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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3/24
    쌍차투쟁관련 구속자 현황
    자유인
  2. 2010/03/24
    쌍용차 구속자 후원회 제안서
    자유인
  3. 2010/03/11
    중정(10월3일-일)
    자유인
  4. 2010/03/03
    메이데이-전평(10월2일-토)
    자유인
  5. 2010/03/02
    단식4일차
    자유인

쌍차투쟁관련 구속자 현황

<쌍차 투쟁관련 구속자 현황> 

 

1. 1심 선고 형량 

  

- 한상균 지부장(징역 4년 - 항소계류 중, 3월 16일 총포관련 추가건 재판 진행)

- 김선영 수석부지부장, 한일동 사무국장, 김득중 조직실장, 최기민 정책실장, 김재환 재정실장, 김정운 교선실장, 강동환 후복실장 (징역 3년 - 항소계류 중)

- 김혁 금속 미비국장(징역 3년 - 항소계류 중), 권순만 금속 부위원장(징역1년 2월 - 항소계류 중, 집행유예건), 강성철 구노회 인권팀장 (징역8월 - 항소 계류 중), 이기호 건설노조 (징역 1년 6월 - 항소 중, 집행유예 건)

 

2. 구속자 상태 및 지원과제

 

- 한상균 지부장(평택 지소구금)을 제외한 11명 모두 항소재판 중으로 수원구치소에 구금되어 있음. 구속자 대부분이 3,4년의 중형을 선고 받았거나, 집행유예 건에 걸려있는 상태임. 작년 8월6일부터 현재까지 8개월간의 장기간 구속이 이어지고 있는 상태임.

 

- 구속자의 경우 장기구금 상태에 놓이면서, 외부로부터 고립감이 증폭 될 수 있는 시기임. 특히, 평택구치소에 비해서 수원구치소는 여러면에서 더 열악한 상황임. 현재, 쌍차간부들은 주로 쌍차 지부가 중심이 되어 쌍차 조합원과 가족들이 주로 면회를 하고 있는 상태이며, 연대단체 동지들은 금속과 쌍차 비지회 및 사회단체 동지들을 중심으로 면회가 이루어지고 있는 상태임. (연대동지들은 평균 주2회)

 

- 가족들은 (쌍차간부 중심) 구속이 장기화되면서 여러 고통이 가중되고 있음. 대부분 ‘수원’이라는 거리 특수성상 주1회 주말 면회와 서신을 통해 구속자와 교감하고 있는 상태임.

 

- 결론적으로 쌍차투쟁을 핵심적으로 이끌었던 동지들의 장기간 구금이 이어지면서, 사회적 관심도는 떨어지고 있으며 가족 등 개인적 고립감과 고통이 가중되고 있음. 한편, 구속에서 1심 재판까지 정권과 자본의 쌍차투쟁에 대한 왜곡과 이데올로기 공세는 상대적으로 줄어든 반면, 투쟁을 이끌었던 핵심간부들에 대한 사법부의 ‘역사적 괴씸재 적용(?)’이 예상되고 있음. 따라서, 2심 재판을 앞두고 더욱더 구속자들에 대한 연대와 지원이 더욱 필요함.

 

3.   쌍차 구속자 후원회 역할 

 

 

- 첫째, 쌍차 구속자 후원회는 양심적 시민들과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쌍용차 투쟁의 정당성을 알려내고 구속자들의 석방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도록 한다.

 

- 둘째, 쌍차 구속자 후원회는 후원회원 모집 등 다양한 방식으로 기금을 조성하여, 구속되어 있는 쌍차간부 및 연대동지들에 대한 (가족 등) 재정적 후원을 집행하도록 한다.

 

- 셋째, 쌍차 구속자 후원회는 현재 쌍차 지부가 행하고 있는 면회 등 구속자 지원사업과 긴밀하게 협조하여, 구속자 처우개선 투쟁 및 외부 정세소식전달 등 다양한 후원사업을 전개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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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차 구속자 후원회 제안서

< 쌍용차 구속자 후원회 결성 제안서 >

 

쌍용차 77일 파업투쟁을 알고 계십니까?

09년 이명박 정부는 경제위기의 책임을 노동자에게 떠넘기고, 대량의 정리해고 살생부를 만들어 무차별적인 공권력 투입을 자행했습니다.

 

쌍용차 투쟁은,

6명의 목숨을 앗아간 살인적 정리해고 중단만은 막고자 했던 투쟁이었고,

죽도록 일만한 노동자와 가족의 목숨을 지키려했던 절박한 생존권 투쟁이었습니다. !

위기의 당사자인 정부와 상하이 자본의 책임성을 세상에 알리려 했던 투쟁이었으며,

그리고, 지배자들의 잘못된 정책으로 굶주리고 탄압받고 있는 이 땅의 양심과 함께 하고자 했던 77일간의 몸부림 이었습니다.

 

폭력진압으로 얼룩진 그 77일간의 사투가 끝난지 벌써 8개월이 넘어서고 있습니다.

그러나, 상처는 치유되지 않았습니다.

정부가 서민경제를 떠들지만 해고자는 아직도 복직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감옥에는 투쟁의 당사자들이 구속되어 있습니다.

한상균 지부장을 비롯한 역사적 투쟁의 주역들은 4년, 3년 중형의 실형을 받은채,

차디찬 감옥에 갇혀있습니다.

 

8개월째 장기구금과 중형을 언도받은 동지들에게 연대의 정이 절실히 필요할 때입니다.

우리의 관심이 떨어진 상태로 장기간 구금이 이어질 때 구속자와 가족 등 개인적 고립감과 고통은 가중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정권과 자본의 쌍차 투쟁에 대한 폄훼와 왜곡이 기승을 부리고, 사법부의 재판결과가 마치 공정한 것인 양 용인 될 수도 있습니다.

 

쌍용차 구속자 후원회는 이러한 행동을 만들어 나가려 합니다.

첫째, 지속적인 구속자 석방운동,

둘째, 구속자가 감옥안에서 힘 있게 생활해 나갈 수 있도록 의지를 북돋아 주는 행동,

셋째, 구속자와 가족들이 혼자만의 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행동,

마지막으로, 구속되어 있는 동지들의 투쟁이 누구보다 의로운 행위였으며, 역사적 정당성을 획득하고 있다는 점을 지속적으로 제기하는 행동을 만들어 나갈 것입니다.

 

77일 투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해고자들의 복직투쟁과 구속자들의 옥중투쟁으로 계속되고 있습니다.

나아가, 이 땅의 억압과 착취받고 있는 모든 민중들과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양심적인 시민들의 투쟁으로 계속 만들어 나갑시다.

 

2010년 3월 19일

쌍용차 구속자 후원회 준비모임 회원 일동

(쌍차 구속자 후원회 (준) 대표 : 김동수 010-3378 -0971, 쌍차 구속자 후원회(준) 통장 계좌번호 : 농협 302-0200-3192-01  이자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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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정(10월3일-일)

사랑하는 당신에게

 

동양의 내향형 중정주택의 생명력.

  ' 동양의 도시주택은 그 뿌리를 고대 문명에 두고있다. 그것은 근동지역과 인도아대륙, 북 아프리카 및 극동지역에서 200세대 이상 도시 거주민들의 안식처가 되어온 지속적인 생명력을 가진 주거 형태이다. 이 내향형 주거형태의 본질적인 성격과 속성은 상당히 많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한 특징은 중앙에 있는 사적인 성격의 열린 공간이 중'정'이다. 마당은 동양 도시 주책의 심장부이며 이것을 표현하는 가장 시적인 말로는 하늘의 우물이라고 번역되는 중국 이름을 들수 있다. 이 우물은 주택에 빛과 공기와 빛물을 제공한다.' (집 - p242)

 

중정으로 상징되는 동양의 주거 형태는 , 빈부와 계급간의 구분이 뚜렸했고, '교외에 잘 난체하는 외딴 별장들이나 도시의 고층타워 꼭대기에서 과시하는 펜트하우스 주거들이 생겨'난 서양관습과 대비된다. '신분을 의식적으로 반영하려'한 서양과는 달리, 단층과 2-3층을 넘지않는 '단순하고 절제된 가로입면'의 주거도시 안에서 '부자와 가난한 사람모두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갔던 것이다.

 

'외부와 격리된 마당'에 식물이나 분수를 설치하여 기온과 습도등을 쉽게 조절하기도 하여, '쾌적한  미기후(?- 환경)를 거주자에게 제공'한 중정개념의 주거는 그리스 로마를 비롯하여 무어인을 통해 스페인으로, 스페인 폴투갈 인들을 통해 멕시코, 남미에 까지 전파되었다.

 

' 그 내향성으로 인해 가로및 이웃으로 부터 시각적, 청각적 프라이 버시'를 보호받고 가정의 안전을 확인 받았던, 또한 주택의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을 융통성있게 구분한 것은 동양중정 주택의 또 다른 특징이었다.

 

금은 지루하다 싶기도한 이책을 부여잡았던 보람이 한꺼번에 몰려 온 이유는 바로 '중정'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잘 찿아보기 어려운'ㄴ' 'ㄷ' 'ㅁ'으로 지어진 한옥들은 모두 이러한 '중정개념'때문인데 우리의 풍습과 가옥들에도 여전히 남아있다 하겠다.

 

대 가족제도를 기본으로 하였던 과거에는 '중정'으로 방향을 모으고 중정에서 공적인 행위(종교, 대소사등)를 하였고, 사면의 바깥은 자연스럽게 외부를 관찰(?)하고 접 할수 있는 구조였다.

허나, 사적 공간이 보호되는 만큼, 동양의 사회는 그 만큼 남성 중심의 보수적인 '사회환경'이었음을 알수 있다. 가정의 보호와 사적 공간의 보호는 '길를 지나도 가로수 안이나 담장안의 상황을 전혀 알수없는'바깥사회와의 철저한 차단을 의미하기도 했으니까!

 

 

하여간, 초고층 아파트와 서구형 빌딩들이 압도하는 주거와 도시의 개념들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현재, 세계의 주거 형태를 '중정개념'으로 20세기 까지 이끌어왔던 전통(동양)에 대해서는 충분히 발전적으로 되살려 봐야할 유산이라고 생각한다. 필자가 말하듯'토지이용의 효율성과 에너지 보존'의 측면에서 뿐만이 아니라, '쾌적한 공동체로써의 주거(순전히 내 개념임)'를 위해서 말이다. 이제 '서양'으로 넘어 갈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오직 한정된 정신력의 축적 만을 마음대로 쓸수 있으며, 어느 한 영역에서 소비되는 심적 에너지의 양은 다른 영역에서 쓸수 있는 에너지의 양을 감소시킨다는 것도 프'로'이'드' 의 기본관념의 하나이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유종호>

네가 많이 피곤하고 일이 잘 안 풀릴때, 혹은 보상이 안 나온다고 생각할 때, 위의 문구를 생각하면서 위안 받기 바란다. 허나, 우리가 함께라면 모'든'영'역' 에서 힘을 쓸수 있을 것이리라!

 

2004년 10월 3일 일요일 오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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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데이-전평(10월2일-토)

사랑하는 당신에게

 

전평의 조직활동과 관련해서는 추후에 다시 살펴 볼 것이다. 이는 당시 내외부적으로 급격한 정세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의 수준으로' 단순화 하기가 쉽지않다(p200 전평의 조직활동)

한편, 전평의 문화활동은 참으로 놀랍게 다가온다. '기관지는 집중적 선전선동자인 동시에 집중적 조직자가 되어야 한다.'는 기조하게, 투쟁의 전달과 수렴, 확대, 배포와 통신원 확대등 기본적인 활동에 충실하면서, 당시로써는 유일한 전평및 노동자 내부의 소통매체로 위치 했었다.

 

한편으로 노동자들의 또 다른 문화 교양면이다. 언뜻, 45년의 시대만을 (시간적 과거) 생각한다면, 서적, 음악, 연극, 영화, 무용등 연예활동이 일천했을 것으로 선입견을 갖을수 있지 않겠는가? 허나, '전평 집행위원장 허성택이 1946년 1월 1일 신년사에서 강조하듯이 조합원 대중등을 질적으로 강화하기 위한 구체적 방법의 하나'로 '교양문제(문예활동)'는 중요하게 집중실천 되었다.

 

예를들어 '1945년 4월 조선 출판 노조에서는 다가오는 5월 1일 노동절에 대한 계몽선전과 준비를 위하여 강좌반을 조직하여 박봉연, 이선운, 김원식이 각분회와 직장의 순회 강좌를 개최했다'는 기록등 일반교양, 정세, 심지어 '한글'교양까지강습회와 교육, 시국강연회의 이름으로 다양한 교양활동이 전개된것이다.

 

또 하나는 연예활동이 아주 보편적으로, 그리고 일상적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 전평, 서울지평은 46년 제 20주년 '610만세 기념연예대회'를 ------ 출연 종목은 악대, 합창, 독창 , 무용, 춤, 유회, 시뮤레이션, 촌극, 시낭독 등 이었다. 지도요청으로 하면 각 문화 단체에서 사람을 파견해 준다.---- ' 거나 '서울지평는 46년 3월 1일 ---- 31절기념 노동자 위안회를 연다.'는 등의 자료에서 (전노신) 보이듯이, 일상적이고 당연한 '노동자들의 문예활동' 모습이 목격된다. 그리하여, 46년 5월 1일 메이데이는 약20만명, 47년 51대회는 약50만명이 운집하여 - 그 야말로 새세상과 노동해방을 염원하는 당시 노동자들의 모습- 10에서 20가지의 요구를 담은 행사를 성사할 수 있었다.

 

이와 비교해 대한노총은 46년 700명 47년 2만 5천명을 동원했다고 하는데, 이 마져 당시의 격렬한 좌우대립을 실감케 한다. 46년 대한 노총대회에서 '민재홍'은( 안재홍? - 3월3일)축사를 했다는 데 그내용이 반동적인 극치다. " 8시간 은 그만두고 10시간 20시간이라도 노동하라, 노자는 친선하자" 는 따위 였다고 --

 

**** 메이데이노래 - 한번 불러볼까?

 

1. 들어라 만국의 노동자들아/ 우렁차게 들려오는 메이데이의

시위대가 행진하는 발자국 소리/ 미래를 고하는 고함소리를 !

2. 오래인 압박과 착취밑에서 / 신음하던 조선의 노동자들아

오늘은 만국의 노동자의 날 / 세계의 동무들과 발을 맞추자 !

3. 압제없는 세상을 신설키위해/ 착취없는 사회건설키위해

강철같이 단결한 우리 노동자 / 불은 깃발 선두에 나부낀다 !

4. 완전해방과 자주독립도 /인민의 새나라 세우는 데도

정의로 싸우라 우리 노동자/ 정의로 싸우리라 삼천리 강산 !

5. 인민의 적 물리치고 나가는 곳/ 자유의 새세상 동터온다.

지키자 메이데이 노동자들아/ 지키자 메이데이 노동자들아 !

 

참으로 감동적이고 벅찬 노래이지 않나?

 

허나 48년 메이데이는 불허로 개최되지 못한다. 안타깝게도 ---

이 장면에서, 현재와 당시의 상황을 비교해본다. 어찌 단순비교가 가능하겠는가? 하지만, 조직과 투쟁, 의식과 연대성등에서 상당히 수준높았던 , 즉 혁명적 시대에 걸맞는 노동자등의 활동, 그것이 존재 했었고, 이는 현재로 살려야 할 자산임에 틀림없다.

 

전평의 그것과 '1987- 1992'의 시대에서 보이는 노동자 정치활동은 두고두고 보아도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 조공과 전평의 관계, 정치단체(정당침 기타)와 전노협의 관계는 , 현재에도 여전히 연구되고 고민되(노조와 정치조직의 관계) 어야 한다.

 

(노동자 정치) 91년경 '한노당' 으로 집결한 선진 활동가가 5000명 이라니!

87년 에서 92년경까지의 '상호연대형' 노동자 정치의 활동은 , 허나 한마디로 실패했다고 보여진다. 필자는 '전노협 사수 투쟁과 노동자 정치운동의 이념적 조직적 분화'를 의미있게 살펴보고 있지만, 쏘권의 몰락만큼이나 그 충격이 가해진 것처럼, 그 왕성했던 운동은 쇠락을 면치 못했음을 확인한다. 그런 측면에서 실패라는 것이지!

 

날씨가 10도씨 떨어져 10도라고 하네.

방금전 그리고, 서울의 상도동에 강제철거가 시행되었다는 티브화면이 나온다. 아나운서와 기자조차 '추워지는 날씨에 어찌 살라고?' 하는 항의성 보도가 나오는데, 당사자들의 울분과 한은 얼마나 크겠는가 !

어찌 빈민 뿐이겠는가? 농민과 노동자들의 가슴이 검게 타들어가는 가을시대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안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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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식4일차

단식4일차

- 어제 찬 바람을 쐬 어서인지 콧물이 심했다.
오전에 목욕을 하고 한숨자니 가라 앉았다.
거울을 봤다. 턱에 뾰로지가 나고 눈가에 주름이 심했다.
어디서 많이 본 겉 늙은이가 누렇게 뜬 얼굴로 째려보고 있다. 바로 나다.

내몸은 나 만이 돌 볼 수 있고, 내가 돌 보아야 할 일차적인 대상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지금껏 몸이 아프다는 것은 나와 상관이 없었다. 나는 아파아 할 원인이 별로 없었고, 앓아 봐야 한 사흘 뿐 이었고,그래서 내가 병들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상상 못하고  살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젠 사정이 달라졌다.
나는 심하게 아팠고, 훌훌털고 일어 난다는 것은 의욕 뿐 이었다.
냉온욕을 아침저녁으로 했는데도 몸이 예전으로 돌아가질 않았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아! 세월에는 항우장사도 맥을 못추는 것인가?
마음은 여전히 스무살 청춘인데! 몸이 따라주질 않다니!

원래는 볶은소금을 먹고 관장요법을 행하려 했다. 
관장기도 준비하였던 것이다. 내 경우는 장이 부실해서인지 단식중에 변을보지 못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똥을 눟지 못하는데 어떻게 묶은 똥이 배출되겠는가!

허나 결론적으로 소금섭취와 관장요법은 사용되지 못 하였다.
소금섭취는 선배님의 간곡한 만류 때문 이었다.
" 먹을려면 간수를 뺀 죽염을 써야지! 이건 김치 담는데 쓰이는 일반 볶음 소금인데, 극약인 비소가 없다고 장담할수 없다."는 논리를 받아 들였기 때문 이었다.
애초에 행하려던 관장요법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 자연스럽지 못하다" 는 논리보다는, 관장을 행할수 있는 주변조건이 갖추어져있지 못해서 였다.

나는 단식의 실재에 있어서 일관적이지 못한 태도를 보인 것이다.
이건 중요한 문제다. 흔히 발생할 수 있고, 때에 따라서는 사고가 날수도 있다.
나는 수많은 과거 경험과 단식이론에 대한 자신감이 넘쳐났으므로, 좌고우면 없이 단식치유를 감행했던 것이다.
허나, 이론과 실재는 다를 수 있고, 주변조건을 잘 고려하지 않는 우를 범하였던 것이다.
'생수인가? 소금인가?' 소금은 왜지? 생수의 양은? 원리가 가물가물했다.
' 왜 관장기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가?' 단식중 숙변제거에 힘겨워했던 예전 경험을 망각했고, 주변조건이 좋지않다는 이유로 관장의 중요성을 쉽게 포기했던 것이다.
( 이 문제는 나중에 또 언급을 하겠지만, 단식전과 단식의 과정에서 관장을 생략한 것은 상당한 손해였다. 복식2일차에나 나는 관장을 하였다. 5일간 공들였던 효과는 반감되었다는 평가를 하고 있다. 묶은 똥을 뱃속에 그대로 둔채였으니, 기분도 거북했고 몸도 무거웠던 것이다.)

저녁 나절에 먼데서 친구가 왔다.
자원방래불역락호! (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
팔을 다치신 형수님께 예쁜 꽃 한송이! 한라봉1박스, 생굴 한봉지를 싸들고 왔다. 내몫은 하나도 없었지만 눈 요기는 충분히 할수 있었다.
저녁을 함께 했다. 북어국, 족발데침, 생굴, 고추절임 김치, 그리고 서리태 넣은 찰진 쌀밥이 차려졌다.
먹음직 스럽다.
반주로 소주 한잔씩!
난 물을 마셨다. 입을 다시면서.
이것도 단식 수행의 한 프로그램이라고 자위했다.
(훗날 오늘 밥상에 오른 음식을 잊지 않고 찾아 먹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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