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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 캘리니코스 논평-“제국의 무덤”으로 진군하는 오바마

알렉스 캘리니코스 논평

“제국의 무덤”으로 진군하는 오바마

알렉스 캘리니코스 (런던대학교 킹스칼리지 유럽학 교수 / 영국사회주의노동자당 중앙위원)

 

지난주 두 사건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수위를 높이겠다는 오바마의 주장이 빈말이 아니었음을 보여 줬다.

하나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오바마는 이라크 수감자를 괴롭히는 미군 병사들의 사진을 공개하겠다는 애초 약속을 번복했다. 백악관 대변인은 순전히 미국 군대의 안전을 염려해서 입장을 바꿨다고 말했다. 그러나 고위 군장성들의 압력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것은 오바마가 조지 부시 정부 시절에 테러 용의자들의 고문을 허용하는 메모를 작성했던 전직 관리들을 처벌하는 문제를 놓고 왔다 갔다 한 것을 떠올리게 한다.

오바마는 자신을 뽑아 준 사람들, 즉 9ㆍ11 이후 부시가 선언한 전 세계적 비상 사태를 끝내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압력을 받고 있다. 그러나 오바마는 과거 부시를 도와 미국의 제국주의 전쟁을 벌인 국가안보 기구들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오바마는 고문 지시 메모를 공개하기 앞서 CIA 본부를 방문해 비밀 공작원들을 한 자리에 모아 놓고 자신이 그들을 얼마나 아끼고 필요로 하는지 강조한 것이다.

또 다른 사건은 오바마가 아프가니스탄에서 어떤 작전을 펴려고 하는지 보여 주는 것이었다. 지난주 월요일[5월 11일] 미 국방장관 로버트 게이츠는 이제 겨우 임명된 지 11개월 된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사령관 데이비드 맥키어넌을 해임한다고 발표했다. 게이츠는 맥키어넌의 경력이 끝난 것이냐는 질문에 “아마도”라고 퉁명스럽게 답했다.

게이츠는 이 해임이 전략의 변화와 연결돼 있음을 분명히 했다. 스탠리 맥크리스탈 중장이 맥키어넌을 대체할 것인데, 그는 부시 정부에서 도널드 럼스펠드가 국방장관일 때 많은 지원을 받았던 합동특수전 사령부에서 근무했다.

이 변화 뒤에는 틀림없이 데이비드 페트레이어스 장군이 있을 것이다. 그는 2007~2008년 이라크 ‘증파’를 기획한 인물이다. 그는 지금 ‘아프리카의 뿔’(에티오피아ㆍ지부티ㆍ소말리아 3개국을 포함하는 지역의 속칭)에서 중동을 거쳐 아프가니스탄을 포괄하는 중부사령부 지휘관이다.

오바마는 아프가니스탄 증파를 결정했다. 현재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숫자는 4만 5천 명으로, 올초보다 1만 3천 명이 늘었고, 올해 말에는 6만 8천 명에 이를 예정이다. 그러나 맥키어넌은 전형적인 군인이다. 그는 2003년 부시와 럼스펠드가 너무 적은 육군을 이용해 이라크를 침략했다고 비판한 장군 중 한 명이다.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이그나티우스는 현재 적용중인 [페트레이어스의] 대안 전략의 뼈대를 이렇게 요약했다. “페트레이어스 전략의 기본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저항집단들을 전투성 수준에 따라 수평으로 배치해 보자. 맨 왼쪽에는 ‘타협 불가능한’ 극렬분자들이 있다. 미국이 그들을 길들일 방법은 없다. 오른쪽으로 이동하면 할수록 좀더 유연하고 ‘타협 가능한’ 집단에 가까워질 것이다.”

“페트레이어스는 이라크에서 왼쪽 집단을 오른쪽으로, 즉, 극렬분자들을 미군의 돈을 받는 부족 민병대로 변화시켰다. 그러지 않은 광신도들은 미군 특수부대의 ‘생포하거나 죽이는’ 작전의 표적이 됐고, 맥크리스탈이 이 작전을 지휘했다. 이것은 강경책과 회유책을 결합한 전략이다. 무력을 사용해 그 지역을 확보하고, 그 뒤 그 지역을 유지하기 위해 좀더 부드러운 대(對)게릴라전 수단들을 사용하고 경제를 재건한다는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페트레이어스의 계획은 오바마의 결정으로 추가 파병된 2만 1천 명을 이용해 올해 적을 강하게 치고 나서 탈레반 연합이 분열하는지 지켜보자는 것이다. 따라서 처음에는 미군이 남부의 탈레반 거점을 공격하면서 폭력 수위가 크게 높아질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 전략이 성공한다면, 페트레이어스가 ‘카멜레온 게릴라’라고 부른 집단이 조금씩 분열하기 시작할 것이다.”

다른 많은 대게릴라 전략처럼 이 전략도 정치를 빼먹는다. 부시 정부 때 국방부에서 일한 셀레스트 딘은 <워싱턴포스트>에 기고한 글에서 다양한 정치 세력들이 “전투를 멈추고 타협하기로 결정한 것”이 이라크에 제한적이지만 안정을 가져오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했다고 지적했다.

탈레반도 그럴까? 솔직히 의심스럽다. 그들의 영향력은 커지고 있고, 단지 급진 이슬람주의 이데올로기만이 아니라 과거 승리의 경험에서 비롯한 자신감이 있다. 이그나티우스가 지적하듯이 오바마는 지금 “그의 대통령직을 걸고 ‘제국의 무덤’으로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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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반 ― 제국주의의 피조물에서 저항의 구심으로

탈레반 ― 제국주의의 피조물에서 저항의 구심으로

조명훈 기자 jomh@left21.com

 

오바마는 취임 초 “알카에다와 탈레반 테러조직을 반드시 해체해야 한다”며 아프가니스탄 증파 결정을 내렸고, 최근엔 아프가니스탄 대통령 카르자이와 파키스탄 대통령 자르다리를 백악관으로 불러 탈레반 소탕에 대한 전의를 다졌다.

탈레반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초보수적 이슬람 교리인 와하비즘에 바탕을 둔 단체다. 이전 탈레반 치하의 아프가니스탄과 지금의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확인할 수 있듯 이들이 지향하는 사회는 지독하게 우익적이고 여성차별적이다.

미국 정부는 이 이유를 들어 아프가니스탄 점령을 정당화했고, 아프가니스탄 바깥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반대하지 않거나 심지어 지지했다. 한국에서도 2007년 샘물교회 교인들이 탈레반에게 피랍됐을 때, 참여연대 등 평화주의 단체들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점령, 한국의 파병 정책과 같은 비중으로 탈레반을 비판했다.

그러나 애당초 미국과 파키스탄은 탈레반에 적대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자르다리가 지적하듯이 탈레반은 “우리[파키스탄]와 미국에 의해 만들어진 … 존재”였다.

탈레반을 이해하려면 30년 전으로 돌아가 그들이 집권하게 된 과정을 살펴봐야 한다.

1979년 옛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해 8년 동안 점령을 지속했다. 이 기간 동안 50만 명이 살해됐고 1백만 명이 불구가 됐으며 8백만 명이 난민이 됐다. 당시 아프가니스탄의 총인구는 약 1천5백만 명이었다.

그러나 저항은 멈추지 않았고 옛 소련과 경쟁하던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이슬람주의자들, 즉 무자헤딘이 투쟁을 이끌었다. 1988년, 옛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했다.

중앙권력에 갑작스레 공백이 생기자 이번엔 이슬람주의자들이 치열한 내전을 벌였다. 이 내전은 무려 7년간 지속됐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이 계속 정치적 혼란 상태로 남는 것을 원치 않았다. 미국이 이란과 러시아의 간섭을 받지 않고 중앙아시아의 풍부한 자원을 갈취하려면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적 안정이 반드시 필요했다.

이런 필요에 따라 탈레반은 미국과 파키스탄 정보 당국의 후원 아래 성장할 수 있었다. 탈레반은 파키스탄의 아프가니스탄 난민촌 ‘학생들(탈레반)’로 구성됐는데, 아프가니스탄 인구의 약 50퍼센트를 차지하는 파슈툰족 출신이 압도적이었다. 또 이들은 성장기에 사우디아라비아의 지원 아래 설립된 종교학교(마드라사)에서 교육을 받았다. 이들의 이런 출신 배경이 탈레반 사상의 두 가지 주요한 특징, 즉 이슬람주의와 파슈툰족 우월주의를 만들어 냈다.

1994년 탈레반이 처음 아프가니스탄 국경을 넘었을 때, 그들은 겨우 30명짜리 게릴라 조직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단 2년 만에 수만 명으로 불어나 파슈툰족이 대다수인 아프가니스탄 동부와 남부, 수도 카불을 접수했다.

부패한 이전 권력자들과 다르게 탈레반이 법과 질서를 강조했기 때문에 아프가니스탄 대중은 그들을 신뢰했다. 또 탈레반이 미국과 파키스탄의 후원을 받고 있다는 것 때문에 사람들은 이들이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 줄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그러나 파슈툰족 우월주의는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 전체를 자신의 통치 아래 두는 데 걸림돌이 됐다. 탈레반의 통제 범위는 아프가니스탄 동부와 남부를 벗어나지 못했고 나머지 지역은 군벌들이 통치했다. 이것을 지켜본 미국은 탈레반을 통해 아프가니스탄의 안정을 이루고자 한 기대를 접었고, 1990년대 후반 그들에 대한 지원을 끊었다.

그 뒤 2001년에 9.11 테러가 발생하자 미국은 곧바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미국은 이 전쟁에서 손쉽게 이길 수 있었다. 오랜 기간 침략과 내전에 이력이 난 아프가니스탄 민중은 당장 저항에 나서지 않았다. 또 탈레반은 미국의 동맹인 사우디아라비아를 본뜬 초보수적 이슬람 통치와 축구장에서의 즉결 처형 등 기행으로 대중의 지지를 많이 잃은 상태였다.

파키스탄 정보당국이 나서 미국과 탈레반 사이 평화협정이 체결되는 데 징검다리 구실을 했다. 이 협정으로 탈레반은 카불을 떠나 파키스탄 접경 북서변경주 등 파슈툰 부족 지역으로 돌아갔고 미국은 승리를 선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점령군의 야만적 행태는 곳곳에서 무고한 희생자를 만들어 냈고 ‘재건’을 한다며 들어온 NGO들은 부패했다. 결국 사람들은 다시 투쟁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이 투쟁을 이끌고 있는 것은 바로 탈레반이다. 아프가니스탄 민중이 탈레반을 썩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주도권을 인정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의 점령에 협력하지 않고 공공연히 저항을 호소하는 세력으로 잘 조직돼 있기 때문이다.

지난 경험에서 배운 탈레반도 이전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여성차별적이고 억압적이다. 그러나 민간인들을 상대로 ‘테러’를 벌이는 전술을 지양했고 ― 이것은 주로 알 카에다가 즐겨 쓰는 수법이다 ― 파슈툰족 우월주의를 내세우지 않았다. 대신 점령군에 맞서 모든 무슬림이 단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탈레반은 현재 아프가니스탄 전 국토의 80퍼센트를 장악해 명실공히 가장 유력한 정치세력이 됐다.

한편, 탈레반을 군사적으로 제압하려는 미국의 시도는 오히려 역효과를 낳고 있다.

탈레반이 파키스탄 지역을 넘나들며 활동하는 데 조바심을 느낀 미국은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국경 지역에 무인폭격기를 이용한 무자비한 폭격으로 대응했다. 또 파키스탄 정부에 압력을 넣어 이 지역에서 군사작전을 펼치게 했다. 무고한 민간인들이 엄청나게 희생됐고 무려 2백만 명이 난민이 됐다. 탈레반에 수동적 지지를 보내던 사람들 중 일부는 탈레반과 함께 무장 저항에 나섰다.

지난 8년의 경험이 보여 준 것은 점령이 아프가니스탄 민중의 삶을 개선하긴커녕 더 끔찍한 나락으로 빠뜨렸다는 것이다. 미국의 제국주의적 점령을 끝장내는 것이야말로 아프가니스탄 민중의 평화와 안정을 바라는 모든 이가 풀어야 할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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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반 ― 제국주의의 피조물에서 저항의 구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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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훈 기자 jomh@left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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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는 취임 초 “알카에다와 탈레반 테러조직을 반드시 해체해야 한다”며 아프가니스탄 증파 결정을 내렸고, 최근엔 아프가니스탄 대통령 카르자이와 파키스탄 대통령 자르다리를 백악관으로 불러 탈레반 소탕에 대한 전의를 다졌다.

탈레반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초보수적 이슬람 교리인 와하비즘에 바탕을 둔 단체다. 이전 탈레반 치하의 아프가니스탄과 지금의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확인할 수 있듯 이들이 지향하는 사회는 지독하게 우익적이고 여성차별적이다.

미국 정부는 이 이유를 들어 아프가니스탄 점령을 정당화했고, 아프가니스탄 바깥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반대하지 않거나 심지어 지지했다. 한국에서도 2007년 샘물교회 교인들이 탈레반에게 피랍됐을 때, 참여연대 등 평화주의 단체들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점령, 한국의 파병 정책과 같은 비중으로 탈레반을 비판했다.

그러나 애당초 미국과 파키스탄은 탈레반에 적대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자르다리가 지적하듯이 탈레반은 “우리[파키스탄]와 미국에 의해 만들어진 … 존재”였다.

탈레반을 이해하려면 30년 전으로 돌아가 그들이 집권하게 된 과정을 살펴봐야 한다.

1979년 옛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해 8년 동안 점령을 지속했다. 이 기간 동안 50만 명이 살해됐고 1백만 명이 불구가 됐으며 8백만 명이 난민이 됐다. 당시 아프가니스탄의 총인구는 약 1천5백만 명이었다.

그러나 저항은 멈추지 않았고 옛 소련과 경쟁하던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이슬람주의자들, 즉 무자헤딘이 투쟁을 이끌었다. 1988년, 옛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했다.

중앙권력에 갑작스레 공백이 생기자 이번엔 이슬람주의자들이 치열한 내전을 벌였다. 이 내전은 무려 7년간 지속됐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이 계속 정치적 혼란 상태로 남는 것을 원치 않았다. 미국이 이란과 러시아의 간섭을 받지 않고 중앙아시아의 풍부한 자원을 갈취하려면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적 안정이 반드시 필요했다.

이런 필요에 따라 탈레반은 미국과 파키스탄 정보 당국의 후원 아래 성장할 수 있었다. 탈레반은 파키스탄의 아프가니스탄 난민촌 ‘학생들(탈레반)’로 구성됐는데, 아프가니스탄 인구의 약 50퍼센트를 차지하는 파슈툰족 출신이 압도적이었다. 또 이들은 성장기에 사우디아라비아의 지원 아래 설립된 종교학교(마드라사)에서 교육을 받았다. 이들의 이런 출신 배경이 탈레반 사상의 두 가지 주요한 특징, 즉 이슬람주의와 파슈툰족 우월주의를 만들어 냈다.

1994년 탈레반이 처음 아프가니스탄 국경을 넘었을 때, 그들은 겨우 30명짜리 게릴라 조직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단 2년 만에 수만 명으로 불어나 파슈툰족이 대다수인 아프가니스탄 동부와 남부, 수도 카불을 접수했다.

부패한 이전 권력자들과 다르게 탈레반이 법과 질서를 강조했기 때문에 아프가니스탄 대중은 그들을 신뢰했다. 또 탈레반이 미국과 파키스탄의 후원을 받고 있다는 것 때문에 사람들은 이들이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 줄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그러나 파슈툰족 우월주의는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 전체를 자신의 통치 아래 두는 데 걸림돌이 됐다. 탈레반의 통제 범위는 아프가니스탄 동부와 남부를 벗어나지 못했고 나머지 지역은 군벌들이 통치했다. 이것을 지켜본 미국은 탈레반을 통해 아프가니스탄의 안정을 이루고자 한 기대를 접었고, 1990년대 후반 그들에 대한 지원을 끊었다.

그 뒤 2001년에 9.11 테러가 발생하자 미국은 곧바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미국은 이 전쟁에서 손쉽게 이길 수 있었다. 오랜 기간 침략과 내전에 이력이 난 아프가니스탄 민중은 당장 저항에 나서지 않았다. 또 탈레반은 미국의 동맹인 사우디아라비아를 본뜬 초보수적 이슬람 통치와 축구장에서의 즉결 처형 등 기행으로 대중의 지지를 많이 잃은 상태였다.

파키스탄 정보당국이 나서 미국과 탈레반 사이 평화협정이 체결되는 데 징검다리 구실을 했다. 이 협정으로 탈레반은 카불을 떠나 파키스탄 접경 북서변경주 등 파슈툰 부족 지역으로 돌아갔고 미국은 승리를 선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점령군의 야만적 행태는 곳곳에서 무고한 희생자를 만들어 냈고 ‘재건’을 한다며 들어온 NGO들은 부패했다. 결국 사람들은 다시 투쟁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이 투쟁을 이끌고 있는 것은 바로 탈레반이다. 아프가니스탄 민중이 탈레반을 썩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주도권을 인정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의 점령에 협력하지 않고 공공연히 저항을 호소하는 세력으로 잘 조직돼 있기 때문이다.

지난 경험에서 배운 탈레반도 이전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여성차별적이고 억압적이다. 그러나 민간인들을 상대로 ‘테러’를 벌이는 전술을 지양했고 ― 이것은 주로 알 카에다가 즐겨 쓰는 수법이다 ― 파슈툰족 우월주의를 내세우지 않았다. 대신 점령군에 맞서 모든 무슬림이 단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탈레반은 현재 아프가니스탄 전 국토의 80퍼센트를 장악해 명실공히 가장 유력한 정치세력이 됐다.

한편, 탈레반을 군사적으로 제압하려는 미국의 시도는 오히려 역효과를 낳고 있다.

탈레반이 파키스탄 지역을 넘나들며 활동하는 데 조바심을 느낀 미국은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국경 지역에 무인폭격기를 이용한 무자비한 폭격으로 대응했다. 또 파키스탄 정부에 압력을 넣어 이 지역에서 군사작전을 펼치게 했다. 무고한 민간인들이 엄청나게 희생됐고 무려 2백만 명이 난민이 됐다. 탈레반에 수동적 지지를 보내던 사람들 중 일부는 탈레반과 함께 무장 저항에 나섰다.

지난 8년의 경험이 보여 준 것은 점령이 아프가니스탄 민중의 삶을 개선하긴커녕 더 끔찍한 나락으로 빠뜨렸다는 것이다. 미국의 제국주의적 점령을 끝장내는 것이야말로 아프가니스탄 민중의 평화와 안정을 바라는 모든 이가 풀어야 할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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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팍’ 전쟁은 미국에게 “베트남보다 훨씬 어려운” 전쟁

‘아프팍’ 전쟁은 미국에게 “베트남보다 훨씬 어려운” 전쟁

조명훈 기자 jomh@left21.com

 

군사력에 의존해 아프가니스탄 점령을 ‘안정’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오바마의 전략은 부시와 크게 다르지 않다.

2001년 미국과 북부동맹, 파키스탄, 탈레반이 협상한 결과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을 떠나 돌아간 지역이 바로 북서변경주와 와지리스탄이다.

이곳은 역사적으로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양국이 공동으로 관할하는 지역으로 국경 개념이 거의 없다. 그래서 탈레반은 이곳을 거점으로 아프가니스탄을 넘나들며 미군과 게릴라전을 벌였다. 지형도 험난해 미군의 추격을 피해 숨기에도 제격이었다. 더구나 이 지역은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에게 전달되는 음식ㆍ연료ㆍ무기의 80퍼센트가 통과하는 핵심 수송로다.

이 지역을 확실히 통제해야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판단한 미국은 무인폭격기를 동원한 무차별 공격을 시작했다. 파키스탄 정부도 압력을 받아 군사작전에 나섰다. 무고한 파슈툰족 민간인들이 죽고 다치고 난민이 됐다. 이에 반발해 이 지역의 많은 파슈툰족들이 탈레반과 함께 저항에 나섰다.

파키스탄군의 상당수는 탈레반과 같은 파슈툰족 출신이다. 또 역사적으로 탈레반이 성장하는 과정에 파키스탄군이 깊숙이 개입했기 때문에 둘 사이에는 끈끈한 관계가 형성돼 있다. 더구나 전면전을 펼치려면 인도와 접경한 카슈미르 지역 군대를 끌어와야 한다. 그래서 파키스탄의 무샤라프 정부는 제한적으로만 이 지역에 군대를 투입했다.

그러나 북서변경주와 와지리스탄 지역에서 민간인 살상이 계속되면서 군사독재자 무샤라프의 정치 위기가 심화했고 결국 그는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파키스탄의 새로운 대통령 자르다리는 미국과 파키스탄 대중의 압력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다 지난 4월 중순 탈레반과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북서변경주 스와트 계곡에 대한 통제권을 인정해 주는 것이었다.

미국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은 노발대발하며 파키스탄을 비난했다. “[파키스탄 정부가] 탈레반 등 극단주의 세력과의 전투를 포기하고 있다.” 또 현재 IMF 구제금융을 받고 있는 파키스탄에 막대한 원조를 중단하겠다고 협박하며 북서변경주에서 군사작전을 펼치도록 종용했다.

자르다리 정부는 탈레반과 맺은 평화협정을 깨고 4월 말부터 북서변경주에서 대규모 군사작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아프팍(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전쟁이 본격화한 것이다.

그러나 오바마의 아프가니스탄ㆍ파키스탄 특사 리처드 홀브룩이 인정했듯이, 미국의 대아프가니스탄 전쟁은 “베트남보다 훨씬 어려운” 전쟁이다.

파키스탄으로 확대된 전쟁은 이 지역의 불안정을 더 부추기고 있다. 애당초 정치적 동질성이 높지 않았던 북서변경주 등 지역들이 분리ㆍ독립하거나 군사 쿠데타가 일어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미 북서변경주에서만 2백만 명이 난민이 됐고 난민캠프가 이들을 수용하지 못해 엄청난 혼란이 벌어지고 있다.

이미 점령 8년 동안 아프가니스탄 민중의 삶은 파괴됐다. 점령군의 ‘묻지마’ 폭격으로 무고한 민간인 수만 명이 희생됐고 수백만 명이 난민이 됐다. 평균수명도 남성 41세, 여성 42세로 줄었다. 대마초 재배는 오히려 늘어나 전 세계 양귀비의 90퍼센트 이상을 생산하는 아편의 천국이 됐다. 탈레반 아래서 신음하던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은 카르자이와 지방 군벌들 아래서 똑같이 고통받고 있다. 성매매는 전보다 더 늘었다. 미국은 재건을 약속했지만 말뿐이었고 그나마 지급된 재건 자금도 부패한 서방 NGO와 정부 관리들의 주머니만 채웠다. 치안 부재 상황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미국은 평범한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는 것은 안중에도 없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결국 참다 못한 아프가니스탄 민중이 다시 저항에 나섰고, 탈레반이 그 구심으로 다시 떠올랐다. 이른바 ‘신 탈레반’의 부상은 끔찍한 점령의 산물이었다.

한편, 미국이 간신히 가라앉힌 이라크의 불안정이 다시 커지고 있다. 미국은 이라크 점령 초기 종파 갈등을 부추겨 저항세력을 분열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정치적 불안정은 더 극심해졌다. 결국 2007년 이후 협상 전략을 추진한 미국은 시아파 정부, 시아파 저항세력, 수니파 저항세력 등 적대적인 세력들 간 일시적 휴전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최근 다시 이들 사이 충돌이 본격화하고 있다.

싸움의 판돈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미국 제국주의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선 모두에서 패배를 겪고 심지어 파키스탄까지 잃게 되는 총체적 난국이 펼쳐질 가능성도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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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오바마의 카이로대 연설문에 대한 평

 3000여 무슬림 “오바마” 연호 기립박수

오바마, 카이로대학 연설

경향신문 | 이청솔기자 | 입력 2009.06.05 01:33 | 수정 2009.06.05 09:29



"앗살라무 알라이쿰(안녕하십니까)."

4일 오후 1시10분 이집트 카이로 대학 그랜드홀 연설에 나선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아랍어로 인사하자 강당에 있던 3000여명의 청중은 우레와 같은 박수로 답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어 이슬람 경전인 코란을 인용, "'신을 깨닫고 늘 진실을 말하라'는 말이 있다"며 "난 그런 확신을 내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공유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또 "나는 지금 기독교인이지만 나의 아버지는 무슬림 세대가 포함된 케냐 가문 출신"이라고 말해 강당에 모인 무슬림 청중에게 친근감을 표했다.

연설 후반에는 "우리는 새로운 출발을 만들 수 있는 용기를 지니고 있을 때에만 우리가 추구하는 세상을 만들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며 코란, 성경, 유대인의 탈무드에서 평화를 사랑하라는 내용의 문구를 각각 인용했다.

오바마는 "세계 모든 사람들은 평화롭게 함께 살 수 있다. 우리는 신의 비전을 잘 알고 있다. 이제 신의 뜻을 이 땅에 정착시키는 것은 우리의 일"이라고 말한 뒤

"신의 가호가 당신과 함께하기를 바란다"고 말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50여분간 진행된 연설이 끝나자 청중은 오바마가 퇴장할 때까지 기립박수를 보내며 '오바마! 오바마!'를 연호했다.


이날 연설은 아랍권 대표방송 알자지라, 알아라비아를 통해 중동 대부분의 지역에 방송된 것은 물론 미국 백악관 홈페이지를 통해 아랍어, 이란어, 우르드어 등 13개 언어로 번역된 연설문도 제공됐다.


백악관은 이와 함께 페이스북, 트위터 등 온라인 인맥구축서비스 사이트에도 연설문을 게재, 회원간 활발한 토론이 이뤄지도록 했다.

무슬림과의 '새로운 시작'을 선언한 오바마의 연설에 대해 이슬람권은 일단 환영하면서도

실질적인 행동의 변화가 뒤따라야 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나빌 아부 루데이나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대변인은 이날 두 국가 해법에 대한 지지 의사를 재확인한 오바마의 연설에 대해 "훌륭한 시작"이라며 만족스럽다는 뜻을 밝혔다고 AFP통신이 보도했다.


그는 "오바마가 이스라엘 편향적인 과거 미국 정책과의 단절을 선언했다"고 평가했다.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는 오바마의 연설이 '눈에 띄는 변화'를 보여줬지만 모순도 적지 않다고 평가했다.

하마스 소속 마무드 라마히 의원은 "오바마는 미국의 외교정책이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절과 다르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었지만 관건은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를 쟁취할 수 있느냐는 것"이라며 "그가 그런 노력을 보여준다면 모든 정파가 믿음을 보낼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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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포럼주제를 잡으면서

6월 4일 카이로 대학에서 전달한 오바마의 평화의 메시지가 전 세계 평화를 염원하는 이들을 환호하게 만들었다. 오바마는 "세계 모든 사람들은 평화롭게 함께 살 수 있다."고 외쳤다.

 

그러나, 오바마는 아프가니스탄에서 공세를 강화하고 있고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파키스탄으로 확대되면서 전쟁의 판돈이 커지고 있다. 

 

오바마의 아프팍(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전략은 무엇이고, 그것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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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포럼 제목을 정하기 전 제기되었던 문제제기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인가?

 

지금의 민주주의를 어떻게 이루었는가?

 

민주주의 시계는 거꾸로 갈 수밖에 없는가?

 

진정한 민주주의는 무엇인가

 

 

 

 

=> 이러한 문제제기들이 있어 5월 포럼 제목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로 정하게 되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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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quot;반성의 빛 안 보이는 미네르바에 실형 선고해야&quot;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 박아무개씨의 1심 재판이 오는 20일 선고만 남겨놓았다. 검찰은 13일 그에게 1년 6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박씨는 다음 '아고라'에 지난해 7월 30일 '외화 보유고 부족으로 외화 예산 환전업무 8월 1일부 전면 중단'이라는 내용의 글을, 12월 29일에는 '주요 7대 금융기관 및 수출입 관련 주요 기업에게 달러매수 금지 긴급 공문 전송'이라는 내용의 글을 올린 후 허위사실 유포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이날 오후 서울중앙지법 형사5단독 유영현 판사 심리로 열린 공판은 피고인 신문과 검찰 구형, 피고인 최후진술로 이어졌다.

 

서울중앙지검의 오현철 검사는 "피고인이 실제로 국가와 국민에게 깨친 해악이 분명히 있다"며 "피고인에게 마땅히 실형을 선고되어야 하다고 사료되므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해달라"고 판사에게 요청했다.

 

검사의 구형이 떨어지자 방청석 이곳저곳에서는 "이게 뭐야", "결국…"이라는 탄식들이 나지막이 터져 나왔다.

 

오 검사가 밝힌 미네르바의 죄상(?)은 다음과 같다.

 

"9월 위기설과 11월 물가대란설, IMF 구제금융설을 언급하거나 '6개월치 생필품을 집에 보관하라', '6개월치 생활비를 현금으로 보유하라'고 권유하는 등 대단히 자극적인 글로 국민들의 불안 심리를 노골적으로 자극했다. 노골적으로 허위 사실을 유포하고도 지금까지 자신의 행위를 반성하는 빛은 전혀 보이지 않고 도리어 '인터넷에 글 좀 썼다가 잡아가두냐'는 식의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박씨와 그의 변호인들은 검찰의 구형에 실망을 감추지 않았다.

 

김갑배 변호사는 "피고의 글로 인해 정부 외환보유액에 손실을 입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논리의 비약"이라며 "일반인들이 1만 달러 이상의 외환을 바꾸려면 국세청에 통보되는 상황에서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환투기 목적으로 외환을 사들였는지 입증이 되지 않았으니 재판장의 올바른 판결을 바란다"고 말했다.

 

박찬종 변호사도 "경제를 어지럽힌 책임을 묻는다면 미네르바가 아니라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 장관에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네르바 박씨는 최후진술에서 "검찰은 내가 허위사실을 유포해 공익을 해치려고 했다고 주장하지만, 나는 루머를 퍼뜨려 금전적 이득을 취하거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한 사실이 없다"며 법원의 현명한 판결을 호소했다.

 

유영현 판사는 "다음 재판(선고 공판)은 오는 20일 오후 2시에 열겠다"고 말했다.

 

 

오마이뉴스 손병관 기자

 

기사원문-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109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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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습시위꾼’ 소환장 발부- MB의 ‘상습적’ 민주주의 역행 시도를 막아야

경제 위기로 인해 부글부글 끓고 있는 사람들의 불만과 분노가 언제 어디서 제2의 촛불이 되어 터져 나올지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에, 이명박 정부는 갖은 수단과 방법으로 저항의 불씨를 짓밟으려 한다.

서울경찰청은 용산 추모 집회 도중 있었던 일부 시위대의 ‘경찰 폭행 사건’을 빌미로 ‘상습시위꾼’을 찾겠다고 나섰다. 촛불 단체 네티즌들을 이 잡듯 수사하고 다음 아고라에 시위 관련 글을 올린 네티즌 3명의 집과 사무실을 압수수색했다.

 

또 예전 집회 현장에서 채증한 동영상과 사진을 근거로, 집회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마구잡이로 소환장을 발부하고 있다. 현재 고려대 총학생회장과 민주노동당 전국학생위원장을 비롯해 네티즌 80여 명(<민중의 소리> 보도)과 대학생 20여 명 등 1백 명 넘는 사람들이 소환장을 받았다. 경찰이 ‘상습시위꾼’ 규모를 계속 확대 발표하는 것을 보아 앞으로 소환 대상자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경찰이 말하는 ‘상습시위꾼’은 기준도 명확하지 않다. 그야말로 집회에 나와서 재수 없게 카메라에 ‘찍히면 죽는’ 것이다.

 

이번 소환 대상자에는 용산 추모 집회 참가자뿐 아니라 지난해 촛불집회 참가자와 대학생 등록금 집회 참가자까지 포함돼 있다. 이것은 명백히 모든 저항의 목소리를 억누르려는 것이다.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등록금 인하, 용산 살인 진압 책임자 처벌은 국민의 대다수가 지지하는 요구였다.

 

최근 정부가 이처럼 탄압을 강화하는 것은 새로운 저항의 기운이 싹트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 학생, 시민ㆍ사회단체, 촛불 시민들이 함께 올해 5월 1일 메이데이와 5월 2일 촛불집회 1주년을 준비하고 있다.

이런 투쟁으로 MB의 민주주의 역주행을 좌절시켜야 한다.

 

성지현

 

기사원문- http://www.left21.com/article/6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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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신경민 앵커 교체- 이명박의 언론 탄압에 맞선 더 강력한 투쟁이 필요하다

결국 MBC 사측이 <뉴스데스크> 신경민 앵커를 교체하기로 결정했다.

 

지난 8일 교체 소식이 알려지자 MBC 기자회는 즉각 비대위를 꾸려 제작 거부를, 라디오 PD들은 집단 연차를 내며 강력히 저항했다. 이에 MBC 사장 엄기영은 “심사숙고”하겠다며 교체 결정을 미루다 결국 “엠비 시키는대로” 진행자 교체를 결정했다. MBC 사측이 ‘정권에 부역하겠다는 항복 선언’(언론노조)을 한 것이다.

MBC 사측은 ‘시청률 제고’ 등의 이유를 들먹이고 있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은 없다. 신경민 앵커 때문에 시청률이 떨어졌다는 어떠한 증거도 없기 때문이다.

 

신경민 앵커 교체 뒤에는 너무나도 뻔히 보이는 정치적 압력이 존재한다.

그동안 신 앵커는 “김석기 믿어주는 검찰, 참 너그럽다” 하는 등 이명박에 비판적인 클로징 멘트로 많은 사람들의 속을 시원하게 해 줬다. 이 때문에 그는 이명박과 우파들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엄기영은 담화문에서 “정치적 압력에 의한 것이 아니다” 하고 해명했지만 설령 직접 ‘교체’하라는 압력이 없었다는 게 사실이라고 해도 이명박은 이미 수도 없이 강한 압력을 넣었다.

신경민 앵커가 진행하는 <뉴스데스크>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경고’ 징계를 받았다. 말 그대로 “앵커가 자신의 주관을 드러내지 않고 날씨 얘기나”(MBC기자회)하라는 것이다.

 

이미 지난 1월 신경민 앵커는 “오래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아요. 교체 명분은 시청률이 되겠지만 시청률은 늘 그만했으니 구실일 테고요”(<씨네21>)라며 정치적 압력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에 대한 1년 가까이 계속되는 집요한 탄압과 낙하산 사장을 통해 KBS <시사 투나잇>, YTN <돌발영상> 등을 폐지한 것은 비판적인 프로그램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이명박의 분명한 메시지이자 압력이다.

더구나 최근 MBC는 광고매출이 큰 폭으로 떨어졌다. 1분기 MBC의 광고 매출은 지난해에 비해 무려 41퍼센트, 9백14억 원이 감소했다. 이는 KBS의 22.1퍼센트, 2백63억 원에 비해 압도적으로 큰 수치다.

낙하산 사장의 안착으로 보신각 타종 행사 왜곡 연출 등 이명박 입맛에 맞는 방송을 한 KBS와 두 차례에 걸친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MB악법을 저지한 MBC의 어마어마한 광고 수입 차이는 ‘외압’의 심증을 갖게 한다.

진행자 교체 방침과 거의 동시에 MBC 사측은 1분기 적자가 2백50억 원에 달한다며 명예퇴직 단행, 각종 수당 삭감, 의무안식년제도 도입, 상여금 성과연동 지급으로 전환 등을 발표하고 2차 비상경영체제 돌입을 선언했다. 이는 2015년까지 인력 20퍼센트를 감축하겠다며 지난 2월에 발표한 구조조정 안을 구체화한 것이다.

 

MBC 노동자들은 제작진 체포 시도와 압수수색 협박, 진행자 교체 ‘외압’ 등 이명박의 탄압과 구조조정을 본격화하려는 사측의 탄압 모두에 직면해 있다. 따라서 이명박에 맞서 투쟁하는 것과 동시에, 권력에는 굴복하면서 노동자들에게는 구조조정의 희생을 강요하는 사측에도 단호히 맞서 싸워야 한다.

MBC노조는 기자회와 라디오 PD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제작 거부와 연차 투쟁을 전체 조합원의 파업으로 확대해야 한다. 탄압 때는 시사교양국 PD들이, 신경민 앵커 교체 건으로 보도국 기자들이, 김미화 교체 건으로 라디오 PD들이 따로 투쟁하는 것은 힘을 분산시키는 것으로 효과적이지 않다.

 

이명박의 민주주의 파괴 ‘속도전’은 MBC 노동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모든 언론노동자, 더 나아가 모든 노동자들의 문제다. 비판 언론에 재갈을 물려 비판적인 목소리를 억누르려는 이명박의 시도는 집회ㆍ시위 및 표현의 자유에 대한 공격과 맞물려 있는 것이다.

 

따라서 언론노조는 아무런 결정 권한도 없고 지지부진한 논의로 시간만 끌고 있는 미디어발전국민위를 탈퇴하고 전면적인 투쟁 건설에 나서야 한다.

 

민주노총은 정리 해고, 비정규직법 개악뿐 아니라 민주주의 파괴 시도 등 정신없이 몰아치는 이명박의 반동 ‘속도전’에 맞서 파괴력 있는 파업 투쟁을 건설해야 한다. 5월 1일 메이데이 집회는 그것을 선포하는 것뿐 아니라 실행에 옮기는 자리여야 한다. 그럴 때만 이 모든 악행의 주역, 이명박을 ‘교체’할 수 있을 것이다.

 

박건희 기자 pkh@left21.com

 

 기사원문- http://www.left21.com/article/6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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