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미래

3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05/20
    나무공
    지드
  2. 2007/05/17
    스타크래프트, 인류의 미래
    지드
  3. 2007/01/25
    바이바이(Buy-bye)
    지드

나무공

노무라 연구소에서 나온 '2010 IT로드맵'을 읽으며 Forcing mechanism과 To-be image를 되뇌이다가 기형도의 시, '나무공'을 떠올렸다.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고정하려 덤비고, 대낮까지 고정하려 덤비고, 이제는 미래까지 고정하려고 덤빈다. 노무라의 미래는 노무라와 노무라들이 '원하는' 미래이다. 첨단의 옷을 입고 미래까지 박제되어버린 서글픈 인류. 기형도는 변하지 않는 것은 변화뿐이라며 희망을 던졌는데, 나는 이 변화가 어지럽기만 하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스타크래프트, 인류의 미래

 스타크래프트 게임은 (조금 과장하면) 손금이 닳도록 해보았다. 98년, 첫출시때부터 근래까지 대략 8, 9년은 한 셈이다. 특히 초기 3, 4년은 무지하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타 2가 나온다는 이시점까지 그 시나리오를 제대로 읽어본적이 없으니, 한심할 노릇이다.

 

 모든 이야기는 백지위에 점을 찍으면서 시작한다.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의 감독과 개발자들이 처음에 백지위에 찍은 점은 무엇일까? 바로 '현재'였다. 아무 이유없이 인간이 우주에 내버려진 것이 아니라, 중요한 전환의 point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스타크래프트의 세계관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전체는 천천히 보기로 하고, 인류역사중 '현재'부터 특정부류가 버려지기 전까지를 자세히 보았다. 요약해보면,첫번째 포인트는 '기술의 발전이 지속될 것이고, 이 기술들은 인간의 순수성을 거르게 될 것이다'하는 점이다. 두뇌속에 컴퓨터 칩을 이식하고, 새로운 능력을 얻게 된 이들이 세대를 거쳐 유전자 변이가 이루어져, 인본주의자(?)의 공격을 받게 된다는 가정이다. (부르주아들이 스스로를 실험대상으로 삼지는 않을 것이다) 두번째로, 국제 강대국기구를 통해 인종청소가 대량으로 행해지고, 마침내 그들을 분리시켜 우주 행성으로 보내는 마지막 실험을 한다. 그래서 우주로 쫒겨난 테란은 자신들의 삶을 찾아나간다.

 

 감독은 이 게임을 만들때 왜 굳이 현실에서부터 시작했을까? 왜 전쟁을 주제로 했을까? 나는 마린들이, 질럿들이, 히드라들이 죽어나갈때 그들의 삶이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갖는지 궁금하고 안타깝다.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죽어나가는 것인지, 누구를 위해서 싸우는 것인지. 한가지 확실한 것은 스타 한판이 끝나면 피로 가득한 허무한 화면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스타크래프트 스토리 테란편 I, II 발췌(source : 스타크래프트.co.kr)

 

I. 서구문명의 몰락

지난 20세기에 기술과 세계 문화의 발달이 급속했다고는 하지만, 21세기 이후의 엄청난 발달에 비한다면 빛이 바래고 말 것이다. 21세기의 끝 무렵 인류는 전례없이 엄청난 변화의 물결을 경험하게 된다. 극단적인 신기술들이 빠른 속도로 등장함에따라 가장 가난한 국가들조차 고도로 발달한 컴퓨터와 정보 데이터베이스의 혜택을받을 수 있게 되었다.

동구권에서 공산주의가 몰락함에 따라 핵무기를 사고 파는 풍경을 어디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우세한 자본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유지되던 국가간의 세력 구조는 제 3 세계 국가들이 초강대국들에게 경제적, 군사적으로 도전함에 따라 붕괴되고 말았다. 사이버네틱스, 인간 복제 그리고 유전자 조작기술에 대한 비판은 점점 수위를 높여가, 마침내 극단적인 인본주의자와 강경 종교 집단들이, 이들 유전자 조작 기술을 통해 이익을 얻어온 사기업들의 권리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이버네틱 (역주:사이버네틱스란 컴퓨터를 인간 두뇌와 결합시키는 기술을 말한다) 장비를 두뇌에 심었고, 어떤 사람들은 유전자 조작을 통한 돌연변이로 오감을 발달시키거나 텔레파시 능력을 얻었다. 이러한 인류 유전자에 대한 극단적인 변화가 겁 많은 인본주의자 집단들 사이에 공포심을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기술은 계속 발달하고 널리 퍼져나갔으며, 인구는 늘어만 갔다. 20세기 끝 무렵 세계 인구는 약 60억 정도였다. 그로부터 삼백년도 채 지나지 않아 세계 인구는 270억에 달하게 되었다. 공해와 천연 자원, 그리고 연료 부족이 인구를 억제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던 세계 지도자들의 고민을 배가 시켰다. 인구 폭발과 유전자 변이가 끝내 인류를 파국으로 몰아넣으리라는 불안감이 인류를 휩쓸기 시작했다.

사이버네틱스와 유전자 변이를 사이에 두고 긴장이 더해가는 동안, 수많은 국제 경제 시스템이 스스로 붕괴되었다. 극렬한 테러와 폭력이 빈번히 기업 집단과 인본주의자 집단 사이에 발생하여 경찰의 진압을 초래하였다. 강대국에서 벌어지는 잔혹한 경찰 폭력 진압에 대한 언론의 무책임한 보도는 가뜩이나 혼란스러운 사회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결국 불안하게 유지되고 있던 국제적 힘의 균형은 깨어지고 세계는 유례없는 대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II. 새로운 질서의 탄생

2229년 11월 22일, 국제 강대국 협의회(UPL)가 설립되었다. UPL은 단합된 인류의 미래를 그리던 과거 UN의 강령을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이 새로운 국제 기구는 일부 극히 불안정한 남아메리카의 국가들을 제외한 세계 인류의 93%를 지배하였다. UPL의 근본적 이념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였지만, 때로는 공공 질서를 유지한다는 명분으로 극렬하고 파시스트적인 경찰의 힘에 의존하곤 했다. 80여년에 걸친지배기간동안 UPL은 인류의 다양한 문화를 마침내 하나로 통합하겠다는 극단적인정책을 꾸준히 추진하였다.

조금씩 남아있던 인종주의의 잔재는 잔혹하게 말살되었고, 통합 정책의 주역인 통일 위원회는 세계의 오랜 종교들을 대부분 금지시켰다. 영어가 지구의 공용어로 지정되고, 각국의 언어는 차츰 금지되었다.

UPL은 공식적으로 종교를 금지하면서도, 스스로는 '인류의 신성성'이라는 자못 종교적인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이 준-종교적 강령은 인류의 순수한 유전자에서 불필요한 인공 장기와 돌연변이를 즉각 제거할 것을 요구하였다.

UPL의 강경파와 과학자들은 유전자 변이와 사이버 테크놀로지 그리고 마약의 사용이 인류의 존엄성을 파괴한다고 주장하였다. 마침내 UPL 지도자들은 타락한 기술로부터 인류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한 야심찬 계획을 수립하였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바이바이(Buy-bye)

[펌-웹진 '가슴', 나도원]

 

예상은 빗나갔다. 선택형 자살약 바이바이(buy-bye)의 시판이 허용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리고 시판 직후부터 바이바이는 연일 판매량을 갱신했다. 바이바이의 성공은 무엇보다 자살 성공률에 따라 세 종류의 제품으로 나누어 판매한 데에 있었다. 각각 성공률 100퍼센트, 75퍼센트, 50퍼센트인 바이바이 삼종은 그 자체로 화제였고, 그 중 성공률 50퍼센트 바이바이가 소비를 주도했다.

“안녕을 사세요(buy-bye)”라는 친근한 카피를 내세운 광고도 주효했다. 특히 자살로 생을 마감한 유명인사들과 비슷한 모델들을 내세운 CF가 효과적이었다. 칼을 든 백인 미녀가 “바이바이가 있었다면 손목을 긋지 않았을 텐데…”라고 한다거나, 고층빌딩 꼭대기에 서서 “바이바이가 있었다면 뛰어내리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라고 읊조리는 CF는 바이바이의 장점을 잘 보여줬다. 또 총기자살로 생을 마감한 미국의 유명 뮤지션과 비슷하게 생긴 남자가 “바이바이가 있었다면 두개골을 부수지 않아도 되었을 걸…”이라고 중얼대는 CF도 있었다.



기존의 자살방법들을 대개 참담했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장기와 두개골을 파손시키는 방법이나 혈관을 끊어 과다출혈로 죽는 방법, 그리고 물에 뛰어들거나 목을 매 질식사하는 방법들은 심약한 사람들에게는 쉽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체에 심각한 훼손을 남겼다. 제법 낭만적으로 치부되었던 총기자살과 약물자살의 실상은 더욱 참혹했다. 모두 독한 용기가 필요했고, 실패할 확률도 높았으며, 때론 극심한 고통을 동반했다. 병원에서 약물주사를 통해 안락사하는 방법 말고는 자살이라는 동물적 행위 자체가 힘든 종류의 것이었다. 그런데 바이바이의 등장은 이것을 바꿔놓았다. 구매와 복용이 간편하고 일체의 고통이 없음은 물론 약간의 환각효과까지 있었다.

처음엔 바이바이의 처방을 누가 하는가가 문제였다. 의사가 해야 마땅하지만 사실 그들이 바이바이를 처방해준다는 건 스스로에게도 곤란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시판 허용 때와 마찬가지로 의사 처방이 필요 없는 약품으로 분류되었다. 대신 바이바이 구매자는 ‘채무 및 범죄가 없음’이라는 인증을 받아야 했다. 채무와 형사처벌을 피하기 위한 자살을 막기 위한 사회적-실은 사회를 위한- 안전망이라고들 했다. 또 고속도로 주행 중 바이바이를 복용하고 자살하는 사건들이 발생하자 운전 중 바이바이의 복용 및 소지가 금지되어 적지 않은 과태료와 함께 면허취소 등의 강력한 제재조치가 취해졌다. 방송은 바이바이 복용자에 의해 무고한 어린이들과 단란한 가족이 처참하게 사망하는 내용의 공익영상을 제작해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바이바이 포장에는 ‘어린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보관하세요’ 등의 경고문구 삽입이 의무화되었다.

논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십대들이 나이를 속이고 바이바이를 구입해 자살을 기도하는 일이 잇따르자 어느 칼럼니스트는 ‘죽음을 파는 시대에 고한다!’라는 제목의 제법 비장하고 비판적인 칼럼을 썼고, 각종 단체에서는 안티-바이바이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모 기독교 단체는 ‘바이바이 퇴치를 위한 구국기도회’까지 기획했다가 무슨 이유에선지 자진하여 철회하는 해프닝도 벌였다. 하지만 바이바이의 판매량은 매달 증가했다. 지하철 선로사고 급감 에 대한 보도나 사회적 비용절감에 대한 논의 등으로 순기능에 대한 인식도 확산되었다. ‘죽음을 파는 시대에 고한다!’를 쓴 칼럼니스트마저 바이바이를 먹고 자살하는 일이 발생하자-그는 50퍼센트 바이바이를 복용한 것으로 알려져 보다 체험적이고 비판적인 칼럼을 쓰려 했을 것이란 풍문도 있었다- 바이바이는 트랜드가 되었다. 이어 예쁜 여배우를 커버에 내세운 ‘바이바이와 함께 하는 음악 컬렉션’이 발매되고, ‘바이바이를 먹기 전에 꼭 보아야할 책과 영화 20선’, ‘바이바이와 떠나는 마지막 여행지 12선’ 따위의 책들도 출간되어 적잖이 팔려나갔다.

앞서 말했듯이 바이바이의 성공비결은 확률선택형이라는 데에 있었다. 특히 50퍼센트 바이바이는 자살에 실패한다 하더라도 자살기도를 통하여 몇 가지 목적-예를 들면 어떤 이들에게 슬픔이나 고통을 줘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환기시킨다거나-을 달성할 수 있었고, 실패했을 경우엔 새로운 삶의 기회를 부여받았다고 생각함으로써 다시 생을 시작하는 계기로 삼을 수도 있었다. 물론 다른 경우도 있었다. 50퍼센트 바이바이를 5회에 걸쳐 복용하고도 살아남은 사람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확률적으로 가능한 일이라 3회 복용 후 생존자들도 종종 있었지만 5회까지 생존한 그는 특별히 취급되어 유명인사가 되었다. 제약사는 그에게 사은품으로 75퍼센트 바이바이 10정 구매권을 주었으나 사용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여섯 번째로 자살을 기도했을 때에도 그는 50퍼센트 바이바이를 복용했다고 한다. 그는 이 때 사망했다.

이처럼 치사율이 정확한 약을 만들어낸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고 제조법도 극비였다. 한때 경쟁사가 바이바이와 유사한 효능의 약품을 개발하여 시판한 적이 있었다. 그들은 50퍼센트 바이바이보다 낮은 49퍼센트 자살 알약, 즉 ‘순한 자살’을 판매한다고 하여 전문가들 사이에 때 아닌 논쟁을 일으켰다. 확률이 반 이하라면 자살기도의 의미가 없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그러나 ‘순한 자살’ 49퍼센트는 좋은 판매성과를 보였고, 기존의 하얗고 약간 써보이던 바이바이 대신 ‘커피맛’ ‘딸기맛’ ‘쵸코맛’까지 개발하는 열의를 보였다. 이 때부터 바이바이의 시장점유율이 감소하였지만, 상황은 의외로 허탈하게 종료되었다.

‘순한 자살’의 실제 성공률이 광고와 달랐던 것이다. ‘순한 자살’ 49퍼센트의 성공률은 시판 초기엔 70퍼센트 정도였음이 드러났고, ‘커피맛’ ‘딸기맛’ ‘쵸코맛’ 개발 이후엔 40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사건으로 경쟁사는 과장광고 논란에 휩싸였으며 결국 ‘순한 자살’에 전량리콜이라는 특단의 조치가 내려졌다. 이후 바이바이가 다시 시장을 독점했지만 매출실적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고 수익증가율도 둔화되었다. 업계에서는 주 고객층 중 상당수가 이미 사망하였으므로 새로운 소비자 층을 만들어 내거나 소량생산과 고가마케팅전략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전망이 어둡다는 분석이 우세했다.

바이바이가 재기를 노리고 있을 이 무렵 선거열풍이 휩쓸고 지나갔다. 선거 후 주문형 바이바이의 반짝 특수를 기대해고 있을 때, 일이 터졌다. 바이바이 제약사의 임직원들이 대거 구속되었다. 이 뉴스가 전해지자 일각에선 드디어 살인죄나 살인방조죄가 적용된다는 예단도 있었지만, 곧 약품허용 및 시판과정에서의 불법 로비 혐의임이 알려졌다. 다시 바이바이의 비윤리성에 대한 성토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하지만 이것이 지난 정권의 유력인사와 정치인들까지 소환되는 정치 스캔들로 발전하자 포커스는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이후 바이바이 임직원들에 대한 재판 및 판결은 그다지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다. 다만 이 과정에서 바이바이의 공동개발자이자 제약사의 핵심임원이었던 인사에 의하여 바이바이가 자랑하는 정확한 자살성공률의 비밀이 공개되었다. 그리고 짤막하게 보도되었다.

방법은 간단했다. 가장 중요한 작업은 치사율이 100퍼센트이며 고통 없는 약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 실험에 성공하자 다음은 쉬웠다. 100퍼센트 바이바이는 모두 이 약을 포장하여 판매했다. 75퍼센트 바이바이는 독약, 그리고 수면제와 환각제를 섞은 무해한 약을 각각 75대 25로 제조하여 판매했고, 50퍼센트 바이바이는 50대 50으로 제조하여 판매했다. 즉 가장 인기 있었던 50퍼센트 바이바이는 100개의 알약이 포장될 때 그 중 50개만 독약이었던 셈이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유통금지 이후에도 성행하던 바이바이의 암거래는 자연스레 사라졌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