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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6/04
    haunting paul
    pug

haunting paul

 

이를테면, 비틀즈의 노래 "something"을 듣는다.

 

조지 해리슨이 작곡하고 부른 노래다. 편안하면서도 호소력있는 조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멜로디가 참 좋다. 음 하나 하나가 모두 여운을 남길 만큼 공간감도 좋고 무엇보다도 따듯하다. (따듯함은 비틀즈 전매특허) 어떤 테너 가수는 이 노래를 두고 금세기 최고의 사랑노래라고 했다고.

 

그런데, 멜로디에 집중이 잘 안 된다. 마음을 다시 가다듬는다. 왠지 모르게 다른 노래가 섞여서 들리는 것 같다. 잡음이나 이물감은 아니다. 그런데 조지의 옆에서 누군가가 다른 노래를 부르고 있는 듯 하다. 아니, 확실하다. 바로 폴의 베이스라인이다! 보컬 멜로디와 능청스럽게 조응하며 베이스 멜로디가 꿈틀대고 있다. 폴이 노래하고 있다. 전경과 배경이 뒤섞인다. 이것이 'haunting paul'이다.

 

어느 노래를 들어도 그렇다. "come together"를 이끌어 가는 것은 존의 목소리뿐만이 아니다. "because"의 아카펠라 속에도, "you never give me your money"의 간주 속에도 폴이 있다. 심지어는 "back in the u.s.s.r."의 드럼 연주 속에도 있다. 물론 베이스가 모든 노래에 들어가기 때문이기도 하고, 폴이 각종 악기를 연주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조금 다르다. 없는 것처럼 있다. 저기에 서서 흥얼흥얼거린다. 초점이 비껴 있다. 하지만 귀를 기울이면 선명하게 보인다. 폴은 항상 거기에 있다. 없는 줄 알았는데도 있다. 폴은 출몰한다. 그게 그의 매력이다.

 

내가 폴에게 가지고 있는 애정에는 반사적으로 두 개의 질문이 던져져야 한다. 하나는 "왜 존이 아니라 폴인가?"이고, 두 번째는 "왜 조지가 아니라 폴인가?"다.

 

두 번째 질문부터. 조지는 탁월한 송라이터다. "here comes the sun"과 "while my guitar gently weeps"는 적당한 환경만 주어진다면 여지없이 눈 앞에 안개가 서리도록 만든다. 그는 감정을 자극하는 노트를 알고 있다. 하지만 그에게는 '비틀즈'가 없다. 그는 비틀즈의 멤버이지만 비틀즈의 구성 요소는 아니다. 이것은 어떤 천재, 혹은 보편성, 혹은 어떤 위대성과 관련된다. 이는 그의 능력과 크게 상관없다.

 

 

비틀즈는 존과 폴이 만든다. 이 역시 그들의 능력과 상관없다. 아니, 전혀 없지만은 않다. 그러나 여기에는 우연이 개입한다. 둘의 경합이 비틀즈를 만든다. 둘은 동전의 양면이지만, 분명하게 다른 무늬가 새겨져 있는 양면이다. 둘은 떨어질 수 없지만, 종종 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물론 떨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비틀즈의 아우라는 사라진다. 각자의 아우라도 사라질 수 있다. 실제로 폴의 아우라는 사라졌다.

 

존과 폴이 함께 작곡하거나, 혹은 각자 작곡한 모든 곡에는 "lennon & mccartney"라는 서명이 붙어있다. 존이 앞에 있다. 이것은 그들의 약속이었다. 폴은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후에는 살짝 자리를 바꾸기도 한다. 가끔 앞에도 있어 보고 싶은 모양이다. 그러나 역시 앞에 오는 것은 존이다. 존은 "imagine"이다. 또한 존은 오노 요코다. 존은 "power to the people"이다. 따라서 존은 폴과 분리된 이후에도 독자적인 위대성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폴은 존과 분리되면 그 위대성이 소멸한다. 존 없이 폴은 "silly love song"이나 부르는 존재일 뿐이다.

 

존은 죽었다. 폴은 아직 죽지 않았다. 결국은 둘 다 죽을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그들을 기억할 것이다. 존이 죽은 이후에도 폴은 도처에 있다. 존은 죽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그를 그리워한다. 존은 그저 위대할 뿐이다. 폴도 가끔은 위대하다. 그러나 동시에 아무것도 아니다. 이는 폴이 자꾸 출몰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폴의 위대성을 자주 잊는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좋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이름이 바로 존과 폴이다. 둘 다 좋다. 그런데 나는 폴이 더 좋다.

 

덧) 우리는 '정치적 올바름'으로부터의 해방구를 하나쯤 가지고 있어야 한다. amoral한 것으로 하나쯤. 숨을 쉬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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