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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의 힘 중앙위 수련회 토론자료 1

 <현장의 힘 중앙위 수련회 토론 자료 - #1>

무엇이 전진을 가로 막는가?


 운동을 왜?


 노동자가 자본주의에서 살아가는 길은 둘 중에 하나다.  ‘ 자본가의 떡고물을 받아먹고 살 것인가? 아니면 수탈에 저항하면 살 것인가?’  활동가에게 묻는다면 자본에 빌붙어 사는 것은 ‘어용짓’이라고 할 것이다. 남은 유일한 길은 수탈에 저항하는 것이다. 자본의 노동에 대한 수탈은 자본주의가 유지되는 한 끝나지 않는다. 따라서 운동의 시작은 수탈에 맞선 분노이되 그 끝은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자본을 넘어서기 위한 운동을 하고 있는가?

  

 87년 이후 민주노조운동은 몰락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은 승패를 확실하게 갈랐다. 승리한 자본은 더 많은 자유를 얻었다. 세계화속에서 국경을 넘나들며 공장을 폐쇄하고 비정규직을 확산시키고 있다. 후퇴한 노동은 한진, 세원, 비정규직... 등 열사의 저항에도 총파업의 깃발을 올리지 못한다. 87년 이후 민주노조운동은 몰락하고 있다.

 그래서 ‘산별노조-정치세력화’라는 대안이 유행으로 번졌다. 그러나 어용에 둘러싸인 대우조선, 반동적 태도를 노골화하는 현중 등 대공장은 무너지고 있다. 수혈 받으면서 자라는 금속노조는 힘들게 유지되고 있다. 구호들만 난무한 채 비정규직들은 고군분투하고 있다.

 산별노조건설과 정치세력화를 외치는 수년 동안 대공장의 우경화되고, 산별노조는 흔들리고, 비정규직은 증가하고 있는데 그것이 과연 대안인가?


 놀라운 변화와 상시적 위기


 냉전시대는 갔고 신자유주의 시대가 왔다. 재벌과 국가가 주도하던 경제성장의 시대는 끝났다. 주식시장의 43.5%, 우량기업의 50%, 은행권의 65%를 초국적 자본이 차지하고 있다. 

 새로운 시기에 세상은 흔들린다.  경제는 엉망이고 정치는 시끄럽다. 흔들리는 시대에 안정적 성장의 향수는 독재자 박정희의 딸을 야당의 당수가 되게 하였다. 

 신자유주의시대, 세계화의 시대에 자본도 흔들리고 있다. ‘국민소득 2만 달러’는 공허한 외침이다. ‘동북아 중심국가’를 믿는 사람은 없다. 구심을 잃은 자본은 제 각각 살길을 찾는다. 재벌은 초국적 자본이 되려고 앞 다퉈 해외투자에 열을 올린다. 중소자본은 매각을 통해 초국적 자본에 빌붙어 살고자 한다. 영세자본은 중국 등으로 쫓겨나고 있다. 

 노동자 대중도 상시적 위기를 감지한다. “우리한테 정리해고가 언제 올 것 같습니까?” 최대 자동차회사 현대차 노동자의 질문이다. 날로 증가하는 해외공장, 무노조 비정규직 공장으로 외주화, 고령화되는 조립공장을 보면서 위기를 느낀다. 대안을 바라지만 없다. 다만 현실에서 더 많은 임금을 원한다.   


강화되는 자본의 공격, 갈라지는 노동의 대응


 흔들리는 자본은 아주 치졸한 과거의 저임금전략을 선택한다. 비정규직을 더 늘리고 그것도 벅찬 영세자본은 외국인 노동자를 짐승처럼 수탈한다. 노동자는 분할되었다. 비열하게도 자본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를 활용하여 분할통치를 진행한다. 노동자의 연대를 복구하려는 시도는 끝없이 도전받고 있다.

 노동운동은 헤메고 있다. 더 이상 민주노조운동은 답을 주지 못한다.

 KT를 비롯하여 현중, 대조.....대공장은 우경화되고 있다. 이를 반영하여 총연맹에서는 ‘사회적 합의주의’를 추진한다. 말로는 ‘전술적 활용론’ 이지만 그렇게 믿지 않는 반발의 목소리가 높다. 반대의 방향에서 '민주노조운동을 복원하자 ! 투쟁정신을 되살리자 !'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규직 대공장은 멀어지고 비정규직의 투쟁은 너무 미약하다. ‘산별노조 건설- 정치세력화’가 새로운 대안인양 떠들고 있지만 우경화경향은 더 강화되고 있다.


 과제는 분명하다. - ‘연대’와 ‘사회적 통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분할을 넘어서는 길은 연대다. 무한한 자유를 얻고 날뛰는 자본을 때려잡는 것은 사회적으로 통제하는 것이다.

 첫째로 연대의 출발은 정규직이요 그 결과는 비정규직의 조직화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연대는 출발조차 못하고 있다. 원인은 대공장의 실리주의, 노사담합주의다. 이것을 분쇄하지 않는 한 연대는 없다. 

 담합구조가 발생하는 원인은 구조조정기투쟁에서의 후퇴와 대안부재로 인한 낡은 운동의 반복과 우경화 때문이다. 따라서 노사담합구조의 썩은 환부를 드러내야 한다. 그에 대한 비타협적 투쟁이 필요하다. 기존 조직이 깨질 것을 두려워해서 투쟁하지 않는다면 결국은 낡은 조직자체를 통째로 파괴할 것이다. 이와 함께 민주노조운동을 근본에서 혁신해 나가야 한다. 

 둘째로 사회적 통제의 시작 또한 정규직이다. 차고 넘쳤으나 타락해 가는 대공장내의 현장통제력은 이제 기업을 넘어 산업과 사회적 통제로 바뀌어야 한다.  이러한 가능성은 아주 미세하게 그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경우도 있지만 2004년에 좀더 분명히 드러나 구호들을 보자.

  병원노동자들의 “이윤보다 생명을”,  택시노동자들의 “속도보다 안전을”, 궤도노동자들의 “청년에게 일자리를”, 자동차노조의 “산업발전 및 사회공헌기금” 등이 그것이다.

 엘지 칼텍스의 경우처럼, “쟤네들 연봉 6-7000만원 받는데” 라는 한마디에 투쟁의 정당성이 상실된다. 바로 이 때문에 이 요구들은 아직 임단협 요구를 방어하고 포장하기 위하여 내거는 전술적 수단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런 식의 전술적 수단으로만 활용하는 것은 한번으로 끝이다. 그래서 이젠 중단되어야 하는 것인가? 아니다. 임단협을 넘어서 사회적 의제로 발전할 가능성을 더 확대해야 한다.

 이윤만을 쫓는 병원자본에 맞서서 생명을 치유하기 위하여, 속도만을 쫓는 택시자본에 맞서 더 나은 서비스와 안전을 위하여, 공공서비스를 외면하고 이윤만을 쫓는 공사와 당국에 맞서,  더 많은 인력과 노동강도의 완화, 그리고 비정규직이 아닌 정규직 고용을 통해 양질의 서비스를 생산하자는 것은 분명 자본에 대한 사회적 공공적 차원에서 자본을 통제하고자 하는 가능성을 안고 있다.  또한 자동차 노조들이 비정규직을 수탈한 결과로 얻은 순이익을 환원하자고 하는 것은 분명 자본에 대한 사회적 공격이다.

 반면에 어떻게 이러한 것을 가능하게 할 것인지, 그 물질적 기반(비용)문제를 비롯하여 실제 그것을 가능하도록 하기 위하여 어떤 장치를 만들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할 과제들이 있다.

 공공성, 사회적 의제를 제출하고 이를 발전시키는 것은 분명히 실리주의, 경제주의를 벗어나는 길이다. 그것은 노동자 계급이 자신을 사회적 주도세력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다. 


 적은 내부에 있다.


 첫 번째, 우경화 경향이다.

 사회적 합의주의 등 우경화는 대공장의 실태를 반영한다. 한 현자의 설문조사 결과는 2/3가 넘는 조합원이 노사정위 참가를 찬성한다. 공공연한 비밀로서 각종 루트를 통한 대정부 비밀접촉들이 횡횡한다. 따라서 우경화 경향에 대한 근본적인 답은 민주노총의 ‘사회적 합의주의’에 대한 투쟁 그 자체가 아니다.

 과연 정규직 노조운동은 결국 자본의 하위파트너로 타락할 것인가? 자본에게도 제약요소는 있다. 대공장 고임금론을 공격하고 심지어는 대공장의 임금을 깎아서 비정규직에 주자는 이이제이의 전술을 쓴다. 대공장에서 더 많은 떡고물을 안겨주지 못하는 한계를 보여준다. 이러한 제약요소들에도 불구하고 노동운동이 대공장의 우경화 경향을 근본에서 막아내지 못한다면 대공장은 자본에 의한 포섭의 위험에 늘 드러나 있게 될 것이다. ‘사회적 합의주의’가 파생하는 뿌리를 뽑아내는 문제가 훨씬 중대하고 핵심적 문제인 것이다.

 둘째. 말로만 혁명적이고 실제는 무능한 ‘좌익소아병’

 대공장의 임금을 깎아서 비정규직에 주자는 것은 분명 잘못이다. 그러나 그 반대로 ‘대공장임투옹호론’도 틀렸다. 적어도 현재의 분할된 노동자들의 상황에서 이는 연대를 위한 길이 아니다. 심지어는 의도와 무관하게 대공장의 경제주의, 실리주의를 부추기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임단투를 새롭게 혁신할 가능성을 차단하고 관성을 반복하는 것을 정당화 하는 걸림돌인 것이다.

 좌파를 자처하는 그룹들은 언제나 ‘투쟁’을 외친다. 그러나 문제는 외치기만 할 뿐 어떻게 투쟁이 가능한 것인가? 어떻게 정규직 대공장의 노동자들의 상황을 혁신함으로서 투쟁을 이끌어 낼 것인지에 대한 답은 없다. 관성적 투쟁구호, 결사항전의 구호는 오히려 반대의 경향을 확대시킬 뿐이다.(2003년 열사정국에서도 이것은 또 다시 뼈아픈 반복사례를 낳았다) 대안 없이 낡은 주장을 반복하는 것은 분명 성장을 거부하는 소아병에 불과하다.  

 셋째, 새로운 시도를 가장한 기회주의적 태도들.

 최근 들어 조직을 만들자는 얘기들이 노조는 물론 민주노동당을 둘러싸고 무성하게 떠돌고 있다. 운동을 혁신하자는 주장을 하면서 심지어는 ‘노선에 입각한 운동을 하자’면서 사회주의를 내걸기도 한다. 그러나 우경적인 대공장의 집행부와 뒷거래를 일삼으며 상급단체의 선거에서 한 표라도 더 받으려는 이율배반적 행동을 일삼는다. 말로는 현장을 혁신하자고 하면서 실제로는 집행부 선거를 위한 현장조직간의 이합집산을 반복하는 사례들이 늘고 있다.  

 노동자는 말로 조직을 만들지 않으며 행동으로 조직한다. 생각이 같은 사람이 조직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같은 사람이 모이는 것이 진정한 조직이다. 현명한 조합원들은 그럴싸한 명분을 내걸고 현장조직을 재편한다고 해서 속아 넘어갈 바보도 아니다.


 매년 정세분석을 해서 “자본과 정권은 신자유주의 공세를 강화할 것이며, 노동자 민중은 더욱 도탄에 빠질 것이다. 그래서 투쟁을 해야 한다” 이런 식의 주장을 통해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자본과 정권이 그렇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당면 상황의 문제는 노동운동이 무력하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투쟁해야 할 대상은 우리 자신이다.  

 노동운동을 한 단계 전진시켜 내기 위해서는 노동운동의 전진을 전투주의와 좌파를 자처하지만 실제로는 뒤에서 붙잡고 있는 소아병적 경향, 노동운동을 오른편으로 끌어당기려는 우경화의 경향, 전진을 가장하면서 사실은 낡은 종파적 권력경쟁을 부추기는 기회주의적 경향에 맞선 내부투쟁에서 승리하여야 한다.



***** 몇 가지 제안된 주제에 대한 보론 *****

  

보론 1. 산업발전 및 사회공헌기금을 둘러싼 쟁점에 대하여.

             - 5가지 무지를 개탄한다.


 첫째, ‘낡은 관성’과  ‘분할통치에 맞서는 대안’을 구분하지 못하는 무지.

 기금요구는 날로 심화되는 노동자 내부의 격차를 줄이고 연대로 나아가기 위하여 제안된 것이다.

“ 여기 군대가 있다. 그런데 적을 앞에 두고 군대의 일부는 그동안 전투에서 뺏은 군량미도 많고 대우도 좋다. 다른 일부는 군량미도 없고 대우도 나쁘다. 이 모습을 보고 적들이 이간질을 하면서 심리전을 편다. 이 군대가 적과 싸워 이길까? 말도 안된다. 싸우기도 전에 내부에서 붕괴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오늘의 노동자들의 상황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 이 군대가 적과 싸워 이길 수 있도록 할 것인가?  “비정규직에 대한 연대투쟁”이라는 구호를 반복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현재의 대공장의 상태를 고려했을 때, 정규직을 ‘이권’에서 ‘연대의 길’로 나아가게 할 공동실천의 대안이 있다면 그것을 제출하라.  


 둘째, ‘공동분담론’과 ‘수탈의 환수’를 구분하지 못하는 무지.

 기금요구가 쟁점화 되자 그것은 대공장의 임금양보로 귀결될 것이라고 법석을 떨었다. 그러나 기금요구를 제출한 자동차노조들에서 과연 어디가 임금을 양보했는가? 오히려 기금요구 때문에 자동차노조들은 ‘대공장이기주의’라는 비난을 피하면서 더 많은 임금을 주장했다.

 특히 (노동)연대기금과 사회공헌기금의 중요한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무지를 개탄한다. 민주노총과 금속연맹의 대대에 제출된 연대기금은 노사가 공동으로 기금을 내는 방식이다. 이는 ‘노사의 공동분담=공동의 책임론’으로 귀결될 위험이 분명 있다.

 그러나 자동차노조의 기금요구는 근본적 발상이 다르다. 기아와 현대차, 모비스의 2003년 순이익을 합하면 3조원이 넘는다. 이것은 모두 비정규직과 중소사업장 노동자들을 수탈한 결과다. 3조원은 자동차산업의 비정규 영세노동자들 3만명에게 1억씩, 30만명에게 1천만원씩의 임금을 줄 수 있는 돈이다. 따라서 순이익금에서 기금을 조성하자는 것은 이 수탈의 결과를 돌려줘야 한다는 ‘수탈과 분배’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대공장노조집행부들이 이를 보다 계급적으로 분명히 주장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셋째, ‘물’ 과 ‘어린아이’도 구분하지 못하는 무지.

 어떤 이들은 말한다. 현대차 노조가 닭 100만 마리 먹기나 나무심기를 하는 식으로 사회공헌활동을 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빗겨나간 한심한 일이라고, 또한 기아차노조가 광주지역에 3억원을 소외계층에 전달한 것, 현자가 10억 내외를 조성하여 지역사회에 공헌하기로 한 것은 문제의 본질을 분명히 하지 못하고 시혜나 베푸는 것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나는 이것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자기주머니 채우기가 아니라 사회적 역할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 문제는 있다. 비정규직의 확대를 용인하면서 돈으로 때우는 것은 문제다. 그렇다면 이제 기금요구를 때려 치워야 하는 것인가? 그래서 다시 자기주머니 채우기만 할 것인가? 아니다. 이는 세숫대야의 물을 버리려다가 애까지 버리는 짓이다.

 기금요구를 보다 계급적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사회공헌기금이 단순히 자본가들이 하는 시혜적인 지역봉사에 머물지 않고 지역사회의 연대를 위한 계기로 작용하도록 그 용도를 지역의 비정규직노동자의 장기적인 조직화에 사용하도록 개입해야 한다. 

 기아에서도 일부는 그렇게 말한다. 쓸데없이 기금요구를 했다가 몇 억가지고 내부분란만 일으킨다고.. 그러나 이런 얼토당토않은 얘기는 집어치워라. 이런 얘기를 하는 현장조직은 기금요구에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 요구가 갖는 의미조차도 이해 못한다. 그래서 이 요구를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지 전혀 고민하지 않다가 나중에야 이러쿵저러쿵 씹어댄다. 자신의 대안, 자신의 무능과 무책임은 전혀 돌아보지 못하는 이런 행동에서 운동의 미래는 커녕 운동의 암울한 퇴행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넷째, ‘사회적 통제’와 ‘사회적 합의주의’도 구분하지 못하는 무지에 대하여

 산업발전 및 사회공헌기금에 대한 비판의 또 하나는 그것이 민주노총의 사회적 합의주의를 강화할 것이라는 것이다. 산업발전 기금과 사회공헌기금을 분할하여 사회공헌기금은 각 사에서 처리하고 산업발전기금과 관련해서는 ‘자동차산업노사협의체’를 구성 운영하는 것으로 합의하였다. 그래서 자동차산업의 노사협의체는 소위 업종노사정위원회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2003년 자동차산업의 노사는 간담회를 갖기도 했고 연맹자동차분과는 각 사 사장단 면담을 했다. 이 과정에서 자본이 먼저 요구한 조건이 있다. 자동차산업 노사간 논의기구는 교섭이어선 안되고 노사정과 연관되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것에 우리도 동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도와 무관하게 그것은 노사합의주를 낳을 것이라고 한다. 이런 식이라면 노사합의주의가 아닌게 어디 있나? 단위노조의 교섭 - 산별교섭, 업종별 협의 - 민주노총의 사회적 교섭을 모두 하나의 연관성에 놓고 본다면 노사합의주의가 아닌 것은 없다. 이런 무식한 판단으로 비판하는 것이 아니길 바란다.

 노동운동은 기업차원의 교섭구조를 확립하여 기업차원의 교섭권과 파업권을 확보했다. 이제는 산업과 업종차원의 교섭과 파업을 확보해 나가야 한다. 이를 통해서 기업차원의 자본에 대한 통제력을 산업과 업종차원의 통제력으로 확대해 나가야 한다. 문제는 이런 조건이 전제되지 않은 상황에서 민주노총이 사회적 교섭을 ‘합의주의’체계로 이끌어 가려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 민주노총의 사회적 교섭은 민주노총의 실력을 볼 때에 문제가 있다. 그러나 자동차업종을 보라, 르노삼성을 제외하고 자동차업종의 압도적 다수를 우리가 조직하고 있다. 제대로만 조직한다면 업종차원의 공동총파업을 조직할 수 있고 경험했다. 오히려 자본은 이점을 우려해 왔다. 그러나 현자와 기아와 같은 조직력 있는 회사는 협의체 구성을 인정하지만 쌍용차의 경우 완성사가 모두 참여해야 한다는 유보조건을 걸었고 지엠대우는 아예 참여를 거부하고 있다.

 노동조합이 자본에 대한 통제권을 어떻게 확대할 것인가? 임단협으로? 택도 없다. 날로 늘어나는 모비스의 무노조 비정규직공장 등 산업적 업종적 차원에서 통제권을 확보하기 위한 장치를 만들어 가야하며 자동차산업 노사협의체를 그 연장선에 있다.  오히려 자동차산업의 노사협의체와 같은 것을 어떻게 이끌어 가는가에 따라서 민주노총의 사회적 합의주의가 아닌 다른 대안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를 증명해 나갈 수 있다.

 소아병적 태도에서 본다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다만, 기업차원의 임단협이나 졸라게 하는 것 밖에는 뭐가 더 있나? 아니면 공허한 총파업이나 씨부리는 것 말고 또 뭐가 있는가!   

다섯째, 운동의 ‘선두’와 ‘꽁무니’를 구분하지 못하는 무지. 

 기금요구에 대하여 자동차노조들 중에서 공식적으로 반대를 주장한 것은 유일하게도 현장의 힘이다. 그렇다면 현장의 힘은 ‘전투적, 계급적 입장을 견지하는 유일한 조직’이거나 아니면, ‘운동의 전진을 가로막는 가장 꽁무니에 선 유일한 조직’일 것이다. 나는 전자가 전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운동의 제일 뒷꽁무에 선 가장 낙후한 조직이라고 단호하게 규정한다.

보론 2. 산별노조에 대하여


첫째, ‘별신숭배’를 반대한다.

 나는 최근의 산별노조운동은 신화화된 ‘별신숭배’라고 생각한다. 산별노조는 조직발전의 한 형태로서 운동의 한 부분적 과제이다. 그런데 모든 문제는 마치 산별이 되면 해결될 것으로 주장되어 왔다.

 대공장의 우경과, 비정규직의 확산, 세계화속에서 진행되는 구조조정 등 마치 이 문제들은 ‘기업별노조의 한계’ 때문에 발생한다면서 문제를 유보하거나 회피하여 왔다.

 “모든 문제의 원인은 기업별 노조에 있다.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산별노조에 있다”

 이 사이비 종고와 같은 논리가 지난 4년간을 지배했다.

 ‘신이 재림하여 공중 들림을 하는 그날, 우리를 천국으로 이끌 것이니 모든 것을 그날을 위해 바치자.’는 사이비 교주를 믿지만, 그러나 그날은 오지 않고 신자들은 재산만 탕진 당하고 인생은 망가진다.  

 ‘산별노조가 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으니 모든 것은 산별전환총회에 바치자’고 주장해 온 것이 금속연맹의 4년이다. 그래서 대공장은 우경화되고 정규직은 확산되고 구조조정에 대한 대책은 없다. 금속연맹은 더 망가지고 있다.     

   

둘째, ‘복사’는 실패한다.

 여전히 연맹에서는 독일노조를 초청해서 산별교섭이 어쩌구 저쩌구 해댄다. 그러나 유럽식 산별을 한국에 아무리 갖다 붙여보라. 운동만 망가진다.

 산업구조가 서로 다르다. 유럽의 경우 완성가 부품의 격차가 크지 않다. 한국의 경우 재벌중심으로 발전해서 원하청은 하늘과 땅차이다. 따라서 노동자의 이해의 통일성도 다르다. 정치적 환경도 다르다. 유럽이 좌파운동의 전통이 강력했고 좌파정당과 연계하여 산별노조가 발전했다면 한국은 좌파정당은 오히려 노조위에서 이제 시작하고 있고 현장조직들이 더 큰 역할을 해 왔다. 따라서 유럽식으로 산별노조를 만들 수가 없으며 현장조직들이 전면에서지 않는 위로부터 산별노조는 실패한다. 유럽은 처음부터 기업을 넘어서 노조가 만들어 졌고 한국은 기업별노조라는 전혀 다른 조건에 있다.

 이것만이 아니다. 유럽의 산별노조는 ‘대량생산 - 대규모 근대공업프롤레타리아 - 산별노조 - 사민주의정당 - 사회적 합의체제’가 만들어 졌다. 한국은 어떤가? 전혀 다르다. 여기에 신자유주의가 확대되면서 이제 가장 일반적인 노동자는 비정규직이다. 더 이상 과거와 같은 대규모 공장은 만들지 않는다. 이런 조건에서 유럽식 산별은 절대로 성공 못한다.

 한국에서 산별노조는 어떻게 만들어야 할 것인가? 다시 논의되어야 한다.

 최근 보건의료에서 발생한 산별교섭과 관련해서 뒤짚어 보면 유럽식을 차용할 경우, 이중파업금지를 주장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 그러나 한국에서 문제가 된다. 이것은 애초부터 잘못된 것으로 논의할 가치도 없다. 


셋째, ‘정규직 집짓기’에 반대한다.

 한국 노조운동의 핵심적 조직과제는 뭘까? 산별노조의 건설? 아니라고 생각한다. 핵심조직과제는 비정규직의 조직화이다.

 따라서 산별노조 또한 그 핵심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단일한 계급대중조직으로 묶어세우는 것이다. 그런데 비정규직의 입장에서 산별노조를 보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것은 정규직의 집짓기다. 정규직끼리 기업별노조냐 산별노조냐. 혹은 업종산별이냐 대산별이냐 하는 식의 논쟁은 정규직들끼리 초가집이냐 기와집이냐? 단독주택이냐 아파트냐는 논쟁에 불과하다. 최근 몇몇 산별노조에서는 이런 우려를 더하게 만든다. 정규직 노조들끼리 좀더 좋은 집을 지어놓고 결국은 정규직이익을 챙기를 투쟁을 넘어서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나는 정규직의 집짓기를 중심으로 한 논의는 한참 빗나간 길이라고 생각한다.  


넷째, 새로운 대중조직은 혁신의 촉매제이자 그것을 완성하는 결과가 되어야 한다.

 산별노조라는 조직발전 문제는 조직형태의 문제가 아니다. 운동의 내용적 발전과정에서 요구, 투쟁 등과 같이 발전하는 운동발전의 한 부분으로서 조직과제인 것이다.

 진정한 산별노조 완성은 새로운 위기와 투쟁시기에 완성될 것이다. 즉 비정규직투쟁과 조직화의 진전, 대공장에서 혁신을 통한 실리주의의 극복,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에 대한 강력한 통제력을 발휘하기 위한 장치의 발전과 투쟁의 본격화 등을 동반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 그렇다면 자동차노조에 대해서는 ? - ‘달을 가리키니 손가락만 본다’

자동차노조가 논의되는 배경은, 우선 그나마 조직력을 갖고 있는 대공장으로서 자동차노조들에서 급격히 우경화 경향이 강화될 가능성, 금속노조를 중심으로 한 산별노조 전환사업의 한계, 방치되고 있는 대공장에 대한 연대의 틀을 강화함으로서 조직력의 유지필요성 등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자동차노조를 제출한 목적은, 첫째로 금속노조의 정체를 돌파하기 위한 현실적 방안이기 때문에 교착상태의 산별운동을 전진시킬 수 있다는 것. 둘째는 대공장의 기업별 노사관계가 담합적 관계로 고착화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자동차노조의 횡적단결과 공동실천을 통해서 담합적 노사관계에 돌파구를 내자는 것, 셋째로는 자동차산업에 상시화된 구조조정과 모비스와 같은 비정규 무노조공장의 확대에 대한 업종차원의 공동대응력 구축, 넷째로는 기업내의 노사관계와 노조권력의 틀 안에 갇혀서 운동의 선도성과 계급성을 담아내지 못하는 현장조직이 자동차노조를 계기로 횡적으로 연대함으로서 운동의 전면에 나서는 것 등을 담고 있다.   

 이 문제를 바라 볼 때에 간과해서는 안될 전제가 있다. 그것은 ‘조직형태’는 그 자체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조직형태가 무엇을 해결해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처럼 우둔한 것은 없다.

 즉 비정규직문제 해결과 대공장의 우경화 및 상시적인 구조조정에 맞서는데 있어서 그것이 유리하다면 업종노조든 대산별이든 아니면 기업별 노조든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조직형태는 당면 과제를 해결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등소평이 말했듯이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입장에서 접근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과거의 소산별을 다시 꺼내드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당시를 자세히 논할 수 없지만 그 당시에 소산별은 노동자의 단결이 아니라 분열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 들여 졌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지금은 전혀 다른 지형에 와 있다. 금속이 유일하게 대산별 방침을 직접 실행에 옮기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금속노조는 대공장을 포괄하지 못하고 있다. 연맹은 금속노조 중심성에 목매고 대공장은 방치되고 있다. 따라서 멀어져 가는 대공장을 묶어내고 상황을 반전시킬 필요가 있다는 취지에서 그 수단으로 제출된 것이 자동차노조일 뿐이다.

 일각에서는 자동차노조야 말로 일본식 노동조합으로 가는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터무니 없는 무지다. 일본에서도 산별건설노력이 있었고 실패하여 오늘날의 그룹노조(도요타노조, 닛산노조 등)와 자동차총련이 유지되고 있다. 일본식 노조로 가는 것을 촉진하는 것은 오히려 현재의 금속산별운동방식이다. 되지도 않는 금속노조 중심성을 고집하면서 대공장의 문제를 방치하기 때문에 대공장은 더 원심력이 강화되고 있다.

 따라서 자동차노조의 발상은 분산되는 자동차대공장을 묶어두는 기술적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이것은 금속연맹이 산별노조로 전환의 지지부진함 속에서 업종별 실천을 강화하여 대공장을 묶어두기 위하여 금속노조, 자동차. 조선분과의 체제를 만든 것과 같은 맥락일 뿐이다.

 오히려 자동차노조 건설을 공식적으로 제안하고자 한다면, 그 핵심적 의미는 조직형태 그 자체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를 현장조직이 아래로부터 제기함으로서 현장조직 스스로가 산별노조대안론이 떠오르면서 역사적 역할을 상실했던 것을 복원하자는 것이다. 즉 연맹의 위로부터 산별노조 건설에 대하여 전혀 주동적 역할을 발휘하지 못한 채 결국은 단사의 노조권력을 둘러싼 경쟁수준으로 후퇴한 현장조직을 단위노조를 넘어서 전체 금속운동의 주체로 다시 서도록 하는 것이다. 현재의 상황에서 자동차노조를 만들려고 한다면 우선 현장조직들은 단사조직이 아니라 자동차업종 차원의 조직으로 자신을 재편해야 한다. 먼저 자신들이 기업을 넘어서 조직되고, 이를 통해서 모비스관련 투쟁, 사내하청비정규직을 동등한 조합원으로 받아들이는 투쟁을 전개하여야 한다. 이런 투쟁을 통해서 비로소 자동차 단일노조는 가능한 것이다.

 과거의 예를 들면 민주노조를 만들 때 우선 현장활동가들이 민주노조 건설추진위와 같은 것을 만들어다. 그리고 이 민추위가 투쟁을 통해서 결국은 어용노조를 뒤집거나 혹은 민주노조를 건설했다.

 따라서 자동차노조를 제기하는 합리적 핵심은 그나마 아직 조직력이 살아있는 자동차 노조의 현장조직을 단사를 뛰어넘어 자동차산업차원의 문제를 다루는 핵심주체로 조직하는 것이다. 말로는 계급운동을 주장하면서 행동은 기업수준의 조직활동을 전개하는 모순을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의 문제인 것이다.


 “달을 가리키니 손가락만 본다”

 이런 얘기처럼 자동차대공장의 운동의 지형을 바꾸고자 하는데 정작 사람들은 ‘조직형태논쟁’의 문제로 생각하는 꼴이다. 자동차노조의 제기는 운동지형변화를 위한 매개일 뿐 그것이 목적이 아니다. 현장활동가와 현장조직을 기업에서 산업수준으로 끌어 올리는 매개로서 자동차노조가 아닌 다른 대안이 있다면 조직형태논쟁이 아니라 그것을 논의해야 한다. 


 물론 자동차노조를 추진하는 것도 쉬운 문제가 아니다.

 우선 금속노조의 반발이 뻔하다. 또한 연맹에서는 선거를 앞두고 ‘업종소산별론, 산별반대론’으로 몰아붙이면서 선거전략으로 활용할 것이다. 정상적인 논의는 불가능하다. 이런 지형에서 주장할 것은 뻔하다. ‘별신숭배’를 그대로 반복하는 “내년에 한날한시에 산별로 가자”는 따위의 주장이거나 혹은 아무런 대책 없이 지지부진하게 가는 것이다.

 두 번째 문제는 자동차노조의 활동가들이나 노조집행부의 상태를 볼 때에도 그나마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이다. 현대차의 경우 비정규직 직가입은 말로만 외치고 있다. 기아에서는 공식적인 방침으로 내보이지도 못하고 있다. 자동차 노조든 아니면 자동차업종의 공동투쟁이든, 그것을 조직할 전망과 실력을 갖춘 조직이 없다는 것이다. 현장의 힘도 어떤 비젼도 제시하지 못하면서 단사 내에서 집행부와 치고받기에 정신없는 여러 현장조직의 하나일 뿐이다.


보론 3. 사회적 합의주의를 둘러싼 논쟁에 대하여


 단순하게 말하자.  “사회적 합의주의”에 동의하는가? 동의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회적 교섭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회적 합의주의와 사회적 교섭을 구분하지 못하는 바보는 없을 것이다. 사회적 교섭(기업별교섭과 산별,업종별교섭이 아닌 총연맹의 교섭)은 이미 해 왔다. 좌파가 잡든 우파가 잡든 이미 교섭을 한 두번 한 게 아니다. 그래서 사회적 교섭은 하나의 전술영역이다. 발전파업이나 공공부문의 투쟁만이 아니다. 최저임금심의위원회에서 하는 것도 이런 교섭의 일종이다.

 물론 사회적 교섭전술을 둘러싼 논쟁은 필요하다. 무엇을 얻을 것인가? 어떤 목적 하에 어떤 조건으로 교섭전술을 펼칠 것인가를 논의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나는 민주노총이 노사정위에 참가하면 운동이 끝장날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또한 그것을 막는다고 해서 운동이 살아날 것이라고 전혀 믿지 않는다. 일각에서 관련 투쟁조직을 만들고 대응하지만 그런 조직의 실효성도 믿지 않는다. 기껏해야 그것을 가지고 반국민파 전선을 만들고, 또 후에는 각자 나름의 조직적 목적에 따라서 이리저리 가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운동의 우경화를 극복하고자 한다면, 핵심은 민주노총의 지도부가 추진하는 사회적 합의주의의 문제보다 대공장의 우경화에 대한 대책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골리앗 전사였던 현대중공업이 어떻게 변했는가? 그런데 어떤 대책을 가지고 있는가? 현중의 활동가들은 투쟁을 졸라 외치지만 결국은 오늘날의 상태가 되었다. 이런 노조들의 증가에 따라서 민주노총은 영향 받는다. 최근 IT노조가 생겼다. 민주노총의 상당수 산별연맹의 상태가 어떻게 되었는가?

 지금의 지형은 이수호 집행부가 잘해서 지도부가된 것이 아니다. 정규직 대공장운동이 날로 우경화 되고 있으며 그것을 반영하는 것이 바로 오늘의 지형이다. 아무리 투쟁을 주장한들, 우경화에 따라서 좌파의 활동기반은 약화되고 있다.

 98년의 정리해고 합의와 그에 대한 대응국면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바로 이점이다. 즉, 금속만 보더라도 당시에는 현장파라 할 수 있는 현장조직들이 현대정공(동지회-안현호), 현대차(민투위-김광식), 기아차(평등회-고종환), 한라중공업(현장투) 등 다가오는 위기에 맞서는 투쟁의 기류를 반영하여 당선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국민파의 정리해고합의에 맞선 내부투쟁을 통해 지도부사퇴를 이끌어내고 구조조정에 맞선 투쟁을 강화하는 축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다. 구조조정투쟁의 패퇴와 함께 노동조합운동은 구조적으로 퇴행하고 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경화 흐름에 대한 투쟁을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가?

 98년의 상황처럼 과연 그런 방식의 민주노총지도부에 대한 대응으로 극복할 수 있을까? 결코 아니다. 2003년 열사정국에서도 어쨌는가? 기아의 현장조직은 파업을 주장했으나 정작 기아에서는 파업이 부결되었다. 그것을 단순히 집행부의 탓으로 돌릴 순 있다. 그러나 집행부가 바뀌고 전투적 현장조직이 집행부를 장악했을 때, 상황은 더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바로 이런 경우가 현대차 민투위 집행부의 7.5총파업 불발 사건이다.) 


 과거의 국고보조금 논쟁을 되돌이켜 보자.

 국고보조금을 받으면 완전히 운동이 망할 것이라고 반대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좌우를 막론하고 전국에서 사무실을 보조 받아서 쓴다. 그때 반대했던 사람들은 그럼 뭔가? 국보보조금을 받아서 운동이 망한 것이 아니라, 이미 망해있기에 재정자립을 위한 대안이 없이 정부 돈을 받는 쪽으로 쏠린다. 국고보조금 논쟁이 본질이 아니라, 왜 운동이 이렇게 되었는지를 보자는 것이다.

 “뿌리를 뽑지 않으면 풀은 다시 돋아 난다”

 마치 풀을 자르는 문제에 운동의 운명이 걸려 있는 것처럼 호들갑을 떨어 보았자 풀은 다시 돋아 날 것이다.

 

보론 4. 2004 임단협에 대한 평가와 현장조직에 대한 제언


 2004년 임단투를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나는 관성적 투쟁이었는가?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투쟁이었는가? 로 평가해야 한다고 본다.

 이점에서 수많은 현장조직들의 이 치유할 수 없는 관성과 무기력을 발견한다. 도대체 어떤 새로운 문제를 이슈로 제기했는가? 관성적 임단협이 아닌 뭔가 새로운 가능성을 열기 위한 노력을 어떻게 기울였는가?

 마찬가지로 현장의 활동가들에게 묻는다.

과연 낡은 운동을 반복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비젼을 제시하고 있는가?

 비정규직에 대한 투쟁이 어쩌구 저쩌구, 졸라게 떠들지 말라. 대공장활동가들도 올해 임단협에서 특별성과급으로 얼마나 받았는가? 7-8 백만원 이상을 받았을 것이다. 그것을 당신들이 일한 당연한 댓가라고 생각하지만 말라. 수많은 비정규직과 영세하청 노동자들을 수탈한 자본은 그 지불능력으로 당신들에게 돈으로 잔치를 하고 있다.

 현장활동가라고 한다면 그 중의 10%로만이라도 모아서 비정규직 조직화를 위한 기금으로 내보라. 800만원을 받아서 80만원씩만 내면 조직원이 200명만 된다고 해도 1억6천만원이다. 그 돈으로 비정규직 노조하나가 아니라 1년간 지방의 비정규직 센타를 운영할 수 있다.    

 말로 투쟁을 외치고, 개량을 비판하고....... 그 잣대로 자신을 비춰보라. 그 거울 앞에 비친 우리 자신들의 모습이 어떤가 !

 차마 부끄러울 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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