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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무치는 시대정신이다

후안무치는 시대정신이다

한때 정치인의 전유물이었던 ‘뻔뻔함’은 이제 대중들의 일상 속으로 … 과연 당신의 진보성은 정치·경제·문화의 삼위일체성을 지키고 있는가

▣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후안무치(厚顔無恥)라는 말이 있다. “뻔뻔스럽고 부끄러워함이 없음”이란 뜻이다. 후안무치에 친화적인 정치판에선 상대편을 비난할 때 자주 쓰는 상용어지만, 보통 사람들 사이에선 큰 욕이다. 넓고 묽게 보자. 후안무치를 도덕의 경계선상에 걸쳐 있는 하나의 인간적 특성으로 보자.

김구가 이승만의 적수가 되지 못한 이유

정치인의 제1 자질이 무엇일까? 단연 후안무치다.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보통 사람의 도덕감정을 고수하면서 정치를 한다는 건 사실 거의 불가능하다. 정치인에겐 비상한 수단을 사용하고 상황에 따라 언행을 바꿔야 할 필요성이 훨씬 더 크기 때문이다.


△ 정치인의 제1 자질은 ‘후안무치’다. 대통령이 된 사람은 경쟁자들과 비교할 때 이 자질이 더 뛰어나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3당 합당을 만들어내며 그 능력을 잘 보여주었다. 1990년 1월 3당 합당 발표 장면. (사진/ 연합)

다른 나라를 볼 것도 없이 한국 현대사만 살펴봐도 이는 분명해진다. 대통령이 된 사람들은 경쟁자들과 비교해볼 때 후안무치 자질이 더 뛰어났다. 예컨대 이승만과 김구를 비교해보라. 김구도 다른 독립투사에 비하면 꽤 후안무치한 편이었지만 감히 이승만의 적수는 되지 못했다. 이는 대통령들에게 다른 탁월한 능력과 자질이 있었다는 걸 부정하는 게 아니다. 다른 탁월한 능력과 자질은 기본이고 거기에 후안무치 자질이 더해져야만 대통령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김영삼부터 살펴보자. 3당 합당과 내각제 각서 파동은 김영삼의 탁월한 후안무치 능력을 보여주었다. 정계은퇴 식언과 ‘20억+알파’ 사건은 김대중의 후안무치 능력을, 대선후보 전 동교동계에 대한 우호적 태도와 지역주의 양비론의 일시적 위장 등은 노무현의 후안무치 능력을 입증해준다.

대체적으로 보아 높이 오른 사람일수록 후안무치를 저지른 건수가 더 많고 농도가 더 강하다. 피부가 얇고 부끄러움을 잘 타는 사람이 정치인이 되거나 조직의 리더가 된 걸 본 적이 있는가? 설사 있다 하더라도 유능하진 않았을 게다.

정치는 인간의 야수적 속성을 다루는 영역이다. 어느 영역치고 그 속성과 무관하랴만, 본격적인 권력투쟁이라는 점에서 정치를 따라갈 수 있는 영역은 없다. 경제 영역의 투쟁도 무섭긴 하지만, 그쪽은 이익 중심이기 때문에 이익과 더불어 이념·명분 등이 칼춤을 추는 정치판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이는 경제계의 거물이었던 정주영과 김우중이 정치판에 뛰어들거나 기웃거리다가 얼마나 허망하게 무너졌는가를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경제 영역에서도 후안무치가 경쟁력이라는 건 두말할 필요가 없다. 최근의 삼성과 현대차 사태를 보라. 왜 잘나가는 재벌그룹 총수일수록 후안무치의 농도가 강한가? 그건 평소 후안무치했기 때문에 그 위치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는 답으로 대신하면 되겠다.


△ 올 초부터 대학 내 선거 관리권은 선거관리위원회로 2004년 총장임명 후보자 선출선거를 하고 있는 한 대학의 교직원들. (사진/ 연합 조용학 기자)

주변을 둘러보기 바란다. 후안무치 자질이 비교적 뛰어난 사람들을 볼 수 있을 게다. 그들에겐 좋은 점이 많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교섭하고 해결하는 능력이 비교적 탁월하다. 선수는 선수를 알아보는 법이다. 이미 권력을 가진 쪽은 후안무치 자질이 뛰어난 즉, 같은 선수를 알아보고 요청·요구에 응하게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뻔뻔함’은 새로운 철학적 사유 양식

후안무치 자질이 뛰어난 사람이 자신의 후안무치를 자각할 수 있는가? 없다! 바로 여기서 비극이 싹튼다. 자신이 후안무치하다는 자의식을 갖게 되면 후안무치를 구사하기 어려워진다. 후안무치를 “안녕하세요”라고 가볍게 인사하는 기분으로 체화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보통 사람의 상식적 판단을 넘어서는 일을 해도 그게 얼마나 큰 문제인지 판단하기 어려워진다. 같은 후안무치 자질을 가진 측근 인사들에게 의존해봐야 별 도움이 안 된다.

대중은 묘한 동물이다. 그들은 정치인의 후안무치가 필요악임을 흔쾌히 인정하면서도 어느 순간 돌아서서 후안무치하다고 욕을 한다. 언제 어느 경우에 그러는지 그건 확실치 않다. 그들은 “해도 너무하네”라고 하는데, 과연 어디까지가 괜찮고 어디서부터 너무한 건지 그들 자신도 답을 갖고 있진 않다. 그래서 정치는 늘 대중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게임이 된다.

1920년대 후반 미국 마피아 조직을 주름잡았던 알 카포네는 “상류사회란 사회적 지위를 잃지 않고 이익을 만끽하려는 뻔뻔스러운 놈들로 이 ‘훌륭한 사람들’은 합법적인 공갈을 일삼고 있다”고 주장했다.

조폭이 감히 그런 말을 해? 아니다. 상류층의 후안무치가 임계점을 넘어서면 조폭도 당당해진다. 일반 대중인들 무얼 망설이랴. 민주화 이후 한국인에게 나타난 두드러진 특성 중 하나는 후안무치의 일상화다. 후안무치는 시대정신의 반열에 올랐다. 보수파들은 그게 민주화 탓이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그게 아니다. 후안무치의 엘리트 독식 체제에서 대중화 체제로 넘어간 것이다. 그러니 일단 긍정적 변화로 보는 게 옳다.

그건 마치 아줌마들의 후안무치를 비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남존여비 가부장 체제하에서 처녀 때까지 억눌려왔던 후안무치 욕구가 애 낳고 폭발하면 원인부터 따져보는 게 옳다. 나는 후안무치해도 좋지만 너는 안 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후안무치의 평준화는 사회 정의다.

독일에 페터 슬로터다이크라는 괴짜 철학자가 있다. 이 사람은 ‘위선적 계몽주의’를 질타하면서 ‘뻔뻔함’을 새로운 철학적 사유 양식이자 실천 항목으로 제시했다. 이론과 명분대로 살려면 위선적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 그대로의 표현 양식이라 할 뻔뻔함을 발휘하면서 문제를 짚어보자는 것이다.

보통 사람이 깨닫기 어려운 심오한 뜻이 있겠지만, 후안무치를 다시 보자는 메시지만큼은 그대로 접수해도 좋겠다. 사실 한국에선 이미 오래전부터 실천돼온 것이다. 한동안 열풍이 불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아이 기(氣) 살려주기 운동’도 기실 따지고 보면 이 후안무치한 세상에서 내 새끼 경쟁력 키워주겠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후안무치 경쟁

지금 이 후안무치 이야기를 행여 냉소로 이해하면 크게 실수하는 거다. 지금 우리는 세상의 문법에 대해 탐구하는 것임을 잊지 말자.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후안무치 경쟁’이 이대로 좋은가 하는 걸 정색을 하고 살펴보자는 뜻이다.

버트런드 러셀은 “혁명의 순수성은 2주일을 넘길 수 없다”고 했다. 민주화운동이나 개혁의 순수성은 얼마나 갈까? 2개월? 2년? 얼마이건 그 주체는 모른다. 왜 그런가?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그 주체에겐 후안무치 자각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멀리서 보기엔 이미 순수하지 않은데도 자신은 순수하다고 생각하는 걸 무슨 수로 막으랴.


△ <조선일보>는 문화적으로 ‘좌파 담론’의 상품화에 열을 올리는데, 그건 단지 극우성을 위장하려는 술책일까. 상점 앞의 신문 가판대.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던 농민운동가 천규석이 <쌀과 민주주의>라는 책에서 “지나고 보니, 60~80년대까지의 그 풍성했던 민주화운동이란 것들도 잘난 놈들에게는 입신출세와 물질적 보상이라는 두 가지의 전리품을 동시에 거두어갈 기회로 활용되었다”고 독설을 퍼부었을 때,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런 말을 듣지 않으려면 민주화운동을 한 인사들은 어떤 공직도 맡지 않고 계속 밖에서만 떠돌아야 하고, 공직은 운동 근처에도 가보지 않은 사람들이 독식해야 한다는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달리 생각한다. 천규석이 말하고자 한 건 운동가들의 공직 진출 자체가 아니라 공직 진출 이후 보여주는 모습일 거라고 이해하게 되었다. 이는 글과 말로만 운동을 했던 지식인들에게도 해당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혹 나는 나의 글을 입신출세와 물질적 보상이라는 두 가지의 전리품을 챙기기 위한 도구로 활용하고 있는 건 아닌가? 모든 지식인들이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할 질문이다. 후안무치는 정치인들만의 무기는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고종석은 언젠가 ‘글쓰기의 무서움’이란 글에서 “자신의 발언을 자신의 발 밑에 조회해보는 일은 누구에게나 힘든 일일까?”라는 의문을 제기하면서 “자신이 실천할 수 있는 것 너머를 이야기하지 않는 절제는 공적 발언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 모두에게 긴요한 덕목이 되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런 주장에 대해 반론이 있을 수 있겠다. 자신이 실천할 수 없다 하더라도 옳은 메시지라면 널리 전파하는 게 좋지 않을까? 이런 반론에도 일리는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로 인한 문제가 사회적으로 너무 심각하다는 걸 절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한국 사회엔 ‘담론의 거품’이 너무 심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좀 유치한 이야기를 해야 되겠다. 구체적 각론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이야기는 유치해질 수밖에 없다는 변명도 덧붙이면서 말이다.

적어도 <한겨레21> 수준의 잡지에선 ‘부국강병론’이니 ‘소득 2만달러론’이니 하는 것은 경멸받기 딱 좋은 보수파 담론으로 통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경멸이 과연 정직한 것인가에 강한 의문을 품고 있다. 바꿔 말하자면, 국가주의·민족주의는 무조건 때려야 진보고 품위 있는 지식인으로 통하는 이 풍토가 언행일치를 전제로 한 정직성에 근거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다.

잠시 <조선일보>를 보자. 이 신문은 자주 문화적으론 ‘좌파 담론’의 상품화에 열을 올린다. <조선일보>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극우성을 위장하려는 술책이라는 모범답안을 내놓을지 모르겠다. 일리 있는 주장이지만, 과연 그게 전부일까? 그게 그 신문 독자들이 원하는 상품이기도 하다는 걸 인정할 수 없는가?

“잘 살아보세”는 “잘 써보세”로 바뀌고…

‘보보스의 법칙’이란 게 있다. 미국에서 학생운동권 출신이지만 일류대를 나와 좋은 직장을 갖게 된 이른바 ‘보보스족’이 정치경제적 풍요를 누리면서 과거 운동권 시절과 비교해 갖게 되는 불편한 마음을 해소하고자 문화적으로만 진보 냄새를 피우는 걸 말한다.

과연 <한겨레21>의 독자들은 <조선일보> 독자들과 얼마나 다른가? 당신의 진보성은 정치·경제·문화의 삼위일체성을 지키고 있는가? 물론 삼위일체를 고수하는 게 옳다거나 바람직하다는 법은 없다. 얼마든지 각기 따로 놀 수 있다. 다만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그 어떤 일관된 경향성에 주목해보자는 것이다.

많은 지식인들이 김대중 정권은 물론이고 노무현 정권이 경제적으로 ‘성장주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동의한다. 그런데 ‘성장주의 패러다임’이 과연 한국인 다수가 벗어나기를 원하는 것인가? 돌이키기엔 이미 너무 멀리 나간 것 아닌가?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는 사라진 유물이 아니다. “잘 써보세”로 바뀌었을 뿐이다. 민주시민의 윤리는 소비자 윤리로 대체되었다. 소비자가 악덕 상인에 분노하듯, 민주시민은 악덕 정치권에 분노하는 정도의 윤리는 갖고 있지만, 단지 거기까지뿐이다. 민주주의는 소비주의와 결탁했다. 민주시민은 그 이상의 선은 넘으려 하지 않는다.

일부에 지나지 않을망정, 그 패러다임을 비판하는 지식인들도 매년 해외여행을 하고 중형차를 굴리고 골프를 치기도 한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대학은 재벌 총수들에게 구걸하다시피 해서 얻은 돈으로 이른바 ‘대학 개혁’을 하고 있지만, 그것에 저항하진 않으며 그로 인한 수혜만 누린다.

이런 지적은 부당한 것일 수 있다. 이런 종류의 질문을 받았던 미국의 노엄 촘스키가 짜증을 냈듯이, 유치하다고 짜증을 낼 만한 일이긴 하다. 그러나 논점은 지식인 개개인이 아니라 집단적 차원의 담론 생산이 현실 세계와 맺는 관계다. 그 괴리가 클수록 지식인의 ‘상징 자본’은 튼실해질 수 있겠지만, 그것이 과연 세계를 바꾸는 데 어떤 실천력을 갖는가는 별개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제도와 법의 차원에선 한국 사회는 개혁을 할 만큼 했다. 물론 할 게 더 남아 있고 앞으로 더욱 해야겠지만, 제도와 법만으론 해결할 수 없는 한 가지가 남아 있으니 그게 바로 의식과 행태의 영역이다. 예컨대 정치판에선 ‘보스 정치’가 거의 사라졌지만, 대학엔 건재하다. 학연주의와 파벌주의는 정치권 뺨을 치고도 남는다. 대학 내 선거 수준도 직업 정치판 선거보다 높지 않다는 이유로 관리권을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빼앗겼다. 그런데 나를 포함해 그 바닥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늘 사회를 향해서만 설교를 늘어놓는다.

정치권 동지들을 새삼 경외하다

자신의 후안무치에 대해 가끔이나마 자각을 한다는 건 괴로운 일이다. 그럴 때마다 글쓰기가 몹시 싫어지니까 말이다. 공적 발언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자신이 실천할 수 있는 것 너머를 이야기하지 않게 되면 여러 가지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다. 무엇보다도 언행일치를 하는 사람 위주로 글쓰기 시장이 물갈이돼 담론과 세상의 거리가 좁혀지고 그에 따라 실천력도 강해질 게 아닌가. 정치권의 후안무치 동지들에게 새삼 경외감을 갖게 된다. 그들에겐 이런 고민도 없을 터이니 말이다. 아닌가? 모르겠다.

 

인터넷한겨레21의 칼럼

(http://h21.hani.co.kr/section-021128000/2006/05/02112800020060504060804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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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학

정치학이 아니라 윤리학.

정치적 예속이 아니라 인간학적 예속.

맑스 이전에도 '좌파'는 있었을 것이다. 그들을 무어라고 부를 것인가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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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unting paul

 

이를테면, 비틀즈의 노래 "something"을 듣는다.

 

조지 해리슨이 작곡하고 부른 노래다. 편안하면서도 호소력있는 조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멜로디가 참 좋다. 음 하나 하나가 모두 여운을 남길 만큼 공간감도 좋고 무엇보다도 따듯하다. (따듯함은 비틀즈 전매특허) 어떤 테너 가수는 이 노래를 두고 금세기 최고의 사랑노래라고 했다고.

 

그런데, 멜로디에 집중이 잘 안 된다. 마음을 다시 가다듬는다. 왠지 모르게 다른 노래가 섞여서 들리는 것 같다. 잡음이나 이물감은 아니다. 그런데 조지의 옆에서 누군가가 다른 노래를 부르고 있는 듯 하다. 아니, 확실하다. 바로 폴의 베이스라인이다! 보컬 멜로디와 능청스럽게 조응하며 베이스 멜로디가 꿈틀대고 있다. 폴이 노래하고 있다. 전경과 배경이 뒤섞인다. 이것이 'haunting paul'이다.

 

어느 노래를 들어도 그렇다. "come together"를 이끌어 가는 것은 존의 목소리뿐만이 아니다. "because"의 아카펠라 속에도, "you never give me your money"의 간주 속에도 폴이 있다. 심지어는 "back in the u.s.s.r."의 드럼 연주 속에도 있다. 물론 베이스가 모든 노래에 들어가기 때문이기도 하고, 폴이 각종 악기를 연주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조금 다르다. 없는 것처럼 있다. 저기에 서서 흥얼흥얼거린다. 초점이 비껴 있다. 하지만 귀를 기울이면 선명하게 보인다. 폴은 항상 거기에 있다. 없는 줄 알았는데도 있다. 폴은 출몰한다. 그게 그의 매력이다.

 

내가 폴에게 가지고 있는 애정에는 반사적으로 두 개의 질문이 던져져야 한다. 하나는 "왜 존이 아니라 폴인가?"이고, 두 번째는 "왜 조지가 아니라 폴인가?"다.

 

두 번째 질문부터. 조지는 탁월한 송라이터다. "here comes the sun"과 "while my guitar gently weeps"는 적당한 환경만 주어진다면 여지없이 눈 앞에 안개가 서리도록 만든다. 그는 감정을 자극하는 노트를 알고 있다. 하지만 그에게는 '비틀즈'가 없다. 그는 비틀즈의 멤버이지만 비틀즈의 구성 요소는 아니다. 이것은 어떤 천재, 혹은 보편성, 혹은 어떤 위대성과 관련된다. 이는 그의 능력과 크게 상관없다.

 

 

비틀즈는 존과 폴이 만든다. 이 역시 그들의 능력과 상관없다. 아니, 전혀 없지만은 않다. 그러나 여기에는 우연이 개입한다. 둘의 경합이 비틀즈를 만든다. 둘은 동전의 양면이지만, 분명하게 다른 무늬가 새겨져 있는 양면이다. 둘은 떨어질 수 없지만, 종종 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물론 떨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비틀즈의 아우라는 사라진다. 각자의 아우라도 사라질 수 있다. 실제로 폴의 아우라는 사라졌다.

 

존과 폴이 함께 작곡하거나, 혹은 각자 작곡한 모든 곡에는 "lennon & mccartney"라는 서명이 붙어있다. 존이 앞에 있다. 이것은 그들의 약속이었다. 폴은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후에는 살짝 자리를 바꾸기도 한다. 가끔 앞에도 있어 보고 싶은 모양이다. 그러나 역시 앞에 오는 것은 존이다. 존은 "imagine"이다. 또한 존은 오노 요코다. 존은 "power to the people"이다. 따라서 존은 폴과 분리된 이후에도 독자적인 위대성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폴은 존과 분리되면 그 위대성이 소멸한다. 존 없이 폴은 "silly love song"이나 부르는 존재일 뿐이다.

 

존은 죽었다. 폴은 아직 죽지 않았다. 결국은 둘 다 죽을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그들을 기억할 것이다. 존이 죽은 이후에도 폴은 도처에 있다. 존은 죽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그를 그리워한다. 존은 그저 위대할 뿐이다. 폴도 가끔은 위대하다. 그러나 동시에 아무것도 아니다. 이는 폴이 자꾸 출몰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폴의 위대성을 자주 잊는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좋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이름이 바로 존과 폴이다. 둘 다 좋다. 그런데 나는 폴이 더 좋다.

 

덧) 우리는 '정치적 올바름'으로부터의 해방구를 하나쯤 가지고 있어야 한다. amoral한 것으로 하나쯤. 숨을 쉬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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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6월


the beatles - abbey road(1969)

all-time-favorite!

 

cornelius - fantasma(1997)

음향효과로서는 최고, 필요시 발췌할 수 있음. 주욱 듣기에는 좀...

 

sunset rubdown - shut up i am dreaming(2006)

안 어울리는 것들의 기이한 조화. 특히 맘에 안 들면서 중독성 있는 보컬.

 

tool - 10,000 days(2006)

어둠 속에서 치는 폭풍우.

 

nick drake - five leaves left(1969)

아주 예쁘게 꾸며진 소박한 오두막집. 엄청 들어가보고 싶지만 별로 살고 싶지는 않다.

 

pink floyd - meddle(1971)

.

 

sigur rós - ágætis byrjun(1999)

충격과 중독. 숭고 혹은 스펙타클?

 

system of a down - mezmerize(2005)

"eloquence belongs to the conquerer!" 지저분한 녀석들의 지저분한 놀이, 혹은 약간의 슬픔.

 

radiohead - airbag / how am i driving(1998)

.

 

led zeppelin - iv(1971)

.

 

trespassers william - having(2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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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즈

갑자기 삘(feel)받아서...

 

 


(왼쪽부터 링고 스타,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존 레논)

 

 


(존. 으아~)

 

 

 

(조지. 얼굴로만 보면 제일 잘생겼는데... 이 사진은 그다지)

 

 


(링고. 귀엽다)

 

 


(폴. 웬일이지...)

 

 


(스튜디오에서. 존의 옆에는 마치 없는 사람처럼 요코 오노가)

 

 

 


(애플 레코드사 옥상에서 깜짝 콘서트. 그들의 마지막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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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계획

공부를 하지 못하고 있을 때는 꼭 이런 것들을 적어대고 싶은 마음이 든다. 어쩌랴, 한 번 짜내보자!

 

1. 불어 공부

'에꼴프랑스'에서 받은 자료 일독, 수업 교재 일독 후 곧바로,

<<어린 왕자>> ⇒ <<이방인>> ⇒ <<시론>>의 순으로 읽자.

방학 중에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두고 봐야 겠다.

+ 불어 입문 1을 다시 청강해야겠다!

 

2. 베르그손 독해

황수영의 <<베르그손>> 찬찬히 읽기. 어떻게 하면 정리하며 읽을 수 있을까.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읽어야 하는 것일까.

 

3. 집에 있는데 못 읽은 책 읽기

<<니체, 프로이트, 맑스 이후>> 꼼꼼히 읽기. 이것도 정리하면서.

<<욕망의 전복>>은 라캉 세미나를 하는 짬짬이 읽어 두자.

<<니체의 위험한 책...>>도 다시 읽어 보자.

 

4. 새로운 책 읽기

루틀리지의 critical thinker 시리즈인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두려워하랴>>와

<<스피박 넘기>>를 보자.

<<헤겔 또는 스피노자>>도 사 보자.

 

어차피 이 정도도 다 못할 듯 싶으므로 여기까지만 정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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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합리론 철학에서 실체의 개념


Ⅰ 실체 개념과 근대 철학의 태동

 

철학자들은 세계를 상식적인 수준에서 바라보는 것을 지양하고, 현상의 배후에 존재하는 보다 근본적인 원리에 대해서 탐구해왔다. 이러한 탐구를 위해서는 그 탐구 활동이 대상으로 하는 세계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 먼저 결정하고 제시해야만 했다. 그들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 속에 존재하는 불변적인 것, 우연의 연쇄 속에 존재하는 필연적인 것, 다양한 속성을 가진 외관의 껍질 속에 존재하는 단순하고 본질적인 것을 철학의 직접적인 탐구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본질적인 대상은 각 철학의 입장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다양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러한 원소가 무엇인지에 대한 판단과 설명이 각각의 철학 자체를 특징짓고 그 주요한 부분을 구성하게 되었다. 이를 철학에서의 실체론(substantialism)이라고 한다.


근대 이전에는 주로 자연에 존재하는 개별 사물이 실체(substance)로 간주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비가시적인 이데아 세계를 부정하면서 개별적 사물을 실체로 인정하고, 그러한 사물 안에 사물의 본질적인 형상이 들어있다고 한 이래로, 이를 이어받은 중세의 스콜라 철학에 이르기까지 자연의 사물들은 자신 안에 능동적인 운동의 원리를 갖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이를테면, 불은 위로 오르려는 성질을 갖고 있고 돌은 아래로 떨어지려는 성질을 갖고 있다. 이는 실제로 근대 이전의 일반적인 사람들이 자연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이기도 했는데, 이때까지 그들의 눈에 비친 자연은 지금의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외부적인 힘에 의해서만 움직일 수 있는 완전히 비정신적이고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나 르네상스를 거쳐 근대에 이르면 자연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에 어떤 커다란 인식론적 단절이 일어나게 된다. 이 시기에는 새로운 자연학이 태동하게 되는데, 이 자연 과학은 발전된 실험 도구와 이를 이용한 경험적인 탐구를 통해 물리적 세계의 자연 법칙들을 하나하나 규명해냈다. 이로써 자연적 세계는 인간의 이성으로 파악 가능한 인과적 법칙들에 의해 엄격하게 결정되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제 자연은 더 이상 내적인 원리로 운동하는 능동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인과 법칙을 따라서 외부적 힘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정적이고 수동적인 존재가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이러한 경험 과학이 종교의 권위를 위협하며 진리나 객관적 사실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경험 과학을 통해 얻은 성과는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철학에 반영되어야만 했고, 또 반영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근대 철학의 실체 개념은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되었다.


실체라는 개념은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감각적인 현상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생겨난 것이므로, 이는 감각적인 것의 우위를 주장하는 근대 경험론보다는 현상의 내적 본질에 대한 이성적 인식을 강조하는 합리론에 의해서 정교하게 발전되었다. 이에 따라 나는 이 글에서 근대 합리론의 대표적 철학자 세 사람, 즉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의 실체 개념에 대해서 설명하고, 각 실체론의 특징과 의의를 서술하려고 한다. 또한 이 세 철학자의 실체론이 물론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주장되었고, 이전 철학에 대한 비판을 통해 점점 더 발전하는 면모를 보여주는 것도 일면 사실이겠지만, 이러한 흐름의 역사로 환원할 수 없는 각각의 철학에 고유한 특징 역시 존재할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이 세 실체론이 어떤 하나의 철학적 흐름의 발전 과정을 순순히 따라가고 있다고는 간주하지 않을 것이며, 각 실체론에 고유한 내용을 설명하는 데 좀 더 주력할 것이다.

 


Ⅱ 근대 주요 합리론자들의 실체론

 

1 데카르트의 실체론

 

중세까지는 자유의지의 가능성에 대해 고찰할 때 인간이 신의 예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지에 초점이 맞추어졌으며,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신학적 설명으로써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근대 경험 과학이 물리적 인과 필연성이라는 또 하나의 필연성을 확인하고 발전시켜 나감으로써, 인간의 자유의지를 설명하는 일은 더욱 더 어려운 문제가 되었다. 따라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옹호하는 철학자들에게는 물리적 인과성과 의지 자유를 어떻게 양립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가 최대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데카르트(René Descartes)는 바로 이 지점에서 자신의 실체론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이는 바로, 인과 필연성을 법칙으로 하는 물리학의 영역과 자유의지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윤리학의 영역을,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실체를 통해 설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데카르트는 완전히 배타적인 두 종류의 실체, 즉 정신과 물체를 설정한다. 이로써 중세 철학에서 자연에 부여하던 최소한의 정신적인 특성은 자연 세계로부터 완전히 제거되었으며, 이러한 물체적 실체의 영역은 물체 외적인 작용인만이 운동의 원리가 되는 기계론적인 세계로 변모하였다. 데카르트의 물체적 실체의 영역은 근대적 유물론의 단초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자연으로부터 제거된 정신성을 나(자아)의 의식 속으로 환원함으로써, 그리고 물체의 연장성과 운동성을 제외한 모든 속성을 정신이 주관 안에서 구성하는 것으로 봄으로써, 유물론과는 결정적으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근대 철학이 태동하는 순간과도 동일시되는 저 유명한 코기토의 도출 과정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나의 정신은 무한히 특권화되며 물체 세계는 무한히 탈실재화된다.

 

데카르트는 <<철학 원리>>에서 실체를 “실존하기 위해 다른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으로 정의한다. 실존의 독립성을 실체의 기본 원리로 천명한 것이다. 이 정의를 통해 정신은 육체와 독립적으로 실존할 수 있게 되며, 따라서 영혼불멸을 설명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이 정의를 엄밀하게 적용할 경우, 실체는 다른 실체로부터 뿐만 아니라 실존의 원인으로부터도 독립적이어야 한다. 즉, 실체는 실존에 있어서 완전히 자족적이어야만 하며 이렇게 본다면 신(神)만을 실체로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이 정의를 완화하여 신을 제외한 다른 실체로부터만 독립적인 것도 유한한 실체로 인정함으로써 정신과 물체라는 두 종류의 유한 실체를 설정하였다. 이는 후에 스피노자로부터 비판을 받게 되는 부분이며 스피노자는 이 정의를 보다 엄격하게 적용하여 신만이 실체라는 신 유일실체론을 전개하였다.


실체의 이러한 실존의 독립성은 두 종류의 실체가 각각 독립적으로 인식된다는 사실, 즉 두 개의 서로 다른 속성(attribute)을 통해 인식된다는 사실에 의해서 보증된다. 인식의 독립성으로부터 실존의 독립성이 도출되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알 수 있듯이 데카르트는 실체를 속성을 통해서만 인식되는 것으로 보았다. 즉, 실체가 무(無)가 아니라는 사실은 속성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속성들 중에서도 한 실체에 오직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가장 본질적인 속성이 있으며, 다른 모든 속성들1)은 이에 의존한다. 이러한 속성은 실체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속성 개념과는 달리 실체의 본성과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며, 따라서 실체와는 사실상 구별할 수 없는 것2)이다. 이러한 속성을 특히 주요 속성이라고 하며, 하나의 실체는 하나의 주요 속성을 갖는다. 정신의 주요 속성은 사유(thought)이고 물체의 주요 속성은 연장(extension)이다.


속성이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는 표현은 실체가 이러한 속성과는 분리된 기체로서 파악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물체실체는 항상 연장이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만 파악될 수 있다. 예를 들면, 하나의 돌멩이를 생각했을 때, 우리는 그것의 특정한 크기나 모양을 굳이 떠올리지 않고서도 그것을 표상할 수 있지만, 그것이 삼차원적으로 연장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이를 표상할 수 없다. 이 때 이러한 연장을 물체실체의 본질적 성질이라고 한다면, 그것의 특정한 크기나 모양, 그리고 운동의 여부 등은 우연적 성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개별적 실재의 상태나 운동의 방식을 데카르트는 양태(mode)라고 한다. 이는 실체의 본질을 이루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실체는 양태와 분리된 채로 파악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양태 역시 실체의 변용(affection)이며, 실체와 완전히 외재적인 관계를 가지는 우유(accident)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두 종류의 실체는 작용에 있어서도 서로로부터 독립적이며, 이를 바탕으로 데카르트는 서로 다른 두 종류의 규칙을 가지고 작동하는 두 영역을 구분할 수 있었다. 그는 이 구분을 통해 인과 필연성과 의지 자유의 양립 가능성 문제를 해결하고 자연과학과 윤리학을 정당화하려 하였다. 이처럼 실체의 독립성은 실존의 독립성, 인식의 독립성, 그리고 작용의 독립성을 모두 함축하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데카르트의 이러한 실체론은 기독교적 전통을 합리적으로 해석하려는 하나의 시도로 볼 수 있다. 이 전통에 따르면 세계를 창조한 신은 세계 바깥에 있어야 하므로 이 세계와는 외재적인 관계를 갖는다. 이러한 기독교적이며 초월적인(transcendent) 신 개념을 유지한 채로 만약 신만을 실체로 인정한다면, 이 세계 자체에 존재하는 실재들은 실체적 요소들을 전혀 갖고 있지 않은, 마치 이데아 세계의 그림자와 같은 존재가 된다. 데카르트는 이러한 결론을 거부하고 이 세계 안에도 존재하는 유한 실체를 설정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한다. 이러한 유한 실체 개념은 초월적 신 존재를 가정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으로, 이 가정 하에서는 이처럼 실체의 개념을 단일하게 정의할 수 없다. 반면 신을 이 세계의 내재적인 원인으로 정의하는 스피노자는 유한 실체를 설정할 필요가 없게 되며 따라서 단일한 실체 개념이 유지된다. 또한 라이프니츠 역시 기독교적 전통에 서 있는 철학자이므로, 창조주인 실체로서의 신뿐만 아니라 신에 의해 창조되는 다른 개체적 실체들도 인정하게 되는데, 그는 모나드라는 새로운 실체 개념을 창안하여 데카르트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게 된다.


데카르트 실체론의 가장 큰 난제는 바로 정신과 육체의 상호작용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나(인간)를 제외한 이 세계의 모든 개체적 실재는 사유하지 않는 물체적 실체일 뿐이고, 신은 연장이 없는 사유하는 실체일 뿐이지만, 나라는 존재는 사유와 연장이라는 속성을 모두 갖고 있으며, 그 두 실체 사이에는 모종의 상호작용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면, 나의 의지에 따라 나의 신체가 움직이며 신체가 손상되면 정신이 고통을 받는다. 하지만 두 종류의 실체는 서로 완전히 독립적으로 인식되고 작용하는 것으로 정의되었으므로, 둘 사이의 상호작용을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은 문제인 것이다. 데카르트는 이를 송과선 가설을 통해 해결하려 한다. 송과선은 뇌의 중심에 존재하는 작은 선(gland)으로서 영혼과 신체의 소통을 담당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정은 다소간 억지스러운 것이어서, 후에 데카르트를 따르는 일군의 철학자들은 우리의 결의와 행동이 결합이 전능한 신의 의지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기회원인론을 주장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또한 스피노자에게서는 정신과 물체가 하나의 실체의 두 속성으로서 평행하는 것이 되어서 상호작용의 문제가 해소되어 버리고, 라이프니츠는 물체실체를 비판하고 부정함으로서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만든다.

 

2 스피노자의 실체론

 

스피노자(Benedictus de Spinoza)는 데카르트가 고안하거나 중요하게 부각시킨 여러 개념들을 상당 부분 이어받기도 하지만, 이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여 데카르트 철학과는 상반되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따라서 스피노자가 사용하는 철학적 개념들은 그가 그것을 사용하는 고유한 방식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한다. 그가 전복적인 방식으로 사용하는 기존 개념들 중 하나가 바로 신인데, 이 신은 유대-기독교의 신 개념과는 전혀 다르다. 스피노자는 실제로 공공연한 이단적 주장으로 인해 자신이 속해 있던 암스테르담의 유대 공동체로부터 파문을 당하였으며, 그의 주저 <<윤리학>>의 1부 부록에서는 기존 철학과 종교의 신인동형론적(anthropomorphic) 신 개념을 신랄한 어조로 비판하고 있다. 그의 신 개념의 특징은 그가 신을 자연화된 존재로 파악한다는 데 있으며, 이 때문에 그는 범신론자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의 이러한 신 개념은 실체론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왜냐하면 스피노자에게는 신만이 오직 유일한 실체이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실체를 “자신 안에 있으며 자신을 통해 파악되는 것”으로 정의한다. 이 정의에 의하면 유일 실체인 신의 외부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따라서 이 실체는 절대적으로 무한한 것이 된다. 또한 스피노자의 실체는 자기-원인적(self-caused)이므로 실존의 원인에 있어서도 다른 어떤 것으로부터도 독립해 있다. 이처럼 스피노자는 실체를 다른 것을 통해 파악되지 않는 것으로 정의함으로써 데카르트적 실체의 인식론적 독립성을 이어받고 있지만, 데카르트가 한 것처럼 실체의 정의를 완화하여 유한 실체 개념을 받아들이지는 않고 있다.


스피노자에게서 실체의 본질은 역량(power; potentia)이다. 스피노자는 속성을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으로 정의한다3). 그런데 스피노자에게서 하나의 속성은 오직 하나의 실체에 귀속되어야 하지만, 그 하나의 실체는 또한 여러 개의 속성을 가질 수 있다. 하나의 속성이 여러 개의 실체에 귀속되는 경우만을 배제하고 있는 것인데, 이는 그렇게 되면 속성을 통해서 실체를 구별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즉, 자연 안에는 동일한 본성을 가지는 두 개 이상의 실체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스피노자는 절대적으로 무한하며 또한 무한한 수의 속성을 가지는 유일한 실체만이 실존한다고 결론짓는다. 여기서 스피노자적 실체(신) 개념의 독창성이 드러나는데, 그는 신을 사유하는 실체일 뿐만 아니라 연장된 실체로도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그는 유대-기독교적 전통과는 결정적으로 갈라선다.


또한 속성은 실체의 본질, 즉 역량이 표현되고 전개되는 차원이거나 혹은 그것이 파악되는 관점이다. 그리고 양태는 이 속성의 차원에서 산출되는 개체적 실재를 의미한다. 따라서 모든 개별자는 양태4)이다. 동시에 이 양태는 실체의 변용(affection) 또는 변양(modification)으로 정의된다. 따라서 양태는 항상 실체 안에 있고 실체를 통해 파악된다. 실체는 각각의 양태들의 원인이 되지만, 이는 자신의 밖에 양태들을 산출하는 타동적(transitive) 원인이 아니라 자신 안에 산출하는 내재적(immanent) 원인이다. 이러한 설명을 통해 스피노자의 실체는 세계 바깥에 있는 초월적인 존재자가 아니라 세계 자체에 내재하는 근원적 역량이 된다.


따라서 모든 개체는 양태라는 측면에서 동일하다. 이는 신으로부터 엔텔레키에 이르기까지 개체적 존재자의 위계를 엄격하게 설정한 라이프니츠와는 상반되는 입장이다. 또한 인간을 제외한 모든 자연적 사물로부터 정신성을 제거함으로써, 동물을 인간과는 본성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즉 기계로 정의한 데카르트의 동물기계론과도 상반된다. 이처럼 자연을 수동적인 존재로 본 데카르트와는 반대로, 스피노자는 ‘신이 곧 자연’이라고 하면서 신 자체를 자연화한다.


스피노자는 이처럼 신으로서의 실체를 자연과 동일시한다. 하지만 이때의 자연이라는 개념은 통상적 의미의 자연과는 다른 것이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일상적인 개념으로서의 자연과 스피노자의 실체를 동일시하고, 스피노자의 실체관을 ‘모든 것이 곧 신’이라는 명제로 정리하는 해석이 바로 범신론적 해석이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원인으로서의 자연, 즉 능산적 자연(naturing nature)과 결과로서의 자연인 소산적 자연(natured nature)을 구분하면서, 좀 더 정교한 자연 개념을 사용한다. 이러한 구분을 도입하여 설명하면, 능산적 자연으로서의 신이 자신 안에 소산적 자연, 즉 개체적 실재들의 총합을 산출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것이 곧 신이다’라는 명제는 ‘모든 것은 신 안에 있다’로 수정되어야 한다.


실체의 모든 속성들은 존재론적인 위계가 없이 모두 동등하며, 이 중에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속성은 사유와 연장밖에 없다. 이는 인간이 사유와 연장이라는 두 속성의 관점에서 산출된 개별자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스피노자에게서는 사유와 연장이 동일 실체의 서로 다른 속성일 뿐이므로 이들 간의 일치 문제가 아예 제기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세계를 사유 속성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고, 연장 속성의 관점에서도 바라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어떻게 하나의 실체가 다수의 속성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야기한다.


스피노자는 세 종류의 구별을 제시하면서 실체와 속성, 양태간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먼저 실체와 실체, 또는 속성과 속성은 ‘실재적으로’ 구별된다. 양태와 양태, 그리고 실체와 양태는 ‘양태적으로(modally)’ 구별된다. 마지막으로 실체와 속성은 ‘사고상으로’ 구별된다. 그렇다면 하나의 실체에는 실재적으로 구별되는 무수히 많은 속성들이 귀속된다는 것인데, 이는 논리적으로 납득하기가 힘들다. 따라서 이 부분을 해명하는 것이 스피노자 해석의 난제가 되고 있다.


또한 스피노자는 유일한 실체인 신을 모든 것의 자유 원인으로 설정하고, 양태들은 제약되어 있다고 말함으로써 개별자에게는 어떠한 자유의 조건도 남겨놓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그는 인간이 갖고 있는 자유의지의 가상이 인간으로 하여금 사태의 진정한 원인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는 점을 들어, 인간의 자유의지를 비판하고 부정한다. 역설적으로 그의 주저의 제목은 <<윤리학>>인데, 과연 자유의 개념 없이 윤리학이라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그는 이 점에서 자유의지 개념을 자연 법칙과 동등한 지위의 원리로 설정하고 이를 따르는 두 개의 영역을 설정한 데카르트, 라이프니츠와는 다른 길을 걷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3 라이프니츠의 실체론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는 데카르트의 여러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기독교적 신 개념과 자유의지를 부정한 스피노자의 길을 따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는 앞선 철학자들의 여러 논리적 난제를 독창적인 방법으로 해결하였으며 기계론적인 데카르트의 세계와 결정론적인 스피노자의 세계와는 다른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하였다. 라이프니츠의 세계에서는 데카르트에 의해서 배제된 목적인이 다시 자연으로 복귀하며, 스피노자에 의해 부정된 자유의지가 신의 예정과 조화되어 다시 나타난다.


먼저 라이프니츠는 데카르트의 정신과 물체실체의 개념을 각각 비판하면서 자신의 실체 개념을 정립한다. 그는 먼저 데카르트의 물체실체를 부정한다. 왜냐하면 연장된 실체는 그 연장성 때문에 논리적으로 무한히 분할 가능한데, 그렇게 되면 실체성을 보유하고 있는 최소한의 단위를 설정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라이프니츠는 단순성, 즉 분할 불가능성을 실체의 기본 조건으로 삼는다. 그의 실체 개념인 모나드(monad)는 하나 또는 단순함을 뜻하는 그리스어 ‘모나스(monas)’에서 왔다. 이 모나드는 가장 단순한 것이므로 일종의 점(點)인데, 이 점은 이론상으로 분할이 가능한 물리학적 점(원자)과도 다르고 아무 내용이 없는 수학적 점과도 다른, 형이상학적 점이다.


따라서 이러한 모나드는 비연장적인 성질을 가지며 일종의 영혼과 같은 것이지만, 데카르트의 정신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라이프니츠는 정신적 실체의 속성으로 데카르트가 제시한 사유 개념을 비판하면서, 정신이 항상 의식적으로 사유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는 정신의 속성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의식적인 사유 개념을 영혼의 일반적 활동인 지각(perception)으로 대체하며, 의식적인 반성적 사유는 특별히 통각(apperception)이라는 개념으로 지칭한다. 세계는 무수히 많은 모나드들로 가득 차 있으며, 이 모나드는 모두 지각을 가지고 있다. 정신적 활동이 없는 것으로 보이는 사물과 같은 물체적 존재자들은 이러한 지각 활동이 너무 미미해서 그러한 활동의 존재가 우리에게 잘 인지되지 않을 뿐이다.


이 모나드의 본성은 힘이며 이는 스피노자의 실체의 본질인 역량과 비슷한 개념이다. 데카르트가 자연으로부터 제거한 힘이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의 세계에서는 복귀하고 있는 것이다. 실체의 이러한 힘을 라이프니츠는 근원적 힘(primitive force)이라고 한다. 이 힘은 능동적 근원력인 욕구(appetite)와 수동적 근원력인 저항(resistance)으로 구성된다. 현상세계의 작용력과 저항력, 관성 등은 이러한 실체적 힘으로부터 파생된 힘이다.


모나드에는 ‘창이 없다.’ 즉, 다른 모나드와 상호 소통하여 자신의 지각 내용을 변화시키거나 하지 않는다. 모나드의 지각 내용은 자신 안에 ‘가능한 상태로’ 모두 내재해 있으며, 외부로부터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각하는 것은 모든 것들은 이러한 지각 내용들이 잠재적인 상태로 있다가 순차적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이는 주어와 술어의 논리적 관계로도 설명할 수 있는데, 각 모나드는 주어이며 가능한 모든 지각 내용들이 여기에 술어로서 내재해 있다는 것이다. 이 술어들은 주어로부터 ‘분석적으로’ 도출된다. 이 지각 내용들은 물론 그것을 포함하는 개체적 실체의 우연적 성질이지만, 이 단순한 개체적 실체는 자신이 갖고 있는 지각 내용에 의해서만 서로 구분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이를 본질적 성질로 볼 수도 있다.


또한 모나드들은 각자가 소유한 지각의 판명성에 따라 존재론적인 위계를 갖는다. 라이프니츠는 신으로부터 정신, 영혼 등을 거쳐 엔텔레키에 이르기까지 모나드들의 등급을 설정한다. 엔텔레키는 지각의 정도가 극히 미미한 모나드인데 이것이 우리의 지각에서는 물체로서 현상한다. 즉, 물체는 현상으로서만 나타나는 것이다. 신을 제외한 모든 모나드들은 다수의 열등한 모나드가 하나의 우월한 모나드를 둘러싸고 있는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다. 이때 이 열등한 모나드들의 집합이 우리에게는 물체로 보이는 것이다. 물론 모나드 자체는 연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신이 창조한 세계는 이러한 비연장적인 모나드들의 세계이며 이를 예지계라고 하고, 우리의 지각을 통해서 보이는 세계는 현상계이다. 이와 같은 설명을 통해 라이프니츠는 정신과 물체의 상호작용 문제를 나름의 방식으로 해소하였다.


따라서 라이프니츠의 세계는 예지계와 현상계의 두 영역으로 나누어진다. 예지계에는 물체가 실재하지 않으며 현상계의 물체는 지각이 혼미한 모나드의 집합에 대응한다. 또한 모나드의 내부 지각은 목적인에 따라 변화하는 반면 현상계는 작용인에 의해 결정된 세계이다. 따라서 우리의 관념에 주어진 현상계를 배제한다면 자연 필연성으로부터 의지 자유가 어떻게 해방될 수 있는가의 문제는 라이프니츠에게서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신의 예정으로부터의 자유가 다시금 의지 자유 문제의 중심으로 복귀한다.


무수히 많은 각각의 모나드가 가지고 있는 지각 내용 사이에 서로 모순이 없으려면, 모나드가 창조될 때부터 이것이 이미 조정된 채로 내재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라이프니츠의 ‘예정 조화설’이다. 각 모나드의 지각은 우주 전체를 반영하도록 구성되어 있으며, 어떠한 두 모나드의 지각도 서로 상충될 수 없도록 완벽하게 예정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제는 이렇게 신이 모든 것을 조화롭게 예정해 놓은 세계에서 자유의지의 근거를 설명하는 것이 문제로 된다. 그러나 신의 예정이 의미하는 바는, 신이 인간의 행위를 자신의 임의대로 규정한다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존재인 인간이 어떤 행위를 선택할 지를 미리 예견하여 이 행위가 다른 모나드들과 상충하지 않도록 조화시킨다는 것이다.

 


Ⅲ 실체론과 자유의지

 

여기에서는, 근대 합리론자들의 실체론에서 자유의지의 문제가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근대 철학의 실체론은 ‘인간도 기계론적 세계의 일부인가?’라는 물음에 답하는 과정이었다고 해도 일면 타당성이 있을 것이다. 특히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츠는 정교하게 설정된 실체론 체계를 통해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음을 증명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는 어떤 맥락에서는 근대에 등장한 기계론적 세계관과 기독교적 세계관의 충돌로 볼 수 있다. 인간이 세계에 포함되어 있는지, 혹은 세계와 분리되어 있는지를 묻는 과정은, 인간의 자연에 대한 대상화/객관화(objectification)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즉, 자연을 대상으로 설정하고 인간을 그 대상에 대한 주체로서 정립하는 어떤 인간관/세계관 자체의 변혁이 없이는, 자연과 인간이 동일한 층위의 개념이라는 인식, 혹은 그 둘이 동등한 수준에서 논의될 수 있는 항들이라는 인식 자체가 발생하기 힘들다. 다시 말하면, 자연의 대상화는 나 또는 나의 정신의 주체화 과정과 짝패라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근대 철학은 주체 철학이라고도 불리는데, 근대 철학의 시발점이 데카르트의 코기토, 즉 주체의 확립이라는 것 또한 이를 상징적으로 뒷받침한다.


한편 기독교적 전통은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음을 강조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러한 자유의지는 기독교적 세계관을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개념인데, 왜냐하면 자유의지가 인간에게 보장되어야만 인간에게 원죄의 책임을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면 인간에게 죄의 책임을 물을 수 없다. 따라서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츠가 자유의지를 옹호하는 것, 스피노자가 자유의지 개념을 부정하는 것은 그들의 종교관 또는 세계관과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


데카르트의 실체론은 물리적 세계로부터 예외적인 영역(코기토)을 설정함으로써 자유의지를 보존하려 하였다. 근대 철학에 이르러 자연 전체를 인간의 정신과 동일선상에 놓고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스피노자는 기독교적 신 개념을 부정하였기에 자유의지에 천착할 필요가 없었고, 따라서 모든 것의 원인으로서의 신만을 자유롭다고 인정하기에 이른다. 이는 보통 결정론으로 해석되지만, 신은 또한 모든 실재들의 ‘내재적’ 원인이므로, 스피노자에게서는 개별자의 자유 문제에 대한 다른 해석의 여지가 있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과제는 자유의지를 부정하고도 윤리학이 성립할 수 있음을 보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라이프니츠는 물체의 실존을 부정하였으므로 자연 필연성으로부터 인간이 자유로울 수 있음을 보이는 문제로부터는 벗어났지만, 목적론적인 신의 예정설을 통해 자연의 조화를 설명하였으므로 이를 고려하면서 인간이 어떻게 자유로운 행위를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설명해야 했다. 따라서 라이프니츠는 전지(全知)한 신 개념을 통해, 신은 자의적으로 인간의 행위를 결정하지 않고 다만 자유로운 인간의 선택을 완전하게 예정하고 이에 따라 다른 것들을 조정할 수 있을 뿐이라고 함으로써 이 문제에 대해 해명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근대 철학의 실체론은 방법론적 성격을 강하게 띤다. 데카르트가, 철학을 하나의 나무로 비유했을 때 윤리학은 철학의 가지이며 열매는 가지에서 딴다고 말한 것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합리론자들의 실체론은 각 철학자의 윤리적 입장, 또는 이에 상응하는 메타-형이상학적인 논의를 정당화하기 위한 기반이나 방법으로서 존재하는 측면이 크다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이렇게 보았을 때 실체론은 독립적인 발전 과정을 거치는 순수한 사변적 논증의 측면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각 철학자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고유한 특징 역시 가지게 된다. 이러한 해석은 근대 합리론의 실체 개념을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끝)

 

1) 주요 속성을 제외한 이러한 속성들은 양태라는 개념과 엄격하게 구별되지 않고 있다. F. C. 코플스턴, 김성호 옮김, <<합리론>>(1998, 서광사) 189쪽 참조. 정신의 양태로는 지성적 지각과 의지적 작용이 있고 물체의 양태로는 모양과 운동이 있다.

2) 스피노자는 데카르트를 따라 실체와 속성 사이에는 실재적인 구별(real distinction)이 없으며 사고상의 구별(distinction of reason)만이 있다고 표현하였다.

3) 실제로는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으로 지성이 지각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지성이 지각하는 것’이라는 표현을 둘러싸고 주관적 해석과 객관적 해석이 대립해 왔는데, 전자는 이 표현을 이유로 속성이 실제로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지성이 그렇게 지각하는 것일 뿐이라고 설명하며, 후자는 실제로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근래에 와서는 특히 프랑스의 스피노자 주석가들이 스피노자의 다른 저작 등을 참고로 하여 객관적 해석을 지지하는 추세이다. 하지만 이 해석은 하나의 난제를 야기하는데, 이는 이후에 본문에서 언급하도록 하겠다.

4) 정확히 말하자면 유한 양태이다. 스피노자는 무한 양태와 유한 양태를 구분하는데, 유한 양태는 앞서 말했듯이 개별자를 뜻하고, 무한 양태는 또다시 직접적 무한 양태와 매개적 무한 양태로 나뉜다. 직접적 무한 양태로는 운동과 정지, 무한한 지성이 있고 매개적 무한 양태로는 우주의 모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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