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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06/05
    동양의 공부와 서양의 공부가 따로있나?(9)
    지드
  2. 2007/05/30
    천민자본주의에 대한 의견
    지드
  3. 2007/05/17
    스타크래프트, 인류의 미래
    지드
  4. 2007/05/16
    MOT_Cold blood(1)
    지드
  5. 2007/05/10
    지식검색
    지드
  6. 2007/05/08
    Radiohead - Idioteque(3)
    지드
  7. 2007/04/27
    Advise to B
    지드
  8. 2007/02/13
    장하성 Fund
    지드
  9. 2006/12/01
    Value based management
    지드
  10. 2006/11/20
    Issue와 Problem
    지드

동양의 공부와 서양의 공부가 따로있나?

김규항님의 블로그중 '공부의 내력' 포스트를 보다가 전반적인 문맥과 함의에는 동의하나, 동양의 공부를 비하(!)하는 대목에서는 '정말 그런가'하는 의문이 든다. 그가 올린 대목은 아래와 같다.

 

 

동양의 전통적인 공부법은 ‘무작정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었다. 동양의 공부란 사람이 되기 위해 꼭 알아야 할 지식과 깨우침이 담겼다고 사회적으로 합의된 몇 권의 고전을 거듭 공부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서양의 공부가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라면 동양의 공부는 지적 통찰을 체득하는 정신 수련이었다. 사방이 책으로 빼곡한 서양 학자의 서재와는 달리 동양의 학자 공부방에는 몇 권의 책만 있었다.

 

 

김규항님이 동양의 공부를 어떤 시기, 어떤 범위로 규정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전체 문맥으로 볼때, 근대화(박정희 이후)로 규정한다면, 대략 뜻이 맞지만, 굳이 동양의 전통적인 공부법을 내세울 필요가 있었는지 의심스러우며, '동양의 방법은 틀렸다'로 귀결될 여지가 다분하기 때문에 위험하다. 천자문과 사서삼경이 단순히 한자를 '외우는' 공부가 아니라 동양의 신화, 역사, 과학, 철학을 아우르는 내용을 담고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문제는 동양의 공부가 아니라 속성 근대화에 있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동양의 학자의 공부방에 책이 몇 권 있었는지 난 잘 모르겠으나 그들이 도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 궁금하긴 하다. 또한, 불과 100년전의 선조들이 써놓은 글도 못읽는 행태가 한심하기도 하고, 어떤 생각으로 살았는지 궁금하기도 하여 선조들의 '입문서'인 천자문을 보름전부터 읽고 있는데, 그게 그냥 '하늘천 따지 검을 현 누루 황'이 아니라, '天地玄黃하고, 宇宙洪荒이라'하여 하늘(天)과 땅(地)과 공간(宇)과 시간(宙)의 특성을 한문장에 요약한 엄청난 문장이다. 초급 입문서의 첫문장이 이러한데, 단지 이해의 기회가 없었을뿐, 이러한 '비하'라면 섭한 분들이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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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민자본주의에 대한 의견

지드님의 [장하성fund] 에 관련된 글.

강유원님의 팟캐스팅을 듣다가 천민자본주의에 대한 간단한 의견에 대한 그의 말에 공감하면서 포스팅한다.

 

자본주의면 자본주의지, 천민자본주의와 귀족자본주의가 따로 있느냐, 천민자본주의라고 부르는 지금 형태의 자본주의는 초기도입 또는 개발중인 국가에서 흔히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모습이라는 것이다. 확실히 천민자본주의라는 말은 '천민'이란 단어가 제외되어야 하는, 즉 '정상적인' 자본주의 사회로의 전환을 추구해야 한다는 가정을 바탕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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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크래프트, 인류의 미래

 스타크래프트 게임은 (조금 과장하면) 손금이 닳도록 해보았다. 98년, 첫출시때부터 근래까지 대략 8, 9년은 한 셈이다. 특히 초기 3, 4년은 무지하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타 2가 나온다는 이시점까지 그 시나리오를 제대로 읽어본적이 없으니, 한심할 노릇이다.

 

 모든 이야기는 백지위에 점을 찍으면서 시작한다.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의 감독과 개발자들이 처음에 백지위에 찍은 점은 무엇일까? 바로 '현재'였다. 아무 이유없이 인간이 우주에 내버려진 것이 아니라, 중요한 전환의 point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스타크래프트의 세계관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전체는 천천히 보기로 하고, 인류역사중 '현재'부터 특정부류가 버려지기 전까지를 자세히 보았다. 요약해보면,첫번째 포인트는 '기술의 발전이 지속될 것이고, 이 기술들은 인간의 순수성을 거르게 될 것이다'하는 점이다. 두뇌속에 컴퓨터 칩을 이식하고, 새로운 능력을 얻게 된 이들이 세대를 거쳐 유전자 변이가 이루어져, 인본주의자(?)의 공격을 받게 된다는 가정이다. (부르주아들이 스스로를 실험대상으로 삼지는 않을 것이다) 두번째로, 국제 강대국기구를 통해 인종청소가 대량으로 행해지고, 마침내 그들을 분리시켜 우주 행성으로 보내는 마지막 실험을 한다. 그래서 우주로 쫒겨난 테란은 자신들의 삶을 찾아나간다.

 

 감독은 이 게임을 만들때 왜 굳이 현실에서부터 시작했을까? 왜 전쟁을 주제로 했을까? 나는 마린들이, 질럿들이, 히드라들이 죽어나갈때 그들의 삶이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갖는지 궁금하고 안타깝다.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죽어나가는 것인지, 누구를 위해서 싸우는 것인지. 한가지 확실한 것은 스타 한판이 끝나면 피로 가득한 허무한 화면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스타크래프트 스토리 테란편 I, II 발췌(source : 스타크래프트.co.kr)

 

I. 서구문명의 몰락

지난 20세기에 기술과 세계 문화의 발달이 급속했다고는 하지만, 21세기 이후의 엄청난 발달에 비한다면 빛이 바래고 말 것이다. 21세기의 끝 무렵 인류는 전례없이 엄청난 변화의 물결을 경험하게 된다. 극단적인 신기술들이 빠른 속도로 등장함에따라 가장 가난한 국가들조차 고도로 발달한 컴퓨터와 정보 데이터베이스의 혜택을받을 수 있게 되었다.

동구권에서 공산주의가 몰락함에 따라 핵무기를 사고 파는 풍경을 어디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우세한 자본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유지되던 국가간의 세력 구조는 제 3 세계 국가들이 초강대국들에게 경제적, 군사적으로 도전함에 따라 붕괴되고 말았다. 사이버네틱스, 인간 복제 그리고 유전자 조작기술에 대한 비판은 점점 수위를 높여가, 마침내 극단적인 인본주의자와 강경 종교 집단들이, 이들 유전자 조작 기술을 통해 이익을 얻어온 사기업들의 권리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이버네틱 (역주:사이버네틱스란 컴퓨터를 인간 두뇌와 결합시키는 기술을 말한다) 장비를 두뇌에 심었고, 어떤 사람들은 유전자 조작을 통한 돌연변이로 오감을 발달시키거나 텔레파시 능력을 얻었다. 이러한 인류 유전자에 대한 극단적인 변화가 겁 많은 인본주의자 집단들 사이에 공포심을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기술은 계속 발달하고 널리 퍼져나갔으며, 인구는 늘어만 갔다. 20세기 끝 무렵 세계 인구는 약 60억 정도였다. 그로부터 삼백년도 채 지나지 않아 세계 인구는 270억에 달하게 되었다. 공해와 천연 자원, 그리고 연료 부족이 인구를 억제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던 세계 지도자들의 고민을 배가 시켰다. 인구 폭발과 유전자 변이가 끝내 인류를 파국으로 몰아넣으리라는 불안감이 인류를 휩쓸기 시작했다.

사이버네틱스와 유전자 변이를 사이에 두고 긴장이 더해가는 동안, 수많은 국제 경제 시스템이 스스로 붕괴되었다. 극렬한 테러와 폭력이 빈번히 기업 집단과 인본주의자 집단 사이에 발생하여 경찰의 진압을 초래하였다. 강대국에서 벌어지는 잔혹한 경찰 폭력 진압에 대한 언론의 무책임한 보도는 가뜩이나 혼란스러운 사회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결국 불안하게 유지되고 있던 국제적 힘의 균형은 깨어지고 세계는 유례없는 대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II. 새로운 질서의 탄생

2229년 11월 22일, 국제 강대국 협의회(UPL)가 설립되었다. UPL은 단합된 인류의 미래를 그리던 과거 UN의 강령을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이 새로운 국제 기구는 일부 극히 불안정한 남아메리카의 국가들을 제외한 세계 인류의 93%를 지배하였다. UPL의 근본적 이념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였지만, 때로는 공공 질서를 유지한다는 명분으로 극렬하고 파시스트적인 경찰의 힘에 의존하곤 했다. 80여년에 걸친지배기간동안 UPL은 인류의 다양한 문화를 마침내 하나로 통합하겠다는 극단적인정책을 꾸준히 추진하였다.

조금씩 남아있던 인종주의의 잔재는 잔혹하게 말살되었고, 통합 정책의 주역인 통일 위원회는 세계의 오랜 종교들을 대부분 금지시켰다. 영어가 지구의 공용어로 지정되고, 각국의 언어는 차츰 금지되었다.

UPL은 공식적으로 종교를 금지하면서도, 스스로는 '인류의 신성성'이라는 자못 종교적인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이 준-종교적 강령은 인류의 순수한 유전자에서 불필요한 인공 장기와 돌연변이를 즉각 제거할 것을 요구하였다.

UPL의 강경파와 과학자들은 유전자 변이와 사이버 테크놀로지 그리고 마약의 사용이 인류의 존엄성을 파괴한다고 주장하였다. 마침내 UPL 지도자들은 타락한 기술로부터 인류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한 야심찬 계획을 수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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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T_Cold blood

MOT. 곧 2집이 나온다.

그런데, 2집 수록곡중 '시니피에'는 언어학의 그 단어인지,

알고 쓴건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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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검색

어느날 Yahoo.com에서 놀던 중에, 놀라운 것을 발견했는데, 바로 Yahoo! Answers라는 거였다. 곰곰히 뜯어보니, 한국웹에서 흔히 보는 지식검색이라는 것과 비슷하다. 야후에 이런게 왜 있을까, 어떻게 들어왔을까?

 

짐작컨대, 야후 코리아의 '지식검색'이 그 원류일 것이고, 야후 코리아는 네이버로부터 카피했을 것이다. 그럼 네이버는? 네이버도 엠파스의 그것을 카피하지 않았을까.(특허권 문제를 해결하긴 했을테다) 엠파스의 지식검색은 어디서 왔느냐하면, 아마 한겨레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한다. 90년대 후반에 한겨레에서 론칭한 DBDIC이라는 사이트가 바로 지식검색의 원류가 아닐까 한다.(나중에 엠파스가 인수했다)

요는 DBDIC - 엠파스 - 네이버 - 야후코리아 - 야후의 흐름으로 옮겨갔다는 것.

 

지식검색. 웹으로 뭘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우왕좌왕하던 시절, 네트워크를 이용한 의사소통의 효율화 도구를 통해서 지식이 축적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첫번째이면서도 강력한 사례이다. 근래에는 쓰레기로 가득차 있지만, 사용자그룹이 정해진다면 강력해질 수 있는 여지가 많다.

 

한겨레에서 이걸 만들어냈다는게 놀라운 일인데, 이걸로 인해 한겨레의 수익구조가 얼마나 좋아졌을지 궁금하다. 어쨌든, 정(+)의 효과가 났을 것은 분명한 일인데, 한겨레 같은 언론사가 독립성을 유지하려면, 광고수익으로부터 경영이 멀어져야 편집권이 독립된다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인 것 같다. 상업성과 독립성이 밀접하다는 점이 아이러니이지만, 현재의 체제에서는 차악책으로 지속적인 수익처를 만들어야 한다.

 

한겨레사이트를 돌아다니다가 know21이라는 新사이트를 발견하고는, 또한번 호기심에 이곳저곳 뜯어보았다.이곳은 bookazine을 표방하는데, book + magazine이라는 의미로, 특정 기사에 관련된 서적을 붙여 고객(?)이 기사를 읽으면서 궁금한 점은 책구매로 유도하는 것이다. 신선한 아이디어이긴 한데, 책시장은 이미 완전경쟁시장에 접어들었다. 시장의 비효율과 왜곡이 거의 없어서 각종 인터넷서점 중에서 젤 싼데가서 산다. 그래서 know21은 힘들거 같다.

 

상업성의 부재로, 사업성이 없는 사업을 하다보면, 언론이 사업이 된다.

그래서 한겨레가 요즘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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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diohead - Idioteque

전에 좋아하던 라이브 비디오를 다시 찾아보았다.

저걸 흉내내겠다던 다짐은 어느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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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vise to B

[네이트 보낸쪽지함 中]

 

너처럼 밝고 명랑한 사람이 큐피트의 장난 때문에 조울증(?)에 걸리다니 한편으로는 놀라우면서도 걱정이 된다. 하지만, 그것이 너의 성숙의 과정이라면 당당하게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니. 그래서 내 오늘은 운명에 대해 얘기를 해야겠다.



1. 궁합


  세상에 존재하는 사랑을 극단적으로 두부류로 나누어볼때, '지겹도록 힘들기만 한 사랑의 관계'과 '미치도록 좋기만 한 사랑의 관계'라고 하자. (실제로 존재하기도 하는 것 같다.) 그 두 관계의 차이를 나타내는 요인을 전통적으로 '궁합'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궁합은 왜 이렇게 자주 회자되는 것일까. 아마도 과거에 얼굴도 안보고 결혼하던 시절에, 서로 맞춰볼 기회(연애, 동거 등)와 안맞는 경우 헤어질 기회(이별, 파혼 등)가 완전히 차단되어있었던 전통적인 환경에서 두 사람이 얼마나 맞는지에 대한 통계치(!)를 사전적으로 확인해보고자 필요성이 부각될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현대에 와서는 주로 '반대의 이유'를 위해서만 활용되지.
  궁합의 맹점은 통계라는 점과 정확한 요인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결론은 맞아도 그만, 안맞아도 그만이라는 점이지. 사람들은 궁합이 뭔가를 맞춘 경우에는 '거봐, 맞잖아, 신기하네'하고, 못맞히면 '조심하거나, 언젠가는 맞추길 바라'든지 그냥 조용히 있든지 하는 것 같다.
  '힘든 사랑'과 '좋은 사랑'의 차이를 굳이 궁합이라고 명칭한다면, 궁합의 이면에서 그것이 작동하는 요인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밝혀야 한다. 그리고 난 그것이 표면적으로는 '성격'이라고 생각하고, 성격이라는 놈은 환경과 노력에 따라 변한다고 본다.
 
          '힘든 사랑'
                ㅏ---------- 궁합 ← 성격 ← 노력(및 환경)
          '좋은 사랑'

 

 

2. 인연


 A. 인구
  전세계 인구 : 60억명
  아시아 인구 : 30억명
  한반도 인구 : 7천만명
  한국    인구 : 4천8백만명
  경상도 인구 : 1천3백만명
  - 순경상도(광역시 제외): 6백만명
  - 대구광역시                : 2백5십만명

  단순화시켜서 경상도에서 누군가를 만날 수 있는 확률은 세계인구 대비 0.2%에 불과하며, 그대가 자주 가는 지역만 봤을때 8백5십만명으로 한국인구 대비 18%이다. 여기서 몇가지를 더 빼보자.

                                    850만명
   - 어린이/노인(30%)   255만명=595만명
   - 남자(50%)                         - 297만명=296만명
   - 기혼녀(70%)                                   - 207만명= 90만명
   - 애인있는사람(30%)                                        - 30만명=60만명

 

  전체 만날 가능성이 있는 인구에서 어린이/노약자, 남자, 기혼녀, 애인있는 인구를 제외했을때, 세계인구대비 거의 0%, 한국인구대비 1.2%의 가능성이 있다.


 
 B. 장소
  사생활에 따라 다르니 대략 안나간다/나가서못만난다/나가서만난다 세가지로 나누어보면, 확률은 1/3이다.

 

 

 C. 호감
  첫만남이 이루어져 서로 호감을 가지려면, 4가지의 옵션이 나온다. (호감-호감), (호감-비호감), (비호감-호감), (비호감-비호감) 따라서 확률은 1/4.

 

 

 D. 종합
  앞의 간단한 계산을 종합해 보면, 두 선남선녀가 만날 확률은 한국인구 대비로 보더라도 0.1%에 가깝다. 실제로 꼽을 수 없는 변수들을 감안한다면 0이 수십개는 더 붙어야 할 것이다. 난 이러한 상황을 뭐라고 불러야될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은 인연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3. 운명
  풍전등화처럼 미약한 희망이 인연으로 발전하고, 노력 끝에 그것을 운명으로 만들어 가는 것을 사랑이라 부르는 것 같다. 단지 안맞는 부분은 궁합이 아니라 일시적인 '땡깡'인 것이다. 득보고 사는게 아니라 덕쌓고 살겠다는 마음가짐이 중요하지 않을까. 설사 잘안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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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성 Fund

1.

  7, 8년쯤 전에 정확히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삼성전자 주주총회장에 스타가 한명 나셨다. 당시에 고려대 교수로 있던 장하성이라는 사람이었는데, 어디서 갑자기 나타나셨는지 모르지만, IMF혼란속에 혜성같이 나타나 소액주주를 대표하여 삼성 경영진을 대상으로 호통을 치던 기억이 생생하다. 대다수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음은 물론이고, 재계로부터 경계를 받기까지 하였다. 물론 경계의 이유는 재벌들의 빈약한 기업지배구조 때문이었는데, 이는 문어발식 확장경영과 순환출자를 통해 아주 적은 양의 지분을 가지고도 거대 그룹을 좌우할 수 있는 구조를 말하는 것이고, 지금은 조금 나아졌지만 기업지배구조, 또는 재벌의 지배구조를 어떻게 바꿔나갈 것인가 하는 질문은 2007년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2.

  아무튼 어느날 갑자기 스타가 된 장하성 교수는 참여연대와 기업지배구조개선센터 등의 단체 활동를 통해 반재벌의 기치를 끊임없이 내들었는데, 그의 주장은 한국식 '천민자본주의'를 벗어나 선진자본주의를 '제대로' 도입해야 한다고 개략적으로 얘기할 수 있고, 돈(지분)도 없는 놈이 기업의 이윤을 독차지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제대로된 주주 중심의 자본주의가 성립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재벌의 부패가 발생하고 재벌의 독과점적 권한을 기반으로 경쟁력있는 중소기업, 일반기업을 해치게 되어 결국 자본주의체제의 균열이 발생할 것이라는 주장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의 지향점은 1) 주주 중심의 자본주의(기업윤리에 대한 인식 포함), 2) 완전경쟁시장 완성 정도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인식의 기반은 참여연대뿐 아니라 정부내에서도 존재하는 것으로, 공정거래위원회 같은 부처에서 담당하는 공정거래법(독점규제법)을 살펴보면 유사성을 확인할 수 있다.

  법은 법제처나 공정위 홈페이지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고 내용도 복잡하므로 생략하고, 참여연대의 경우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규정해 놓은 그들의 방향을 확인할 수 있다. 아래는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소개에서 퍼온 글이다.

 

      경제개혁센터는 계열사간 부당내부거래와 문어발식 사업확장으로 기업의 연쇄부실을
      낳고 한국 경제를 위기에 처하게 만든 재벌체제를 개혁하는 것을 핵심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법에 근거한 소수주주권을 활용해 재벌 총수와 경영진이 상법,
      증권거래법, 공정거래법 등을 위반하고 소액주주의 권익을 침해하는 사례에 대해 법적
      책임을 추궁하는 소액주주운동을 펼쳐왔습니다

 

3.

  한동안 잠잠했었는데, 최근에 장하성 교수의 이름을 언론에서 자주 확인할 수 있다. 그가 Fund를 만들고, 기업지배구조 개선에 뛰어들었다는 것이다. Fund는 '기업지배구조 Fund' 또는 '장하성 Fund'라고 불리고, 자금은 국내에 투자자가 없어서 대부분 미국에서 조달하였다고 한다. 이미 대한화섬을 비롯하여 몇몇 기업에 투자하였고 시장의 반향은 피투자사의 주가가 몇차례 상한가에 오를만큼 엄청났다. 그의 현실인식은 여전히 불투명한 기업지배구조로 인해 기업가치가 저평가되고 있다는데 그친다.

  기업지배구조. 이말은 주주의 권한이 어떻게 대리인(경영자)에게 넘겨지게 되고, 경영의 결과가 주주에게 어떻게 돌아오게 되는지에 대한 구조를 의미한다. 도식화한다면, 권한의 위임은 '주주 → 이사회 → CEO → 업무집행임원'순으로 넘어가게 되고, 성과의 분배는 주주의 판단에 의해 '투자를 위한 내부유보 또는 배당'으로 이어진다. 장교수는 CEO의 권한이 과도하여 주주와 이사회를 무시하고, 성과의 분배도 독단적이라는 것이고, 이를 해소하는 것이 투명한 기업경영이라는 인식이라 판단된다. 그리고 그 기반엔 제대로 된 시장경쟁전제되고 있다.

 

4.

  근본적인 문제는 시장을 어떻게 규정하는가와 그 시장에서의 참여자(가계, 기업, 정부 등)의 역할을 얼마만큼 인정하느냐이다. 장하성이라는 사람의 지향은 내 판단에는 완전경쟁시장을 기준으로 하고, 정부의 역할을 최소화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점에서 장하준 교수와는 다르다. 장하준은 장하성의 사촌이라고 (신문에서) 얘기하는데,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경제학 교수로 알려져있다. 그는 기존의 저작(개혁의 덫, 쾌도난마 한국경제, 국가의 역할 등)에서 한국경제는 대략 93년 김영삼 시절에 금융자유화를 비롯한 세계화를 추진하면서 경제의 구조가 지금과 같은 방향으로 가게 되었고, IMF를 지나면서 미국식 자본주의, 또는 자유주의가 도입되었다고 본다. (여담이지만, 80년대에 미국에서 경제학 공부하고 돌아온 엘리트들이 정부, 공기업, 사기업 등에 들어가면서 이 흐름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다고도 본다.)

 

5.

  어쨌든 사촌간 상반된 이야기를 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두가지 질문이 남는다. 한국식 천민자본주의를 해소하고 발전된 자본주의를 만들어내면 삶이 행복해지는가? 그리고, 누구의 삶이 행복해지는가? 장하준의 최근 저작인 국가의 역할 홍보문구에 써있는 외침은 폐부를 찌른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들을 보이지 않는 손에 맡길 것인가, 여러분의 손으로 뽑은

      국가에 맡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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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based management

비정규직과 Value based management에 관하여

 

0.

  살면서 흔히 만나게 되는 사람들 중에 일용/임시근로자가 있다. 일종의 알바 같은 것으로 완전한 프리랜서라 볼 수 있다.(계약서 같은 것을 쓰는지 모르겠다) 내가 다니는 회사의 경우, 일부 잘나가는 IT개발자들이 프리랜서 선언을 하고(일부 아나운서들이 그러는 것 처럼), 독립적으로 일하는 경우를 간간히 보게 된다. 이들은 자신이 만들어내는 가치 중에서 회사가 간접비 명목으로 떼는 비용(이를테면, 사무실사용료, 수도광열비, 각종 세금들 등)을 보전받기 때문에 대부분 연봉이 높은 편이다.(물론, 불안정하긴 하지만, 인맥이 한번 맺어지면, 짧게 끊어지지는 않는다) 불행히도 이런 부류는 전체의 1%도 되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프리랜서들은 건설잡부로 연상되는 비교적 고령의, 무기술자들이거나, 패스트푸드점같은 곳에서 볼 수 있는 대학생/청소년, 식당에서 일하는 아줌마들 정도이다. 하루벌어 하루 먹고사는 사람들이다.

  회사원들이 주로 볼 수 있는 또 다른 두 부류가 있다. 각 부서에 배치되어 각종 잡무를 담당하는 '사무여직원'이다. 그들은 주로 상고나 전문대를 나왔고(근래에는 대학을 나온 경우도 심심치 않은 것 같다), 99.9% 박봉이다. 이들이 박봉인 이유는 급여의 Baseline 자체가 낮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1년짜리 계약을 매년 맺기 때문이다. 1년 계약이므로 고용안정의 유효기간도 1년이고, 연봉인상협의를 해보기도 전에 재계약의 위협을 느끼게 된다. 대부분 미혼의 젊은 여성들인지라, 밝고 명랑하고 순수하기도 하다. 어쨌든 이들은 신문에서는 '비정규직 노동자'라고 불린다.

  '비정규직 노동자'보다 더 나쁜 경우도 있는데, 그들은 '파견근로자'라고 불린다. 물론 일하는 것은 똑같고, 연봉도 비슷하겠지만, 비정규직이 회사와 직접 계약하는 반면, 파견근로자는 회사와 근로자 사이에 '공급책'이 하나 더 끼기 때문에, 실제 받는 연봉은 비정규직보다 더 적으며 '공급책'의 확보물량 덕에 고용은 훨씬 불안정하다.

 

  어쨌거나, 우린 모두 같은 장소에 나란히 앉아 비슷한 일을 하고 있다.

 



1.

  지난 11월 30일에 국회에서 비정규직 관련 법안 3개(기간제 및 단시간 근로자파견법, 파견근로자 보호법, 노동위원회법)이 통과되었다. 내 경험상, 위의 세 부류는 비정규직 법안에 대해 관심이 없거나 모른다. 법안의 핵심골자는 '비정규직/파견근로자가 2년 이상 근무시 정규직으로 전환'한다는 것이고, 보수언론에서도 난리, 진보언론에서도 난리를 치고있다. 보수언론은 인건비가 급상승하는 상황이 조성되어 경영난이 가중될 것이라고 아우성이고, 진보언론에서는 고용보장에 대한 강제성이 없으므로 2년후 대량 정리해고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아우성이다.

 

2.

  기업은 왜 존재하는가? 사회발전의 효율성 측면에서 볼때, 시장경제가 원활하게 돌아갈 수 있는 핵심 공급원이라고 할 수 있다.(나는 자유주의자가 아니며, 시장은 어떤 체제에서라도 필요하다고 본다. 이부분은 다음에 더 얘기해보겠다) 반면, 개별조직 측면에서는 조직의 안정과 성장을 위한 끝없은 이윤추구가 그 목적이라 할 수 있다.

  4년쯤 전에 전경련에서 주최하는 세미나에 다녀온 일이 있었는데, 당시 보스턴컨설팅 부사장이라는 작자가 거드름잡으며 발표했던 내용은 경영의 Global trend(or standard)는 Value based management라는 주장이었는데, 대차대조표를 갖다놓고 보니까 기업의 Cash flow가 돈빌려준 사람(부채항목)으로 많이 들어가더라는 것이고, 기업의 존재목적이 주주의 이익극대화인 만큼 기업의 '주인'인 주주(자본항목)에게 많은 Cash flow가 돌아가야 한다는 뻔한 스토리였으며, 그것을 실행하고 평가하는 지표로 EVA(Economic value added, 경제적 부가가치)라는 개념을 제시하였다.(이 개념에 대해서 잘 모르는 분들은 넘어가도 되며, 궁금하신 분들은 검색하면 금방 나온다. 단순하기 짝이 없다)

  쉽게 말하자면 매출은 올리고 비용(인건비, 이자비용까지 포함)을 최소화하여 주주한테 돈을 많이 갖다바쳐야 한다는 것이다. 

 

3.

  관리회계를 응용하여 손익계산서 양식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비정규직 법안이 진보하는 것에 대해 재계가 두려워하는 이유와, 이번 법안에서 왜 그들이 안도하는지가 명확해질 것이다. 손익계산서는 '매출-비용=이익'을 구체적으로 명시하는데 내가 보기엔 아래와 같다.

 

               매출

    -         매출원가                       ← 외주비 : 파견근로자 비용

---------------------------

               매출총이익

    -          판매비와 관리비

                        급여                    ← 인건비 : 정규직/비정규직

                        복리후생비

                        임차료

                        감가상각비

                        세금과 공과

                        연구비

                        대손상각비

                        기타비용 등           ← 잡급 : 일용직 노동자

----------------------------

                영업이익

 

 

4.

  스웨덴은 노사정협의회가 아주 잘 돌아간다고 한다. 독일은 최고의사결정 기구에서 중요 결정을 할때 노조 인사가 참여한다고 한다. 한국도 사회통합이 잘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주체은 정부와 재계와 언론이다. 그들은 '사회의 부가 어떻게 생겨나는가'에만 집중하도록 하여 경제성장율에만 신경쓰도록 만들고, 잠재적 경제성장율이라는 듣도보도 못한 희안한 지표까지 만들어 사람들을 바보로 만든다. 게다가 분배의 문제에서는 짜고치는 고스톱을 이미 여러번 돌린 판이다.

  어쨌든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파견근로자든 모두 같은 자리에서 비슷한 일을 하고 있지만, 각각의 입장은 판이하게 다르게 구성되어 서로 대립하게 되어있으며, 신경전을 벌이는 동안 돈은 되놈이 벌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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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와 Problem

1

  살다보면, 매순간 문제에 부딪히고, 또 매순간이 의사결정의 연속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답을 내리기는 쉽지가 않은 것 같다. 3년쯤 전인가, '싱글즈'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는데,

마지막 대사가 인상깊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아직 아무 일도 안 일어났다는 것이며 일어나봤자

          지가 문제일 것이고 문제는 반드시 해답이 있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2

  그렇다. 모든 문제는 '문제이기 때문에' 해답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정답일까? '올드보이'라는

영화를 보면서 느낀 것은 또 다른 포인트였다.

 

          당신의 진짜 잘못은 대답을 찾지 못한데 있는게 아냐. 자꾸 잘못된 질문을 하니까

          제대로된 대답이 나올리가 없자나..."이우진은 왜 오대수를 가뒀을까?"가 아니라

          "왜 풀어줬을까"잖아

 

3

   소크라테스는 자신만의 대화법(반어법?)을 개발하여, 교육(?)에 나섰다고 한다. 대화의 상대자는

질문에 대답함으로써 진리에 다가가는 것이다. 질문은 그 자체에 답 또는 화자의 의도나 그것을

암시하는 메타포를 담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개인관점을 벗어나 사회 시스템의 관점에서

보면, 문제에 대한 해답의 영향이 집단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내가 기획팀에 배치받아 처음 받은 질문은 'Issue와 Problem의 차이가 뭐냐' 하는 것이었다.

우여곡절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 '두가지 모두 한글로 해석하면, 문제라는 뜻이지만, Problem이

해결을 요하는 문제라면, Issue는 선택을 요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4

  신자유주의가 횡포하고 있는 요즘같은 시기에, 수많은 Problem과 Issue에 무방비로 놓여진

우리들은 더 많은 고민을 하고 올바른 판단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 대상은 개인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과 올바른 사회를 향한 것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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