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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서 지상으로

막연하게 생각하던 것을,
그것도 내가 그걸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단 것 자체를 모른 채 그리 생각하고 있던 것을,
현실이란 바닥에서 구른 물리적 실체를 대면하고는
다른 각도에서 재고해보게 되는 경우가 있지.

얼마전 본 동물 보호 운동 얘기 중에서도.
개고기 합법화 반대에 대해,
지극히 인간 중심적 사고이며 애견 편향자들의 주장일 뿐이라 생각해왔는데.
왜 개만 특별해야 되느냐 이거지. 소도 닭도 다 잘 먹으면서.
차라리 양성화하는 것이 식용으로 소비되는 개들을 위해서도 낫다고 주변인들과 얘기해왔고.
헌데..
현실1. 합법적으로 식용으로 대량 '생산'되는 동물들의 처지는 현재 '공식적으로' 조낸 비참하다는 것,
현실2. 먹어도 된다고 공인 떨어지는 순간 무슨 종이 됐건 그런 처지로 편입된다는 것,
..이란 얘길 보고는
아, 이건 나는 미처 생각을 안해봤던 지점이었구나, 싶은 기분이 들었어.

물론 원론적으로야 소든 돼지든 개든 다 똑같은 생물이고
어느 종만 특별 대우 받아야 할 이유도 없는거고,
인간이 식물이든 동물이든 남의 생명 희생시켜 존재하고 있는 건 엄연한 사실이고.
하지만 지금 당장, 식용 동물들의 비참한 환경과 처우 때문에 채식 운동까지도 일어나는 마당에,
어떤 종이 됐건 자 먹읍시다, 분위기가 되면
그 비참한 꼬라지로 몰아넣어지는 개체수가 대폭 늘어난다는 건 뭐 어떻게 할 수 없는 사실인 거였다.
자의적일 뿐이고 형평성에도 어긋나는 명분이
다분히 인간 중심적으로 윤색되어있다는 건 '이론'의 문제지만,
엿같은 환경에서 생산되어 몇 개월 살다 죽을 팔자의 생명체가 증가한다는 건

100% 야기될 '현실'이란 얘기다.
뭐 윤리란 것의 근본이 어디까지 소급되느냐에는 여러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확실히 유쾌상쾌한 일은 아니잖아.


그리고 유기견, 유기묘, 심지어 유기인.

고양이와 정말로 살아보기 전까진, 길고양이를 본 날은 기분이 좋았다.
고양이를 좋아하니까.
좋아하는 고양이가 눈 앞에 보이니까, 기분이 좋았지.
하지만 고양이와 정말로 살아보고, 걔를 걱정해보고, 먹여보고, 똥을 치워보고,
살아있구나, 매 순간순간 느껴보고.
그러고 나니깐.
길고양이를 본 날은 이젠 가슴이 아파. 속상하고 막막해.
책임져 줄 수 없단 것도, 어쩔 수 없다는 것까지도.
애묘인들 커뮤니티같은 데 가면, 구조활동 해 보고 분양시켜 보고 한 분들, 되게 까칠해.
고양이 예뻐염 하면서 처음 룰루랄라 들어간 사람들은 그 양반들 말에 막 놀라고 상처입어.
근데 그분들 그러는 게, 이해가 가.

당하고 데이다보니 날이 선 거야.
얼마나 세상이 고양이들에게 무책임하고 (특히 한국같은 경우)적대적인지,
나도 아끼는 고양이가 실체로 자리잡기 전까진 제대로 실감하지 못했던 거야.

근데 그러고 나니깐,
분리되어 있던 내 방 안의 삶과, 길바닥의 삶이,
분리된 다른 차원이 아니게 되고 나니깐.
그게 그냥 길고양이로 끝나지도 않게 되는 거야.
길에서 태어난 새끼 고양이.
쟤들은 삶을 부지할까. 겨울을 버틸까.
버려져 떠도는 개.
저것들의 안전은 대체 어떻게 지켜질까.
꾀죄죄한 노인네가 냇가에 서 있다.
그 옆에 자리한 조그만 스티로폼 그릇에 김치, 나무젓가락, 소주 한 병.
먼지 낀 비닐봉다리 속 라디오에서 지직지직 들려나오는 음악.
저 양반은 어떻게 사는걸까. 저게 끼닌가.
대체 이들을 어쩌면 좋아. 뭐야 이게 대체.
생명이란 게 대체 뭐야.

내 생애 최초로 느꼈던 무력감도 다시 기억해내게 되었어.
그것도 길고양이 때문이었지.
고교 시절 친구들이랑 하교길에 주웠던 탯줄도 안 떨어진 새끼고양이.
그날밤을 결국 못 넘기고 죽었던.
서넛의 친구들과 그 녀석을 들고 동물 병원을 찾아 온 동네를 헤매면서,
내가 힘없는 어린애라는 것을,
세계의 시스템은 이런 여고생들과 이런 새끼 고양이따위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족고 사는 것이 그저 그러할 뿐인 자연법칙이라는 것을,
무섭도록 뼈저리게 깨달았다.
세상이 어쩜 그리도 크고, 내가 어쩜 그리도 작게 느껴질 수가 없었어.
단지 고양이가 불쌍해서가 아니라, 그 거대한 무력감이 분하고 슬퍼서 펑펑 울었지.


세부적 디테일보다, 원칙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근데, 그 원칙이 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은 아니어야 한다는 거지.
탁상 위에서만 통하는 것이어도 안되고.
그걸 나도 자주 잊는거야.
경험하고 느껴봐야만 비로소 정말로 알게돼.
그 전까진 안다고 생각해도 아는 게 아니야.
그리고 실제로 겪기 전까진, 그걸 절대 깨닫지 못해. 어쩔 수 없는 비극이지.
지켜야 하는 것과 막연히 생각하는 건 다른 문제지만, 너무나 자주 혼동되는 문제야.
더군다나, '정말로' 알게 되면 될수록,
시원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갑갑해진다는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쉽사리 못 벗어나는 이유인지 몰라.
막연하게 붕 떠 있던 무력감이
거대한 실체로 고스란히 내려앉을테니.

 

 

...뉴욕에서 여전히 잘 지내고 있을, 보고싶은 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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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아고라에 올라온 어느 외고생의 글

원문 링크: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02&articleId=104803&RIGHT_DEBATE=R5

 

외고폐지에 찬성하는 외고생입니다.

[487] starryy in**  번호 104803 | 09.10.26 22:47 IP 121.167.***.248 조회 31317  =
 

안녕하세요. 전 한영외국어고등학교 2학년 재학생입니다.
이글은 앞서 10월 23일에

'나소란-'이라는 아이디를 사용하시는 분께서 써주신 글에 대한 답글로 달았던 글인데요,
조금 더 많은 분들이 읽어주시고 함께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싶어서 다시 올립니다..

제 입장부터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외고 폐지에 찬성하고,
또 외고를 자율고나 자사고, 특성화고로 전환시키자는 입장에 대해 반대합니다.
외고에 다니는 학생이 외고 폐지를 주장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소리일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제가 외고 입시 준비할 때는 생각해보지 않았던 부분을 고등학생이 되어 고민해보면서
외고는 폐지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흔히 사람들이 말하기를 국제화 시대에 외국어는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서
외고는 통역관 키우는 장소가 아니라 국제적인 지도자를 양성하는 학교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에는 심각한 모순이 존재합니다.
외국어 고등학교는 무슨 고등학교인가요?'특수 목적' 고등학교입니다.
'외국어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라고 주장하는 분들의 입장에 따르자면
'특수 목적'이란 '국제적 지도자 양성'을 의미하는 것이겠지요.
여기서 잠깐 한국의 법률을 살펴봅시다.
특수목적고등학교를 초중등교육법시행령 제90조에서는
'특수 분야의 전문적인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고등학교'로 정의한다.
일반 인문계 고등학교와는 달리 특목고에서는 과학, 외국어, 농업, 해양, 예술, 체육 등
각 특수하고 전문적인 분야를 미리 학생들에게 습득시켜
그 분야의 전문가를 조기 양성을 하는 목표로 설립되었다.
묻겠습니다.일반 인문계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외국어는 목적입니까? 수단입니까?
목적인 사람도 있을 것이고 수단인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외국어 고등학교로 가면  이야기가 달라지게 됩니다.
몇몇 선생님들이 모여
"저희 학교는 외국어를 '목적'으로 간주하는 학생들을 받아들여 외국어 전문가를 양성하겠습니다."
하고 설립한 것이 외고라는 말입니다.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실 우리나라에 외국어 고등학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외고라는 간판을 걸고,
마치 기업처럼 '외고'라는 이름을 브랜드로 활용하여 만든

입시전문학교는 있을지 몰라도 말입니다.

외국어고등학교 학생들이 외국어를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만 간주한다면
일반 인문계 고등학교와 어떤 점에서 설립취지가 달라집니까?
외국어 수업시간이 많다고 해서 그것이 외고의 설립취지에 부합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요약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외고'는 현재 한국에서
'입시 명문' 또는 '사회적 성공의 발판',

'국영수 문제 풀이 잘하는 애들 집합소'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않습니다.
외국어를 수단이라고 말함으로써

외국어고등학교가 설립취지에 맞지 않게 운영되고 있다는 점을 스스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외고의 설립 취지에 관한 논의는 여기서 접어두고,
이제 외고의 존립을 옹호하는 분들께서 주장하시는

또 다른 명제 한가지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앞으로의 세상은 1%의 '인재'가 99%의 바보들을 먹여살리는 세상이 될 것이기 때문에
수준별 수업을 통한 수월성 교육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하시지요?
제가 역사 과목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만 잠시 역사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알기로, 나라에서 학교라는 것을 세워
나라안의 모든 사람들을 체계적으로 교육시키기 시작한 것은 굉장히 최근의 일입니다.
학교를 세운 목적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우리가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다고 배웁니다.
학교는 나라의 주인인 모든 사람이 사회를 만들어나갈 때
조금 더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돕기 위해 교육을 제공하는 곳입니다.
이점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분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학교라는 곳은 모든 학생들이 모여, 성적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앞으로 우리는 우리의 세상을 얼마나 아름답게 가꾸어 나갈 수 있을까

고민해보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공교육 부실론자분들께서는
공교육이 부실하니까 외고가 부실한 공교육에 보완책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공교육이 부실하다고 하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공교육만 받아서는 애들 국영수 점수가 안나오더라 이겁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중학교 시절을 돌이켜보면 쉬운 설명을 10번해줘야 겨우 알아들을까 말까한 친구도 있고,
아무 생각없이 떠드는 친구도 있고, 공부하는 것 방해하는 친구도 있습니다.
'저'라는 인간만을 기준축으로 놓고 보았을 때
앞서 언급했던 친구들은 걸림돌들에 불과합니다.
제가 국영수 문제풀이 실력늘리는 것을 방해하는 존재들이니까요.
그래서 어른들이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공부잘하는 애들끼리 모여야 공부 분위기가 좋아지고 너가 나중에 출세할 때 도움도 된다고요.
사실 저는 그래서 외고를 왔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게 '우리 사회'에 유익한 방향일까요?
국영수 점수는 단지 학생이 학교 생활을 성실히 했느냐 아니냐의 잣대에 불과합니다.
그것이 한국에서 사회 계급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학벌을 결정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지나치게 강조되었을 뿐입니다.
학벌사회라는 면은 여기서 다루는 부분이 아니므로 그냥 넘어가도록 하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분명 수준별 수업, 그러니까 성적에 따라 학생들을 격리시킨 후 지식을 주입하게 되면
국영수 점수 산출이라는 측면에서 보았을 때 외고와 같은 학교는 굉장히 좋은 학교입니다.
또 '좋은 학교'그러니까 국영수 점수 좋은 애들 다니는 학교에 다니게 되면
분명히 그 효과를 통해 개개인의 출세, 학벌의 획득에는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우리 세상을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 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토론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개인의 출세와 사회의 발전이

반비례 관계를 형성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바보가 되었습니다.
 

대한제국이 일제에게 넘어갈 때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이완용을 기억하십니까?
이완용은 당시 소위 말하는 1%의 인재였습니다.
그런데 이완용이 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자신과 함께 살던 민족을 팔아먹었습니다.
한국 민중의 이익은 싸그리 짓밟고 자신의 이익만 챙기고 편하게 살다가 죽었습니다.
오늘날 강조되는, 수월성의 틀에 갇힌 교육에서는
또 다른 이완용들을 만들어 낼 가능성이 높습니다.
비단 이완용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1%가 99%를 짓밟은 사례는 무수히 많습니다.
성적이 좋은 아이들끼리 모이면 성적 좋은 아이들의 마음만 헤아리게 됩니다.
사람이 나빠서가 아니라,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을 기준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 아이들이 자라 사회에 지도자적인 위치를 차지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 아이들은 학생시절에 입시 명문 고등학교를 다니고,
국영수 문제 풀이를 잘해서 소위 '인재'라고 인정받고 자라왔습니다.
그 학생은 당연히, 자신과 친하게 지내던 소수의 아이들의 생각만 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한 아이들이 늘어날 수록
우리 사회에 얼마나 큰 걸림돌이 될 지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저는 자율고와 자사고에도 반대합니다.

마지막으로 얼마전 홈플러스 이승한 회장님께서 하셨던 말씀으로 마무리를 짓겠습니다.
"장애인이 맛없는 빵을 만든다면,
중요한 것은 빵을 사주는 것이 아니라, 맛있는 빵을 만들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홈플러스 지방점 출점 논란과 관련한 청중의 질문에 대한 답변 가운데 나온 것인데요.
이 회장님의 주장이 옳고 그름을 떠나
이 회장님께서 평소에 가지셨던 인식을 단번에 살펴볼 수 있지 않습니까?
장애인들은 똑같은 빵을 만들어도 제대로 못만드는 존재라는 인식....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동시에 각자의 빵을 만들었습니다.
누가 더 잘 만들었을까요? 당연히 비장애인이 잘 만들었을거라고요?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여러분께서는 아마 장애인이 아닐 것이고,
장애인의 마음을 헤아려보지 않은 분일 겁니다.
만약 그 장애인분이 다리가 불편한 분이라면요?
빵만드는데 있어 비장애인보다 못하리라는 보장이 있습니까?
그 장애인분께서 한쪽 팔만 불편하신 분이라면요?
남은 한쪽 팔로 부단한 노력을 통해 맛있는 빵을 만들수도 있습니다.
설사 두팔 다 없는 장애인 분이라도 발로 멋진 빵을 만들 수도 있고
눈이 안보이시는 장애인 분이라도 손에 스며드는 느낌을 통해 맛있는 빵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우리사회의 1%이신 이 회장님께
장애인 친구분 한명만 계셨더라도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있었을까요?
한번이라도 장애인분들의 마음을 헤아려 보신 분의 입에서

이런 천박한 예시가 나올 수 있을까요?

1%와 99%를 격리시키는 교육 체계에서 진정한 1%는 나오지 않습니다.
99%를 얕보는 1%는 우리에게 필요 없습니다.
100%를 누구나 1%가 될 수 있도록 돕는 게 수월성 교육입니다.
정해진 1%가 어딨습니까.1%는 상황마다 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인간이든 소중하고 또 매우 똑똑한 존재들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강요되는 1% 인재론'은 모두 거짓말입니다.
선택은 우리가 우리를 위해 합니다.
우리가 1%를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사회의 1%가 이회장님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자라길 바라는 것인가요?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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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은 원칙이다

A의 세부적인 디테일이 우리를 물먹일 지라도,
A의 제거가 대원칙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면
할 수 없이 물을 먹어야 하는 것이다.


김규항씨 왈 "한국 사회는 우경화된 게 아니라 민영화되었다"고.
"정치가 사라졌다"는 표현도 들었다.
그 말들은 맞다.
사투리가 극심한 사람을 공교육 현장의 교사로 계속 둘 수 있느냐,
해고 추진을 전제로 보이콧을 할 수 있느냐를 가지고 식구들과 약간의 논쟁을 벌였을 때,
학교도 기업이나 마찬가지며

효율성이 최우선되어야 한다는 20대 청년의 말을 들으며 그것을 실감했다.
(심지어 한평생 보수 성향의 낼모레 환갑 부부도 청년의 그 발언엔 우려를 표시했다;)

선생의 사투리가 엿같이 심해 수업 듣는 애들이 물을 먹어도,
표준어와 사투리가 우열의 규정이 아닌 편의적 대표성의 규정인 이상,
공교육 현장이 지역성을 차별해서는 안되는 이상,
사투리를 이유로 그를 교사로 존속시키는 데에 문제가 있어선 안된다고 나는 얘기했다.
안그러면 원칙이 훼손된다고.


이 얘기에 동의하는 사람을 만나진 못했다.
일단 현실적으로,
수업을 도저히 알아먹기 힘들 정도로 심한 사투리를 구사하는 교사란 존재 자체가 어렵기 때문이다.
심한 사투리라 해봐야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강의 뜻은 알아들을 수 있고,
뭐 월등한 차별점을 지니는 사투리라면 제주도 사투리 정도일 터이나,
임용고시를 치를 정도의 교육 과정과 사회화 과정을 지나게 되면
엔간한 교사 지망생들은 현실적 여건 상
자신의 언어가 타지역에서 소통이 어려울 정도인 채로 두지는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존재하지 않는 일에 대해 얘기를 하려니

'그런 이상한 놈은 있을 수가 없지'에서 출발하여
'있을 수가 없단 건 불가능하단 얘기고,
불가능하단 건 그런 사람은 가르칠 능력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여서 채용시에 다 걸러진단 얘길거고
그렇다는 건 심한 사투리는 교사로서 부적합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거나 같지'
...의 경로로, 대화를 나눠본 사람들의 생각은 진행되더라.


하지만 제시된 논쟁은 일종의 사고 실험이었다.
사투리가 심한 교사가 이미 존재하는.
그리고 저런 식의

'A가 존재하지 않는다 → A는 부적합해서일 것이다 → 따라서 A는 나쁜 요소이다' 진행은
A가 정말로 필드에 등장했을 때 A의 박멸이 올바른 행동 지침이라는 근거를 보장해주진 않는다.
'나쁘기에 없다'역시 인과에 의한 것이 아닌 느슨하고 쉬운 추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필드에 A가 존재하지 않는 이유는 여러가지일 수 있다.
정말로 A가 나빠서일 수도 있지만, 오해 때문일 수도, 불리하게 지급된 조건 때문일 수도 있다.
그것을 원칙적으로 검증해내는 건 현실적 경쟁 우위와는 별도의 문제인 거다.
필드에 A1, A2, 또는 A-ㄱ이나 A-ㄷ1같은 문제들이 등장할 때마다 번번이 헛갈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물론, 논쟁시에 문제가 된 것은 수업 효율성 뿐만이 아니라
표준어와 사투리라는 규정이기도 했다.
표준어도 공교육도 사실상 제정/행위 주체가 비슷하기 때문에
'나라에서 정한 교육 시키는 건 나라에서 정한 말로 시켜야지'로 나가기 시작하면
그런 수준으로 족하는 주장에 대해선 정말 대꾸해 줄 말이 없으나.
표준어라는 것이 바르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니라
다같이 '평등한' 애들 가운데에서 반 대표할 반장 뽑아놓는 것과 비슷한 문제이며
더 솔직하자면 그냥 건국 무렵에 국가 권력의 중심이 어느 지방에 있느냐의 문제일 뿐이라는-
-그런 것은 일단 차치하더라도.
만일 '공교육은 당빠 공적인 언어로'란 명제를 옳다고 해 준다면
지금 현재 실존하는 수많은 사투리 구사 교사들은 다 짤릴 명목을 충분히 갖고 있는 셈이 된다.
그러면 얼만큼 심하냐의 문제이지 않냐는 반론이 들어오게 되는데,
그 시점에서 결국은 다시 원칙 문제로 돌아와야만 하게 되는 거다.
사투리가 심한 것이 해고의 명분이 될 수 있느냐 아니냐,
즉, 지역적 성향이 강한 것이 공적 영역에서 배척받는 요인으로 작용해도 되냐-는
다원성, 평등성 원칙의 문제로.


나는 그러한 평등과 다원주의 원칙의 문제로 이 사투리 교사 얘기가 환원된다고 보며,
특히나 공적 영역에서- 더더군다나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관을 가르친다는 공교육 현장에서-
그 원칙을 보장하는 것은 더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그는 해고되어서는 안된다고 믿는다.
설사 그의 수업에 익숙하지기 전까지 애들이 조낸 짜증이 난다고 해도,
-이미 이 사투리 교사가 존재하는 마당에는-
그 원칙을 훼손하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애들에게 수업 내용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면 교사 자격이 없는 거지,
라고 대화를 나눈 사람들은 다들 얘기했다.
아이들의 수업권은 어떻게 되냐는 거지.
그 결론은 손쉽다.
또 그 얘기 자체로서는 옳은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세상 일은 다층적이다.
고민하지 않았다간 모르는 새에 원칙이 무너지고,
그러면 존폐를 달리할 부당함이 발생했을 때에 조차 호소할 근거가 사라진다.
아주 단순하게 얘기하자면 사투리 심한 교사를 짜를 때
신체 장애가 발생한 교사를 아이들의 수업권을 근거로 교단에서 떨궈내기도 더 쉬워진단 얘기다.
내겐 어쩔 수 없이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것이 효율성 증진보다 훨씬 중요하다.

게다가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게 사회란 걸 애들이 체화하는 것 역시도,

당장 교과서 내용 머릿속에 넣는 것만큼이나 애들이 학교란 데에서 배워야 하는 거다.


사실... 액면가만 보자면 진짜 문제는 바로 그것이다.
"내겐 ~이 훨씬 중요하다."
그렇지 않은 이들에겐 다른 것이 훨씬 중요하고, 그들은 그게 원칙이라고 생각할테니까.
결국, 어떤 세상을 원하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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