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설 유허지와 마지막 유언-⑤
시베리아여행의 기억-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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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크뉴스 박정례 기자]= 7월6일, 우리 일행의 오전 일정의 대미는 이상설 선생 유허지와 한인문화센터를 거쳐서 ‘최재형 선생의 생가’ 방문이 될 것이다. 우스리스크에는 고려인들의 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는 생활문화 흔적과 항일 유적지가 많이 남아있다. 우리들의 역사이자 거울이기도한 그 현장으로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직진하기로 한다.

그 넋을 위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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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설선생 유허지’가 성큼 다가왔다. 민주평화당 정동영 대표는 하얀 국화꽃바구니를 준비해 열사 앞에 바쳤다. 선생을 찾은 우리들의 발걸음이 지사의 넋을 위로하는 진혼곡이 됐으면 좋겠다는 심정이다. 유허비에 새겨진 글을 원광대의 최재덕 교수가 낭독을 했고, 이어 경건한 마음으로 경청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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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허비는 글자 그대로 선인들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에 그들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석이 아닌가. 최 교수가 낭독하는 내용을 들어보니 유허비 말미에 ‘성명회와 권업회를 조직하여 조선독립운동에 헌신하던 중 순국하다. 그 유언에 따라 화장하고, 그 재를 이곳 수이푼 강물에 뿌리다’로 끝을 맺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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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진천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상설은 25세 때 과거 시험에 합격하여 27세 때 성균관 교수를 역임할 만큼 총명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는 1907년 고종의 밀지를 받고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국형화회의에 이준, 이위종과 함께 특사로 파견되었다.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러시아 땅으로 방향을 틀어 그곳에 먼저 정착한 고려인들과 다양한 활동을 펼쳐나갔다.

그러던 중 1916년 초부터 병들어 눕게 된다. 하바로프스크에서 상당 기간 투병생활을 하다가 차도가 없자 기후가 온난한 니콜리스크(우수리스크)로 옮겨 요양을 시작한다. 하지만 건강은 지사를 외면하며 차도를 보이지 않는다. 병세가 호전되지 않았다. 이 지사는 결국 1917년 3월 2일 48세를 일기로 순국하기에 이른다. 지사 나이 48세 때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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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 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뒤 제사도 지내지 말라.”

지사의 유언은 서릿발 같았다. 눈을 감으며 남긴 지사의 마지막 유언은 그처럼 비장하고 서슬 퍼런 것이었다. 임종을 지킨 이동녕과 백순, 조완구, 이민복 등은 선생의 유언에 따라 아무르 강가에 장작을 쌓아놓고 화장하여 선생의 유분을 북해 바다에 날렸다. 이때 선생의 문고(文藁)와 유품도 모조리 거두어 함께 불살랐다.

이상설 유허비, 그곳을 서둘러 떠나기에는 너무나 아쉬웠다. 정동영 대표의 제안에 따라서 모두 유허비 주변을 천천히 세 바퀴 돌기로 했다. 불교신자들이 탑돌이를 하면서 소원을 빌듯이 우리 일행은 침묵 가운데 고종의 밀명을 받고 헤이그로 떠나던 밀사의 심정이 되어 ‘조국이란 무엇인가,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묵상하는 시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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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산처럼 무거운 책임감이 가슴 가득 차올라 “유품도 남기지 말라. 제사도 지내지 말라. 무덤도 만들지 말라.”며 못다 한 독립의 한을 죽어서까지 자신의 빚으로 인식하는 모습이다. 지상에서의 온갖 흔적을 지워버리는 단호함 앞에서 열사에 대한 아쉬움이 더욱 사무치도록 치밀어 오른다.

외교권을 상실한 망국의 한으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한 이상설 선생, 선생은 가셨지만 오늘도 유허지를 찾는 한국인들에게 그날의 원통함과 ‘조국이란 무엇인가’를 되새기게 하고 있다.

*글쓴이/박정례.르포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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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24 17:41 2018/09/24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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