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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석이형 보고싶습니다.

모르겠다.

내가 왜이러는 지

 

나와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난 가눌수 없는 슬픔과 비애를 느낀다.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되도록 울었다.

 

몸이 아파 병원에 갔다가 집에 누워 약에 취해 자다가

일어난 지금 !!

 

난 외로움에서 인지 그에 대한 그리움에서인지 자꾸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대의 노래를 부르는 것 만으로도
오늘 김광석 사망 10주기... 자꾸만 썼다 지우는 그 이름, 그 노래
텍스트만보기   박상규(comune) 기자   
* 잠시 볼륨을 올려주세요. 기사를 읽을 때 김광석의 노래가 나옵니다. <편집자 주>

valign=top 그후 10년, 김광석을 노래하는 사람들 / 편정아 기자


▲ 1996년 1월 6일, 김광석은 갑작스럽게 우리 곁을 떠났다. 소극장에서 김광석과 함께 '서른 즈음에'를 부르던 30대의 사람들은 어느덧 40대가 됐다.
ⓒ 위드 33 뮤직
"광석아, 고맙다. 내 인생에 나타나 함께 시간을 보내줘서… 내 기억 속에 너의 맑은 목소리와 미소를 남겨줘서 정말 고맙다."

김광석 사망 10주기를 이틀 앞둔 지난 4일 밤 12시 무렵. 가수 강산에(43)씨에게 전화를 걸어 물었다. 10년 전에 무심하게 떠난 '친구' 김광석에게 지금 이 순간 어떤 말을 전하고 싶냐고. 강산에씨는 잠시 뜸을 들였다. 애써 감추려했던 그의 작은 탄식은 성능 좋은 전화기를 피하지 못했다. 잠시 후 강산에씨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광석아, 고맙다"라고.

강산에씨는 90년대 초반 김광석과 함께 신촌역 인근의 카페 '무진기행'에서 통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2001년 발매된 김광석 추모앨범 'Anthology1'에서는 김광석과 한 소절씩 주고받으며 이렇게 노래한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고.

10년 전 오늘, 김광석이 지다

김광석에게 나직하게 고마움을 전하는 이는 강산에씨와 같이 특별한 추억을 가진 사람만이 아니다. 한번쯤 김광석의 목소리에 기대어 불면의 밤을 건너봤거나, 힘겨운 삶의 고개를 넘어본 사람들은 어김없이 말한다. 김광석은 왜 그렇게 우리 곁을 일찍 떠났느냐고.

"김광석, 그를 막 흔들었어야 했다. 훼방을 쳤어야 했다. 감성의 깊은 골짜기로 홀로 걸어들어갈 때 막 떠들어서 그를 환기 시켰어야 했다.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굳어진다 마음까지, 이렇게 노래할 때, 소리소리 지르면서 그를 불러댔어야 했었다. 두발로 땅을 힘차게 구르면서 그를 마구마구 흔들어댔어야 했다." - 김점선(화가), '김광석 콜렉션 마이웨이'에서

1996년 1월 6일. 하모니카와 통기타, 그리고 한참을 울고난 뒤 비로소 입을 연 듯한 목소리로 많은 사람들을 위로했던 가수 김광석이 세상을 떠났다. 김광석의 목소리에 위로 받았던 많은 사람들은 마냥 맑게만 보이는 주름 가득한 그의 미소와 갑작스런 죽음을 연결시키지 못했다. 거짓말 같은 '이 시대의 가객'의 죽음. 그로부터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거짓말처럼.

소극장에서 김광석과 함께 '서른 즈음에'를 부르던 30대의 사람들은 어느덧 40대가 됐다. 서태지와 함께 '난 알아요'를 외치던 아이들은 '이등병의 편지'를 부르며 군대에 가거나 누군가를 보냈다. 그리고 이들은 지금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닌데"를 읊조리며 서른살을 맞이하고 있다.

최루가스 자욱한 거리에서 20대의 삶을 보낸 386과 X세대라 불린 90년대 청춘들, 그리고 휴대폰 문자 메시지로 연인과 실시간으로 사랑을 속삭이는 21세기의 스무살이 함께 김광석의 노래를 부르는 건 더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다.

세대를 넘어선 이들은 오늘도 뒷골목 술집에서 잔을 부딪히며 김광석의 노래를 부른다. 적당히 취기가 오르면 10년 동안 물었던 질문을 서로에게 또다시 던진다.

"김광석은 왜 그렇게 일찍 죽었을까?"

물음에 대한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의 북한 오경필 중사처럼 "광석이를 위해서 한 잔 하자!"며 술잔을 들뿐이다.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김광석의 흔적은 희미해지지 않았다. 유명 가수들의 그럴듯한 추모 공연은 이어지지 않고 있지만 김광석의 팬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늘어나고 있다. 오프라인을 포함한 그의 팬클럽은 50개가 넘고 여기에 가입된 사람은 5만에 가깝다. 가장 오래된 팬클럽 '둥근소리'는 96년부터 추모 공연 성격의 작은 음악회를 개최하고 있는데, 오는 2월에도 열 예정이다.

김광석의 노래가 TV 드라마와 영화에 나오는 것은 더이상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이등병의 편지'는 남한과 북한 병사들의 정서적 통일에 이바지하고(<공동경비구역 JSA>),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은 준하(조승우)와 주희(손예진)의 이별을 더욱 애달프게 만든다(<클래식>). 또한 김제동과 영화배우 설경구가 TV에서 김광석의 노래를 부르고 나면 그 노래 제목을 묻는 '신세대'의 문의가 한동안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쇄도한다.

10년 후 오늘, 여전히 살다

이런 김광석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왜 사람들은 여전히 김광석을 기억하고 그의 노래를 부르는 것일까.

가수 강산에씨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가슴으로 느껴지는 진정성의 힘"이라고 설명했다. 한동헌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 대표는 "김광석은 우리나라 대중음악사에서 드물게 문학적 성취를 이룬 돋보였던 가객이었다"며 "문학성 짙은 가사와 진정성이 묻어있는 김광석 목소리의 결합은 대중들에게 강한 호소력을 발휘했다"고 말했다.

음악 칼럼니스트 김작가도 "김광석의 목소리는 그에 범접할 수 있는 아류도 계보도 없다"며 "훌륭한 목소리와 좋은 노래가 결합돼 김광석은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의 아이콘처럼 굳어졌다"고 평했다. 여기에 김작가는 다른 해석도 덧붙였다.

"한국의 포크 음악은 저항과 미학의 두 갈래 길을 갔는데, 김광석은 이 두 갈래 길을 동시에 장악했다. 그러나 김광석을 작가의 반열에 올리기는 어렵다. 그가 불러 큰 인기를 얻은 곡들은 대부분 리메이크된 것이다. 원곡 자체가 탁월했다. 즉 김광석은 탁월한 보컬이었을 뿐, 창작자는 아니었다."

김작가의 지적대로 김광석이 불러 큰 인기를 모은 '이등병의 편지',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불행아', '그녀가 처음 울던 날' 등은 모두 <다시 부르기> 앨범에 수록된 곡들이다. 이런 이유로 "김광석은 리메이크의 원조"라는 평가도 있다.

"김광석의 노래에는 이미 모든 생을 살아본 듯한 관조가 진하게 묻어있다. 그러나 그 관조는 체념이 아니라 삶에 대한 강한 희망이다. 짙은 슬픔 속에서 건져 올리는 희망. 김광석에게서는 그런 것이 느껴진다."

김광석의 팬 이혜영(31)씨의 말이다. 김광석도 공연 실황을 담을 앨범 <인생이야기>에서 아래와 같은 구체적인 희망을 언급하기도 했다.

"나는 환갑 때 연애를 하고 싶다. 7년 뒤 마흔살이 되면 오토바이를 하나 사고 싶다. 돈도 모아놨다. 그거 타고 세계일주하고 싶다. 가죽바지 입고… 나이 마흔에 그러면 참 재미있을 것 같다. 여행과 삶을 살아가는 건 그리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조금 힘들더라도 뭔가 새로운 것이 있을 것이라 기대하며 견뎌낸다."

마흔을 꿈꿨던 영원한 33세

그러나 김광석의 죽음이 증명하듯 그는 스스로의 다짐을 지키지 못했다. 그리고 이 앨범은 그의 사후에 세상에 나온 것이다. 64년도에 태어난 김광석이 지금 살아있다면 그의 나이는 43살이다. 그의 말이 지켜졌다면 그는 지금쯤 가죽바지 입고 오토바이에 몸을 실은 채 세계일주를 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이미 10년 전에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대"가 되어버렸다. 어느덧 김광석 사망 10주기를 맞이한 지금. 그를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김광석에게 하고 싶은 말은 아래와 같지 않을까.

"또 똑같은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향할 때면 가끔 너에게 전화를 걸어 함께 한 잔 기울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때가 있단다. 너도 가끔 그러하니?" - 전 동물원 멤버 김창기. '김광석 콜렉션 마이웨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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