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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4/10/28
    이주노동자에게 집회란..
    free-vahn
  2. 2004/10/27
    개란말이(1)
    free-vahn
  3. 2004/10/18
    메인스트림 교육의 패권주의
    free-vahn
  4. 2004/10/18
    대한민국말아먹는놈들 총정리<서프펌>
    free-vahn
  5. 2004/10/13
    위성에서 본 지구 야경..(1)
    free-vahn
  6. 2004/10/01
    [종교권력] 종교적 피터팬 신드롬
    free-vahn

이주노동자에게 집회란..

정말 산다는게 무서워질 때가 있다.. 추운 새벽 폐지를 줏으러 다니시는 초로의 할머니를 마주치고 눈물이 막 나려고 했었는데...

 

정말 다함께 잘 살수는 없는걸까??

 

이주 노동자의 인권에서 더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생각...................................

 

 

* 이 글은 schua님의 [이주노동자에게 집회란..] 에 대한 트랙백 입니다.

* 이 글은 썩은 돼지님의 [이 신발도 말을 하고 싶었을까?] 에 대한 트랙백 입니다.

지난 2월 17일 굽다가 연행된 날이다.

출입국 관리소 직원이 어이 없이 샤말을 길에서 납치한 것을 항의하는 집회였는데

맘 먹고 덤비는 출입국 관리소 직원들의 집회 침탈을 가까스로 외환카드 노동자들과

연대하러 온 학생, 활동가들이 막고 있을 때

뒤쪽에서 굽다가 연행됐다.

굽다의 사지를 잡고 50m 정도 떨어져 있는 봉고로 데려 갔다.

난 그 상황을 보고 맥이 빠졌다.

들고 있던 카메라는 지 맘대로 돌아가고 있었고

나는 나도 모르게 대오를 향해 큰소리로 '여기 여기' 했다.

다들 정신이 없었던 지라 그 소리를 들은 사람이 없었다.

멀리서 연영석 동지가 달려오면서

'이럴 필요까지 없잖아. 당신들 이럴 필요 없잖아' 한다.

너무 상식적인 말인데 멍하게 들렸다.

그 영상을 보면 순간 순간이 멈춰진 스틸 같다.

그 장면만 지나면 다 괜찮아질 것 같은

그래서 꾹 참아보지만 그 장면은 계속 된다

현실과 희망의 괴리...

그 상황이 재연되고 그 상황을 어찌 바꿀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일때면 그 장면에서 그땐 도망쳐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미치기 십상이다.

 

 

그렇게 굽다를 잃고

우리는 명동농성단으로 향했다.

사람들은 버스 안에서 흥분해서 어쩔 줄을 모른다.

농성단에 도착해서는 다들 들머리에 앉아

넋을 놓았다.

그러다 신발이 덩그러니 놓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걸 찍고 있다.

그런데 누군가 다가오더니 그게 굽다 신발이란다.

그 소릴 듣고도 난

그 신발을 한참 찍었다.

마치 굽다가 투명인간이 되었고

신발만 내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굽다' 부르면 투명인간이 된 굽다가

'어 비즐리' 그러면서 나타날 것만 같았다.


>> 계속 보기...


이주노동자 집회에 가면 상식 밖의 상황이 많이 벌어진다.

아무 일도 아닌 것 가지고 경찰이 트집 잡고 험악한 분위기를 만든다.

어느 집회를 가도 그런 식으로 하지 않을 일들이 벌어진다.

처음에는 어이가 없었다. 왜들 그러는지 왜 말도 안되는 이야기로

저렇게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난 한국 사람이니까.

그런데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멸시.

까놓고 이야기하면 그거였다.

별 것도 없는 나라에서

가난한 나라에서 왔으면 멸시 좀 받고 살아야지

어디 집회까지 하고 지랄이야.

얼굴에 씌어 있다.

노골적일 때도 있다.

 

출입국관리소 앞에서 집회할 때였는데

처음으로 이주노동자가 이주노동자 집회에 왔다.

그랬더니 하는 말 "왜 여기까지 데려 오고 그래"

한국 활동가에게 하는 말이다.

그 활동가 왈 "이주노동자가 개입니까 데려오게"

통쾌했다. 하지만 그 경찰 말 정말 어이가 없다.

어이가 없으면 웃으면 되는 데 웃음도 안나온다.

 

아무 권리도 없고 언제든 잡아채서 넣어 버리면

본국으로 돌려 보낼 수도 있고 어디 하나 거칠 것이 없는 것이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이주노동자들은 인간이 아닌 것이다.

아무런 권리가 없기 때문에

 

그런 분위기 속에서 이주노동자가 집회에 간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농성을 하면서 중요할 때 집회를 해야 하는 데

머뭇거리는 이주동지들을 보면 답답했다.

하지만 한번 연행되면

너무나 어처구니 없게도 어떤 방법도 없이 본국으로 추방되니

그러면서도 그런 어려움을 이겨내고 집회에 나가는 이주동지들을

볼 땐 정말 마음이 아프다.

 

한국에서의 자신의 삶이, 시간이 송두리째 강탈당할 수 있다는

그런 압력을 이겨내면서 이주동지들은 집회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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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란말이

 

 

첨엔 모야?? 했는데.. 너무 웃겼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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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스트림 교육의 패권주의

일단 기본적인 입장이다. 이건 존 롤스의 원칙을 그대로 적용한다.
우선 교육 기회 균등의 권리를 보장하라. 이후 차등을 줘라..

물론 나도 안다. 세상이 부조리하고 불평등하다는 것.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교육 만큼 계급 상승의 기회도 없거니와 모순되게도 현실상 교육 만큼 계급의 재생산의 장치도 없다. 있는 집에서 자식들을 죽어라 공부시키고 유학보내고 하는 것들이 현실적 반증이다.

이미 슈퍼엔진을 단 차와 일반 티코랑 정정당당하게 경쟁하자는건 지나친 기만이다.
도대체 우생학적으로 강남에 살면 우성 인자를 얻게 된다는 사실이라도 밝혀졌는가?

그렇다. 교육은 대부분 후천적 환경에 영향을 받고 후천적 환경의 중요요소는 경제수준이다.
다시 말하자면 경제수준에 의해 인간의 지능평가가 달라지고 결국 차세대 카스트의 정당성을 확보한다.


또 생각해볼 거리는 교육의 문제다.
교육과 평가는 동전의 양면이다. 교육이 허접하기 때문에 평가도 조악해진다. 사실 수능으로 인간의 지적 수준을 평가할 수 있을까? 반대로 현재 교육구조가 양질의 인간 양성을 담보할 수 있는가?
우리나라 대부분의 평가는 이 시험을 잘 보는 학생을 구분짓는 깔대기다. 하지만 그 깔대기라는게 너무 단순하고 편협하기 짝이 없다. 물론 이 논의에선 노력도 하지 않고 자신의 고유한 슬기만 평가해달라고 요구하는 부류는 제외 시킨다.

더구나 그렇게 고생해서 좋은 대학교에 들어갔다고 치자. 그 대학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통해 인재육성을 보장하는 프로그램을 갖고 있는가? (아니오 -.-; )

웃지 못 할 일이다...

물론 이 계급의 모순이 여전히 유전될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다시 롤스의 이론을 끌여들여 .... 적어도 신분간의 모순적 상속의 갭이 줄여들도록 안정망관리를 해야하지 않겠는가?

고교 등급제를 하던지 말던지 나랑 상관없다.
교육정책 좀 제대로 관리 해라. 노력하는 성의라도 좀 보여라. (기회 균등권 보장) 그런 상황에서 정교한 차별이 (차등의 원칙) 정당화될 수 있다. 그리고 그 계급간 피라미드의 높이를 최대한 낮혀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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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스트림 교육의 패권주의

출처 : http://www.hani.co.kr/section-001050000/2004/10/001050000200410171938099.html



"(고교)등급제를 하지 않는다니.. 걱정이군요. 아이 학교를 다른 데로 옮겨야 하는지, 어떤지."
"부동산도 기운다는데…행정수도까지 가면 강남이 어떻게 되는 거죠?"

요즘 강남 학부모들이 나누는 얘기에 이런 것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 고교등급제 폐지와 부동산 신화 붕괴, 이 두가지 정도면 강남은 ‘갈’ 수도 있다. 판검사 변호사 정부 관료 정치인 의사 교수 사장 등등으로 구성된 엘리트공화국 강남은 흔들릴 것이다. 완전히는 아니겠지만 상당히 무너져 내릴 것이다.

대한민국을 강남공화국과 그 변방으로 나누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몇가지 사안으로 그 구분은 명확해졌다. 재산세 파동-고교등급제 소동-수도이전 논란 등에서 비슷한 특정 태도를 보인 이른 바 메인스트림적 부류와 그 바깥에 있는 부류이다. 정권이 바뀌어도 강남은 메인스트림이다. 교육분야로 말하자면, 고교 학력차 인정하라, 내신 무시하라, 등급제 안할 수 있나, 사교육 하면 어떠냐, 정답 맞추기가 수월성이다, 수월성이 국가경쟁력이다, 평준화는 안된다 등등이 그들의 목소리다.

우리 사회를 고질적으로 갈라왔던 영호남 같은 것이 아니라, 강남과 비강남으로 상징되는 좀더 본질적 결절을 환기한 것이 이번 고교등급제 소동이 준 긍정적 측면이라면 긍정적 측면일 것이다. 고교등급제는 교육을 통한 계층상승 기회를 줄여 그나마 남은 자본주의 계급사회의 작은 미덕까지 훼손한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의 기본 원리와 관련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대학들이 그걸 몰래 해왔다는 사실에는 좀 어처구니가 없다. 이번 소동은 보편교육을 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차별적 특권-수월성-국가경쟁력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교육으로 갈 것인지를 가름하는 상징적 사건이다.

고교등급제는 고교간 학력격차와 같은 기술적인 문제 때문에 적용된 것이 아니다. 내신 부풀리기나 변별력 따위의 문제가 아니다. 내신 부풀리기가 정말 문제였다면 각 대학은 벌써부터 내신 변별력을 확보할 수단을 개발했을 것이다. 그건 크게 어렵지 않다. 강남 일부처럼 돼버린 대학들의 삐뚤어진 패권주의에서 비롯한 차별이고 속임수일 뿐이다. 서울대 총장까지 이런 행위에 가담하지 않아 피해의식을 느낄 정도라면 대학들의 패권주의 의식이 얼마나 깊은지 갸늠할 길이 없다.

나는 몇몇 대학들이 공언했고 이미 흘리기 시작한 성적부풀리기의 실태나, 고교간 학력격차 따위가 있는 그대로 드러나야 한다고 본다. 대학들은 그 실태를 있는 그대로 발표하기 바란다. 교육부는 성적 부풀리기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도록 고교 내신 시스템을 정비하고, 학력격차가 존재한다면 대학들이 고교등급제를 거론할 수 없을 정도로 학력격차를 일소하는 강력한 조처를 시급히 취해야 한다. 고교등급제를 인정하지 않는 그 자체가 조처의 첫걸음이다. 등급제가 없다면 강남 특권은 해소된다. 그게 국가의 역할이다.

대학은 자신이 맡아야 할 수월성 교육의 많은 부분을 입시 메커니즘에 내맡기고 게으르면서도 차별적인 고교등급제를 채택함으로써 강남 이데올로기를 부추겼다. 강남은 등급제를 하지 않는 것이 역차별이라고 아우성을 칠 것이다. 등급제로 다른 지역이 받는 차별이 정상적인 차별이라고 목소리를 높일 것이다. 정부가 등급제를 금하겠다고 발표했지만 강남불패 신화는 늘 강고했기 때문에 그 과정이 제대로 진행될지 확신하기 어렵다. 판검사 변호사 정부관료 정치인 의사 사장족 학부모들이 내신을 중시하겠다는 2008년 입시정책을 놔둘지도 모르겠다. 본고사가 되던 어떻든 막강한 사교육의 후광을 업은 강남은 자기복제를 위한 또다른 편법을 만들어내려 할 것이다.

도대체 교육이 무엇인가? 대학은 왜 존재하는가? 국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제 교육에 대해 좀더 근본적인 물음을 던질 때가 되었다. 대한민국이 보편교육을 해나갈 것인가에 대해 답해야 할 때가 되었다.

이흥동 편집부국장 hdlee8@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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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말아먹는놈들 총정리<서프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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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성에서 본 지구 야경..




 

후배가 올린 게시물인데... 작은 불빛 중에 하나도 안될 것 같은 나의 존재감이 우울하게 하고...

반쪽만 있는 우리나라가 또 우울하게 하고...

 

요즘 .. 너무 시니컬하게 사는 탓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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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권력] 종교적 피터팬 신드롬

난 가끔 의하하다. 개혁신학을 외치는 교단에서 전혀 개혁하려는 의지가 없는 모습을 보고...

또 신기하다. 자신의 과거의 모순을 부정하려는 모습 보단 억지로 두둔하려는 태도들의 벽이 교회에서 나의 신앙생활을 질식하게 한다.

내 신앙적 태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걱정하시는 분들이 많은 줄 알지만 내가 배우고 성경을 통해 얻게된 신앙의 기준엔 많은 교인들도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건 피장파장의 오류가 아니다. 난 당신들이 진심으로 걱정된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으로 자유를 주겠노라 하셨다. 하지만 많은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준 나의 자유를 다시 회수해간다. 그래서 난 두 개의 적과 싸우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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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피터팬 신드롬

출처 : http://www.hani.co.kr/section-001005000/2004/09/001005000200409301917065.html


대부분의 고등 종교는 ‘보수주의의 요새’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종교란 과거 전통이 물려준 것들을 재생산하고 강화하는 기능에 더 치우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수의 종교인들은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는 데 요청되는 ‘비판의식’보다는 이전 것을 그대로 전승하는 무비판적 ‘수용의식’이 더욱 강하다. 그래서 종교가 부여한 틀을 벗어나고자 하던 사람들은 단순한 비판이 아닌 ‘종교화한 심판’을 받는다.

‘마녀’ ‘악’ 또는 ‘사탄’이라는 표현은 특정한 종교적 코드에 저항하고, 비판하고, 개혁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종교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붙여주는 이름표다. 그리고 이 종교화한 심판의 이름표가 붙여지면 정당한 재판의 과정도 생략된 채 무참하게 희생되어 생물학적 죽임이나 사회적 죽임을 당하게 된다. 수백만명의 여성들이 500여년에 걸쳐서 마녀로 몰려 끔찍하게 죽임을 당한 중세 유럽에서의 마녀화형 사건은 한 종교가 자행하여 온 ‘죄악사’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한나 아렌트는 나치 전범인 루돌프 아이히만의 재판과정을 지켜본 뒤 발표한 글에서, ‘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을 완전히 뒤엎는 새로운 ‘악’의 개념을 구성한다. 아렌트에 의하면 ‘악’이란 ‘비판적 사유의 부재’다. ‘비판적 사유’가 부재할 때, 착하고 평범하고 신실한 종교인일 수도 있는 사람들이 아무런 죄책감 없이 동료 인간을 무참하게 살상하는 엄청난 악의 공모자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우리는 이라크 공격을 ‘악의 무리를 소탕’하는 ‘신성한’ 일로 여기는 무수한 종교인들, 한국의 역사에서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의 인권유린을 자행하는 잣대가 되어 온 국가보안법 폐지에 반대하는 것을 마치 거룩한 종교적 사명인 양 착각하는 종교인들을 볼 수 있다. 종교적 색채로 가려진 이 비판적 사유의 철저한 부재야말로 ‘죽임의 문화’를 재생산하는 현대판 ‘악의 축’이 되는 것이다.

한국 기독교의 놀라운 양적 성장 이면에는 ‘비판적 사유’를 억누른 ‘단세포적 복음 이해’와 ‘교회성장지향주의’가 자리잡고 있다. 비판적 사유란 ‘비판적 물음표 붙이기’ 작업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는 신앙의 이름으로 교인들에게 ‘물음표’를 박탈함으로서 비판적 사유가 작동되는 것을 근원적으로 차단하고, 무조건적인 ‘아멘’과 ‘예’만을 신앙적이라고 가르쳐 왔다. 결과적으로 그 가르침과 실천에서 인간의 자유와 책임의 차원을 철저히 상실함으로서 더 이상 성숙하기를 거부하는 ‘종교적 피터팬 신드롬’에 빠지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한국 기독교 안에 ‘인식의 사각지대’의 골이 깊어지고 철저히 비가시화되고 있다.

특히 인식의 사각지대에서 가장 두드러진 차원은 성차별에 대한 인식의 부재다. 한국 기독교 인구의 70%를 이루는 절대 다수인 여성들이, 절대 소수인 남성들에 의하여 모든 결정 과정과 결정권으로부터 배제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문제 제기하는 비판적 소리가 이토록 부재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여성들은 남성 지도자들에 의하여 ‘교회의 꽃’으로 치켜세움을 받으면서, ‘물음표 붙이기’를 박탈당한 ‘영원한 유아’가 된다. 특히 목회자 중심적인 한국 기독교는 설교와 성서해석을 통하여 ‘순종과 희생과 봉사’라는 기독교적 덕목을 가부장제적으로 포장하여 교회와 사회에서 여성들의 ‘제2의 성’으로서의 존재를 강화하고 재생산하고 있다.

이제 양성평등에 대한 사회정치적 인식이 다양한 차원에서 광범하게 확산되는 이 시대에 한국 기독교가 그 생명력을 지니기 위해서는, 기독교 인구의 절대 다수를 이루는 여성들을 끊임없이 ‘부차적 존재’로만 규정하는 그 남성중심성의 상자로부터 과감히 탈출해야 할 것이다.

강남순 전 감리교신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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