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제강간 연령상향의 한계

쥬리(십대섹슈얼리티인권모임)

 

의제강간의 의미

 

의제강간이란 국가가 설정한 성관계 동의 연령 미만인 사람과의 성관계를 말합니다. 현재 한국은 만 13세 미만인 사람은 성관계 동의 능력이 없다고 간주하고, 만 13세 미만과 성관계한 사람을 처벌합니다. 12월 15일 남윤인순 의원 등에 의해 발의된 형법 및 성폭력특례법 개정안은 만 16세 미만인 사람을 성관계 동의 능력이 없다고 간주하며, 다만 만 16세 미만과 성관계한 사람 중 만 19세 이상인 사람만 처벌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기준 연령은 한국과 일본, 스페인 등은 만 13세 미만, 독일, 이탈리아, 중국 등은 만 14세, 프랑스와 스웨덴 등은 만 15세, 미국 대부분의 주와 영국, 호주 등은 만 16세가 기준입니다.

 

 

의제강간 연령 상향 옹호 논리들

 

의제강간 연령을 상향해야 한다는 주장은 오래 전부터 있어 왔고, 특히 최근에 미성년자에 대한 성폭력 혐의로 기소된 비청소년 남성이 무죄 판결을 받는 등의 사건이 있으면서 빈번해졌습니다. 급기야 지난 12월에는 법 개정안 발의로 이어졌지요. 그렇다면 의제강간 연령을 상향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논리들은 무엇이 있는지 살펴봅시다.

 

1) 청소년의 성적자기결정 능력과 권리를 동시에 부정하는 논리

“어린 것들이 섹스하면 안 되지!”

어느 새누리당 의원은(허핑턴포스트에서 봤는데 어떤 기사였는지 못 찾았습니다) ‘중학생들의 성적 자유가 너무 많이 보장되고 있다’는 취지로 의제강간 연령 상향을 주장했습니다. 의제강간 연령 설정이 공식적으로는 ‘아동 및 청소년을 비청소년의 폭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볼 때 이와 같은 주장은 의제강간의 기본 취지도 모르는 소리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오해는 생각보다 만연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머릿속엔 아동 및 청소년이 성행위를 하는 것에 대한 혐오감이 있고, 이것이 아동 및 청소년의 성을 보호해야 한다는 당위와 크게 구분되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것이죠. 이 논리는 ‘보호’를 빌미로 하지만 실상은 혐오와 금기를 유지시키고자 하는 욕망이 작동하는 것이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2) 청소년에게 성적 욕망을 품거나 청소년과 성관계 하는 사람을 혐오하는 논리

“변태 아냐?”

어떤 비청소년이 청소년과 연애를 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철컹철컹’이라며 놀리는 경우가 흔합니다. 실제로는 현 만 13세 미만이 아닌 이상 청소년과 (합의된)성관계를 한다고 해서 ‘철컹철컹’될 일은 없지만, 그만큼 청소년-비청소년 간의 성적 관계는 범죄적, 비도덕적이라는 인식이 있는 것이죠. 아마 많은 사람들은 의제강간 연령 기준이 몇 살인지도 모를 것입니다. 청소년-비청소년 간의 성적 관계가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는 상황에서, 명확한 근거 없이 이뤄지는 의제강간 적용은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는 관계를 공권력으로 처벌하는 형태가 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청소년에게 성적 욕망을 품는 것은 아주 공적인 공간에서야 금기시되는 것이고, 일상에서는 (여성)청소년을 성적 대상화하는 비청소년 남성들의 욕망 드러내기는 만연합니다만.

 

3) 00세 미만에게 성적 자기결정 능력이나 성적 욕구가 당연히 없다고 전제하는 논리

“(여자)중학생이 어떻게 자발적으로 성관계를 할 수가 있죠?”

일반적으로 의제강간 연령 상향을 논의할 때는 아동 및 청소년을 여성으로, 상대 비청소년을 남성으로 은연중에 설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동 및 청소년을 여성으로 설정해서 그런지 나이의 문제인지 00세 미만에게 성적 자기결정 능력이나 성적 욕망은 당연히 없을 것이라고 전제하게 됩니다. 기준 연령이 만 13세인 지금은 상대의 처벌 기준 연령이 설정되어 있지 않아, 만 12세 두 명이서 성관계를 하면 ‘상호 강간’이라는 우스갯소리도 나오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지만 저 윗선에선 만 13세 미만에게 성적 욕구가 없다고 당연하게 전제하고 있을 것입니다. 만 16세 기준도 마찬가지인데, 의제강간 연령 상향을 주장하는 쪽에서 내세우는 ‘만 16세 미만’은 피해자일 뿐 성적 욕구의 주체는 아닙니다. 여성인 만 15세가 만 19세 이상인 사람에게 성적 욕망을 품는 일이 그들에겐 상상되지 않는 일이죠. 이 논리는 (만 16세 미만)청소년을 일방적으로 피해자화하며, 욕구 없는 존재로 타자화시킨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논리에서 만 16세 미만인 남성의 성적 욕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남성 중학생에게 성적 욕구가 있다는 것은 정당화되지는 않더라도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인정하는 바이며, 만 16세 미만 남성이 성인 여성에게 성폭력을 가하는 일이 없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이 논리는 공백이 있습니다.

 

4) 청소년-비청소년 간의 비대칭적 권력관계 때문에 의제강간 연령 상향과 같은 비청소년에 대한 제재가 필요하다는 논리

이 논리는 청소년 인권의 관점에서도 일부 지지할 여지가 있는 논리입니다. 청소년과 비청소년 간의 권력관계는 너무나 뚜렷하고, 학생-교사, 노동자-사장, 자식-부모와 같은 관계에서라면 더더욱 권력관계가 강하게 작동하는 법입니다. 권력관계가 강하게 작동하는 관계 속에서는 자발-비자발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드물지 않습니다. 권력을 이용해서 청소년의 성을 착취하려는 비청소년이 없는 것이 아니고, 착취하기 쉽다는 이유로 성적 상대로 청소년을 찾는 비청소년도 드물지 않습니다.

얼마 전 저는 어느 빈곤한 동네의 중학교에 다니는 청소년과 대화를 한 적이 있습니다. 빈곤한 동네라는 것을 언급하는 이유는 계급에 따라 청소년의 방과 후 일상이 달라지고, 부모의 청소년에 대한 일상적 감시 및 보호의 여부와 정도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 중학교 주변에는 하교할 시간이 되면 어슬렁거리는 비청소년 남성들이 있다고 합니다. 여자 중학생들과의 연애 혹은 성관계를 목적으로 갖고 말이죠. 빈곤한 부모를 둔 청소년과 부유한 부모를 둔 청소년 중 어떤 청소년이 더 많이 억압당하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빈곤한 청소년, 혹은 탈가정 청소년이 비청소년의 성적 착취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은 것은 사실입니다(친족 내 성폭력의 경우 계급 차이가 나타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나이권력, 계급, 성별 권력까지 함께 고려하면 가장 어려운 상황에 있는 청소년을 위해서라도 의제강간 연령을 상향해서 청소년을 ‘이용’하려는 비청소년을 처벌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의제강간 기준 연령을 만 16세로 상향한다고 해도, 만 17, 18세의 청소년들이 똑같이 겪을 문제입니다. 또한 권력관계에서 약자이기 때문에 성적 착취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은 집단은 청소년만이 아니기 때문에, 일관성을 유지한다면 의제강간의 기준이 되는 것은 나이 뿐 아니라 다양한 요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문이 남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논리에 반박하기 위해 저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성폭력과 성폭력 아닌 것 그 사이

 

성폭력 사건에서 쟁점이 되는 것은 이 두 가지입니다. 1) 동의의 여부 2) 폭행, 협박, (아청법 보호대상인 미성년자의 경우에는)위계(사기)와 위력 행사 등의 여부. 형사처벌의 여부를 가리려면 이 두가지를 놓고 시시비비를 가려야겠지요. 하지만 본질적인 의미에서 그것이 폭력이었는가 아닌가를 고민하게 되는 때에, 저는 이러한 성폭력의 성립 기준이 내 경험을 해석하는 데에 ‘미끄러지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얼마 전, 어느 자리에서 의제강간 연령 상향이 쟁점으로 논의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는 여성단체 활동가도 있었고, 아동 지원 단체 활동가도 있었습니다. 어느 분은 ‘한 아이라도 보호할 수 있다면 의제강간 연령 상향을 해야 한다’라는 말을 하셨습니다. 그 자리에서 제가 이에 반대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발언은 ‘나는 만 16세 미만일 시절 자발적으로 여러 차례 성관계를 했고, 그것은 폭력이 아니었다’ 라는 것이었으며, 저는 그렇게 발언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 발언을 하고 나서 찝찝한 것이 있었습니다. 만 16세 미만일 당시 저는 자발적으로 여성, 남성 애인과 성관계를 했지만, 그 외 남성들과의 성관계는 여전히 그것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 고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형법의 기준으로 보면 그 성관계들은 강간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의제강간 기준 연령이 만 16세 미만이었다면 그것은 ‘의제강간’이었겠지요. 하지만 제가 만 16세 미만이었다는 이유로 ‘성관계 동의 능력’이 없어서 그것이 의제강간이었다고 누군가 해석한다면 그 또한 저는 말이 안 되는 해석이라고 느낄 것입니다. 더불어 제가 만 16세 미만이었을 당시 애인들과의 자발적이고 합의된 성관계를 가졌다는 사실은 두말할 나위도 없고요. 제가 겪었던 관계들, 성관계들이 폭력적이었던 건 제가 어려서 성관계 동의능력이 없어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제가 놓인 사회적 위치 때문이었습니다.

 

만 14-15세였을 당시, 저는 네 명의 애인 아닌 남성과 성관계를 했습니다. 첫 번째 남성은 처음 만난 사이였으며, 삼십대 정도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과의 성관계는 제가 동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강간이라 부르기도 애매한 무엇이었는데,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제가 어버버하다가, 저의 저항도 협조도 없이 성관계가 이루어진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콘돔을 쓰지 않았고 저는 사후피임약을 처방받아 먹었습니다. 강간은 아닌 것 같은데, 매우 수치스럽고 싫었습니다. 두 번째 남성은 이십 대였는데, 성관계는 미리 합의한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과 성관계를 함으로써 저는 그 사람 소유의 자가용을 탈 수 있었고, 술집에서 술을 마실 수도 있었습니다. 세 번째 남성은 사십 대였고, 성관계는 미리 합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관계 후 무언가 때문에 제가 기분이 상했을 때 그 사람은 ‘아이스크림 사줄까?’라고 말했습니다. 그 사람에게 저는 인간이라기보다는 아이스크림으로 달랠 수 있는 ‘아이’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만나지 않았습니다. 네 번째 남성은 저보다 나이 많은 십대였습니다. 첫 번째 남성과 비슷하게, 강간으로 처벌하긴 애매하지만 제가 동의하지는 않은 성관계가 치러졌습니다. 다만 그 경우에는 제가 미약하게나마 ‘저항’을 했기 때문에 저는 당시 그것을 강간으로 불렀습니다. 제가 그것이 강간이었다고 말하자 그 사람은 주변인들에게 제가 정신병이 있다고 소문을 내고 다녔습니다.

 

저는 지금까지도 제가 대체 왜 그런 성관계에 나를 ‘내몰았’는지, 내가 나를 내몬 것인지 내몰린 것인지 자문하고 있습니다. 당시 저는 학교를 자퇴하고, 다른 여성 청소년들보다 ‘자유로운’옷차림으로 다녔습니다. 머리를 파마하고, 짧은 치마를 입고, 구두를 신고 다녔죠. 길거리를 다닐 때면 휴대폰 번호를 요구하는 비청소년 남성들, 같잖은 성희롱을 하며 지나가는 나이 많은 남성들이 심심찮게 있었습니다. 물론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운다고 훈계질 하는 남성들도 있었고요. 당시 온라인 커뮤니티 활동도 했는데 온라인에서 만남을 제안하거나 치근덕대는 비청소년 남성들도 있었습니다. 저는 당시에 제가 매력이 있어서(웃음) 남자들이 꼬이나 했는데 이제는 그것이 아니란 걸 압니다. 어린 여성 청소년이, 딱 봐도 노는 것 같은 애가, 옷은 야하게(?) 입고 다니니까 성관계하기 ‘쉬워’ 보여서 그랬던 것이란 걸요. 또 어릴수록 좋다는 남성 중심적 판타지도 자극받았겠죠.

 

살이 비치는 스타킹과 뒤꿈치가 까지는 구두, 짧은 청치마를 입고 달콤한 향수를 뿌린 채 밤거리를 돌아다니던 그 시절. 자가용 가진 남자의 옆좌석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노라면 겨우 그만큼의 자유로도 섹스 한 번은 해줄 수 있었던. 어디냐, 언제 오냐는 화난 엄마의 전화를 애써 무시하며 휴대폰을 꼭 쥐고, 빨리 취하는 것만이 목적인 음주를 해대다 길거리에서 구토를 하고. 외로움이 극에 달아 치를 떨면서도 아직까지 누군가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스스로 부정하지는 않았다. 늦은 시간 집이 아닌 곳에 있다는 것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던 그 밤들. 그저 들뜨고 연약한, 그래서 이용해먹기 쉬운 소녀, 스스로의 존엄을 어떻게 지킬 수 있을지 상상하지 못했고, 어른들의 영악한 세상에서 발을 헛디디던, 열다섯과 열여섯의 그 시절을 잊지 않겠다. 부정하지도 비하하지도 않겠다.

 

이것은 제가 스물 무렵 쓴 일기의 일부입니다. 저는 그 당시 저를 이해하기 위해, 그 상황을 ‘자가용 가진 남자의 옆좌석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노라면 겨우 그만큼의 자유로도 섹스 한 번은 해줄 수 있었던’ 상황으로 해석했습니다. 제가 원했던 것은 ‘자유’였고, ‘구원’이었는데 그 대가로 제가 지불할 수 있었던 것은 성관계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유나 구원을 얻었는가, 그것은 아니었습니다. 건조하게 이야기한다면 당시 제가 바랐던 자유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늦은 시간 길거리든 어디든 내가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 있을 수 있는 자유, 술 마시고 담배 피울 자유, 내가 원하는 옷차림을 할 자유, 내 결정과 행동을 일일이 (어른에게)해명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 제가 바랐던 구원의 내용은 나의 본질 그대로 이해받을 수 있는 관계와 사회적 인정이었습니다. 저에겐 은밀한 욕망이 있었는데, 그것은 ‘아이’가 아니라 ‘인간’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었습니다. 때론 ‘아이’로 취급받는 것 보다는 ‘성적 대상: 여자’로 취급받는 게 더 인간 취급을 받는 것에 가깝다고 느꼈기에 제가 즐겁지 않은 성관계들을 한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탈학교 청소년으로써 다가온 비청소년 및 청소년 남성들을 자기결정권을 갖고 판단하기에는 인간관계 없이 고립되어 있었던 것도 한 몫 했을 것입니다.

 

저는 자유나 구원을 얻기 위해, 인간 취급을 받고 싶어서, 인정받고 싶어서, 사랑받고 싶어서 아동·청소년이, 혹은 여성이 성관계를 하게 되지 않는 세상을 바랍니다. 때때로 성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거래 조건으로 유용하게 쓰이지만, 성을 거래 조건으로 놓아야 하는 위치의 사람은 이미 불공정한 거래를 할 수 밖에 없는 위치에 놓인 것입니다. 여성 청소년으로써 제가 겪었던 그 성관계들은, 개별 사건은 법적 의미에서 폭력이 아닐지라도 제가 놓였던 전체적인 상황 자체는 폭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동, 청소년과 여성을 성폭력으로 내몰지 않는 사회가 되려면, 약자들이 성관계를 하든 하지 않든 자유와 관계와 존중을 누릴 수 있는 사회여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청소년의 성폭력 피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해결책은 청소년운동에서 이야기해왔던 청소년의 자유와 인권이며, 나이 위계와 권력의 철폐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의제강간 연령 상향을 반대하는 논의에서 염두에 두었으면 하는 것들

 

1) 성적자기결정권은 유무의 문제가 아니다.

의제강간 적용에서 핵심이 되는 부분은 누구에게 성적자기결정 능력이 있는가의 여부입니다. 국가가 일률적으로 몇 살까지는 성적자기결정 능력이 없고 몇 살부터는 없다고 법으로 명문화하는 것은, 청소년운동에서 20살 되면 갑자기 성숙해지냐고 제기하는 것처럼 매우 오류가 많은 시도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인간에게 성적자기결정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를, 그것도 나이를 기준으로 제한하고 공권력이 개입하는 것 자체에 문제제기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저는 성적자기결정 능력이라는 것은 유무의 문제, 있거나 없거나 흑백의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오히려 정도의 문제에 가깝겠지요. 저는 올해 만 20세를 넘었지만 제가 성적자기결정 능력을 온전히 발휘하며 사는지 의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좁은 의미에서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뿐 아니라, 상대방을 위해서, 관계 유지를 위해서, 증명을 위해서, 다른 보상을 위해서 성관계를 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성 등 약자의 위치에 놓인 사람일수록 더욱 자신의 욕망 외의 다른 것을 위해서 성관계를 하거나 하지 않게 될 여지가 커지지요. 경계가 애매하지만, 그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성적자기결정 능력을 온전히 발휘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2) 성적자기결정권이 있어야 성적자기결정 능력도 있다.

앞서 말했듯, 약자의 위치에 놓인 사람일수록 성적자기결정 능력을 온전히 발휘하기 어려워진다는 면에서, 저는 성적자기결정권이 있어야 성적자기결정 능력도 있을 수 있다고 판단합니다. 제가 말씀드렸던 저의 만 16세 미만 시절에서의 성관계들이 폭력적이었던 건 제가 미성숙해서 성적자기결정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일어났던 것이 아니라, 저의 위치에서 성적자기결정권을 가지기 어렵도록 조직된 구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성인 여성 중에 성적자기결정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참 많습니다만, 여성운동에서는 이것을 여성의 성적자기결정권과 관련한 사회 구조의 문제로 제기합니다. 성적자기결정 능력은 개인의 능력치 문제라기보다는 그 개인이 얼마만큼의 능력을 가질 수 있는 사회인가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왜 청소년의 경우도 같은 논리로 이야기될 수 없는지 문제를 제기하고 싶습니다.

 

3) 성폭력 사건이 제대로 형사처벌이 되지 않는 것은 의제강간 기준 연령이 낮아서가 아니다.

의제강간 연령 상향을 지지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는 청소년에 대한 성폭력 사건이 제대로 형사처벌을 받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폭력 사건이 제대로 형사처벌이 되지 않는 다른 강력한 원인들이 많습니다.

먼저 강간 여부를 가르는 기준으로 폭행, 협박 등이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가시적 폭행이나 협박이 없었던 성폭력 사건들-주로 친밀한 관계에서 일어나는 권력형 성폭력-은 강간으로 인정받기 어려운 한계가 현행법에 있습니다. 또한 연인이나 부부 등 친밀한 관계에 있었다는 이유로 강간 성립에 더 까다로운 요건을 설정한 판례들을 볼 수 있습니다. 가해자가 ‘너도 즐겼잖아’등으로 피해자가 동의했음을 주장하는 상황, 혹은 특히 어린 나이의 피해자가 당시 그 순간에는 동의로 여겨질 수 있는 언행을 했지만 전체 상황을 볼 때 자발적 동의가 아니었던 상황에도 피해자중심적으로 세밀하게 접근할 수 있는 제도와 사법 기관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여성 및 소수자 친화적이지 않은 경찰과 사법기관은 성폭력 피해자들의 피해호소를 어렵게 하고, 2차가해를 하기도 합니다. 청소년 성폭력 피해자들이 신고를 꺼리게 되는 원인 중에는 신고하면 부모 등 가까운 사람에게 알려질까 하는 우려가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에 의제강간 연령 기준을 상향하는 것은 쉬운 길처럼 보일지 모르나 위험한 길입니다.

 

4) 의제강간죄의 적용 여부가 피해자에게 도움이 되는지 의문이다.

2011년에 세 명의 성인 남성이 12세인 사람을 강간한 사건이 있었는데, 무죄 판결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의제강간으로 기소하는 것보다 특수강간(윤간)으로 기소하는 것이 형량이 높아 특수강간으로 기소를 한 것인데 특수강간으로 보기에는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무죄판결을 받은 것입니다(당시 가해자들은 피해자가 12세인 줄 몰랐다고 했습니다). 의제강간을 기소하는 것보다 위력을 이용한 강간, 특수강간으로 기소하는 것이 형량이 높기 때문에 검찰은 형량이 높은 쪽으로 기소를 하고, 피해자 측에서도 그러기를 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시 말해 의제강간죄의 존재는 일반적으로 법원에서 강간으로 인정받기 어려운 사건의 경우에는 가해자 처벌에 도움이 되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그다지 피해자에게 유의미한 법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하여 앞서 말했듯 의제강간 연령을 상향하는 것보다 성폭력과 관련한 제도 및 사법 처리 체계가 피해자에게 유리하도록 변화하는 것이 더 요구되는 상황이라 하겠습니다.

 

5) 개인은 복잡하고 구조는 선명하다.

위 문장은 제가 지인의 페이스북에서 본 문장을 인용한 것입니다. 성폭력은 개별 사건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전체 사회 구조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여성과 소수자를 억압하는 기제로써 성폭력이 활용되고, 나이와 성별과 지위 등을 이용해 권력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수단으로써 성폭력이 활용되는 구조가 있습니다. 이 구조는 선명합니다. 그러나 개별 성폭력 사건들은 복잡합니다. 성폭력과 성폭력 아닌 것 경계에 서 있는 개인들의 경험은 더욱 다양하고 복잡합니다. 개별 사건을 다룰 수밖에 없는 사법 절차에서 나이라는 일률적 기준으로 강간 여부를 결정하면서, 청소년이 성폭력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구조의 문제는 건드리지 않는 의제강간 연령 상향은 복잡한 개인과 선명한 구조의 문제를 거꾸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청소년운동으로써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며 할 수 있는가의 문제도 이 간담회에서 꼭 논의되기를 바랍니다. 가장 간단하게는 청소년운동의 논평, 성명 등 입장을 내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십대섹슈얼리티인권모임에서는 개별 차원에서 미러링 논평을 내려는 논의가 되고 있습니다. 성폭력, 데이트폭력, 가정폭력이 독보적으로 높게 일어나는 이성애 관계의 문제는 남성과 여성이 성적 관계를 맺기 때문에 일어나며, 여성을 보호하기 위해 이성애를 금지해야 한다는 논평을 내려고 합니다. 물론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테니 해설을 덧붙여야겠죠. 오늘 자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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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02 16:52 2016/03/02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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