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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과 우리 집 가사분담

내일 지나 모레면 서울에 다시 올라가게 될테니 이번 귀향 일정도 반이 넘어서고 있다. 그 동안 못된 아들로 지낸 인생인지라 집에만 오면 분위기 싸해지기 십상이었는데 이번 추석은 지금까진 분위기 좋다^^ (설마 나만의 착각은 아니겠지) 어제 새벽에 친구들이랑 술 먹고 들어오다가 엄마한테 택시비 들고 아파트 입구로 나오라고 전화한 것 빼곤 --;; 우리 엄마 아부지야 내 기사들 꼼꼼히 다 읽고 모니터링까지 해 줄 뿐더러 내 블로그의 '오늘은' 밀리면 그것 걱정도 해줄 정도의 정치적 의식을 지닌 분들 아닌가^^ 이런 걸 보면 난 참 복받은 넘이다 :)

 

추석이면 여기저기서 가사노동의 괴로움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지만 우리집은 좀 다르다. 사실 우린 제사도 안지내는데다가 할머니 돌아가신 이후엔 추석이건 설이건 거의 음식도 안 한다. 여기저기서 얻어오는 것만해도 냉장실이 그득한 나머지 냉동실까지 채우고 서울 오는 내 손에도 가볍지 않은 보따리가 들릴 정도다. 그래도 물론  일거리는 꽤 있다. 말 안듣는 아들 거둬 먹일일이나 할아부지 할머니 묘소 돌볼일, 고모네 방문할 일. 물론 엄마도 청춘 시절(내가 초등학교 다닐적 정도까지?)에는 명절이면 집안일에 허덕거렸었지만...

 

언제 부턴지 모르겠지만 (아마 제대 직후부터가 아닌가 싶다) 부산 집에 오면 음식이나 각종 집안 일들도 꽤 하는 편이다. (집안일 맨날 하는 엄마, 그리고 엄마 학교 다닐때면 청소를 도맡아 하고 반찬은 아니더라도 밥 앉히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게 생각하는 아부지만 하겠냐만.. 이런면을 보면 우리집 가사분담은 어디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다. 정말 자랑스럽다!! ) 그닥 어렵지 않은 별식을 만든다던가(이번엔 갈비 양념에 재워서 구웠다, 난 음식할때 고무장갑이나 비닐 장갑 끼는거 싫어하는 편인데 갈비 재우고 나니 한동안 손에서 다진 마늘과 간장 참기름 물엿이 섞인 오묘한 맛있는 냄새가 오래 가더라 배고프면 손가락 씹어 먹고 싶을 정도로...) 엄마, 아부지, 동생 옷들 다림질 한다던가 등등

 

첫 째 내가 이런 일들을 별로 안 힘들어 하고 둘 째 일년에 몇번이라고 이럴 때 아니면 내가 언제 식구들 일 돕겠나 싶어서 즐겁게 하려고 애 쓰는 편인데...이런 일 하는 것보다 다른 집 아들처럼 두툼한 돈 봉투 안겨드려야 하는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근데 어쩌랴~ 앞으로도 그게 쉽진 않을 것 같으니...--;;

 

엄마, 아버지 미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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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당의원 양대노총 위원장 연쇄 인터뷰

정말 오랜만에 이 디렉토리에 글 써보네^^

 

열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어디있겠으며 자식은 다 똑같은 자식일진데 블로그에서 너무 편애를 하지 않았나 싶어 마음이 아프다--;;

 

사실상 아무꺼나나 취재뒷다마 혹은 라 마시께따에다가 재밌고 맘 편하게 글 쓸려고 만든건데 이건 '오늘은' 때문에 너무 허덕거리니 나 원 참, 참 나 원, 혹은 원 나 참.

 

하여튼 골때리는 열린우리당 인권위원장 이후로 여기다간 처음인데..그 후에 무슨 기사들을 썼더라? 이경해 열사 일주기 집회 스케치 기사 썼고...연속 인터뷰 했고 뭐 그 정도지 싶다. 이경해 열사 일주기 때는 너무 힘들었다. 비가 많이 오는데다가 사진 찍으러 앞뒤로 뛰어다니느라 그 비 흠뻑 맞았고..그나마 인도네시아 출신 비아 깜뻬시냐 여성 활동가랑 인터뷰 한게 기억에 남네...

 

그 집회  끝나고 며칠 후 노동부에서 대형사고 하나 터뜨렸다. 파견법, 기간제법 개악안 발표~ 두둥

 

그 발표 이후에 연속 인터뷰 기획안을 잡았다. 사실 그 때는 4인 연속 인터뷰였는데 단병호 의원이 한노총 이용득 위원장도 꼭 하라고 권유해서(초기 단계에 이용득 위원장도 포함시킬까 했다가 약 10초간 고민한 후 접었었는데--;;) 5인 연속 인터뷰로 바뀌었다.

 

시간도 촉박한데다가 일이십분 인터뷰 하는 것도 아닌지라 스케쥴 잡는게 가능할까 싶었는데 약간의 뻥을 적절히 활용한 덕에 하여튼 열우 이목희, 한나라 배일도, 민주노동 단병호, 민노총 이수호, 한노총 이용득이라는 라인업으로 연속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인터뷰 진행할 때는 그냥 정신없이 했는데 돌이켜 보니 너무 빡셌다ㅠㅠ 스케줄 잡기,인터뷰이의 최근 발언들과 행적 체크하며 질문지 작성하기, 한자락 혹은 두자락씩 깔고 인터뷰 하기(비위 맞추기와 살살 약올리기를 병행하는 괴로움이란...), 돌아와서 테잎 확인 하며 빠진 부분 메우기, 초벌 원고 가지고 말 안되는 부분 고치며 원고 정리하기...흑흑 이걸 하루에 나 혼자 다 한다는건 참 힘들더라.

 

다음에는 여유를 가지고 해야겠다는 생각이 골백번도 더 들었다.

 

참 이 다섯명 가운데 정식 공문을 보내 인터뷰 요청 하라고 한 측은 두군데다. 이목희 의원실이랑 민노총 교선실--;;

 

배일도 아자씨 인터뷰 할때는 그와 나 사이의 과거의 끈끈한 인연을 상기시켜 줄까 하다가 말았는데^^(그 인연을 공유하고 있는 모 기자는 한나라당사에서 배일도 의원 만났을때 그 기억을 상기시켜줬다더라, 엄청 반가와 했다나 머라나ㅋㅋ) 인터뷰 끝나고 나니까 자신의 명저(?) '공존의 꿈'을 선물로 주더라.

 

연쇄 인터뷰 동안 나름대로 특종도 몇가지 있었다. 이목희 의원이 이 법안의 문제점들에 대해 최초로 공식적으로 인정을 했으며 민노총 각급 조직의 투쟁체 전환이나 구체적 로드맵이 공개된것도 이 인터뷰가 최초다. 게다가 한국노총으 정확한 입장도 우리가 최초로 밝혔고...

 

근데 아무 반향도 일으키지 못했다--;; 이 인터뷰 받아서 기사 쓰는 넘들 하나도 없더라ㅠㅠ 남들 보라고 기사 쓰는건 아니지만(아니지 남들 보라고 쓰는거 맞지 나 혼자 볼려면 왜 쓰나?) 이럴 땐 참 맥 빠진다.

 

첨언: 보자마자 나한테 턱하니 말 놓은 사람은 단병호 의원이 유일하다. 근데 기분이 하나도 안 나쁘더라. 딴 사람들 인터뷰할 땐 잔머리 굴리면서 바둑두는 기분으로 포석 깔면서 질문했는데 단의원 인터뷰 할 땐 그냥 궁금한 거 솔직하게 묻고 답변 들었다. 제일 편한 인터뷰 아니었나 싶다.  이수호 위원장 인터뷰할땐 좀 공세적으로 나가볼까도 싶었는데 그 양반 얼굴도 말이 아닌데다가 나름의 고충을 듣곤 마음이 약해졌더랬다. 이용득 위원장은 젤 화끈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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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오늘(9.25) 조선의용대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 영면

2001년 9월 25일 항일투사이자 혁명가인면서 또한 소설가인 김학철이 85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20세기 한반도에서 태어난 인물 가운데. 그리고 요절하지 않고 천수를 누린 인물가운데 김학철(본명 홍성걸) 보다 더 당당한 삶을 살아낸 사람을 찾기는 흔치 않을 것이다. 김학철의 평생 이력을 간략하게 짚어보겠다.

 

원산에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남-보성고보 재학중 중국으로 망명- 약산 김원봉의 휘하로 상해에서 의열단 활동-중국공산당 가입-황포 군관학교 입학- 황포군관학교 졸업후 국민당군 장교- 팔로군 조선의용대 군관 활동- 태항산 전투에 분대장으로 참가 부상 입고 일본군에 포로로 잡힘- 나가사키 형무소 투옥, 다리 절단- 해방과 더불어 출옥, 소설가로 생활 시작- 조선정판사 사건 이후 월북- 연변 조선족 자치주 정착- 인민공사, 대약진 운동 비판하는 소설 출간으로 투옥- 문화혁명기에 다시 십년간 투옥, 당적 박탈- 모택동 사망 이후 당권회복

 

정률성과 정설송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http://blog.jinbo.net/Profintern/?cid=1&pid=16) 김학철을 약간 언급한 적 이 있었다. 그 때 꼭 독립적으로 다시 다루겠다고 약속했는데 오늘 기회가 왔다.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의 책을 하나라도 꼭 읽기를 권하고 싶다. 한 권만 권해준자면 (최후의 분대장, 문학과 지성사 간)

 

김학철은 무슨 뛰어난 혁명이론을 내어놓은 사람도 아니고 조직 활동에서 거대한 성과를 거둔 사람도 아니다. 그러나 평생을 인민과 역사 그리고 자신 앞에 당당하게 살아간 사람임에는 분명하다. 해방 이후 한 때  혁명 영웅 칭호를 받았건만 역시 항일, 중국공산당 동지 출신으로 이북의 최초 공군참모총장이던 매제는 김일성의 연안파 숙청 당시 처형 당하고 여동생 역시 노동수용소 생활... 그 자신은 띵링의 사사를 받을 정도고 중국 건국 주역들과 허물없는 사이였을 정도지만 마오의 극좌적 노선과 일인지배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이차에 걸쳐 투옥당하고 인민재판을 받았다. 그 재판을 회고하는 글을 읽어보면 눈물이 날 정도다. 인민학습당을 가득 채운 수천명의 군중 앞에서 친일분자, 우익분자로 비판받으면서 맑스, 레닌주의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당당하게 토해내며 개인숭배를 비판하는 다리 하나 없는 노혁명가의 모습을 보고 누구의 눈과 가슴이  뜨거워지지 않을 수 있으랴?

 

남긴 글을 보면 이 노혁명가 조차도 가슴 아린 적이 한 번 있었다고 한다. 반당분자로 몰리고 당적을 박탈당했을 때 인민학교를 다니던 외아들이 학교에 갔다가 소년단의 상징인 스카프를 뺐기고 울면서 돌아왔다고 한다. 반동의 자식은 소년단에 가입할 자격이 없다고 ㅠㅠ

 

김학철은 곧은 필봉으로 석정 윤세주, 정률성, 호일화(이상조), 김학무를 비롯한 조선의용대를 우리의 역사로 남겨주었다. 그렇다고 김학철의 글들의 재미없고 딱딱한건 절대 아니다. 시인 고은은 김학철을 "벽초 홍명희 이래로 우리 민족어를 진정으로 계승했으며 가장 신명나는 문학을 이루었다고" 평가한다.

 

그런데 재밌는 사실 한가지를 언급하자면 김학철이 우리에게 소개되는데 가장 공헌을 한 것은 '노태우 정권'이다 --;; 1989년 1회 세계한민족 체육대회에 공식 초청 받음으로 43년 만에 서울 땅을 밟았다. 아마 그 당시의 북방정책등과 관련이 있는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김학철은 94년  KBS 해외동포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이런거 보면 노태우나 김영삼 같은 대통령들도 가끔 미친척 하고 기특한 짓을 하긴 했다)

 

내 한 때 김학철을 너무나 존경(혹은 흠모)한 나머지 나도 저렇게 살았으면 한 적이 있었는데 포기했다--;; 그 이유가 뭐냐면 어릴 때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나서 김학철의 어머니께서 '너는 아버지도 없으니 술 담배 하면 후레자식이라고 욕먹는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김학철은 ' 내가 항일운동, 탄압받는 작가 생활을 해서 불효를 할 지언정 어머니의 저 말은 지켜야 겠다'고 생각해서 죽을 때 까지 술, 담배를 입에도 대지 않았단다. 심지어 항일 무장 투쟁기간에도--;;


사나운 비바람이 치는 길가에
다 못가고 쓰러진 너의 뜻을
이어서 이룰 것을 맹세하노니
진리의 그늘 밑에 길이길이 잠들어라
불멸의 영령

-김학철 작사 류신 작곡 조선의용대 추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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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오늘(9.24) 에드워드 사이드 영면

2001년 9월 24일 팔레스타인 출신 비교문학자 에드워드 사이드가 백혈병으로 투병 끝에 6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영국의 식민지이던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났다. 이스라엘 건국을 위해 유태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집중 이주, 팔레스타인 인들과 갈등을 일으키던 1947년 가족들과 함께 이집트 카이로로 이주했다. 상류층이었던 부모 덕택에 십대후반에 미국으로 이주 프린스턴 대학과 하버드에서 공부했으며 그 이후 평생을 미국 시민권자로 살았다. 몇 년전에 출간된 에드워드 사이드의 자서전 제목은  Out of place 이다. 팔레스타인 출신으로 카이로에서 성장하면서 부유한 부모 덕택에 탈아랍식 정통 영국 식민 교육을 받은데다가 십대후반부터는 미국 동부에서 교육을 받은 사이드는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을 계기로 팔레스타인인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고 한다. 그 정체성이 바로 1978년 오리엔털리즘의 출간으로 연결된 것이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20세기 후반 문화, 정치, 사회 모든 분야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학자중에 한 명이다. 그의 책 '오리엔털리즘'과 그 개념은 너무나 큰 영향을 미쳤다. 오리엔털리즘자체에 대한 설명이나 언급은 다음 기회로 돌리겠다. 그러나 오리엔털리즘이 얼마나 대중화 된 개념이냐면 심지어" 올 가을의 패션트렌드는 과감한 오리엔털리즘 풍의 실버체인과 가죽 재킷의 미스매치 불라불라" 하는 식으로 여성지의 패션란에서도 언급될 정도다. 그리고 '오리엔털리즘' 한국어 번역판은 영남대 박홍규 교수의 성실한 작업에 힘입어 참으로 괜찮은 역서중의 하나다.오리엔털리즘의 출간 이후, 컬럼비아 대학 교수로서 에드워드 사이드는 학문으로서만이 아니라 항상 실천하는 지식인의 전형이었다. 하워드 진, 노암 촘스키와 더불어 미국의 삼대 양심(?)적 지식인으로 꼽힐 정도였으니..

 

참 지난 2000년 에드워드 사이드는 심각하다면 심각할 수 있는 정치적 스캔들을 일으키기도 했다. 단체 관광객의 일원으로 레바논-이스라엘 접경지역을 돌아보던 에드워드 사이드가 이스라엘 경비 초소에 돌팔매질을 했고 그 광경이 이스라엘 측 CCTV에 찍혔던 것이다. 당연히 이스라엘 측은 대대적으로 그 장면을 선전했고 팔레스타인 인들의 폭력성을 증명하는 행위라고 입에 게거품들을 물었다.

당시 사이드는 사진에 찍힌 사람이 자신임을 인정했으며 '레바논 접경 지역에서 이스라엘 군의 점령이 끝난 것을 기뻐한 나머지 환희의 제츠처로서 투석을 했다'며 또한 '철책선에 도착하기전 과거 점령지에서 발생한 인권유린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보았다. 지난 35년간 정의와 평화에 반해 행해졌던 만행이 자신이 던진 돌의 무게에 비해 너무 무겁다'며 기회가 생기면 또 돌을 던지겠노라고--;; 당당히 밝혔다.

당시 미 주류 유태계에서는 난리가 났고 컬럼비아 대학에도 압력이 갔다고 한다. 그러나 석좌교수 에드워드 사이드의 무게 또한 만만치 않았던 법 컬럼비아에서는 그 압력들에 대해 가비얍게 일축했다고 한다.

 

그리고 기회가 닿으면 '평행과 역설'이라는 책을 일독해보길 권한다. 에드워드 사이드와 대표적 유태계 음악인 다니엘 바렌보임의 대화를 묶어낸 책이다. 바렌보임은 나찌의 상징이자 이스라엘에서는 터부시 되었던 트리스탄과 이졸데(바그너 작)을 01년 이스라엘에서 최초로 연주해서 화제를 일으킨 적이 있는데 이 책에서도 역시 리하르트 바그너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갑론을박을 벌이는데 그 대화들이 너무나 아름답다. 물론 오슬로 협정(지난 9월 13일자 오늘은 -http://blog.jinbo.net/Profintern/?cid=2&pid=49 참고)을 두고선 날 선 대화들이 오고가기도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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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오늘(9.23) 장개석, 국공합작 및 중국공산당 합법화 선언

1937년 9월 23일 장개석이 2차 국공합작과 공산당 합법화를 선언했다. 2만 5천리 대장정을 겨우 마치고 연안에서 허덕이고 있던 중국공산당으로선 항일전선에 복무하고 또 세력을 확장시킬 수 있는 결정적 기회를 잡은 것이다.


그런데 장개석이 왜 갑자기 국공합작을 선언했을까? 중국공산당의 영웅적 투쟁에 감복해서? 아니면 항일의 대의 앞에 뭉쳐야 한다는 깨우침을 얻어서? 둘다 아니고 실은 장학량이라는 인물이 일으킨 서안사변 때문이다. 삼년전에 101세를 일기로 하와이에서 영면한 장학량은 봉천 군벌 장작림의 아들이다. 흔히들 은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는 표현을 쓰는데 장학량이야 말로 은수저와 은젓가락을 한꺼번에 물고 태어난 인물이다. 동북지역을 장악한 군벌 아들로 태어난 덕택에 아버지가 죽자마자 동북지역과 수십만의 대군을 한손에 넣을 수 있었다.


주색잡기와 아편으로 소일하던 장학량은 아버지가 죽고 나선 백팔십도 달라졌다고 한다. 일본 육참본부 대본영의 공작으로 만주철도에서 아버지가 폭사하자 장하량은 일본과 가까웠던 아버지와 달리 항일의지에 불타게 된다. 그래서 자기 휘하 병력과 영토를 그대로 국민당에 헌납하고 국민당군 동북 사령관의 자리에 취임했다. 그런데 장개석과 국민당 정부는 일본하고 싸우는데는 별 관심없고 현상유지 하는 수준에 그치며 십여년동안 공산당 때려잡는 일에만 열중하는게 아닌가? 열받은 장학량은 장개석을 서안으로 불러 잔치를 벌이다가 그냥 감금해버렸다. 공산당의 합법화와 국공합작을 안 받아 들이면 장개석도 죽이고 자기도 같이 죽을 것이며 받아들이면 그대로 풀어서 총통직과 총사령관직을 계속 맡도로 하겠다고 협박한 것이다^^ 결국 장개석은 장학량의 요구를 받아였다. 장개석도 그나마 대인의 풍모가 엿보이는 것이 서안을 빠져나온 후에도 자기 말을 뒤짚지 않고 그대로 실행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홍군(중국공산당군)은 국민당군 팔로군으로 재편된다. 팔로군 팔로군 말은 많이 들어봤겠지만 정확한 명칭은 국민당군 팔로군이다.( 전에 정률성 이야기를 하면서  http://blog.jinbo.net/Profintern/?cid=1&pid=15 팔로군 행진곡을 한 번 언급한적이 있다. 다시 찾아가보던지 아니면 기억해보라. )


하여튼 국공합작을 통해 중국인민은 항일전선에서 일치되어 싸우게 된다. 참 서안사변이 잠잠해진 후 장개석은 장학량을 재판에 회부하고 49년 대만으로 도망치면서 데려갔다.(죽이거나 육체적 폭력을 가한적이 없이 장학량을 데리고 갔다. 대만 데리고 가선 40년동안 가택연금을 시켰고...왜 그랬을까? 두고 두고 괴롭힐 심산이었을까?) 1990년대에 들면서 고령임을 감안해 대만 정부는 장학량이 자기 맘대로 살 수 있게 했고 장학량은 하와이로 이주해서 십년간 살다 죽었다.


혁명동지를 제외하곤 중화인민공화국 건설과 중국공산당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장학량이 죽었을 때 당시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은 다음과 같이 추모했다. “장선생의 서거 소식에 비통한 심정을 금치 못하겠으며 중국 공산당과 인민을 대표해 삼가 애도한다. 장 선생은 65년전 애국의 심정으로 서안사변을 일으켜 민족 존망의 위기에서 중국을 구했다.” 대만 총통 첸수이벤 조차도 “공과를 떠나 장선생은 중화민국(대만)의 자산이었다” 고 애도의 뜻을 전했다고 한다.


1949년 내전에서 장개석이 공산당에게 패배해 광활한 대륙을 뒤로한 채 배 타고 대만으로 도망칠 때 장학량을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혹시 전해지지는 않지만 귀싸대기라도 한 대 때린건 아닐까? 참으로 궁금하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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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오늘(9.22) 삼성 회장 이병철 (주)한비 국가에 헌납, 매스컴과 학원사업에서 은퇴선언

 

1966년 9월 22일 당시 삼성 회장 이병철은 (주)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하고 매스컴과 학원사업에서 은퇴할 것을 선언했다.


같은 날 국회에선 당시 국회의원 김두한이 ‘나는 야인이 될꼬야~’ 라며 파고다 공원에서 퍼온 똥물^^을 정일권 국무총리와 국회의원들에게 선사했다. 한국비료의 사카린 밀수 사건에 대한 대정부 질의 도중이었다. (주)한국비료가 건설자재로 위장하여 사카린(당시 사카린은 돈 덩어리였다고 한다.)을 밀수했고 그 와중에 중앙정보부와 정부가 연루되어 같이 돈을 챙겼을 뿐 아니라 당시로서는 최고급 사치품인 양변기--;; 같은 물건도 꼽싸리로 밀수 했다고 한다.

하여튼 이 사건으로 인해 삼성의 후계구도에도 변화가 생겼다. 이 사건 이후 이병철이 잠깐 전면에서 물러서고 이병철의 장자인 이맹희가 사업 전면에 나섰으나 너무 나대고 아버지를 무시했는지 몰라도 결국 팽 당해서(어 김두한도 야인인데...)으로서의 삶을 살기 시작한다. 현재 CJ그룹 회장 이재현이 바로 이맹희의 큰 아들이다. 결국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셋째 아들 이건희가 이병철의 후계자로 낙점되어 2세 수업을 받게 된 것이다. (둘째 아들은 이창희 인데..새한 그룹 창업주이다. 지금 새한은 거의 거덜나다 시피 했지만 한 때는 비디오 테잎 같은거 팔아서 돈 좀 벌었다.)


이병철이 손을 뗀 매스컴과 학원 사업은 도대체 뭘까? 일단 학원 사업, 이병철은 이 사건 이후 대구대학 이사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 대구대학은 지금 있는 대구대학하고는 좀 다르다. 당시 청구대학과 이병철이 물러난 이 대구대학이 합병되어 영남대학이 만들어졌다. 이 대구대학은 지금도 유명한 경주 최부잣집의(십대가 만석지기였다는 그 부잣집. 가훈으론 이런게 전해진다고 한다. 벼슬은 진사이상 하지마라, 백리 이내에 굶는 사람이 없게 하라, 흉년엔 절대 땅을 늘리지 마라 등등) 마지막 부자 최준이 해방직후 설립한 대학인데 최준이 재산을 설립에 다 쓸어넣은 바람에 유지하기가 힘들어 이병철에게 넘겼다고 한다. 그러다가 이런 과정을 거쳐 결국 벌써 청구대학을 꿀꺽한 박정희는 대구대학까지 합쳐서 영남대학을 만들어 한방에 집어 삼켰다.


그렇다면 매스컴 사업은? 공교롭게도 이 때로부터 딱 일년전인 1965년 9월 22일 중앙일보가 창간되었다. 중앙일보의 경영은 홍진기가 맡았고(홍진기는 이병철의 사돈이다. 이건희의 장인이며 현 중앙일보 회장 홍석현의 아버지다. 홍진기는 일제때 판사를 지냈다. 그 때 얻은 딸이 이건희의 부인 홍라희다. 해방 이후에도 당연히 승승장구하여 자유당 말기에는 법무부 장관을 지냈다. 당시 내무부장관 최인기는 315 부정선거와 419당시 학살의 책임을 지고 사형당했으나 홍진기는 아주 짧은 옥살이를 끝내고 이병철에게 픽업된다. 친일하면 삼대가 잘 산다라는걸 온 몸으로 증명하는 집안이다. 홍석현의 동생 홍석조는 지금 검사장을 지내고 있다.) 중앙일보 뿐 아니라 나중에 ‘전 두환이라고 해요, 두발이 없다는 뜻이죠, 환장하겠어요,’ 에 의해 KBS2 방송으로 통합되어 버린 TBC 동양방송 또한 이 때 이병철이 소유하고 있던 매스컴이다. 생각해보면 그나마 5공이  잘한게 이 거 아닌가 싶다. 지금 SBS 꼬라지만 봐도 갑갑한데 만일 TBC 까지 살아남아 있고 그거랑 중앙일보가 여전히 삼성 그늘에 있다고 생각하면--;;    


현재 삼성은 중동고와 성균관 대학을 소유하고 있다.  삼성은 이병철의 모교인 중동고를 자립형 사립고로 전환하려고 지속적으로 모색중이다.  삼성의 성균관 대학 소유 이후에 삼성이 성대를 어떻게 컨트롤 하고 있는가를 알리는 문서를 총학생회에서 폭로했으나 많은 학생들은 오히려 

총학생회를 비난했다 . 그 이후 이른바 ‘비권’(성대사랑)이 총학생회를 계속 수권하고 있다. 그리고 중앙일보는 수많은 잡지들과 케이블 티비 채널 두개(큐채널과 히스토리 채널)을 가지고 있으며 굴지의 출판사 (중앙 랜덤하우스)를 소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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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4년 오늘(9.21) 고려 공민왕 피살.

 

미안하다. 또 늦었다. 그러나 정국이 정국이 아닌가 독자들이 이해해야지 어쩌겠냐--;;


1374년 9월 21일 고려공민왕이 신하 홍륜 일당에게 피살됐다. 공민왕은 충숙왕의 둘 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 당시 다른 고려왕들처럼 원나라에서 성장했다. 공민왕의 몽골식 이름은 ‘빠이앤티무르’ 라고 한다.


그런데 공민왕은 그 당시 고려왕들하고는 좀 달랐다. 고종 당시 원의 침략 이후 고려왕은 몽골의 부마가 되었고 조나 종을 붙이지 못해고 칭호는 왕으로 바뀌었다. 그 밖에 폐하-> 전하 등등 바뀐게 아주 많다. 아 참 왕명에는 반드시 ‘충’자를 붙이게 되었다. 충목왕, 충혜왕, 충정왕, 충선왕, 충숙왕 등등 그런데 공민왕은 자기에게 ‘충’ 자를 붙이지 않았다.


고려가 이 정도로 원에게 꽉 잡혀 살았지만 꼭 그런 것 만은 아니라는 주장들도 많이 전해진다. 일단 원에게 40여년  동안 개기며 버텨낸 나라가 고려를 제외하곤 없고(에..일본이 있네. 여몽연합군의 이차에 걸친 침략을 가미가제-신풍 덕택에 막아냈으니--;;) 고려왕은 몽고황족의 부마를 지냈으며 몽고 황실 내부의 다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단다.  그 밖에 ‘고려양’ 이라고 해서 원나라 대도(수도 이름)에서는 고려의 풍습이 최신 유행을 했다고 한다. 원나라 말기에는 공녀 출신의 고려 여인이 정식 황후 자리에 오르기도 했을 정도니... 

하여튼 공민왕은 원에 대해 독립적이려고 노력했고 또 실제로 그런 정책들을 펼쳤다. 즉위하자마자 몽골 연호와 관제를 철폐했으며 정동행성을 혁파했다. 누나(원나라 기황후) 믿고 까불던  기철 일파를 척결했고 원명 교체기의 혼란을 틈타 쌍성총관부, 동녕부 등을 공격해 영토의 일부를 회복했다. (이 때 스타로 올라선 인물이 황금을 돌처럼 봤다는 최영과 신궁 이성계..사실 이성계의 아버지는 원나라 다루가치 출신인데 하여튼 이렇게 시대의 변화에 민감해서 변신을 잘 하는 사람들이 어디에나 있는 모양이다.)


대내적으로는 신돈을 등용해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설치했다. 한문을 보면 알겠지만 전민변정도감은 논밭과 노비에 관한 행정을 정비하기 위해 설치된 특별기관이다. 무신정권 이후 권세가들이 토지를 마음대로 겸병하여 병작반수제(이런거 기억 나나? ㅋㅋ 고딩때 다들 국사시간에 배웠을텐데...기억을 더듬어보시길.)를 강요했다. 원나라의 영향력이 강해지고 고려의 힘이 약해지면서 부터는 친원파들이나 원나라에 관련된 기관들(정동행성이라던지 제주도에 있던 말목장, 전국에 산재되어있던 다루갖치들)은 한 술 더 떠서 마음대로 토지를 수탈하고 양민을 노예로 삼았던 것이다. 당연하게 세금도 안 내고...


전민변정도감 판사 신돈은 탈법/불법적으로 점유된 토지와 노예에 대해 개경에서는 15일 지방에서는 40일의 기간동안 자진신고하게 하였다. 토지는 원주인에게 돌려줘서 국가의 수조권이 닿게 했고 에서는 노예는 자신들 마음대로 자신의 행보를 결정하게 했다. 이 조치는 민중들로부터 뜨거운 환영을 받았으나 당연히 기득권 세력과 마찰이 발생했다.


뿐만 아니라 신돈은 고려말 등장한 신흥무장세력(최영, 이성계、김방경등등)과의 갈등 뿐 아니라 유교를 바탕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신진사대부 계층과도 물과 기름처럼 지냈다. 공민왕과도 트러블이 발생하여 결국 1371년에 처형--;; 사랑해 마지 않았던 노국대장공주도 죽었고 신돈까지 스스로 숙청한 공민왕은 헤롱헤롱 거리기 시작했다. 귀족집안의 잘생긴 자제들로 고성된 ‘자제위’ 라는 기관을 설치했는데 사실 이게 묘하다. 딱히 하는 일도 정해지지 않은 이 친위집단 자제위가 공민왕의 동성애 상대 집단이었다는 말도 있는데...자제위 소속 젊은이들이 공민왕으로부터 지나칠 정도로 총애를 받은 것은 확실하다. 여러 계비들과 간통사건을 일으켰다는 기록이 전해질 정도로...그러다가 급기야 자제위 소속 홍륜이 익비를 임신시키는 사건이 발생하고 공민왕은 그 사건을 조용히 처리하기 위해 고자질한 최만생과 홍륜을 다 죽이려 하다가 거꾸로 침실에서 자기가 죽음을 당한다.ㅠㅠ


고려말 마지막 불꽃을 태우며 자주적 대외정책과 대내 개혁을 실시했던 공민왕은 이렇게 허망하게 갔다. 공민왕 사후 이십년도 안되서 고려는 멸망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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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할 것인가?

 

V. I. 레닌이 1902년 발표한 이 팜플렛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은  영감, 의지, 교훈을 얻었다. 레닌은 이 팜플렛에서  아무리 강고한 쇠사슬이라도 약한 고리를 molot^^ 로 때리면 끊어지게 마련이라고 말했다. 참 이  글을 통해 레닌 이라는 이름이 처음 세상에 나온 것이다. 또한 레닌은 새로운 형태의 정당을 가지고 전 러시아를 전복 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는다고 밝혔다.


그리고 체르니셰프스끼의 유명한 소설 또한 ‘무엇을 할 것인가’이다. 이 책이 레닌의 팜플릿보다 훨씬 먼저 나왔을 뿐만 아니라 레닌은 작가를 맑스 이전의 가장 위대한 사회개혁가로 상찬하기도 했다. 사실 이 소설이 난 더 감동적이었다. 이데올로기가 정립된 것은 아니지만 혁명적 인텔리겐찌아의 정열과 합리성에 바탕한 구체적 실천들이 정말 감동적(사실 지금 보면 좀 그렇다--;; ‘어찌 인간으로서 저렇게 완전무결할 수 가 있담 순 뻥일게야..’  하는 맘이 든다.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도 마찬가지고...) 이었던 것이다.


과연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내가 지금까지 진보넷에서 한 것들을 꼽아보자면 카레라이스, 짜장, 하이라이스, 오징어 볶음, 오징어 국, 찜닭, 북어국, 꽁치조림, 수육, 계란찜, 콩나물밥 등이다. 앗 비빔국수도 있군(이건 실패작이었다--;;) ..  바야흐로 오곡백과가 여물고 식욕이 충천하는 이 가을에 이제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가을 전어는 깨가 서말이라는 속담이 있듯 가을은 전어의 계절이다. 전어회도 맛나지만 굵은 소금 슬슬 뿌려가며 석쇠에 굽는 전어맛 또한 일품이다. 신김치랑 돼지고기 넣고 너무 맵지 않고 뭉근하게 순두부 찌게를 끓이면 쓰린 속을 달래는데 도움이 될 것 같고...맵고 달지 않게 간장 양념으로 궁중 떡볶이를 해도 한끼 식사로 훌륭할 거 같다.


물론 이런 것을 하기 위해 부족한 것이 너무 많다. 팬은 너무 후지고 석쇠는 구경도 못해본데다가 반찬할 김치도 모자란데 순두부찌게에 넣을 김치가 어디 있으랴? 궁중 떡볶이에는 느타리버섯하고 다진 쇠고기를 넣어야 하는데 그건 너무 비싸다ㅠㅠ


그러나 1902년 레닌도 손에 들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창간한지 2년 밖에 안되는 , 그 당시에는 지명도가 형편 없었던 정치신문 ‘이스크라’가 있었고 이스크라의 필진으로 막 합류한 스물세살 짜리 애송이 트로츠키란 동지가 있었을 따름이다.


그렇다! 내게는 아름다운 푸른 불꽃을 세 개나 내뿜는 이스크라 아니 가스레인지가 있으며 많은 생각시 동지들이 있다!

 

한 점의 불꽃에서 불길이 타오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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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블로그 철학(부제:나는 여우가 아니다!)

 

간만에 좀 여유롭게 블로그를 붙잡고 있다. 자주는 아니고 게다가 들어가는 데만 들어가 보는데도 남들 블로그 보믄 참 아기자기 짜임새 있게 이쁘다. 근데 내 블로그는 자간, 장평도 삐뚤 빼뚤 사진 크기도 제 각각. 남들 블로그가 이쁜 다이어리라면 내 블로그는 초등학교 한 이학년 짜리 그림 일기장 같다 ㅠㅠ


그러나 내 비록 유나 바머처럼 기술 발전에 대한 경고를 하기 위해 폭탄 우편 보낼 능력은 안 되지만 역시 기술의 무한한 발전을 회의적으로 보고 있는 바, 이런 저런 걸 할 줄 몰라서 안 하는게 아니라 디지털 공간에서도 아날로그적 감수성을 표현하고자 일부러 이렇게 못생긴 블로그를 만들어 가고 있음을 이해 해 달라.

 

내 블로그에 있는 글들을 읽다가 떠오르는 음악이 있으면 직접 찾아서 듣고, 생각나는 이미지가 있으면 혼자 힘으로 찾는 수고를 들여서 감상하라. 연동되는 음악, 그림, 책, 영화의 제목들은 틈틈이 소개 하겠다.(이 지점에서는 피에르 쌍소라던가 스콧 니어링 들의 책을 떠올리기 바란다. 머 라다크로 부터도 배울게 있으면 배우기 바란다.  쉽고 빠르게 사는 것이 그렇게 좋은 것 만은 아니다.^^)


생각해보니 디지털 공간에서 느리게 사는 즐거움과 스스로 찾는 수고로움을 전파하는 내가 참 대견하기 짝이 없다.  나 자신에게 상을 내려야 겠다. 내일 사무실 가다가 맛있는 거 있으면 사 먹어야지~  신포도나 사 먹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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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년 오늘(9.20) 강화도 연안을 침범한 일본 전함 운요오호, 조선 수비대와 충돌

 

흑..한 번에 나흘치를 올린다--;;


1875년 9월 20일 강화도에서 개항과 측량, 식량 및 식수 제공 등등 말도 안 되는 요구안을 내걸며 집적거린 일본 전함 운요오호와 조선수비대의 충돌이 있었다. 일명 운요오호 사건. 이 사건은 미국의 페리제독이 단 한척의 전함으로(일명 흑선, 구로후네) 자신들을 무릎꿇려 불평등 조약을 체결한 지 20여년 만에 그걸 그대로 똑같이 써먹은 것이다. 이 일은  중화 중심주의나 세계제국을 꿈꾸던 원나라와 다른 이른바 근대적, 서구적 제국주의가 아시아에 도입되어 실제로 첫 발을 내디딘 역사적 사건이라 할 수 있겠다.--;;

8월말 강화도 인근에 닻을 내리고 왔다리 갔다리 하던 운요오호는 아무런 사전 접촉없이 강화도 초지진 포대에 접근했다. 병인양요나 신미양요에서 나름대로 미제와 프랑스제국주의자들한테 한 깡을 보여준 조선 수비대는 냅다 포격을 가했으나 그것이 바로 일본이 바라던 바였던 것이다. 되로 주고 말로 받음의 진수라고나 할까? 운요오호는 초지진에 맹렬한 함포사격을 퍼부었고(일본제국주의자들이 근대 무기 도입해놓고 써먹을데 없어서 얼마나 답답했을까? 태권도 몇 달 배워서 빨간 띠 쯤 따선 근질근질해져서 ‘만만한 놈 하나 걸려라~’ 하고 학교주위를 배회하던 성질 나쁜 넘들처럼 말야 ) 영종진에도 포격을 가했다. 뿐만 아니라 육전대까지 상륙시켜 살인, 약탈, 방화 ,강간 하여튼 온갖 나쁜 짓은 다하고 ‘니들이 우리를 먼저 공격했다’ 며 배상금을 요구하고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게 된 것이다.

근데 재밌는 것은 이 때의 불평등조약은 그 당시의 ‘글로벌 스탠더드’였단 것이다. 요즘 BIS 비율이 어쩌고 개도국의 시장개방이 어쩌고 월스트리트의 투명한 경영이 어쩌고 하며 전세계에 강요하는 글로벌 스탠더드 말이지.19세기 후반에는 제국주의국가가 선택한 항구에 개항장의 건설, 개항장에서 저지른 범죄에 대한 속인주의 원칙의 적용등이 글로벌 스탠더드였던 것이다--;; 영미는 일본에 그걸 강요했고 글로벌 스탠더드 잘 배운 일본은 조선에 그걸 강요하고...아 참 강화도 조약은 조선이 체결한 최초의 근대적(ㅠㅠ) 조약이라고 역사책에 나온다. 

근대, 제국주의가 강요한 과거의 글로벌 스탠더드들에 대해 오늘날의 평가는 대체로 비슷하다.

쌀관세화, 스크린 쿼터 철폐, 한일 FTA체결 같은 오늘의 글로벌 스탠더드들을 훗날 역사는 과연 어떻게 평가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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