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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1/30
    갈등이론의 전개(2)
    김지씨
  2. 2005/01/19
    씁쓸한 만남
    김지씨
  3. 2005/01/19
    전경린, <염소를 모는 여자>
    김지씨
  4. 2005/01/10
    끝없는 보고에 시달리다.
    김지씨
  5. 2005/01/08
    하야타니 겐지로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
    김지씨
  6. 2005/01/08
    가족이야기(1)
    김지씨
  7. 2005/01/08
    도서관을 독서실로 착각하는 당신에게
    김지씨
  8. 2005/01/08
    가족을 지키면 복을 준다고? 누가?
    김지씨
  9. 2005/01/08
    이문구에 대하여
    김지씨
  10. 2005/01/03
    내무교육지침서라...
    김지씨

갈등이론의 전개

1. 보수주의적 혹은 자유주의적 설명


"학교"라는 사회 기관에 대해 사람들은 과연 어떤 시각을 가졌을까? 초기의 학자들은 학교에 대해 중립적인 환상을 지니고 있었다. 즉 학교는 사회에서의 성공을 위해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보다 특수하게 학생들에게 제공해 주도록 고안된 종합적인 기관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Parsons와 같은 사람들이 이러한 생각을 전개했었다. 이렇게 되면 학교의 역할은 단순한 것이 되고 만다. 과연 학교는 일정기간동안 개인이 사회생활을 하는 데 필요로 하는 지식을 얻고, 기간이 되면 나가는 장소에 불과한 것인가? 그런 기능적인 역할만을 학교가 수행하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에 대해 대답을 찾던 이들은 학교라는 거대한 실체의 음습한 그림자를 발견하게 된다. 객관적이라는 환상 속에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던 학교의 담론들이 어떤 특정한 권력관계를 구성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시작한 이 비판적인 접근들은 우선 재생산 이론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형성하게 된다.


2. 재생산 이론

 

재생산 이론가들은 학교가 문화적 우수성, 가치 중립적인 지식, 그리고 객관적인 교수양식을 향상시키는 민주적 제도라는 가정을 거부한다. 대신 이 재생산 이론가들은 학교가 자본의 이익을 매개하기 위하여 권력에 의해 어떻게 사용되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재생산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학교가 일정한 생산 관계를 재창출해낸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에 기반한 이론가들은 상부구조와 하부구조의 영향 관계 틀에서 학교라는 기관을 바라보려 했다. 상부구조의 일종인 학교의 담론들은 하부구조인 경제적 생산관계에 의해 직접, 간접적으로 결정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즉 교육이론과 실천에서 국가 또는 정치경제의 일차성과 결정적 성격을 강조함으로써, 재생산적 접근은 학교교육에 대한 자유주의적 관점뿐만 아니라 보수주의적 관점이 갖고 있는 중립성과, 사회이동의 역할 이면에 놓여 있는 이데올로기적 전제와 가정을 밝혀 내도록 하는데 의미 있는 역할을 했다. 학교가 일정한 사회관계를 반영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학교라는 기관이 가지는 영향력에 대해서는 상당부분 부각된 셈이다. 이러한 재생산 이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그 하나는 사회재생산이론이며 두 번째는 문화재생산이론이다.


1) 사회재생산 이론
사회재생산이론은, 학교가 자본주의 생산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사회 구성체를 재생산함에 있어서 주된 역할을 담당한다는 개념을 그 핵심적인 주제로 한다.  

① Althusser
상부구조가 하부구조에 의해 결정된다는 마르크스주의의 오랜 명제에 대해 나름대로의 비판점을 제공한 것이 바로 이 Althusser이다. 그는 "상부구조의 상대적 자율성"이라는 말을 하면서 기존의 생산체계와 권력기관의 유지가 단순히 물리력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 측면 즉, 강제력의 사용과 이데올로기의 사용에 의존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의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국가기구도 두 가지 종류로 구분된다. 즉 강제력에 의해 통치되는 군대, 경찰, 감옥과 같은 "억압적 국가기구"와 합의를 통해 통치되고 있는 학교, 가정, 법적 구조, 대중 매체와 같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 바로 이것이 그의 이론을 구성하는 주된 두 개의 중심축이다. 따라서 학교의 의미는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라는 맥락 안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학교는 경제질서의 단순한 반영이라는 마르크스주의적 학교교육 이론이 물러나고, 학교는 경제적 토대와 특정한 관계로 존재하는 그러나 동시에 그들 자신의 특정한 한계와 실천을 갖고 있는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제도"가 되는 것이다. 
그의 이론에서 한 가지 특이할 만한 것은 이 이데올로기의 작용에 관해서다. 우리는 흔히 이데올로기라고 하면 의식적으로 구성되는 신념체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Althusser는 그런 주장에 대해 반기를 들었다. 그는 이데올로기라는 것이 무의식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데올로기는 실로 표출체계이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 표출체계들은 "의식"과는 관계가 없으며 보통 상상이며 종종 개념들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것은 "의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대다수 사람들에게 부과되는 구조로서이다. 그들은 지각·수용·경험된 문화적 대상물들이며 그것들을 벗어나려는 과정에서 인간에게 기능적으로 작용한다.


번역문이라서 그런지 약간의 어색한 표현이 있기는 하지만 대략의 의미를 짐작해볼 수는 있다. 그가 지금 무어라고 말하고 있는가? 그는 이데올로기라는 것이 인간을 무의식의 차원에서 구조로서 얽어매고 있는 존재라고 말한다. 여기서 그에게 구조주의자라는 표현이 주어진 이유를 짐작해볼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학교에 적용된다고 생각해보자. 학생들은 지배 이데올로기의 영향력 하에서 의식을 형성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지배 이데올로기는 수동적으로 동의하게 하지도 않는다. 단지 그것은 학생들의 무의식을 구성하는 의미와 관념의 표출체계로서만 작용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학교 현장이 너무나 무서운 곳이 되고 만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아니 아예 모른 채로 지배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어 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무언가 그의 이론에 문제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너무나 인간을 수동적으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다가 그의 이론이 지배 이데올로기에 노예들이 벌이는 지배체제 전복 운동을 설명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이르게 되면 그의 이론에서 뭔가 부족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2) Bowles와 Gintis
Bowles와 Gintis 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학교교육의 역할에 대한 Althusser의 기본개념을 공유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의 과도한 비중 대신에 대응원리(correspondence principle)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사회에서의 관계와 학교의 관계가 서로 대응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 그들의 중심생각이다. 즉 교육에서의 사회관계도 위계적인 노동분업의 형태와 다를 바 없다고 주장한다. 특히 교육에서의 이러한 구조적인 관계는 단순히 나중에 일하게 될 작업장에서의 규율에만 익숙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작업장에서 필요한 사회적 정체감, 자기 이미지, 인간의 태도 유형들까지 형성시킨다는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이들의 이론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바로 이점인데 그들은 특정한 인성유형을 창출해내는 학교의 역할에 초점을 맞춤으로서 비인지(非認知)적 지배영역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Althusser와 마찬가지로 지배가 어떤 식으로 정교하게 이루어지는 지에 대한 언급만 있을 뿐 저항에 대한 어떠한 단초도 제시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들에 대한 문제제기로 남아 있다.


2) 문화재생산이론
문화재생산이론을 사회재생산이론과 구별하는 이유는 재생산의 대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회재생산이론의 경우 경제적, 물질적 관계를 재생산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비해 이 문화재생산이론가들은 경제적, 물질적 관계가 아니라 "문화"라는 대상의 재생산이 교육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살펴보고자 했다. 즉 학교가 갖는 문화국면의 구조와 전수의 기초가 되는 원리들에 대한 분석, 또는 학교문화가 어떻게 생성되고 선정되며 정당화되는가에 관한 질문에 대한 대답에 그들 연구가 집중되고 있다. 이중에서 Bourdieu와 Bernstein의 연구를 중심으로 살펴볼 수 있다.


① Bourdieu와 그의 동료들
Bourdieu와 그의 동료 Passeron은 학교를 사회의 단순한 반영으로 보는 환원주의적 설명을 거부한다. 학교는 보다 강력한 경제적, 정치적 제도들에 의해 간접적으로 영향받는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제도라고 주장한다. 얼핏 보면 위의 논의들과의 차이를 구별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에게 특별한 것은 학교가 경제적 제도의 단순한 반영이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상징적 제도 안에 포함되는 제도라고 보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중요한 개념 중에서"문화자본"이라는 것이 있다. 그런데 이 단어를 자세히 살펴보면 지금까지와는 무언가 조금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자본이라는 것이 경제적 관계뿐만 아니라 "문화"라는 관계에서도 창출될 수 있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이론에 의하게 되면 학교라는 곳은 이러한 문화자본들, 즉 상징재를 학생들에게 불평등하게 분배하는 성격을 지니게 된다. 문화자본이라는 것은 그들 가정의 계급적 배경에 의해 상속받는 상이한 언어적·문화적 능력체계이다. 각각의 학생들이 그들의 가정으로부터 상속받은 문화자본들, 혹은 상징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는 다양한 것이 있을 수 있다. 단적으로 말해서 "옷을 얼마나 잘입는가"도 하나의 문화자본이 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Bourdieu는 학교와 가정을 연결했다는 공로가 있다. 다음 인용하는 부분은 언어라는 상징재가 학교에서 어떻게 분배되는가에 대해서이다.


사회언어학의 법칙 가운데 하나는, 특정한 상황에서 사용되는 언어가 내재적 언어학이 생각하듯이 촘스키적 의미의 발화자의 언어 능력(competence)뿐만 아니라 내가 언어 시장이라고 명명하는 것에도 종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내가 제안한 모델에 의하면, 우리가 생산하는 담론은 발화자의 언어 능력과 그 담론이 유통되는 시장의 '결과'이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말하기는 단순히 발화 능력을 향상시키는 게 아니다. 교양 있는 자들을 위한 말하기 교육은 하류 계층 학생들에게는 결정적으로 불리할 것이 뻔하다. 이렇게 되면 "언어"라는 상징재는 학교 내에서 불평등한 방식으로 분배되고 있는 것이 된다. 이처럼 Bourdieu는 경제적 생산 관계뿐만 아니라 문화적 생산 관계에까지 그 재생산이론의 영역을 넓히고 있다. 또한 Bourdieu는 이 문화적 생산 관계들, 즉 사고의 구성틀에 새겨져 있는 계급에 기초된 기호·지식·행동의 사회적 문법을 아비투스(habitus)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Bourdieu에게도 재생산 이론 전반에 걸친 문제점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문화자본이나 아비투스라는 특수한 개념으로 지배 계급의 종속을 좀 더 세밀하게 포착하고 있을 뿐 그 저항성에 대해서는 어떤 언급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학교에서 과연 일방적인 문화자본 전달만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그렇지는 않다. 학생들이 스스로 형성시켜 가는 대항문화자본들의 존재는 어떻게 볼 것인가? 그리고 학생들과 교사들의 문화가 충돌할 때 생기는 문제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요즘 학생들은 학교가 요구하는 문화자본과는 다른 척도들을 가지고 있다. 교양 있는 말 따위는 그들에게 먹혀들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그들만이 가지는 다른 문화자본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학교는 여러 수준의 문화자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충돌이 이루어지는 장소라고 볼 수 있게 된다. 학교가 일방적인 문화자본 재분배 공간은 아닌 것이다. 학교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들이 밝혀낸 바에 의하면 학교 내의 특권적인 입장과 교육혜택은 지역사회의 오랜 투쟁에서 얻어진 결과물이다.
그뿐만 아니라 문화자본 외에도 물적 조건이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음을 Bourdieu는 무시하고 있는 듯하다. 문화자본의 영향력이 상당한 것만은 사실이지만 실제적으로 경제적 조건이 미치는 영향력도 거의 결정적이라고 할만큼 중요하다. 그럼에도 그의 이론에는 이 점이 간과되고 있는 듯 하다.


② Basil Bernstein
Bernstein의 경우 교육은 경험을 구성하는 주된 힘이라고 설명하면서 교육과정, 교수법, 그리고 평가가 어떻게 메시지 체계를 구성하는 지를 설명하려한다. 그는 교육의 구조가 정체성과 경험을 어떻게 형성하는가에 관한 질문을 탐색함으로써, 학교는 교육코드를 구체화한다고 주장하게 된다. 코드라는 것은 권위와 권력이 학교경험의 모든 국면에서 매개되는 방식을 뜻하며, 이것은 다시 집합코드(collective code)와 통합코드(integrated code)로 나뉜다. 이 둘은 교사와 학생들의 교수관계에서 전수하고 전달받는 지식의 선정·조직·속도·시간조절에 대해 통제력을 갖는 정도에 의해 분류한 것이다. 집합코드는 교과의 엄격한 경계와 교사-학생 간의 강한 위계적인 관계에 의해 특성화되는 전통적인 교육과정 형태를 취하며, 통합코드는 교과목과 범주들이 보다 통합되고 교사-학생 간의 권위관계는 보다 협상적이며 변화에 대해 개방적인 교육과정을 표출한다. 물론 통합코드가 진보적인 교육학의 가능성을 더 많이 내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두 가지 코드 모두 사회재생산 양식과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서 Bernstein은 계급관계를 재생산하는 것으로서 학교와 생산양식을 연결하는 구조적 특성을 개념화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그의 연구는 사회통제의 원리들이 학교와 다른 사회제도들에 깊이 박혀 있는 메시지들을 형성하는 구조적 장치에 어떻게 부호화되어 있는가를 확인하는 데 특히 유용하다.


3) 재생산이론을 넘어서
재생산이론의 전반적인 문제로 지적되는 것은 바로 저항의 문제다. 심하게 말해서 재생산이론은 학교 내에서 벌어지는 생산관계 재생산에 대해 좀 더 정치(精緻)한 해석을 덧붙여 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다. 따라서 그 재생산의 고리가 치밀하면 치밀할수록 그 재생산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모습으로 비춰지게 된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들이 그 이후에 많이 이루어 졌다. 특히 신마르크스주의의 사회이론과 민속지 연구와 같은 실증적 접근을 통합하는 시도들이 대표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Willis와 같은 사람들은 학교의 내적 작용에 대해 단지 서술적인 설명만을 제공하는 온순한 방법을 따르지 않는다. 대신에 이들의 관점은 지배사회에 깊이 박혀 있는 결정적인 사회경제 구조들이 일상적 삶의 수준에서 학생들의 대항적인 삶의 경험을 형성할 때 계급과 문화라는 매개체를 통해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분석하려고 노력한다. 즉 교육과정을 지배관계에 기여하는 것으로서 뿐만 아니라 해방적 가능성에 관련된 관심들도 내포하는 복합적인 논의양식으로 분석하였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해방적 관심에 우선적인 지위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3. 실천의 이론

 

이론은 이론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이론이 현실과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그 이론의 가치는 결정된다. 그런데 교육에 대한 진보적인 이론들의 전개를 살펴보다 보면 그 방향이 현실 쪽으로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현실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한다.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의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들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현실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그들은 실천적인 교육사회학을 위한 진보적인 궤적을 그리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이런 탐색의 저변에는 그들 공통이 가진 인식이 있다. 그것은 이 교육현실이 단순히 합의에 의해 형성되어 있지는 않다는 믿음이다. 교육현장은 언제나 여러 계층의 갈등이 존재하며 그 갈등에 대한 대결의식을 견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입장은 우리의 무반성적인 인식에 대해 따끔한 일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전교조가 탄생하고 난 이후 교육현장에 불어닥친 진보적인 흐름은 면면히 이어져 현재에 이르러서는 현장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 우리의 교육 현실을 진보적이라고 말하기에는 여전히 너무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다. 다른 여러 가지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학교 안, 즉 교사들 간의, 혹은 교사와 학생간의 권위적인 관계는 우리 교육의 문제를 대변하는 아주 단적인 예이다. 이런 권위적인 관계는 우리 사회 전반의 권위성을 반영하는 것이면서도 그 권위성을 재생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권위적인 사회 구조를 바꾸어 나가기 위한 방법은 무엇일까? 물론 교육사회학만의 역할은 아니겠지만 이 재생산의 사슬을 끊을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심각한 노력이 필요함을 물론이다.

 


참고문헌 :
헨리 지루, 『교육이론과 저항』, 성원사 (1990)
피에르 부르디외「말하기의 의미」, 『혼돈을 일으키는 과학』, 솔 (1994)
루이 알튀세르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아미엥에서의 주장』, 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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씁쓸한 만남

요즘 경기가 워낙 좋지 않아서인지 군대에 남아있으려고 하는 사람이 많다. 옛날에는 억지로 말뚝을 박게 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요새는 나가라고 등을 떠밀었으면 떠밀었지 제대 말년의 장교나 부사관들을 남겨두려고 애쓰는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다. 제대가 가까워 오면 사람들은 너도 나도 복무기한을 연장하려고 신청하며, 보다 더 길게 군 생활을 지속하기 위하여 장기복무를 신청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성공률은 날이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

장기복무하기가 어려워졌다는 현상과 더불어 불경기로 인해 찾아온 또 한 가지 현상은 군에 입대하는 여성들의 숫자도 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군대의 민주화와 함께 남녀평등 바람이 군에도 불어와 차츰 군 내 여군의 숫자를 늘이는 추세도 추세지만, 여러 가지로 취업이 힘든 여성들은 장기적으로 일자리를 보장해줄 수 있는 군으로 눈을 돌리는것 같다. 사실 군인 또한 공무원이니 고용의 안정성 측면으로 따지면다를 점은 하나도 없다.

내가 맡고 있는 소대에도 여자 후보생이 몇 명 있다. 나는 그들을 담당하고 있다는 이유로 이런 저런 신상명세서를 들추어볼 권리를 가지고 있다.(물론 남자 후보생들의 신상명세서도 마찬가지의 운명을 겪는다) 나도 인간인지라 남들의 과거를 살펴보는 일에 흥미가 없을 리 없다. 흥미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소대원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으라는 유,무언의 압력이 들어오기 때문에 좋든 싫든 난 그네들에 대한 신상명세서 및 여러 가지 자료들을 뒤적거려야만 한다. 이번 차수에도 어김없이 난 신상명세서를 펼쳐보게 되었다. 그렇게 신상을 살피다 보면 가끔 생각지도 못한 인연들을 만나게 되는 수가 있다. 중학교 후배라거나, 혹은 내가 돈을 벌기 위해 나가던 학원의 학생을 발견하게 될 때, 난 아무튼 세상이 별로 넓지 않다는 삶의 관용구들을 떠올릴 수 있게 된다. 이번에도 또한 마찬가지 가냘픈 삶의 인연을 하나 발견했다. 근데 이번 인연은 약간은 씁쓸한 기분이 들게 하는 인연이었다.

 

난 기본적으로 교사가 되고 싶다는 희망을 마음 한켠에 가지고 사는 사람이다. 무작정 교사가 되는 것만이 내 희망은 아니다. 물론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다. 좋은 선생님이라고 하면 너무 막연하니까, 일종의 역할 모델을 하나 설정하고 살아야 한다. 그래서 나에게도 그런 역할 모델이 되는 좋은 선생님들이 몇 분 있었다. 그 중에서도 광동고등학교에 있는 송승훈 선생님, 즉 승훈이 형(^^)은 대학시절부터 쭉 비교적 가까이에서 지켜본 좋은 선생님이다. 대학 다닐 때는 선,후배 관계로 학회를 통해 이것저것 많이 배우며 살았고, 지금은 교직에 진출해서 승훈이 형이 펼친 다양한 활동들을 직,간접적으로 접하면서 나중에 나도 이러저러한 활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많은 도움을 얻고 있다. 학생들에게 책을 읽히고, 글을 쓰게 만들고, 그것을 통해 삶을 가꾸게 하는 형의 노력들은, 책을 좋아만 하고 그것을 어떻게 쓸 것인지에 대해 무지한 나에게 깨달음을 줄 때가 많다. 언젠가 학교 근처에 있는 형의 집에 놀러가서 그때 학생들이 쓴 글들을 읽어보고 감탄한 적도 있었다. 형이 끌어낸 학생들 마음 속의 숨은 말들이 날 놀라게 만들었다.  

 

이번에 여자 후보생 신상명세서를 뒤지다 보니 그 승훈이 형이 있던 광동고등학교 졸업생이 한 명 있음을 발견했다. 난 송승훈 선생님을 아느냐고 물었다.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한 40명 쯤 되는 인원의 모임에서는 어쨌거나 이런 식의 인연을 있기 마련이구나라고 난 생각하고 지나쳤다. 그런데 기분이 영 찜찜했다. 승훈이 형이 보다 넓게 사고하고, 모든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고 비판하며, 그것을 글로 표현하는 방법들을 가르쳤을텐데, 난 그와 반대로 모든 사고를 정지시키고, 복종하게 하며, 로봇처럼 움직이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 내 기분을 그렇게 다운시킨 것이다. 내가 이런 교육방식을 선호한다면 모르겠지만, 나 또한 누구보다도 자유롭게 사고하고, 비판적으로 인식하는 능력을 길러주는 교사가 되고 싶기에 난 더욱 우울해졌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인연이 있겠지만 이런 식의 인연을 악연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물론 군대에서의 훈련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믿는다. 그리고 지금 내 모습을 보고, 좋아하고 따르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지금 연기하고 있는 역할로 만나고 있는 인연들은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아닌 듯 싶다. 그래서 이와 같은 인연은 나를 더욱 씁쓸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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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린, <염소를 모는 여자>

서른 살 무렵의 여자는 어떨까? 나는 아직 서른 살이 되지 못했고, 그리고 여자가 될 가능성은 더더욱 없기에 어쩌면 도저히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 될 듯도 싶다. 하지만 99년 말 2000년 초 쯤에 내 머릿 속을 온통 사로잡고 있던 질문은 황당하게도 위의 그 질문이었다.

뺀찌의 영향도 컸겠지만, 그 당시 읽고 있던 전경린이나 하성란과 같은 여성 작가들의 소설들은 여자가 살아간다는 것, 특히 서른 살 쯤 된 여자들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개인적인 경험이 오버랩되면서 그 질문은 부정적인 대답으로 되돌아 왔다. 탈출구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여자들은 결국 서른 즈음이 되면 일상의 틀 안으로 들어오고야 만다는 것.

여기서 말하는 서른이 정말 나이 서른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또 여자만 그런 것은 아닐테고... 흔히 말하는 사회로 들어가는 단계를 말할 거다. 철든다는 것, 그리고 세속적이 된다는 것, 그런거겠지.

하지만 전경린은 <염소를 모는 여자>에서 서른이 되어버린, 아이도 하나 있고, 남편도 있고, 그럴 듯한 집도 있고, 남편과의 불화도 있고, 우울증도 있고, 자기처럼 꿈을 잃어버린 친구들도 있는 그런 여자를 그려낸다. 그리고 그 여자가 어떻게 환한 감옥 속에서 환하게 갇혀 있는지를 말한다.

전경린은 말한다. 남편과 아이들이 떠난 오전의 아파트 단지를 생각해보라고. 각 방마다 여자들이 하나씩 있고, 그녀들은 조금씩 우울하고 거의 비슷한 일을 하며, 돌아올 남편과 아이들은 기다리는 그 장소.

"조용한 한낮에 아파트에서, 칸칸이 벽만 나누어진 닭장 같은 다른 집들을 바라보면, 그 어떤 기이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보다도 더 어처구니없는 기분에 사로잡히게 돼. 칸칸마다 한 명씩 성숙한 여자들이 들어 있고, 남자를 위해 밥을 하고, 청소를 하고, 밤에 남자가 들어오면 섹스에 응해주고, 남자의 집에 제사를 지내러 가고"

그런데 전경린의 그 여자는 그런 일상을 뚫고 들어온 염소 남자에 의해 자신의 일상성을 자각한다. 무턱대고 염소를 맡긴 남자. 그리고 도시와 염소의 불균형 속에서 그 전까지 미처 깨닫지 못하던 자신의 삶의 메마름을 그 여자(역설적이게도 이름이 "미소"이다.)는 느낀다. 그리고 과감하게 탈출을 시도한다. 작품의 마지막은 떠나는 여자의 뒷 모습을 그려낸다.

전경린은 이처럼 떠나는 여자들의 모습을 그려낸다. 왜 그녀들이 떠날 수밖에 없음을 열정적인 어조로 밝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주기도 한다. 하지만 현실의 서른 살 여성들은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그리고 서른 살 남성은 또 어떨까?

그녀의 소설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언제까지 벼랑 끝에 배를 붙이고 심연을 내려다보고 있을 수는 없다. 나아가기 위해서는 끊긴 길 앞에서 두 눈을 감고, 두 귀도 닫고 자신의 본질을 향해 어느 순간 뛰어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뛰어내려본 사람은 알게 될 것이다. 있는 것과 없는 사이의 심연 속에, 현실보다, 현실의 현실보다도 더 강한 구름의 다리가 있다는 것을. 자신의 숲을 향해 가는 구름처럼 가벼운 구름의 다리"

나는 이렇게 두 눈을 감고 훌쩍 뛰어내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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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보고에 시달리다.

어제 당직을 섰다. 당직이 끝나면 당연히 보고를 하게 된다. 내 위로 있는 줄줄이 늘어선 상관들에게 그 전날 일어났던 상황들을 난 꼬치꼬치 보고해야 한다.

 

그들은 나에게 꼼꼼하게 되묻는다. "얘는 어디가 아프지? 그리고 어제 어떤 시설물을 어떻게 고친거야?" 내가 대답을 조금이라고 허술하게 한다치면 대번에 욕이 날아온다. 심지어 난 내가 근무하는 곳의 창문 개수까지도 세어가지고 들어간다.

 

난 오늘도 보고를 마치고 나오면서 생각한다. "왜 이런 일을 해야하지?" 도대체 궁금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아니 간 밤에 일어난 모든 일을 다 알아야 하나? 그냥 제발 내버려두면 안되나? 

 

혼자서 좀 곰곰히 생각해본다. 아마도 이건 상하관계로 구성된 조직의 특성일거라고.가장 위에 서 있는 한 사람의 시선 안에 그의 모든 조직이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그 조직은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과 자기가 전혀 관여하지 않은 일임에도 조직을 책임지고 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그 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깨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따위의 감정들로 엉켜진 끝없는 층층구조.

 

그러다 갑자기 무서워진다. 나도 이런 구조에 어느덧 익숙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모든 일을 내가 맡아서 직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고생만 직싸게 했었다. 이제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어느덧 시키는 것이 더욱 편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난 이제 내 아래에 있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에게 일을 떠맡기고

감시하는데 더 익숙해져 있다. 아니 어쩌면 더 정교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남들이 하지 않는 수많은 장부들을 만들어 떠 넘기고, 엑셀을 이용하여 그 결과들을 통합해서, 관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 또한 "관리"라는 이름의 허울 좋은 떠넘김에 맛을 들이고 말았다.

 

사람들이 모여 새로운 모임을 만들 때, 사람들은 그 전까지 익숙한 방식으로 모임을 구성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나에게 익숙한 방식은 바로 이러한 방식이 되고 말았다. 과거에 학회나 자발적 모임에서 겪었던 경험들은 차츰 사라지게 되었다. 이것은 군대를 겪은 한국 남성들의 비슷한 경험이라는 극단적인 일반화까지도 머릿 속에 떠오른다.

 

언젠가 에릭 홉스봄의 <극단의 시대>를 읽었을 때의 기억이 난다. 자본주의에 대항해서 새로운 사회를 만들려 했던 사람들이 도대체 왜 그 자본주의보다 어쩌면 더 억압스러운 사회를 만들어 버렸냐는 딜레마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었다. 그때 누군지 이름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당시 소련 사회를 만들었던 주역 중의 한 사람이 임종할 때 했던 말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는 그 당시 그것밖에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수 년에 걸친 전쟁끝에 새로운 사회를 만들 기회가 주어졌지만, 그들이 알고 있던 방식은 전시동원체제밖에 없었다고...

 

나 또한 그렇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이곳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만들 기회가 주어지더라도 결국엔 익숙한 비극적 방식대로 삶을 꾸릴 수밖에 없는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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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타니 겐지로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

어설픈 낭만주의는 감동보다는 짜증을 주기 마련이다.
세상은 완고한데, 그 완고함을 외면한 채 감동적인 타협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쉽게 말해서 유치하다.

하지만, 그런 유치함을 비웃을 수만은 없다.
어쩌면 우리는 그런 유치함을 희망이라고 믿고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세상에 단단히 뿌리박은 희망과 유치한 희망은 분명히 그 근거가 다르다.
단단한 희망은 단순히 예외적이고 우연적인 가능성에 의지하지 않으며 세상을 인과적으로 혹은 계획적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언제 세상이 내 맘대로 되기만 하던가?
그렇지 않기에 우리는 가끔씩 어떤 특별한 행운이 찾아와 주길 기대한다.
이러한 기대는 어젯밤 꿈 땜에 산 복권이 당첨되기를 바라는 것처럼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소박한 기대이다.


그래서 그런지 인과적인 판단으로 쉽사리 해결될 수 없는 갈등들이 어떤 우연한 계기로 해결되는 소설이나 영화들을 보면
어제 산 복권에 당첨된 듯한 기분이 든다.

부끄럽지만 여기서 한 가지 고백하는 것은 내가 본 영화 중에서 가장 감동받았던 영화는 "귀여운 여인"이다.
천한 계급의 창녀가(물론 마음만은 순수하지...) 부유한 남자를 만나 그 남자를 변화시키고, 자기 자신도 변화되면서
결국 행복한 신분상승을 이루는 꿈 같은 이야기에 나는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완고한 계급적 차이를 희석시키는 실현 불가능한 내용에 대한 거부감이 내 머릿 속에 단단히 자리잡고 있었지만
줄리아 로버츠의 귀여운 웃음을 자아내는 행복한 결말은 언제 보아도 몸서리쳐지게 감동적인 것이다.

아직도 이런 식의 낭만적인 감정에 기대어 사는 내 모습이 한심해보일 따름이지만 가끔은 이런 기대를 품고 사는 것도
가끔 복권을 사는 것처럼 나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긴 한다.
하지만 분명히 경계하는 것은 이런 우연적인 계기들에 인생을 맡길 수는 없다는 점이다.


그런데 교육을 소재로 한 영화나 만화 혹은 소설들이 쉽게 빠지고 마는 함정이 바로 위에서 내가 지적한 곳이다.
교육이 교사와 학생간의 순간적인 감정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은 교육을 일종의 감동유발의 수단으로 이용한다.

타락한 학생들을 찾아다니며, 학생의 삶으로 뛰어들어서 그 학생을 감화시키고 결국에는 올바른 인간으로 개조시킨다는
틀에 박힌 공식들은 이제는 너무 상투적이어서 더이상 감동을 주지 못한다.
학생은 계속해서 변화하지 않은 틀 속에서 신음하는데 한 학생을 그 속에서 구해내었다고 모든 갈등이 해결된다고 볼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마치 막노동꾼도 복권에 당첨될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우리 사회의 계급적 차이는 없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런 점에서 꼭 한 번 읽어보기를 권하는 책이 바로 제목으로 달아놓은
하야타니 겐지로의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이다.

이 책은 일단 감동적이다. 이 책을 읽고 눈시울이 뜨끈해지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인간도 아니라고 말해도 좋다.
뭐 눈물은 아닐지 몰라도, 뭔가 가슴 찌릿한 감동을 분명히 받을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도 위에서 말한 어설픈 감동처럼 개별적인 구원에 기대고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이 소설은 감동을 던져줌과 동시에 그 소설이 바탕하고 있는 현실적 토대에 대한 생각을 환기시킨다.
즉 감동을 줌과 동시에 또한 감동은 쉽게 찾아오지 않음을 말해주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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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야기

마당 깊은 집」이라는 드라마를 기억할는지 모르겠다. 내가 어렸을 적에 봤으니까 꽤 오래된 드라마이다. 그 드라마는 전쟁이 끝난 후에 아버지 없이 살아가는 한 가족의 삶을 비교적 담담하게 보여주었다. 빡빡 깍은 머리 위로 하얀 가루로 된 DDT(나도 잘 모르지만, 그 시대를 겪으신 아버지 말로는 무슨 살충제라더라. 몸에 무지 안 좋은...)를 마구 뿌리는 어머니의 모습과 전쟁으로 인해 팔 하나를 잃은 상이용사의 비참한 절규가 인상적으로 남아 있다. 이 드라마는 전쟁으로 인한 비참한 현실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동시에 "마당이 푹 꺼진" 주인집 뒷채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이들의 훈훈한 인정미를 보여주고 있었기에 보는 이들의 가슴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전쟁 이후의 힘든 삶을 가족과 함께 견디어 내는 감동적인 이야기는 「마당 깊은 집」외에도 상당히 많은 것 같다. 장미희가 나와서 "똑"을 팔던「육 남매」와 같은 TV 드라마뿐만 아니라, 「오발탄」이나 「잉여인간」과 같은 수많은 소설들에서 그런 이야기들은 쉽게 접할 수 있고,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런 이야기들이 드라마, 소설, 영화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변화하면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한국 사회가 겪은 전쟁 체험이 비교적 보편적이었음을 증명하는 게 아닐까한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 한국 사회가 국가 혹은 정부라는 이름으로 과연 개인들의 행복을 보장해줄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았음은 자명하다. 국가는 전쟁으로 인해 경제적인 파멸상태로 떨어져 버렸으며, 이데올로기라는 명목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거대한 억압으로서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 속에서 개인은 어떻게 살아남아야 했던가? 개개인은 살아남기 위한 최소한의 우군을 찾아야 했으며, 그 최소한의 단위가 바로 "가족"이었다. 「마당 깊은 집」에서 볼 수 있듯이, 당장 내일의 먹을거리를 찾아야 했으며, 등이라도 붙일 수 있는 조그만 공간이라도 마련해야했으며, 어린 자식들을 이 험한 세상 속에서 키워내야 할 때, 어느 누구도 그들을 돌보아 주지 않았기에 가족들은 똘똘 뭉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 아버지들은 가족들 외에는 그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된다는 "정글의 법칙"을 아이들에게 가르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을 한국 사회의 "가족주의"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이 "가족주의"는 전쟁이라는 비참한 상황을 통과한 한국사회의 병리적 현상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것 같다. 그러므로 "따뜻하고 평화로운 가족"의 실상은 생존의 법칙에서 힘겹게 살아남은 배타적인 공동체일 뿐이다.
이런 식의 "가족주의"는 현재에도 여전히 힘을 발휘한다. "정글의 법칙"을 몸으로 깨우치며 살아온 세대들이 지금 이 시대에는 또 다시 자식들의 부모가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허황된 짓임을 아들, 딸들에게 아직도 주입하고 있으며, 단지 "우리"를 지켜줄 수 있는 것은 "우리"일 뿐임을 명심하도록 요구한다. 이것은 한국의 사회보장제도가 여전히 미미한 수준임을 보여줌과 동시에, 앞으로의 사회복지 정책의 개선을 가로막는 근원적인 의식으로 자리잡는다. 사람들은 "그런 세금 낸다고 언제 내가 혜택을 받냐고?"라고 항상 되묻는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한국의 "가족주의" 속에 근본적인 이기주의가 뿌리깊게 박혀있음에도 매체들은 "가족"이라는 집단이 "인정과 사랑이 넘치는 곳"이라는 환상을 계속 심는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매체들의 이러한 이데올로기 공세는 사회적 안전망을 불신하고, 가족의 이름으로서만 개인이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계속해서 생산한다. 매체는 끊임없이 가족의 신화를 반복하고, 인정세태의 문제를 끊임없이 지적한다. 전쟁 체험을 다룬 이야기들은 특징을 하나 들어보자면, 국가는 항상 위협으로서 등장하는 대신에, 불행한 가족을 돕는 인정 많은 이웃이 하나쯤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공식이 성립할 수 있는 것도 달리 보면 개인의 시선을 사회적인 것으로 확대시키는 것을 막고, 행복의 범위를 가족과 아는 사람의 수준으로 한정시키는 역할을 할 뿐이다. 아는 사람의 수준? 자 여기서 한국사회의 뿌리깊은 문제가 걸려 나옴을 알 수 있다. 그들을 지켜줄 수 있는 "가족"은 더욱더 확대되어야했는데, 그 확대된 가족 혹은 그 이웃의 이름들이 바로 "혈연"에서 "학연", "지연"이라는 이름이 된다. 요컨대 "학연", "지연"은 폐쇄된 공동체로서 "가족주의"의 다른 이름이다. 다시 한 번 지적하자면 현재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거대한 연줄의 연쇄고리들은 참혹한 전쟁체험에서 비롯된 가족주의를 끊임없이 확대해온 결과이다.

이것을 어찌해야 할꼬? 이런 사고방식들은 일종의 "집단적 무의식"처럼 한국사회에 팽배해있는 듯 하다. 무의식을 치료할 수 있는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아!「마당 깊은 집」을 볼 때 아버지의 표정이 생각난다. 아버지 없는 가족이 힘든 삶을 겨우겨우 지탱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는 현재의 삶이 얼마나 혜택을 받은 것인지를 나에게 자꾸자꾸 말씀하셨다. 저렇게 살고 싶지 않으면, 똑바로 살아라고 말하시던 아버지를 생각해보면 갑갑해진다. 똑바로 사는게 가족을 위해 사는 것일 뿐임을 알고 있지만, 그것이 똑바른 길이라고 믿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나는 "가족주의"의 뿌리를 확인한다.
(2003.03.31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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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을 독서실로 착각하는 당신에게

도서관을 독서실로 착각하는 당신에게


도서관에서 여러분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는가? 잘라 말해서 단 두 가지 일만을 하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한 가지는 시험공부(여기서 시험공부는 고시준비, 취직준비를 모두 포함한다)이고, 또 한 가지는 레포트 쓸 때 베낄 책 찾기. 굳어버린 당신들의 머리는 이런 일들 외에 도서관의 다른 용도를 상상하기 어렵다. 아~~~ 좀 더 생각해보면 몇 가지 더 있기는 하다. 중도관 일층에서 복사를 할 때 가끔 필요하고(그건 복사집에서도 할 수 있다), 돈 찾으러 갈때도 가끔 필요하며, 스포츠 신문을 볼 때도 가끔 필요하다.

2백만권이라는 장서를 갖추고 있는 고대 도서관이 이런 역할만을 하고 있다면 그건 너무나 한심스러운 일이 아닌가? 도서관은 본래 문화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 다양한 문화를 향유하고,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공간이 도서관인 것이다. 2백만권이나 되는 장서에 담겨있는 지식들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많이있다. 2만 고대생이 도서관을 사설 독서실로 만들고 있을 때, 학교 밖의 누군가는 그 지식을 갈구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고대생에게 중도관은 여전히 시험공부를 위한 독서실이다.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기간만 되면 도서관의 열람실은 자리가 없어서 난리가 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않는가. 왜 거기서만 공부해야 하는가? 차라리 강의실을 열어달라고 하라!!! 거기서 공부하면 엉덩이에 가시가 돋히는가? 그리고 그냥 독서실도 아니라, 돈 내고 들어오는 사설 독서실이다. 내 돈 내고 독서실에 들어와 있으니, 돈 안낸 다른 사람들은 절대로 들어오지 말라고 중도관 정문에는 출입통제기까지 설치되어 있고, 밖에서 누가 조금만 떠들면 시끄럽다고 난리다.

그들은 아침만 되면 어김없이 일찍 일어나 도서관에 자리를 맡는다. 그리고는 거기서 열심히 공부를 한다. 물론 그 공부는 CPA준비나 고시 준비, 혹은 토익, 토플 책 등 각자 자기가 가져온 책을 놓고, 밑줄 쳐가며 하는 공부이다. 그런데 당신이 앉아있는 곳의 이름을 보라. 그곳은 "열람실"이다. 열람실은 도서관에서 빌린 책들을 열람하는 곳이다. 하지만 당신이 하고 있는 행동은 열람실이 아니라, 독서실에서 할 법한 행동이다.

이에 우리는 '도서관의 제 모습 찾기'에 나서고자 한다. 앞서 대자보와 소자보를 통해 도서관을 지역주민에게 개방하라고 요구했던 것도 '도서관 제 모습 찾기'라는 커다란 맥락 속에 놓여있다. 이번에 도서관이 전면 개가제로 바뀐다는 결정 또한 100% 지지한다. 도서관이 전면 개가제로 바뀌어 자기 공부하는데 방해된다고 불평하지말라!!! 그게 바로 도서관의 참모습이다. 정말 독서실이 필요하다면 각 단대마다 말 그대로 독서실을 만들어 달라고 하라!!! 문대에 있는 문도관(이걸 도서관으로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처럼 말이다.

(2003.03.31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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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을 지키면 복을 준다고? 누가?

좀 오래된 영화이기는 하지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영화 중에 하나는 <귀여운 여인>이다. 그 영화를 보고 있으면, 행운이라고 하나도 없을 것 같은 세상에서 복권이나 하나 당첨된 듯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왕자건 공주건 누군가가 다가와 나에게 행복을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는 사람들의 기분을 잠시나마 즐겁게 해준다. 그런데 같은 이유로 나는 그 영화를 좋아하는 것만큼이나 또 싫어한다. 모든 사람에게 복권에 당첨될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세상에 가난한 사람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현실의 완강함을 에둘러서 무마시켜 버리는 영화의 술책이 얄밉다.
"신동엽의 러브하우스"를 볼 때에도 <귀여운 여인>을 볼 때와 비슷한 느낌이 든다.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뜻밖의 행운에 감동하는 모습을 볼 때, 나의 눈시울은 뜨끈해진다. '아! 착하게 살면 복을 받는구나...'라는 뒤늦은 깨달음도 함께한다. 그런데 말이다. 눈시울이 뜨끈해지는 것까지는 좋지만, 보고 난 뒤에 찝찝한 맛이 남는 것도 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착한 사람들이 복을 받는다'는 만고불변의 진리에 무슨 찝찝함이 있는가 하고 자문해본다. 내가 나쁜 놈이라서 그런가?
일단은 내가 떨떠름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떤 사람들이 "러브하우스"의 혜택을 얻느냐를 생각해보기 때문이다. 가만히 살펴보면 선택되는 집은 대부분의 경우 아주 집안 식구가 많거나, 장애우가 있거나 해서 정상적인 가정을 이루기가 힘든 상황을 가진 가족이 대부분이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가족의 따뜻한 사랑으로 힘들지만 행복하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신동엽이 찾아가 복을 주게 된다. 물론 집의 구조가 형편없는 곳이 선택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전 집의 열악한 상황은 바뀐 집의 삐까뻔쩍함에 대비되어 그들에게 주어진 행복을 더욱 빛나게 하는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건 말이다. 한 마디로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가족을 지키면 복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어도 가족을 지키기만 하면 복을 줄까? 과연 누가 줄까? "러브하우스"에 따르면 이 땅 수백만의 가족들 중에 이렇게 복을 받는 이들은 일주일에 하나다. 가족으로 인해 벌어지는 모든 문제들은 일주일에 한 번 보여지는 그들의 행복한 웃음 속으로 묻혀버리고 만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을 더 짜증나게 하는 것이 있다. 이른바 소년 소녀 가장들이 주로 많이 나오는 프로그램, 즉 불행한 사람들의 삶을 다큐멘터리 식으로 엮은 프로그램과 이 "러브하우스"를 비교해볼 때다.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볼 때 시청자들은 불행한 그들을 동정한다. 하지만 그 속에는 '휴∼ 나보다 더 못한 사람들도 있구만' 하는 안도의 한숨이 배어있음을 무시할 수 없다. 이건 또 무슨 얘긴가? "러브하우스"가 보여주는 행복한 웃음은 가족을 유지한 자들에 대한 행복한 보상으로, 소년, 소녀 가장들의 불행은 결여된 가족의 비극성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서로서로 잘 엮어져 있다.
내 생각이 이러하니 신동엽이 곱게 보일리 없다. 대마초 사건도 있고 해서 그런지 모른다. 대마초를 피웠으면 피웠지, 왜 이런 프로그램으로 이미지 쇄신을 하려하는지 짜증스럽기도 하다. 얼마 전에 구속된 모 대학 미대교수처럼 당당히 대마초할 권리를 달라고 하면 안되나? 내가 신동엽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거다. "니가 무슨 권리로 행복을 주니? 응?"

(2003.03.31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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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구에 대하여

얼마 전 여자 친구로부터 이문구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전해듯고 약간 쓸쓸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대학을 막 들어왔을 때 이문구의 <관촌수필>을 접하고 문학이 사람을 이렇게 감동시킬 수도 있구나라고 생각했었다. 의뭉스러운 사투리로 자기 주변의 사람들 이야기를 풀어내는 그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삭막한 공업도시에서 살아온 나에게 입담 좋은 아저씨 한 분이 생긴 것 같아 마음이 푸근해지곤 했었다. 그 이후로 나는 이문구를 언제라도 찾아뵐 수 있는 시골에 계신 아저씨라고 생각했었다. 그렇기에 이문구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는 소식은 나에게 고향이 사라졌다는 느낌을 주었다.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에서 극적으로 나타나 있는 고향상실의 슬픔이 나에게도 간접 체험된 것이다.

물론 동인문학상을 둘러싸고 전개된 최근 그의 행적은 나에게 또 하나의 슬픔을 주긴 하였다. 하지만 나는 그에 대해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실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우리동네>나 <관촌수필>에서 농촌 문제에 대한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발견하기보다는 주변 사람들에 대한 푸근한 관심을 발견하였고, 그것을 그의 세계관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단지 그를 시골에 계신 맘씨좋은 아저씨 정도로 판단하고 있었을 뿐이다. 맘씨 좋다는 것과 정치적으로 올바른 판단을 내린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가 아닐까. 그래서 나는 그의 이름 앞에 붙은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이라는 명칭은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그에게는 전근대적 사회가 가지고 있었던 특유의 단어들, 즉 "인심", "후덕", "의리" 등의 단어가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스승인 김동리를 끝까지 저버릴 수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와 같은 스승을 어찌 버릴 수 있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정치적 상황은 이런 사람들까지 저항세력으로 만들어 버렸던 것 같다. 하지만 그에게 이런 짐은 너무 무거운 것이 아니었을까? 문학하는 사람들은 현실을 바꾸는 실천이 본업이 아니다. 만약 행복하게도 문학하는 것과 실천하는 것이 일치할 수 있다면 그것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 두 가지가 배치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소설가는 소설쓰기로 돌아설 수밖에 없다.

이런 생각들을 하다보면 문학에 과도하게 사회적인 기대를 부여하는 시선들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느끼게 된다. 문학하는 사람들은 결국 문학에 대해서만 날카롭고, 명민하다. 그리고 문학적 실천에만 능동적인 경우가 많다. 문학은 이제 문학이라는 좁은 공간 속으로 숨어들고 있을 뿐이다. 이문구의 죽음을 보며 문학에 대한 사회적인 짐들은 이제 벗겨버려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문학은 이제 문학일 뿐이다.(2003.04.01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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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무교육지침서라...

내가 근무하는 곳은 군인을 만드는 곳이다.

빨간 모자가 땀에 절을 때까지 뛰어다니고,

그 빨간 모자가 땀에 절었다고 욕을 먹는 곳에서 난 매일매일 근무하고 있다.

군대갔다 온 사람들은 잘 알거다. 빨간 모자들이 어떤 인간들인지.

 

요즘 내가 주로 하고 있는 일은 "내무교육지침서"라는 책을 가르치는 일이다.

그 책을 난 농담삼아 "'감시와 처벌'의 부록"이라고 부른다.

그 책은 신체를 어떻게 규율해야하는가를 세세하게 잘 써놓은 책이다.

내무실에 들어와서부터 나갈때까지의 모든 행위를 센티미터까지 규정한 책.

그런 책을 매일 난 가르치고 있다. 시범까지 보여가면서...

 

거리를 자연스럽게 걷고 있을 때도 

내 팔은 앞으로 45도, 뒤로 15도 이상 뻗어지지 않는다.

 

그렇게 매일매일 내 몸은 규율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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