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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5/06
    평택 2
    pug
  2. 2006/05/06
    평택 1
    pug

평택 2

일단 구호부터. 평택은 광주 이래 처음으로 주민들을 상대로 한 군사 작전이 벌어진 곳이다. 이것은 살이 떨리고 눈이 뒤집힐 일이다. 그러나 소위 대한민국 국민들은 어찌하여 여기에 별로 분개하지도 않고, 되려 보상금 운운하며 자신도 무슨 말인지 모를 말을 지껄여대는 것일까. 왜 지금 이 나라는 노무현 탄핵 때보다도 더 조용한 것일까. 일단 여기에 첫 번째 방점이 찍힌다.

 

분석은 '사실'에서부터 시작하자. 다수의 대중들은 평택의 투쟁을 '반미꾼'들의 선동으로 보고 있다. 이 사실은, 인정하기 싫지만, 결코 무시될 수 없다. 왜냐하면 투쟁이 대규모로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심각하게 낮추기 때문이다. 하긴 그 때 광주의 시민들은 빨갱이 소리를 들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정권의 조작이었지만, 이것은 어느 정도 사실에 기반한다. 도대체 지금 이 순간에 반미가 왜 등장하는가? 물론, 평택의 투쟁이 미국과 매우 관련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들은 미국에 의한 한국의 종속도 엄연한 '사실'이라 주장할 지 모른다. 또 어떤 이들은 평택이 '신자유주의 군사세계화'의 전략적 교두보가 되었다는 것을 '사실'이라고 선언할 지 모른다. 이것들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진정으로 압도적인 사실은 지금 평택 주민들의 땅을 뺏기 위해 경찰과 군대가 대규모로 투입되었다는 것이다! 반미나 신자유주의 논쟁은, 지금 바로 이 상황에서는, 오히려 논점을 흐리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반미주의자들의 책임으로 돌려야 한다는 말인가. 어느 정도 그렇다. 그들은 물론 가장 '용감하게' 싸우고 있다. 하지만, 평택이 다수 대중의 절대적인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그걸 얻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반미주의자들은 분명 책임이 있다. 다시 말하지만 지금은 구조적 설명이 필요한 시기가 아니다. 실존적 설명만이 필요할 뿐이다. 평택의 현 위기는, 거기에 나중에 미군 기지가 들어설 것이기 때문이 아니다. 바로 이 순간에 그곳이 무차별적인 폭력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인 것이다.

 

두 번째 방점은 폭력에 대한 감수성에 찍힌다. 평택은 폭력에 의해 침탈당했다. 자기가 평생 농사지어 온 땅을 군화발로 짓밟는 이들에게 죽자사자 매달리는 것은 폭력이 아니다. 마지막 남은 보루였던 대추분교를 지키기 위해, 거기서 끌려나가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발버둥치는 것은 폭력이 아니다. 이것은 삶을 망가뜨리는 폭력에 대한 저항이며, 따라서 생명 그 자체의 발산이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보았다. 그리고 분노했다. 그런데 이 분노를 어찌할 것인가. 이 분노를 또다시 폭력에 사용할 것인가?

 

목숨을 걸고 대추분교를 사수하다가 끌려나는 것과, 미대사관으로의 '행진'을 막는 전경을 폭행하는 것은 같은가. 아니다, 이것은 같지 않다. 후자는 분명 폭력이다. 물론 이것은 정당한 분노에 의한 폭력인지 모른다. 그러나 정당한 분노에 의해서 폭력을 사용했다고 하더라도, 그 폭력은 행사되자마자 거꾸로 소급되어 분노 자체도 정당하지 못한 것으로 만든다. 논밭에 들어오는 굴착기를 막기 위해 온 몸을 던지는 것과, 미대사관으로 그저 조금 더 가보겠다고 전경을 밀치고 때리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같은가? 시위 지도부는 시위대가 위험한 상황에 더 크게 노출되고, 사람들이 더 많이 잡혀가고 끌려가는 것으로써 평택에 대한 부채감을 덜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분노에 찬 대규모의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도 시원치 않은 판이다. 그러나 그 시민들이 전경을 때리고 군인을 죽이고 청와대로 진격해서 관리들을 폭행하는 것을 우리는 바라는가? 도대체 우리가 바라는 게 무엇인가? 그것이 평화라는 사실을 잊었는가? 우리는 분노를 표출하는 방식을 배워야 한다. 폭력에 대한 분노는 절대로 폭력적으로 표출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방식을 모른다. 그래서 또 다른 폭력을 저지른다. 물론 이 폭력은 정부의 폭력이 없었다면 발생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이유야 어찌 됐든 시위대의 폭력 역시, 시위에 참여하고픈 사람들, 평택과 함께하고픈 사람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 이 폭력이 시위를 축소시키고, 정부에 대한 사람들의 분노를 머뭇거리게 만든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기분이 참담하다. 할 것이 많다. 그러나 막막하다.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큰 힘이 필요하다. 이 점에서 우리는 대중에게 배워야 한다. 그들은 말하고 있다. 폭력은 싫다고. 반미는 싫다고. 우리의 선택지는 둘 중 하나다. 대중의 무지를 비판하고 사안의 심각성에 대해 설교하거나, 대중이 원하는 것에서 우리가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가를 깨닫고 이 투쟁을 철저하게 대중의 투쟁으로 만들어 나가거나. 여기 남은 우리가 스스로에게, 그리고 대중들에게 떳떳해야지만, 평택 주민들의 필사적인 몸부림이 '폭력'이라고 오해받지 않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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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 1

어제 날맹이 연행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내 마음은 쿵쾅거리기 시작하더니 쉽게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기 때문이었는데, 평택에서 벌어진 일들 뿐만 아니라, 날맹이 지금껏 해 왔던 일들, 또 평택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 내 기억으로만도 1년은 넘게 자보를 붙이고 퍼포먼스를 했던 적극적 평화행동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했던 그러한 활동들이 쉴 새 없이 떠올랐다. 그 모든 것들이 갑자기 자극으로 다가왔나보다. 심장을 콕콕 찔렀다.

 

그간 나는 집회에 가지도 않았고, 운동판에서 하는 일에도 별 관심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아니, 그런 척을 한 게 아니라 진짜로 그랬었다. 집회는 가기가 싫었고,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강연회, 토론회, 퍼포먼스, 액션 등등에 참여하기에는 시간적인 여유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그런데, 그런 곳에 가야만 할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가지 않고 버티려면, 사실은 꽤나 정교하고 탄탄한 정당화가 필요하다. 내가 그렇게 확신을 갖고 행동하는 편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거였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특히 더 확신이 없었다. 집회하는 방식이 싫다고 집회에 가지 않는 게 과연 맞나. 가지도 않으면서 괜히 잔소리만 늘어놓고, 오히려 운동을 갉아먹는 꼴이 아닌가. 내 입장을 아슬아슬하게 옹호하면서도 항상 찝찝했는데, 이 일로 그간 나를 정당화해 왔던 많은 말들이 중심을 못 잡고 한꺼번에 허물어져 버렸다. 나는 뭐라도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당화하기 위한 것들 중 가장 크고 중요한 것 두 가지는 다음과 같다. 일단 나는 나를 '공부하는 사람'으로 정체화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꼭 몸으로 활동이나 집회에 참가하지는 않지만 그것과는 다른 방식의 투쟁을 기획하거나 실천하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공부하는 것이 투쟁과 너무나 관계없는 것으로 보일 때도 많았다. 그럴 때는 투쟁을 준비하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혹은 '정치적 예속'이 아닌, 좀 더 넓고 보편적이며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인간학적 예속'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것도 투쟁이다!"라고 외치기는 싫었다. 그저 어느 정도의 부채감을 느끼며, 그 부채감이 나를 계속해서 자극하기를, 내가 무엇을 하든 나의 근본적인 추동력은 바로 이것이기를 바랬다.

 

또 다른 것은, 집회 방식에 대한 나의 느낌인데, 이것은 거의 혐오에 가깝다. 이 느낌을 꺼내어서 풀어놓아야 할 것이고 추상적이나마 대안도 제시해야겠지만, 생산적인 논의는 조금 뒤로 미루어 놓자. 그저, 나는 이러한 자기 정당화의 기제들이 한 순간에 무너져버린 직후에, 무엇이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게 바로 어제 당일 저녁 7시에 있었던 광화문 집회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사실 그 기제들이 허물어졌다는 말에 내가 방점을 찍고 싶어하는 것은 아니다. 그 단단한 조각들은 엉성한 체계를 이루고 있었기에 허물어졌을 뿐이며, 어제 집회를 다녀오는 와중에 또다시 어느 정도 재구성되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바로 이 재구성의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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