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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익, 김주익, 김주익

김주익 열사 추모제에 다녀와서 몇 꼭지나 되는 관련 기사를 썼고 한 참 지나버렸지만 어떻게든 정리를 해놓고 넘어가야 되겠다 싶더라. 사실 그 동안 몇 번이나 썼다가 지워버리곤 했다.

 

1주기 추모제가 벌어지기 이틀 전 총연맹 부산본부 갔다가 자료집 한 권을 얻었다. '85호 크레인'

김진숙 지도위원의 절절했던 추모사, 아이들이 아버지에게 보냈던 크레용으로 그린 그림일기들, 김주익 지회장의 유서, 관련 자료들을 일년만에 다시 읽었고 또 김지회장에 대한 정은임의 멘트들 까지 다시 찾아 읽었다. 집에서 눈물 좀 미리 빼고 그 다음날 한진중 노조 사무실에 갔더랬다.

 

거기서 정말 멋진 형님 한 분을 만났다.( 바로 박성호 한진중 열사정신계승 사업회 회장 http://media.jinbo.net/news/view.php?board=news&id=31178&page=2&category1=1) 예전엔 현장 마다 멋진 형님들이 참 많았었는데 요즘은 참 멋진 형님을 만나기 힘든 시절이다. 최근에 국회에서 다시 만난 옛날 형님으로는 배일도 행님이 있다 --;; (엊그제 성폭력예방교육 받고 멋진 형님 찾는 나도 구제불능이지만..뭐 어때? 멋진 누나는 멋진 누나고 멋진 형님은 멋진 형님이지..) 벅찼던 과거, 슬픈 이야기, 힘든 현실과 헤쳐낼 각오들을 비장하게 풀어내는 사람들은 꽤 많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들을 웃으면서, 칼날을 솜에 숨긴 채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박성호 회장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국감 땡땡이 치고 참석한 심상정 의원도 멋진 누님이었다. 박성호, 김주익, 심상정, 노무현 이 네 사람은 박창수 열사를 매개로 밀접한 관계를 맺었었더랬다. 박창수 열사가 의문의 죽음을 당했을 때 박성호 회장은 노조 교선부장이다가 해고 당하고 열사 대책위 간사 활동을 했다. 그리고 또 구속당하고...김주익 열사는 문체부장이었는데 겨우 해고를 피했단다. 그리고 심상정은 박창수 비대위 상황실장을 맡았었고 '인권변호사' 노무현은 박창수 진상규명단장을 맡았더랬다.

 

작년에 심상정은 한진중 상급연맹인 금속 연맹 교섭 대표를 지냈다(9월 30일까지) 심상정이 금속에서 임기를 마친 후 17일만에 사고가 났고...인터뷰 때 이 누나가 '국회에서도 가끔 김주익 지회장이랑 이야기 하곤 해요' 라고 하더라. 첨엔 뭔 말을 하는가 싶었지...그리고 작년 김주익 지회장이 제 몸을 달아맸을때 노무현 대통령은 '아니 아직도 한국에 이런 일이 있냐' 고 탄식했다고 열우 모 의원께서 이야기 해주더라. 노무현 대통령이 통치하는 한국에 그런 일은 참 많다. 김주익 열사의 일주기가 되던 날 법원은 효성 노동자들에게 또 손배 칠십억을 때렸다.

 

추모제 당일 아침 일찍 한진중에 나갔더랬다. 눈에 들어오는건 바로 85호 크레인, 햇빛 때문에 제대로 올려다보기도 힘든 운전실.

 

 

사실 나는 열사라는 말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근데 35 미터 높이에 있는 저 무쇠방을 보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히더라.  천이백명의 조합원을 남겨두고 혼자서 저 위로 기어올라가 문을 잠궈버리고 백스물 아홉날의 여름밤을 지켜낸  그 마음을 , 비닐 봉지에 담긴 밥을 밧줄로 매달아 올려 목구멍으로 꾸역꾸역 넘기던 그 마음을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여름밤에 휴대 전화기가 울리기라도 하면 얼마나 반가웠을까? 통화가 막친 후 더 고고해졌을 적막은 어찌 견뎠을까? 천이백 파업 대오가 칠십으로 줄어 자기 몸뚱아리를 매달땐 솥발산에 먼저 누워있는 박창수 선배가 생각났을까?

 

파업에 참가하면 무급이지만 그냥 결근해버리면 70퍼센트 임금 준다는 회사 앞에서, 생활비 때문에 그리고 고등학교 다니는 딸래미가 눈에 밟혀 몸이 안좋다는 핑계로 여남믄 날 동안 파업 대오에서 빠지다가 결국 후배의 죽음을 맞이한 곽재규 열사의 죄책감의 무게는 얼마였을까? 그 무게가 얼마나 무거웠으면 85호 크레인 아래 4호 도크로 제 몸을 던져서 피로 유서를 써내려갔을까? 그들이 짊어졌을 짐의 무게를 난 짐작조차 못하겠더라.

 

추모식 날 광장을 가득 메운 작업복의 물결들, 참 오랜만에 보는 풍경이었다. 한마디로 뽀다구 나더라.

 

 

조합원들이 유급 참여를 보장 받은 이 시간에 사내 하청 노동자들과 이주 노동자들은 조선소 여기저기에 두더쥐들처럼 박혀 일했다. 물론 그건 한진중 조합원의 책임이나 잘못이 아니다. 노조에서 비정규직의 비 짜만 꺼내도 사측이 어떻게 대응하는진 나도 잘 알고 있다.  차해도 한진중 지회장의  안타까워 하던 모습이 악어의 눈물이 아니란 것도 잘 안다. 한진중 조합원들이 얼마나 힘든 싸움을 치워냈는지도 안다. 그리고 그들더러 이제 또 당신들이 앞장 서시오 하고 명령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 누구도 없다.  하지만 추모식이 끝난 후 함께 선 밥줄에서 이런 위원장, 저런 위원장, 노동운동가 출신 국회의원을 훔쳐 보던 하청 노동자들의 호기심 어린 눈빛들을.

 

남한 노동 운동의 위대한 전사  현대 중공업이 올해 금속연맹에서 제명당했다. 94년 파업 이후 그들은 십년 무쟁의 기록을 이어가고 있다. 그래 쟁의 안 할 수도 있지 뭐. 하지만  '현장파' 출신 탁학수 집행부는 자본과 손을 잡고 해고자들을, 비정규직을 몰아내는데 집중했다. 지금 현중 집행부는 심지어 해고자들의 아침 선전전에 가끔 참여하는 현중 해고자 울산 동구청장 이갑용을 직무유기로 고발하기도 했다. 근데 아직도 현중노조원들은 '영원하라 현중노조' 노래를 부를까? '칠천만의 해방을 위해 영원하라 현중노조'라는 부분을 부를땐 좀 간지럽지 않을까?

 

육해공군 상륙작전 전쟁 선포에 맞섰던 현중이, 그리고 이갑용,이영현, 조돈희의 현중이, '동지들 새해 복 많이 쟁취하시라'는 시로 백무산이 노래했던 그 현중이, 전노협의 상징이었던 '골리앗의 그림자'라는 투쟁가가 헌정되었던 그 현중이, 영국에서 만난 칠십 먹은 노동당원 할아부지까지 투쟁 비디오를 봐서 알고 있던 현중노조가 특별히 나쁜 놈들로  이루어져 이 모양 이 꼴이 난건 아닐게다. 

 

추모식에 참석한 여러 장기 투쟁 사업장과 금속연맹내 비정규직 조합원들. 뿐만 아니라 리베라 노조, 성람재단, 풀무원 아저씨 아줌마 조합원들...이들이 모두 김주익이다, 그리고 곽재규다. 비정규 노동자 앞에 내놓은 노무현 정부의은 비정규직 개악 법안은 바로 21년차 노동자 김주익이 받아들었던 13,5000짜리 가압류된 월금 명세서다. 한진중은 '귀하의 노고에 감사합니다' 고 말하며 저 명세표를 내밀었고 노무현 정권은 비정규직 보호하겠노라며 개악안을 들이밀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내몰리고 있는 거리가 바로 85호 크레인이다. 우리는 김주익을 추모하지만 되살릴 순 없다. 이제 또 다른 누군가를 추모하진 말자. 열사란 말 난 정말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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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국감 출장 이야기

간만에 취재 뒷다마를 쓴다. 사실 그동안 쓸거리가 많았는데 부산 출장건을 어떻게 정리하고 넘어가야 하나 싶어 다른 이야기들도 못썼다. 지난 주에 부산엘 다녀왔다. 국감 취재 건이랑 김주익 열사 일주기 추모행사 건으로...

 

기사를 통해 하고 싶은 말들 거진 다했지만 가슴 짠한 일들이 많았다.

 

먼저 국감때 문성현 만난 것, 한달 전 즈음에 매일노동뉴스 인터뷰를 보고 '아 이 양반이 아직 살아있구나 ' 싶었는데 막상 보니까 참 안 됐더라. (이런걸 보면 나도 마음이 좀 여린가 보다--;;) 호강할려고, 대접 받으려고 그 사람이 운동한 것도 아니었겠지만 알아보는 사람도 드문 '문전투'(내가 알아보니 참 반가워 하더군--;;)를 단병호 의원이 불러내 소개시키고 각종 행사에서 내빈의 말석을 지키는 그 양반을 보니 참...게다가 당 운동의 막차를 탔는데 그것도 그리 길이 넓어보이진 않고..하여튼 내가 궁금해서 그 양반 인터뷰 했는데 왜 갑자기 문성현이냐며 뜬금없다는 소리를 꽤 많이 들었다ㅠㅠ 에이 그래도 기사 거리는 되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 가슴 한 구석에서 사라지진 않는다--;;

 

부산에서벌어진 국감은 부산, 울산, 대구, 경남, 경북이라는 광대한 지역의 노동문제를 커버하는 국감이었다. 그러나 주어진 시간은 달랑 세시간 반 정도--;; 서부 경남의 끝자락 의령에서 버스를 타고 와 국감장 앞마당에서 집회를 했는데도 자기들 이야기 한마디 안나온게 한이 맺혀 의원 얼굴이라도 한 번 보고 가겠노라던 풀무원 의령 공장 아줌마, 아저씨들 생각하면 아직도 짠하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그 주름 패인 얼굴, 얼굴들...일요일은 쉬게 해달라며 외치다가 '노동자 출신 국회의원 '손을 막상 잡고 나니까 그 당당하던 구호도 못외치고 목메어 울던 그 모습. 양귀자 소설 중에 '슬픔도 힘이 된다' 란 중편(단편이던가?) 가 있었다. 불법화 시기의 전교조 이야기 였는데 풀무원 아저씨, 아줌마들에게도 슬픔도 힘이 될까? 국감 마치고 구내 식당에서 들렸던 진주 지방노동사무소장 목소리가 기억 난다. '풀무원 사측에선 의령공장 접겠다던데?' 의령공장은 7월 1일 주5일제 실시를 앞두고 십수개로 쪼개져 버린 풀무원 사업장 중의 하나다. 주5일제 법안 실시를 앞두고 천명이 넘던 풀무원 생산 라인은 7, 80명의 작은 회사 십수개로 쪼개졌다.  태백산맥 보면 '지주가 빨갱이 만든다요' 라는 구절이 나온다. 정말 세상이 투사 만드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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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삭스 역스윕해버리다!

빨간 양말들이 양키스를 꺾었다. 삼연패 뒤 사연승.기가 막힌 역스윕.

 

메이저 리그가 대단하고 안 대단하고를 떠나서 스스로에게 지워진 짐과 징크스를 벗어내 버린 빨간 양말들에게 축복이 있기를. 베이브 루스가 살던 주소에 사는 어린 야구 팬의 이빨에 야구 공이 맞아 밤비노의 저주가 사라졌다고 보스턴 인간들이 우기더니 정말 그런건가?

 

그리고 6차전까지 26타수 3안타에 그쳤던 자니 데이먼의 연타석 홈런. 확실히 스포츠는 각본 없는 드라마라는 진부한 격언을 증명해냈다. 데이빗 오티즈가 살린 불꽃을 자니 데이먼 교주가 피워냈다.

 

보스턴 팬들은 이번 월드시리즈를 우승 못해도 속이 시원할게다. 그리고 a-rod의 영입에도 불구하고 보스턴에게 한 방 맞아 버린 스타인브래너 영감에겐 ' 하하하 고소하다.' 는 말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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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갔다 들어왔다

나갔다 들어왔다. 나가기 귀찮기도 했지만 타 매체 돌아가는 이야기 하나 들을까 싶어서, 내 나와바리가 아닌  곳 커버하는 기자 이야기 들을까 싶어서, 뉴저 네트웍 할 수 있을까 싶어서...아니 뭐 내가 언제 부터 이렇게 열혈 조직원이었다고 허허...아 내가 생각한 이 번 주말은 이런 것이 아니었는데 또 뻔한 술자리를 다녀왔다. 물론 술은 많이 안 먹고 먹는 척 정도만 했지만. 샤갈 전시회도 연장됐고, 불꽃 축제 표도 얻었고, 세종 문화회관에서 하는 모 공연 표도 주겠노라는데, 슈퍼 스타 감사용도 보고 싶은데...게으른 탓인가? 물론 내가 남 부럽잖게 게으르긴 하지. 흑 다음주말은 친구 결혼식 때문에 목포--;;까지 갔다와야 된다. 쨰버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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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 오비츄어리, 발리바르 추모사

며칠전 자끄 데리다가 운명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사 하나를 썼다. 데리다의 개인 이력을 검색해서 확인했고 내가 그에 대해 갖고 있던 생각들을 녹일려고 했는데 참 힘들더라. 일단 내가 무식한 탓에... 예전에 봤던 맑스의 유령들에 대해서만 썼다. 해체주의에 대한 언급은 하지도 못한채. 그러고 나니 요즘 참 '책'을 안 읽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오비츄어리는 처음 써보는거지만 '오늘은' 에서 죽은 사람들을 몇번 정리 해봤던게 큰 도움이 됐다. 안타까운 것은 데리다의 이론과 실천 작업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된 기고를 받아 올리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거다. 우리 바운더리가 좁아서인지 아니면 사람들이 몸을 사려선진 모르겠지만 몇몇 기고청탁 시도들이 실패로 돌아갔다. 초라한 내 기사 하나는 너무 부족했다는 생각이 아직도 든다.

 

간만에 여기 저기 서핑을 하다가 에띠앤 발리바르가 뤼마니떼(프랑스 공산당 기관지, 지금은 그냥 좌파계 일간신문)에 기고한 추모사를 발견했다.문장들이 좀 씹히긴 하지만  잘 정리된 글이란 생각이 든다.  최원이 자기 홈페이지에 번역한 것을 몇몇 문구만 수정해서 다시 올린다.  근데 꼽아보니 발리바르도 환갑을 넘긴지가 몇 년 된 것 같다. 참 다들 늙어가는구나.

 

 

곧 만납시다, 자끄 데리다.

 

철학자 에띠엔 발리바르

 

자크 데리다가 사라진지 몇 시간이 안된 지금 나는 그의 작업을 몇 마디 말로 규정하려고 시도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그것을 하나의 명칭안에 가두어두고 싶진 않습니다. 단지 학생으로, 동료로, 친구로 만날 수 있었던 삶과 생각의 몇몇 순간들을 회상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저는 그가 고등사범학교에 도착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거기서 우리는 교수자격시험을 준비 중이었습니다. 데리다는 우리에게 '프랑스의 뛰어난 현상학자' 라는 그의 명성에 앞서, 무엇보다도 후설의 <기하학의 기원>에 관한 눈부신 에세이의 저자였습니다. 거기서 그는 역사성과 진리으 질문을 사회학주의와 심리학주의 사이의 논쟁으로 부터 빼앗아 왔습니다. 그는 곧바로 가장 어려운 곳으로 갔습니다. 증명 가능성의 조건들이라는 질문-이를 형식적 보증이라는 문제로부터 시간 속에서의 재생산이라는 문제('흔적' 이라는 그의 위대한 테마를 예상하는)로 이행하게 만들면서- 이나 기록/글쓰기의 활동과 사고와 물질성 간의 연결이라는  질문 말입니다. 그의 강의들은 웅변적이었지만, 무엇보다 개념들의 성립과 텍스트 읽기에 있어 엄격했습니다. (이 강의들의 엄격성을 증명하는 것은 <우정의 정치>를 읽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수년 후 저는, 그의 해석의 힘과 명쾌함 덕에 제가 강의들의 모든 전개를 기억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었습니다.

 

위대한 가르침의 이러한 실천에 저는 더욱 일반적인 교훈을 관련시키고 싶습니다. 세계적으로 상당한 미디어적인 인물이 된 데리다는 대학에서 작업하길 결코 멈추지 않았고 철학적 활동의 근본적인 장소를 대학 안에서 보길 멈추지 않았습니다(비록 대학은 그를 단지 초라하게만 인정해 주었을 뿐이며 자기 나라의 대학은 그나마 인색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1979년 철학의회 혹은 1983년 국제철학학교의 창설 같은 이니셔티브를 통해 그는 대학이 자신의 위계제적인 굴레와 분과들 사이의 배타주의와 민족주의(이는, 프랑스에서처럼, 스스로 “보편적” 가치들을 담지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 민족주의이기 때문에 더더욱 [대학을] 불모로 만드는 민족주의입니다)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시도했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대학이 그가 1998년 스탠포드 컨퍼런스에서 조건 없는 대학이라고 부른 것이라는 점은 사실입니다. 권력의 경계선들과 통제들을 넘어 인간의 모든 노동들을 다시 사고하고 기계화와 세계화의 시대에 가능한 것을 (그리고 심지어 불가능한 것을) 발언하는 과제를 떠맡는 대학 말입니다.

저는 사람들이 이후 “해체”라고 부를 이 새로운 방법론에 관한 세 가지 선언인 <목소리와 현상>, <기록학에 관하여>, <기록과 차이>의 1967년 출판 및 이들의 철학과 문학 사이에서의 미묘한 교차들을 기억합니다. 저는 [그가 행한] 루소의 독해에 관한 레비-스트로스와의 논쟁, 데카르트에 관한 푸코와의 논쟁 같은 대논쟁들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이를 오늘 다시 그만큼의 철학적 구조주의의 근본적인 논쟁이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거기서 철학적 구조주의는 형이상학과 자신의 구별을 행하고, 따라서 이미 자신을 “후기-구조주의”로 전화시킬 잠재성, 즉 자신을 구조라는 관념(특히 구조가 “총체성”들을 표상한다는 주장/오만)의 내적인 비판으로 전화시킬 잠재성을 유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은 휴머니즘의 관점이나 주체의 자유라는 관점에서 행해지지 않고 인간에 관한(따라서 “인간의 목적들”과 권리들에 관한) 우리의 관념을 복잡하게 만들고 그것의 양가성(의식과 무의식, 육체와 정신,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과 중성적인 것))을 강조하는 차이들이라는 관점에서 행해집니다. 왜냐하면, 차이들은 모두 이원론적 대립들로 환원할 수 없는 초과를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의미의 이 같은 초과(데리다가 “기원적 보충-대체”라고 부르는)는 해석의 재개와 증식 뿐 아니라 동일성의 기계주의의 폭력과 세계 전유의 전술들로 향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데리다의 성숙기의 위대한 테마들, 특히 계산 불가능한 “도래할 것”으로서의 사건이라는 인식의 맹아를 봅니다—이 사건이라는 인식 안에서는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책임성이 극단화되는데, 이는 우리가 우리의 행위와 발언의 결과들을 “수행적으로” 지배/제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행위와 발언이 무한히 권리와 정의라는 문제의 재활성화 및 재정식화를 초래할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우리가, 참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소속이 없는 지성인들로서, 그가 “새로운 국제주의”라고 불렀던 것의 출현에 기여하고자 시도했던 그 모든 상황들(얀 후스 연대의 한복판에서의 체코슬로바키아의 “반역적” 지성인들에 대한 원조에서 시작해서, “외국인들”에 대한 공안정치와 낙인에 반대하여 유럽에서 피신권을 방어한 일을 지나, 그리고 팔레스타인 인민의 권리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에서 적대자들의 화해를 위한 입장을 표명한 일에 이르기까지, 확실히 저는 이에 관해선 대충 지나가고 있습니다)을 기억합니다. 우리가 항상 분석과 역사적 참조에 있어 전적으로 동의했던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여기 또 다른 많은 분들과 함께, 종종 데리다의 주도로, 우리는, 대중의 폭력을 야기하고 그것을 되받아 배양하는 국가와 시장 주권들의 지배력에 대한 다형적이고 다극적인 저항을 구성함에 있어 지성인들과 예술가들이 고유한 역할을 갖는다는 확신을 공유했던 것입니다. 이는 자신들의 담론들의 해체와, 그리고 자신들의 적들/경쟁자들 사이의 건설적인 대화를 통과합니다(데리다는 얼마전에 테러리즘과 “불량배 국가들”에 대한 항구적 전쟁을 선동하는 기계를 분해하기 위해 자신의 오래된 “적”인 하버마스와 힘을 합침으로써, 여기에 실례를 제공했습니다)

대학의 도래 혹은 “도래할” 철학, 지성인들의 책임, 지구적 교통의 세계 안에서 그들의 자리의 문제인 이 모든 것은 데리다의 기여 없이는 반성하기 한층 어려운 것입니다만, 이 모든 것은 그의 모범과 글 안에서 사유의 원천들을 구하길 그리 빨리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잘 가요 자끄. 아니 차라리, 곧 만납시다.

 

À bientôt, Jacques Derrida

par Étienne Balibar
philosphe.

Quelques heures après la disparition de Jacques Derrida, je ne veux pas tenter de caractériser son oeuvre en quelques mots. Je veux encore moins l’enfermer dans une étiquette. Seulement me remémorer quelques moments d’une vie et d’une pensée que j’ai eu la chance de rencontrer comme élève, collègue et ami.

Je me souviens de son arrivée à l’École normale supérieure, où nous préparions l’agrégation. Précédé de sa réputation de « meilleur phénoménologue de France », Derrida était surtout, pour nous, l’auteur d’un essai éblouissant sur l’origine de la géométrie de Husserl, dans lequel la question de l’historicité de la vérité était arrachée aux débats entre le sociologisme et le psychologisme. Il y allait d’emblée au plus difficile : la question des conditions de possibilité de la démonstration, en la faisant passer d’un problème de garantie formelle à un problème de reproduction dans le temps, anticipant sa grande thématique de la « trace », ou de la connexion entre l’activité de la pensée et la matérialité de l’écriture. Ses cours étaient - éloquents, mais surtout rigoureux dans l’établissement des concepts et la lecture des textes (comme ils le resteront toujours, il suffit de lire Politiques de l’amitié). Je découvris des années plus tard que j’en avais mémorisé des développements entiers grâce à la clarté et à la force de ses interprétations.

À cette pratique de grand enseignant, je veux rattacher une leçon plus générale. Derrida qui, dans le monde entier, est devenu une figure très médiatique, n’a jamais cessé de travailler dans l’université et d’y voir le lieu fondamental de l’activité philosophique (même si, dans son pays du moins, elle ne lui a concédé que chichement la reconnaissance). Par des initiatives telles que les états généraux de la philosophie de 1979, ou la création du Collège international de philosophie en 1983, il a tenté de l’aider à sortir de son carcan hiérarchique, de son exclusivisme disciplinaire et de son nationalisme (d’autant plus stérilisant lorsque, comme en France, il se croit assuré de porter les valeurs « universelles »). Il est vrai que l’université dont il s’agit là est ce que, dans une conférence à Stanford de 1998, il appelle une université sans condition, s’assignant par-delà les frontières et les contrôles du pouvoir, la tâche de repenser tous les travaux humains et d’énoncer le possible (et même l’impossible) à l’époque de la mécanisation et de la mondialisation.

Je me souviens de la publication en 1967 des trois manifestes de cette nouvelle méthode qu’on appellerait plus tard la « déconstruction » : la Voix et le Phénomène, De la grammatologie, l’Écriture et la Différence, et de leurs subtils croisements entre philosophie et littérature. Je me souviens des grandes controverses avec Lévi-Strauss sur la lecture de Rousseau, avec Foucault sur celle de Descartes, qu’on peut relire aujourd’hui comme autant de « querelles » fondatrices du structuralisme philosophique, où se joue sa démarcation avec la métaphysique et, déjà, la virtualité de sa transformation en un « post-structuralisme ». C’est-à-dire en une critique interne de l’idée de structure (en particulier de sa prétention à représenter des « totalités »). Cette critique, toutefois, ne se fait pas du point de vue de l’humanisme ou de la liberté du sujet, mais du point de vue des différences qui compliquent notre idée de l’homme (donc des « fins de l’homme » et de ses droits), et en soulignent l’ambivalence : la conscience et l’inconscient, le corps et la lettre, le masculin et le féminin (et le neutre). Car, elles comportent toutes un excédent irréductible aux oppositions binaires, formelles. Un tel excédent de sens (qu’il appelle le « supplément d’origine ») ouvre aussi bien à la violence des mécanismes identitaires et des stratégies d’appropriation du monde qu’au recommencement et à la multiplication des interprétations. On trouvera là le germe des grands thèmes de sa maturité, en particulier sa conception de l’événement comme un « à venir » incalculable, dans lequel la responsabilité individuelle ou collective est portée à l’extrême, non parce que nous serions capables de maîtriser « performativement » les conséquences de nos actes et de nos paroles, mais parce que nous savons déjà qu’ils entraîneront à l’infini la relance et la reformulation du problème du droit et de la justice.

Enfin je me souviens de toutes les circonstances dans lesquelles - depuis le secours aux intellectuels « dissidents » de Tchécoslovaquie au sein de l’association Jan Hus jusqu’aux prises de position pour les droits du peuple palestinien et la réconciliation entre les adversaires dans le conflit israélo-palestinien, en passant par la défense du droit d’asile en Europe contre les politiques sécuritaires et la stigmatisation des « étrangers », j’en passe évidemment - nous avons tenté de contribuer, en tant qu’intellectuels sans attaches sinon sans engagements, à l’émergence de ce qu’il a appelé un « nouvel internationalisme ». Non pas que nous ayons toujours été entièrement d’accord dans nos analyses et dans nos références historiques. Mais, là encore avec beaucoup d’autres, et souvent à son initiative, nous avons partagé la conviction que les intellectuels et les artistes ont un rôle propre à jouer dans la constitution d’une résistance multiforme et multipolaire à l’emprise des souverainetés d’État ou de marché qui engendrent la violence de masse et s’en nourrissent en retour. Ce qui passe par la déconstruction de leurs discours et par le dialogue constructif entre leurs adversaires (comme il venait d’en donner l’exemple en joignant ses forces avec celles de son vieil « ennemi » Habermas pour démonter la machine de propagande de la guerre sans fin contre le terrorisme et les « États voyous »).

Tout cela, qu’il s’agisse de l’avenir de l’université ou de la philosophie de l’« à venir », de la responsabilité des intellectuels et de leur place dans le monde des communications globales, est plus difficile à réfléchir sans sa contribution, mais ne cessera pas de sitôt de chercher des ressources de pensée dans son exemple et ses écrits. Adieu, cher Jacques, ou plutôt à de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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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림길에 서다.

이박 삼일의 일정으로 부산에 다녀왔다. 국감 이랑 김주익 열사 일주기 취재를 하고 왔다. 꼽사리로 미 대선 토론 기사도 한 건 쓰고...간만에 아니 추석지난지 얼마 안 됐지만 부산 집에서 지내다 왔는데 집에선 저녁 한끼 아침 한끼 밖에 못 먹었다.  꼭 밥을 먹어야 맛은 아니지만 집에 가서도 너무 바쁜 척 한게 아닌가 싶어서 엄마, 아버지한테도 좀 미안하다.

 

남들 보기엔 모자람이 많을지 몰라도 요즘 내 머릿속은 온통 일로 가득 차 있다. 돌이켜보면 나 자신을 위해 투여하는 시간도 거의 없다. (뭐 당신들도 마찬가지라고?) 그런데도 항상 부족함을 느낀다.  어디 가면 좀 더 파보고 싶고 이런 사람도 만나고 싶고 머릿 속에 떠오르는 기획들이나 다른 뉴스 볼 때 잡히는 실마리들을 풀어보고 싶고...

 

타 매체에서 내가 잡기만 하고 못 건드린 꺼리들을 가지고 쌈박하게 뽑아내는 걸 보면 '에이 씨 내가 했으면 더 잘 할 수 있을건데' 하는 생각이 들기 일쑤다. 내가 실제로 더 잘 할 수 있는지는 별개로. 아 모르갔다. 정신 없이 뛰다가 문득 멈춰서면 답답하기 그지 없다. 가끔은 옆 사람들한테 짜증도 나고 그런다. 틱틱 거리고 싶기도 하고 '나 요즘 너무 착한 척 하는거 아닌가 하고 싶은 말 참고 사는건 아닌가?' 하는 되도 안하는 잡상들이 스멀거리기도 한다.

 

스스로를 좀 더 몰아 붙일 것인지 너무 빵빵해져 터질 것 같은 타이어의 바람을 약간 빼줄것인지 결정할 시간이 왔다. 지금까지는 그냥 아예 타이어 터뜨려 버리고 뒷자리 옆자리에 탄 사람들이야 어쩌던 말던 나 혼자 내려버린적이 수두룩했지만 이젠 그럴 순 없고...근데 여기서 바람 약간 빼버리면 좋은게 좋지, 딴 매체야 어떻게 하든 우리는 우리 형편에 맞춰 우리 페이스로 가면 되지 하면서 주저앉아 버리게 될것이 뻔하다. 역시 도스께끼? 도스께끼의 결과는 옥쇄? 헉!

 

운동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일중독자로 불리는 한 선배가 문득 떠오른다. 도대체 저 양반은 업무가 그렇게 좋아서 저러고 있는걸까 아니면 다른 할 일이 없어서 회사일에만 매달리는 걸까 궁금했었는데 이제 내가 그 짝 나는게 아닌가 싶다ㅠㅠ

 

막상 주말에 뭔가 딴 걸 해야겠다 (놀러간다던가 영화를 본다던가) 싶은데 마땅한 것도 안 잡히고 같이 할 이도 없다. 돌아보니 술친구 할만한 사람들만 보인다.  정말 무서운 현실이다...글 쓸 것 두 꼭지 있는데 있는데 그냥 그거나 쓰고 다음 주 기획이나 해야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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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하다!

재경위 국감 보도자료에서...

 

'작년 한 해 우리 국민은 29억병의 소주를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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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사다난 했던 목요일 환노위 국감

 목요일 환노위 국정감사는 정말 다사다난했다. 그리고 온라인 매체 기자로서 간만에 뿌듯함을 느끼기도 했다. 그 뿌듯함에 대해 먼저 이야기 해보자면...

 

요즘 열우-한나라 간의 되지도 않은 이념 논쟁이 국감의 이슈아닌 이슈인지라 환노위 국감 그 중에서도 서울지방노동청 국감에 취재 나온 '메이저' 기자들은 하나도 없었다. 국감장 앞에서 장기투쟁 사업장 노동자들이 집회도 했었지만 이건 뭐 온라인 기자들도 별 관심이 없었던 터라 나 혼자 취재 했었고--;;

 

하여튼 환노위 국감장에서 대형 사고가 터졌다. 본인의 기사를 참조하시라^^  '박순석 회장, 월급 타묵고 회사 일 안하니까 문제다' http://media.jinbo.net/news/view.php?board=news&id=31133

 

연합뉴스 조차도 그 다음 날 뒷북 기사를 날렸고 여러 메이저 언론사들이 그 뒤를 따랐다. 허나 미디어 참세상을 비롯한 프로메테우스 , 매일 노동뉴스가 이미 그 소식을 전했던게지..이 세군데만 전하는 소식이 한두가지가 아니자만--;; 이 세군데에서 먼저 터뜨린 뉴스들을 보수 언론사들이 동시 다발적으로 받아 안는 경우는 참 드문데 이번이 그 드문 경우 중의 하나인게다.

 

좀 아쉬운 것은 박순석 회장의 '국회가 깡패집단' 이냐가 일반적 휘발성이 더 강할 것은 짐작했지만 그래도 환노위 국감이고 장기투쟁 사업장에 대한 기사 인지라 난 박회장의 노조에 대한 발언을 미다시로 뽑았는데 역시나 다를까 딴 데는 전부 '깡패'를 미다시로 뽑았다는 점.

 

하여튼 이 날 있었던 이야깃 거리는 한두가지가 아니다. 이런건 술 먹으면서 추임새를 곁들여 이야기 해줘야 재밌는건데^^

 

먼저 단병호 의원 질의 직전에 정전이 된 것. 지각한 주제에 한나라당 모의원은 국회 탄압이냐는 신소리를 웃으면서 해댔으나 별 호응이 없었다--;; 단병호 의원 질의 와중에 박순석 회장이 빡내며 핏대 올리고 '깡패' '노가다 십장' 운운 한 것은 이미 쫙 기사화가 됐고...근데 박순석 이 사람은 정말 너무 하더라. 일반적으로 재벌 정도 되면 속내야 어떻든 간에 매너나 가오는 어느정도 갖추기 마련인데...역시 전사가 있어서 그런가? '국감 깜짝 스타 박순석 회장은 누구? ' http://media.jinbo.net/news/view.php?board=news&id=31134

 

그 날 박순석은 완전히 제 무덤 자기가 팠었다. 그냥 입 다물고 있으면 될 텐데 계속 헛소리 하다가 열우당은 물론이고 한나라당 의원들 한테도 딱아 세움을 당했다. (가장 압권이었던 한나라당 배일도 의원의 발언- 그런 식으로 노조를 인정치 않은면 본의원은 몰론이고 우리 한나라당이 묵과하지 않을 것이요.ㅋㅋㅋ 배일도 아자씨는 어떻게 인상 하나 안변하고 그런 말 하는지 몰라^^)

 

이 날 날씨는 더운데다가 배는 고프지요. 기자 휴게실에 놓아둔 모나카, 에이스 크래커 이런거 내가 우적우적 다 먹었다--;; 비타 오백 이런것도 몇개나 마시고...^^ 남들은 먹는둥 마는둥 하는데 사흘 굶은 넘 처럼 굴다보니 나중엔 좀 쪽팔릴라 그랬는데 그래도 그냥 계속 먹었다. 노동부 직원한테 모나카 더 없냐고 묻기 까지 했다....글구 프로메테우스 최모 기자가 현장 기사를 열라게 자기네 사무실로 노트북 컴퓨터로 전송하는걸 보고선 얼마나 질투가 나고 내 노트북--이 어찌나 미워 보이던지. 기자실에 있는 랜선을 다 잘라버리고 싶을 정도였다ㅠㅠ

 

아 참 증인 휴게실에 가서 박순석 회장 인상 찌그리고 있던거 사진 찍다가 보디가드 넘이랑 시비 붙기도 했다. '여기서 내가 한 대라도 맞으면 대 특종이 되노라'는 불타는 기자정신으로--;; 계속 나도 티껍게 나갔지만 그 넘이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하는 표정으로 피해버려서 충돌은 싱겁게 끝났다.

 

그리고 인터뷰 덕택인지 이목희, 배일도 의원은 반갑게 아는 척을 하더라. 그 양반들이 먼저 인사 하는거 답례하면서 영 뻘줌했다. 나이든 사람을 만나면 먼저 반갑게 인사하라시던 어린시절 할머니 가르치힘이 생각나기도 하고.... 게다가 정책과는 별개로 싹싹하고 성격 좋은 탓에 꼭 누나 같은 느낌이 드는 배일도 의원실 모 보좌관이 'Peyo기자님 오전 노동위에는 안 나오셨었죠. 여기 보도 자료 있어요' 하면서 주길래 하나도 안 고맙고 관심도 없었지만 '아 예 고맙습니다. 수고 많으시죠' 하고 받았다가  잠시 후 그 보도자료는 버렸다. 근데 그걸 그 보좌관한테 들키고 말았던 것이다--;; 아햏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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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에 대한 몇 가지 이야기

" 근데 이건 그렇게 힘든 작업은 아니지만 극도의 성실성이 필요한 작업이임엔 분명하다. 고로 매일 매일 블로그에 업데이트 시킬 수 없다는건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얼마나 오래 갈지, 얼마나 자주 뺴먹을진 모르겠지만...하여튼 오늘 이 작업을 시작해본다." 라며 이 디릭토리를 8월 22일에 시작했었다.

 

아일랜드 독립운동가 마이클 콜린스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서 그와 정말 대조적인 삶은 산 프란시스 프랑코에 대해 쓴 10월 1일 이후로 일주일 째 못쓰고 있다.

 

41일 동안 지속한 것에 대해 내 자신을 칭찬 해줘야 할까 아니면 비웃어 줘야 할런지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 현재는 이 디렉토리를 지속할 만할 정신적 여유가 내게는 없다는 것이다. 신나서 쓸 땐 한 사십분 정도 그냥 재미없이 때우는 기분으로 쓸땐 이십분 소요되는 이 디렉토리를 매일 채워낼 시간이 없다고 말하면 뻥일게다.

 

어쩌면 '오늘은'을 안 쓰는 대신 다른 디렉토리에 더 많은 갯수의 글을 더 많은 분량으로 올릴지도 모른다.

 

아마 문제는 이런게 아닐까 싶다. '오늘은' 을 쓰기 위해선 프로세스가 필요하다. 뉴스에 대한 검색-> 그 중에 하나를 취사 선택-> 맥락을 잡음 -> 아는데로 쓰다가 관계된 팩트들을 검색해서 확인-> 글 작성

즉 '기획'이라는게 필요한 작업이란거다. 노력은 덜 들긴 하지만 기사 쓰는거랑 거의 비슷한 경로를 통해서 작성된다는거지... 사실 여기 정신 쏟느지 기사 똑 바로 쓰는게 낫지 않겠냐는 생각도 들기도 하고 이 정도 각오 못했었냐는 생각도 들고...아 뭐가 뭔지 모르겠다.

 

그 동안은 컴퓨터가 안 되니까..하고 스스로에게 핑계를 댓었는데 이젠 핑곗거리도 없고 솔직해 져야 하지 싶다.

 

결론적으로 당분간(언제까지가 될 지 모른다) 이 디렉토리는 중단하던지 아니면 부정기 적으로(주 2회 정도?) 진행하던지 해야 할 것 같다. 뭐가 맞는건지 모르겠다. 고견들 있으면 들려들 주시라.

 

블로그에 글을 쓰면서 오늘같이 스스로가 부끄럽게 느껴진 적이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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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흥 ..계속 힘든 일상들..

 피곤하다. 지친다. 뭐 쓰러지면 바로 잠든다는 좋은 점이 있긴 하다.

취재 뒷다마도 써야 하는데..오늘 취재에 대해 할 말 많은데...기사 먼저 쓰고 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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