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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0/12/15
    명문대 합격 쌍둥이 자매 등록금에 애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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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0/11/30
    선택의 길에 서서..(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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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0/06/08
    너무 예쁜 고냥이들!!!ㅠ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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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10/06/08
    넘 예쁜 냥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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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10/03/10
    자발적 퇴교를 앞둔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3학년 김예슬(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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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9/04/02
    홍기빈, 자본의 본성에 관하여 역자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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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8/10/30
    끔찍스런 진보경제학계의 '사회학과 정치학'(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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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8/10/27
    2008/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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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대 합격 쌍둥이 자매 등록금에 애태워....

사교육 거의 못받고 서로 격려하며 공부..꿈 이룰 수 있게 도움 호소

(통영=연합뉴스) 임형섭 기자 = 경남 통영시의 쌍둥이 자매가 어려운 가정환경을 극복하고 나란히 명문대에 합격했으나 등록금을 마련할 길이 없어 애를 태우고 있다.

15일 통영시 등에 따르면 2011학년도 대학수시모집에서 통영여자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언니 김민서(18)양과 동생 김민채(18)양 각각 연세대 응용통계학과와 서울대 바이오조경학과에 합격했다.

일란성 쌍둥이인 이들은 시에서 생활비를 지원받아야 할 정도로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원이나 과외 등 사교육을 거의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서로 격려하면서 학업에 정진해 합격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어머니인 이수영 씨는 "중학교 때와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는 간간이 학원을 보냈지만 그 뒤로는 학원에 전혀 보낼 수 없었다. 학교와 집에서 주로 공부를 했다"며 "힘든 가운데서도 잘 자라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이어 "아이들에게 어려서부터 공부를 하라든가 놀지 말라든가 하는 말을 해본 적이 없다. 자발적으로 공부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며 "다행히 시키지 않아도 서로 격려해가며 열심히 공부해 좋은 결과가 있었다"며 뿌듯해 했다.

민서와 민채 자매는 "합격 소식을 듣고 12년 동안의 노력이 보상받는 기분이 들어 너무 기쁘다"며 "부모님과 선생님 등 그동안 돌봐주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린다"고 소감을 밝혔다.

하지만 이들 자매는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등록금 마련에 어려움을 겪고 있어 주위의 안타까움을 사고 있다.

어머니 이씨가 음식점 주방에서 일을 하면서 생계를 꾸리고 있지만 두 딸의 입학금을 마련하기는 힘든 상황이다.

통영시 관계자는 "힘든 환경을 딛고 성실히 공부한 자매가 꿈과 용기를 잃지 않도록 독지가들의 따뜻한 손길이 절실하다"며 "시에서도 도울 수 있는 방안을 찾겠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대도시와 달리 교육 인프라가 열악한 통영시에서는 공교육 강화가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며 "앞으로도 질 높은 공교육이 이뤄지도록 계속 지원할 것"이라고 전했다.

hysup@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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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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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자선가가 이 여학생들에게 1천만원을 건넸다는 기사가 전해지면 미담이 완성된다.

저 학생들이 합격한 학교가 서울대와 연세대가 아니라 남서울대와 연세대 원주 캠퍼스였어도 같은 결과를 얻게 되었을까?

 

6년 전 나는 대학 등록 예치금이 없어서 지방의 자선가에게 400만원을 받아 지금 다니고 있는 대학을 등록했다.

학자금 대출이 잘 정비되어 있지 않던 시절이라, 그분이 아니었다면 난 재수를 했을지도 모르고, 아니면 엄마의 교육열 때문에 고리대를 얻어서 대학에 등록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나는 이 학생들이 언론을 통해서라도 도움을 받고자 하는 절절함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

 

 이제 내 동생의 이야기를 해보겠다. 우리 집은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97년) 완전히 파산했고, 동생과 나는 할머니댁에 맡겨졌다. 당시 동생은 7살이었다. 부모님은 멀리 피신을 가셨는데 두분 다 3년 후에나 돌아오셨고, 아빠는 도박 중독이라 집에 잘 들어오지 않았고 엄마는 기숙사가 있는 직장에서 하루에 15시간씩 일을 하셨다. 나야 당시 15이니 어떻게든 혼자 생활을 꾸려나갔는데 동생은 다시 할머니댁에 맡겨지는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댁은 2평이 될까말까하는 방에 화장실도 없고 따뜻한 물도 나오지 않았다. 동생은 그렇게 7살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13년을 할머니댁에서 살았다. 나는 공부를 잘했고, 맏딸이었으니, 그래도 엄마가 악착같이 모은 돈으로부터 적어도 책 값 걱정없이는 공부를 할 수 있었지만 내 동생은 중학교 때 부모 없는 아이라고 왕따를 당하고 방황하다가 공부에 흥미를 잃었다. 비평준화였던 내 고향에서 동생은 최하위권이었던 학교에 진학했고, 운이 좋게도 그 곳에서 친구를 사귀면서 공부도 시작하고 학교 선생님들에게 사랑받으면서 비록 지방사립대지만 간호학과에 갈 수 있었다. 10학번으로 입학한 내 동생의 등록금은 입학금을 합쳐 500만원에 육박했지만 물론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은 없었다.

 

 사실 돈이 정말 필요한 사람들은 내 동생과 같은 사람들이다. 명문대는 기업 뿐만 아니라 파워엘리트인 동문들로부터 기부가 많고 재정운용 규모도 크기 때문에 장학금을 받을 기회가 훨씬 많다. 서울대 연고대는 모두 가계곤란 장학금을 구비하고 있고, 적어도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이 대학을 포기하지 않게끔 제도적 정비를 해 놓았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고등학교 때부터 아무리 집안 형편이 어려워도 최소한의 공부시간과 자원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이 학교들에 합격하기가 어렵다. 내 사촌 오빠들은 둘 다 모두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는데, 오빠들의 아버지는 장애인이었고, 어머니는 어릴적에 집을 나갔다. 차상위나 기초수급대상자에 대한 아무런 지원이 없던 시절이기에 오빠들은 학교를 다니면서 매일 아르바이트를 했다. 당연히 대학에 지원할 등록금이 없었다. 돈이 없어서 대학을 포기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무시하지 못할만한 수치가 아니다. 누가 더 돈이 필요한 사람들이었을까?

 

 대부분의 대학생들이 학자금 대출을 받고 대학에 졸업할 때 즈음 3000-4000만원 정도의 빚을 달고 나온다. 그에 비해서 이 학생들은 명문대에 진학하였으므로 훨씬 많은 장학혜택이 주어지게 될 것이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저 아이들을 보면서 박탈감을 느끼는 것이 바로 그런 기부의 학벌주의적 선별성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결론은 나와 같지 않다. 그들은 저 아이들에게 너희들도 어차피 명문대 합격한 것을 제외하고는 우리와 같으니 주제 넘게 상향 지원하지 말고 전액 장학금을 주는 대학으로 지원을 하거나, 아니면 빚을 얻으라고 말한다. 아니다. 그것은 모두가 불행한 방법이다. 모두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누구든지 돈이 없어서 원하는 대학을 포기하게끔 해서는 안된다고 요구해야 한다. 교육이란 것이 누구도 자선이나 개인적 시혜를 바라지 않고, 사회적 시스템을 통해서 적극적으로 국가에게 요구할 수 있는 권리라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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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의 길에 서서..

25년을 살면서 배운 중요한 인생의 가르침 중의 하나는 하고싶은 것만 하면서 살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정말 하기는 싫지만 그것이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일 때, 혹은 나만 생각하면서 살수는 없기에 해야할 때가 있다. 하지만 막상 이 질문 앞에 부딪혀 있을 때 선택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 이번에 서울대 보건대학원 보건학과와 고대 경영대학원 경영관리에 지원했는데 둘다 붙는다면 아마도 난 서울대를 선택하게 될 것 같다. 여기까지 결정하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석사 코스웍이 시작하고 3개월 이내에 나는 세부전공을 선택해야 한다.

 

 보건통계학, 보건인구학, 환경보건학, 의료사회학..

 

 애초에 나에게 보건학에 대한 흥미를 심어준 것도 의료 사회학이었고 통계학보다 사회학이 훨씬 재미가 있을 거란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기에 사실 내가 하고 싶은 공부는 의료사회학이다. 하지만 의료사회학을 맘편히 선택하기에는 여러가지 문제가 있다. 먼저 이 분야는 정말 마이너해서 나중에 밥벌어 먹고 사는 문제가 있을 것이고, 그보다 더 문제인 것은 이 공부는 다소 거시적이어서 실질적으로 '필요한' 공부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필요의 문제란 내게 필요한 공부를 말하는 게 아니라 사회적 필요를 말하는 것이다. 나는 앞으로 석박사를 거치면서 내 연구가 좀 더 형평성 있고 여러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의료정책을 건설하는 데 일조할 수 있었음 좋겠다. 그러려면 이론 공부보다는 계량 공부를 통해서 구체적 성과를 내는 게 매우 중요해지는 데 사회학 이론 공부는 사실 그게 매우 어렵다.

 보건통계학은 보건학 가운데서도 매우 전망있는 분야이며 어디든 쓸데가 매우 많고(사회학, 정책학, 행정학, 정치학, 경제학 심지어 경영학) 석사 때 공부하고 박사 때 의료사회학 등 내가 하고싶은 공부와 연계해서 써먹을 수도 있고, 게다가 미국유학을 생각한다면 펀딩받고 박사하기에 가장 좋은 전공이다. (상대적으로 사회학 이론은 펀딩받기 무지하게 어려움) 하지만....나는 학부 때 통계라고는 경영통계밖에 안들었고, 그나마도 중간고사 이후로 버려서(헐.-_-;)지식도 일천하다. 듣기로는 학부에서 통계학 전공을 하지 않으면 코스웍을 따라가는 게 매우 버겁다고들 한다. 게다가 통계학 특성상 공부하면서 즐거움을 느끼기는 매우 어려울 것 같다...

 보건인구학의 주제는 저출산 고령화, 지역사회 건강증진, 사망력 등등과 연관되는 데 사실 지식면에서 본다면 의료사회학과 보건통계학을 융합시켜 놓았다고 보면 이해하기 편할 것 같다. 양적연구 측면에서 이론사회학보다 훨씬 진척도가 크고, 그러면서도 적당히 나의 흥미를 자극하며, 또한 필요의 측면에서도 의미가 있는 전공이다. 박사 어드미션, 펀딩, 나중에 일을 할 수 있는 분야면에서도 보건통계학만큼은 아니지만 꽤 괜찮다. 또 지도교수님 삼고싶은 분이 바로 이 전공이기 때문에 이걸 택하면 그 교수님 방에서 함께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하지만 메리트의 측면에서 보건통계학, 흥미의 측면에서 보건사회학과 비교한다면 다소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결국 나는 무엇을 선택하게 될까?

아니,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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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예쁜 고냥이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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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 예쁜 냥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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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퇴교를 앞둔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3학년 김예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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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빈, 자본의 본성에 관하여 역자해설

 여기 번역하여 내놓은 글들은 바로 이 ‘자본의 본성’을 해명하는 새로운 이론을 다루고 있다. 베블런(Thorstein Veblen 1857~1929)은 신고전파의 자본 이론도 완전히 거부했지만, 마르크스주의의 자본 이론 또한 그와 동일한 전제를 공유하는 것으로 보아 기각했다. 대신 그가 착목한 지점은 실제의 현실에서 ‘자본’이라는 이름의 제도가 작동하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분석하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그가 찾아낸 사실은 자본이란 경제적 생산 행위 그 자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소유권이라는 법적 제도적 권력을 이용한 재분배의 방법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전통적인 자본 이론에서 자본의 본질과 그 축적 과정의 성격을 파악하는 방식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 자본은 생산 과정에 투입되는 물질적 자본이며, 그 이윤과 축적의 크기는 그 자본재에 내포되어 있는 생산성의 발현의 결과라고 보는 신고전파 이론이다. 둘째, 생산에 들어가는 원초적 재료, 노동과 토지를 투하하여 생산을 겪는 시간이 자본이며 이윤과 축적의 크기는 그 시간적 과정을 이자율 등으로 평가한 것이라고 보는 오스트리아 학파의 이론이다. 셋째, 자본이란 불변 자본, 즉 그것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노동자를 착취한 ‘죽은 노동’의 집적이며 , 그 크기는 원칙적으로 생산 과정에서의 착취율의 함수라고 보는 마르크스 경제이론이다. 이 세 이론은 비록 서로 큰 차이가 있으나 하나의 전제를 공유하고 있으니, ‘자본이란 생산 과정에서 발현되는 생산성을 체현한 존재’이며, 이렇게 생산 과정에 뿌리박고 있는 자본이 화폐적 표현 형태로 전환된 것이 자본의 가치이자 이윤 및 축적이라는 것이다.


베블런의 자본 이론이 다른 모든 자본 이론과 애초에 갈라지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바로 이러한 요소 생산성이라는 개념을 거부했다는 점에서다. 그가 보기에 ‘자본의 생산성’이란 현실의 두 가지 요소를 합쳐서 구성해놓은 신화였다. 그 두 요소 중 하나는 사회 공동체 전체가 생산의 수단과 방법에 대해 공유하는 지식이요, 다른 하나는 그 지식을 자기의 것으로 전유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자본가의 권력이다. 즉, ‘생산성’이라는 것은 실제로는 사회 전체가 공유하고 있는 지식을 활용하여 전체가 이루어내는 산업의 생산 과정 자체라는 것이다. 산업의 생산 과정이 자본, 그리고 자본의 이윤으로 전환하게 되는 것은 자본을 소유한 자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권력에 기초하며, 따라서 자본이란 본질적으로 생산이 아닌 권력에 기초하는 존재이다.


  그는 근대 경제 사상에서 가장 초석이 되는 개념의 하나인 ‘생산성productivity'이란 고대와 중세를 거쳐 현대로 내려온 ’정령 숭배animism', 즉 일종의 물활론적 미신이라고 보았다. 주지하듯이 18세기의 중농주의자들physiocrats은 자연이란 무엇인가를 산출하는 틀이라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자연physis 개념을 받아들여 이것을 ‘가치’를 낳는 원천으로서 생산성의 개념과 동일시했다. 이후 애덤 스미스Adam Smith에게서 시작된 가치론 논쟁사는 그러한 ‘가치’를 낳는 원천은 노동에 있는가 자본에 있는가 시간에 있는가 등의 ‘요소 생산성’ 논의로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베블런은 이러한 ‘생산성’이라는 하나의 정령을 가정하는 태도가 근대 초기의 자연관에 기초한 하나의 미신이며, 더욱이 그러한 정령이 경제적 과정의 구체적인 사물에 있는 양 여기는 것은 원시인들의 애니미즘과 똑같은 선입견preconception이라고 보았다.


  그는 ‘생산성’이라 할 만한 것이 있다면 이는 자본재이든 인간 노동이든 특정한 요소에서 귀속되는 것이 아니며, 어떤 공동체가 자신의 문화적 맥락에서 어떤 욕망을 충족하는 데 사용하는 방법과 수단에 대해 공동체 전체가 보유하는 총체적 지식만이 궁극적인 생산성의 담지자임을 강조한다.

 그는 이렇게 공동체 전체의 효율적 생산 활동을 담보해 주는 지식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화폐 가치를 가질 수 없으며, 또 자본도 이러한 지식을 기반으로 벌어지는 생산 활동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강조한다. 오로지 특정인이 그 공동체 전체의 지식을 ‘볼모’로 잡아 사회 전체로부터 ‘몸값’을 뜯어낼 때에만 이윤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며, 그러한 지식이 특정인의 이윤 창출을 위한 도구인 ‘자산’이 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어떻게 이러한 ‘인질극’이 벌어질 수 있는 것인가. 생산의 수단과 방법에 관한 공동체 전체의 지식은 경제 단계가 발달함에 따라 특정한 ‘사물’에 체현되기 마련이다. 과학과 기술에 의존하게 된 19세기 중반 이후의 생산 지식은 모두 공장과 기계라는 사물에 재현된다. 여기에서 폭력을 동원한 지배 계급이 그 사물에 대한 법적 소유권을 설정하게 되는데, 이 근대적 소유권의 실질적 의미는 사실상 ‘자신이 그것을 사용할 권리’가 아니라 ‘남들이 그것을 사용하지 못하게 할 권리’이다. 한 번 더 비유를 들자면, 지배 계급이 사회적 생산이라는 흐름이 통과할 수밖에 없는 기계나 장비 등의 ‘병목’을 잡아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공동체 전체로서는 그것을 사용하기 위한 대가를 그 생산 수단의 소유자에게 지불할 수밖에 없게 되며, 이것이 그 장비로 생산된 재화에 대한 높은 가격과 그로 인한 높은 이윤으로 나타나게 된다. 여기에 중요한 함의가 있다. 자본 소유자가 이윤을 높이기 위해 하게 되는 일은 산업 생산을 한없이 증대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효율적 활용을 일정한 이윤이 보장될 만큼만 가동되도록 제한하는 ‘깽판 놓기sabotage', 즉 베블런의 표현을 빌리면 “효율성의 주의 깊은 철회”라는 것이다.

 

여기서 마르크스와 베블런의 차이를 지적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두 사람은 모두 자본주의의 ‘착취적’ 성격을 이론화했지만, 두 가지 정도의 큰 차이를 보인다. 첫째, 자본이 착취하는 대상을 마르크스는 노동자의 잉여 노동이라고 본 반면에 베블런은 노동자만이 아닌 사회 공동체 전체의 생산력과 복지라고 보았다. 베블런은 노동 가치론 또한 ‘요소 생산성’의 신화에 기초한 그릇된 이론이라고 보았으며, 자본이 사회 공동체 전체로부터 가져가는 잉여의 성격은 ‘추상 노동’이 아니라 구체적인 액수의 ‘화폐’로 표현되는 생산물에 대한 청구권이라고 보았다. 둘째, 마르크스는 자본가들이 늘 가격 경쟁에 시달리면서 자신의 이윤을 올리기 위해 항상 생산성을 극대화하려 든다고 보았다. 비록 이것이 최종적으로 과잉 생산과 이윤율 저하라는 ‘비생산적 결과’를 낳기는 하지만, 이는 생산성을 오히려 너무 높이려고 노력한 결과 생산량이 무계획적으로 과도해지고 또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과도하게 기계 중심이 된 데 따른 ‘의도하지 않은 결과’이다. 반면에 베블런은 자본주의란 애초부터 생산성의 극대화가 아닌 그것의 제한, 즉 생산에 대한 ‘깽판 놓기’에 기초하고 있기에, 비효율적 비생산적 성격을 본질적으로 갖는다고 보았다. 결국 베블런에 있어서 자본주의의 사회적 모순이 생겨나는 대립선은 자본 대 노동이라기보다는 자본 대 사회 공동체 전체가 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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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스런 진보경제학계의 '사회학과 정치학'

펌: http://blog.naver.com/leng70/110016149471

 

끔찍스러운 진보경제학계의 ‘사회학과 정치학’ (댓글:14, 추천:8)
에로이카() 2006-03-22 16:11

내 책상 위에는 지금 세 권의 책이 있다. 윤소영의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 개론] (2006, 공감), 정성진의 [마르크스와 한국경제] (2005, 책갈피), 그리고 김수행, 김공회의 [한국의 좌파 경제학자들] (2005, 서울대학교 출판부). 이 페이퍼는 위 책의 내용들과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다. 그냥 방금 윤소영의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 개론]을 다 읽고 서평을 쓸까 하다가, 서평에 쓰기도 뭐한 문제고  하지만, 아무래도 짚고 넘어가야 서평에서 말이 꼬이지 않을 것 같아 따로 몇 자 적어두기로 한다.

 

10명의 경제학자들을 선정해서 다루는 [한국의 좌파 경제학자들]의 저자들은 논란거리를 피하기 위해 애초부터 이 10명의 선정은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라고 한 수 접고 시작한다(iv). 그러나 이 열 명에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을 통해 종속심화-독점강화 테제를 들고나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윤소영이 들어 있지 않은 것에 의구심을 품은 이가 비단 나 뿐이었을까? 윤소영의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 개론]은 이 의구심을 심증으로, 그리고 정성진의 [마르크스와 한국경제]는 이 심증을 확신으로 바꾸어 놓았다.

 

 

윤소영-김수행

 

윤소영은 자신이 관계하고 있는 과천연구실의 어떤 대학원생이 김수행 교수에게 박사논문을 제출했는데, 논문 주제의 유일한 전공자였던 정운영 교수를 김수행 교수가 기피했다는 일화를 들면서 다음과 같이 쓴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전통이 단절된 것이 반드시 부르주아 경제학 탓인지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안병직 교수에 이어 김수행 교수도 만만찮은 기여를 했거든요. 진보경제학계의 사회학과 정치학은 정말 끔찍스럽습니다” (윤소영 2006: 105). 이 때까지만 해도 이게 앞서도 몇번 나온 김수행 교수에 대한 지은이의 유감 표명(65, 81)의 연장이려니 했다. 그러다 책의 맨 뒤에 실린 정운영 선생 추도문을 보면서 이 끔찍한 사회학과 정치학이 더욱 궁금해졌다. 403쪽에서 지은이가 언급한 [민중언론 참세상]에 실린 김수행 교수의 글("이 못난 사람아! 왜 먼저 죽어!")은 이번에 처음 보았는데, 중앙일보로 옮긴 뒤 정운영 교수의 논조를 못 마땅해 하는 나였지만, 정운영 교수들 두고 당신은 경제학자보다는 신문기자에 더 적성과 소질이 맞다고 계속 생각해왔다는 그 이상한 추도사는 나를 아연실색케 하였다. 정운영 교수와의 옛 정이나, 글솜씨나 감수성에 대한 칭찬, 변절에 대한 책망, 그리고 먼저 떠난 이에 대한 원망 등이 뒤엉켜 있는 이 글의 형편없는 글솜씨는 충격이 컸거나 시간이 없기 때문이었으리라 좋게 생각한다 해도 글에는 드러나지 않은 무언가가 있었다. 뭔지 모르겠으나, 김수행 교수가 정운영 교수에 대해 어떤 미안함이나 컴플렉스 같은 것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여간 김수행 교수의 이 글에 충격을 받은 윤소영 교수는 [밥자유평등평화] (http://bob.jinbo.net) 자유게시판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긴다.

 

김수행 교수처럼 정 선생을 추모한답시고 변절 운운하는 것은 김 교수의 생각(저는 김 교수가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이나 두 분의 관계(자신은 정통 마르크스주의자이고 정 선생은 저널리스트일 따름이라는 단정은 명예훼손급의 망언입니다)를 잘 알고 있는 저로서는 정말이지 어처구니 없는 짓입니다.

 

게시판의 또 다른 글에서 윤소영 교수는 김수행 교수가 언제 단 한 번이라도 자신의 입장이라는 것이 있었는 지모르겠다는 말을 남기면서 격한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자신은 김수행 교수를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생각했던 적은 한 번도 없으며, 그가 언제 입장 같은 게 있었냐는 윤소영 교수의 댓글은 김수행 교수의 추도사 만큼이나 뒤에 무언가가 숨겨져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그 숨겨져 있는 무언가의 일단은 윤소영의 이 책에서도 나온다. 지은이에 따르면, 서사연 해산 이후, 이전의 한신경제과학연구소와 비슷한 성격의 연구소를 만들려는 흐름이 있었으나, 연구소 창립이 구체화되는 단계에서 김수행 교수가 참여를 거부하고, 다른 교수들(정운영, 김기원, 정성진, 김성구)도 시큰둥해 하자, 자신 혼자 과천연구실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65). 물론 이것말고 다른 일들도 많을 것이다.

 

어쨌든 정리하면, 김수행은 윤소영을 무시하고, 윤소영은 김수행을 물어뜯는다.

 

 

윤소영-정성진

 

김수행, 김공회의 [한국의 좌파 경제학자들]은 맨 마지막에 정성진을 다룬다 (122-137). 그 정성진 교수는 자신의 책에서 윤소영 교수에 대한 유감을 다음과 같이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정성진 2005: 221-222).

 

짜골로프의 [사회주의 정치경제학 교과서]를 선전하는 데 앞장섰던 윤소영도 얼마전부터 소련 국가자본주의론으로 개종했다. 비록 문제점투성이의 일국적소련 국가자본주의론이기는 하지만, 이는 일단 환영할 일이다. 그런데 윤소영 (2004)은 이 같은 자신의 이론적 입장의 수정 혹은 변화와 관련된 자기비판이나 해명 대신, 엉뚱하게도 지난 10여년 이상 소련을 일관되게 국가자본주의라고 비판해온 나와 트로츠키주의를 공격하는 것으로 자신의 과거의 오류를 은폐하려 하고 있다. 윤소영은 이미 14년 전부터 소련 국가자본주의 논쟁을 소개해온 나의 글들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정성진 교수는 마치 클리프 그룹이 국가자본주의론을 대표하는 것처럼 호도하지만 이는 무지의 소치일 따름이라는 등으로 비난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사실 호도이고 역사의 날조다. 게다가 윤소영 (2002)의 소련 국가자본주의론은 뒤죽박죽의 이론적 기회주의를 반영한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의 역사를 잡식재단하면서 자신의 무지콤플렉스, ‘트로츠키주의 알레르기를 달래는 것은 자유이지만, 스탈린주의와 반공주의의 폭압과 개량주의의 포섭에 맞서 노동자계급 자기 해방에 헌신해 온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을 멋대로 왜곡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사실 정성진의 이러한 분노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 개론]에서도 윤소영은 정성진 교수가 활동하고 있는 트로츠키주의 그룹 다함께에 대해 가소롭다는 반응을 보인다. 윤소영에 따르면, 트로츠키주의의 부활은 남한이나 그리스에서만 볼 수 있는 다소 특이한 현상이며, 이들의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는 식의 알리바이정말 기가 막히는 태도란다 (39).  더 나아가 윤소영은 정성진을 다음과 같이 약올린다. 아래에는 다함께라고 나오지만, 이는 사실 정성진이다.

 

“[역사적 마르크스주의]를 발표한 후에 제 생각에 공감하는 사람들도 늘어났지만, 그러나 다함께 같은 데서는 적대감이 더욱 심해졌는지 논쟁을 해보자고 덤벼들곤 하지요. 그런데 미안하지만 저는 그런 논쟁은 사절입니다. 완전히 시간 낭비일 따름이기 때문이에요. 모든 논쟁에는 동지적인 신뢰나 적어도 정직성과 분별력이 있어야 하는데, 다함께에게는 그런 것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사실 다함께는 아주 특이한 기질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다함께를 보면 한 손에는 코란 또 한 손에는 칼을 들고 지하드에 나서는 이슬람 시아파 전사가 생각날 정도이지요. 게다가 제가 듣기로 다함께는 노동자의 힘과 만나도 늘 그렇게 으르렁댄다고 합니다. 무슨 시아파가 수니파와 싸우는 것 같아요. 제 말이 정 의심스러우시다면, [이론] 4호에 소개된 캘리니코스의 만델 비판을 한번 읽어보세요. 어떻게 같은 트로츠키주의자에게도 그렇게 적대적일 수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윤소영 2006: 344).

 

정성진이 보는 윤소영은 은폐된 스탈린주의자이며, 사실을 호도하고, 역사를 날조하며, 이론적 기회주의자이며, “무지콤플렉스에 시달리는 넘이다. 반면, 윤소영에게 정성진은 나는 잘못한 게 없다고 오리발이나 내밀면서, 동지적 신뢰는 커녕 정직성과 분별력도 없고, 지들끼리도 껀수 잡아 싸우는 데 바쁜 한심하면서 질까지 안 좋은 넘이다. 정성진은 윤소영 한 번 걸리기만 해보라며 이를 빠득빠득 갈고 있고, 윤소영은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하는 식으로 실실 쪼개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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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바로 여기에서 눈여겨 봐야 할 것이 있다. 윤소영에게 시비를 걸고 있는 정성진은 바로 김수행에게 시비를 걸고 있는 윤소영의 모습이다. “본래 남성이란 밴댕이 소갈딱지라는 윤소영의 말(363)은 우리나라에서 난다긴다 하는 이 좌파경제학자들 김수행, 윤소영, 정성진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다라고 한다면 이들은 왜 자기가 거기 들어가야 하느냐고 하며 억울해 할까? 그 밴댕이 소갈딱지들 갖고 사회성격논쟁에 다시 불을 지피기는 상당 기간 동안은 힘들 것 같다. 우울한 현실이다.

 

사실 이 세 경제학자들은 남한의 좌파 경제학자들이 21세기에 어떻게 활동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각기 다른 전형들이다. 김수행 교수의 경우는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을 담당하고 있으며, [자본]의 국역자이다. 일단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비판에 관심을 갖게 되면, 제일 처음 접하게 되는 이름이고, 행여 그 부분을 전공으로 삼을라치면 거쳐야할 큰 스승의 위치에 있다.

 

물론 윤소영 교수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서울대의 학생은 일류이지만, 교수는 이류일 뿐이고, 비봉판 [자본]은 대학원생들 도움을 받아 개역을 했다고는 하지만, 북한판을 남한말로 옮긴 것에 지나지 않는다. 윤소영 교수는 80년 광주항쟁을 전후하여 마르크스주의로 전향한 이래, 자신의 입장을 갖고 PD론을 정초했으며, 절친했던 선배인 이병천이 중진국론에서 포스트마르크스주의로, 또 발전국가론으로 널뛰기를 하고 있을 때, 알튀세르-발리바르 계열의 마르크스주의의 한 길을 걸어왔다. 한신대라는 좌파 대학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현실 운동에서는 한 걸음 떨어져 과천연구실을 꾸리고 있다. 그는 87년 이후 선거에 참여하지 않고, (자신의 연구실에 나오는 후학들이 행여 선거에 참여하여 민주노동당이라도 찍을까봐) 과천연구실 MT 출발을 선거당일 아침 6시에 했다는 얘기를 저서에서 자랑스럽게 한다.

 

이런 윤소영은 정성진 교수에게는 파렴치한 스탈린주의자일 뿐이다. 정성진 교수 또한 경상대라는 좌파 대학 경제학과에 자리잡고 있고, 교수라는 점잖은 직책에도 불구하고 다함께라는 정치조직에 투신하고 있다. 트로츠키주의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면서도 동시에, 남한 마르크스주의 르네상스를 위해 학진의 후원을 받는 [마르크스주의 연구]라는 반년간 학술지의 편집장이기도 하다.

 

이들 말고도 다른 전형들을 들 수 있다. 민주노동당 부설 진보정치 연구소의 장상환, 참여연대나 대안연대에서 활동하는 교수들, 그리고 재야의 채만수 등등...

 

밖에서 보기엔 그 물이 그 물이고, 우리 힘 한 번 합해서 뭐 한 번 해봐야 하는데... 꼰대들이라 완전 콩가루다. 뭐 거창하게 단결투쟁을 하자는 것도 아니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고 제대로 된 토론문화 한 번 만들어 보는 게 그렇게 어려울까? 모두들 상대방만을 탓하고, 자기가 문제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은 애써 외면한다. 아니면 이제 연세들이 드셔서 거기까지는 생각이 못 미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선생들 밑에 있는 대학원생들은 어떨까? 그 사회도 줄을 서야 할텐데... "나는 바담풍 하더라도 너는 바람풍 해야 한다"고 가르칠 수 있을까? 또 이 양반들이 쓴 책을 사볼 어린 학생들이나 노동자들은 또 뭐라고 생각하겠는가? 역시 우리 윤소영... 역시 우리 정성진... 이럴까? 또 그런다고 한들 공부하는 양반들인데, 그게 또 자기한테는 무슨 득이 되겠는가?

 

안 그래요? 선생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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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7

2002년 초등학교 5학년 짜리 아이가 자살하면서 남겼던 말은 "우리 부모님은 하루에 8시간을 일하시는데, 12살이 나는 왜 13시간을 공부해야하나, 물고기처럼 자유롭고 싶다"였다.

지난 해에 자살한 초등학생이 남긴 유서는 “나의 가장 큰 결점은 공부를 못한다는 것이다. 내가 잊고 싶은 두려움은 이번에 친 시험점수다. 언제가 나는 공부를 제일 잘하는 OO를 이기고 싶다.”

“저는요, 학원에서 시험보면 영어는 항상 100점 맞아요. 근데 수학은 꼭 한 개나 두 개 틀려서 속상해요. 아파트 12층에서 뛰어내리려고 했는데 엄마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동영상에서 초등학교 2학년 예영(가명)이가 한 말이다. 이 동영상은 요즘 초등학생들의 성적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한지 웅변하고 있다.

서울지역 4~6학년 초등학생 1,000명을 대상으로 얼마 전 교육커뮤니티 ‘즐거운 학교’가 스트레스 지수를 조사한 결과 ‘과외’가 초등학생의 스트레스 원인 1위로 꼽혔다. 초등학생 10명 중 9명이 과외를 하고 과외 과목은 평균 3.13개, 과외 시간은 하루 평균 2시간 37분이라는 것이다.

조사 결과에는 27%의 초등 학생들이 자살 충동을 느낀 적이 있고, 그 이유가 바로 ‘성적’ 때문이라는 결론도 나와있다.

실제로 지난 2월 인천에서 초등학교 6학년 어린이가 방학숙제를 하다가 방에서 목을 매 자살을 했다. “학원을 조금만 다녔으면 좋겠다.” 자살한 아이가 자주 하던 말이다. (ebs 지식채널 "대한민국에서 초딩으로 산다는 것")

 

0. 들어가며.

 

 낯설게 본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당신은 한국의 입시제도와 "미친교육"에 얼마나 분노하며 사는가? 모순적인 사회를 뒤집겠다고 나서는 좌파들조차, 분신하신 노동자 한분의 죽음에는 그토록 슬퍼하면서도, 한해에 200명의 아이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한국의 교육에 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그 어떤 노동착취보다 광범위하고 대규모로 벌어지는 현상임에도, 좌파들의 교육제도, 특히 대학의 서열에 대한 문제의식은 물론이고, 무엇보다 실천으로 보여주는 행동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지않을까?

 나는 적어도 한국사회에서 대학서열 철폐운동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휴머니즘적인, 혹은 인권의 관점에서 교육문제만을 해결하는 게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과 능력'에 관한 이데올로기 저항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능력없는 인간은 한달에 100만원을 채 못받는 비정규직이 되어도 싸다는 것은 중학교때 실업계와 인문계를 나누어 실업계 학생들을 '똥통' 취급하는 중학교의 분위기로부터 만들어진다. 아이들은 아주 어려서부터 타인과 함께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시험에서 상대방을 이기는 방법을 먼저 배운다. 한국의 중등 교육기관은 그 존재 목적이 무엇인가? 문서에 적혀져 있는 전인교육은 간데 없고 고등학교는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도구로서 존재한다. 그래서 그토록 많은 외고생들이 불리한 내신을 포기하려고 학교를 자퇴한다, 세상에. 

 이번 10월 고려대 수시 2학기 고교등급제 논란은 나로 하여금 한국의 모든 교육제도의 문제는 '학벌'에서부터 유래하였으며, 서열을 혁파할 수 없다면 이와 같은 류의 문제는 어떤 형태로든 끊임없이 재생산될 것임을 확신하게 만들었다. 노무현 정권의 3불정책과 수능등급제가 사교육비 절감과 대체 무슨 관계를 가질 수 있단 말인가. 대학 서열이 남아있는 한, 그것도 지금과 같은 형태로 1등부터 꼴등까지 '네임벨류'로 서울의 대학들이 줄세워질 수 있는 시스템에서는, 가장 우수한 '성적'의 학생들은 서울대에 진학하려 들기 마련이고, 입시형태가 어떻게 변하든 아이와 학부모는 온갖 돈을 들여 그 기준에 맞추려 들것이다. 사교육과 공교육 정상화를 그토록 외치던 이해찬의 교육정책 이후로 사교육비가 더욱 증가했던 것은 예정된 결과였다.

 

1. 학벌의 정의.

 김상봉씨의 논의를 가져오겠다.

2. 한국사회에서의 학벌.

 

3. 왜 대학서열철폐만이 문제의 답인가?

4. 대학 평준화의 조건.

5. 대학 평준화의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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