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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1/14
    '오래된 정원', 질문은 나에게 던져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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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5/06/23
    덕성여대. 4년 후. 그리고 투쟁에 대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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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5/05/29
    '원칙'과 '현실' 사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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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5/05/16
    중심 없는 교육부, 혼란 속의 대입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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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5/05/12
    논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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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5/05/12
    꿈. 그리고 이것저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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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5/05/12
    알만큼 다 안다는 자만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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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정원', 질문은 나에게 던져진다.

 

영화 '오래된 정원'을 보았다.

그리고

보는 내내 가슴이 답답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남들'이라 할 수 없는 그들의 삶에, 그리고 그 시대에 대해 느껴지는 안타까움과 슬픔과 분노가

나와 나의 시대를 자꾸만 반추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사회주의자입니다"

이 한 마디에 인생을, 목숨을 걸어야 했던 시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자로서의 신념을 놓지 않았던 그 사람들은.

2000년대의 세상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과거 속에 살거나, 방황하며 살고 있다.

출소하고 나오니 자신의 어머니가 자신에게 천만 원 이상의 옷을 사 입히는 부르주아 계급이 되어있는 현실에서

오로지 신념 하나로 세월을 버텨온 사람들은

갈 길을 잃었다.

그들은 이제 술을 마시며 오래 전 투쟁가를 부를 뿐이다.

 

한편, 영화는 현우의 80년 광주와 영작의 80년대 말을 비교한다.

죽어나가는 동지들을 보며 저절로 목숨을 건 결의를 다졌던 80년 광주의 현우와 동지들의 모습과는 달리

80년대 후반의 영작과 친구들은 '문어체'로 스스로도 헛갈리는 긴 문장을 읊어대며

혁명을, 사회주의를 '개념화'하고 조직을 위해 개인을 결의'시킨다'.

 

그들은 현우와 다를 바 없이 위험을 감수하고 결국 그곳으로 향하지만

'개념화 된 사회주의'는 '적당한 민주주의 시대'를 받아들이고 그들이 사회에 편입할 수 있게 해주었다.

결국 그 이후 인권변호사가 되어 선거에도 출마할 준비를 했다는 영작은 

자연스럽게 운동 경력을 지닌 수많은 386 세대의 정치인들이나 노무현을 떠올리게 한다.

 

그들 가운데는 여전히 순수한 신념 하나로

법대 출신의 보장된 미래를 버리고 공장 노동자가 되어

결국 제 한 몸 불사르고 마는 미경과 같은 이들도 있지만

살아서 권력에 편입한 영작과 같은 이들에 비해 그들은

타버린 그들의 몸처럼 시대의 변화 속에 묻혀지고 말았다.

"세상 길게 보자. 겸손하자" 말하는 윤희는
현우도, 영작도, 미경도 잡지 못했다.
 
그리고
그렇게 신념을 지킨 이들이 있었기에
세상은 이만큼 변할 수 있었다.
그래서
비록 잊혀지고 시대의 변화에 무력해졌다해도
그들의 결코 삶은 헛되지 않았다.
 
이제 질문은 나에게 돌아온다.
 
나의 결의와 나의 신념은 현재 무엇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는가.
 
'오래된 정원'은
현우와 윤희의 과거 공간일 뿐 아니라
어쩌면
시대의 변화 속에 퇴색되고, 상실되어버린
'세상을 바꾸자'는 강한 신념, 그 신념을 가진 이들이 있던 시대인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스스로의 '오래된 정원'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되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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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성여대. 4년 후. 그리고 투쟁에 대해.

어느 덧 4년이 되어간다.

 

2001년. 덕성여대의 치열했던 한 해.

 

그 1년 이후

함께했던 중운위(총, 단대 학생회장단) 들은 심장에, 위에, 허리에 하나씩 병을 얻었고

함께했던 교수들은 변절했다.

 

교수협의회 회장으로 함께 단식도 하고, 삭발도 했던 교수는

이제 총장이 되어

한편으로는 교수협의회와 학생회, 노조를 교묘히 탄압하고

한편으로는 새 건물을 짓고 시설을 확장하면서

자기 공을 세우기에 여념이 없다.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투쟁했던 노조는

총장의 탄압으로 인해 너무나도 힘들게 파업을 진행해야 했고

결국 총장은 '향후 5년 간 조금씩 정규직화를 하겠다'는

불확실한 약속만을 남긴 채 파업을 정리시켰다.

 

등록금은 여전이 해마다 오르고

학교가 투자 없이 등록금만 올린다며 비판하던 바로 그 사람이

지금 6개월 째 총장실을 점거하고 있는 학생들을 모른 채 하고 있다.

 

덕성여대의 민주화를 위해 끝까지 싸우겠다던 모 여교수는

이제 구재단파 교수와 손잡고 차기 총장 선거를 노리고 있고

대부분의 당시 교수협의회 교수들은 또다른 교수협의체를 만들어

총장과 샤바샤바 친하게 지내고 있다.

 

오직 한상권 교수만이 어떠한 흐름에도 흔들리지 않고

제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

 

덕성여대는 변했다.

변했지만 민주화되지 못했다.

 

역사상 많은 혁명이

민중의 희생을 발판삼아 중간계급의 이익을 획득하는 데 이용되었듯이

덕성여대 역시 똑같은 절차를 밟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민중이 희생당한 주체로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

분명 혁명을 통해 민중은 한 걸음 나아갔으며

그들 스스로의 변화를 통해 또 다른 혁명을 준비해가는 것이다.

 

투쟁 당시에, 자신의 불안정한 위치 때문에 재단이 시키는 대로 행해야 했던 직원분들,

플랭카드를 뜯어내다가 우리와 마주쳤을 때

'정말 미안하다. 우리는 어쩔 수가 없다'며 미안해 하시던 분들,

누가 볼새라 계속 불안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며 찾아와

'수고한다'며 음료수를 건네주셨던 분들이

이제 힘겨운 비정규직 정규직화 파업에 끝까지 함께 하시고

그 분들이 노조의 주체가 되어 새로운 투쟁을 준비하고 계시니.

 

투쟁은 곳곳에서.

투쟁은 끊임없이.

투쟁은 누구에게나.

 

그러나 주의할 것은,

중간 계급 그 누구도 믿지 말 것이며

동지의 변절에 좌절하지 말 것.

자신의 투쟁에 자긍심을 가질 것.

 

어떠한 때라도.

끝까지 자신을 믿고 자신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말 것.

 

비록.

지금은 나약한 모습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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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과 '현실' 사이

소위 '운동'이란 걸 한다는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종종 소름끼치도록 자신이 세운 '원칙'의 잣대만으로 타인을 평가하는 이들을 발견하게 된다.

 

자신만의 '원칙'의 잣대로 쉽게 타인을 평가하고는,

그 평가를 통해  끊임없이 자신의 위치를 확인한다.

그러나 그런 이들 중

진실로 자신의 삶을 진정한 '원칙'에 맞게 꾸려가고 있는 사람을

나는 '단/한/명/도' 보지 못했다.

 

비정규직의 삶을 살면서

당장 현실에 닥친 생계 문제로 인해  투쟁에 쉽게 나서지 못하는 이들에게

'당신은 왜 비정규직이면서도 당신의 권리를 위해 투쟁에 나서지 않는가'

라며 '원칙'의 잣대를 들이댈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다.

 

그들이 들이대는 '원칙'은 현실을 보지 못하는 '원칙'이다.

 

타인의 현실을 직접 경험해보지 않은 이가

현실을 위해 선택한 그들의 삶에

'원칙'을 들이대는 행동은

그들의 삶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부족함 없이 살아온 이들은

현실에 조응할 수밖에 없는 삶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

 

'원칙'만을 아는 이들은

'원칙'을 위해 '현실'을 무시한다.

 

모두의 삶은

치열하고 경이롭다.

 

비록 그들이 지금은 '현실' 속에 있다 하더라도

그들도 '원칙'을 모르는 것이 아니며

하기에 그들도 '원칙'과 '현실'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으며

언젠가는 '원칙'을 위해 '현실'의 모순과 싸우게 될 것이다.

 

어려운 상황에서 운동을 하고 있는 이들도,

모순의 현실 속에서도 빌어먹을 '현실' 때문에

'원칙'에 당장 다가갈 수 없는 이들도

'원칙'을 몰라 '현실'에 조응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이것을 모르는 이들이야말로,

'현실'을 무시하고 '원칙'의 잣대만을 들이대는 이들이야 말로

'운동가'로서의 자질을 좀 더 키워야 할 이들이다.

 

그들이 먼저 해야할 것은

자신들이 타인에게 들이대고 있는 '원칙'의 잣대를

자기 자신에게 먼저 철저하게 들이대고

스스로를 끊임없이 반성하면서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러나 타인을 비판하기에 바쁜 이들은

대개 자신을 비판하는 데 무디다.

 

그들이 쉽게 비판하는 '현실'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다.

 

'원칙'은 '현실'과 함께 치열하게 부딪치고 깨어지며 융화될 수 있을 때만이

비로소 빛을 발할 수 있음을.

 

항상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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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 없는 교육부, 혼란 속의 대입제도

 ⓒ 뉴스메이커
 

중심 없는 교육부, 혼란 속의 대입제도


지난 5월 13일 MBC 프로그램 ‘아주 특별한 아침’의 보도에 의하면, 지금 고 1 학생들은 배우자와의 이혼 시에 느끼는 스트레스에 준하는 정도의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한다. 스트레스 평정값에 따르면 평정값이 100으로 가장 높은 ‘배우자의 죽음’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수치이다.

사물함에서는 필기 노트와 교과서가 사라지거나 찢어진 채 발견되는 경우가 허다하고 친한 친구와 경쟁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심각한 죄의식과 함께 자살까지 고민하는 학생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부는 여전히 갈팡질팡 정신이 없다.

내신을 강화하여 사교육을 줄이겠다던 야심찬 태도는 이미 간 데 없고, 서울대에서 논술형 본고사를 도입하겠다고 하니 쩔쩔 매다가 얼마 전에는 서울 지역의 대학 입학처장단이 모여 ‘내신의 비중을 급격히 높이지는 않을 것이고 다양한 형태의 논술시험이나 심층적인 구술면접을 통해 종합적으로 평가하겠다”는 요지의 발언을 하자 이번에는 또 여기에 적극 찬동하고 나섰다.

올해 초, 내신에 집중하기 위해 교과를 중심으로 한 학원과 과외에 몰렸던 고 1 학생들이 서울대와 입학처장단의 발표 이후 이번에는 다시 논술학원으로 몰리고 있다는 학원가의 소식은 교육부의 중심 없는 입시 정책이 학생들을 얼마나 혼란에 빠뜨리고 있는 지 단편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현상일 것이다.

 

교육부의 내신등급제, 대학들의 딴 소리


교육부가 ‘내신 비중을 강화하여 사교육 부담을 줄이고 공교육을 강화하겠다’는 명분으로 적극 추진해 온 내신등급제와 2008 입시안은 이미 지난 해 발표되었을 때부터 ‘오히려 입시 부담을 가중시게 될 것’이라는 교육계의 비판에 부딪혀왔다.

성적에 따라 절대평가를 하여 ‘수, 우, 미, 양, 가’의 5단계로 성취도를 나타내었던 기존 학생부 기재 방식을 내신 부풀리기 방지를 위해 상대평가제의 9단계 등급으로 세분화하였기 때문에 1, 2점 차이만으로도 등급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학생들 간의 경쟁은 심해지고 시험은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이제는 학교가 그 자체로 ‘입시학원’이 되어버렸다.

또한 교육부는 내신등급제의 명분으로 각 학교의 ‘내신 부풀리기’를 내세웠지만 사실상 매해 대학들이 교사에 대한 불신과 학교 간의 학력격차를 문제 삼아 내신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는 현실을 볼 때 어차피 내신의 반영 여부는 전적으로 대학들의 선택에 달려있다고 보아야 한다. 결국, 내신 등급을 세분화해 보았자 대학들이 이러한 태도를 계속 지니고 있는 한 내신등급제는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교육부의 2008 대입안이 가진 또 다른 문제는 공교육 강화와 내신의 신뢰 확보를 위한 ‘내신 비중 강화’를 강조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대학의 자율성’을 명분으로 한 대학별고사 역시 사실상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미 교육부의 입시안 자체가 이와 같은 모순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서울대가 2008학년도입시부터 수능의 비중을 없애고 내신을 40%, 논술형 본고사를 60% 반영하겠다는 사실상의 ‘본고사 시행안’을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 명확한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서울대가 이와 같은 입시안을 그대로 시행한다면 그간 교육부가 강조해 왔던 ‘3불 정책(고교등급제 금지, 기여입학제 금지, 대학별 본고사 금지)’을 어기는 것이 된다. 그러나 교육부는 ‘3불 정책’을 법적으로 강제할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 때문에 덩달아 다른 대학들도 ‘입학처장단’ 모임을 통해 서울대 안과 비슷한 입장을 발표하기에 이른 것이다.

결국 자꾸만 바뀌는 장단에 괴로운 것은 학생 뿐이다.


몸통은 간 데 없고 깃털만 나부껴.


해방 이후, 한국의 입시 정책은 13번이나 바뀌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입시정책을 바꾸고 좋은 명분을 다 가져다 붙인다 해도 문제는 계속 반복되기만 할 뿐이다. 근본적인 문제인 ‘대학서열화’와 ‘학벌 중심 질서’를 건드리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초, 중, 고 12년의 소중한 세월이 오직 ‘좋은 대학’에 입학하기 위한 경쟁으로 채워지고 여기서 뒤처지면 ‘인생을 망친다’는 압박감이 엄연히 현실을 좌우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공교육 정상화’니 ‘사교육 경감’이니 ‘경쟁 완화’니 하는 것들은 모두 공염불에 불과한 것이다.

입시를 위해 국, 영, 수 교과서 따라가기도 힘든 현실의 아이들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도 모르고 산다. 새벽 6시부터 다음 날 새벽 1시까지 끊임없이 수업의 연속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어떻게 아이들이 철학적 고민을 하고 세상을 알며 자신의 입장과 논리를 정리할 수 있겠는가. 결국 교과과정도 '외우고‘, 논술에 유리한 답도 ’외우는‘ 수밖에 없다.

교육부는 더 이상 2008 대입정책을 두고 우왕좌왕 고민할 필요가 없다.

지금, 교육부가 해야 할 일은, ‘국․  공립대 평준화’ 나 국립대의 ‘지역균형선발제’ 등 대학 간 서열과 경쟁을 완화할 수 있는 정책을 개발하고 학벌 해소를 위한 구체적인 법적, 제도적 방안들을 타 부처와의 연계를 통해 연구, 제시하는 것이다.

부디 교육부가 이 당연한 결론을 속히 인정하기를 바란다.

 

                                                                -2005. 5. 셋째 주. <문화사회>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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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

교원평가제와 내신 경쟁으로 인한 고1 학생들의 연이은 죽음과 눈물을 보며

학원과 나를 생각한다.

 

논술이 강화된다는 소식에 늘어난 입시 상담.

하루에도 수십 명씩 찾아오는 학부모들과

중간고사 때는 내신에 집중해야 한다며 한 달 간 학원을 쉬겠다는 아이들.

 

그들 앞에서 나는 가치관과 윤리를 논하고 각종 사건과 사회적 쟁점들을 꺼내 놓고 토론을 요구하지만

토론의 결론이 무엇이 되던 간에

결국 그들이 바라는 건 '입시에 유리한 답변을 정리하는 것' 뿐이다.

어차피 자신의 가치관이나 입장을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은 입시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을테니까..

 

수업을 진행하는 나는,

나의 생각과 가치관과 입장을 아이들과 공유하길 원하지만

입시 앞에서 어쩌면 그것은 우스운 바람일 지도 모른다.

 

학원 교사의 대부분이 노조나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는

소위 '운동권'이라 할 지라도

입시 앞에서 그것은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결국 그 곳은 '학원'이고,

'학원'은 '입시'를 위한 곳이니..

 

아이들이 경쟁에 짓눌려

입시를 위해 자신의 가치관과 입장을 사건별로 정리해 '외우고' 있는 상황을 보면서

'논술학원 교사'라는 나의 위치에 심각한 회의가 밀려온다.

 

논술학원의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들의 현실 속에서는,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개념이 명백히 입증되고 있음을 느낀다.

 

사회적, 문화적 자본이 풍부한 이 아이들은

자신들의 환경을 매우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철거민이나 노숙자, 노동자와 사회적 소수자들의 삶에 대해서 대부분 공감하지 못한다.

 

이들의 부모는 대개 의사나 교수, 사장, 이사 등이며

이들의 가정에서 구독하는 신문은 오로지 조선일보.

 

갈수록 심난해져만 가는 교육 현실과

'논술학원의 교사'라는 나의 입지가

자꾸만 나의 머릿속을 헤집고 있다.

 

오늘도 결국,

제대로 자기는 어려울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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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그리고 이것저것.

이야기 하나.

 

평소에는 잘 표현하지 않던 일이나 인식하고 있지 않은 듯한 일.

그러나 무의식 중에 항상 머리속에 잠재하고 있는 일들이

꿈에서는 '기억하라'는 듯

항상 나타난다.

 

4월 말 경에는

4월까지만 활동을 하겠다던 혜진이가 나타나

나를 보며 활짝 웃으면서

"나 다시 계속 활동 할려구"

하면서 활짝 웃었다.

혜진의 어깨를 두드리며, 나 역시 활짝 웃었다.

"그래, 잘 생각했어!"

 

육교를 건너면서는 종필과 도끼가 나와 함께

'문화예술교육지원법'에 관해 심각하게 논의했다.

 

저 아래, 버스 정류장에서

문화연대 사람들이

"빨리 와~!"하고 부른다.

 

어느 날엔,

바람소리 사람들과 판굿을 신나게 뛰었다.

송글송글, 사람들 이마에 맺힌 땀방울들과

신명나는 풍물 소리에 취해

나도 덩달아 열심히 뛰었다.

 

한 동안 거의 매일 나타나던 전경들은

최근엔 잘 나타나지 않는다.

 

그들과 대치하게 되는 장소는

어딘 지 모를 휘황찬란한 건물 앞 거리

또는 덕성여대이다.

 

학교에서는 수미 언니가 나와 함께 쫓기고 있다.

우두두두 달려드는 새까만 전경들을 피해

언니와 나는 건물과 건물 사이를 지나

가쁘게 계단을 오르내리고,

결국엔 막다른 곳에 다다라

전경들과 대치하게 되지만

잡히기 일보직전,

천장에 난 작은 문을 급하게 열고

옥상으로 힘겹게 뛰쳐 올라간다.

 

거리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투쟁하고 있다.

전경들이 몰려오고

우리는 전경들과 대치하며 잔뜩 긴장하고 있다.

전경들이 우리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세우면

꽉 막힌 골목의 끝에서

우리는 필사의 힘을 다해 전경들의 방패를 밀어낸다.

 

작년에 꾸었던 꿈 중에

너무 생생해서 절대 잊혀지지 않는 꿈은,

범국민교육연대 동지들과 함께 어떤 건물의 제일 윗층에서 세미나를 하던 중

폭탄이 날아들었던 꿈이다.

 

폭탄이 건물 한 가운데로 떨어졌고

우리는 사다리가 잔뜩 쌓인 비상계단을

미끄러지듯이 내려가고 있었다.

 

내가 정신없이 사다리에 밀려 무너지듯 그 계단을 내려가고 있을 때

뒤에서 천보선 선생님이 외친다.

"나영아~!! 성명서 써야 하는데~!!!!"

 

최근엔 꿈을 잘 꾸지 않거나

꿈의 내용을 금방 잊는다.

 

자기 전에 먹는 약의 영향인 것 같은데,

꿈을 꾸고 있을 때는 괴롭고 긴장되더라도

그 꿈들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게

조금 섭섭하긴 하다.

 

이야기 둘.

 

학원 아이들이 요즘 신입생 환영회다,

수학여행이다. 소풍이다 해서 다들 바쁘다.

 

나는 수학여행 가서 밤마다 술만 마시고

다음 날엔 버스 안에서 잠만 자서

수학여행에 이렇다할 추억거리가 남아있지 않다.

 

슬프다.

 

그래서 요즘 학원 아이들에게 항상 강조한다.

"얘들아, 나처럼 후회하지 말고 술은 적당히 마시고 재밌는 추억을 많이 만들어라"

 

술은, 추억을 남기는 데 그리 좋은 도구는 되지 못한다.

 

이야기 셋.

 

우리 동네는 임대 아파트 단지이다 보니

이 동네엔 무언가 부족한 사람들이 많다.

 

혼자사시는 할머니, 할아버지들.

몸이 불편한 장애인들.

한부모 가정의 아이들.

부모님이 일주일에 한 번 올까말까 하여

매일 밤을 친구들과 술로 지새는 아이들.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을 피해

아이와 함께 숨어 사는 여성들...

 

이들이 우리의 이웃이다.

 

이런 환경의 아이들이 있는

단지 앞 중학교에서 문화교육 프로그램을 요청해서 찾아갔더니

교사라는 사람이

"얘네들 수준을 몰라서 그렇지, 얘네 전국 꼴지예요. 얘네들한테는 많은 걸 기대할 게 없어요"

라고 망언을 내뱉는다.

 

"당신이야 말로 최악이야. 당신같은 교사에게, 아이들도 기대할 게 없다구!"

소리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다.

 

그 날, 그 말을 하지 못한 것이

내내 마음에 걸린다.

 

지금도

밖에서 어떤 아주머니가

술에 취해 뭐라고 울부짖으며 비틀비틀 걸어간다.

 

슬픈 일이 있나보다.

 

이 동네에는 슬픈 사람들이 참 많다.

 

오늘 밤에는,

우리 동네 사람들이 모두 행복한 웃음을 짓는

꿈을 꾸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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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만큼 다 안다는 자만에 대하여.

알만큼 다 안다는 자만에 대하여.

 

몸에 병을 달고 살게 되면서 얻은 한 가지 교훈은,

타인의 고통을 절대 자신의 잣대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신이 직접 그 사람이 되어 보지 않는 이상,

어느 누구도 그 사람이 지닌 고통의 크기를 짐작조차 할 수 없을 것이며

따라서 어느 누구도 그 사람이 지닌 고통의 크기를 평가할 자격은 없다.

 

우리가 특히 경계해야 할 것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타인에 대한 평가이다.

 

누구나 사래에 걸려본 적이 있다고 해도

개인이 지닌 경험치에 따라,

건강 상태에 따라,

그 사람이 처한 환경에 따라

그 고통의 크기는 어마어마한 차이를 지니며

그것의 영향 또한 다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지닌 사래의 경험이

몇 차례 목이 따끔하고 괴로웠던 정도의 것이었다 해도

다른 어떤 이는 그의 상태에 따라

사래로 인해 치명적인 상처를 입을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졸음을 이기지 못해 괴로워할 때

다른 이에게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고민일 테지만

당사자에는 그 자체만으로

자신의 삶을 침해하는 커다란 고통일 수 있다는 사실을

타인은 알지 못한다.

 

따라서 나는

누군가의 고통에 대해

절대 함부로 평가하지 않기로 하였다.

 

우리의 경험은 철저히 주관적인 것이며

때문에

타인에 대한 평가에 앞서,

우리는 그 사실을 항상 명심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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