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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9/11/20
    혁명은 칵테일 파티가 아니다!!(1)
    은하철도
  2. 2009/11/18
    몸살은 싫어!!!
    은하철도
  3. 2009/11/18
    탱크를 막아선 그 시민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은하철도
  4. 2009/11/18
    진림(陳淋)의 사랑은 사랑일뿐.....(2)
    은하철도

혁명은 칵테일 파티가 아니다!!

중국의 마오가 했다는 말이다.

 

한가로이 농담이나 따먹으면서 음풍농월은  물론이고

 

도덕이나 절차를 따지는것을 경계하는 말이다.

 

혁명과 관련된 두가지 영화를 보았다.

 

하나는 칠레의 쿠데타를 다뤘던 '산티아고에 비는 내리고'와 독일 적군파를 다룬 '바더- 마인호프'

 

대통령 궁에서의 아엔데

 

 

 

 

매일 같이 거리에서는 국회에서는 그리고 주변에서는 계급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칵테일 파티는 개인적으로 친구들과 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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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살은 싫어!!!

일요일 오후에 시작된 몸살로 이틀을 몸져 누워있다가

 

이틀만에 출근을 했다.

 

주위에서는 신종플루 아니나며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두려워한다.

 

예전 누가 마스크만 썼다고 택시가 승차거부를 했다고 하던데...... 쩝......

 

신종플루던 기존의 플루던 별반 차이없어보이는데............ 쩝........

 

그나저나 아파트 투기 몰빵 인플루엔자는 서로 걸려들고 싶어하니........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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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크를 막아선 그 시민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탱크를 막아선 그 시민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중국과 관련해서 떠오르는 기억 두 가지가 있다.

어렸을 때 동네에는 화교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전족을 해서 뒤뚱거리며 걷는 호호백발의 할머니와 흔히 ‘짱깨’라고 불렀던 말끝마다 ‘...... 해’ 라고 했던 중국집 주인 그리고 우리와 방학이 일치하지 않았던 화교학교 학생들... 우리가 국군의 날과 개천절 그리고 한글날이 몰려있어 10월 달을 기다렸다면 화교 학생들은 10월 10일 신해혁명 기념일인 쌍십절을 기다리면서 우리가 학교가 가던 그날 그 얘들은 동네 골목에서 신나게 놀았었다.

다른 하나의 기억은 대학 신입생 때의 일이다. 89년 5월과 6월의 천안문 사태가 일어났을 때 구내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4학년 선배중 하나가 ‘중국 대학생들의 무책임한 난동’ 운운에 1학년 신입생임에도 발끈하면서 나름대로 민주주의며 자유를 들어 당시 중국의 대학생들을 옹호했었다.

 

 

쌍십절과 국경일

1911년 10월 10일 부패한 만주족 봉건 왕조를 타도하고 공화제 정부를 수립한 신해혁명으로 새로운 중국의 역사는 시작이 된다. 반봉건 반식민지의 상황 속에서 신음하고 있던 많은 중국인들에게 신해혁명은 앞의 두 가지 모순의 지양을 위한 서막이다. 그러나 서양, 특히나 미국의 민주주의에 경도되었던 손문을 중심으로 하는 일부의 지식인들은 거대한 반동과 외세의 물결에 움츠러들고 반혁명의 나락으로 곧 떨어지게 된다. 원세개의 친위 쿠데타와 지역에 할거하던 군벌들의 실질적인 봉건 체제로의 퇴행 그리고 영국과 독일 그리고 새로운 제국주의 국가로 발돋움하던 일본의 수탈과 착취로 중국의 인민들은 ‘민주주의’ 와 ‘자유’의 세례를 받기도 전에 이전 구체제의 모순이 더욱 심화된 상태로 ‘아시아의 암덩어리’ 이자 숙주 역할을 해야만 했다.

당시 아시아 최대의 항구이자 첨단의 도시였던 상해는 아울러 범죄와 타락 그리고 마약의 소굴로 그 악명을 떨쳐야만 하였다. 그러다 1917년 러시아 볼세비키 혁명에 고무된 일단의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사회주의사상은 이런 ‘아시아의 매음굴’ 상해의 어느 빈민가에서 결성된 중국 공산당을 통해 급속하게 인민들 속으로 파급이 된다. 희망을 찾는 인민들에게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리라.

장개석의 음모와 배신 그리고 학살로 인하여 급속도로 세력이 위축이 되고 급기야 중국 남부의 농촌지역을 중심으로 하던 공동체에 대한 대규모 토벌작전이 개시가 되면서 전설이 탄생하게 된다. ‘대장정’ 진시황의 만리장성을 훨씬 능가하는, 지금도 오지로 잦은 재해로 인해 도로가 단절되곤 하는 지역을 종횡무진하면서 수많은 눈 덮힌 설산과 급류 그리고 초원과 습지를 맨발로 각종 무기와 식량을 짊어지고 질병과 배고픔을 견디며 수많은 희생을 거쳐 북서부의 척박한 농촌 지역으로의 ‘후퇴’..

이 와중에 토착 사회주의 사상과 전술을 견지한 마오를 중심으로 하는 혁명 1세대의 진영이 갖추어지고 나름의 전략과 전술 그리고 기율을 토대로 이전의 상해 등의 도시 중심의 기존 전략에서 탈피, 농촌을 중심으로 하는 중국식 혁명 전술이 도모되면서 제 2의 흥기를 맡는다. 만주와 중국 북동부를 장악하던 일본 제국주의가 45년 8월 무조건 항복하게 되면서 중국 남서부에 거점을 두었던 장개석 국민당 정부와의 내전이 시작된다.

1911년 이후 인민들은 국민당 정부의 부패와 무능력 그리고 외세 의존 대신 기율과 희생을 몸소 실천하는 중국 공산당에 신뢰를 보내게 되고 드디어 1949년 10월 1일 전제 왕권의 상징이던 자금성의 정문인 천안문에서 새롭게 정비된 광장을 마주보고 역사적인 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하게 된다.

 

 

짧았던 영광 그리고 고난과 모순의 아수라장

 

부패에 선수였던 국민당의 수뇌부와 군대는 후퇴에도 선수였다. 군함에 엄청난 명나라와 청나라는 물론 그 이전 전제 봉건 시절의 유물을 한껏 싣고 일찌감치 꽁무니를 뺐던 장개석, 그리고 그의 부하들인 국민당 장군들 역시 미국으로부터 받은 군수물자를 ‘적’들인 인민해방군에게 팔아 자신들의 부하들의 생명을 사지로 몰았다. 결국 바다 건너 조그만 대만에 본거지를 틀고 뒤의 미국만을 믿고 택도 없는 본토수복의 기치를 호언장담하고 있을 때 ‘인민의 해방군’들은 서쪽의 이슬람교도들 지역과 히말라야 산맥의 조용한 불교국가 티벳을 ‘해방’하기 위해 저항하는 그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애초에 ‘만주족에 의한 청나라 타도’라는 신해혁명의 기치에서 보이듯이 철저한 민족주의적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쇼비니즘이 결합된 혁명의 물결은 49년 인민공화국의 수립이후 영토팽창의 작태에서도 들어나듯이 처음부터 잘못 끼워진 단추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민공화국 수립 이전의 반봉건 반식민지 상태에 대한 지양이 진행되면서 50년대 빠르게 사회가 회복이 되고 인민들에 대한 후생 개선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경험의 부족, 잦은 재해 그리고 급속한 사회의 질적 변화로 인한 혼란은 이전 잠시 동안의 회복의 순간을 발목 잡게 만들었다.

경제 성장과 정부와 당의 거대화로 인한 각종 잡음과 퇴행이 횡행하는 가운데 문화대혁명이 66년에 시작이 되면서 76년 마오의 사망까지 10년간의 모색과 후퇴, 혁명과 반혁명의 시대가 지속이 된다.

하나의 국가라기 보다는 대륙이라고 불릴만한 인구와 영토를 가지고 다양한 기후와 풍부한 자원 그리고 풍요로운 토양을 가진 중국은 인민들에게는 고통의 세월이 대부분이었지만 권력을 가지고 있던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특별잉여를 끊임없이 창출할 수 있었던 수천년의 ‘기회’의 땅이었다.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 이후 십 여년의 시간이 지난 60년대 역시 소수 당원과 정부의 관리들의 특권이 서서히 발생하면서 평등의 기율이 무너지던 즈음 정치 경제적 혁명이후의 새로운 ‘문화’부문의 혁명이 계획되고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처음의 시작과는 달리 혁명의 말미는 시들하다. 어떻게 끝이 났는지 그리고 어떻게 마무리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없고 혁명 기간 몰락하고 퇴출되었던 혁명의 1세대들이 조용히 그들의 추종자들과 복귀를 하면서 권력을 거머쥐고 4인방에 대한 공개 재판을 방송중계하면서 모든 혁명의 과오를 그들에게 투영하면서 과오에 대한 반성과 도약의 기회가 막혀번린다.

 

카우보이 모자와 크로와쌍

71년 미국의 닉슨의 핑퐁 외교보다도 더 극적인 장면이 79년 미국에서 연출이 된다. 중산복의 덩샤오핑이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대통령의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 목장에 나타났다. 당시 최고 지도자였던 덩샤오핑은 미국의 카터와 나란히 미국 팝가수의 콘서트에 얼굴을 비추었고 카우보이 모자를 자연스레 쓰면서 죽(竹)의 장막을 거두었다. 유엔 연설 이후 덩은 돌아오는 길에 프랑스 파리에 들러 어렸을 때 파리에서 먹었던 크로와쌍을 잊지 못해 한 바구니 싸들고 와서 혁명 1세대들에게 돌렸다. 혁명의 이상과 고귀함에 스스로 박해받았다고 생각하는 그들은 이제 과거의 회상을 넘어서서 과거로의 회귀를 꿈꾸고 보상받기를 갈망한다. 대다수 인민들과는 격리되는 구중궁궐에 집단 거주하면서 가족의 안위를 걱정하는 여느 노회한 자본가로 탈바꿈한다.

개혁 개방이라는 이름으로 혁명의 성과를 무화시키고 자본주의 따라잡기를 넘어서 자본주의로의 진행에 박차를 가한다. 80년대 도시를 중심으로 불어닥친 소비의 광풍은 도시와 농촌은 물론이고 도시민들 사이에 심한 격차를 불러왔고 개방과 개혁의 광풍속에서 몰락했던 자본가 계급을 대신하여 사회주의정치와 자본주의 경제의 사생아인 새로운 자본가 계급을 형성했고 과거에 타도와 지양의 대상이었던 착취가 심화되는 가운데 격차와 갈등은 80년대 중반 심화된다..

문화대혁명 10년 간의 고통과 박해에 대한 보상을 받으려는듯 복귀한 당간부와 관료들은 게걸스레 국영기업을 사유화하고 외국 자본을 유치하여 장막 뒤의 착취자가 되었다. 노동자들은 물론 지식인들 그리고 대학생들에 대한 우려와 걱정은 비등하게 되고 결국 우려는 현실로 전화하여 89년 봄 북경 서북쪽의 대학가를 중심으로 교내에서 진행되던 토론과 공개비판이 담장을 넘어 혁명의 성지인 천안문 광장으로 옮겨지게 된다.

 

 

탱크와 시민 그리고 다시 천안문 광장

북경은 봄은 뚜렷이 대비된다. 초봄의 황사는 사람들의 눈과 호흡기를 고통스럽게 한다. 그러나 비가 내린 후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면 청명한 하늘과 길가의 회나무에 녹음이 지면서 뜨거운 여름을 준비하게 된다. 이런 89년 늦은봄 천안문에 학생과 지식인 그리고 노동자들이 모이게 되었다. 개혁 개방의 십년간의 퇴행과 모순에 대한 체험적인 토로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여러 경로를 통한 정부와의 대화 시도가 이뤄진다. 실제로 대화는 방송으로 중계되기도 하였으며 수 많은 다른 지역과 도시의 대학생들은 북경 천안문으로의 상경투쟁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이런 순진한 발로와 대조적으로 복귀한 혁명 1세대들과 그들의 후손으로 권력을 세습받고 있었던 2세들은 대학생과 시민들의 자유와 민주주의 요구를 문혁기의 쓰라린 고통과 오버랩시켰다. 아니, 곧바로 목숨을 노리는 위협으로 여겼다.

상황 초기 협상과 타협의 분위기는 시위대들의 힘이 약해질 무렵 강경책으로 돌변하였다. 심지어 미술대학 학생들의 집단 창조물인 ‘민주주의의 여신’ 조소작품이 미국 자본주의 추종하는 무모한 집단들의 ‘자유의 여신’으로 선전이 되면서 인민해방군이 출동하고 북경에 대한 계엄령이 전격 단행되면서 시민들의 육탄 저지와 설득에도 불과하고 6월 4일의 대학살은 감행이 된다.

당시 CNN을 비롯한 서방 언론에의해 보도된 사진과 화면을 보면 진압하려던 탱크를 가로막은 비닐 봉지를 든 용감한 시민을 볼 수 있었다. 오래 기억되는 장면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누구인지 그리고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아는 사람은 현재까지 없다고 한다.

급속도로 천안문은 잊혀졌다. 빛나는 경제 성과로 기록되는 90년대를 지나면서 사회의 경제적 모순과 적대는 쇼비니즘으로 포장되었으며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최고조로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아우르는 아(亞)제국주의국가로 발돋움을 하려하고 있다.

 

 

붉은 천안문의 성벽과 허무한 구호

다가오는 10월 1일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60주년이 되는 날이다. 아마도 여름부터 준비된 성대한 기념식이 바로 피로 얼룩졌던 천안문 광장에서 열릴 것이다. 중산복 대신 양복을 입은 중국공산당의 지도자들과 관료들은 천안문 정면의 단상에 서서 호기롭게 인민들을 너그러이 보면서 광장과 천안문을 사이로 지나는 장안대가에는 각종 신무기들과 자동소총을 든 ‘인민해방군’들이 지나갈 것이며 북경의 상업가인 조양구의 호텔은 기념 특식으로 노동자의 몇 달치 월급에 해당하는 메뉴를 내걸고 중국의 자본가들을 유혹할 것이다.

혁명기간 산화한 이름없는 혁명가들을 위해 백옥과 대리석 등으로 조각한 천안문 광장의 인민영웅기념탑은 여전히 조명을 받으며 군인들에 의해서 엄격히 출입이 통제될 것이며 바로 뒤 마오 기념관에 유리관 안에 누워있는 마오는 소리없이 중국 각지에서 온 가난한 농민과 노동자들을 눈을 감고 환영할 것이다.

광장 너머 중남해에 은거하는 새로운 상위 자본가들은 군대와 경찰들의 호위속에 한달 월급만큼 비싼 고급 담배를 태우며 ‘인민공화국’ 수립 60주년 기념사를 준비하지 않을까?

 

행사를 위해서 천안문 광장은 물론 북경 시내의 통행에 대한 검문 검색은 물론이고 남루한 복장의 인민들에 대한 대테러 작전 수행이라는 명목의 무자비한 인권 탄압은 자행될 것이다. 10월 10일 행사 당일 날 수 백만의 잘 차려입은 북경의 시민들은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북경의 가을 하늘 아래에서 최신식 미사일과 탱크로 무장한 ‘인민해방군’의 사열식을 값싼 민족주의와 패권적 애국주의와 자기파괴적 민족주의에 기대어 환호할 것이다.

 

잘못 끼워진 단추

중국의 20세기의 현대사는 아마도 ‘잘못 끼워진 단추는 중간에 아무리 제대로 채우려해도 채워지지 않고 처음부터 다시 채워야 한다’ 라는 지극히 단순하면서도 당연한 명제의 실례일 것이다.

애초에 ‘고소영’, ‘강부자’로 조롱받으면서 출범한 이명박 한나라당 정권은 우려와 염려에 부응하여(?) 반 서민, 반 민중적 정책으로 일관하고 있다.

유모차를 끌고 거리에 나선 가정주부들에 대한 무차별적 기소와 살권리를 인정해 달라는 세입자들에게는 불세례를 서슴치 않았다.

어디 뿐인가? ‘학교자율화’라는 명목으로 학교를 통째로 사교육 시장의 먹이감으로 내던지더니 급기야 시국선언을 한 교사들에 대한 이메일 압수수색은 물론이고 은행계좌에 대한 금융 거래 내역까지도 조사하면서 전방위 압박을 전개하고 있다.

환경파괴를 염려하는 국민들의 여론을 개무시하고 삽하나로 경제를 살리겠다는 헛된 망상에 사로잡혀 토건공화국으로 나라를 공사판으로 만들고 있으며 친정부, 친정권, 친한나라당의 나팔수로 모든 언론을 단일화(?)하기 위한 사전포석으로 미디어법 날치기 감행을 하면서 흡사 조지오웰의 1984에 나온 ‘빅브라더’가 되려고 하고 있다.

 

 

처음부터 다시 채워야

최근들어 ‘친서민정책’을 내세우면서 유화적 인물로 총리를 갈아치우는 등 양의 탈을 쓴 늑대마냥 둔갑을 해서 여론을 호도하려고 하지만 그 본질을 벗어날 수 있을까?

잘못 채워진 단추의 우화를 통해서 결국 해결책은 하나 밖에 없으며 중간은 없다라는 것은 자명하다. 처음부터 다시 채워야 한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중간적 타협점은 없는것 같다. 결국 잘못 채워진 단추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피해는 모든 피해는 사회 구성원 전체의 몫이 될 수 밖에 없다라는 또 하나의 역사적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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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림(陳淋)의 사랑은 사랑일뿐.....

10월 마지막날

 

북경에서 내나이 비슷한 여가수가 투신자살을 했다.

 

그녀의 대표곡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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