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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9/29
    공자님 말씀...
    free-vahn
  2. 2005/09/29
    롤즈의 정의론 정리
    free-vahn
  3. 2005/09/29
    침묵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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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님 말씀...

흔히 사람들은 옳고 지당한 말을 "공자님 말씀"이라고 한다.
혹은, 이 '옳고 지당한 말'을 고리타분하고 구태의연한 의미로 받아들일 때도 같은 표현을 한다.

당연한 얘기로 생각했던 이 공자님 말씀을.. 어쩌다 읽게된 논어를 본 후에 '의미심장'하게 되새김 하고 있다.

진리는 우리 모두가 아는 것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공감대나 얼마나 의미있게 받아들이냐... 하는 태도나 자세가 가름할 것이다.

고딩 시절 도덕경을 읽었을 때 '이런 글은 나도 쓰겠다.'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몇년 후 다시 도덕경을 읽으며 들었던 생각이.... 도덕경이 깊은 사유와 경험에서 우러나온다면... 그 진위는 심오하기만 하다.

여하튼.. 문제는 내가 얼마나 받아들일 소양이나 자세, knowledge base를 갖고 있느냐.. 하는 것일게다..

그러므로 어떠한 말에 대해서도 겸손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말이 감동적이거나 심오하지 않다면 그것은 발화자의 부족함보다 청자의 부족함을 먼저 탓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감동적이었던 공자님 말씀 몇자 올린다.. ^^;

 


공자가 말하길, “도움이 되는 친구로 세가지 유형이 있으며 해가 되는 친구에 세가지 유형이 있다. 정직한 사람,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 박학다식한 사람, 이런 친구는 좋다. 잔꾀에 밝은 사람, 겉과 속이 다른 사람, 입만 살아있는 사람, 이런 친구는 사귀면 손해다.”
孔子曰, “益者三友, 損者三友. 友直, 友諒, 友多聞, 益矣. 友便辟, 友善柔, 友便佞, 損矣.” (論語, 季氏)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子曰, 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 (論語, 雍也)

자공이 친구에 관해 물었다. 공자가 말하길, “친구가 잘못했을 때 진실된 마음으로 충고하거라. 한두 번 충고했는데도 듣지 않는다면 이제 그만 하거라. 충고한다고 자꾸 하게 되면 공연히 모욕을 당할 수도 있다.”
子貢問友. 子曰, “忠告而善道之, 不可則止, 毋自辱焉.” (論語, 顔淵)

“무릇 된 사람이란 음식이나 거처에 있어 만족스럽고 편한 것만을 추구하지 않으며 일을 할 때에는 부지런하고 민첩하며, 말을 삼가서 한다. 그리고 사람 살아가는 도리를 깨친 사람들과 사귐으로써 자기를 단정히 한다. 이렇게 하는 사람이면 배움을 즐겨한다고 할 수 있다.” 子曰: "君子食無求飽, 居無求安, 敏於事而愼於言, 就有道而正焉, 可謂好學也已." (학이편)

“세 사람이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 좋은 점은 택해 본받고, 나쁜 점이 있으면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 하며 고치도록 노력한다.” 子曰: "三人行, 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 (술이편)

옛사람들이 별로 말이 없는 것은 실천하지 못할까 걱정되서 그런거다. 
子曰, “古者言之不出, 恥躬之不逮也.” (論語, 里仁)

“지식인은 말이 행동을 앞서는 걸 수치스럽게 여긴다.” 子曰, “君子恥其言而過其行.” (헌문편)

공자가 말하길, 사람으로서 떳떳하게 말하는 것, 그렇게 하려면 쉬운 일이 아니다. (헌문편)
子曰, “其言之不怍, 則爲之也難.” (論語, 憲問)

“돈이 많게 되면 사람이 좀 거만해진다. 돈이 없게 되면 사람이 좀 째째해진다. 거만하느니 차리리 째째한 편이 낫다.” 子曰, “奢則不孫, 儉則固. 與其不孫也, 寧固.” (술이편)
 

설사 천하에 둘도 없는 재주와 지식을 구비했다 하더라도 사람됨이 교만하고 인색하다면 그 밖의 것은 더 이상 볼 필요가 없다.
子曰, “如有周公之才之美, 使驕且吝, 其餘不足觀也已.” (論語, 泰伯)

“계로가 귀신 모시는 문제를 물었다. 공자 대꾸하길, ‘산 사람도 못 모시면서 어찌 귀신을 모실 수 있겠느냐?’ 계로가 물었다, ‘죽음에 대해 감히 여쭙습니다.’ 공자 말하길, ‘삶도 아직 모르면서 어떻게 죽음을 알겠느냐?’ ’‘ 季路問事鬼神. 子曰, "未能事人, 焉能事鬼?" 曰, "敢問死." 曰, "未知生, 焉知死?" (선진편)

공자가 말하길, 아랫사람은 경외의 대상이다. 기성세대를 능가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가? 나이 40, 50이 되어서도 별볼일 없다면 이런 사람은 역시 겁날 것이 없지.
子曰, “後生可畏, 焉知來者之不如今也? 四十五十而無聞焉, 斯亦不足畏也已.” (論語, 子罕)

- 노력하지 않는 젊은이는 무시당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 나이 40 50이 되었는데도 별 볼일이 없는 인간은 (젊을 때 노력하지 않았으므로) 무시 당해도 싸다.

도덕으로 정치를 하면 마치 그것은 북극성과 같아 모든 뭇별이 우러러 본다.
子曰, “爲政以德, 譬如北辰, 居其所而衆星共之.” (論語, 爲政)

“법률과 형벌로써 백성을 다스리면, 국민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법망을 피해가며 나쁜 짓을 저지르게 되고 이렇게 되면 국민들은 나쁜 짓을 하면서도 점점 부끄러움을 못느낀다. (양심이 마모되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한다는 의미) 하지만 도덕으로 인도하고 예의로써 통제하면 국민들은 양심을 되찾아 스스로 바르게 된다.” 子曰, "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 (위정편)

태어나면서 아는 사람은 최고다. 배워서 아는 사람은 그 다음이다. 몰라 고생하다가 비로소 배우게 되면 그 다음이다. 몰라 고생하면서도 배우지 않으면 이건 최하로 못말리는 사람이다.
孔子曰 : "生而知之者上也, 學而知之者次也 ; 困而學之, 又其次也 ; 困而不學, 民斯爲下矣." (論語, 季氏)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헛것이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험하다.
子曰: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論語, 爲政)

“배우고 시간날 때마다 그것을 실천에 옮긴다면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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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즈의 정의론 정리

롤즈의 정의론 정리

롤즈는 그의 저서 <정의론>에서 정의의 원칙에 도달하는데 ‘최대의 평등한 자유의 원칙’과 ‘차등의 원칙’을 사용하고 있다. 그는 첫째 기본적인 자유는 평등하게 그리고 최대한으로 누려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선거의 자유, 언론의 자유, 양심의 자유 등 정치적인 자유를 포함해서, 사유 재산을 가질 자유, 신체의 자유, 부당하게 체포되지 않을 자유 등이 기본적인 자유 등에 포함된다. 둘째 사회에서 가장 혜택을 받지 못한 자, 즉 최소 수혜자 계층에게 유익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 한 부의 차등적 분배는 정당화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차등이 용납되기 위해서는 그 전제로서 모든 사회적 직책과 직위는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가치 균등의 조건이 성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롤즈의 두 가지 원칙은 ‘우선 순위의 원칙’에 따른다. 이른바 첫 번째 원칙이 두 번째 원칙보다 우선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회에서 가장 밑바닥에 있는 계층에게 혜택이 돌아가더라도 언론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과 같이 정치적 자유를 위축시키는 사회를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박정희 군사 정권 하에서의 경제적 성장을 이유로 언론이나 인권이 탄압 받아서는 곤란하다는 뜻이다.” 일단 기본적인 자유가 보장되는 가운데 비로소 두 번째 원칙 ‘경제적 분배의 문제’를 고려할 자격이 생긴다는 것이다. 물론 경제적 문제를 논의할 경우 불우한 계층의 혜택을 우선 시 고려하여야 하지만 그것도 모든 사람의 권리가 충분히 보장받은 후에 가능하다고 한다.

롤즈 <정의론>의 사상적 배경:
사회 계약론적 방법 : 근대 철학자들 중에 사회 계약설을 주장했던 홉스, 로크, 루소, 몽테스키외 등등 이들의 사회 계약설 요지는 합리적 인간들은 자연 상태와 같은 무정부 상태로부터 자유로운 논의와 합의에 의해 어떤 정부나 국가를 선택할 것을 결정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유로운 논의와 합의, 즉 계약에 의거하여 우리가 살아가게 될 사회나 국가의 헌법을 선택하게 된다.

1. 계약 당사자의 조건 :(무지의 베일) 우리가 사는 사회에는 천부적 재능이 뛰어난 자나 그렇지 못한 자 또는 사회적 지위에 있어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 개개인의 가치관 또한 천차만별이다. 이처럼 각양각색의 인간들이 하나의 정의 원칙에 합의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자신의 기득권을 이용해서 유리한 원칙을 채택하지 못하게끔, 또 여러 계층이 합의할 수 있게끔 정보를 제한하는 장치가 필요하다고 한다. 여기서 롤즈는 “무지의 베일”을 이용한다. ‘무지의 베일’이란 천부적 재능과 사회적 지위 즉 자신의 기득권이 우연 또는 의도적으로 작용하는 것을 막아주는 장치이다. 이것은 사적인 이해 관계를 버리고 공적인 입장을 보장하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정의의 여신 (오른손에는 칼을, 왼손에는 저울)을 생각해보자. 이를 데면 어떤 법적인 문제가 발생했을 때 소송 당사자간의 합의(?)에 따르지 않고 그 당사자들과 이해 관계가 없는 재판부에게 판결을 맏기는 경우를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여기서 저울은 공평함 즉 정의의 기준을 의미하고 칼은 정의가 실현되기 위한 힘을 상징한다.

2. 계약 당사자의 조건 : (합리성) 롤즈는 정의의 원칙에 합의하는 당사자들은 주어진 목적을 성취하는데 있어 최선의 수단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고, 또 그것을 선택할 수 있는 합리적인 존재라는 사실이다. 물론 사람들은 합리적이기는 하지만 지나친 동정심과 시기심을 갖지 않은 존재다. 만일 자신의 몫을 챙기기보다는 타인을 위해 희생할 줄 아는 자비심의 소유자이거나,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는 타인을 도구로 삼아 희생시킬 극단적 이기주의자의 경우는 정의의 원칙이 문제될 것이 없다. 따라서 정의의 원칙을 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정의의 원칙에 합의하는 데는 사람마다 자신의 정당한 몫을 요구하고, 그것을 누리는데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자신의 이익과 마찬가지로 타인의 이익도 존중하는 건전한 개인주의자에게만 정의의 원칙에 합의할 수 있다.

3. 정의의 원칙에 있어서 선택 규칙 : (최악의 상황을 설정한다) 위에서 말한 합리적인 당사자들이 따를 수 있는 정의에 대한 선택 규칙은 대체로 두 가지이다. 하나는 ‘기대 효용 극대화의 원칙’이다. 이는 가능한 대안들 중에서 최선의 결과를 가져오는 대안을 선택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 속에서 최선의 것을 약속하는 대안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롤즈가 말하는 규칙은 ‘최소 극대화의 원칙’이다. 가령 어떤 대안을 선택했을 때 기대되는 최악의 상황이 어떤가를 가상해서 그 중 최선의 결과가 보장되는 결과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이는 “불행 중 다행”법칙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정의의 원칙에 합의를 한 당사자들의 신분이 확인되었을 경우나 그 사회의 최소 수혜자 (사회적으로 가장 혜택받지 못하는 자 또는 계층)로 확인되었다 할 지라도 가장 다행스럽게 여겨지는 대안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4. 정의의 두 원칙 : 첫째는 평등주의에서 출발한다. 롤즈는 사회적 기본 가치 (자유, 소득, 부, 기회, 권력 등등)를 꼭 같이 나누는 평등의 원칙이 정의의 원칙을 정하는 기준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무지의 베일로 인해 기득권자라 할지라도 자신의 기득권을 보장받는 다는 확신도 없지만 그렇다고 남에게 자신의 몫을 희생할 이유도 없는 까닭에 평등의 원칙에 누구나 합의할 수 있다고 한다. 물론 롤즈 자신도 이러한 평등의 원칙이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을 뿐더러,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은 인정한다. 만일 절대적 평등을 엄격하게 지킨다면 자유나 개인적 자질에 대한 침해가 명백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조건부 차등을 말한다. 조건부 차등이란 미래에 더 큰 것이 보장될 때 현재의 희생을 감수하는데 동의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정의의 원칙에 합의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종류의 차등이 도입됨으로써 모든 구성원들에게 절대적 평등보다 더 큰 자신의 몫이 보장될 때 그러한 차등은 정당화 또는 정의로운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절대적 평등을 고수한다는 전제에서 조건부 차등이 정의의 원칙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기준에서 도달한 롤즈의 정의는 최소 극대화 원칙과 사회에서의 최소 수혜자에 대한 고려와 관련하여 형식화되는 것을 말한다. 결국 롤즈가 말한 일반적 정의의 원칙은 사회의 기본 가치( 자유, 소득, 부, 기회 등등)는 차등적 분배가 최소 수혜자를 위시한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최대의 이익이 확실시되는 한 차등적으로 분배하고 만일 그렇지 않으면 평등하게 분배되어야 한다로 요약할 수 있다. 다만 이 원칙에서 자유는 다른 사회 경제적 가치와 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자유와 빵간의 등가적 교환은 가능하며 더 많은 빵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자유의 포기도 가능하게 되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어느 정도 생존에 필요한 물질적 궁핍에서 해방된다면 더 많은 빵을 위해서 자유를 희생하지는 않을 것이다.

5. 정의의 원칙 적용 : 정의의 제1 원칙이 “최대의 평등한 자유”이라 하고 자유를 제외한 사회 경제적 가치 분배로 “조건부 차등의 원칙”을 제2의 원칙이라 할 때 그 적용에서는 제1의 원칙에 우선 순위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 원칙의 적용에서는 자본주의 국가나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무리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롤즈가 말한 정의의 원칙에 합의만 된다면 어떤 체제를 선택하던지 각 나라의 사회 경제적 조건, 역사 문화적 특성에 따라 체제 및 이데올로기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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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의미


침묵의 의미

- 법정 -

현대는 말이 참 많은 시대다. 먹고 뱉어내는 것이 입의 기능이긴 하지만, 오늘의 입은 불필요한 말들을 뱉어내느라고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수고를 하고 있다. 이전에는 사람끼리 마주 보며 말을 나누었는데, 전자매체가 나오면서는 혼자서도 얼마든지 지껄일 수 있게 되었다.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에서는 유언비어나 긴급조치에 위배되지만 않는다면, 그리고 다스리는 사람들의 비위에 거스르지만 않는다면, 그 말의 내용이 아첨이건 거짓이건 혹은 협박이건 욕지거리건 간에 마음대로 지껄일 수 있다. 가위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 풍토이다.
그런데 말이 많으면 쓸 말이 별로 없다는 것이 위들의 경험이다. 하루하루 나 자신의 입에서 토해지는 말을 홀로 있는 시간에 달아 보면 대부분 하잘 것 없는 소음이다. 사람이 해야할 말이란 꼭 필요한 말이거나 '참말'이어야 할 텐데 불필요한 말과 거짓말이 태반인 것을 보면 우울하다. 시시한 말을 하고 나면 내 안에 있는 빛이 조금씩 새어나가는 것 같아 말끝이 늘 허전하다.
좋은 친구란 무엇으로 알아낼 수 있을까를 가끔 생각해 보는데, 첫째 같이 있는 시간에 대한 의식으로 알 수 있을 것 같다. 같이 있는 시간이 지루하게 느껴지면 아닐 것이고, 벌써 이렇게 됐어? 할 정도로 같이 있는 시간이 빨리 흐른다면 그는 정다운 사이다. 왜냐하면 좋은 친구하고는 시간과 공간 밖에서 살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기도를 올려 보면 더욱 잘 알 수 있다. 기도가 순일하게 잘될 경우는 시공時空 안에서 살고 있는 일상의 우리지만 분명히 시공 밖에 있게 되고, 그렇지 못할 때는 자꾸 시간을 의식하게 된다. 시간과 공간을 의식하게 되면 그건 허울뿐인 기도다.
우리는 또 무엇으로 친구를 알아볼 수 있을까. 그렇다. 말이 없어도 지루하거나 따분하지 않은 그런 사이는 좋은 친구일 것이다. 입 벌려 소리내지 않더라도 넉넉하고 정결한 뜰을 서로가 넘나들 수 있다. 소리를 입밖에 내지 않았을 뿐, 구슬처럼 영롱한 말이 침묵 속에서 끊임없이 오고간다. 그런 경지에는 시간과 공간이 미칠 수 없다.
말이란 늘 오해를 동반하게 된다. 똑같은 개념을 지닌 말을 가지고서도 의사소통이 잘 안 되는 것은 서로가 말 뒤에 숨은 뜻을 모르기 때문이다. 엄마들이 아가의 서투른 말을 이내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말소리보다 뜻에 귀기울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사랑은 침묵 속에서 이루어진다.
사실 침묵을 배경 삼지 않는 말은 소음이나 다를 게 없다. 생각 없이 불쑥불쑥 함부로 내뱉는 말을 주워보면 우리는 말과 소음의 한계를 알 수 있다. 오늘날 우리들의 입에서 토해지는 말씨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자꾸만 거칠고 천박하고 야비해져 가는 현상은 그만큼 내면이 헐벗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안으로 침묵의 조명을 받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급한 현대인들은 자기 언어를 쓸 줄 모른다. 정치 권력자들이, 탤런트들이, 가수가, 코미디언이 토해낸 말을 아무런 저항도 없이 그대로 주워서 흉내내고 있다. 그래서 골이 비어간다. 자기 사유마저 빼앗기고 있다.
수도자들에게 과묵이나 침묵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것도 바로 그 점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묵상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안에 고여 있는 말씀을 비로소 듣는다. 내면에서 들려오는 그 소리는 미처 편집되지 않은 성서다. 우리들이 성서를 읽는 본질적인 의미는 아직 활자화되어 있지 않은 그 말씀까지도 능히 알아듣고 그와 같이 살기 위해서가 아닌가.

我有一卷經(아유일권경}
不因紙墨成(불인지묵성)
展開無一字(전개무일자)
常放大光明(상방대광명)
사람마다 한 권의 경전이 있는데
그것은 종이나 활자로 된 게 아니다.
펼쳐보아도 한 글자 없지만
항상 환한 빛을 발하고 있네.

불경에 있는 말이다. 일상의 우리들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에 잡히는 것으로써만 어떤 사물을 인식하려고 한다. 그러나 실체는 저 침묵처럼 보이지도 들리지도 잡히지도 않는 데에 있다. 자기 중심적인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허심탄회한 그 마음에서도 큰 광명이 발해진다는 말이다.
참선을 하는 선원에서는 선실 안팎에 '묵언默言'이라고 쓴 표지가 있다. 말을 말자는 것. 말을 하게 되면 서로가 정진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집단 생활을 하다 보면 때로는 시와 비를 가리는 일이 있다. 시비를 따지다 보면 집중을 할 수 없다. 선은 순수한 집중인 동시에 철저한 자기 응시이다. 모든 시비와 분별망상을 떠나서만 삼매三昧의 경지에 들 수 있다.
말은 의사소통의 구실을 하지만 때로는 불필요한 잡음의 역기능도 하고 있다. 구시화문口是禍文, 입을 가리켜 재앙의 문이라고 한 것도 그 역기능인 면을 지적한 것이다. 어떤 선승들은 3년이고 10년이고 계속해서 묵언을 지키고 있다. 그가 묵언 중일 때는 대중에서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수도자들이 이와 같이 침묵하는 것은 침묵 그 자체에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다. 침묵이라는 여과 과정을 거쳐 오로지 '참말'만을 하기 위해서다. 침묵의 조명을 통해서 당당한 말을 하기 위해서다. 벙어리와 묵언자가 다른 점이 여기에 있다.
칼릴 지브란은 우리들이 해야 할 말을 "목소리 속의 목소리로 귓속의 귀에" 하는 말이라고 했다. 사실 언어의 극치는 말보다도 침묵에 있다. 너무 감격스러울 때 우리는 말을 잃는다. 그러나 사람인 우리는 할말은 해야 한다.
그런데 마땅히 입 벌려 말을 해야 할 경우에는 침묵만을 고수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미덕이 아니라 비겁한 회피다. 그와 같은 침묵은 때로 범죄의 성질을 띤다. 옳고 그름을 가려 보여야 할 입장에 있는 사람들의 침묵은 비겁한 침묵이다. 비겁한 침묵이 우리 시대를 얼룩지게 한다.
침묵의 의미는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는 대신 당당하고 참된 말을 하기 위해서이지, 비겁한 침묵을 고수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어디에도 거리낄 게 없는 사람만이 당당한 말을 할 수 있다. 당당한 말이 흩어진 인간을 결합하고 밝은 통로를 뚫을 수 있다. 수도자가 침묵을 익히는 그 의미도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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