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2005/09/15

3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09/15
    [쾌도난담] 분발하라, 닷컴이여
    free-vahn
  2. 2005/09/15
    [펌] 2Pac 기사 두 개...
    free-vahn
  3. 2005/09/15
    Pragmatic Programmer와 Pragmatism에 대한 단상
    free-vahn

[쾌도난담] 분발하라, 닷컴이여

딴지 총수 김어준과 논객 김규항의 대담입니다.
이문열 씹으면서 극우 씹는 부분을 재단하려고 했는데 저작자의 권리를 존중해주고 싶어서 부득불 넣었습니다....
닷컴과 극우를 억지로 결부시킨 것 같다는.. ^^

IT에 대해 이해가 별로 없는 사람들이 IT를 분석하고 있는데, 예리한 부분도 있고 '좀 모르니까 저런 소릴 하는구나..' 하는 부분도 있는 것 같습니다.

버뜨, 김규항의 천민 자본주의가 IT에 적용된 폐단에 대한 분석은 십분 공감이 갑니다..

제가 여기에 이 글을 퍼온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고민하지 않는 부분을 이들은 이렇게 즉흥적? 이나마 고민해준다는데 대한 약간의 수치감이 있어서 올립니다. ^^;;;

물론 우리도 고민하는 것은 인정하지만요.. (생업에 관한 문젠데..)
단지 이렇게 입체적, 해학적?으로 보지 못 하는 눈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아마도 정치, 경제, 사회 등에 대한 학습이 부족했던 이공계 출신의 태생적인 리미트가 있다는걸 인정하면서도 이 리미트가 '지배당하는 이공계', '위기의 이공계'를 조장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극복해야 하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구요.. ^^;;

출처 : 한겨레 http://h21.hani.co.kr/section-021023000/2000/021023000200008020320064.html

[쾌도난담] 분발하라, 닷컴이여 극우여…

안티조선 운동은 왜 음대협의 파시즘적 활동방식과 다른가

“너무 점잖더라.”

김규항을 본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다. “쾌도난담의 이미지와는 딴판이더라.” 또는 이런 말도 있었다. “해병대를 욕하시더니 본인이 해병대 스타일이더라.” 지난 7월27일 ‘문화방송 100분 토론- 표현의 자유와 청소년 보호’에 대한 관람평이다. 김규항이 패널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던 것이다.

“형, 안 떨었어?” “후배들이 청심환을 사왔어.” (웃음)

김규항은 ‘예상했던 대로 돌이킬 수 없는 쪽팔림’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도 “토론의 룰을 홀로 사수했다는 것이 유일한 보람”이라는 뼈있는 우스개 소리를 하기도 했다. 김어준의 짓궂은 질문이 이어지자, 말머리를 돌리는 김규항. <한겨레21> 지난호에 실렸던 ‘이문열 인터뷰’가 화제로 올랐다.

그는 정말 바보인가



김어준 네티즌들이 난리가 났어. 되게 재미있다며.

김규항 이문열씨가 안티조선운동이야말로 권력놀음이라고. 극우도 하나의 의견으로 허용해야 한다고 했다는데, 어떻게 생각해?

김어준 이문열씨 주장은 다 독자가 선택했다는 거야. 독자가 선택해서 <조선일보>가 권력을 갖게 됐다는 거지. 독자가 선택한 이상 그걸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건 참으로 ‘별스런 일’이고, 독자의 선택인데 왜 제몫을 찾아준다느니 하냐는 건데, 이거 우째 생각하십니까? (웃음)

김규항 극우도 하나의 의견으로 존중해야 한다는 건 바보 같은 소리지. ‘우’자 앞에 ‘극’자를 붙이는 건 극단적인 형태이기 때문에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사회의 공적이라는 의미가 되거든. 극우라고 인정을 하지 말든지.

김어준 난 어릴 적 이문열씨 좋아했거든요. 그런데 인터뷰 기사를 보고 참 실망했어…. <조선일보>에 대한 태도가 우호적이라서가 아니라. 그거야 그럴 수 있지. 그 논리의 빈약함 때문에. 고등학생 때였던가, <사람의 아들>을 처음 읽고 얼마나 감탄했는지. 지금 보니… 바보네…. (웃음)

김규항 좀더 구체적으로….

김어준 이문열씨는 군사정권이 독자들에게 신문보라고 강요한 것도 아니고, 독자들이 선택한 이상 조선일보 권력의 정당성은 문제가 없다고 하는데, 이거 정말 모르고 하는 소린지 아니면 알고도 이렇게 말하는 건지… 둘 다 실망스럽긴 마찬가지긴 하지만… <조선일보>가 1등이 된 이유가 그 신문의 논조가 탁월해서인가. 독자들이 그 신문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한 당시의 정치환경을 빼놓고는 조선일보를 이야기할 수 없지. 조선일보가 주장하는 이데올로기가 주류로 통용되도록 군사정권이 조장한 극우적, 수구적, 냉전적 정치환경 덕분이고, 당시 그러한 군사정권과 유착해 고급정보에의 접근이 상대적으로 용이했던 면들… 왜 그런 걸 생각 못할까? 역사의식, 사회의식이 없다는 이야기밖에 더 되냐고.

김규항 사회의식이 다른 거지.

김어준 카-.(트림) (웃음)

김규항 안티조선을 권력놀음이라고 말한 것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이를테면 음란물대책협의회(음대협)에서 영화 <거짓말>을 음란영화로 보고, 그걸 시민들한테 보여주면 따라할 것 같아 걱정하는 건 그 사람들의 권리라고 봐. 그 사람들은 조리퐁 보면 여자 성기를 떠올리고 테트리스를 보면 삽입성교를 떠올리는 사람들이니까. 그래서 극장 앞에서 관람거부 캠페인을 하는 건 허용돼야 한다고. 하지만 그걸 공권력의 힘을 빌려 상영금지를 받아내려는 것은, 의견을 선택할 권리를 없애버린다는 차원에서 파시즘인 거야. 안티조선은 음대협과 같은 운동방식을 택하고 있지 않거든. <조선일보>를 검찰에 고소하는 것도 아니고, 공권력을 통해 <조선일보> 구독금지 운동을 편 것도 아니고, 사주 방우영씨나 김대중 주필을 구속하자고 한 것도 아니고, 고엽제전우회처럼 조선일보 5층에 기어올라간 것도 아니고….

김어준 코리아나호텔에는 들어갔는데. (웃음)

김규항 커피숍에 모인 거지. 철저히 민간차원의 자발적이고 평화적인 캠페인인데 그걸 권력놀음이라고 하면 말이 되나?

김어준 게다가, 평양주석궁에 탱크가 들어가야 한다는 식의 극우적인 <조선일보> 의견도 다양성이라는 면에서 존중되어야 한다는 사람이, 시민들이 문제의식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거대한 언론권력을 향해 운동을 펼치는 안티조선은 말이 안 된다고 하니 도대체 이게 논리에 닿냐고. 거대 언론사는 극우적이고 수구적인 의견이라도 사람들이 선택했다면 인정해야 한다면서, 거대 언론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의 권력밖에 없는 사람들이 스스로 선택한 운동은 마뜩찮고 별스럽고 권력놀음이라니. <조선일보>를 변호하기 위해 “모든 의견은 존중해야 한다”는 걸로 방어논리를 삼다가 자가당착에 빠진 거 아냐. 바보…. (웃음)

김종필과 이만섭

김규항 재밌는 건, 이문열씨가 언제부터 그렇게 근대적인 다양성을 인정하는 사람이 됐냐는 거야. (웃음) 왜 갑자기 이견을 존중해야 한다는 논리를 펴는 걸까.

김어준 반박논리가 그것밖에 없으니까. (웃음)

김규항 봉건하고 반공 빼면 없는 사람이 말이야.

김어준 “도둑놈을 무조건 잡아야 한다”는 거하고 “도둑놈은 무조건 죽여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면, “무조건 죽여야 한다”는 주장은 ‘극’단적인 거고, 정치적으로 그런 정도의 극단성을 띤 게 극우잖아. “다른 의견은 죽여야 돼, 없애버려야 돼, 말살해야 돼, 인정하지 말아야 돼”… 거대언론사가 그런 극우적 편향을 띠어도 괜찮다는 건데. 혹시 극우가 뭔지도 모르는 거야. (웃음)

김규항 극우가 뭐냐?

김어준 오른쪽으로 많이 간 거. (웃음)

김규항 우리가 극우라고 지칭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정말 교양이 없는 걸 느낄 수 있어. 어떻게 그렇게 모를 수 있는지 잘 모르겠어. 그외의 자기 작품세계에서 보여주는 엄청난 정보량이나 지식에 비한다면 말이야.

김어준 이건 그냥 대학생과 토론해도 깨질 수준이야.

김규항 극우 진영에선 조갑제 선생이 열심히 이론을 개발하고 있는데… 딴 놈들은 극우의 이념과 사상을 정교화하려는 노력보다는 그저 극우의 역할을 할 뿐이야. 극우는 극우인데 장사꾼 극우지. 난 이런 상황이 한국 극우를 단련시키는 기회가 될 것 같아. (웃음) 하여간 황석영 선생이 동인문학상 거부입장을 표명한 것은 우리나라 중견문학인들 중에선 아주 특별한 태도라서… 아주 고무적인 일 같아.

김어준 이문열은 맛이 간 것 같아. 순수문학만 하든지.

김규항 사람이 맛이 간 게 아니라, 그 사람이 먹히는 사회가 맛이 간 거야. 세상이 변하긴 변한 거지.

김어준 그건 그렇고 날치기는 어떻게 된 겁니까.

김규항 정말 김종필은 대단한 인간이야. 이회창하고 골프장에서 웃으면서 “국내 정치현안 이야기는 하나도 안 했다”고 눙치고 그랬거든. 민주당을 아주 안달나게 했지. 50년 동안 해왔던 줄타기 실력을 유감없이 보인 거지. 결국 자민련을 원내교섭단체로 만들어주기 위해 민주당이 무리수를 썼지.

김어준 딱, 한국정치의 수준인 것 같아. 그런 인물을 끼고 가지 않으면 도대체가 해결책이 나오지 않는….

김규항 이에 비해 국회의장 이만섭 같은 사람은 아주 다른 모습을 보여줬지. 날치기 진행을 거부했잖아. 난 그 사람 나름의 정치가로서의 이념에 동의하는 편은 아니거든. 이력을 봐도 하다 못해 민주인사 출신도 아니고…. 그렇지만 아주 존중받아 마땅할 일을 했어. 사실 김종필과 이만섭이란 두 사람 다 이념은 비슷하잖아. 그런데 정치인으로서 아주 대조적인 모습을 보인 거야.

김어준 음… 이런 생각도 들어. 이회창은 DJ와 JP의 정치놀음에 완전히 들러리 역할하고 있는 거…. 이번에 이회창은 자민련 입지를 강화시켜주는 데 충실하게 조연 역할을 한 거 아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여를 공격할 빌미를 잡고 자민련을 포섭하겠다는 전략이었나 본데, JP가 그렇게 쉽게 잡히나. JP만 딩가딩가하게 해준 셈이지.

김어준의 ‘닷컴을 위한 변명’

김규항 정치는 복잡한 것 같지만 사실 이해관계가 너무 분명하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아주 단순하지. 어떤 신념이나 소신도 그런 구조 속에선 아주 연약할 수밖에 없으니까. 이만섭이라는 사람은 이번에 그러고도 치명상을 입지 않은 걸 보면 참 자기 관리를 잘하는 사람이야. 정치권 이야기는 지겹다. 딴 이야기 하자. 요즘 수익모델 문제 때문에 벤처시장이 자금 마련에 어려움을 겪고 있잖아.

김어준 벤처투자회사에서 공공연하게 닷컴기업에는 당분간 투자를 안 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오지.

김규항 지난해 말이나 올 초 같은 경우엔 ‘인터넷 벤처’라는 이름만 붙으면, 수익을 올리고 안 올리고를 떠나서 조회 수나 회원 수를 기준으로 엄청난 투자가 이뤄졌는데 말이야. 이런 문제에 대해 닷컴기업 사장으로서 어떻게 생각하니? 니 입장을 이야기하지 말고 공명하게 이야기해봐. (웃음)

김어준 공명정대하게 이야기하면 양쪽 다 책임이 있지. 닷컴기업들 같은 경우엔 지나치게 꿈에 사로잡혔다든가, 자기가 끌어들인 자금에 비해서 수익모델을 제대로 창출해내지 못했다든가….

김규항 남 이야기가 아닌 것 같다. (웃음)

김어준 우린 다르지. (웃음) 또는 남의 돈을 끌어들여 장사를 하면서 지나치게 사업 이외에 부문에 투명하지 않게 돈을 썼다거나… 기타 등등.

김규항 반성을 계속하렴. (웃음)

김어준 닷컴기업이 떠맡아야 할 책임이 분명히 있죠. 그런데 투명하지 못했다든가 하는 부분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데, 수익을 1년 내에 제대로 못냈다는 건 변명의 여지가 참 많은 부분이지. 기존 경제구조와는 전혀 새로운 모델을 개발하고 있는데 그게 어떻게 단시간에 승부가 나겠어. 그리고 그런 게 벤처 아니냐고. 그리고 이 모든 책임을 모조리 닷컴기업에 떠넘기는데, 물론 비판받을 부분은 분명히 있지만, 그걸 차분히 검증해낼 임무의 대부분은 투자하는 쪽에 있거든. 자신들도 분위기에 휩쓸려 그 임무를 제대로 해내지 못했으면서 말이야.

김규항 하소연으로 흐르는군. (웃음)

김어준 닷컴에서 나오는 반성부분만큼 캐피털쪽에서도 반성이 나와야 하는데 그렇지 않단 말이에요. 상황 전반에 대한 책임은 둘 다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수익모델을 못 냈으니까 그렇다”는 게 맞는 말이긴 하지만 캐피털도 애초 그 붐에 적극 동조했단 말이에요. 안 끼면 손해볼 것 같으니까 떼거리로 들어갔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수익이 안 나니까 또 떼거리로 등을 돌리는 거지. 이런 상황들에 대한 책임을 오로지 닷컴기업에만 돌리는 건 적어도 도덕적이지는 못한 거죠.

천민자본주의를 실감하다

김규항 도덕? 처음에 돈을 투자받으려고 하는 쪽에서는 가능하면 돈 받을 가능성을 확대 포장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인지상정 아냐? 거기에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지. 그 검증은 돈을 투자하는 쪽에서 냉혹하게 해야 하는 것이고… 냉혹함은 그때 발휘되어야 했지.

김어준 양쪽에서 해결방안을 찾기 위해 같이 고민해야 할 상황에서 그냥 죽으라고 내버려 두는 건, 한편으로는 시장의 자율과 조정에 맡기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가운데 옥석을 가려 살 수 있는 경우까지 죽음 혹은 그 직전까지 몰고 가 헐값으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음모도 있는 거지.

김규항 근데 닷컴기업쪽에서 너처럼 “상황의 책임이 둘 다 있으니까 왜 너희 투자쪽은 자기책임을 갖지 않으냐”고 하는 것도 순진한 소리야. 그쪽은 그런 거 반성하는 사람들이 아냐. 돈 놓고 돈 먹기 장사하는 건데.

김어준 문제해결 방식이 맘에 안 든다는 거지. 순진한 소리이기는 한데 모든 책임을 닷컴기업에만 몰려는 건 정말 비열하다고 생각한다는 거지.

김규항 비열하다고 해봐야 꿈쩍 안 할 거고. (웃음) 어쨌든 이 현상은 이미 1년 전 누구나 상식적으로 예상할 수 있었던 거야.

김어준 예상 못했죠.

김규항 왜 못해?

김어준 쉽게 될 줄 알았으니까. 양쪽 모두.

김규항 그러니까 상식이 무서운 거야. 내가 출판계통에서 10년 정도 적을 두다보니 친구나 후배들로부터 사람을 소개해달라는 부탁이 간간이 있거든. 기자나 편집부원 또는 디자이너… 이따금씩 해주지. 근데 지난해 말부터 그런 걸 못하는 거야. 없어. 노는 놈이 하나도 없어. (웃음) 뭐 제대로 글 좀 쓴다거나 디자인 좀 한다는 놈들은 전부 어디 들어가 있는데… 그게 전부 웹쪽이더라고. 심지어는 아날로그쪽에 있던 인력들도 대거 그쪽으로 빠져나갔다고. 내가 그때 했던 말이 “걔들 1년 만에 회사 다 망해서 돌아올 거다”였는데,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던 일이라고. 요란하긴 한데 돈될 게 없어보이더란 말이지. 이런 게 다 어차피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해선 거칠 수밖에 없는 과정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고.

김어준 캐피털 쪽도 어려움이 많겠죠. 사실 투자자로선 투자된 게 회수돼야 재투자를 하는데, 회수가 안 되니까 사이클이 막혀버린 거거든요. 결국은 그게 비열하든 무책임하든 어쨌거나 닷컴기업 자신이 살아갈 길을 찾아내는 수 밖에 없죠. 스스로.

김규항 원래 벤처캐피털의 취지는 말 그대로 ‘모험적인 투자’인 것이거든. 위험하지만 전망있는 기업에 과감히 투자한다는 것은 자본주의에서 볼 때 최선의 사고방식이지. 사채시장의 장사꾼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는 거라고. 지금까지 너무 무절제하게 투자했기 때문에 데미지를 입었다는 걸 반성하면서, 지금부터는 철저하게 검증한다는 쪽으로 가야 하는데 “닷컴기업은 투자중단”이라는 게 참…. 하여간 닷컴기업이 수익모델을 만들면 자동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이긴 해.

김어준 도덕성을 논하는 건 자본쪽에서 보자면 씨도 안 먹히는 얘기죠. 도덕이고 나발이고 내 돈이 들어가서 안 나오는데 누가 하겠어.

김규항 이 모든 현상들은 한국에서 돈이 얼마나 저열하게 움직이는가를 보여주는 것 같아. 이를테면 대기업이 영상산업에 진출하면서 영화쪽으로 들어갔다가 다 나왔잖아. 지금은 투자금융쪽에 다 들어와 있거든. 그것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고. 한국이 천민자본주의라는 게 여기서 방증이 돼.

김어준 난 캐피털쪽을 도덕적 이외의 이유로 비난할 순 없을 것 같아. 그게 자본주의의 생리이자 회사의 생리고, 돈의 생리이니까. 하지만 도덕성 부분에 이르면 캐피털쪽이 천하다…라는 비난은 감수해야 마땅하다고 봐. 사실이니까.

벤처 뻥튀기를 경계함



김규항 상도덕으로는 비난할 수 있겠지. 소용없는 일이지만.

김어준 한 가지 분명한 건 닷컴기업이 수익을 못 내면서 사회적 손실을 불러일으킨 건 사실이지만 결정적인 공도 있다는 거야. 전혀 새로운 방식의 부의 재분배를 일정 정도 한 거고. 사람들의 머릿속에 있는 재벌의 지배력을 뒤엎는 것은 그전까지는 어떤 방식으로도 불가능했잖아요. 하지만 그 가능성의 일단을 봤거든. 새롬이니 다음이니…. 그 꿈이 하도 커져서 망가지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이런 거대한 경제구조의 변화는 전시상황 같이 판을 아예 뒤엎는 엄청난 구조적 충격이 아닌 다음에야 불가능했던 이야기라고. 그 계기를 전쟁없이 닷(dot)이 만들어준 거죠.

김규항 재벌의 불건전한 성장을 비판하면서 벤처를 옹호하는 입장에 서더라도, 니가 적시한 두세개 기업이 얼마나 성실과 노력에 의해서 성장했는지 보면 별로 그렇지도 않거든. 그 역시 뻥튀기란 말이야.

김어준 그렇죠. 기적이죠.

김규항 사실 열기에 의한 증자였지. 생산에 의한 자산 증가가 아냐. 거기서 실제 엄청난 돈을 벌어들인 것도 아니고.

김어준 물론 알맹이가 튼실하지 않다는 비판은 지금 받고 있고, 앞으로도 수년간 계속 받겠지만… 우리네 경제구조를 뒤집을 계기를 마련했다는 건 엄청난 거야.

김규항 뒤집은 상태는 아니야.

김어준 사람들 머릿속에 다른 것도 가능하다는 인식을 심어줬잖아.

김규항 다르게 볼 수도 있어. 젊은 사람들에게 정직하고 성실하게 노력해서 성공하는 게 아니라 하나의 아이디어, 그러니까 대동강에서 물장사로 떼돈을 번 김선달식으로 자꾸 그런 식의 성공신화를 추종하게 하는… 환상을 좇게 하는 열기를 불러일으킨 면도 있지. 저놈이 하는데 나라고 못할까 하는.

김어준 근데 워낙에 벤처라는 게 그런 열기가 없다면, 꿈이 없다면 불가능한 것이고, 실제 그렇게 꿈꾸고 그 꿈을 향해 달려갈 가능성조차 없었던 사회에서 그나마 꿈꿔 볼 수 있는 사회로의 이행은 아무리 부정적인 요소가 있다손치더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니까.

김규항 지금 가장 뻥튀기된 벤처들의 특징은 첨단기술 제조업체에 기반하지 않고 있는 거 같아. 이를테면 미국의 유명한 벤처기업들을 보면 “광고를 보면 돈을 준다”는 단순한 아이디어보다는 기술력에 의한 벤처기업이 최상위를 차지하고 있거든.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는 좀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이 아닌가 하는 거지.

김어준 꼭 그런 건 아니지. 야후나 아마존이 기술력이 최고여서 그렇게 됐나?

김규항 근데 메일 보내는 걸 상대방으로부터 확인받는 기능이 핫메일(hotmail)에서도 안 되던데…. 다음(daum)의 한메일(hanmail)에서 되대. 그거 괜찮은 기술이지.

김어준 기술로 따지면 대단한 기술은 아니죠.

김규항 핫메일이 어디 거지?

김어준 마이크로소프트로 넘어갔죠.

김규항 마이크로소프트로는 안 되거든. 우리나라 통신메일은 그게 된다고. 그것도 기술은 기술이지. 다이얼패드 같은 것도 대단한 기술은 아니지만.

김어준 먼저 한 거죠. 야후는 무슨 기술이 있나.

김규항 야후야, 초기에 인터넷을 실제 일반인들의 몫으로 만든 검색사이트로서 막대한 공이 있지.

김어준 제 말은 기술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걸 어떻게 활용하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건데, 어쨌거나 닷컴들이 꿈과 희망의 메시지를 살포한 공로는 인정해주자고.

김규항 젊은이들한테 꿈을 준 건 사실이지.

김어준 물론 그 대열에 끼지 못한 사람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준 부분도 있긴 있지.

극우는 단련된다

김규항 25살 카이스트 출신 벤처 희망자라면 무조건 10억원을 투자하겠다는 이야기가 실제로 많이 돌았다는 거야. 20대에 카이스트를 나와서 벤처를 한다면, 실제 뭘 하든 간에 그 모양 자체로서 투자가 충분히 가능하고 뻥튀기가 가능하다는 얘기가 되는 거지. 몇달 전에 그렇게까지 갔었대.

김어준 우리나라가 이렇게까지 닷컴기업의 열풍과 거품에 휩싸인 이유 중 하나도… 역으로 말하면 닷컴 열풍 이전까지는 도저히 이런 기회가 없었던 거예요. 재벌이 아니면 산업구조 속에서 제대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없었잖아. 재벌로 가는 것만이 사회적 성공의 보증이고, 그 속에서 튀어나오고 싶어했지만 그럴 공간 자체가 없어 답답하면서도 대안이 없던 환경….

김규항 후발주자들만 불행하게 됐지. 남들보다 오래 착실하게 준비해서 출발한 벤처기업들은 피를 보고 있는 거야. 어쨌든 일련의 과정을 통해 한국의 벤처가 합리성을 찾을 수 있는 기회가 오겠지. 결국은 적자생존이야. 오늘 결론은 뭐니.

김어준 바보….

김규항 그런 식으로 단정적인 말은 하지 말자고. 혹시 아닐지도 모르잖아. (웃음)

김어준 바보이지 않을까? (웃음) 결론을 유보한 채. (웃음)

김규항 극우 이문열 의외로 약한 모습 보이다. (웃음)

‘강철은 단련된다’는 말 있지. ‘극우는 단련된다’ 어때. (썰렁)

김어준 하나도 안 웃긴다. 역시 바보는 형이야. (웃음)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펌] 2Pac 기사 두 개...

힙합, 랩, 그리고 투팩

from : http://openc.or.kr/openbook/04/openbook_view2.asp?idx=117

[음악이야기] 힙합, 랩, 그리고 투팩
유요비 | 문화평론가, 시인

요즘 랩그룹 DJ DOC의 멤버 이하늘이 ‘베이비 복스’를 ‘미아리 복스’라고 비하한 말이 인터넷 상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요절한 랩가수 투팩(2PAC)의 노래를 돈을 주고 한 곡 사와서, 이리저리 뜯어 고치고 하여 마치 자신들의 창작품인 양 노래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얄팍한 상혼으로 이미 사망한 투팩의 정신(저항성)까지 죽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베이비 복스는 돈을 위해 사랑을 파는 미아리의 창녀와 다를 바 없다는 이야기 같다.
어쨌든 이러한 현상들이 우리나라의 대중문화계에서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다. 사회적 이슈가 있을 때마다 인기 연예인들이 참여하는 횟수가 늘어나고 있는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이것마저 상업적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혹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몇몇 사람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인기 연예인들이 자본에 의해 만들어지고 그래서 자본의 논리에 충실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또 자신의 인기에 걸맞은 자기 철학과 가치관을 갖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랩음악은 할렘의 길거리문화인 힙합의 음악적 형식으로 원래는 말장난인 랩(Rapp)에서 시작되었다. ‘힙합’은 1970년대 후반 흑인 할렘가 청소년들의 놀이였던 스크래취, 브레이크 댄스, 랩 등이 어느 정도 예술적 형식을 갖추게 되면서 문화화된 것이다. 할렘가는 빈곤, 흑인차별, 낮은 교육수준 등으로 미국사회 최하층의 삶이 만연한 지역이다. 일자리 없는 젊은이들이 무리지어 할렘가를 배회하며 범죄를 저지르거나 마약에 빠져든다. 랩음악은 바로 이런 할렘가의 무위도식(?)하는 젊은이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시간 때우기 위한 말장난과 농담들이 점점 부자들의 인색함이나 부당한 인종차별과 경제적 횡포를 비난하는 말들로 바뀌어 갔고, 더 나아가 정치적 주장으로 표현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가장 기본적인 리듬이 결합되어 ‘하고 싶은 말들을 지껄이듯 말하는’ 랩음악이 탄생된 것이다.
따라서 랩은 미국사회에서 아직도 이방인으로 대접받고 있는 미국 흑인(Afro-American)들의 한과 분노, 저항정신이 담긴 넋두리이다. 백인들의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프리덤라이드운동이 미국 전역을 휩쓸고 지나간 지 30여 년이 지났지만 흑인들은 아직도 미국사회 전반에 뿌리 깊게 남아있는 흑백간의 인종차별을 랩이란 음악으로 고발하고 있다.
랩이 대중적으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도 레이건의 보수주의에 대항하여 대통령 선거운동이 한창이던 1979년이었다. 당시 슈거힐 갱Sugarhill Gang이 발표한 이 히트함으로써 하층의 흑인문화에 숨었던 랩의 존재를 알게 됐고, 랩뿐만 아니라 브레이크 댄스 등의 힙합이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각종 음악과 영화로 힙합은 상업화되고 문화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흑인들 스스로의 각성과 평화를 촉구하는 등 긍정적 메시지로 일관하던 랩은 레이건의 당선과 함께 미국 내에 백인 중심의 보수주의가 뿌리를 내림에 따라 체제를 부정하고 폭동을 주장하는 등 점점 과격한 메시지로 변모한다. 공화당 정부가 흑인들을 위한 복지예산을 삭감하자 할렘가는 더욱 황폐하게 되었고 흑백간의 경제적 격차는 더욱 커지게 됐다. 범죄와 마약만이 난무하는 거리에는 소박한 꿈을 빼앗긴 흑인들의 저주와 욕설과 폭력이, 그리고 그러한 메시지를 담은 랩이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갱스터 랩이고 그 대표적 주자가 바로 투팩이다.
투팩(2PAC)은 1990년대 미국의 흑인 대중문화인 힙합(HiP-HOP)을 대표하는 랩가수이자 영화배우다. 마지막 잉카제국의 황제인 이름인 투팩 아마루 셰이커Tupac Amaru shakur가 본명이며, 1971년 뉴욕의 뒷골목에서 흑인해방운동 단체인 블랙 팬더Black Panther의 여성 조직원인 아페니 세이커Afeni Shakur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세 때 그룹 디지털 언더그라운드Digital Underground의 댄서로 대중음악계와 인연을 맺었으나 곧 탈퇴하고 1991년 랩가수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1995년 괴한의 총격으로 사망할 때까지 《2Pac alypse now》(1991), 《Strictly 4 my n.i.g.g.a.z...》(1993), 《Me against the world》(1995), 《All eyez on me》(1996) 등 4장의 앨범을 내놓았다.
투팩의 랩은 무자비한 욕설과 공권력에 대한 반항과 폭력이 주 가사인 ‘갱스터랩’으로 분류된다. 1991년 텍사스에서 한 소년이 경찰관에게 총격을 가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투팩의 노래를 듣고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하자, 부통령인 댄 퀘일이 공중파 방송을 통해 갓 데뷔한 투팩을 비난하였고, 그 때문에 투팩은 대중적으로는 거물이 되었지만 동시에 개인의 힘으로선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갱스터 래퍼’라는 고정된 이미지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투팩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표면적인 것이다. 오히려 투팩은 자신의 음악을 통해 미국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편견을 지적하고, 회개를 통한 범죄의 근절과 흑인들의 자각을 촉구했다.
이러한 투팩의 생각을 대변한 앨범이 1995년 발매된 《Me against the world》다. 앨범에 실린 노래가사들은 제목 ‘Me against the world’(이 세상 전체와 싸우는 나)가 암시하는 것처럼 미국사회에 대한 그의 분노와 개인의 외로움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폭력과 마약이 난무하는 흑인 빈민가의 현실과, 사회의 모순에 대한 직설적 비판, 흑인으로서의 고통, 암울한 운명 등을 거칠게 고발하고 있지만, 종국에 가서는 이러한 모든 불합리를 적극적으로 극복하려는 마음가짐, 폭력과 분노로 가득 찬 자신의 죄악에 대한 회개 등을 노래하고 있다.
이 앨범의 수록곡 중 홀로 자신을 키운 어머니 아페니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눈물겨운 가사로 표현한 와 감옥 안에서 자신의 짧은 인생을 돌아보며 회개와 함께 하느님께 구원을 호소하는 는 투팩 음악의 정수이다.
투팩은 강한 개성과 외모 때문에 4년 동안 무려 6편의 영화에 출연하여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흑인빈민가 청년들의 애환을 다룬 , 재닛 잭슨과 공연한 , 농구영화, 또한 팀 로스Tim Roth와 함께 경찰관 역을 맡았던 , , 등에 출연하여 호평을 받았다.
이처럼 성공적인 음악이나 영화 활동과 달리 투팩의 사생활은 불안정했다. 오클랜드의 가출 청소년을 위한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Underground Railroad'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등 열성적으로 사회활동을 펼치기도 했지만, 정작 본인은 사망하기 전까지 폭력과 성추행 등의 혐의로 감옥을 들락거렸다. 투팩은 자신의 노래처럼 위험한 인생을 살았고 비참하게 삶을 마감했다. 그러나 투팩은 미국사회에서 소외된 젊은층의 절망과 분노를 대변했고, 미국 사회가 지닌 모순을 거침없이 고발한 음악인이었다.

============================================================================ TuPac의 생애

from : http://lion.chonan-c.ac.kr/~pro12/2pac.htm

1971년의 어느 날, 뉴욕의 빈민가인 Bronx에서 Tupac Amaru Shakur라는 이름을 가진 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그 아이는 할렘 출신의 여느 다른 흑인들처럼 힘든 삶을 살았으며, 1996년 9월7일 라스베가스에서 괴한의 습격으로 총상을 입었다. 그리고 정확히 6일 후인 9월 13일에 2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언뜻 보면 우리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어보이는 이 흑인 청년의 이야기에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그가 랩 음악을 통하여 흑인 사회에,나아가서는 미국 사회 전체에까지 미친 영향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그의 사망 후에조차도 그의 음악과 인생을 재조명하는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적어도 전세계 수백만의 팬들의 마음 속에서, 2Pac은 아직도 진정한 승리자로 인정받고 있다. 여기에서는,국내에는 비교적 알려지지 않았던 2Pac에 관한 여러 사실들을 통하여 그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는지, 또 그의 음악은 어떤 것이었으며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하자.

2Pac Shakur는 흑인 과격 세력의 모임이었던 Black Panther의 멤버였던 Afeni Shakur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리고 볼티모어에서 예술 고등학교를 다니며 음악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졸업후 그는 서부 캘리포니아의 Marin City로 와서 당시 상당한 주목을 받기 시작하던 랩 그룹 Digital Underground에 정식 멤버로서 참여하게 되었다. Digital Underground의 앨범 'Sons of the P' 앨범으로 그래미상 후보에 오르며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다. 이때 2Pac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신의 솔로 앨범인 '2Pacalypse Now'를 발매하여 'Trapped', 'Brenda's got a baby'등을 히트시켰다. 그러나 그의 행운은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첫 앨범의 수록곡들이 텍사스에서 있었던 경찰관 살해범에게 살인 동기를 제공하였다는 법원의 판결을 받았고, 92년당시 부통령이었던 댄 퀘일은 2Pac을 문화의 이단아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하였다.

그러나 그는 93년 2집 'Strictly 4 My N.I.G.G.A.Z.'를 발표, 'I get around', 'Keep ya head up'과 같은 명곡들로 그해에 American Music Award의 최우수 힙합 신인상을 수상하게 된다. 그는 'Juice','Above the Rim'과 같은 영화에 출연하여 배우로서의 활동도 시작한다. 그러나 영화감독 앨런 휴즈와의 싸움은 L.A.의 구치소에서의 15일간 구류라는 결과를 낳는다. 같은해 11월에는 아틀란타에서 경찰관 살해범으로 몰려 재판을 받았다. 결국 혐의는 풀렸지만, 그의 평판은 나빠지기 시작했다. 또한 11월 말경, 2Pac은 무기 소지와 성추행 사건으로 기소되는데, 행운의 여신이 그를 외면했기 때문일까, 법원의 마지막 판결이 있던 바로 전날 맨하탄의 녹음실로 향하던 2Pac이 3명의 갱단에게 총격을 당하고 금품을 강탈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다음날 그는 기브스를 하고 휠체어에 앉은 상태로 징역18개월의 형을 선고받게 되었다.

감옥에 있는 동안,그는 인생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한 것 같다. 이것은 출옥후에 가졌던 인터뷰에도 잘 드러나며, 무엇보다도 1995년 옥중에서 발표한 'Me Against The World' 앨범에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이 앨범은 초유의 인기를 모으며 싱글 'Dear Mama'를 빌보드 차트 정상에 올려 놓는다. 그의 말을 빌자면, 감옥에서의 생활은 지옥이었고 다시 사회에 돌아온 그에게는 모든 곳이 곧 천국이었다. 1995년 말경에 오랫동안 사귀어왔던 Keisha Morris양과 뉴욕에서 결혼식까지 올리게 되었다. 2Pac에게 있어서는 MC로서의 경력과, 그의 인생 자체에 있어서 커다란 전환점이라 할 수 있겠다.

그의 짧은 인생을 놓고 보았을때, 그에게는 L.A.의 Death Row 레코드사에 속해 있었던 기간이 최고의 전성기였다. Dr.Dre와 함께 Death Row를 설립한 Suge Knight는 2Pac이 출감되자마자 그를 찾아가 계약을 맺고, 96년 드디어 대망의 더블 앨범 'All Eyez On Me'를 발표한다. 이후 Dr.Dre의 독립과 Snoop Doggy Dog의 이적 등으로 재정난에 시달렸던 Death Row 레코드사에 있어서 모든 것의 중심은 바로 2Pac이었으며,그는 이미 신화적 인물이 되어 있었다. 2Pac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90년대 랩 음악을 이야기할 수가 없다. 그는 연기자로서도 한층 성숙된 모습을 보여, 그의 사후에 공개된 영화 'Gang Related'에서는 주연을 맡기도 했었다. 그러나 1996년 9월 7일,그는 또다시 총탄을 맞아야 했고 결국 9월 13일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고 말았다.

2Pac은 이제 이 세상에 없다. 하지만 그에게 세상 사람들의 계속적인 관심이 쏟아지는 것은 과연 무엇때문일까? 지금 이순간에도 인터넷의 랩 뉴스그룹에서는 2Pac의 음악과 그의 사상 에 대한 열띤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심지어는 2Pac이 살아있다고 주장하는 홈페이지도 올려져 있다. 그리고 미국의 몇몇 대학에서는 90년대의 흑인 문화 현상을 연구하는데 있어 2Pac을 강의의 소재로도 삼고 있다.

2Pac은 한마디로 묘사하자면 마틴 루터 킹 박사와 말콤 엑스의 특성들을 나눠가진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3집과 4집을 통하여 미국 흑인들에게 자성의 목소리를 높일 것을 종용하였다. 1집과 2집에서 보여주던 Thug Style과 외설스러움은 수그러지고 대신 그의 주변을 유심히 관찰하고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보게 하는 눈이 생겼던 것이다. 그는 4집의 수록곡인 'Life goes on'에서는 놀라우리만치 뛰어난 감수성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중 한 구절을 보자; "얼마나 많은 형제들이 더 희생되어야 하는가? 모두에게 평온함이 깃들기만을 바라지만 나와 같은 범죄자에게도 천국이 있는가? 나는 죽음을 생각한다. 인생이란 과연 무엇인가?"

어떤가. 2Pac은 그가 자라난 뒷골목의 잔인함과 비참함을 통하여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인지 많은 고민을 하였다. 그러한 자기 통찰의 과정을 통하여 그는 예전에 세상에 대하여 품었던 증오를 풀었고,그의 안에 내재되어 있던 인간적 면모를 발현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간혹 언론들은 앨범 사진에 보이는 그의 기이한 문신들을 놓고 그것이 마치 범죄성이 2Pac의 전모를 나타내는 것으로 부각시킬 때가 많았다. 물론 그는 한때 혼란과 광폭함이 넘치는 야생마와 같았다. 하지만 그러한 그의 과거 때문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편견을 가지게 되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음악은 분명히 '갱스터 랩'으로 분류되지만 그것이 전하려 하는 메시지는 오히려 윤리적이고 우리에게 필요한 미덕인 경우가 많이 있다. 그 중 하나를 들자면 '여권의 존중'이다. 2Pac은 어려서부터 어머니에 의해 홀로 자라난 만큼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깊었는데, 그는 복역 기간중에 어머니의 자신에 대한 깊은 애정을 경험했었다. 2Pac의 어머니는 계속 지방법원을 찾아다니면서 까지 아들의 결백을 주장했던 것이다. 2Pac은 'Dear Mama'라는 노래에서 어머니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

한 사회가 발전하려면 근본적으로 무엇이 필요할까? 바로 청소년들 이다. 흑인 구역의 청소년들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지 않는 한 대개가 학업과는 거리를 두게 된다. 거리에서는 쾌락과 범죄의 유혹이 청소년들을 기다리고 있다. 청소년들은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악순환을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2Pac은 특히 청소년들에게 강한 힘과 의지를 가지라고 격려한다. 그의 곡들 중 'Keep ya head up'이라는 곡은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쳐 실의에 빠진 젊은이들에게 보내는 그의 격려 편지와도 같은 것이다. "우리들 스스로가 변화를 만들어 가야만 한다. 우리 사회는 우리가 만들어 가는 것이다. 내일은 반드시 밝은 태양이 우리를 비춰줄 것이다"라고 그는 이야기했다.

위에서 잠시 20세기 흑인 인권 운동의 두 대표자인 킹 박사와 말콤 엑스를 언급한 적이 있다. 이 두 사람은 흑인의 인권 확보라는 같은 주제를 상반된 방식으로 해석했다. 킹 박사는 늘 평화와 비폭력,그리고 사랑을 강조한 반면 말콤 엑스는 무조건적인 쟁취와 투쟁을 전면에 내세웠다. 2Pac이 인터뷰나 그의 노래에서 전하는 메시지들을 살펴보면 놀랍게도 이 두 가지 입장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위의 두 인물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2Pac은 흑인 사회 구성원들 자체를 직접적인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먼저 흑인들 스스로가 올바로 살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같은 흑인들이라 해도 좋게 봐줄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생각이 사람들에게 알려진 사례에는 역시 총격으로 사망한 래퍼 The Notorious B.I.G.와 그의 소속사인 Bad Boy Entertainment와의 갈등을 들 수 있다. Notorious B.I.G.는 뉴욕의 빈민가에서 갖은 고생을 하다가 2Pac의 도움으로 랩 음악계에 이름을 알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자 Notorious BIG는 2Pac 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2Pac은 이에 대하여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Notorious B.I.G. 는 내가 아끼는 형제 중의 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에게 최대한 잘 해 주었고 성공의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돈의 어둠에 가려 사물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실망스러운 일이다" 라고 말이다. 그는 3집의 'Temptations'라는 곡에서 그러한 메시지들을 잘 담아내고 있다.

2Pac의 사후에 랩 음악계를 비롯한 흑인 사회 전반에는 조용한 반성의 기운이 감돌았다. 랩 음악계 관련인들 간의 간담회가 여러 차례 열렸고, 2Pac의 생애를 기리는 출판물도 상당수 간행되었다. 그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하나로 일치시키고 있는 듯 하다. '더 이상의 폭력은 용납하거나 미화할 수 없다'라는 결론에 많은 이들이 동감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을 뿐, 요즈음 발매되는 랩 음반들을 보면 여전히 갱스터적인 소재들이 득세하고 있는 실정인 것이 몹시 안타까운 점이다. '힙합의 의식적인 면을 되찾자'는 운동이 생각만큼 실효성을 거두고 있지 못하는 듯 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2Pac의 죽음은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그의 인간적인 면에 대한 연민을 갖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Pragmatic Programmer와 Pragmatism에 대한 단상

대학교 3학년때였던 것 같습니다.

당시 저는 전산과 철학이라는 두 관심 영역을 식탐하던 때였습니다. 당시 저는 꽤 거창했는데.. 전산은 제 업을 위해, 철학은 사는 방법을 구하기 위해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전산이라는 분야에 철학적인 요소를 찾을 수 없을까?' 가끔 고민하곤 했는데 현대 사상에 대한 강의를 듣던 중 Pragmatism에 대한 사조를 배우게 되면서 이 질문의 답을 찾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Pragmatism은 그리스어인 'Pragma'에서 어원적인 개념을 도입하고 있으며 Pragma란 '행위'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 사상은 개척시대 미국에서 발달됐는데.. 기존에 관념(Idea)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철학사조를 무의미하다고 여기고 행위(실용, 유용)적인 측면에서 철학적 사고를 진행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즉, 관념이나 이론은 행위로 증명, 연관됐을 때 유의미하며, "관념의 대상이 행위와 관련이 있는 어떤 결과를 초래하느냐. - 그 관념이 어떤 성과를 나타내고, 유용한 것으로 현상화 됐을 때"에 따라 의미여부가 결정된다고 합니다. - "관념의 의미는 그 대상을 초래하는 결과에 있다." - 제임스

이를테면... 기존의 세계관에 비추어볼 때,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 세계에서의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의자'는 실세계에 전혀 의미가 없으며 실제 만지고 사용할 수 있는 (질료와 형상화된) 의자만이 의미가 있다는 입장입니다.

pragmatism의 대표적인 예는... 신이라고 하는 관념은 신을 믿음으로써 용기, 동기가 생기는 결과가 초래한다면 신이란 관념의 의미가 부여됍니다.

즉, "결과(혹은 유용성)가 관념을 규정한다."


이 사상은 미국에서 프론티어 정신과 함께 미국 개척을 이끄는 사상으로 적용되었으며.. 제가 이 사상을 프로그래머로서 가져야할 태도로 설정한 이유는 패턴이건 방법론이건 어떤 기술이건 그 이론(관념)이 유용함을 증명하기 위해선 이상적인 시스템을 구축함으로써 가능하다는 태도가 너무도 매력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내가 만약 제일 이상적인 S/W를 만들었다면 내가 적용한 방법이 제일 유용하다.!! .........ㅋ

사실.. 제 기억의 편린으로 pragmatism이 잊혀질 즈음... objectworld 선배들과 술자리에서 우연히 (경원형으로 부터) 이 책의 이름에서 "pragmatic"이란 단어가 귀에 꼿혔을 때 이 책을 꼭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었고 곧바로 e-book을 구해서 탐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경원님이 꼭 스터디를 함께하면 좋겠다는.. ^^)

사실.. Pragmatic Programmer가 Pragmatism을 적용한다고 하기엔 너무 거창하지만 (Pragmatic하지만 Pragmatism은 아닌 것 같은.. ^^)... Pragmatic Programmer는 다른 책과 다르게 몇 가지 기억이 묻어있는 책이 되었습니다... ^^



보태기 하나..!!

요즘.. 논어를 틈틈히 보고 있는데요... 교과서적인 얘기 같지만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배우고 시간날 때마다 그것을 실천에 옮긴다면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공자가 말하는 '실천'이란 덕목도 Pragmatic과 연관이 있을 것 같습니다. 순수학문을 하지않는 우리에게 있어 배움이라던가 지식은 실천이 없으면 지적 허영이나 의미 없음에 지나지 않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물론 (실천이 전제한) 다음 지식을 위한 선수과정으로서는 유의미하겠지만 말입니다.

또, 이런 말씀도 하십니다. (이건 학습법에 관한 얘기일 것 같은데요..)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헛것이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험하다."
子曰: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論語, 爲政)

어떤 학습을 할 때 수동적인 주입보단 타당성이라던가 정합성, 적용방안, 체계확립 등등의 '생각'들을 함께할 때 그 '배움'은 실제 자신의 내공으로 승화될 것입니다..


도덕책 같은 말이죠? ^^;;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