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어떤 반추

분류없음 2013/09/08 10:03

이 나라에서 더 머물 궁리는 아니었는데 공부를 더 해야겠다 마음먹고 머물 도시를 옮겼을 때까지만 해도 정신건강 (Mental Health)을 공부할 생각은 아니었다. 이웃나라 미국에 비해 대단히 독특한 건강보험 체계, 그러나 여전히 자본의 입김이 강력한 이 요상한 사회복지 시스템을 공부해보면 뭔가 답이 있겠지. 그렇게 생각했을 때만 해도 아주 나이브한 편이었다. 원래는 저널리즘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비백인에 나이 든 학생이 박사과정도 아니고 그 공부를 해봤자 뭐, 답이 좀 뻔하지 않은가. 내가 뭐 부잣집 딸래미도 아니고, 저널리즘을 공부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상황도 아니었고. 심리학 (Psychology)이나 사회학 (Sociology)은 어쩐지 블랙홀 같은 구석이 있어서 아예 계급관계를 명확히 드러낼 수 있는 학문. 아니면 실용적인 공부를 하자, 고 다짐했다.

 

한국을 떠나기 일년 몇 개월 전, 정신분석 (psycho-analysis) 계열의 상담을 서너 차례 받은 적이 있었다. 솔직히 말하건대 그 상담자는 나에게 맞지 않았다. 지금 돌아보건대 그이는 '사람'에 대한 관심보다는 자신의 학문 그 자체에 관한 관심이 더 많았다.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눈 뒤 그이는 나에게 우울증 (Depresssion: Mood Disorder)계열의 진단을 내렸다. 나는 어머니에게 이 이야기를 어렴풋이나마 전달했고 온 가족이 다같이 '치료'를 받는 게 어떤지 여쭈었던 적이 있다. 대화는 잘 풀리지 않았다.

나중에 정신건강 공부를 한 뒤 다시금 나를 반추해보니 당시 나는 아무래도 우울증 계통보다는 분노 조절 (Anxiety Disorder) 계열에 가까운 곤란함을 겪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우리 모두 의사가 될 일이 아니고 의사들의 진단이 최고가 되는 세상이 되지 않는 한 (based on the Medical model) "진단"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나에게는 지금도 여전히 의사도 아닌 주제에 '진단'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있다. 징후 (symptoms)를 발견하면 그 몇 가지 징후에 맞게 진단 (diagnose)을 한다. 그리고 그 진단에 맞게 치료 (treatments)의 방법을 찾으려는 "우"를 범한다.

우리 모두 알다시피 세상은, 하나의 세상이기도 한 인간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어떤 질병 코드로 진단한다고 해서 그 코드에 적실히 맞아떨어지는 인간도 없거니와 설령 그 코드에 맞다손 치더라도 치료의 방법들이 또 맞아떨어지느냐, 그건 '전혀 다른' 문제다.

 

교과 과목이 늘어나면서 정신건강을 더 공부해봐야 겠다고 생각한 건, 나 자신을 이해하고 싶어서였다. 부모님, 특히 어머님은 지극한 사랑을 전해주셨지만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과 관계맺기 (attachment)에 일정 어려움이 많았다. 그것은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부모님들도 힘든 시절을 지내신 탓이 컸고 나 또한 한창 부모님의 사랑과 칭찬과 꾸중을 받아야 할 시절을 운동선수로 지내면서 통채로 날려버린 이유가 컸다. 더구나 나에겐 모든 개개인이 통과의례로 지나는 정체성 탐구의 시절을 온전히 전유하지 못했던 아픔이 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각각 어떤 시절에 통과해야 할 의례적인 것들이 있기 마련인데 나는 그 절대성 혹은 상대성에서 다소 벗어난 '비정규성을 띤 시절'을 보냈다. 이것은 물론 나로부터 연유한 것은 아니지만, 따라서 나의 탓은 아니지만 여전히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할 내 '삶의 숙제'인 것은 분명하다. 왜냐면 이것은 내 삶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십여 년 전에 저지른 '실수', 이십여 년 전에 저지른 '잘못'이 여전히 꿈에 생생히 나타나는 것은 그 '사실'로부터 내가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 이것은 그들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에 관한 문제이다.

 

일을 하면서 만나는 클라이언트들은 간혹 나 자신의 현재를, 과거를, 미래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나와 같은 사람은 없다. 내 삶의 한 시점과 비슷해 보인다 해도, 결코 그의 삶은 나의 그 시점과 같지 않다. 나를 들여다본다는 것, 한 사람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그래서 힘들다. 대단한 애정이나 투철한 직업적 윤리 (ethics)를 갖지 않는 한 그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반드시 깨달아야 하는 시점이 오기 마련이다. 이 사람은 나와 다른 사람이자 '클라이언트'라는 점이다. 그 선을 깨달을 때, 바운더리 (boundaries)는 유지된다. 그 '선' 이 그어진 한도 내에서 너와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정해진다. 그 '선'을 넘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은 엉키고 할 수 있는 일들조차 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 비정하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그 '바운더리'를 잘 지키는 사람이 일을 잘하는 이유다.

2013/09/08 10:03 2013/09/08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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