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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에 대한 위계적 고찰1

시스템에 대한 위계적 고찰 - 1
[존재가 존재할 수 있기까지..]

주목할 만한 사상가들이 시스템을 만들 때 반드시 고려해야하는 변수가 소유에 대한 것일겁니다.
사실 저는 곙제나 사상에 대해 체계적인 공부를 하지 않아서 수다쟁이님 처럼 레퍼런스들을 나열하긴 힘들지만 아마도 맞을 겁니다.

이유는 두 가지 요소일 겁니다. 재화의 한계와 인간의 욕심...
역사를 더듬어 보면 몇몇 예외적 사례를 제외하고 욕심의 분량만큼 재화를 획득하려는 전쟁들을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다투는데 부터 시작해서 얼마전 있었던 이라크 학살에 이르기 까지..
사실 여기까진 진부할 정도로 공감하는 내용일겁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소유를 위해 삽니다. 에리히 프롬에 의하면 인간은 생존, 소유, 명예, 존재를 위해 산다고 합니다.
이 형태도 여러가지여서 - 인간의 욕심은 신기하게도 - 이것 중 하나를 위해 사는게 아니라 복합적으로 네 가지 가치들에 대해 우선순위를 매기고 있는 상황입니다.
프롬의 예가 아니더라도 사회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주장하는 인간의 욕구는 생리적 욕구, 경제적 욕구, 권력욕, 명예욕이라고 한다니 어느정도 일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려서 부터 도가 사상에 대한 환상을 갖았습니다. 험난한 세상에서 신선 처럼 살기, 적어도 내가 어떤 가치를 위해 살아야 할지 정의하기, 세상이 제시한 기준이 아닌 내가 도덕, 율법, 자유, 존재의 의미.. 같은 것들을 정의해 보기..
그렇기 때문에 프롬의 '존재'를 더욱 값지게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신기하게도 가장 무난한 존재 획득의 조건이나 방법은 그 전의 세 가지를 획득하는 것 입니다. 생존에서 소유로, 소유에서 명예로... 그리고 존재로 계층적인 발전.
하지만 이 방식은 잘 나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무리한 방식입니다. 더러 생존의 문제로 싸워야 하는 사람에겐 만용이기 까지 합니다. 하지만 사회에서 가장 안전하게 존재에 도달하는 방법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제한된 제화의 체제에선 몇몇 혜택받은 사람들에게만 기회가 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보다 정신을 차리고 길을 모색한다면 다른 세 가지 변수와 무관하게 존재를 획득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전자의 방법 보다 더 가혹한 수련이 필요하게 됩니다.
주로 이런 길의 모색은 종교의 형태로 이뤄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제시한 종교의 교의 자체가 존재의 획득하기 보단 존재를 획득한 것 처럼 느끼게 하는 경우가 상당합니다. 마치 박카스를 먹으면 피로가 해소됐다고 느껴지는 것과 같습니다. (스팀팩을 맞은 마린은 당장 힘이 배가되지만 생명은 줄어들죠.. )

종교와 유사하게 사회라는 조직이 주는 박카스가 더 무섭습니다. 종교의 경우 어느정도 자의적 선택을 보장하지만 사회/국가라는 조직은 출생과 함께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추구하는 가치를 이렇게 만듭니다. 존재 = 명예, 존재 = 소유, 존재 = 생존..
하지만 존재는 이외의 것과 무관한 종류입니다. 설령 존재의 본질이 위와 같은 도식이라 하더라도 이 도식을 짤 수 있는 주체는 '나'이어야 하지 국가나 사회가 아닙니다. 이것은 폭력입니다.

제일 불쾌한 일 중 하나가 존재에 대한, 가치에 대한 결정권이 박탈당하는 것 입니다. (우리는 너무 많이 박탕당했습니다. 입시제도라는 성적표에, 돈이라는 모호한 형태의 가치에, 도덕이라는 불합리성에.. ) 존재의 결정권을 착취당했다는 것은 노예의 직인이 찍힌 셈이 됍니다. 조그만 치즈 하나를 위해 수없는 미로의 벽들을 헤쳐나가야 하는 생쥐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이제 내가 먹고 싶은 치즈가 무엇이고 내가 건너야 할 벽이 무엇인지 정도는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아니 이 결정을 위한 고민의 자유를 획득해야 할 것입니다. 존재의 답안을 작성하지 못 하더라도, 적어도 존재의 답안을 작성할 수 있는 기회라도...
그리고 첨언하여 프롬의 질문을 자신에게 해야겠습니다.. 소유냐? 존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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