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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 다함께 진보포럼 "맑시즘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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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포럼을 마치고

6월 포럼은 "오바마의 아프팍 전쟁, 무엇을 위한 것인가?" 라는 주제로 열렸다.


연사는 오바마의 전략과 부시의 전략이 근본에서는 다르지 않으며 아프팍 전쟁 반대를 위해 이데올로기적 대응을 위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했다.


다음은 연사 발제 내용의 일부이다.


오바마는 부시정책에 대한 환멸로 인한 변화의 열망 때문에 당선될 수 있었다. 

오바마는 수사에서는 분명히 부시와 다르지만 실천에서는 큰 틀에서는 다르지 않다. 첫째, 아프가니스탄에 증파하고 새로운 아프간 전략을 발표했다. 이것은 조지부시의 2007년 이라크 증파와 같은 오바마의 아프간 버전이다. 둘째, 이라크 철군안에 대해서다. 오바마는 16개월 안에 철군시키겠다는 애초의 계획을 19개월로 연장했다. 그리고 2011년까지 이라크에는 5만명의 미군은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다. 


대통령 당선 전 오바마는 이라크에서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으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 정책이 일부에서 오바마를 의심케 했다.   


오바마를 의심토록 한 것은 그의 인사정책에서도 기인한다.

오바마는 선거 캠페인 과정에서 조 바이든(민주당 내 호전적 정치인)을 부통령 후보로 지목했는데, 그는 1999년에 상원에서 매케인과 함께 코소보 결의안을, 2002년 부시의 이라크 전쟁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당선 이후 비서실장으로 램 임마뉴엘을 지목했는데, 그는 친 이스라엘 인물이다. 오바마는 나아가 부시 시절의 인물까지 기용한다.


오바마가 변화의 열망으로 당선된 것은 맞으나, 그 변화의 열망은 단지 아래로부터의 변화의 열망만은 아니었다. 위로부터의 열망이 모여진 측면도 있다.


미국은 1945년부터 성장 폭이 뒤처지기 시작했지만, 미국의 군사력은 여전히 압도적이다.  미국은 군사력으로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욕망을 가질 수밖에 없고, 네오콘들이 이런 상황을 잘 대변해 왔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정치적 측면에서는 군사력을 과시한 것이고, 이데올로기적 측면에서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한 명분으로 이용되었다. 다음은 경제적·지정학적 측면인데,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고 볼 수 있다. (소련의 무슬림 지역은 이제 모두 독립국가가 됐는데, 여기는 한 곳만 빼고 모두 석유 매장국이다. 그런데 송유관이 모두 러시아를 지나간다. 중앙아시아 정권들이 손쉽고 싸게 석유를 세계에 내다파는 방법은 이란을 지나 페르시아만으로 통하는 송유관을 통해서이다. 그런데 이란은 미국의 적국이다. 따라서 미국이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일부를 남쪽으로 관통해 바다로 똑바로 이어지는 송유관을 만들 수 있기를 바라는 꿈을 갖게 된다.)


부시에서 오바마로 넘어왔지만, 미국의 세계제패전략의 목표가 바뀌지는 않았다. 다만, 테러와의 전쟁의 위기 때문에 전술적 후퇴가 반영되고 있다.


전쟁에 반대하는 세력들은 오바마의 전쟁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대응을 위한 준비가 필요하다. 특히 한국에서는 오바마의 전쟁을 지원하는 파병에 적극적으로 반대해야 한다.   


발제가 끝난 후 자유로운 토론과 질문이 이어졌다.


먼저 미국의 반전운동 세력들의 오바마에 대한 태도에 대한 질문이 있었다. 이에 대해 두 가지 측면에서 답변이 있었다.

 

첫째, 2007년 중간선거 이후로 미국에서 반전운동 진영이 대중행동을 강조하지 않는 분위기가 있는데, 아마도 오바마에 대한 기대 때문인 듯하다. 둘째, 오바마의 전쟁을 비판하지 않는 이유에는 핵심 전장이 이라크에서 아프가니스탄으로 넘어가면서 전쟁의 성격을 바라보는 이데올로기적 약점도 있는 것 같다. 이라크 전쟁은 나쁜 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좋은 전쟁으로 보는 묘사되고 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무장이 필요하다.


탈레반에 대한 태도에 대한 활발한 토론도 있었다.


탈레반의 여성억압과 같은 반인권적 행동들이 탈레반에 대한 거부감을 들게 하지만, 탈레반이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저항세력이라는 점을 보고 탈레반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있었다.  


이후 탈레반의 권위적이고 기이한 행태에 대한 비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의 지지가 늘어가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졌다. 이에 대해서는 좌파나 자유주의자들이 정치적 무능력으로 대중적 공감을 얻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오히려 일관되게 제국주의와 싸우고 있는 세력은 탈레반이라는 것 때문에 탈레반의 지지가 늘어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 참가자는 점령이 중단되어야 하는 건 맞는데, 아프가니스탄인들이 자체적으로 민주적인 삶을 꾸려나갈 가능성이 있는지 모르겠다는 의문을 제기하였다. 이러한 문제제기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주장들이 있었다.


첫째, 오랜 제국주의국가들의 점령과 전쟁이 아프가니스탄인들의 삶을 지금처럼 만들었다.

둘째, 아프가니스탄은 스스로 민주적 독립국가를 건설할 능력이 있다.

셋째, 민주주의 국가 건설에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릴지라도 외부로부터의 개입으로 민주적 독립국가를 건설할 수는 없다.

  

포럼을 마치고 간 뒤풀이에서 아프가니스탄의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 알 수 있었고 이데올로기적 대응을 위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발제자의 주장에 공감한다는 소감을 밝힌 참가자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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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강동송파사회포럼에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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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일,《촛불항쟁과 저항의 미래》

김광일,《촛불항쟁과 저항의 미래》

촛불항쟁의 산 증인이 쓴 촛불 평가와 전망

이수현

 

△ 김광일, 《촛불항쟁과 저항의 미래》(책갈피) 책 표지
● 책 구입하기

우리는 아직 그를 기억한다. 지난해 촛불시위가 한창일 때 방송차 위에서 특유의 선동적 목소리로 구호를 선창하고 투쟁을 호소하며 자신의 열정을 불사르던 그의 모습이 여전히 눈에 선하다. 이명박 정부의 광기 어린 공안 탄압 칼바람이 몰아치는 지금 그가 더욱 그리운 것은 그래서다. 그가 자신을 쫓는 경찰의 눈을 피해 1년 가까이 힘든 수배 생활을 하면서 짬짬이 쓴 이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 책은 그의 또 다른 투쟁 방식이고 저항의 수단이다. 그는 김광일 광우병국민대책회의 행진팀장이다. 

이 책은 그동안 나온 촛불항쟁 관련 책들과 여러모로 다르다.

지은이는 지난해 촛불항쟁 당시 정치적 지도부 구실을 했던 광우병국민대책회의에서 행진팀장을 맡아 불철주야 현장의 한복판을 누비던, 운동의 산 증인이다. 우리 같은 사람들로서는 평생에 한 번 해 보기 힘든 경험을 바탕으로 쓴 책이라는 사실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저자의 정치적 관점과 주장에 동의하든 안 하든 한 번 읽어볼 만한 책이라고 하겠다.

이 책의 또 다른 특징은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시각에서 촛불항쟁을 분석한다는 점이다. 고전적 마르크스주의는 이른바 ‘현실 사회주의’의 일당 독재 체제를 정당화하는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스탈린주의와 완전히 다르다.

△2008년 촛불시위의 한 장면  ⓒ사진 이윤선

마르크스주의는 역사의 변화와 발전 과정에 대한 변증법적ㆍ유물론적 해석을 바탕으로 운동을 과학적으로 분석해서 전략ㆍ전술을 제시할 수 있게 해 준다. 지은이는 바로 이 관점에서 촛불항쟁을 분석하고 그 강점과 약점을 지적하면서 미래의 저항을 위한 교훈을 도출한다. 특히, 러시아 혁명을 비롯한 여러 역사적 혁명의 경험에 비춰 촛불항쟁을 살펴보는 것은 이 책만의 장점이다. 촛불항쟁이 혁명도 아니었는데 뜬금없이 혁명과 비교하느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인간의 해부가 원숭이 해부의 열쇠라고 했던 마르크스의 말처럼(《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중원문화, 227쪽) 사물의 가장 고차원적 형태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그보다 미발전한 사물과 현상을 이해하는 지름길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지은이를 포함한 촛불 수배자들, 광우병국민대책회의 안팎의 주요 지도자들과 활동가들, 촛불항쟁을 다룬 이런저런 책의 저자들을 실명으로 거론하면서 그들의 활동과 주장을 분석하고 평가하고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려 노력한다. 지은이는 그동안 한국의 다양한 공동전선에서 활동하면서 우호적 협력을 바탕으로 동지적 비판을 제기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 책도 그 연장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운동의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지 않고서 2008년 한국의 촛불항쟁을 이야기한다는 것, 특히 진보나 좌파의 관점과 시각에서 촛불항쟁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일 터이다. 이 책의 출판을 계기로 한국 사회 변혁 운동의 이론적ㆍ실천적 수준을 높일 수 있는 논쟁이 뜨거워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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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 캘리니코스 논평-“제국의 무덤”으로 진군하는 오바마

알렉스 캘리니코스 논평

“제국의 무덤”으로 진군하는 오바마

알렉스 캘리니코스 (런던대학교 킹스칼리지 유럽학 교수 / 영국사회주의노동자당 중앙위원)

 

지난주 두 사건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수위를 높이겠다는 오바마의 주장이 빈말이 아니었음을 보여 줬다.

하나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오바마는 이라크 수감자를 괴롭히는 미군 병사들의 사진을 공개하겠다는 애초 약속을 번복했다. 백악관 대변인은 순전히 미국 군대의 안전을 염려해서 입장을 바꿨다고 말했다. 그러나 고위 군장성들의 압력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것은 오바마가 조지 부시 정부 시절에 테러 용의자들의 고문을 허용하는 메모를 작성했던 전직 관리들을 처벌하는 문제를 놓고 왔다 갔다 한 것을 떠올리게 한다.

오바마는 자신을 뽑아 준 사람들, 즉 9ㆍ11 이후 부시가 선언한 전 세계적 비상 사태를 끝내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압력을 받고 있다. 그러나 오바마는 과거 부시를 도와 미국의 제국주의 전쟁을 벌인 국가안보 기구들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오바마는 고문 지시 메모를 공개하기 앞서 CIA 본부를 방문해 비밀 공작원들을 한 자리에 모아 놓고 자신이 그들을 얼마나 아끼고 필요로 하는지 강조한 것이다.

또 다른 사건은 오바마가 아프가니스탄에서 어떤 작전을 펴려고 하는지 보여 주는 것이었다. 지난주 월요일[5월 11일] 미 국방장관 로버트 게이츠는 이제 겨우 임명된 지 11개월 된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사령관 데이비드 맥키어넌을 해임한다고 발표했다. 게이츠는 맥키어넌의 경력이 끝난 것이냐는 질문에 “아마도”라고 퉁명스럽게 답했다.

게이츠는 이 해임이 전략의 변화와 연결돼 있음을 분명히 했다. 스탠리 맥크리스탈 중장이 맥키어넌을 대체할 것인데, 그는 부시 정부에서 도널드 럼스펠드가 국방장관일 때 많은 지원을 받았던 합동특수전 사령부에서 근무했다.

이 변화 뒤에는 틀림없이 데이비드 페트레이어스 장군이 있을 것이다. 그는 2007~2008년 이라크 ‘증파’를 기획한 인물이다. 그는 지금 ‘아프리카의 뿔’(에티오피아ㆍ지부티ㆍ소말리아 3개국을 포함하는 지역의 속칭)에서 중동을 거쳐 아프가니스탄을 포괄하는 중부사령부 지휘관이다.

오바마는 아프가니스탄 증파를 결정했다. 현재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숫자는 4만 5천 명으로, 올초보다 1만 3천 명이 늘었고, 올해 말에는 6만 8천 명에 이를 예정이다. 그러나 맥키어넌은 전형적인 군인이다. 그는 2003년 부시와 럼스펠드가 너무 적은 육군을 이용해 이라크를 침략했다고 비판한 장군 중 한 명이다.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이그나티우스는 현재 적용중인 [페트레이어스의] 대안 전략의 뼈대를 이렇게 요약했다. “페트레이어스 전략의 기본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저항집단들을 전투성 수준에 따라 수평으로 배치해 보자. 맨 왼쪽에는 ‘타협 불가능한’ 극렬분자들이 있다. 미국이 그들을 길들일 방법은 없다. 오른쪽으로 이동하면 할수록 좀더 유연하고 ‘타협 가능한’ 집단에 가까워질 것이다.”

“페트레이어스는 이라크에서 왼쪽 집단을 오른쪽으로, 즉, 극렬분자들을 미군의 돈을 받는 부족 민병대로 변화시켰다. 그러지 않은 광신도들은 미군 특수부대의 ‘생포하거나 죽이는’ 작전의 표적이 됐고, 맥크리스탈이 이 작전을 지휘했다. 이것은 강경책과 회유책을 결합한 전략이다. 무력을 사용해 그 지역을 확보하고, 그 뒤 그 지역을 유지하기 위해 좀더 부드러운 대(對)게릴라전 수단들을 사용하고 경제를 재건한다는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페트레이어스의 계획은 오바마의 결정으로 추가 파병된 2만 1천 명을 이용해 올해 적을 강하게 치고 나서 탈레반 연합이 분열하는지 지켜보자는 것이다. 따라서 처음에는 미군이 남부의 탈레반 거점을 공격하면서 폭력 수위가 크게 높아질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 전략이 성공한다면, 페트레이어스가 ‘카멜레온 게릴라’라고 부른 집단이 조금씩 분열하기 시작할 것이다.”

다른 많은 대게릴라 전략처럼 이 전략도 정치를 빼먹는다. 부시 정부 때 국방부에서 일한 셀레스트 딘은 <워싱턴포스트>에 기고한 글에서 다양한 정치 세력들이 “전투를 멈추고 타협하기로 결정한 것”이 이라크에 제한적이지만 안정을 가져오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했다고 지적했다.

탈레반도 그럴까? 솔직히 의심스럽다. 그들의 영향력은 커지고 있고, 단지 급진 이슬람주의 이데올로기만이 아니라 과거 승리의 경험에서 비롯한 자신감이 있다. 이그나티우스가 지적하듯이 오바마는 지금 “그의 대통령직을 걸고 ‘제국의 무덤’으로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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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반 ― 제국주의의 피조물에서 저항의 구심으로

탈레반 ― 제국주의의 피조물에서 저항의 구심으로

조명훈 기자 jomh@left21.com

 

오바마는 취임 초 “알카에다와 탈레반 테러조직을 반드시 해체해야 한다”며 아프가니스탄 증파 결정을 내렸고, 최근엔 아프가니스탄 대통령 카르자이와 파키스탄 대통령 자르다리를 백악관으로 불러 탈레반 소탕에 대한 전의를 다졌다.

탈레반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초보수적 이슬람 교리인 와하비즘에 바탕을 둔 단체다. 이전 탈레반 치하의 아프가니스탄과 지금의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확인할 수 있듯 이들이 지향하는 사회는 지독하게 우익적이고 여성차별적이다.

미국 정부는 이 이유를 들어 아프가니스탄 점령을 정당화했고, 아프가니스탄 바깥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반대하지 않거나 심지어 지지했다. 한국에서도 2007년 샘물교회 교인들이 탈레반에게 피랍됐을 때, 참여연대 등 평화주의 단체들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점령, 한국의 파병 정책과 같은 비중으로 탈레반을 비판했다.

그러나 애당초 미국과 파키스탄은 탈레반에 적대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자르다리가 지적하듯이 탈레반은 “우리[파키스탄]와 미국에 의해 만들어진 … 존재”였다.

탈레반을 이해하려면 30년 전으로 돌아가 그들이 집권하게 된 과정을 살펴봐야 한다.

1979년 옛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해 8년 동안 점령을 지속했다. 이 기간 동안 50만 명이 살해됐고 1백만 명이 불구가 됐으며 8백만 명이 난민이 됐다. 당시 아프가니스탄의 총인구는 약 1천5백만 명이었다.

그러나 저항은 멈추지 않았고 옛 소련과 경쟁하던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이슬람주의자들, 즉 무자헤딘이 투쟁을 이끌었다. 1988년, 옛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했다.

중앙권력에 갑작스레 공백이 생기자 이번엔 이슬람주의자들이 치열한 내전을 벌였다. 이 내전은 무려 7년간 지속됐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이 계속 정치적 혼란 상태로 남는 것을 원치 않았다. 미국이 이란과 러시아의 간섭을 받지 않고 중앙아시아의 풍부한 자원을 갈취하려면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적 안정이 반드시 필요했다.

이런 필요에 따라 탈레반은 미국과 파키스탄 정보 당국의 후원 아래 성장할 수 있었다. 탈레반은 파키스탄의 아프가니스탄 난민촌 ‘학생들(탈레반)’로 구성됐는데, 아프가니스탄 인구의 약 50퍼센트를 차지하는 파슈툰족 출신이 압도적이었다. 또 이들은 성장기에 사우디아라비아의 지원 아래 설립된 종교학교(마드라사)에서 교육을 받았다. 이들의 이런 출신 배경이 탈레반 사상의 두 가지 주요한 특징, 즉 이슬람주의와 파슈툰족 우월주의를 만들어 냈다.

1994년 탈레반이 처음 아프가니스탄 국경을 넘었을 때, 그들은 겨우 30명짜리 게릴라 조직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단 2년 만에 수만 명으로 불어나 파슈툰족이 대다수인 아프가니스탄 동부와 남부, 수도 카불을 접수했다.

부패한 이전 권력자들과 다르게 탈레반이 법과 질서를 강조했기 때문에 아프가니스탄 대중은 그들을 신뢰했다. 또 탈레반이 미국과 파키스탄의 후원을 받고 있다는 것 때문에 사람들은 이들이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 줄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그러나 파슈툰족 우월주의는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 전체를 자신의 통치 아래 두는 데 걸림돌이 됐다. 탈레반의 통제 범위는 아프가니스탄 동부와 남부를 벗어나지 못했고 나머지 지역은 군벌들이 통치했다. 이것을 지켜본 미국은 탈레반을 통해 아프가니스탄의 안정을 이루고자 한 기대를 접었고, 1990년대 후반 그들에 대한 지원을 끊었다.

그 뒤 2001년에 9.11 테러가 발생하자 미국은 곧바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미국은 이 전쟁에서 손쉽게 이길 수 있었다. 오랜 기간 침략과 내전에 이력이 난 아프가니스탄 민중은 당장 저항에 나서지 않았다. 또 탈레반은 미국의 동맹인 사우디아라비아를 본뜬 초보수적 이슬람 통치와 축구장에서의 즉결 처형 등 기행으로 대중의 지지를 많이 잃은 상태였다.

파키스탄 정보당국이 나서 미국과 탈레반 사이 평화협정이 체결되는 데 징검다리 구실을 했다. 이 협정으로 탈레반은 카불을 떠나 파키스탄 접경 북서변경주 등 파슈툰 부족 지역으로 돌아갔고 미국은 승리를 선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점령군의 야만적 행태는 곳곳에서 무고한 희생자를 만들어 냈고 ‘재건’을 한다며 들어온 NGO들은 부패했다. 결국 사람들은 다시 투쟁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이 투쟁을 이끌고 있는 것은 바로 탈레반이다. 아프가니스탄 민중이 탈레반을 썩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주도권을 인정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의 점령에 협력하지 않고 공공연히 저항을 호소하는 세력으로 잘 조직돼 있기 때문이다.

지난 경험에서 배운 탈레반도 이전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여성차별적이고 억압적이다. 그러나 민간인들을 상대로 ‘테러’를 벌이는 전술을 지양했고 ― 이것은 주로 알 카에다가 즐겨 쓰는 수법이다 ― 파슈툰족 우월주의를 내세우지 않았다. 대신 점령군에 맞서 모든 무슬림이 단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탈레반은 현재 아프가니스탄 전 국토의 80퍼센트를 장악해 명실공히 가장 유력한 정치세력이 됐다.

한편, 탈레반을 군사적으로 제압하려는 미국의 시도는 오히려 역효과를 낳고 있다.

탈레반이 파키스탄 지역을 넘나들며 활동하는 데 조바심을 느낀 미국은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국경 지역에 무인폭격기를 이용한 무자비한 폭격으로 대응했다. 또 파키스탄 정부에 압력을 넣어 이 지역에서 군사작전을 펼치게 했다. 무고한 민간인들이 엄청나게 희생됐고 무려 2백만 명이 난민이 됐다. 탈레반에 수동적 지지를 보내던 사람들 중 일부는 탈레반과 함께 무장 저항에 나섰다.

지난 8년의 경험이 보여 준 것은 점령이 아프가니스탄 민중의 삶을 개선하긴커녕 더 끔찍한 나락으로 빠뜨렸다는 것이다. 미국의 제국주의적 점령을 끝장내는 것이야말로 아프가니스탄 민중의 평화와 안정을 바라는 모든 이가 풀어야 할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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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반 ― 제국주의의 피조물에서 저항의 구심으로

탈레반 ― 제국주의의 피조물에서 저항의 구심으로

조명훈 기자 jomh@left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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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는 취임 초 “알카에다와 탈레반 테러조직을 반드시 해체해야 한다”며 아프가니스탄 증파 결정을 내렸고, 최근엔 아프가니스탄 대통령 카르자이와 파키스탄 대통령 자르다리를 백악관으로 불러 탈레반 소탕에 대한 전의를 다졌다.

탈레반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초보수적 이슬람 교리인 와하비즘에 바탕을 둔 단체다. 이전 탈레반 치하의 아프가니스탄과 지금의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확인할 수 있듯 이들이 지향하는 사회는 지독하게 우익적이고 여성차별적이다.

미국 정부는 이 이유를 들어 아프가니스탄 점령을 정당화했고, 아프가니스탄 바깥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반대하지 않거나 심지어 지지했다. 한국에서도 2007년 샘물교회 교인들이 탈레반에게 피랍됐을 때, 참여연대 등 평화주의 단체들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점령, 한국의 파병 정책과 같은 비중으로 탈레반을 비판했다.

그러나 애당초 미국과 파키스탄은 탈레반에 적대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자르다리가 지적하듯이 탈레반은 “우리[파키스탄]와 미국에 의해 만들어진 … 존재”였다.

탈레반을 이해하려면 30년 전으로 돌아가 그들이 집권하게 된 과정을 살펴봐야 한다.

1979년 옛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해 8년 동안 점령을 지속했다. 이 기간 동안 50만 명이 살해됐고 1백만 명이 불구가 됐으며 8백만 명이 난민이 됐다. 당시 아프가니스탄의 총인구는 약 1천5백만 명이었다.

그러나 저항은 멈추지 않았고 옛 소련과 경쟁하던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이슬람주의자들, 즉 무자헤딘이 투쟁을 이끌었다. 1988년, 옛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했다.

중앙권력에 갑작스레 공백이 생기자 이번엔 이슬람주의자들이 치열한 내전을 벌였다. 이 내전은 무려 7년간 지속됐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이 계속 정치적 혼란 상태로 남는 것을 원치 않았다. 미국이 이란과 러시아의 간섭을 받지 않고 중앙아시아의 풍부한 자원을 갈취하려면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적 안정이 반드시 필요했다.

이런 필요에 따라 탈레반은 미국과 파키스탄 정보 당국의 후원 아래 성장할 수 있었다. 탈레반은 파키스탄의 아프가니스탄 난민촌 ‘학생들(탈레반)’로 구성됐는데, 아프가니스탄 인구의 약 50퍼센트를 차지하는 파슈툰족 출신이 압도적이었다. 또 이들은 성장기에 사우디아라비아의 지원 아래 설립된 종교학교(마드라사)에서 교육을 받았다. 이들의 이런 출신 배경이 탈레반 사상의 두 가지 주요한 특징, 즉 이슬람주의와 파슈툰족 우월주의를 만들어 냈다.

1994년 탈레반이 처음 아프가니스탄 국경을 넘었을 때, 그들은 겨우 30명짜리 게릴라 조직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단 2년 만에 수만 명으로 불어나 파슈툰족이 대다수인 아프가니스탄 동부와 남부, 수도 카불을 접수했다.

부패한 이전 권력자들과 다르게 탈레반이 법과 질서를 강조했기 때문에 아프가니스탄 대중은 그들을 신뢰했다. 또 탈레반이 미국과 파키스탄의 후원을 받고 있다는 것 때문에 사람들은 이들이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 줄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그러나 파슈툰족 우월주의는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 전체를 자신의 통치 아래 두는 데 걸림돌이 됐다. 탈레반의 통제 범위는 아프가니스탄 동부와 남부를 벗어나지 못했고 나머지 지역은 군벌들이 통치했다. 이것을 지켜본 미국은 탈레반을 통해 아프가니스탄의 안정을 이루고자 한 기대를 접었고, 1990년대 후반 그들에 대한 지원을 끊었다.

그 뒤 2001년에 9.11 테러가 발생하자 미국은 곧바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미국은 이 전쟁에서 손쉽게 이길 수 있었다. 오랜 기간 침략과 내전에 이력이 난 아프가니스탄 민중은 당장 저항에 나서지 않았다. 또 탈레반은 미국의 동맹인 사우디아라비아를 본뜬 초보수적 이슬람 통치와 축구장에서의 즉결 처형 등 기행으로 대중의 지지를 많이 잃은 상태였다.

파키스탄 정보당국이 나서 미국과 탈레반 사이 평화협정이 체결되는 데 징검다리 구실을 했다. 이 협정으로 탈레반은 카불을 떠나 파키스탄 접경 북서변경주 등 파슈툰 부족 지역으로 돌아갔고 미국은 승리를 선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점령군의 야만적 행태는 곳곳에서 무고한 희생자를 만들어 냈고 ‘재건’을 한다며 들어온 NGO들은 부패했다. 결국 사람들은 다시 투쟁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이 투쟁을 이끌고 있는 것은 바로 탈레반이다. 아프가니스탄 민중이 탈레반을 썩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주도권을 인정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의 점령에 협력하지 않고 공공연히 저항을 호소하는 세력으로 잘 조직돼 있기 때문이다.

지난 경험에서 배운 탈레반도 이전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여성차별적이고 억압적이다. 그러나 민간인들을 상대로 ‘테러’를 벌이는 전술을 지양했고 ― 이것은 주로 알 카에다가 즐겨 쓰는 수법이다 ― 파슈툰족 우월주의를 내세우지 않았다. 대신 점령군에 맞서 모든 무슬림이 단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탈레반은 현재 아프가니스탄 전 국토의 80퍼센트를 장악해 명실공히 가장 유력한 정치세력이 됐다.

한편, 탈레반을 군사적으로 제압하려는 미국의 시도는 오히려 역효과를 낳고 있다.

탈레반이 파키스탄 지역을 넘나들며 활동하는 데 조바심을 느낀 미국은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국경 지역에 무인폭격기를 이용한 무자비한 폭격으로 대응했다. 또 파키스탄 정부에 압력을 넣어 이 지역에서 군사작전을 펼치게 했다. 무고한 민간인들이 엄청나게 희생됐고 무려 2백만 명이 난민이 됐다. 탈레반에 수동적 지지를 보내던 사람들 중 일부는 탈레반과 함께 무장 저항에 나섰다.

지난 8년의 경험이 보여 준 것은 점령이 아프가니스탄 민중의 삶을 개선하긴커녕 더 끔찍한 나락으로 빠뜨렸다는 것이다. 미국의 제국주의적 점령을 끝장내는 것이야말로 아프가니스탄 민중의 평화와 안정을 바라는 모든 이가 풀어야 할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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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팍’ 전쟁은 미국에게 “베트남보다 훨씬 어려운” 전쟁

‘아프팍’ 전쟁은 미국에게 “베트남보다 훨씬 어려운” 전쟁

조명훈 기자 jomh@left21.com

 

군사력에 의존해 아프가니스탄 점령을 ‘안정’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오바마의 전략은 부시와 크게 다르지 않다.

2001년 미국과 북부동맹, 파키스탄, 탈레반이 협상한 결과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을 떠나 돌아간 지역이 바로 북서변경주와 와지리스탄이다.

이곳은 역사적으로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양국이 공동으로 관할하는 지역으로 국경 개념이 거의 없다. 그래서 탈레반은 이곳을 거점으로 아프가니스탄을 넘나들며 미군과 게릴라전을 벌였다. 지형도 험난해 미군의 추격을 피해 숨기에도 제격이었다. 더구나 이 지역은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에게 전달되는 음식ㆍ연료ㆍ무기의 80퍼센트가 통과하는 핵심 수송로다.

이 지역을 확실히 통제해야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판단한 미국은 무인폭격기를 동원한 무차별 공격을 시작했다. 파키스탄 정부도 압력을 받아 군사작전에 나섰다. 무고한 파슈툰족 민간인들이 죽고 다치고 난민이 됐다. 이에 반발해 이 지역의 많은 파슈툰족들이 탈레반과 함께 저항에 나섰다.

파키스탄군의 상당수는 탈레반과 같은 파슈툰족 출신이다. 또 역사적으로 탈레반이 성장하는 과정에 파키스탄군이 깊숙이 개입했기 때문에 둘 사이에는 끈끈한 관계가 형성돼 있다. 더구나 전면전을 펼치려면 인도와 접경한 카슈미르 지역 군대를 끌어와야 한다. 그래서 파키스탄의 무샤라프 정부는 제한적으로만 이 지역에 군대를 투입했다.

그러나 북서변경주와 와지리스탄 지역에서 민간인 살상이 계속되면서 군사독재자 무샤라프의 정치 위기가 심화했고 결국 그는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파키스탄의 새로운 대통령 자르다리는 미국과 파키스탄 대중의 압력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다 지난 4월 중순 탈레반과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북서변경주 스와트 계곡에 대한 통제권을 인정해 주는 것이었다.

미국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은 노발대발하며 파키스탄을 비난했다. “[파키스탄 정부가] 탈레반 등 극단주의 세력과의 전투를 포기하고 있다.” 또 현재 IMF 구제금융을 받고 있는 파키스탄에 막대한 원조를 중단하겠다고 협박하며 북서변경주에서 군사작전을 펼치도록 종용했다.

자르다리 정부는 탈레반과 맺은 평화협정을 깨고 4월 말부터 북서변경주에서 대규모 군사작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아프팍(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전쟁이 본격화한 것이다.

그러나 오바마의 아프가니스탄ㆍ파키스탄 특사 리처드 홀브룩이 인정했듯이, 미국의 대아프가니스탄 전쟁은 “베트남보다 훨씬 어려운” 전쟁이다.

파키스탄으로 확대된 전쟁은 이 지역의 불안정을 더 부추기고 있다. 애당초 정치적 동질성이 높지 않았던 북서변경주 등 지역들이 분리ㆍ독립하거나 군사 쿠데타가 일어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미 북서변경주에서만 2백만 명이 난민이 됐고 난민캠프가 이들을 수용하지 못해 엄청난 혼란이 벌어지고 있다.

이미 점령 8년 동안 아프가니스탄 민중의 삶은 파괴됐다. 점령군의 ‘묻지마’ 폭격으로 무고한 민간인 수만 명이 희생됐고 수백만 명이 난민이 됐다. 평균수명도 남성 41세, 여성 42세로 줄었다. 대마초 재배는 오히려 늘어나 전 세계 양귀비의 90퍼센트 이상을 생산하는 아편의 천국이 됐다. 탈레반 아래서 신음하던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은 카르자이와 지방 군벌들 아래서 똑같이 고통받고 있다. 성매매는 전보다 더 늘었다. 미국은 재건을 약속했지만 말뿐이었고 그나마 지급된 재건 자금도 부패한 서방 NGO와 정부 관리들의 주머니만 채웠다. 치안 부재 상황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미국은 평범한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는 것은 안중에도 없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결국 참다 못한 아프가니스탄 민중이 다시 저항에 나섰고, 탈레반이 그 구심으로 다시 떠올랐다. 이른바 ‘신 탈레반’의 부상은 끔찍한 점령의 산물이었다.

한편, 미국이 간신히 가라앉힌 이라크의 불안정이 다시 커지고 있다. 미국은 이라크 점령 초기 종파 갈등을 부추겨 저항세력을 분열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정치적 불안정은 더 극심해졌다. 결국 2007년 이후 협상 전략을 추진한 미국은 시아파 정부, 시아파 저항세력, 수니파 저항세력 등 적대적인 세력들 간 일시적 휴전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최근 다시 이들 사이 충돌이 본격화하고 있다.

싸움의 판돈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미국 제국주의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선 모두에서 패배를 겪고 심지어 파키스탄까지 잃게 되는 총체적 난국이 펼쳐질 가능성도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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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오바마의 카이로대 연설문에 대한 평

 3000여 무슬림 “오바마” 연호 기립박수

오바마, 카이로대학 연설

경향신문 | 이청솔기자 | 입력 2009.06.05 01:33 | 수정 2009.06.05 09:29



"앗살라무 알라이쿰(안녕하십니까)."

4일 오후 1시10분 이집트 카이로 대학 그랜드홀 연설에 나선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아랍어로 인사하자 강당에 있던 3000여명의 청중은 우레와 같은 박수로 답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어 이슬람 경전인 코란을 인용, "'신을 깨닫고 늘 진실을 말하라'는 말이 있다"며 "난 그런 확신을 내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공유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또 "나는 지금 기독교인이지만 나의 아버지는 무슬림 세대가 포함된 케냐 가문 출신"이라고 말해 강당에 모인 무슬림 청중에게 친근감을 표했다.

연설 후반에는 "우리는 새로운 출발을 만들 수 있는 용기를 지니고 있을 때에만 우리가 추구하는 세상을 만들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며 코란, 성경, 유대인의 탈무드에서 평화를 사랑하라는 내용의 문구를 각각 인용했다.

오바마는 "세계 모든 사람들은 평화롭게 함께 살 수 있다. 우리는 신의 비전을 잘 알고 있다. 이제 신의 뜻을 이 땅에 정착시키는 것은 우리의 일"이라고 말한 뒤

"신의 가호가 당신과 함께하기를 바란다"고 말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50여분간 진행된 연설이 끝나자 청중은 오바마가 퇴장할 때까지 기립박수를 보내며 '오바마! 오바마!'를 연호했다.


이날 연설은 아랍권 대표방송 알자지라, 알아라비아를 통해 중동 대부분의 지역에 방송된 것은 물론 미국 백악관 홈페이지를 통해 아랍어, 이란어, 우르드어 등 13개 언어로 번역된 연설문도 제공됐다.


백악관은 이와 함께 페이스북, 트위터 등 온라인 인맥구축서비스 사이트에도 연설문을 게재, 회원간 활발한 토론이 이뤄지도록 했다.

무슬림과의 '새로운 시작'을 선언한 오바마의 연설에 대해 이슬람권은 일단 환영하면서도

실질적인 행동의 변화가 뒤따라야 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나빌 아부 루데이나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대변인은 이날 두 국가 해법에 대한 지지 의사를 재확인한 오바마의 연설에 대해 "훌륭한 시작"이라며 만족스럽다는 뜻을 밝혔다고 AFP통신이 보도했다.


그는 "오바마가 이스라엘 편향적인 과거 미국 정책과의 단절을 선언했다"고 평가했다.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는 오바마의 연설이 '눈에 띄는 변화'를 보여줬지만 모순도 적지 않다고 평가했다.

하마스 소속 마무드 라마히 의원은 "오바마는 미국의 외교정책이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절과 다르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었지만 관건은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를 쟁취할 수 있느냐는 것"이라며 "그가 그런 노력을 보여준다면 모든 정파가 믿음을 보낼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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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포럼주제를 잡으면서

6월 4일 카이로 대학에서 전달한 오바마의 평화의 메시지가 전 세계 평화를 염원하는 이들을 환호하게 만들었다. 오바마는 "세계 모든 사람들은 평화롭게 함께 살 수 있다."고 외쳤다.

 

그러나, 오바마는 아프가니스탄에서 공세를 강화하고 있고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파키스탄으로 확대되면서 전쟁의 판돈이 커지고 있다. 

 

오바마의 아프팍(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전략은 무엇이고, 그것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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