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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01] ‘제안’ 이후 현재까지의 경과에 대한 판단과 입장

 

‘제안’ 이후 현재까지의 경과에 대한 판단과 입장


- “가칭)노동자 독자 정당 건설 공동행동” 제안은 여전히 유효하며

더욱 절실해 지고 있다! -


                                                                  

고민택


[‘제안’ 이후 현재까지의 경과에 대한 판단과 입장.hwp (60.00 KB) 다운받기]

 

  노동자혁명당 추진모임은 지난 7월 2일 20개 조직/단체/모임에 공문 형식의 전달과 함께 공개 방식을 통해 “자본가 정당과 단절! 야권연대 반대!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독립!”에 입각한 “가칭) 노동자 독자 정당 건설 공동행동”(이하 ‘제안’)을 제안한 바 있다. 이 글은 ‘제안’에 따른 현재까지의 경과에 대한 일종의 공개보고이다. 우리가 ‘제안’을 하면서 ‘제안’에 대한 답변을 7월 31일까지 해 줄 것을 명시한 바도 있어 그에 따른 경과와 결과를 객관화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글을 쓰는 주된 목적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제안’ 이후 현재까지 확인된 반응(경과와 결과)에 대한 단순한 사실 보고를 넘어 그에 기초한 ‘제안’의 정치적 적확성/실효성을 다시 한 번 사회화/공론화/쟁점화하고자 하는 데 있다. 그 이유는 7월 31일을 훌쩍 지난 현재 시점까지도 ‘제안’의 취지와 맥락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즉 아직까지 ‘제2 정치세력화’, ‘새로운 정치세력화’를 둘러싼 논의는 가닥이 잡히지 않은 채 복잡 혼미한 형태로 흩어져서 현재도 모색 중에 있는 바, ‘제안’을 뛰어 넘거나 대체할 수 있는 방안은 나타나고 있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제안’ 이후에 ‘제안’에 대해 설명하고 토론할 수 있는 객관적 기회가 있었으며, 우리가 공문을 전달한 20개 단위 중 다는 아니지만 오늘 현재까지 여러 단위와 일대일로 만나 일종의 간담회 형식으로 좀 더 이야기를 나눈 바가 있으며(이 행위는 이후로도 이어갈 예정이다), 20개 단위 중 일부는 공문을 통해 우리의 ’제안‘에 대해 답해오기도 했다. 또한 객관적으로 몇 몇 단위는 우리의 ‘제안’과 같은 방식은 아니라도 또 다른 움직임을 통해 자신들의 입장과 견해를 사실상 직간접적으로 표출하고 있다. 따라서 이상에 대한 우리의 판단을 밝히는 것을 통해 그러한 움직임과 흐름이 우리의 ‘제안’과는 어떤 상관관계를 갖고 있는 가를 비판적으로 검토, 토론 하고자 한다.  

 

  우리가 ‘제안’을 하면서 이미 설정한 바 있지만 객관적으로도 지금 당 건설을 둘러싸고 부딪치고 있는 쟁점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경로 문제다. 또 하나는 어떤 당이냐는 문제다. 이 둘은 사실 서로 떼기 어려운 동전의 양면과 같다. 전자가 당 건설 사상이라면 후자는 당 사상이다. 이 둘은 불가분의 관계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이 둘은 각각의 독립된 범주를 가지고 있다. 이 둘이 아무리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하나가 아니다. 하나라면 불가분의 관계라는 말이 굳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즉 이 둘은 변증법적 관계를 이룬다. 뿐만 아니라 이 둘은 추상적, 초역사적 개념이 아니다. 현실의 구체적 맥락과 동떨어진 채 개념 내지 당위만을 내세워가지고는 사변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할 때 ‘제안’은 핵심적으로 경로를 다루고 있다. 그 이유는 지금 더 중요한 것, 더 먼저 말해야 하는 것은 경로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물론 최종적으로는 어떤 당이냐의 문제로 귀결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의식은 어떤 당이냐는 문제는 지금으로서는 입구가 아니라 출구에 이르러 결판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반대 현상이 더 크게 나타나고 있다. 일부 그럴 수 있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으며 지금 나타나고 있는 현상도 그 같은 현실(불가피한 측면)을 반영하고 있다고 본다. 우리 역시 어떤 당이냐에 대해 이름(조직명)에서 그대로 드러나듯이, 또한 ‘제안’을 하면서 또 다른 글에서 이미 밝혔듯이 그것은 ‘노동자혁명당’이어야 함을 이미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다시 한 번 ‘제안’의 핵심인 경로 문제를 중심으로 다룰 것이다. 다만 어떤 당이냐와 관련해서는, 현 시기 필요한 정도에서, 본 책자에서 별도의 글로 제출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둔다.

 

 

‘제안’ 이후 현재까지의 경과

 

  우리가 ‘제안’을 한 후 현재까지 그에 대한 공식 답변을 보내온 조직은 5개 조직이다. 그 중 ‘사회주의 유기적 지식인’은 우리와 같은 공개 표명을 통해 자신들의 견해를 밝혔으며, 나머지 조직은 ‘공문’을 통해 의사를 전달해왔다. 그 중 3조직(해방연대, 사노신, 코뮤니스트 정치조직 준비모임)은 불참(거부) 의사를 보내왔으며, 1조직(노동자민중해방동맹준비위원회 창립모임)은 함께 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변혁모임’(대전모임)과는 소집권자와 대화를 나눌 기회를 갖게 된 계기를 통해, 우리가 ‘변혁모임’에 공식 제안을 한 것은 우리가 ‘제안’을 할 때 밝혔던 원칙과 기준에 따른 것이라는 점을 확인했으며 다만 ‘변혁모임’의 특성상 ‘공식 답변’을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에 대해 서로 이해를 같이 했다. 이 연장선에서 우리는 ‘변혁모임’ 1, 2차 토론회에 참석했지만 거기에서도 정식 제안은 하지 않았다. 우리가 알기로 ‘변혁모임’은 다른 단위에서의 ‘초청’도 같은 이유로 참석하지 않았다. ‘울산노동자연대회의’가 주최한 집담회에서 ‘제안자모임’, ‘사이버노동대학’, ‘좌파노동자회’, ‘사노위’에게는 간접적으로나마 ‘제안’을 설명할 수 있었다. ‘진보신당’과는 우리의 ‘제안’을 중심으로 한 일대일 만남 형식은 아니었지만 ‘진보신당’ 내 ‘노동정치팀’의 요청에 의해 만남을 가진 자리에서 간접적으로 우리의 ‘제안’에 대해서 직접 설명한 바 있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나머지 14개(‘변혁모임’ 제외) 단위는 아직 ‘공식 답변’이 없는 상태다. 그 중 어떤 단위는 우리가 제시한 7월 31일까지 반응하지 않은 것으로 간접적으로 ‘거부 의사’를 표현한 단위도 있을 수 있으며, 또 어떤 단위는 각기 다른 사정으로 아직 답변을 유보하고 있거나, ‘변혁모임’과 똑 같지는 않더라도 그와 비슷한 이유로 ‘공식 답변’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조직도 있을 수 있다고 예상한다. 한편 14개 단위 중 일부 조직은 내부 논의 과정을 거쳐 답변을 주겠다고 했지만 아직까지는 ‘공식 답변’을 보내오지는 않았다. 앞서 말했지만 아직 직접 대화를 나누지 못한 단위와는 최대한 대화를 요청할 생각이다.

 

  이 자리를 빌어 두 가지만 말하고자 한다. 하나는 우리가 비록 7월 31일까지 답변을 바란다는 요청을 한 바 있지만 그것은 ‘절대적 기준’으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제안’자의 입장에서 일정을 추진하기 위해 필요한 일반적 차원에서의 ‘제시(예시)’ 정도의 뜻을 표현한 것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순 행정(실무)적 절차상으로라도 7월 31일은 이제 더 의상의 의미를 갖지 않으며 더욱이 정치적으로는 ‘제안’을 거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둔다. 또 하나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뒤에서 다시 내용적으로 말하겠지만, ‘제안’이 갖는 취지와 뜻을 중심에 두고 각 단위에서 토론과 판단을 더 해 줄 것을 바라며 기대한다. 그 결과로 꼭 우리의 제안 자체에 대한 답변 형식이 아니더라도 다양하게 각 단위의 문제의식이 공개적으로 표명되는 것을 통해 현재의 논의가 훨씬 더 풍부하게 진행될 수 있기를 역시 바란다. 그것만으로도 ‘제안’의 역할은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떤 당’이냐를 말하기 위해서라도 먼저 경로를 장악해야 하는 것이 우선이다.

 

  지금 촉발된 당 건설 논의는 정세와 무관하게 진공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지난 민주노동당 창당은 96~97 총파업투쟁 정세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이루고 있다. 그 전 민주노총 출범과 함께 과제로 설정한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정치세력화’가 민주노총이 주도한 96~97 투쟁을 거치면서 구체화 된 것이다. 따라서 민주노동당 창당 경로는 민주노총 내 공식 단위(체계)의 논의 과정이 절대적으로 장악한 상태에서 이루어졌다. 민주노총 안팎에 존재하는 ‘정파’는 모두 민주노총 공식 체계에 개입하는 것을 통해서 자신을 관철해야 하는 지형이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아직 ‘정파’ 자체가 미형성/미분화 된 상태였으며 지금보다 훨씬 더 ‘비/반합법’ 형식의 정치활동이 강제 받고 있는 현실이었다. 이 때문에 민주노총에 대한 개입은 이미 ‘합법주의/개량주의’로 전환(변절)한 ‘정파’의 개입이 거의 일방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비/반합법’ 형식의 정치활동을 취하고 있거나 추구하고 있는 ‘정파’는 내용에서의 ‘합법/개량주의’에 대한 반대나 우려를 표현할 수는 있어도 경로(개입)에서는 불가피하게 고립주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꼭 이 때문만은 아니지만 이로 인해 그 뒤 민주노동당이 별다른 압박이나 견제를 받지 않고 ‘합법/개량주의’ 정당으로 치닫게 되는 한 원인이 됐다고 할 수 있다.

 

  그에 비해 지금의 당 건설 논의는 총체적으로 지난 15년에 걸쳐 이루어진 ‘진보정치’, ‘진보정당’이 최종적으로 실패한 역사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구체적으로는 민주노동당 분당, ‘진보대통합/민주대통합’ 논의를 거쳐 통진당이 결성되는 과정을 경유하고, 특히 직접적으로는 ‘통진당 사태’가 불거진 정세 위에서 촉발된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을 민주노총이 함께했으며 그에 대한 책임 또한 민주노총이 대부분 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지금 정세는 민주노동당 창당 당시와는 다르게, 지금은 민주노총이 ‘제2 정치세력화’, ‘새로운 정치세력화’에서의 경로 장악력을 일방적으로 발휘할 수 없는 지형이다. 민주노총이 통진당에 대한 ‘조건부 지지철회’를 ‘지지철회’로 결정했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오히려 민주노총이 바깥의 경로에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구도를 형성하는 것이 가능하다. 민주노총은 이미 지난 4. 11 총선 전에, 비록 실질(내용)적으로는 통진당(민주대연합)을 지지, 지원했지만, 겉으로나마 당시의 ‘통진당, 진보신당, 사회당’을 모두 ‘진보정당’이라고 인정한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통진당 사태’가 불거지면서 ‘조건부 지지철회’와 함께 ‘제2 노동자 정치세력화 특별기구’를 결정한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물론 그렇다고 민주노총의 영향력이 사라졌거나 역할이 완전히 약화된 것은 아니다. 통진당에 대한 ‘지지철회’를 결정한 뒤 이미 ‘새정치특위’를 중심으로 새로운 움직임을 본격적으로 가시화하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비록 민주노총 중집이 "중집 결정은 당내의 어떤 세력이나 정파 간의 이해와 무관한 민주노총의 독자적이고 주체적인 결정"이라고 했지만 통진당 내 ‘진보정당 혁신모임’에 친화적인 세력과 여전히 ‘구당권파’ 계열 사이의 대립과 갈등이 심화되는 양상을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통진당 바깥의 세력과는 여전히 선을 긋고자 하는 것은 물론 오히려 일부는 겉으로야 어떻든 속(실질적)으로는 민주당으로 경사될 가능성이 더 높다. 특히 연말 대선에서 민주노총 관료 지도부는 어차피 ‘야권연대’에 목매달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그 같은 행보에 외에는 별 다른 문제의식이나 문제제기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통진당 및 민주노총 바깥에서의 당 건설을 둘러싼 지형/쟁점은 크게 두 가지로 형성되어 있다. 하나의 지형은 의회/개량주의 세력과 사회/혁명주의 세력 사이의 간극이다. 또 다른 지형은 바로 그 두 세력 각각 내부에, 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하나의 조직(단위) 안에서조차 존재하는 차이를 드러내 주고 있는 것이자 그것이 펼쳐진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바로 ‘노동중심의 대중적 진보정당’, ‘진보좌파정당’, ‘좌파당’, ‘변혁적 노동자 정당’, ‘노동자계급정당’, ‘사회주의/혁명정당’, ‘전위정당’(아예 맥락이 없는 것), ‘공동전선적당’(맥락이 다른 것) 주장 사이의 간극이다. 그런데 이것들은 보다시피 모두 ‘어떤 당’이냐를 둘러싼 지형/쟁점으로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는 우리가 말하는, 즉 ‘제안’이 가리키고 있는 바의 경로(장악)에 대한 문제의식은 빠져 있다. 아니 경로가 왜 중요하며 그것이 지금에서는 왜 더 일차적인 문제인가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 뒤에서 다시 말하겠지만 ‘정파 중심이냐/현장 내지 활동가 중심이냐’, ‘투쟁조직화냐/정당건설이냐’, ‘지역(아래)으로부터의 건설이냐/중앙(위)으로부터의 건설이냐’ 등을 둘러싼 지형/쟁점이 경로상의 문제로 제기되고 있지만 이 역시 이 글에서 말하는 바의 경로와는 차이가 있다. 그것들도 작은 의미의 경로 또는 우리가 말하는 경로의 일부는 되겠지만 우리가 말하는 바의 경로(장악)와는 맥락과 차원이 다른 것이다.

 

  지금 ‘통진당 사태’가 더욱 악화(진화)되고 있지만, 또한 민주노총 상층 관료 지도부가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하고자 나서고 있지만 이에 대한 (대중적, 정치적) 대안 경로는 형성되고 있지 않다. 대중들의 입장에서는 물론 전 사회적 차원에서도 주어(관심사)는 여전히 통진당(분당)이자 민주노총이다. 다시 말해 아직도 이 두 단위가 새로운 경로 형성을 가로막고 있으며 여전히 경로를 장악하려 하고 있다. 이 같은 상태에서 지금처럼 ‘어떤 당’이냐만을 놓고 논쟁을 계속한다면 끝내 경로 장악을 해보지도 못하고 그 결과로 지리멸렬하거나 기껏해야 세력 사이의 ‘이합집산’을 통한,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그것이 ‘어떤 당’이든 간에 ‘통진당 사태’로 인해 발생한 정치 공백을 메우는 것에는 훨씬 미치지 못하는, 따라서 현실 계급정세에 실질적인 영향력이나 파급/파괴력도 미치지 못하는 그저 또 다른 정당의 설립에 그치거나 심하게는 ‘정파’ 난립 상태로 귀결될 가능성이 훨씬 높다. 이런 현실이 펼쳐지고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통진당 바깥의 ‘노동정치’ 세력 중 그 누구도 자신만의 힘으로는 경로를 장악할 수 없는 현실 때문이다. 경로를 장악할 수 있는 권위를 갖춘 조직도, 세력을 확보한 조직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치적 수준이야 어찌됐든, 각 단위 내부의 정치적 통일성도 극히 미약한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그런데 ‘통진당 사태’가 자가 발전해 ‘분당’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또한 민주노총 ‘새정치특위’가 움직임을 본격화하려고 하고 있는 마당에서는 경로를 장악하는 문제가 더욱 시급해지고 있다. 여유를 부릴 시간이 줄고 있다. 특히 민주노총 상층 관료지도부가 또 다시 살아날 환경이 조성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럴 경우 ‘제2 정치세력화’, ‘새로운 정치세력화’ 운동은 또 다시 굴절되거나 힘겨워 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우리가 ‘제안’을 한 핵심 이유도 바로 선제적으로 경로를 장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시급한 문제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분명 대중적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제2 정치세력화’, ‘새로운 정치세력화’ 운동을 공론화 시켜야 하며 그럴 수 있는 정세가 일시적으로 주어져 있다. 따라서 누가 어떻게 이 과정을 선도/주도할 것인가가 가장 긴급한 문제로 떠올라 있다. 민주노동당 창당 당시와 같이 민주노총에게 경로를 의존하게 되거나, 따라서 경로 장악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 각개 약진을 계속한다면 단언컨대 전체 차원에서든 각자 입장에서든 그 어떤 진전도 시킬 수 없다. 물론 우리의 ‘제안’이 성사된다고 해서 그 자체로 경로 장악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 말고는 경로 장악을 시도할 그 어떤 다른 대안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누구도 독자적으로는 경로를 독점/장악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아무리 ‘제2 정치세력화’, ‘새로운 정치세력화’ 공간이 대중적으로 열렸다 한들 각자 조건에서 그저 되는 만큼 하겠다는 식의 안일한 사고를 하거나, 경로 장악을 위한 공통의 과제, 일반적 과제에는 복무할 생각 없이 각자 약진하는 것에만 골몰하거나, 아예 고립주의에 빠진다면 그 어떤 전망도 열 수 없다.

 

  적어도 ‘제2 정치세력화’, ‘새로운 정치세력화’를 시도해야 하며, 할 수 있는 정치 공간이 발생했다는 정세 인식을 전제로 그에 대한 개입을 하기로 결정을 한 단위라면 최소한 그 운동을 대중적으로 펼칠 수 있는 경로를 형성하는 데 우선 누구든 일조해야 한다. 그건 바로 민주노동당 창당 당시의 민주노총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는 ‘공적 기구’를 먼저 만드는 것에 다 같이 복무하는 방식 이외의 것은 없다. 물론 민주노총은 그 자체로 ‘공적 기구’가 될 수 있지만 우리가 ‘제안’하고 있는 공동전선은 그 자체로는 민주노총과 같은 지위를 갖는 ‘공적 기구’가 자동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대중들과의 관계에서는 오직 행위(실천)를 통해서만 ‘공적 기구’로서의 위상과 역할을 쟁취하는 과정을 겪어야 한다. 그것은 당 건설 경로에서 민주노총을 최종적으로 대체하는 것으로 현실화돼야 한다. 그럴 경우에만 비로소 노동조합과 당과의 올바른 관계도 재정립하는 것이 가능해 질 수 있으며 노동조합을 혁신(우리의 개념으로는 노동조합의 전투적 재편)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당 건설을 위한 ‘공적 기구’를 먼저 결성해야 하는 이유이자 이 ’공적 기구‘가 실현해야 할 일차적 과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경로를 장악한다는 것이 가리키는 바다. 다만 그에 앞서 그러기 위해서라도 먼저 내적으로는 ‘공적 기구’로 출발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계속해서 ‘어떤 당’을 앞세우는 것은 제사에는 관심 없고 오직 젯밥에만 관심을 두는 것으로 밖에는 달리 해석할 길이 없다. 달리 비유하면 ‘사회적 필요노동’을 다 같이 먼저 하지 않고 과실만 따먹겠다고 해서는 누구도 과실을 차지할 수 없다. 당연히 전체 노동자계급에게도 그 어떤 전망이나 계획도 제시하기 어렵다.

 

 

‘어떤 당’이냐는 결국 ‘어떤 강령’이냐로 말해야 한다.

 

  앞서도 말했듯이, 아무리 경로 장악이 우선이라고 해도, 불가피해서든 또는 적극적으로든 ‘어떤 당이냐’ 논란은 벌어질 수밖에 없으며 이미 논쟁은 이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여기서는 ‘어떤 당’이냐를 본격적으로 다루려는 것이 아니라 그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지는 속에서 경계해야 할 것이 이미 나타나고 있는 것에 대해 비판적으로 검토/제기하고자 한다. 이 역시 경로 설정이 왜 우선되어야 하는 가를 뒷받침하기 위한 맥락을 띠고 있다.

 

  누구나 알겠지만 사실 ‘어떤 당’이냐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어떤 당’이냐는 여전히 세계사적으로도 논쟁이 진행 중이거나 진전을 이루지 못한 채 중단된 상태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쉽지 않은 문제다. 따라서 더 많은 연구와 경험을 거쳐야만 하는 문제다. 현실 적용 위에서 지속적으로 완성시켜가야 하는 문제다. 현재까지 제출된, 즉 위에서 열거한 ‘어떤 당’도 아직은 지극히 피상적이거나 다이제스트 수준에 불과하다. ‘어떤 당’이냐는 최종적으로 ‘당 강령’으로 표현/집약되어야 한다. 당 건설 과정은 강령 건설 과정에 다름 아니다. 나아가 당은 강령만이 아니라 조직과 전술에 대한 분명한 입장과 원칙을 또한 가져야 한다. 즉 강령/조직/전술을 통일적, 유기적으로 결부시킬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그에 대한 선험적 완성태를 미리 완비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당을 신비화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결과적으로 대기주의/엘리트주의로 경도될 위험성이 매우 높다. 지금은 당을 목적의식적으로 건설하기 위해 노력을 다해야 하지만, 당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당은 출구가 아니라 입구다. 이를 전제하더라도 ‘어떤 당’을 말하기 위한 또는 ‘어떤 당’을 출범시키기 위한 최소한의 전제조건은 강령 건설(논쟁)이다.

 

  따라서 ‘어떤 당’이냐를 말하거나 주장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그를 뒷받침 할 수 있는 강령을, 그것이 어떤 수준이든 간에, 이미 밝혔거나 조직 내적으로라도 갖고 있어야 한다. 아니 그러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강령 논의를 본격적으로 하겠다는 태도나 입장만이라도 먼저 밝히는 것이 순서다. 물론 그렇다고 현재 거론되고 있는 ‘어떤 당’이 완전히 무의미한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것을 통해 대략의 기준과 의견 분포를 가늠해 볼 수도 있으며, 나아가 ‘제2 정치세력화’, ‘새로운 정치세력화’ 운동의 현실성을 알리는 데에도 일부 기여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이다. 우선 지금 제기되고 있는 ‘어떤 당’이냐라는 의제 설정 자체가 ‘정파 주도성’을 선점하기 위한 방편으로 제출되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러다보니 의도야 어찌되었던 간에 직간접적으로 ‘종파적’ 경쟁을 부추기는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미 현실에서는 그 같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판단이다. 이로 인해 크게 세 가지 우려할 만한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첫째는 ‘어떤 당’이냐는 문제가 졸속으로 다루어지거나 처리될 가능성이다. 모두가 이 경쟁에서 뒤지지 않기 위해 실제 내용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거나 새로운 것이 없으면서도 단지 몇 가지 개념이나 당위를 앞세워 마치 커다란 차이라도 있는 것처럼 하면서 정작 그 과정에서 진지한 토론을 거쳐야 할 알맹이는 빠뜨린다면 결과적으로는 졸속으로 끝날 수 있다. 둘째는 ‘어떤 당’이냐를 매우 실용적으로 접근하는 경향도 나타나고 있다. 즉 함께하고자 하는 의욕을 앞세워 ‘최소공통분모’를 찾는 데 급급함으로써 하향평준화를 낳을 가능성이다. 즉 어렵고 치열한 논쟁과 정치투쟁을 거쳐야 하는 것을 마치 불필요한 것이거나 하지 않아야 하는 것처럼 이끌 수 있다. 이것을 마치 대중적, 현실적인 방식인 것처럼 말하는 것이야말로 과두제가 싹트는 길을 열게 될 뿐이다. 셋째는 ‘어떤 당’의 문제를 구체적 현실 정세와 무관하게 추상적, 초역사적으로 주장할 가능성이다. 예컨대 우리도 사회주의/혁명정당을 말하겠지만 원칙이나 당위를 앞세워 주장하고자 하지 않는다. 즉 사회주의/혁명정당을 나머지 당 개념과 무조건 대립시키는 방식의 개념 논쟁을 할 의사는 없다. 그런 게 아니라 당면한 정세 과제, 대중적 과제가 무엇인가를 사회/혁명주의 입장에서 제기하고 설득하려 할 것이다. ‘제안’도 바로 그것의 일환이다.

 

  우리는 이미 ‘사노위’(현재의 특정 정파의 이름이 아닌 당 건설 경로로서의 ‘공동실천위원회’) 경로를 겪은 바 있다. 비록 우리 입장에서는 실패로 규정하고 해산을 선언한 바 있지만 당시로 돌아간다면 여전히 그것이 최상의 경로라고 보는 데에는 변함이 없다. 당시로서는 사회/혁명주의 세력 사이의 당 건설 논의가 가장 긴급하게 요구되는 정세라고 판단했으며 그 판단은 지금도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의 정세는 그 때와는 전혀 다르다. 지금은 사회/혁명주의 세력 사이에서조차 당 건설 논의를 독자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니다. 나아가 설령 그런 가능성이 있다고 해도 지금의 지형에서는 ‘제안’과 같은 경로를 취하는 것이 옳다. 다시 말하지만 의회/개량주의 범주든, ‘사회/혁명주의 범주든 간에 독자적으로 ’제2 정치세력화‘, ’새로운 정치세력화‘ 경로를 장악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하물며 개별 정파 차원에서는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지금 정세는 무엇보다 경로 장악이 최우선적 과제로 떠올라 있다. ‘어떤 당’이냐는 논의는 바로 경로를 장악한 위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오히려 ’어떤 당‘이냐 논의를 졸속적/실용적/추상적으로 처리하지 않을 수 있다. ’어떤 당‘이냐는 ’어떤 강령‘이냐에 의해서 최종적으로 결정/결판지어야 한다. 거기까지 도달하는 데에는 당연히 적지 않은 시간과 과정이 필요하다. 특히 지금과 같이 대중 속에서, 대중과 함께 해야 하는 정세/지형 아래에서는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바로 이 과정을 지속적으로 끌고 가기 위해서는 경로를 먼저 장악해야 한다. 비유하자면 자동차가 달릴 도로를 먼저 만들어야 한다.

 

 

정파와 활동가 각각의 역할을 강화/결합해야 한다.

 

“오죽하면 개별 활동가들이 당 건설을 위해 나섰을까. ‘당 건설’을 말하는 정치조직들이 한 두 개가 아니라 적어도 두 자리 수가 되는 데도 오죽하면 개인들이 발 벗고 나서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혁명> 2호 중에서 재인용)

 

  ‘제2 정치세력화’, ‘새로운 정치세력화’ 경로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정파(정치조직)’의 능동적/적극적 역할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개별 활동가들이 나설 수밖에 없는 하나의 정황도 바로 정파의 역할이 그러지 못한 것에서 비롯된 면이 크다. 무엇보다 현재 ‘정파’의 역할과 태도가 너무도 미약하며 미온적이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중에서도 특히 사회/혁명주의 범주에 속한다고 스스로 규정하고 있는 세력들 사이에서 이 같은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일부가 아예 고립주의(불개입)를 자발적으로 취하고 있는 바는 논외로 친다 하더라도 그렇지 않은 부위조차 전면에 나서지 않고 우회적/배후적 개입에 머물고 있다. 당당하게 나서지 않는 것은 그 만큼 책임과 의무를 짊어지지 않으려는 소극적/수동적 태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계급을 향한 직접정치/공개정치를 펼쳐야 한다. 역사에 공짜나 무임승차는 없다. 지금처럼 사회/혁명주의 세력이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면 ‘제2 정치세력화’. ‘새로운 정치세력화’ 국면은 방향을 잃고 표류할 수도 있으며 어떻게든 진행이 된다고 해도 하향평준화에 머물 가능성이 높다.

 

  만약 정파들이 나서지 않는 것이 개별 활동가들을 주체로 세우기 위한 것이라거나 개별 활동가들을 조직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거야말로 우스꽝스러운 논리다. 사실적으로도 개별 활동가들이라고 해도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 직간접적으로 개별 정파와의 관계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누가 봐도 눈 가리고 아옹 하는 꼴이다. 지금대로라면 당 건설 논의가 원점에서, 맨땅에서 시작하거나 아니면 ‘정파’들이 배후에서 작동하는 이중적 구조를 벗어나기 어렵다. 이래가지고는 혼란과 혼선만 빚어낼 뿐이다. 현재와 같은 발상부터가 스스로 자신감이 없음을 드러내는 것이며 동시에 대중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지난 15년에 걸쳐 이루어진 역사와 경험을 전혀 별개의 것으로, 즉 무로 돌려서는 안 된다. 당 건설 과정에서 치열한 논쟁과 정치투쟁을 거치면서 당 전체의 지도력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그 당은 ‘어떤 당’이든 정세가 요구하는 제대로의 역할을 감당/수행할 수 없다. 활동가 또는 계급대중을 주체로 세우기 위해서라도 사회/혁명주의 세력은 계급대중의 가장 선진부위의 요구와 바람에 기준을 두고 정치활동을 펼쳐야 한다. 그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접근한다면 끝내 대중추수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그래가지고는 대중의 정치적 실망과 무관심만을 더욱 부추기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

 

  다른 한편 지금 당 건설 주체로 나서고 있는 활동가들도 돌아보아야 할 점이 없지 않다. 물론 그들이 모처럼 당 건설을 직접적으로 말하면서 자발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며 더욱 강화/확산되어야 한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와는 별개로 정파의 역할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거나 부차화 시키는 것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그것이 아무리 선의에서 나오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렇게 해서는 의도하는 바를 이루기 어렵다. 오히려 정파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요청하고 주문해야 한다. 정파에게 일방적으로 의존하는 것과 정파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배치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정파들이 전면에 나서는 것이 대중을 조직하는 데 일부 어려움이 따를 수 있는 정황이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이 점을 정면으로, 정곡으로 돌파/극복하지 않고는 당 건설 투쟁을 지속적으로 가져갈 수 없다. 일부 신중한 접근과 기술적 처리가 필요한 부분이 분명 있을 수 있지만 그 과정은 최소화해야 하며 가능한 공개적 방식을 취해야 한다. 지금 실제로 문제가 되는 것은 정파들이 전면에 안 나서고 있다는 점에 있다. 따라서 오히려 정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입장과 견해를 밝힐 것을 요구하고 촉구해야 한다. 

 

  또한 활동가들 사이에서도 역사적으로 형성된 경계와 차이를 극복/재편하기 위한 큰 틀에서의 원칙과 기준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 정파들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활동가들 사이에서도 벽이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다. 겉으로 아무리 함께하고자 하는 모양새를 취한다 하더라도 이면에서 각자대로 움직여 가지고는 상호 불신만 키울 뿐이다. 과거의 역사를 무로 돌릴 수도 없으며 돌려서도 안 된다. 그러나 과거의 역사에만 매달리거나 묶여서는 더욱 안 된다. ‘제2 정치세력화’, ‘새로운 정치세력화’ 운동을 위한 ‘공적 기구’를 결성하고 그 속에서 상호 검증과 대중적 검증을 거치는 방안 이외의 다른 길은 없다. 무엇보다 경로 장악을 위해 활동가들 사이에서의 공동행동이 절실히 필요하다. 이 점에서 만큼은 정파들 못지않게 활동가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특히 민주노총 상층 관료지도부와의 투쟁을 위해서는 평조합원 활동가들을 넘어 평조합원 대중들이 정치활동을 펼칠 수 있는 정치 공간을 먼저 만들어야 한다. 적어도 그들이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고, 나아가 직접 주체로 나서게 할 수 있을 만큼의 최소한의 정치 과정을 제공/창출/축적해야 한다. 활동가들의 끈질기고 지속적인 활동이 필수적으로 필요한 부분이다. 그것들을 수행하기 위해서라도 정파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불러들여야 한다.

 

 

투쟁 과제와 당 건설 과제를 긴밀히 연동시켜야 한다.

 

“자본가 정당과 단절하고 노동자 독자 정당을 건설하기 위한 투쟁이 어떤 별개의 영역에서 진행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지금 전개되고 있는 노동자투쟁들을 어떻게 계급적으로 진전시킬 것인가의 과제와 응당 긴밀한 연동 속에서 진행될 것이다.”(<혁명> 2호에서 재인용)

 

  그러나 실제 현실에서는 꼭 그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거기에는 여러 사정과 조건이 있어서겠지만 가장 핵심적인 원인은 투쟁을 책임지고 이끌 권위 있는 ‘공적 체계’가 있지 않기 때문이다. 민주노총 등 산별노조가 이 역할을 하지 않거나 못한 지는 한참 됐다. 그럼에도 규모 있는 집회라도 열라치면 공식노조가 제공하는 투쟁 일정이라도 있어야만 하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투쟁은 여전히 공식노조에 대한 의존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난 15년에 걸친 ‘진보정당’ 역사 속에서 이른바 양날개 전략에 의해 ‘진보정당’ 역시 스스로 주체가 되어 대중투쟁을 직접 조직하고 이끄는 역할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정파들 역시 수많은 ‘공대위’에 이름을 올리고 나름으로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정세를 변화시키는 데에는 역부족이다. 정말이지 오죽하면 투쟁사업장 주체들이 직접 ‘공동투쟁단’을 스스로 만들고 나섰겠는가. 그들이 나선 것은 고무적인 일이지만 그들이 그렇게라도 나설 수밖에 없는 열악한 조건은 하루 빨리 극복되어야 한다.

 

  거두절미하고 말하면 우리가 ‘제안’하고 있는 바의 ‘공적 기구’를 하루 빨리 성사시켜 이 ‘공적 기구’가 권위 있는 ‘투쟁 주체’로 나서는 길밖에 없다. 일차적으로 여기에 결합한 단위의 성원들까지 투쟁을 이끌고 나가겠다는 의지와 실천을 몸으로 직접 보여주는 방안 외에 다른 길은 없다. 그 과정에서 대중들에게 신뢰를 쌓아 나가야 한다. 그를 통해 당 건설을 말하는 정파, 활동가들 사이에서도 상호 검증과 대중적 검증을 받겠다는 것을 선언하고 스스로 시험대 위에 올라서야 한다. 단지 물리적 동원을 넘어 투쟁의 정치적 방향과 전망을 대중들에게 제시하고 직접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래야만 활동가들도 다시 현장에서 투쟁을 조직할 수 있는 근거가 생기게 된다. 벌어지는 투쟁에 연대하고 결합하는 것을 넘어 스스로 투쟁을 만들고 대중이 거기에 참여할 수 있을 때까지 꾸준하게 일관되게 밀고 나가야 한다. 그래야 실질적으로 투쟁과 당 건설을 긴밀히 연동시킬 수 있다.

 

  민주노총 상층 관료지도부와 통진당 개량주의 지도부가 장악하고 있는 대중동원력(지도력)을 뛰어 넘는 것을 최우선적 과제로 설정해야 한다. 그것이 당 건설을 현실화 하는, 당을 발전시킬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며 가장 올바른 길이다. 당 건설 과정에서든, 당 건설 이후에든 모든 정치활동의 집중은 결국 대중투쟁, 계급투쟁을 강화하는 것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모든 대중투쟁을 정치적/계급적으로 진전시켜 나가는 것이 당의 임무이자 역할이다. ‘공동전선’으로든 ‘당’의 이름으로든 노동자투쟁을 조직하고, 선언하고, 책임질 수 있을 때 비로소 당으로서의 지도력을 확보할 수 있다. ‘공동전선’ 또는 ‘당’이 주도하는 투쟁이 조합주의 투쟁과 어떻게 다른가를 대중들이 함께 공감하고 느끼고 그럼으로써 직접 주체로 나설 수 있도록 해야만 비로소 당이 하나의 세력으로 올라설 수 있다.

 

  그런데 지금 모처럼 활동가들이 당 건설을 위해 나선 상황에서 투쟁과 당 건설을 바라보는 데 있어 약간의 혼란이 빚어지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당 건설에 대한 의지가 그 어느 때보다 높은 것에서 비롯되고 있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때문에 역편향이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만약 당 건설 과제를 현재의 구체적 정세, 즉 ‘통진당 사태’로 인해 노동자정치 또는 노동자 독자 정당이 실종된 그 현실과 무관하게 지극히 일반론적 차원에서 투쟁을 통해 당을 건설하자는 주장이라면 그것은 당연히 문제가 된다. 왜냐면 지금 활동가들이 당 건설을 위해 직접 나선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그 동안의 정치 없는 투쟁, 당 없는 투쟁을 해온 것에 대한 반성에서부터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들 활동가들은 투쟁을 하기 위해서라도 우선 당 건설이 시급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바로 그렇기 때문에 ‘통진당 사태’로 인해 정치 공백이 발생한 지금의 정세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인식하고 있다. 그 같은 판단과 인식은 올바르며 정당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반대로 투쟁을 당 건설 이후로 미룬다면 그것은 또 다른 문제를 낳게 된다. 당 건설을 분명한 과제와 목표로 하되 그럴수록 투쟁을 중심 과제로 삼아야 한다. 투쟁을 단지 물리적 형태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 투쟁에 반영할 정치적/계급적 내용을 중심에 놓고 바라본다면 거기에 이미 ‘당 건설 경로’는 물론 ‘어떤 당’과 관련된 수많은 쟁점이 놓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쟁점을 놓고 생생한 논쟁과 정치투쟁을 벌여야 한다. 그래야만 서로 주장하는 그 ‘어떤 당’이 정말 ‘어떤 당’인가가 대중들에게 똑똑히 드러날 수 있다. 백 마디의 말을 주고받는 것보다 훨씬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서로의 생각을 단번에 알 수 있게 된다. 물론 이것만을 위해서가 아니다. 활동가들을 정치적으로 단련하고 보다 폭넓은 대중을 투쟁과 정치의 주체로 세우기 위한 최대의 무기는 역시 투쟁 조직화다. 한 마디로 투쟁과 정치는 분리될 수 없으며 분리해서도 안 된다. 지금까지의 ‘진보정당’, ‘진보정치’가 낳은 결정적 폐해의 하나가 바로 투쟁과 정치를 분리시킨 데 있다. 그 못지않게 ‘좌파활동가’들도 투쟁에 비해 정치를 등한시 한 바 있다. 그 결과는 결국 투쟁마저 약화시키는 것으로 드러났다. 정치적 전망 없는 투쟁은 지속될 수도, 강화될 수도 없다는 것을 지난 역사가 말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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