만 자꾸 싸구려 자전거와 비교하면서
부품교환을 유도하는게 불편했다.

그나저나 전기자전거도 하나 갖고 싶은데...
이것도 지름신인가? 쩝...
    


#1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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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05 -- 다시 군대에 갔다.

다시 군대에 갔다.

예전에 와본 곳이데 어딘지 기억이 가물가물 하다.
자세히 들여다 보니 연병장이다. 분명히 연병장이다.

 

한 낮의 뜨거운 햇살이 머리위로 쏟아진다. 마른 먼지가 플라타너스 나뭇잎에도
뽀얗게 앉아있다. 가만히 있어도 땀으로 팔뚝이 번질거린다. 손바닥은 온전히
살구 빛이지만 손등은 갈색에 가깝다. 손등을 보고 있자니 손톱의 반달이 유난히 눈에 띈다.

 

멀리서 호루라기 소리가 리듬을 타고 들려온다.
“삐이-익삑, 삐이-익삑”
귀에 익은 박자다.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이 쑥색 옷을 입고 <팔 벌려 높이뛰기> 체조를 한다.
제자리에서 팔 벌리며 두 번 뛰어야 하나의 구령이 붙고 그렇게 보통 삼사십 번 정도 한다.
말이 체조지 딱가리(기합)다. 맨 마지막 구령을 안 하는게 서로 약속인데 늘 그렇듯 누군가
구령을 붙인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이다.

 

한 쪽 구석에는 도하 훈련을 하고 있다. 강을 건너는 게 아니라 좀 큰 웅덩이를 외줄
하나 붙잡고 그네 타듯 건너야 한다. 건널 때는 반드시 다리와 몸이 “ㄴ”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물이 엉덩이에 닿거나 다리가 빠질 수도 있다. 배가 나왔거나 뚱뚱한
사람은 죄다 빠진다. 웅덩이는 깊지는 않지만 고인물이라 냄새가 고약하다.
도하에 실패하면 딱가리는 없지만 자신은 물론, 동료에게도 고통을 준다.

우리 소대는 반대편 연병장 바닥에 앉아 조교의 강의를 듣고 있었다. 조교는 무슨 말을
지껄이고 있는데 내 귀에는 들어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딴 데를 쳐다보지도 못한다.
그러다 걸리면 혼자 딱가리다. 다들 알아서 시선은 앞을 보지만 머릿속은 딴 생각일
것이다. 뙤약볕 아래 강의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다 둘 다 고통이다.
 
갑자기 조교가 묻는다.
“알~갈습니까?”
“네에~~”
“대답소리가 작습니다. 저~기 뭐가 보입니까?”
 이건 선착순 달리기 시키기 전에 늘 먼저 묻는 말이다. 분위기가 좋으면 “아무것도 안보입니다.”라고
 농담 따먹기 하지만 지금은 그럴 분위기가 아니다.
“축구 골대요.”
“선착순 다섯 며엉~”

시든 풀잎처럼 쳐져있던 사람들이 용수철처럼 일어나 뛰어간다. 나도 얼떨결에 뛰어가지만
이미 선두그룹은 한참 앞서고 뛰어간다.
‘그냥...쉬엄 쉬엄 뛰자’
안 할 순 없으니 뛰긴 하지만 마지못해 뛴다. 절반이나 갔을까? 먼저 뛰던 사람들이 벌써
골대를 돌아 나와 엇갈려 뛰어간다. 약은 사람들은 슬쩍 끼어들어 그들과 같이 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천천히 골대로 뛰어간다. 축구 골대를 돌아 뛰다보니 조교가 있던 곳에서 다시
한 무더기 사람들이 이번에는 농구 골대를 향해 죽어라 뛰어간다.
‘선착순 3명 정도 겠군.’
축구 골대를 돌아 출발점에 도착한 나는 다시 농구골대를 향해 뛴다.
‘또 시작이다. 오늘도 뺑뺑이 인생이 시작이다.’

 

그러다 잠이 깼다. 꿈이다. 화들짝 놀라면서도 익숙한 내방 풍경에 안심이다.
 잠자리에 누워 생각해 본다.
오늘은 전부 9일 동안의 휴가를 마치고 첫 출근하는 날이다. 첫 출근하는 날 아침,
군대에 다시 가는 악몽을 꾸다니…

 

그동안 시간에 얽매지 않고 살았는데 당장 출근시간부터 맞춰야 한다. 눈부신
햇살은 없지만 눈 아프게 모니터를 계속 봐야한다. 호루라기 소리는 없지만 끊임없이 울려대는
전화벨 소리가 있다. 딱가리는 없지만 직장 상사의 쿠사리(꾸중)가 있다. 선착순은 없지만 실적평가니
결과분석이니 순위를 매기며 들들 볶는다.

 

“아…지겨운 뺑뺑이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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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06 -- 어느 일요일 오후 사무실에서...

일요일 오후, 늦은 아침을 먹고 잔무를 처리하려고 출근했다. 바빠서 못했던
일을 정리하고 있는데 다른 직원에게 전화가 왔다.


“홍보자료를 찾는다는 전화가 왔었는데 ○○씨가 있어서 오라고 했다”고 한다.
“알았다”고 했지만 자기가 전화 받았으면 자기가 알아서 할 일이지 어려운
일도 아닌데 굳이 담당자에게 넘기나 싶다.

그 직원이 얄밉기는 했지만 전화한 사람이 오죽했으면 일요일까지 자료를
찾으러 다닐까 싶어 케비넷을 뒤져보았다. 아마 초등학생이 직업에 대한
숙제를 하려고 그럴 것이다.

회사 홍보업무를 8년 넘게 했어도 쉬는 날에 무언가를 찾아 준다는 건 사실
귀찮은 일이다.

브로셔(사진과 설명이 있는 홍보자료)와 홍보책자를 준비하고 한 30분이나
지났을까?
아버지 손에 이끌려서 초등학교 2-3학년 정도의 자그마한 체구의 남자
아이가 사무실에 들어왔다. 작은 키에 긴 잠바를 입고 들어온 아이는 옷
때문에 더 작아보였지만, 고운 피부와 추울까봐 목도리와 마스크를 한
것으로 보아 부모들이 꽤나 애지중지 키우겠다 싶다.

아버지에게는 간단히 인사하고 아이에게는 모른 척하고 “무엇이 필요하니?”
하고 물어봤다. 역시나 꼬깃꼬깃 접은 A4용지를 펴면서 우리 회사의 하는
일에 대해서 물어본다.

“저기요~, 학교에서 직업에 대해 알아오라고 해서요.....”
이런 아이의 모습을 보면 귀찮은 마음이 사라지고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싶어진다.

우선 알기 쉽게 사진이 있는 브로셔를 보여주며 천천히 설명을 해 주었다.
일단 사진을 보더니 아이의 눈이 달라진다. 주눅 든 듯 웅크려 있던 아이가
손가락으로 사진을 가리키며 보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내 사진을 짚던
손가락을 거두며 “영어네...”하고 얼굴을 찡그린다.
-우리 회사 브로셔는 한글과 영어가 같이 있다-

순간 당황스러웠지만 바로 위에 한글이 있다고 알려주며 급히 아이의
호기심을 돋우려 했다. 하지만 아이는 못 볼 걸 본 듯 굳은 인상이 풀어지지
않는다.
옆에서 지켜보던 아버지도 당황스러웠는지 한글이 있다고 아이를
안심시켰지만 아이는 변함이 없다.
할 수 없이 한글로만 된 홍보자료를 꺼내 보여주며 설명을 했더니 아이가
다시 관심을 갖는다.

한 장 한 장 넘기며 보여주는데 분명히 한글로 된 자료인데 아이는 작은
글씨로 된 설명문을 보면 “영어...”라고 읊조리듯 말하며 거리를 둔다.
“영어 아니야~”하고 말하면서 혹시나 싶어 곁눈질로 설명문을 보았지만
분명히 한글로 된 설명문이다.

얼마나 영어에 스트레스를 받았으면 영어가 아닌 작은 한글에도 영어
단어로 착시현상을 일으키는 걸까?
이런 당황스런 경우는 처음이다. 어떻게든 아이의 관심을 돌리고 싶어서
책장을 넘기고 잘 설명해도 별로 귀담아 듣지를 않는다.


하는 수없이 마무리를 하면서 피리기념품을 주니까 그제야 얼굴이 펴지고
신기한 듯 이리저리 살펴본다.
달래듯 아이에게 여러 가지 기념품을 쥐어주고 배웅해 주었지만 마음속이
개운하지 않다.
아이 아버지를 보니 그렇게 영어를 가르치려고 애 쓸 것 같지 않아
보이는데 초등학교 3학년 어린이가 벌써부터 이렇게 영어에 주눅 들어있나?

오렌지에서 어린쥐로 시작하는 이 정권의 초등학교 영어교육이 생각난다.
영어를 잘 해야 국제경쟁력이 있다고 어렸을 때부터 몰아붙이고, 영어를
못하면 이 사회에서 매장시킬 듯 윽박지르고 있다.
이런 교육이 아이들을 주눅 들게 만들고 착시현상까지 일으키는 걸 저
위에 있는 사람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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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01 -- 삶과 죽음

한창 일하고 있는데 손전화 문자가 왔다.
[ YTN 속보 - 위암 투병 영화배우 장진영 오늘 오후 사망]
(달마다 천 몇 백 원을 내면 YTN에서 속보를 보내준다.)
장진영이라면 왕의 남자에 나온 남자 배우 아닌가?
최근 전여옥 의원에게 ‘시민으로서의 권리’라는 공개 편지를
써서 속을 시원하게 해줬던 그 배우 아닌가!

놀란 마음에 인터넷을 뒤져보니 내가 아는 사람은 남자배우
정진영이였고 죽은 사람은 여자배우 장진영이였다.
그녀는 위암 투병을 하다가 남자친구가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근데 나는 잘 모르는 배우다. 출연작을 보니 눈에 익은 제목의
영화들이 많다. 그녀의 삶이 그녀가 출연한 ‘국화꽃 향기’의
내용과 비슷해 애절한 마음이 든다.

이런 저런 기사를 뒤져보다가 화장실을 갔다.
가는 길에 전산팀 직원을 만났다.
그 직원이 대뜸 내게 물어본다.
“설○○주임 죽은 거 아세요?”
“예?”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직원과 이야기 하면서 설주임을 생각해 본다.

설주임은 2년 전 쯤에 전산팀에 근무했던 직원이다.
왜소한 체격 이였지만 뭐든 말하면 다 들어줄 사람처럼
늘 웃으면서 일처리를 했다.
그러다가 그이가 다른 부서로 가고 나서는 만나지 못했다.

그런 그이의 소식을 들은 건 올해 봄쯤에 위가 아파서
휴직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였다. 크게 걱정은 안 했다.
내 또래 사람이니 병원에서 치료받고 음식조절 잘하면
곧 출근하리라 믿었다.

그랬던 설주임이 장진영과 비슷한 시간에 위암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술, 담배도 안한 사람인데...’
‘술, 담배에 찌든 난 아직도(?) 이렇게 생생한데...’
여배우가 죽었을 때는 별로 느끼지 못했던 허무함이 밀려온다.
병문안도 안 간 게 마음에 걸린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살려고 발버둥쳤다고 한다. 병원에서 개복을
했다가 손도 못 대고 다시 그대로 덮어두었지만 설주임은 좋은 약은
힘닿는 대로 구해보고 먹으려 했다.
뒤늦게 종교도 가져서 기도원도 다녔고 자연요법으로
치료한다고 야채로만 식사하기도 했단다.

항암치료가 머리카락이 빠지고 고통이 크다고 하는데 어찌 견디고 있었을까?...
자식 둘이 있는데 직장에서 들어준 보험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최근에 사람들이 많이 죽는다. 하기야 늘 죽고 있는데 내 또래 가까운
사람이 죽고 나니까 죽음이란 것을 새삼스레 생각해 본다.
잘 사는 것과 잘 죽는 것은 무엇일까?
스코트 니어링이란 사람은 백 살이 다될 무렵 먹기를 그치고
물만 먹으며 조용히 스스로 죽음을 맞이했다. 물론 어떤 의료 행위도
받지 않았고 숲속의 오두막에서 부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하게 생을 마감했다.

내가 스코트 니어링처럼 살거나 죽을 용기는 없다. 하지만 흔한
사람들처럼 악다구니 하며 살거나 죽음의 문턱에서 문고리를 잡고
늘어지듯 발버둥 치고 싶지도 않다.
그저 자연이 내게 주는 만큼 욕심 버리고 자연스럽게 살다가 죽고 싶다.
내 인연과 세상이 허락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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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13 -- 기다림

그녀를 만나기로 했다.
광화문에 있는 예술영화 전용 상영관에서 보기로 했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니다. 그러면서도 술을
먹거나 영화보자고 하면 바쁜 일 없으면 잘 나온다.

그녀는 술도 잘 먹는다. 그것도 비싼 술보다 싼 술을 잘 먹는다.
밤새 술 먹고 다음날 아침 해장국에 소주를 먹어도 흐트러진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약속시간 5분전에 도착했다. 티켓박스 바로 앞에서 만나자고
했는데 둘러보니 아직 안 온 것 같다.
영화표를 사고 등받이 없는 긴 의자에 앉아서 잠시 기다렸다.
예술영화 전용 상영관이라 그런지 사람이 별로 없다. 붐비는 게
싫은 나는 이런 한산함이 좋아 여기서 가끔 영화를 본다.

기다리기 심심해서 가지고 다니는 책을 펼쳐 들었다. 기왕이면
책을 보면서 기다리면 ‘좀 있어’보일 것 같은 얄팍한 계산이 선다.
한쪽으로 다리를 꼬고 무릎위에 책을 올려놓고 본다.

‘몇 줄이나 읽었을까...’
계단을 내려오는 발자국 소리에 청각이 예민해진다.
“또각 또각 또각 또각”
그녀가 아니다. 한 3년 그녀를 만나고 있지만 구두 신은 걸
한 번도 못 봤다. 늘 헐렁한 운동화 아니면 스포츠 샌들을 신고 온다.

또 누가 오는 발자국 소리가 난다.
“스쓱 스쓱”
바닥엔 카페트가 깔려있어 가까이 오면 발자국 소리가 탁해 진다.
고개를 숙이고 눈의 초점은 책속 문자에 맞춰보지만
시야가 넓어진다. 넓어진 시야에 치마를 입은 여자 다리가 지나간다.
그녀가 아니다. 사적인 자리는 물론이거니와 공적인 자리에서도
치마 입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에이...책이나 보자.”
몇 번 읽었던 곳을 찾아 다시 읽었다.
탁한 발자국 소리가 또다시 가까이 온다. 일부러
고개를 더 숙이고 열중해서 책을 본다. 발자국 소리는
오른쪽 귀에서 들리다 내 앞을 지나 왼쪽 귀로 멀어진다.
이번에도 그녀가 아니다.

내 옆 빈자리에 사람들이 앉는다.
‘그녀가 오면 앉을 자리가 없는데...오면 바로 일어나야지’
시계를 보았다. 7시 20분.
약속시간이 20분이나 지났다.
‘웬일이지? 무슨 일 있나?’
가끔 늦을 때도 있는데 이렇게 늦기는 처음이다.
혹시 몰라 손전화를 꺼내 본다. 연락 온 건 없다.
그녀에겐 전화를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녀는 손전화가 없다.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다고 한다. 급한 사람들이 알아서
사무실로 전화한다고 한다.

그녀는 시계도 없다. 대충 시간대 까지는 알고 있지만 궁금하면
손목시계까지 차고 있는 내게 물어본다. 그래도 약속시간이
늦었다는 건 알 텐데...나도 답답하지만 그녀도 미안해 할 꺼다.

영화 보기 전에 저녁을 먹기로 해서 시간 여유는 있지만
그래도 좀 불안해 진다.
‘어디쯤 왔을까?’
벌써 7시 30분을 넘어선다.

그때 멀리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창피했지만 그냥 나도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배낭을 메고 성큼성큼 선머슴같이 걸어온다.
미안하다며 차가 밀려서 늦었다고 한다.
시간이 빠듯했지만 저녁 먼저 먹자며 밖으로 나왔다.
영화를 보고 우리는 언제나처럼 술집으로 향했다.
빈대떡 집에서 막걸리를 먹으며 침 튀기며 서로 영화평을 했다.

그날 그녀는 헤어지기 전에 맑은 국물이 담긴 하얀 비닐 봉다리를
내게 주었다. 직원식당의 솜씨 좋은 요리사가 멸치를 넣고
우려낸 잔치국수 국물이라고 한다.
역시...그녀다운 선물이다.
그치만 이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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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07 -- 상도(商道)는 없고 상도(商盜)만 있다.

단골로 가는 세탁소가 있다. 집에서 50m만 가면 다른 세탁소가 있지만
굳이 찻길건너 맞은 편 단골 세탁소로 간다.

단골 세탁소는 젊은 부부가 꾸려간다. 부인은 옷 수선도 하고 아기도
키우면서 가게도 본다. 큰 애는 5살 정도의 남자 아기다. 여느 애들과
같이 뛰어놀고 소리치며 가게 안을 휘젓고 다닌다. 동생으로 보이는
작은 애는 늘 엄마 등에 업혀 있다.

애들 아빠는 땅땅한 키에 둥글고 넓적한 얼굴로 웃는 모습이 좋다.
꼭 옛날 코메디언 이기동 같다. 가끔 반바지에 나시티를 입고 가게 앞에서
애들을 보다가도 내가 퇴근할 때 만나면 “퇴근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넨다.

세탁소는 보기보다 작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면 왼쪽의 수선대 앞에 의자가
하나 있고 등받이 없는 의자가 하나 더 있지만 권하지도 않고, 나도 수년
동안 다녀도 의자에 한 번 앉아 본 적이 없다. 가게 안쪽에는 세탁을 마친
옷들이 주렁주렁 달려있어 낮에도 어두컴컴하다.

오래 다니다 보니 천 원, 이천 원 깎아주기도 하고 가끔은 실밥이 터진
옷을 거져 꿰매 주기도 한다. 꼭 이래서 라기 보다는 새로운 곳을 찾는 게
불편한 나에겐 편한 세탁소이다.

몇 달 전의 일이다. 옷을 맡기러 세탁소를 찾았는데 주인아저씨가 심각한
얼굴로 앉아있다. 옷감을 가져온 손님이 왔는데도 마지못해 인사를 한다.
별로 붙임성이 없는 나지만 조심스레 물러봤다.
“왜 그러세요? 아저씨” 다림대에서 옷을 추리던 아저씨가 손길을 멈추고
대답한다.
“옆의 세탁소 보셨죠?”
“아니요” 그러면서 고개를 내밀고 쳐다보니 한 20m 옆 전파사가 있던
자리에 가게 하나가 환한 빛을 내고 있다. 신장개업을 했나 보다.
그게 세탁소인줄은 이야기를 듣고 알았다.

“아...글세. 저기다 세탁소를 새로 낸데요. 참~나원...얼마 전에 저쪽
세탁소 사장이 찾아와서 바로 옆에 세탁소를 낼 건데 서로 싸우지 말고
자기에게 이 가게를 넘기라는 거예요.”
제법 언성이 높아지는 게 아마도 그 사장과 벌써 한 판 붙은 모양새다.

“아~하루 이틀도 아니고 몇 년째 이 자리에서 세탁하는데 돈 있다고
바로 옆에 세탁소를 내는 게 말이 되냐구요...어휴...정말...”
내가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싶다. 주인아저씨가 화 날만 하겠다.
특별히 할 말이 없어 단골이 많으니까 걱정 말라고 위로 하고 가게를 나섰다.

반경 50m 도 안되는 곳에 세탁소가 3개라니, 그것도 우리 동네는 아파트도
없고 죄다 주택이라서 큰 이득도 없을 텐데...정말 상도(商道)가 없다.

길을 나서면서 슬쩍 새로 생긴 세탁소 안을 들여다 봤다. 역시나 깨끗하다.
제법 넓은 가게 안에는 손님을 상대 할 수 있는 접수대도 있다.
들어가는 유리문에는 문자로 ‘와이셔츠 700원’이 붙어있다.
단골 세탁소의 절반보다도 싸다. 싼 가격에 사람들이 몰리겠다.
그리고 나면 주변의 세탁소는 자리를 옮기거나 문을 닫아야 할 것이다.
‘참 비열한 장사꾼이다’

그리고 나서 몇 달이 흘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까지 세 개의
세탁소가 영업 중이다. 나야 좀 비싸더라도 아저씨 얼굴 봐서 가던
세탁소에 계속가지만 동네 사람들도 그런지 어쩐지 모르지만 일단 다행이다.
아니면 겨우 버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최근 대형 슈퍼마켓이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자본력을 앞세운 대형
유통업체가 옆에 구멍가게가 있는데도 버젓이 슈퍼를 새로 연다.
대형유통업체는 벌 만큼 번 대기업으로 동네 상권까지 판쓸이
하려고 한다. 그것이 그들에게 얼마나 큰 이득이 오는지 모르겠지만
그것 때문에 서민들은 삶의 터전을 잃거나 심지어 자살하는 경우도
있는 것을 아는지...

정말 상도(商道)는 없고 상도(商盜)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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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14 -- 지리산에 갔다와서...





‘지리산’하면 밀려오는 강한 압박감을 가지고 새벽부터 산에 올랐다. 처음
부터 쉽게 보고 오른 산은 아니지만 역시나 장난이 아니다. 백무동에서
시작하는 산행 길은 가파른 경사에 이어지는 돌계단 때문에 오르기가
만만찮다. 땀은 비 오듯 쏟아지고 30여명의 일행은 걷다가 쉬었다가 반복
하면서 거리가 점점 벌어졌다. 아이들도 네댓 명 있었지만 오히려 어른들이
산에 오르기를 힘겨워한다.

새벽부터 오른 산은 이내 체력을 떨어뜨려 여기저기서 밥 먹고 가자고
한다. 대충 한 시간 반 정도 산을 오른 다음에 샘이 있는 곳에서 이른
아침식사를 준비했다.

배낭을 풀어 싸온 음식을 펼치고 푸짐한 밥상을 차렸다. 아무리
시장이 반찬이라지만 산에서 먹는 밥은 뭐든지 입맛을 살려준다. 흰
쌀밥에서부터 김밥, 영양밥, 떡, 빵까지 다양한 밥상을 차렸다. 여럿이
산행하면 이 맛에 산행의 묘미를 느낀다. 그리고 빠져서는 안 될 술!
Pet병 맥주를 꽁꽁 얼려서 살얼음 맥주를 가져온 사람도 있고 막걸리,
소주, 과실주까지. 한두 잔씩만 얻어먹어도 취한다.

그 중에 일품은 역시 과실주, 진한 과일 향을 가진 알코올이 목 줄기를
타고 내려가는 맛은 잊혀지지 않는다. 자주 산에 오는 사람들은 과실주를
가져오는데 그 맛에 따라 등산 경력을 가늠해 보는 것이 어느덧 내 못된
습관이 되었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바로 다시 산에 오른다. 6월이지만 아침나절 지리산
자락은 제법 쌀쌀하다. 이런 날씨에 가만히 있으면 감기 걸리기 딱 좋다.
부지런히 산을 오르니 어느 덧 장터목산장이다. 뒤쳐지는 사람들과
무전기로 천왕봉을 먼저 간다고 말하고 천왕봉으로 향했다.

장터목산장에서 천왕봉까지 1.5㎞, 한 시간거리이지만 이 산길은 지리산의
비경이 숨어있다. 능선의 한 쪽 산자락에는 햇살이 있지만 반대 쪽
산자락에는 능선을 넘지 못하는 운무가 사람들을 홀리고 있고 산길
양쪽으로 듬성듬성 자리를 잡은 고목들은 깊은 사연을 간직한 듯, 보는
이를 생각에 잠기게 한다.

천왕봉 정상에 올랐다. 멀리 펼쳐진 경치를 구경하고 흔히 하듯이 사진을
찍고 다시 부지런히 하산 길에 접어든다. 서울에 너무 늦게 도착하지
않으려면 길을 재촉해야 한다.

하지만 이어지는 돌길은 계속해서 무릎에 압박을 주고 있다. 딱딱한 돌길은
흙길에 비해 몸무게의 충격을 고스란히 무릎이나 발목으로 전달하기
때문에 부담을 준다. 한 발 한 발 내딛을 때마다 무릎에 통증이 온다.
참을 정도는 되지만 다른 사람들이 걱정이다. 산에 몇 년씩 다닌 나도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많이 안 다닌 사람들은 견디기 힘들 것으로 생각된다.

하염없이 이어지던 하산 길도 어느덧 산 아래 마을에 다다랐다. 일단
담배부터 한 대 태우면서 뒷사람들에게 무전을 날려본다. 무전내용을
들어보니 대충 한 시간정도 터울이 있다. 하지만 잠시 후 무전기에서
들려오는 내용은 나를 당황스럽게 한다. 한 사람이 탈진하여 낙오되었다는
무전이다. 심장이 덜컹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당황스럽고 혼란스럽다. 손전화로 통화가 안 되는
곳이라 아직 산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연락할 방법도 없다. 힘들게 무전기로
통화해 보니 일단 자체 구조대를 만들어서 다시 산으로 올려 보내야 할
것 같다. 아직 여력이 있는 사람들을 모아서 산으로 올려 보냈다. 사실
내가 올라가야 하지만 나도 무릎에 통증이 있다.

올라 간지 얼마 되지 않아 다행스럽게도 탈진한 사람과 일행들이 모두
내려왔다. 탈진한 사람은 그렇게 나빠 보이진 않았지만 많이 지쳐보였다.
일단 상태를 지켜보고자 했지만 환자는 기력이 없고 음식을 전혀 입에
대지 못하고 있다.

하는 수없이 119 구급대를 불렀다. 구급차는 금세 왔다. 내가 구조하러
산에 올라가지 못한 것도 미안하고 해서 환자의 보호자로 같이 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갔다.

환자는 구급차안에서 편안하게 잠들고 병원에 도착해서는 포도당 링켈을
맞고 나니까 어느 정도 기운도 차리고 몸 상태도 좋다고 한다. 천만 다행
이다.

구급차안에서 구급대원이 하는 말이 백무동코스는 구급대원들이 보기에도
최악의 코스라고 한다. 왜냐고 물어보니 돌길이 많기 때문에 늘 부상환자와
탈진환자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산에서 부상환자가 있다는 것은 구급
대원입장에서는 구조하기가 두 배, 세 배 힘들다고 말한다. 헬기를 부를
수 있는 곳은 제한적이고, 또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 들것으로
이송하거나 업고 내려온다고 한다. 그럴 때 가장 힘든 하산길이 바로
돌길이라고 한다. 구급대원 자신의 몸무게와 환자의 몸무게의 압박을
고스란히 자신의 무릎으로 받아야 하기 때문이란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국립공원 측에 나무계단 혹은 흙길로 만들어 달라고
수차례 건의하였지만 예산과 지형변화를 이유로 번번이 거절당했다고 한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국립공원 측 행태가 안타까움을 넘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원래 흙길이였을 곳을 비용이 적게 들고 오래 간다는
이유로 돌길로 포장을 하면서도, 그 길을 지나는 사람의 위험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이 사람이 아닌 물질중심의 사고방식을 보는 듯해
씁쓸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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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03 -- 김연아, 스포츠 그리고 고려대

신문을 보니 온통 김연아 기사다.
김연아가 세계 피겨 선수권에서 1등을 하고 나니까 언론들은 그이를 따라 다니며 국민이 알 필요 없는 것까지 시시콜콜 보도에 열을 올린다. 김연아가 우승 못했으면 무슨 기사를 실을지 걱정될 정도다.

김연아는 지난해 10월에 수시 2학기에 체육 특기자 전형으로 고려대 사범대학 체육교육과에 합격했다. 그리고 어제가 첫 등교하는 날이다. (체육 특기자 전형도 맘에 안 든다. 왜냐하면, 한 가지만 잘해서 대학에 들어가고 메달 몇 개 따고 졸업시켜주는 제도는 스포츠 기계를 만드는 제도지 교육제도라고 말할 수 없다.) 그것도 한 달 만에 첫 등교하는 날이다.

김연아는 대학 총장실에서 학생증을 받고 총장이 직접 안내해 주는 것에 따라 교내 중앙도서관까지 갔다. 거기서 3권의 책을 빌리고 한 시간 남짓 학교에 머물다 떠났다.

김연아가 한 일은 별로 없다. 뒤늦게 학교 와서(요즘 대학교는 한 달에 한 번 등교해도 되나? 그것도 출석이 아닌 등교 말이다.) 학생증 받고 (그것도 총장한데 직접) 도서관에서 책 빌리고 (어느 신문엔 빌린 책 3권의 제목도 실려 있다.) 잠깐 캠퍼스 거닐다 간 것 뿐이다. 그런데 온통 김연아 일거수일투족을 생중계하듯 기사가 나간다.

사실 스포츠가 상업화한 것이 새삼스런 이야기도 아니다. 더군다나 요즘엔 국민이라는 접두어가 한 개씩 붙어서 은연중에 민족주의의 감성을 자극한다. (심지어 국민노예라는 별명이 붙은 야구 선수도 있다.)

문제는 민족주의는 아직도 이성을 마비시켜 어디로 튈지 모르는 폭발적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민족주의와 전체주의는 ‘좀 더’와 ‘좀 덜’의 차이일 뿐이다.) 눈치 빠른 스포츠 프로모터들은 재빨리 스포츠와 민족주의를 결합시킨다. 최홍만이 일본에서 이종격투기 대결을 할 때 경기 며칠 전 서울 거리엔 “최홍만, 독도를 사수하라”라고 쓰인 현수막이 내걸리기 까지 했다. 그리고 미국 슈퍼볼 영웅 하인즈 워드는 우리가 그토록 거리감을 두고자 하는 혼혈인이지만 MVP에 선정되고 나서는 거의 광풍에 가까운 바람이 일었다. 갑자기 “한국계”가 유일한 끈인 양 끈질기게도 물고 늘어졌다. 이것은 성공한 이들만 ‘골라서’ 환영하는 스포츠로 인한 이성 마비 현상이다. 이럴 때 특히 언론은 집단적 이성 마비를 부채질 한다.

잘 나가는 김연아가 질투 나서 이러는 게 아니다. 그이가 얼음판에서 흘린 땀은 그 얼음판 보다 클 것이고, 직업까지 팽개치고 헌신적인 뒷바라지를 해준 부모의 노력은 가히 짐작도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연아를 마냥 좋아할 수 없는게 김연아를 이용해서 한 판 “쇼”를 벌인 고려대가 있기 때문이다.

오늘 대부분의 신문에서 김연아의 기사를 실었지만 어느 신문의 사회면 구석에는 ‘치졸한 고려대’라는 제목으로 이른바 ‘출교생’ 7명에 대하여 무기정학을 추진한다는 기사가 있었다.

법원에서도 무효로 판결난 퇴학처분에 대해 어떻게 해서든 본때를 보여주려 안간힘 쓰고 있는 치졸한 고려대 기사와 김연아를 보디가드하고 있는 고려대 총장의 사진이 오버랩 된다.

정말 싫다. 고려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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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5 -- 마을버스 타기

일찍 퇴근을 하고 지하철을 타고 수유역에서 내렸다. 집에 가려면
마을버스를 타야 하기 때문에 마을버스 정류장쪽 계단을 올라 나서려는데
내가 타야하는 2번 마을버스가 막 출발하고 있다.
순간 뛸까 말까 고민을 했다. 근데 바로 앞의 건널목이 파란색 신호로 바뀌면서 버스가 서서히 건널목 앞에 정차를 한다.
옳거니 하면서 냅다 버스로 내달렸다.

버스 앞 문에 가서 똑똑똑 노크를 했다. 보통 이럴 땐 운전기사가 알아서
문을 열어 준다. 어쩔때는 반대편 건널목에서 뛰어오는 사람이 있으면
알아서 문을 열어주는 기사도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어째 이상하다. ‘잘 못 들었나?’ 다시 한 번 “똑! 똑! 똑!”
그래도 반응이 없다. 운전기사는 앞만 보고 있지 이쪽으로 눈길도 없다.
이쯤 되면 도로 위에서 버스에 문 좀 열어달라고 애원하는 꼴로 보인다.

슬슬 부아가 돋는다. 다시 한 번 “똑! 똑! 똑!” 여전히 반응이 없다.
‘동전을 세워서 두르리면 크게 들리는데…’
주머니를 뒤져볼까 하다가 마지막으로 손가락을 세워 두드렸다.
“똑! 똑! 똑!”
갑자기 문이 확 열린다.

재빨리 올라타서 버스카드를 찍으려 하는데 운전기사가 대뜸 말한다.
“여기서 태워주면 벌금이 십만 원이예요. 밑에 써 붙어 있는데 안보이세요?”
한 40대 정도의 운전기사의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 있다.
‘어쭈구리..좋아..’
나도 지지 않고 고개 빳빳이 들고 말했다.

“아, 그러면 그렇다고 말을 하시든지...아니면 아예 열어주지 말든지요?
사람 무시하는 것도 정도가 있는 거지...뭐예요? 이게”
“아..그러니까 타시라구요.”
내가 대거리를 하니까 조금 수그러든 목소리다.

버스에 사람들이 제법 앉아 있고 상당수의 사람들은 서 있다.
분위기상 냉큼 카드 찍고 버스에 오르기가 부끄럽다.
“아~안 타면 되잖아요.”
그러고는 내려서 버스정류장으로 걸어 갔다.
버스는 떠나 갔지만 열 받아서 혼자서 씩씩거렸다.

‘그냥~욕이라도 한 마디 할 걸 그랬나? 좀 더 조리있게 말해서 버스 안에
있던 사람들에게 운전기사 망신을 줬어야 하는 건데...’
정류장에서 혼자서 열 받아 있는데 어디 말하기도 그렇고 좋은 저녁에 기분 잡쳤다 싶다.

다음 버스로 집으로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 운전기사는 사람을
도로 위에 세워놓고 곤란하게 한 다음에 문을 열어주고는 다 들으라는 듯
내 행동을 나무랐다. 아예 안 열어주면 그러려니 싶은데 열어주고는
도리어 나에게 무안주고자 하는 의도를 추측해 보니 은근히 부아가 돋는다.

‘얼굴을 똑똑히 기억해야지’ 싶다가도 한편으로는 그런 식으로라도 ‘고객’에게 큰소리치고 싶은 기사의 마음이 느껴지니 안쓰러운 생각도 든다.
그리고 혹시 진짜 벌금 십만 원 내야 하는 건 아닌지 걱정도 된다.

현실을 무시한 법규와 규칙으로 피해 보는 건 일하는 사람들과 시민들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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