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스피노자의 판글로스 비판

볼테르의 [캉디드]에 나오는 판글로스의 목적론적 주장을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비판해보시오.
1) A4 1장 이내로 작성하되, 판글로스와 스피노자 사이의 대화 방식으로 글을 꾸며볼 것.
2) 다른 사람들 것을 베끼면 F를 줄 거예요. (-_-b)

 



어쩌다가 스피노자가 100년쯤 늦게 태어나서, 1755년 리스본 지진의 폐허를 앞에 두고 판글로스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캉디드는 폐허 속으로 음식을 좀 찾으러 갔다.

 

판글로스: 정말 엄청난 지진이로구나.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사실 잘 되어 있는 것이지. 이 지진 역시도 최고로 잘 되어 있는 이 세상의 일부인 것이네.


스피노자: 아니 이런 아비규환의 상황에서도 그런 말씀이 나옵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는 근거는 대체 뭡니까.


판글로스: 원래 모든 사물들은 목적을 가지고 있네. 이 코를 보게나. 코가 없으면 안경을 쓰지 못할 게 아닌가. 그러니 코는 우리가 안경을 쓸 수 있도록 존재하는 것이네. 마찬가지로 돌은 성벽을 만들기 위해 있고, 돼지는 먹히기 위해 있는 것이니, 이 지진도 무언가를 위해서 있는 것이네.


스피노자: 그렇다면 저기 저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도 무언가를 위해 있습디까?


판글로스: 그 개개인에게는 불행이로되 이것은 필시 인간 전체에게는 이익이 될 것이네. 왜냐면 목적을 가진 모든 사물은 필연적으로 더 좋은 목적을 원할 것이고, 결국 가장 좋은 목적을 얻게 되니까 말일세. 이 모든 것은 필요 불가결한 것일세.


스피노자: 개인들의 불행이 오히려 더 큰 목적의 달성을 위한 것이라는 말씀이군요. 그렇다면 이 지진의 목적은 뭡니까. 그건 어떻게 알 수 있나요.


판글로스: 자네도 참. 그건 알 수 없는 게 아닌가. 왜냐면 그건, 이미 있다고 하더라도 아직 실현되지는 않았을 것이니까 말일세. 그건 앞으로 차차 알 수 있을 테니, 내 말에 일일이 토를 다는 수고는 그만두게나. 어차피 최고로 잘 되어 있는 세상, 무어 그리 의심이 많은가.


스피노자: 의심할 수밖에요. 지금 당신은 결과를 원인으로 간주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 어찌하여 이미 일어난 일의 원인입니까? 그리고, 더 큰 목적과 더 작은 목적이란 게 있다는 모양인데, 이를테면 돼지를 기르는 농가에서 돼지에게 먹이를 주었다고 합시다. 그 음식물들은 돼지에게 먹히기 위해 존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돼지 자신은 또한 인간에게 먹히기 위해 존재한다니, 그렇다면 그 돼지는 무엇하러 먹이를 먹었다는 말씀입니까?


판글로스: 그거야, 살이 피둥피둥 쪄서 인간에게 더 많은 고기를 제공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그것이 돼지가 존재하는 목적인 것이야. 이처럼 모든 사물에는 목적이 있네. 이것이 바로 모든 일의 원인이 아닌가. 그 원인은 아직 우리가 모르는 것일 뿐, 원래부터 있는 것일세.


스피노자: 철학자여! 당신의 무지를 정당화하려 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모든 사물들이 목적을 갖는다고 해 놓고는, 모든 사물들이 인간의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논증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당신의 말 속에서 나는 인간의 목적 이외의 것은 찾지를 못하겠더이다. 게다가 자기도 모르고, 또 어떻게 해도 알 수 없는 원인에다가 목적이라고 이름을 붙여 놓다니, 그런 것이 사물들의 참된 원인을 구하는 철학자의 판단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판글로스: 어쨌든 나는 저 위대하신 형이상학자인 라이프니츠를 따라 내 입장을 유지하겠네. 철학자로서 말하건대, 그는 틀릴 수 없어!

 

스피노자는 판글로스를 떠나 한숨을 크게 쉬며 독백을 한다.

 

스피노자: 자신의 의지만을 의식하고 있을 뿐, 그 의지의 원인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구나! 그러고서도 철학자라고 착각하고 있다니. 모든 일에서 놀라며 신만을 찾으며 생각하려 하지는 않는 우중들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아, 그들은 자신들의 무지 속에서 이 세상을 그저 정당화하고 있을 따름이로구나!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