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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8/18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pug
  2. 2006/08/18
    작가/인간
    pug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이 문장의 의미는 명확하지 않다.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은, "신이 없다면"이라는 조건절로 은근슬쩍 가리고 있는 신의 존재여부에 대한 작가(도스토예프스키)의 생각이고, 또 하나를 들자면, 만약 다른 텍스트를 활용해서 신에 관한 작가의 입장을 밝힌다 하더라도 이를 저 문장에 적용시켰을 때 도출되는 직설적 결론이 저 문장의 의미를 온전히 보존하고 있는가의 여부이다. 다시 말하면, 도스토예프스키가 저 명제를 통해 하고 싶었던 말은, "신은 없으므로 모든 것이 허용된다", 또는 "신이 있으므로 모든 것이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두 개의 문장 중 어느 것과도 정확히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선 이 명제를 제시한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이반에게 가 보자. 물론 이 말을 하면서 이반이 가졌던 생각과 작가의 생각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 불일치 자체가 곧 작가의 생각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열쇠가 될 수도 있다. 이반은 일단 무신론자다. 그러나 신을 부정하지는 않는 무신론자라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이반은 신이 꼭 필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반이 볼 때 우리 인간들은 본성적인 기질상 우리의 자유를 견뎌내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중요한 어떤 일을 오로지 우리의 판단에 의거해 결정해야 한다는 중압감(그리고 아마도 그에 따르는 책임감)을 이겨내지 못한다. 인간은 단순히 자유로운 존재라기 보다 자유를 선고받은 존재다. 우리의 자유는 우리의 짐이다.

 

따라서 우리가 두려워해야 마땅한 전능한 신의 존재는 인간의 보다 나은 삶에 필수적이다. 신은 인간에게서 자유를 빼앗고 복종을 강요하지만, 사실 인간은 기꺼이 자신의 자유를 헌납하고 신 앞에 바짝 엎드릴 준비가 되어 있다.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여야 더욱 해방감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실 인간에게는 자유로부터의 해방이 가장 절실한 과제다. 요컨대, 이반은 신이 없다고 믿지만 동시에 신이 필요하다고 믿으며, 신의 필요성에 대한 그의 믿음이 신의 존재여부에 대한 그의 판단을 압도한다. 신은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신은 존재해야만 한다.

 

따라서 이반에게서 위의 명제는 다음과 같은 보충적인(동시에 중심적인) 의미를 갖는다. 만약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되므로, 인간은 그와 같은 절대적 자유를 견뎌내지 못하고 자멸할 것이다. 그러므로 신은 인간의 보존을 위해서라도 꼭 필요하다.

 

이와 같은 제안은 다소 기만적이다. 왜냐하면 사실은 ①신이 존재하지 않지만, 일반 사람들은 이를 알 필요가 없고 그저 ②신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를 견디지 못하는 일반 사람들에게 이를 적용할 때 전자(①)는 후자(②)의 아래에 억압되어 있지만, '신의 부재'를 알고 있는 이반 자신에게 이 모순적 명제를 들이밀면, 억압되었던 '신의 부재'는 결코 완전히 소멸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반드시 남아서 이반의 자의식(우월감)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때부터 이 기만적 명제의 의미는 삐걱거리게 된다.

 

이 명제의 의미가 결국 파열하게 되는 지점은, 의미화될 수 없는 어떤 것, 곧 '실재'가 이반의 명제에 틈입하게 되는 바로 그 순간이다. 상징계 안에서 신의 부재는 엄연한 사실이며, 이 사실과 윤리적 강령이 가까스로 봉합되어 있는 것이 이반의 명제였다면, 작가는 이 봉합의 끝 매듭을 살짝 건드리므로써 '사실'이란 상징계 안의 어떤 것에 불과하다는 점, 그리고 그 사실은 실재의 어떤 것이 불가피하게 누락되었기 때문에(의미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사실로써 존재할 수 있었다는 점을 폭로한 것이다. 끝 매듭이 풀린 봉합은 단번에 해체되었다.

 

그 실재는 곧 스메르쟈코프의 범죄이다. 이반의 '사상적 아들'인 스메르쟈코프는 "모든 것이 허용되어 있으므로" 그냥 한 번 표도르 카라마조프(이반의 아버지)를 죽여 본다. 이반은 자신의 이론이 '실제로' 아버지의 몸 위에서 시연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조차 (상징계 안에서는) 할 수 없었으므로,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미쳐버리고 만다(상징계로부터 벗어남). 작가인 도스토예프스키는 바로 여기에서 이렇게 이반을 단죄하므로써 이반의 명제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이반의 단죄는 '신의 부재'라는 사실의 거부를 의미한다(①의 소거). 또한 상징계의 한계와, 상징계는 실재의 배제를 통해 구조화되어 있다는 것, 따라서 그렇게 배제된 부분이 사실은 상징계 전체의 의미를 좌우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볼 수도 있다. 이반은 자신의 아버지의 육체가 '모든 것이 허용된' 인간의 범죄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실재)을 의도적으로 배제함으로써 자신의 이론(상징계)을 구성했다.

 

'신의 부재'가 부정됨으로써 도스토예프스키의 저 명제는 분명하게 유신론으로 읽힌다. 또한 이론이 아닌 실재의 신앙, 실재의 윤리학으로도 읽힌다. 우리의 삶(과 신앙)에는 가타부타를 따질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삶에 대한 이론은 그러한 것들의 배제를 매개로 해서 구성된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바로 이론화할 수 없는 것들, 이론의 찌꺼기, 곧 순수한 삶 그 자체이다. 윤리는 직접적으로 삶에 적용되는 것이다.

 

덧) 스메르쟈코프도 (확실히 밝혀지지는 않지만) 아마 표도르의 아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반의 이론으로 침입한 실재, 곧 그의 이론을 지탱하면서 결코 이론화되지는 않았던 가장 근본적인 사실은 바로 '부친살해'가 된다. (스메르쟈코프가 표도르의 아들이 아니더라도, 결과적으로 이반의 사상에 의해 살해된 것이므로 부친살해가 맞다고 볼 수도 있다) 따라서 프로이트가 도스토예프스키를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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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인간

1. 전에 미당에 관한 고종석의 글을 인용했었다. 정치적으로(혹은 윤리적으로) 올바르지 못했던 미당의 삶과, 문학적으로 최고 수준의 성취를 보여주는 그의 시를, 모순 없이 일관되게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 혹은 그렇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 혹은 일관된 설명을 위해 사실을 훼손하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요지로 하는 글이었다.

 

2.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 도스토예프스키를 넘어선다'는 말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머리와 손으로 위대한 언어를 쏟아내지만, 그것이 인간으로서의 자기 자신의 작품은 아닐 수 있다는 것. 즉, 자기가 썼되 그 결과물에는 자신이 표현/반영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 <<죄와 벌>>은 누구의 사상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손을 빌어 세상에 외출한 것일까. 그 누구가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라면, 그는 '인간 도스토예프스키'보다 깊고 풍부하며 복잡하게 사고할 줄 아는, 그와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일까?

 

3. 텍스트에서 작가의 무의식의 징후를 발견할 수 있는가? 그 작가는 인간으로서의 자신과 구별되는가? 징후는 작가에게만 적용되는가? 작가는 이 세상엔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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