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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08/08
    이사
    지드
  2. 2007/07/27
    블로그를 어떻게 할까(1)
    지드
  3. 2007/07/27
    2007/07/27
    지드
  4. 2007/07/19
    트랙백
    지드
  5. 2007/07/13
    미술과 와인의 공통점(1)
    지드
  6. 2007/07/09
    새만금의 락페스티발
    지드
  7. 2007/06/29
    예술가가 알아야할 모든 것이 들어있는 것 같다.
    지드
  8. 2007/06/22
    와인
    지드
  9. 2007/06/15
    의문2
    지드
  10. 2007/06/12
    UFO
    지드

이사

지드님의 [블로그를 어떻게 할까] 에 관련된 글.

 어제 밥먹다가 체할뻔한 질문, '너는 주류냐, 비주류냐'. (물론 내가 호의적으로 보지 않은 사람이기도 했지만) 말도 안되는 이분법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각 시기별로 담론이라는게 있다면, 그것에 대한 입장을 가지고 판단할 수 있으며, 그런면에서 나는 비주류라고 답했지만, 그런 얘기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쯤은 느끼고 있다.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은, '진보넷에 블로그를 갖고있으면 진보인가', 또는 '진보는 무엇인가'이다. ('진보'와 '개혁'에 대해서 이미 여러분들께서 단어 자체의 허약함을 짚어주시긴 했다) 더구나, 최근에 느끼는 바는, 방향성은 왼쪽이되, 삶은 우편향이라는 이중성이며, 이러한 괴리가 내 개인에게는 삶의 모순을 부른다는 것이다.

 나는 그동안 예술에 있어서의 독립제작방식에 흥미를 가져왔다.(비단 예술이 아니더라도) 우편향으로 살기에 너무 커져버린 뇌의 일부분을 표출하는 방식으로 적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이런 방식에는 상당한 관심을 가질 것이며, 시도하는 것 자체에 의의를 두고싶다. 해야하는 이야기를 개척해나가고, 이야기하는 방식을 만들어내는 것, 이런 것들은 모두 토양의 질이 결정해주는 것일테고..그래서

 

당분간, 새로운 블로그를 위한 준비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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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를 어떻게 할까

 

 

 

 



왜 나는 진보블로그를 쓰는가.

왜 나는 진보넷의 Resource를 불필요하게 낭비하고 있는가.

 - 내가 사용하는 Resource만큼 진보넷에 무언가 Benefit을 돌려주고 있는가.

또, 진보넷의 이용이 내게 주는 장단점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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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27

근 몇일간 읽던 중국경제에 대한 텍스트를 종합해보면 아래의 가설이 나온다.

 

'공산주의 → Washington  Consensus → Beijing Consensus'

 

좀 더 생각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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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랙백



 인터넷이 소개되고 지난 십수년동안, 많은 통신규약들이 나타났고, 단순히 정적인 페이지들의 조합(Hyper text)이었던 웹은 바야흐로 웹 2.0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이러한 흐름에서 중요한 변화는 블로그의 탄생이라고 본다. 블로그는 'Web + Log'의 줄임말이라고 알고 있는데, 미국에서는 myspace류의 블로그가 인기를 끄는동안, 한국에서는 이글루가 나오기 전까지 cyworld류(이하 '싸이')의 블로그가 대세였다. (도대체 싸이는 왜 블로그라고 부르는거냐, 아직까지 의문이다. 싸이의 특징은 엔터테인먼트-사진, 음악-, 훔쳐보기 딱 두가지라고 본다) 그래도 블로그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상호간 자동링크기능 때문인 것 같다.

 그동안, 인터넷 검색은 출처를 알수 없는 복사본의 천국이었다. 인터넷이 정보의 바다가 아니라 쓰레기의 바다로 불려지기까지 했다. 새로운 개념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이때 참여와 공유를 원칙으로 하는 웹2.0이 나오고, 또 블로그가 나오고, 트랙백이 나온것으로 알고있다.  트랙백을 통해, 개인의 생산물들(포스트)은 상호작용이 가능해졌다. 그러니까, 기표의 구조 중 어느 구석에 존재하는지 이야기해주고, 사고의 폭을 확장할 수 있는 시도이다.

 그런데, 때때로 혼란이 있는 것은, 트랙백을 거는 '기준'이다. 처음에 난 모든 경우에 트랙백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기표의 세계가 있다면, 아마도 (소쉬르가 얘기한 것 처럼) 몇가지의 특징을 가질 것이고, 그것들 중에서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중복/반복되지 않고, 포스트간의 연관성이 추적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A를 보고 A'를 쓰는 경우에, A'가 마치 B인 것 처럼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A에서 나온 A'라고 명시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이유로 트랙백을 걸었는데, 결과는 좀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유입 클릭들에 대해서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경우가 발생하다보니 트랙백에 대해서 좀 회의적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고보니, 기표의 구조에 내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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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과 와인의 공통점

 신모씨의 학력위조 사건으로 떠들썩한 와중에 한가지 웃기는 사실은, 그 사기꾼이 한국의 주요 갤러리들에서 줄줄이 기획해서 전시해 오고, 광주비엔날레까지 가는 동안 별다른 제제가 없었다는 점이다. 미술이 무엇이며, 관객은 무엇을 보고 느끼는가에 대해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내가 보고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는 답 밖에 돌아오지 않은 생각과 밖에서 누가 무슨 얘기를 하든 집안에 쳐박혀 티비나 보겠다는 생각은 같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한국의 대부분의 관객은 마케팅(평론가, 큐레이터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명성)에 약하다.  미술품에 왜 '가격'이 매겨지는가, 그 '가격'은 작품을 통해 발생된 관객의 감동의 총합에 비례하는가. 미술품의 유통시장에 대해 잘 모르지만, 일반적인 가치평가(Valuation) 방법론에 대해서는 조금 알고 있다. DCF방식(Discount cash flow)을 활용하여 가치를 평가한다면 아래와 같이 생각해볼 수 있다. 즉, 작품을 통해서 발생시킬 수 있는 미래의 Cashflow(현금유입)의 합을 현가화하는 것이다.

 

즉, Vale = 향후 작품이 없어질때까지 발생할 수 있는 모든 현금흐름의 합 - 관리비용

            = 1지적재산권 + 2관객이 그림을 보기 위해 투자하는 비용의 합 + 3청산비용(자산)

 

그러니까, 2원본을 보여주거나, 1원본의 카피를 팔거나, 3원본을 팔거나 하는 세가지의 방법으로 구성되어있다. 원본을 보여주거나, 원본의 카피를 팔거나, 모두 관객의 호응을 얻어야 하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원본을 파는 행위는 앞의 두 행위에 종속적이기 때문에 말할 것도 없다) 관객의 호응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 즉 작품의 마케팅 문제에 밀착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작품의 화폐적 가치는 관객들의 감동의 합과는 전혀 다르다. 마케팅하는 사람들이 정말로, 작품의 화폐적 가치와 관객의 감동의 합 사이의 Gap을 줄이고자 노력하고 있을지 의문인 것은 지금 시대가 돈만 밝히는 천박한 사회이며,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써의 마케터(큐레이터)가 사회로부터 독립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소믈리에(와인)나, 연예기획사(대중가수)나, 큐레이터(미술가)나 수요자(관객)과의 Gap을 줄여야 하는 임무를 받았다는 점과, 실제로는 그와는 반대로 행동한다는 점에서 거의 유사하다. 전부 마케팅의 영역에서 움직이는 마케터들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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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만금의 락페스티발

지드님의 [세계의 락페스티발] 에 관련된 글.

페스티발의 사전적 의미는 '[명사]축하하여 벌이는 큰 규모의 행사. ‘잔치’, ‘축전’, ‘큰 잔치’로 순화'라고 인터넷 백과사전에 나온다. 새만큼 방조제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락페스티발이 열리나보다. 여기에 참가하는 밴드들은 개발론자이거나, 정신을 돈에 팔아버린 사람들인가. 아래와 같이 윤밴을 비롯하여 대부분 별로 기대가 안되는 밴드들 뿐이다.

 

일렉쿠키

테너 최승원교수

동물원+여행스케치

크라잉넛

윤도현밴드

 

럼블피쉬

나무자전거

JK김동욱

김C, 강산에

마야

 

윤하

이브

주현미

헤리티지

T, 현진영

다이내믹 듀오

베이지

장윤정

토미 기타

김장훈

 

유진박, 양지원

데이브레이커스

DJ DOC

FTISLAND

데프콘+김도향

클래지콰이

 

 

그런데, 도대체 크라잉넛은 왜 저기 껴있는 것인지...

Punk의 정신을 잊지 말라고 메일이라도 써야되겠다..

 

7/19 출연자들이 바뀌어 수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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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가 알아야할 모든 것이 들어있는 것 같다.

지드님의 [수련자_태산압정] 에 관련된 글.

 

강홍구님 글펌

겪어보니 사진이라는 매체 역시 다른 시각 매체와 마찬가지로 핵심적인 것은 시선의 문제였다. 그 시선이란 시력이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 즉 세계에 대한 해석과 통찰력의 문제였다. ● 인간의 시각은 가장 복잡하고 발달이 느린 감각 기관이다. 예술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나이어린 음악천재, 수학 천재, 시적 천재는 있어도 나이 어린 미술 천재는 없다. 있더라도 그럴 듯한 의미 있는 작품을 생산하려면 적어도 스물 중반은 넘어야 한다. 심지어 영화도 마찬가지다. 시각적인 것을 다루니까. ● 시각적 정보들을 다른 시각, 다른 관점에서 보고 해석하는 일은 새로운 개념과 통찰력을 필요로 한다. 통찰은 순식간에 온다. 그걸 영감이라 불러도 좋다. 그렇게 온 순간을 놓치지 않고 깊이 있게 하는 힘은 개념 혹은 사고의 힘이다. 창조성 혹은 독창적인 어떤 것은 거기서부터 일 것이다. 그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순간의 영감은 그냥 지나가고 만다. 요는 붙잡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늘 훈련하고 있다가 타석에 들어선 타자처럼 방망이를 휘둘러 공의 중심을 맞혀야 한다. 땅! 하고 맞아 뻗어가는 공은 잘 맞으면 홈런이 되기도 하고 운 좋으면 텍사스 히트가 될 것이다....

 

- 강홍구님 글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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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http://wallflower.egloos.com/1578608 를 읽다가 떠오른 기억

 

 3년전인가. 프랑스를 방문한 차에, 현지의 몇가지 와인을 접할 기회가 생겼다. 내 취향에 맞는 와인을 딱 하나만 골라와야겠다고 마음먹고, 용의주도하고 면밀하게 혓바닥을 낼름거린 결과, 떫은 맛(탄닌?)이 너무 강하지 않게 부담없이 마실 수 있는, 현지에서도 비교적 대중적이고 적당히 알려진 것이며, 가격도 적당한 와인을 발견하였다. 바로, 쌩떼밀리옹(Saint-emilion)이다. 물론 이것은 그냥 프랑스의 지명이름이지만, 그 후로 지금까지 내가 마시는 와인은 70%가 쌩떼밀리옹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는 와인이었다.(최근에는 저렴한 가격때문에 칠레산을 마신다) 물론, 선물할때도 무조건 쌩떼밀리옹이다. 그것밖에 아는게 없다.

 

 혼자 마시거나, 선물하는 경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개인용도가 아닌 경우에 가격대가 높은 와인을 사야하는 경우는 정말 혼란스럽다. 최근에 공식적으로(?) 와인을 사서 전달해야하는 경우가 생겼다. 내가 받은 가이드는 '단가 10만원 이내' 뿐이었다. 아무 정보도 없이 와인샵에 들렀다가 미로속에 빠진 기분이 들었다. 오프라인 매장에서 모든 정보가 차단된 상태에서 도대체 주인이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고, 맛을 볼 수도 없었고, 맛을 본다한들 이 맛의 우수성(?)을 판단할 기준이 내겐 없었다. (맛을 설명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래서 머리를 짜낸다는게, 주는 사람도 알고, 받는 사람도 아는 유명한 와인을 사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게 정말 유명한 와인인지 아닌지를 내가 판단할 수 없었으므로, 주인의 입을 믿는 수밖에 없었고, 결국 내가 선택한 것은 주는 사람도 모르고 받는 사람도 모르는 와인이었다.(그렇게 믿고 있다)

 

 내가 산 와인은 뽀이약(Pauillac) 지방에서 나온  Pontet-Canet 99년산이었다. 그걸 11만원이나 주고 샀다. 주인이 포장을 하면서 가게의 명함을 넣길래, 이유를 물었더니 선물받은 사람이 전화해서 가격을 물어보곤 한단다. 그래서, 혹시 전화와서 물어보면 두배로 얘기해달라고 단속해두었다. 뭔지도 모르고 받고, 뭔지도 모르고 주고, 그사이에 거품만 커져가는 한심한 현상을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가장 어이없던 사건은 히딩크대통령이 전쟁뒤에 마시고싶은 술로 샤또 딸보를 얘기했다고 해서 그 술이 한동안 유행했던 적도 있다고 한다.) 한참 후에 우연히 그 와인의 가격을 검색해본 일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8~9만원정도면 시중에서 구매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최종 유통단계의 마진이 2~3만원 정도 된다는 말인데, 그 바로 전단계(수입, 마케팅비용)의 비용과 마진도 그와 비슷하다고 보고, 제한다면 아마 실제 가격은 4~5만원쯤 한다고 보면 맞을 것 같다. 한국에 들어오면서 가격이 두배가 되는 것이다. 이 사회가 제정신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어쩌다가 한번이라도 마시게 되니 좀 알아야겠다 싶어서 검색하다 보니, 빈티지 차트라는게 돌아다녀서, 유심히 보았다. 이런 식의 표준화가 가능한건지 이해가 잘 안가지만, 이걸 보니 복잡해 보이기만 하던 와인의 가격체계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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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2

보풀님의 [저도 의문이랄까 뭐랄까..] 에 관련된 글.

  근본적으로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판단은 인간에게 주어진 숙제일텐데, 개인이 서 있는 어떤 지점에서, 그 지점의 환경이 개인의 가치관과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보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닌 것 같습니다. 진보에 대한 개인의 의지의 영역이 교육에 의한 것이든, 환경에 의한 것이든, 완벽한 주체가 되기위한 노력이든, 확대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겠죠. 87년이 의미를 갖는 것은 '현재'의 바탕을 이루는 큰 판(체제)을 이루기 때문인 것 같고요, 개인의 현재 '지점'에서 선택할 수 있는 한계점를 보여주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현재의 큰 판은 대략 '87년 체제 + 97년 체제'라고 보입니다. 87년은 '민주화', 97년은 '경제체제(신자유주의)'라고 대강 보는 것 같고요, 대다수의 경제문제가 97년 이후 현재에 이르러 심화되고 있습니다. ('부자되세요'라는 천박한 말이 10년만에 인사가 될 줄이야.)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가 '뭘 먹고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대체된 시대가 되었고, 제경우에는 완전한 주체가 되는 것은 수도사가 되는 일만큼 어렵게 느껴집니다. 말씀하신대로, 여전히 남은 질문들은 '현재'가 되겠네요.똑바로 살라는 말씀, 새겨듣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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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FO

<패닉 UFO>

 

 



 처음 죽음을 접한 것은 고1때 친구의 죽음이었다. 그 어린 나이에 친구가 사라져버렸는데, 처음엔 신기하기도 하고 뭐가 뭔지 하나도 몰랐었는데, 장례식에 그의 여자친구의 슬픈 모습을 보고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마 그때부터 죽는 것에 대해 실감했던 것 같다. 당사자는 이미 없는데, 남은 사람들은 모두 괴로워했다. 친구의 꿈은 수능 잘보기와 파일럿, 여자친구와 행복한 시간 가지기 같은 것들이었는데, 어느 순간 모든게 사라져버렸다. 세상에 남긴 흔적이라곤, 그의 가족과 친지, 여자친구와 몇몇 친구들의 희미한 기억뿐이다. 왜 태어났는지, 왜 살아가는지, 왜 죽는지, 죽고나면 어떻게 되는지, 질문만 남겼다. 어디서 왔는지, 또는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답을 알아낸다면, 그 반대는 수월할 것이다.둘중 하나만 꼽아본다면, 왜 태어났는지에 대한 간결한 답은 부모님의 사랑이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궁금했던 것은 나라는 존재가 유일하고 필연적인 것인가이다. 내가 된 정자가 아니라 내 뒤에 따라오던 정자가 나보다 앞섰다면, 난 지금 이자리에서 지금과 같은 얼굴과 모습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마 반쪽의 나와 다른 반쪽의 누군가의 결합이 이 세상 어디엔가는 빈대붙고 있을 것이다. 세상이 아주 조금은 달라졌겠지만, 바뀌지 않는 것도 있다. 아버지가 나를 낳고 아버지의 아버지가 아버지를 낳고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아버지의 아버지를 낳고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를 낳고, 그렇다면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아버지의 아버지는 누구일까? 아버지들의 아버지는 또 누가 낳았을까? 누가 만들었을까? 희망적이게도 선조들은 몇가지 답을 준비해주었다. 오래도록 알려진 답은 '신'과 '사후세계'이다. 이건 제일 간편한 답이지만, 말하기만 좋을뿐 이성적으로는 납득이 안간다. 두번째는 라엘리안과 같은 기괴한 종교이다. 먼 과거에 외계인들이 원시인류를 아프리카 어딘가에 던져놓고 관찰하고 있다는 기괴한 종교이다. 세번째는 진화론, 천체물리학 같은 과학의 답이다. 이성적이긴 한데, 아직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이다. 뭐가 옳다고 할 수도 없고, 틀리다고 할 수도 없고 그냥 믿는게 믿는거다. 세가지 옵션중에서 선택할 수 있다면, 나는 첫번째 옵션만은 과감히 버리겠다. 치사한 종교지도자들이 설계해놓은 사후세계에 가고싶지 않기 때문이다. 굳이 고르라면 세번째가 좋다. 무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불교에서는 열반이라고 하나?), 그냥 사라지는 것이 좋다. 죽음 이후의 세계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것은 머릿속에 심어놓은 도청장치에 다름아니다.(맑스가 인민의 아편이라고 칭했듯이)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와 내 친구와 오늘 변을 당한 얼굴 모르는 동료와 우리의 모든 조상은 도대체 어디로 간걸까? 아마 대다수는 머리에 남은 사회제도와 윤리의 찌꺼기 때문에 삶이 고통이었을 것이고, 삶을 제대로 살아보겠다는 먼 꿈을 바라보면서 사라져 갔다. 그들의 고통이 열반으로써 해소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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