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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인들이 종교적 신념에서 하는 수난극을 보게 되었다. 한 영상매체를 통해서인데 후사인 이븐 알리는 모하메드의 손자로서 자신을 지도자로 모시려는 쿠파시(市)로 향하다가 반대파로부터 일가 전부가 카르발라에서 몰살을 당하는 비극을 맞는다. 무슬림 간의 무서운 종파전쟁의 시발점은 이렇게 시작됐다.
 
좀 더 자세히 얘기하자면 이븐 알리 모하마드 일족은 '쿠파'로 향하는 도중에 카르발라에서 4만 명의 군대에 포위를 당하는데 사내아이라는 이유로 그의 8개월 된 어린 아들까지 죽임을 당한다. 이에 쿠파시 사람들은 후사인 가족의 몰살이 자신들의 탓이라면서 이븐 알리를 순교자로 기념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수니파를 이단이라고 규정하고, 모하메드의 손자가 이끌었던 시아파를 이슬람의 정통으로 인정한다. 이들의 수난극 의식은 독특했다. 아무리 보고 듣는 것이 많은 세상이라지만 이 의식은 신선하고도 충격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것을 곱씹어보는 계기가 됐다.
 
그들이 '후사인 이븐 알리'를 기리는 의식은, (이용한 사진은 상의를 입은 사진이지만..) 상의를 탈의한 건장한 남자들이 열을 지어 서서 오른 손에 짧게 말아 쥔 채찍을 들고 애통해하는 노래 가락에 맞춰 스스로 자신들의 몸에 태형을 가하며 고통을 느끼는 것이었다. 순교자 일가족이 당한 억울하고도 절통한 죽음을 잊지 않으려는 퍼포먼스인 것이었다. 이때 부녀자들도 빠지지 않고 한 몫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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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난아기가 있는 젊은 엄마들은 후사인 이븐 알리의 상징색인 녹색 옷을 입힌 아들을 데리고 나와 이슬람사원을 향하여 통곡하며 그 어린이를 들어 올리면서 순교자에게 바치는 의식을 거행한다. 자식 대까지 대를 이어 충성을 하겠다는 충성서약인 것 같았다.
 
당시의 후사인 이븐 알리의 이들이 8개월 정도 밖에 안 되는 어린 아이였다고 하니까 남자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순진무구한 어린 영혼의 한을 달래며 그날의 뼈아픈 상황에 상징적으로나마 자신들의 어린 것들을 동참시키는 뜻일 것이다. 서기 680년 10월 10일에 벌어진 그 일을 1333년이 지난 지금까지 같은 날 반복적으로 재현하며 시아파만의 동질성과 정체성을 지켜나가는 놀랍도록 끈질긴 의식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시아파 무슬림들은 그 어떤 종교적 규례나 절기보다 아슈라를 가장 성스럽고 경건하게 지킨다. 이들은 아슈라에 참석함으로 자신의 죄가 용서 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이맘 후세인을 위해 흘린 눈물 한 방울은 100가지 죄를 씻어 준다.” 혹은 “후세인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애도하는 사람들은 낙원에 들어갈 수 있다.” 라는 유명한 말들이 있다. 이들은 무슨 죄를 짓든지 후세인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고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면 용서 받을 수 있는 특권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더 열정적으로 아슈라를 지킨다.

 특히 1979년의 이슬람 혁명에서 가장 즐겨 사용했던 말이 “매일 매일이 아슈라 이고 모든 곳이 카르발라이다.” 라는 구절이다. 카르발라의 사건이 갖는 의미를 알고 있는 시아파 무슬림들에게 이 말은 혁명에 참여하라는 어떤 말보다 더 큰 동기 부여가 되었다. 후사인 이븐 알리가 불의의 상징인 야지드에게 굴복하지 않고 죽기까지 저항한 것을 잘 알고 있는 이란 시아파 무슬림들은 호메이니를 현대판 후사인으로 팔레비 왕은 야지드로 동일시하여 저항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러니까 여기서 기억할 점은 어떤 정체성이 자연스럽게 공동체에 녹아들어 전승되는 데에는 자연스럽게 녹아든 고차원적인 문화적인 힘이다. 수천 년을 이어 전승되고 정체성을 퇴색하지 않게 한데 묶는 결집력은 그렇게 부드럽게 녹아든 무형문화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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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23 22:22 2013/10/23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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