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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운동'이란 걸 한다는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종종 소름끼치도록 자신이 세운 '원칙'의 잣대만으로 타인을 평가하는 이들을 발견하게 된다.
자신만의 '원칙'의 잣대로 쉽게 타인을 평가하고는,
그 평가를 통해 끊임없이 자신의 위치를 확인한다.
그러나 그런 이들 중
진실로 자신의 삶을 진정한 '원칙'에 맞게 꾸려가고 있는 사람을
나는 '단/한/명/도' 보지 못했다.
비정규직의 삶을 살면서
당장 현실에 닥친 생계 문제로 인해 투쟁에 쉽게 나서지 못하는 이들에게
'당신은 왜 비정규직이면서도 당신의 권리를 위해 투쟁에 나서지 않는가'
라며 '원칙'의 잣대를 들이댈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다.
그들이 들이대는 '원칙'은 현실을 보지 못하는 '원칙'이다.
타인의 현실을 직접 경험해보지 않은 이가
현실을 위해 선택한 그들의 삶에
'원칙'을 들이대는 행동은
그들의 삶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부족함 없이 살아온 이들은
현실에 조응할 수밖에 없는 삶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
'원칙'만을 아는 이들은
'원칙'을 위해 '현실'을 무시한다.
모두의 삶은
치열하고 경이롭다.
비록 그들이 지금은 '현실' 속에 있다 하더라도
그들도 '원칙'을 모르는 것이 아니며
하기에 그들도 '원칙'과 '현실'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으며
언젠가는 '원칙'을 위해 '현실'의 모순과 싸우게 될 것이다.
어려운 상황에서 운동을 하고 있는 이들도,
모순의 현실 속에서도 빌어먹을 '현실' 때문에
'원칙'에 당장 다가갈 수 없는 이들도
'원칙'을 몰라 '현실'에 조응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이것을 모르는 이들이야말로,
'현실'을 무시하고 '원칙'의 잣대만을 들이대는 이들이야 말로
'운동가'로서의 자질을 좀 더 키워야 할 이들이다.
그들이 먼저 해야할 것은
자신들이 타인에게 들이대고 있는 '원칙'의 잣대를
자기 자신에게 먼저 철저하게 들이대고
스스로를 끊임없이 반성하면서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러나 타인을 비판하기에 바쁜 이들은
대개 자신을 비판하는 데 무디다.
그들이 쉽게 비판하는 '현실'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다.
'원칙'은 '현실'과 함께 치열하게 부딪치고 깨어지며 융화될 수 있을 때만이
비로소 빛을 발할 수 있음을.
항상 기억하자.
MOT(池), 끌어들이다.
음습한 기운이 감도는 깊고 어두운 숲 속의 연못. 푸른 물빛이 아닌 검고 음침한 빛깔을 지닌, 마치 늪과도 같은 이미지의 연못 속에 누군가 던져 넣은 작은 돌의 ‘비선형’ 파장.
이것이 MOT의 데뷔 음반
전반적으로 이들의 자폐적이고 자학적인 가사와 기계음과 지직거리는 잡음이 섞인 연주는 듣는 이의 마음을 한없이 불편하고 우울하게 만들지만 오히려 앨범의 전 곡을 듣고 나면 Radiohead의 톰 요크 (Thomas Edward Yorke)를 연상시키는 이언의 목소리와 함께 가슴 속에 짙은 인상을 남기며 은근한 중독을 유발한다. 어둡고 음습한 숲과 그 안의 깊고 짙은 연못이 묘하게 사람을 끌어들이듯. 그렇게.
They are...
나는 너의 깨어진 거울
너의 화려한 몰락
나는 서랍 속의 파란 버섯
너의 비밀스런 희망
나는 너를 움직이는 슬픔
잊혀진 첫번째 사랑
나는 너의 숨겨놓은 칼
너를 위한 흑마술
- 'I am' 중에서 -
MOT는 10년여 간 음악 작업을 해 온 이언과 Z.EE로 구성된 2인조 밴드이다. 이들은 2001년 이언이 인터넷에 올린 구인광고를 통해 만났다. 이언은 당시, "스매싱 펌킨스. 라디오헤드. 포티쉐드 등과 유사하면서도 록. 재즈. 트립합을 접목시킨 새로운 스타일의 음악을 함께 할 사람을 찾는다"는 글로 구인광고를 냈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은 결국 이언이 구인광고에서 밝혔던 의도대로 '라디오헤드, 포티쉐드의 그것과 비슷하면서도 전혀 새로운 스타일의 음악‘을 제대로 창조해내고야 말았다.
앨범은 전반적으로 트립합 비트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재즈와 일렉트로니카에 이어 헤비메틀까지 다양한 장르를 넘나든다.
첫 곡 ‘Cold Blood’는 앨범의 전체적인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트랙이다.
‘널 처음 봤던 그날 밤과 설렌 맘과 손톱 모양 작은 달, 셀 수 없던 많은 별 아래 너와 말없이 걷던 어느 길과 그 길에 닿은 모든 사소한 우연과 기억’을 읊조리며 서정적인 분위기로 시작된 노래는 중반에서 ‘모든 추억은 투명한 유리처럼 깨지겠지. 유리는 날카롭게 너와 나를 베겠지. 나의 차가운 피를 용서해’라며 반전을 이루고 가사에 따라 처음에는 서정적으로 들리던 기타의 음색도 후반으로 가면서 점차 우울한 노이즈로 변한다.
이러한 분위기는 ‘I am'에 이르러 트립합 비트와 함께 연주되는 몽환적인 신디사이저의 음향과 기타의 뭉그러지는 사운드로 마침내 전면화된다. 이어 ’Love song'에서는 한층 강화된 기타의 리프가 헤비메틀의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계속되는 불규칙한 박자는 ‘해로운 상상 내게 꽃처럼 피어 이렇게 나는 점점 점점 점점 미쳐’하며 노래하는 화자(話者)의 불안한 심경을 극적으로 표현해내고 있다.
이러한 불안함은 ‘상실’의 기계적 불협화음에 이르러 최고조에 달하지만 ‘나의 절망을 바라는 당신에게’와 ‘날개’ 등 앨범의 후반부로 가면 무겁고 불안하게 치닫던 음색은 서서히 사그라지고 다소 몽환적이면서도 조용한 분위기로 가라앉는다.
이렇게 마지막 히든 트랙인 ‘Mixolydian Weather’에까지 이르면 어느새 이들의 음악에 중독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조심스러운 기대
MOT는 똑똑한 밴드이다.
그들은 ‘Radiohead'와 'Portishead'에 머무르지 않고 기계와 어쿠스틱, 불협화음의 사운드를 조합해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들어냈다. 게다가 전반적으로 음울하고 불안한 분위기 속에서도 묘하게 대중을 끌어당기는 감성을 지니고 있기까지 하다. 때문에, 아직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앞으로의 행보에 기대를 걸지 않을 수 없다.
부디 이들이 현재에 머무르지 않고 앞으로도 새로운 실험들을 통해 90년대 후반의 활발했던 실험정신이 사라진 언더그라운드와 대중음악계에 활력을 불어넣어줄 수 있기를 바란다.
중심 없는 교육부, 혼란 속의 대입제도
지난 5월 13일 MBC 프로그램 ‘아주 특별한 아침’의 보도에 의하면, 지금 고 1 학생들은 배우자와의 이혼 시에 느끼는 스트레스에 준하는 정도의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한다. 스트레스 평정값에 따르면 평정값이 100으로 가장 높은 ‘배우자의 죽음’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수치이다.
사물함에서는 필기 노트와 교과서가 사라지거나 찢어진 채 발견되는 경우가 허다하고 친한 친구와 경쟁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심각한 죄의식과 함께 자살까지 고민하는 학생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부는 여전히 갈팡질팡 정신이 없다.
내신을 강화하여 사교육을 줄이겠다던 야심찬 태도는 이미 간 데 없고, 서울대에서 논술형 본고사를 도입하겠다고 하니 쩔쩔 매다가 얼마 전에는 서울 지역의 대학 입학처장단이 모여 ‘내신의 비중을 급격히 높이지는 않을 것이고 다양한 형태의 논술시험이나 심층적인 구술면접을 통해 종합적으로 평가하겠다”는 요지의 발언을 하자 이번에는 또 여기에 적극 찬동하고 나섰다.
올해 초, 내신에 집중하기 위해 교과를 중심으로 한 학원과 과외에 몰렸던 고 1 학생들이 서울대와 입학처장단의 발표 이후 이번에는 다시 논술학원으로 몰리고 있다는 학원가의 소식은 교육부의 중심 없는 입시 정책이 학생들을 얼마나 혼란에 빠뜨리고 있는 지 단편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현상일 것이다.
교육부의 내신등급제, 대학들의 딴 소리
교육부가 ‘내신 비중을 강화하여 사교육 부담을 줄이고 공교육을 강화하겠다’는 명분으로 적극 추진해 온 내신등급제와 2008 입시안은 이미 지난 해 발표되었을 때부터 ‘오히려 입시 부담을 가중시게 될 것’이라는 교육계의 비판에 부딪혀왔다.
성적에 따라 절대평가를 하여 ‘수, 우, 미, 양, 가’의 5단계로 성취도를 나타내었던 기존 학생부 기재 방식을 내신 부풀리기 방지를 위해 상대평가제의 9단계 등급으로 세분화하였기 때문에 1, 2점 차이만으로도 등급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학생들 간의 경쟁은 심해지고 시험은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이제는 학교가 그 자체로 ‘입시학원’이 되어버렸다.
또한 교육부는 내신등급제의 명분으로 각 학교의 ‘내신 부풀리기’를 내세웠지만 사실상 매해 대학들이 교사에 대한 불신과 학교 간의 학력격차를 문제 삼아 내신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는 현실을 볼 때 어차피 내신의 반영 여부는 전적으로 대학들의 선택에 달려있다고 보아야 한다. 결국, 내신 등급을 세분화해 보았자 대학들이 이러한 태도를 계속 지니고 있는 한 내신등급제는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교육부의 2008 대입안이 가진 또 다른 문제는 공교육 강화와 내신의 신뢰 확보를 위한 ‘내신 비중 강화’를 강조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대학의 자율성’을 명분으로 한 대학별고사 역시 사실상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미 교육부의 입시안 자체가 이와 같은 모순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서울대가 2008학년도입시부터 수능의 비중을 없애고 내신을 40%, 논술형 본고사를 60% 반영하겠다는 사실상의 ‘본고사 시행안’을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 명확한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서울대가 이와 같은 입시안을 그대로 시행한다면 그간 교육부가 강조해 왔던 ‘3불 정책(고교등급제 금지, 기여입학제 금지, 대학별 본고사 금지)’을 어기는 것이 된다. 그러나 교육부는 ‘3불 정책’을 법적으로 강제할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 때문에 덩달아 다른 대학들도 ‘입학처장단’ 모임을 통해 서울대 안과 비슷한 입장을 발표하기에 이른 것이다.
결국 자꾸만 바뀌는 장단에 괴로운 것은 학생 뿐이다.
몸통은 간 데 없고 깃털만 나부껴.
해방 이후, 한국의 입시 정책은 13번이나 바뀌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입시정책을 바꾸고 좋은 명분을 다 가져다 붙인다 해도 문제는 계속 반복되기만 할 뿐이다. 근본적인 문제인 ‘대학서열화’와 ‘학벌 중심 질서’를 건드리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초, 중, 고 12년의 소중한 세월이 오직 ‘좋은 대학’에 입학하기 위한 경쟁으로 채워지고 여기서 뒤처지면 ‘인생을 망친다’는 압박감이 엄연히 현실을 좌우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공교육 정상화’니 ‘사교육 경감’이니 ‘경쟁 완화’니 하는 것들은 모두 공염불에 불과한 것이다.
입시를 위해 국, 영, 수 교과서 따라가기도 힘든 현실의 아이들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도 모르고 산다. 새벽 6시부터 다음 날 새벽 1시까지 끊임없이 수업의 연속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어떻게 아이들이 철학적 고민을 하고 세상을 알며 자신의 입장과 논리를 정리할 수 있겠는가. 결국 교과과정도 '외우고‘, 논술에 유리한 답도 ’외우는‘ 수밖에 없다.
교육부는 더 이상 2008 대입정책을 두고 우왕좌왕 고민할 필요가 없다.
지금, 교육부가 해야 할 일은, ‘국․ 공립대 평준화’ 나 국립대의 ‘지역균형선발제’ 등 대학 간 서열과 경쟁을 완화할 수 있는 정책을 개발하고 학벌 해소를 위한 구체적인 법적, 제도적 방안들을 타 부처와의 연계를 통해 연구, 제시하는 것이다.
부디 교육부가 이 당연한 결론을 속히 인정하기를 바란다.
-2005. 5. 셋째 주. <문화사회>에 게재.
뒤바뀐 연대와 적대
장귀연
1.
나는 정말 몰랐다.
만국의 노동자들이 치루는 세계노동절대회에서, “일본의 망동”에 대해 “남북 노동자가 한 목소리로 철저한 응징을” 하겠다는 외침이 울려퍼질 줄은.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그리고 북한 조선직업총동맹의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과 역사왜곡 행위를 규탄하는 남북 노동자 공동성명>이 결연한 목소리로 낭독되었다. 노동절 행사 마지막 즈음 하이라이트 시간대였다. 그 순간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던 것은 나 뿐이었을까?
“일본은 우리가 나약한 민족이 아니라는 점을 똑바로 알아야 한다”는 경고를 듣고, 과연 일본이 섬뜩해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섬뜩했다. “나약한 민족이 아니”라서 어쩌겠다는 것인가? “응징”하겠다고? 전민족이 “한목소리로”?
일본의 침략 전쟁 기도에 대해 반일투쟁을 결연히 벌여나가겠다는 선언에서, 만국 노동자의 인터내셔널을 주창했던 노동자들과 노동 대표자들이 전쟁이 예기(豫期)되자마자 애국주의 광풍에 몸을 맡겼던 역사를 떠올렸던 것은, 역시 나의 과민반응이었을까?
물론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과 역사왜곡행위는 규탄할 만한 일이다. 일본 우익의 군국주의적 경향도 우려할 만하다. 그러나 또한 그만큼 우려스러운 일은, 외세에 대해 전국민 전민족이 똘똘 뭉쳐야 한다는 또다른 애국주의의 발상이다.
어째서 그것이 우려스러운 것이냐 하면, 전국민과 전민족은 똘똘 뭉쳐 통일된 목소리를 낼 수가 없고 내어서도 안되기 때문이다. 국가간 경계와 민족이라는 상상적 공동체를 가로질러, 자본과 노동이라는 심대한 계급 분열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국가에서 이른바 국민적·민족적 목소리는 짐짓 이러한 계급 적대를 은폐하고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기 마련이다.
기실, 일본의 군국주의화와 우경화라는 현상 자체가 바로 이에 근거한다. 일본 자본주의의 성장 신화가 한계에 부딪치고 장기 불황에 접어든 90년대 이래, 갈수록 어려워지는 일본 노동자 민중들의 불만을 달래고 상실되어가는 자부심과 희망을 환상적으로 재구축하려는 시도가 극우 민족주의 선동의 배경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그게 어디 일본뿐인가. 한국 역시 정확히 이러한 상황에 해당한다. 그러니 남을 규탄하기에 앞서, 그를 거울로 삼아 우리를 성찰해야 할 일이다.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위기에서 나라마다 난무하는 강한 국가와 민족이라는 수사가 전세계적 자본과 노동의 적대와 대립을 은폐하고 있음을 밝히는 것이, 노동자와 노동 대표들의 임무일 터다.
그러나 노동절대회에서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한국노총 위원장의 연대사를 듣다가 잠시 귀를 의심해야 했던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내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면, “국가경쟁력이 세계 10위 안에 들고 노동자들이 살맛나는 세상이 오도록 노력해 나갈 것”이라는 말이 스쳐 지나갔다. 노총 위원장이 국가경쟁력이란 말이 곧 자본의 경쟁력을 의미한다는 것을 모를 리는 없을 테고, 한국의 자본이 잘 되면 노동자들이 더 많은 것들을 얻어내도록 열심히 투쟁(!)하겠다는 취지였을 게다. 그러나, 백번 양보해서 자본이 잘 나가면 노동자들에게 돌아오는 것이 많아질 가능성이 그나마 높아진다 하더라도, 자본의 경쟁력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것이 노동자 대표가 할 소리인가?
이 말이 성립되려면 또다른 국가주의의 기반 위에서만 가능하다. 우리나라 국가경쟁력이 높아지면 노동자들도 잘 될 거라는 생각. (‘강대국 건설’을 외치는 일본 우경화의 대중적 기반과 무엇이 다른가?) 그리하여 국가의 경쟁력 자본의 경쟁력을 위해, ‘우리나라’ 정부와 손을 잡고 ‘우리나라’ 자본과 손잡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연대 속에서 계급의 분열과 적대는 환상적으로 사라진다.
2.
노동절대회 동안 받은 많은 선전물들 중에서, <2005년 노동절대회 문선을 하지 못하게 된 수도권지역 문화패들의 입장>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었다.
이미 <참세상>에서 보도한 대로, 사회적 교섭 반대와 총파업 투쟁 호소를 형상화하려 했던 문화패들은 노동절대회 전야제를 참가하지 않았다. 또는, 못했다.
민주노총 지도부는 ‘그런 내용은 올릴 수 없다’고 단호하게 거부하며 지도부가 밝힌 기조와 지침에 따를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문화패들은 민주노총 집행부 전속 쇼단이 아니다. 그들은 현장의 노동자들이고 기층 조합원들이다. 노동자로서 조합원으로서, 밑으로부터의 목소리를 지도부에 전달할 권리가 있고, 노동자의 대회에 그 생각과 표현을 맘껏 펼쳐보일 권리가 있다. 자신의 생각과 다른 내용을 노래하고 몸짓한다면, 상업적 연예인만도 못한 일. 따라서 문화패들이 지도부의 요구에 응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다른 한편으로 민주노총 지도부의 입장에서는, 그렇잖아도 사회적 교섭 논란으로 분열이 심각한 와중에 그런 문선을 용납할 수는 없다는 마음이 들기도 할 것이다. 민주노총 문화미디어실장의 인터뷰대로 “조합원들을 혼란에 빠뜨릴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분열이 심각하고 지도부의 지도력이 누수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더욱, 노동절대회 문화패들의 공연을 봉쇄해서는 아니 되었던 것이다.
잘 알다시피, 이번 일은 사회적 교섭을 강행하려는 지도부와 그를 결사저지하려는 측 사이 분열과 대립의 연장선상에 있다. 지난 대의원대회 이후 양측은 서로 공공연하게 비난할 뿐만 아니라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는 말들을 쏟아냈다. 나는 아연실색했다.
뜨겁게 흥분한 시점에서 양측의 적대심을 저울질할 수 없어 보였지만, 결정적인 책임은 지도부에게 있을 수밖에 없다. 지도부는 지도부이기 때문이다. 지도부는 왜 존재하는가? 노동자들의 분열을 막고 계급적 연대를 형성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 아니더냔 말이다. 자신이 대표해야 할 노동자들을 적으로 규정한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조건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민주노총 지도부는 분열과 대립을 막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조장하기조차 했다. 대의원대회에서 발언과 참여를 봉쇄했고 이번 노동절대회에서 문선을 봉쇄했다.
민주노총 지도부는 그것이 자신의 지도력을 공고히 하는 방도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대단한 오해다. 지도부의 지도력은 밑으로부터의 다양한 목소리를 포괄하고 아우르고 집중해나가는 힘에서 나오는 것이지, 그것을 봉쇄하는 힘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봉쇄란 적대하고 있는 적에 대해서 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서로 적인가? 물론 자본은 언제나 노동자들을 서로 분열시키고 대립시키려 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연대로써 그것을 극복해야 하고 지도부는 바로 그것을 임무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절대회 전야제는 반쪽이 되어 버렸고, 배제된 노동자들은 무대 아래서 자신의 입장을 호소하는 유인물을 돌리고 있었다.
3.
광화문 거리에 앉아 나는 심각하게 자문했다. 노동자들은 누구와 적대하고 있고 누구와 연대하는 것일까?
내겐 너무 명백했던 답이 흔들리는 순간, 나는 아노미 상태에 빠져들었다.
2005년 5월 1일, 115주년 세계노동절기념대회, 전세계의 노동자들이 일제히 거리로 나오는 날. 바로 그 날의 일이었다.
교원평가제와 내신 경쟁으로 인한 고1 학생들의 연이은 죽음과 눈물을 보며
학원과 나를 생각한다.
논술이 강화된다는 소식에 늘어난 입시 상담.
하루에도 수십 명씩 찾아오는 학부모들과
중간고사 때는 내신에 집중해야 한다며 한 달 간 학원을 쉬겠다는 아이들.
그들 앞에서 나는 가치관과 윤리를 논하고 각종 사건과 사회적 쟁점들을 꺼내 놓고 토론을 요구하지만
토론의 결론이 무엇이 되던 간에
결국 그들이 바라는 건 '입시에 유리한 답변을 정리하는 것' 뿐이다.
어차피 자신의 가치관이나 입장을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은 입시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을테니까..
수업을 진행하는 나는,
나의 생각과 가치관과 입장을 아이들과 공유하길 원하지만
입시 앞에서 어쩌면 그것은 우스운 바람일 지도 모른다.
학원 교사의 대부분이 노조나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는
소위 '운동권'이라 할 지라도
입시 앞에서 그것은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결국 그 곳은 '학원'이고,
'학원'은 '입시'를 위한 곳이니..
아이들이 경쟁에 짓눌려
입시를 위해 자신의 가치관과 입장을 사건별로 정리해 '외우고' 있는 상황을 보면서
'논술학원 교사'라는 나의 위치에 심각한 회의가 밀려온다.
논술학원의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들의 현실 속에서는,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개념이 명백히 입증되고 있음을 느낀다.
사회적, 문화적 자본이 풍부한 이 아이들은
자신들의 환경을 매우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철거민이나 노숙자, 노동자와 사회적 소수자들의 삶에 대해서 대부분 공감하지 못한다.
이들의 부모는 대개 의사나 교수, 사장, 이사 등이며
이들의 가정에서 구독하는 신문은 오로지 조선일보.
갈수록 심난해져만 가는 교육 현실과
'논술학원의 교사'라는 나의 입지가
자꾸만 나의 머릿속을 헤집고 있다.
오늘도 결국,
제대로 자기는 어려울 것 같아.
이야기 하나.
평소에는 잘 표현하지 않던 일이나 인식하고 있지 않은 듯한 일.
그러나 무의식 중에 항상 머리속에 잠재하고 있는 일들이
꿈에서는 '기억하라'는 듯
항상 나타난다.
4월 말 경에는
4월까지만 활동을 하겠다던 혜진이가 나타나
나를 보며 활짝 웃으면서
"나 다시 계속 활동 할려구"
하면서 활짝 웃었다.
혜진의 어깨를 두드리며, 나 역시 활짝 웃었다.
"그래, 잘 생각했어!"
육교를 건너면서는 종필과 도끼가 나와 함께
'문화예술교육지원법'에 관해 심각하게 논의했다.
저 아래, 버스 정류장에서
문화연대 사람들이
"빨리 와~!"하고 부른다.
어느 날엔,
바람소리 사람들과 판굿을 신나게 뛰었다.
송글송글, 사람들 이마에 맺힌 땀방울들과
신명나는 풍물 소리에 취해
나도 덩달아 열심히 뛰었다.
한 동안 거의 매일 나타나던 전경들은
최근엔 잘 나타나지 않는다.
그들과 대치하게 되는 장소는
어딘 지 모를 휘황찬란한 건물 앞 거리
또는 덕성여대이다.
학교에서는 수미 언니가 나와 함께 쫓기고 있다.
우두두두 달려드는 새까만 전경들을 피해
언니와 나는 건물과 건물 사이를 지나
가쁘게 계단을 오르내리고,
결국엔 막다른 곳에 다다라
전경들과 대치하게 되지만
잡히기 일보직전,
천장에 난 작은 문을 급하게 열고
옥상으로 힘겹게 뛰쳐 올라간다.
거리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투쟁하고 있다.
전경들이 몰려오고
우리는 전경들과 대치하며 잔뜩 긴장하고 있다.
전경들이 우리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세우면
꽉 막힌 골목의 끝에서
우리는 필사의 힘을 다해 전경들의 방패를 밀어낸다.
작년에 꾸었던 꿈 중에
너무 생생해서 절대 잊혀지지 않는 꿈은,
범국민교육연대 동지들과 함께 어떤 건물의 제일 윗층에서 세미나를 하던 중
폭탄이 날아들었던 꿈이다.
폭탄이 건물 한 가운데로 떨어졌고
우리는 사다리가 잔뜩 쌓인 비상계단을
미끄러지듯이 내려가고 있었다.
내가 정신없이 사다리에 밀려 무너지듯 그 계단을 내려가고 있을 때
뒤에서 천보선 선생님이 외친다.
"나영아~!! 성명서 써야 하는데~!!!!"
최근엔 꿈을 잘 꾸지 않거나
꿈의 내용을 금방 잊는다.
자기 전에 먹는 약의 영향인 것 같은데,
꿈을 꾸고 있을 때는 괴롭고 긴장되더라도
그 꿈들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게
조금 섭섭하긴 하다.
이야기 둘.
학원 아이들이 요즘 신입생 환영회다,
수학여행이다. 소풍이다 해서 다들 바쁘다.
나는 수학여행 가서 밤마다 술만 마시고
다음 날엔 버스 안에서 잠만 자서
수학여행에 이렇다할 추억거리가 남아있지 않다.
슬프다.
그래서 요즘 학원 아이들에게 항상 강조한다.
"얘들아, 나처럼 후회하지 말고 술은 적당히 마시고 재밌는 추억을 많이 만들어라"
술은, 추억을 남기는 데 그리 좋은 도구는 되지 못한다.
이야기 셋.
우리 동네는 임대 아파트 단지이다 보니
이 동네엔 무언가 부족한 사람들이 많다.
혼자사시는 할머니, 할아버지들.
몸이 불편한 장애인들.
한부모 가정의 아이들.
부모님이 일주일에 한 번 올까말까 하여
매일 밤을 친구들과 술로 지새는 아이들.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을 피해
아이와 함께 숨어 사는 여성들...
이들이 우리의 이웃이다.
이런 환경의 아이들이 있는
단지 앞 중학교에서 문화교육 프로그램을 요청해서 찾아갔더니
교사라는 사람이
"얘네들 수준을 몰라서 그렇지, 얘네 전국 꼴지예요. 얘네들한테는 많은 걸 기대할 게 없어요"
라고 망언을 내뱉는다.
"당신이야 말로 최악이야. 당신같은 교사에게, 아이들도 기대할 게 없다구!"
소리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다.
그 날, 그 말을 하지 못한 것이
내내 마음에 걸린다.
지금도
밖에서 어떤 아주머니가
술에 취해 뭐라고 울부짖으며 비틀비틀 걸어간다.
슬픈 일이 있나보다.
이 동네에는 슬픈 사람들이 참 많다.
오늘 밤에는,
우리 동네 사람들이 모두 행복한 웃음을 짓는
꿈을 꾸었으면 좋겠다.
몸에 병을 달고 살게 되면서 얻은 한 가지 교훈은,
타인의 고통을 절대 자신의 잣대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신이 직접 그 사람이 되어 보지 않는 이상,
어느 누구도 그 사람이 지닌 고통의 크기를 짐작조차 할 수 없을 것이며
따라서 어느 누구도 그 사람이 지닌 고통의 크기를 평가할 자격은 없다.
우리가 특히 경계해야 할 것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타인에 대한 평가이다.
누구나 사래에 걸려본 적이 있다고 해도
개인이 지닌 경험치에 따라,
건강 상태에 따라,
그 사람이 처한 환경에 따라
그 고통의 크기는 어마어마한 차이를 지니며
그것의 영향 또한 다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지닌 사래의 경험이
몇 차례 목이 따끔하고 괴로웠던 정도의 것이었다 해도
다른 어떤 이는 그의 상태에 따라
사래로 인해 치명적인 상처를 입을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졸음을 이기지 못해 괴로워할 때
다른 이에게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고민일 테지만
당사자에는 그 자체만으로
자신의 삶을 침해하는 커다란 고통일 수 있다는 사실을
타인은 알지 못한다.
따라서 나는
누군가의 고통에 대해
절대 함부로 평가하지 않기로 하였다.
우리의 경험은 철저히 주관적인 것이며
때문에
타인에 대한 평가에 앞서,
우리는 그 사실을 항상 명심해야 하는 것이다.
학교 폭력 논란, 새삼스럽다.
학교 폭력이니, 일진회니 하는 말들로 한 달째 세상이 떠들썩하다.
초-중-고등학교까지 이어지는 조직화에 전국연합 조직의 결성, 선배의 후배를 이용한 금품 갈취, 일상적인 구타, ‘살인축구’에 ‘섹스머신’ 등의 ‘퇴폐놀이문화’까지. 언론을 통해 일파만파 퍼진 이른바 ‘일진회’의 실태는 소심한 어른들의 간을 그만 개미허리만큼 오므라들게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매일, 뉴스에는 새로운 학교 폭력 소식이 올라오고, 정부와 언론은 학교 폭력의 심각성에 대해 호들갑을 떨면서 ‘스쿨폴리스’, 학생 연행, cctv에 이어 심지어 ‘야간 통행금지 조치’에 ‘병영체험’까지 동원하며 연일 강경 대책만을 제시하고 있다.
이쯤 되면 학교 폭력에 대한 정부의 알레르기 반응은 거의 7,80년대의 실미도나 삼청교육대에 버금간다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메일을 확인하기 위해 포털 사이트를 클릭할 때마다 새롭게 떠오르는 ‘학생이...폭행’, ‘정부...강경대응 방침’ 뉴스를 보며 생각한다.
도대체 뭔 난리야? 새삼. 학교에 폭력이 존재하지 않았던 적이 있었던가? ‘학교=구타’ 아니었냐고. 참 내...
학교. 일상적 폭력의 장.
우리 모두가 익히 알고 있지 않은가.
일제와 군국주의의 군대문화 유산을 그대로 물려받은 학교 현장에서 폭력은 새삼스러운 화두가 아니라는 것쯤이야.
아침 7시 등교. 서서히 교문이 닫히고 미처 그 사이를 통과하지 못한 지각생들은 운동장에 열 지어 서서 ‘앉았다 일어서기’ 100번, ‘운동장 10바퀴’, ‘오리걸음 왕복 10번’ 등의 특훈을 받고 9시 정규 수업이 시작될 때까지 교사에게 회초리 세례를 받거나 교무실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어야 한다.
저기. 한 놈이 된통 잘못 걸렸다.
운동장을 달리다가 담배 한 갑을 떨어뜨린 놈.
“너 이 새끼 이리와!” 불호령이 떨어지고, 어기적어기적 교사 앞으로 간 녀석에게 교사의 커다란 주먹과 발이 무작위로 날아든다. 몇 대? 셀 수도 없다. 어느 새 녀석의 입가에 피가 맺히고 녀석이 조그맣게 읊조린 “아이, 씨” 한 마디에 또 다시 무기들이 세차게 날아든다.
그 녀석, 맞거나 말거나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린다.
첫 시간부터 숙제를 해오지 않은 아이들이 연이어 불려나가 교탁 앞에서 회초리로 엉덩이를 맞았다. 회초리 10대쯤 아무것도 아니다. 아이들은 그냥 엉덩이를 슥슥 문지르며 자리로 돌아온다. 시간은 흘러 3교시. 악명 높은 물리 시간이다. 뒤에서 킥킥거리며 만화책을 돌려보던 녀석들이 ‘걸리면 죽는다’고 별명이 ‘폐암말기’인 ‘물리’에게 딱 걸리고 말았다. 처음부터 뭔가 안 좋은 일이 있었던 듯 연신 툴툴대던 ‘물리’가 놈들을 불러내더니 교탁부터 교실 끝까지 쫓아가며 두 녀석의 뺨을 후려친다.
“너희들 같이 쓸모없는 새끼들은 진작에 공장이나 가! 뭐하러 여기 앉아서 시간 낭비하고 있어 이 ** 같은 새끼들아!”
‘물리’의 목소리가 교실에 쩌렁쩌렁 울리고 놈들의 뺨은 붉게 부어 달아올랐다. 잠시 후 ‘물리’는 씩씩거리며 교탁으로 돌아왔다. 순간 교실에는 숨소리마저 조심스러운 정적이 감돈다.
점심시간이다.
좀 전에 ‘물리’에게 뺨을 맞아 얼굴이 달아오른 한 녀석이 동아리실로 향했다. 점심시간까지 열 명이 집합해 있어야 하는데 세 놈이 보이지 않는다. 들어서자마자 동아리실에 서 있는 일곱 명의 후배들에게 ‘일렬종대’ 명령을 내리고, 나머지 세 녀석을 기다린다. 잠시 후 세 녀석이 동시에 헐레벌떡 들어섰다. 한 놈씩 차례로 발길질을 당하고 다시 열 명은 일렬로 섰다. 오늘 집합명령이 떨어진 이유는 ‘인사를 하지 않아서’이다. 대략 삼십 분 정도 훈계를 들은 후배 녀석들은 오늘 저녁 노래방으로 다시 집합하여 전체 선배들로부터 얼차려를 받고 몇 대씩 돌림 빵을 당해야 할 것이다. ‘물리’에게 뺨을 맞은 녀석은 후배들이 ‘싸가지가 없다’며 연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폭력은 순환되기 마련.
참고로 위의 서술은 철저히 필자와 친구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이다. 더 심한 이야기도 많으나 소심한 어르신들 그나마 간당간당한 심장 무너져 내릴까봐 이쯤 하기로 한다.
일진회를 비롯하여 조직화된 학생들의 폭력은 이러한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결국 이들의 폭력이란 온갖 종류의 폭력이 당연하게 자행되는 학교와 사회에서 그들이 배운 삶의 방식에 불과한 것이다.
힘으로 권력을 과시하고, ‘시키면 무조건 따르고 때리면 그냥 맞아야 하는’ 법칙이 초중고 12년의 삶 속에서 그대로 관철되고 있다.
하기에, 이렇게 길들여진 폭력 문화를 다시 공권력으로, 감시와 통제로 해체하겠다는 교육부와 경찰청의 발상은 결국 또 다른 폭력의 확대와 악순환만을 야기하게 될 것이다.
‘cctv’는 감시의 눈길을 피하는 방법을 가르치게 될 것이고, ‘병영캠프’는 소위 말해 ‘까라면 까는’ 힘의 문화가 무엇인지를 더욱 강력하게 인식시키게 될 것이다.
3월 초, 신입생이 들어오면 상담 일정을 잡기 이전에 보충수업 시간표를 짜기 바쁘다는 한 교사의 말이 그대로 학교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공부 못하고, 조직에 적응하지 못하는 놈은 학기 초부터 일찌감치 골라 내버리는 것이 이 사회의 냉정한 ‘경쟁의 법칙’을 가르치는 학교의 교육 방법이다.
학교 폭력? 호들갑 떨 것 없다. 작금의 사태는 지금 호들갑 떨고 있는 교육부, 경찰청, 정부 당신네들이 오랜 세월에 거쳐 갈고 닦은 결과일 뿐이니.
하기야, 여의도 돔 뚜껑 아래에 앉아 허구헌날 머리 쥐어뜯고 양복 찢어가며 싸우는 어르신들이 어찌 ‘폭력의 순환’을 끊어내는 방법을 알 수 있으리오.
‘인권’이란 두 글자의 깊은 의미를 어찌 알겠느냔 말이다.
너무나도 당연한 권리! 장애인 교육권 쟁취를 위하여!
장애인 교육의 현실
다음은 사단법인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의 ‘입학거부를 통해 본 장애우 교육권, 무엇이 문제인가’(2001.5)라는 토론회에서 제시되었던 사례이다.
○ 피해학생 인적사항
․장애유형: 정신지체 1급
․학년: 초등학교 2학년
『지난해 초 A지역 ㅂ초등학교로 전학을 하려고 했던 L군(정신지체1급)이 한 학기동안 전학을 하지 못했다. L군은 진해의 일반초등학교에서 1학년을 마치고 치료와 교육을 위해 A지역으로 주소지를 변경했다. 두 개의 특수학급이 있는 ㅂ초등학교로 전학하려고 했으나, 교장과 특수학급 교사가 특수학급은 장애를 가진 학생들이 있는 반이 아니라 학습부진 학생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장애를 가진 학생이 전학을 오게 되면 수업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와 지역의 특수학교에 진학할 것을 권유하며 전학을 거부했다.
이 과정에서 문제 해결을 위해 교육청에 중재를 요구했으나 교육청은 이러한 과정이나 절차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었으며, ‘전학에 관한 건은 학교장에게 책임이 있으니 학교장과 협의 바람’이라는 공문으로 처리했다. 이후 교장은 L군의 입학을 전제로 L군에게 무슨 일이 있을 경우 부모가 책임진다는 ‘각서와 동의서’를 부모에게 요구했으나 서명하지 않았다. 이후 법적 소송을 준비했으나 L군의 ㅂ초등학교 전학을 수락해 이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특수교육진흥법 제13조에는 ‘각급 학교의 장은 특수교육 대상자가 당해 학교에 입학하고자 하는 경우에는 그가 지닌 장애를 이유로 입학을 지원 거부하거나 입학전형 합격자의 입학을 거부하는 등의 불이익한 처분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엄연한 법 조항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위의 사례와 같이 입학 거부가 이루어지는 사례는 부지기수이다. 특히 초등학교 장애학생의 지정 및 배치는 학교에 직접 지원과 특수교육운영위원회의에 지원하여 지정, 배치를 받는 것 모두가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학교는 임의로 전학을 거부하였다. 이후 교육청에 중재를 요청하기도 했으나 교육청은 “학교장의 소관이므로 학교장과 협의하기 바란다”는 답변만을 했을 뿐이었다. 이후 학교장은 부모에게 전학을 허락한다는 조건으로 ‘각서와 동의서’를 요구하였고 부모는 결국 ‘아동에게 문제가 발생했을 때 부모가 책임을 진다’는 그 내용에 동의하지 않아 끝내 전학 접수증을 제출하지 못했다. 초등학교 교육과정이 특수교육진흥법 제5조(의무교육등)에 의해 국가에서 보장하는 의무교육인데 학생이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각서를 요구하는 것은 또 하나의 차별이며 다시 한번 전학을 거부당한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교육청과 교육부의 학교장 설득으로 7월초에 다행히 ㅂ초등학교에 전학이 가능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로 인해 한 학기 동안이나 학교교육을 받지 못한 장애학생은 보장된 교육권을 또 한번 침해받았다.
교육관계법 관련 조항의 개정 없는 특수교육진흥법은 있으나마나
우리나라 교육의 근간을 이루는 교육기본법에는 ‘특수교육’에 대해 단 한 개의 조항만이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초중등교육법’을 비롯한 관련 교육법에는 여전히 장애 학생의 교육권 확보에 불리한 조항들이 삽입되어 있다. 따라서 특수교육진흥법만으로는 장애인 교육권을 제대로 확보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장애인 교육권 확보를 위해서는 관련 교육법들이 전반적으로 함께 개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선 ‘교육기본법’의 내용을 보면 제18조에서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는 신체적․정신적․지적 장애 등으로 인하여 특별한 교육적 배려가 필요한 자를 위한 학교를 설립․경영하여야 하며, 이들의 교육을 지원하기 위하여 필요한 시책을 수립․실시하여야 한다.’ 고 명시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결국 교육기본법에서부터 ‘장애인 교육은 특수학교에서’라는 협소한 개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초중등교육법 제14조에는 ‘질병 등 부득이한 사유로 인하여 취학이 불가능한 의무교육대상자에 대하여는 대통령령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제13조의 규정에 의한 취학의무를 면제하거나 유예할 수 있다.’ 1994년 특수교육진흥법이 전면 개정되면서 장애인 의무교육의 실시를 명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초중등교육법에서는 ‘취학의무의 면제’를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다.
장애 학생의 교육은 특히 조기교육이 매우 중요하다. 조기교육을 통해 장애에 대한 적응을 도울 수 있고 사회 적응력을 높일 수 있으며 후차적인 장애 또한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중등교육법’ 제 36조에서는 ‘유치원에 입학할 수 있는 자는 만3세부터 초등학교 취학 전까지의 유아로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유아교육은 만 3세부터’라고 규정함으로써 장애를 고착화시키고 조기 통합교육의 기회를 빼앗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만 3세 이하 아동의 조기교육을 위해 장애 아동의 부모들은 사설 교육기관을 전전해야 하고 결국 이로 인한 과도한 교육비 지출 구도까지 만들어지고 있다. 실제로 일반 아동의 경우에는 월평균 12만 원 대인 유아교육비가 장애아동의 경우 월평균 최소 70만원까지 소요되고 있다. 장애아동의 유아교육이 만 3세 이하로 규정되어 장애를 발견한 즉시 교육과 치료를 겸비할 수 있도록 규정되어야 한다.
또 제57조에는 ‘고등학교이하의 각급 학교에 관할청의 인가를 받아 특수교육을 필요로 하는 학생을 위한 특수학급을 둘 수 있다.’고 되어 있다. 이 때문에 특수학급은 행정편의주의에 의해 설치되거나 학교 동문회 및 학교운영위원회의 반대로 설립이나 존폐가 크게 좌우되기도 한다. 따라서 이와 같은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조항을 개정하여 특수학급을 ‘반드시 설치’하도록 해야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제59조를 보면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는 특수교육을 필요로 하는 자가 유치원․초등학교․중학교 및 고등학교와 이에 준하는 각종학교에서 교육을 받고자 하는 경우에는 별도의 입학절차, 교육과정 등을 마련하는 등 통합교육의 실시에 필요한 시책을 강구하여야 한다.’고 되어 있다. 현재의 통합교육은 통일된 기준 없이 특수교육교사의 재량으로 운영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에서 통합교육에 대한 연구 및 프로그램 등의 개발이 절실히 필요하다. 이에 대한 예산 지원과 전문인력 등을 보장해야 할 것이다.
장애인 교육권, 그 당연한 권리를 위하여
이 밖에도 ‘특수교육운영위원회’와 ‘특수교육심사위원회’의 실질적 역할 강화, 학생의 학습 수준에 따른 장단기 교육 목표와 교육 방법, 평가 등을 계획하여 교육을 수행하는 ‘개별화교육계획’의 실현, 분리의 개념을 가지고 있는 ‘특수학급’ 이 아닌 비 장애 학생과 장애 학생의 통합교육 실현을 위한 구체적 정책 및 지원, 장애인 교육 연구비의 편성, 각급 학교의 편의시설 설치 등 장애인 교육권 실현을 위해 헤쳐 나가야 할 장벽은 많다.
그러나, 넘지 못하고 무너뜨리지 못할 장벽은 없다. 이 장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오늘도 수많은 장애 학생과 교사, 학부모는 단식에 전국순회까지 하며 장애인의 교육권 쟁취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다.
제발! 이런 피눈물 없이도 가장 기본적인 국민의 권리인 ‘교육권’의 보장을 위해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다시 한 번 촉구한다.
** 이 글은 2004년 420 장애인차별철폐투쟁의날을 앞두고 <문화사회> 기획 기사로 게재하였던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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