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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1/18
    몸살은 싫어!!!
    은하철도
  2. 2009/11/18
    탱크를 막아선 그 시민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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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oors 의 Strange D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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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로 본 오늘날의 중국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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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8/09/26
    쁘띠의 영원한 안식처 내쇼날리즘과 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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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8혁명과 청계광장( 68혁명 40주년에 부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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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8/07/07
    일상적 사랑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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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8/04/28
    티벳 유랑기
    은하철도

몸살은 싫어!!!

일요일 오후에 시작된 몸살로 이틀을 몸져 누워있다가

 

이틀만에 출근을 했다.

 

주위에서는 신종플루 아니나며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두려워한다.

 

예전 누가 마스크만 썼다고 택시가 승차거부를 했다고 하던데...... 쩝......

 

신종플루던 기존의 플루던 별반 차이없어보이는데............ 쩝........

 

그나저나 아파트 투기 몰빵 인플루엔자는 서로 걸려들고 싶어하니........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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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크를 막아선 그 시민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탱크를 막아선 그 시민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중국과 관련해서 떠오르는 기억 두 가지가 있다.

어렸을 때 동네에는 화교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전족을 해서 뒤뚱거리며 걷는 호호백발의 할머니와 흔히 ‘짱깨’라고 불렀던 말끝마다 ‘...... 해’ 라고 했던 중국집 주인 그리고 우리와 방학이 일치하지 않았던 화교학교 학생들... 우리가 국군의 날과 개천절 그리고 한글날이 몰려있어 10월 달을 기다렸다면 화교 학생들은 10월 10일 신해혁명 기념일인 쌍십절을 기다리면서 우리가 학교가 가던 그날 그 얘들은 동네 골목에서 신나게 놀았었다.

다른 하나의 기억은 대학 신입생 때의 일이다. 89년 5월과 6월의 천안문 사태가 일어났을 때 구내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4학년 선배중 하나가 ‘중국 대학생들의 무책임한 난동’ 운운에 1학년 신입생임에도 발끈하면서 나름대로 민주주의며 자유를 들어 당시 중국의 대학생들을 옹호했었다.

 

 

쌍십절과 국경일

1911년 10월 10일 부패한 만주족 봉건 왕조를 타도하고 공화제 정부를 수립한 신해혁명으로 새로운 중국의 역사는 시작이 된다. 반봉건 반식민지의 상황 속에서 신음하고 있던 많은 중국인들에게 신해혁명은 앞의 두 가지 모순의 지양을 위한 서막이다. 그러나 서양, 특히나 미국의 민주주의에 경도되었던 손문을 중심으로 하는 일부의 지식인들은 거대한 반동과 외세의 물결에 움츠러들고 반혁명의 나락으로 곧 떨어지게 된다. 원세개의 친위 쿠데타와 지역에 할거하던 군벌들의 실질적인 봉건 체제로의 퇴행 그리고 영국과 독일 그리고 새로운 제국주의 국가로 발돋움하던 일본의 수탈과 착취로 중국의 인민들은 ‘민주주의’ 와 ‘자유’의 세례를 받기도 전에 이전 구체제의 모순이 더욱 심화된 상태로 ‘아시아의 암덩어리’ 이자 숙주 역할을 해야만 했다.

당시 아시아 최대의 항구이자 첨단의 도시였던 상해는 아울러 범죄와 타락 그리고 마약의 소굴로 그 악명을 떨쳐야만 하였다. 그러다 1917년 러시아 볼세비키 혁명에 고무된 일단의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사회주의사상은 이런 ‘아시아의 매음굴’ 상해의 어느 빈민가에서 결성된 중국 공산당을 통해 급속하게 인민들 속으로 파급이 된다. 희망을 찾는 인민들에게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리라.

장개석의 음모와 배신 그리고 학살로 인하여 급속도로 세력이 위축이 되고 급기야 중국 남부의 농촌지역을 중심으로 하던 공동체에 대한 대규모 토벌작전이 개시가 되면서 전설이 탄생하게 된다. ‘대장정’ 진시황의 만리장성을 훨씬 능가하는, 지금도 오지로 잦은 재해로 인해 도로가 단절되곤 하는 지역을 종횡무진하면서 수많은 눈 덮힌 설산과 급류 그리고 초원과 습지를 맨발로 각종 무기와 식량을 짊어지고 질병과 배고픔을 견디며 수많은 희생을 거쳐 북서부의 척박한 농촌 지역으로의 ‘후퇴’..

이 와중에 토착 사회주의 사상과 전술을 견지한 마오를 중심으로 하는 혁명 1세대의 진영이 갖추어지고 나름의 전략과 전술 그리고 기율을 토대로 이전의 상해 등의 도시 중심의 기존 전략에서 탈피, 농촌을 중심으로 하는 중국식 혁명 전술이 도모되면서 제 2의 흥기를 맡는다. 만주와 중국 북동부를 장악하던 일본 제국주의가 45년 8월 무조건 항복하게 되면서 중국 남서부에 거점을 두었던 장개석 국민당 정부와의 내전이 시작된다.

1911년 이후 인민들은 국민당 정부의 부패와 무능력 그리고 외세 의존 대신 기율과 희생을 몸소 실천하는 중국 공산당에 신뢰를 보내게 되고 드디어 1949년 10월 1일 전제 왕권의 상징이던 자금성의 정문인 천안문에서 새롭게 정비된 광장을 마주보고 역사적인 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하게 된다.

 

 

짧았던 영광 그리고 고난과 모순의 아수라장

 

부패에 선수였던 국민당의 수뇌부와 군대는 후퇴에도 선수였다. 군함에 엄청난 명나라와 청나라는 물론 그 이전 전제 봉건 시절의 유물을 한껏 싣고 일찌감치 꽁무니를 뺐던 장개석, 그리고 그의 부하들인 국민당 장군들 역시 미국으로부터 받은 군수물자를 ‘적’들인 인민해방군에게 팔아 자신들의 부하들의 생명을 사지로 몰았다. 결국 바다 건너 조그만 대만에 본거지를 틀고 뒤의 미국만을 믿고 택도 없는 본토수복의 기치를 호언장담하고 있을 때 ‘인민의 해방군’들은 서쪽의 이슬람교도들 지역과 히말라야 산맥의 조용한 불교국가 티벳을 ‘해방’하기 위해 저항하는 그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애초에 ‘만주족에 의한 청나라 타도’라는 신해혁명의 기치에서 보이듯이 철저한 민족주의적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쇼비니즘이 결합된 혁명의 물결은 49년 인민공화국의 수립이후 영토팽창의 작태에서도 들어나듯이 처음부터 잘못 끼워진 단추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민공화국 수립 이전의 반봉건 반식민지 상태에 대한 지양이 진행되면서 50년대 빠르게 사회가 회복이 되고 인민들에 대한 후생 개선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경험의 부족, 잦은 재해 그리고 급속한 사회의 질적 변화로 인한 혼란은 이전 잠시 동안의 회복의 순간을 발목 잡게 만들었다.

경제 성장과 정부와 당의 거대화로 인한 각종 잡음과 퇴행이 횡행하는 가운데 문화대혁명이 66년에 시작이 되면서 76년 마오의 사망까지 10년간의 모색과 후퇴, 혁명과 반혁명의 시대가 지속이 된다.

하나의 국가라기 보다는 대륙이라고 불릴만한 인구와 영토를 가지고 다양한 기후와 풍부한 자원 그리고 풍요로운 토양을 가진 중국은 인민들에게는 고통의 세월이 대부분이었지만 권력을 가지고 있던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특별잉여를 끊임없이 창출할 수 있었던 수천년의 ‘기회’의 땅이었다.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 이후 십 여년의 시간이 지난 60년대 역시 소수 당원과 정부의 관리들의 특권이 서서히 발생하면서 평등의 기율이 무너지던 즈음 정치 경제적 혁명이후의 새로운 ‘문화’부문의 혁명이 계획되고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처음의 시작과는 달리 혁명의 말미는 시들하다. 어떻게 끝이 났는지 그리고 어떻게 마무리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없고 혁명 기간 몰락하고 퇴출되었던 혁명의 1세대들이 조용히 그들의 추종자들과 복귀를 하면서 권력을 거머쥐고 4인방에 대한 공개 재판을 방송중계하면서 모든 혁명의 과오를 그들에게 투영하면서 과오에 대한 반성과 도약의 기회가 막혀번린다.

 

카우보이 모자와 크로와쌍

71년 미국의 닉슨의 핑퐁 외교보다도 더 극적인 장면이 79년 미국에서 연출이 된다. 중산복의 덩샤오핑이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대통령의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 목장에 나타났다. 당시 최고 지도자였던 덩샤오핑은 미국의 카터와 나란히 미국 팝가수의 콘서트에 얼굴을 비추었고 카우보이 모자를 자연스레 쓰면서 죽(竹)의 장막을 거두었다. 유엔 연설 이후 덩은 돌아오는 길에 프랑스 파리에 들러 어렸을 때 파리에서 먹었던 크로와쌍을 잊지 못해 한 바구니 싸들고 와서 혁명 1세대들에게 돌렸다. 혁명의 이상과 고귀함에 스스로 박해받았다고 생각하는 그들은 이제 과거의 회상을 넘어서서 과거로의 회귀를 꿈꾸고 보상받기를 갈망한다. 대다수 인민들과는 격리되는 구중궁궐에 집단 거주하면서 가족의 안위를 걱정하는 여느 노회한 자본가로 탈바꿈한다.

개혁 개방이라는 이름으로 혁명의 성과를 무화시키고 자본주의 따라잡기를 넘어서 자본주의로의 진행에 박차를 가한다. 80년대 도시를 중심으로 불어닥친 소비의 광풍은 도시와 농촌은 물론이고 도시민들 사이에 심한 격차를 불러왔고 개방과 개혁의 광풍속에서 몰락했던 자본가 계급을 대신하여 사회주의정치와 자본주의 경제의 사생아인 새로운 자본가 계급을 형성했고 과거에 타도와 지양의 대상이었던 착취가 심화되는 가운데 격차와 갈등은 80년대 중반 심화된다..

문화대혁명 10년 간의 고통과 박해에 대한 보상을 받으려는듯 복귀한 당간부와 관료들은 게걸스레 국영기업을 사유화하고 외국 자본을 유치하여 장막 뒤의 착취자가 되었다. 노동자들은 물론 지식인들 그리고 대학생들에 대한 우려와 걱정은 비등하게 되고 결국 우려는 현실로 전화하여 89년 봄 북경 서북쪽의 대학가를 중심으로 교내에서 진행되던 토론과 공개비판이 담장을 넘어 혁명의 성지인 천안문 광장으로 옮겨지게 된다.

 

 

탱크와 시민 그리고 다시 천안문 광장

북경은 봄은 뚜렷이 대비된다. 초봄의 황사는 사람들의 눈과 호흡기를 고통스럽게 한다. 그러나 비가 내린 후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면 청명한 하늘과 길가의 회나무에 녹음이 지면서 뜨거운 여름을 준비하게 된다. 이런 89년 늦은봄 천안문에 학생과 지식인 그리고 노동자들이 모이게 되었다. 개혁 개방의 십년간의 퇴행과 모순에 대한 체험적인 토로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여러 경로를 통한 정부와의 대화 시도가 이뤄진다. 실제로 대화는 방송으로 중계되기도 하였으며 수 많은 다른 지역과 도시의 대학생들은 북경 천안문으로의 상경투쟁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이런 순진한 발로와 대조적으로 복귀한 혁명 1세대들과 그들의 후손으로 권력을 세습받고 있었던 2세들은 대학생과 시민들의 자유와 민주주의 요구를 문혁기의 쓰라린 고통과 오버랩시켰다. 아니, 곧바로 목숨을 노리는 위협으로 여겼다.

상황 초기 협상과 타협의 분위기는 시위대들의 힘이 약해질 무렵 강경책으로 돌변하였다. 심지어 미술대학 학생들의 집단 창조물인 ‘민주주의의 여신’ 조소작품이 미국 자본주의 추종하는 무모한 집단들의 ‘자유의 여신’으로 선전이 되면서 인민해방군이 출동하고 북경에 대한 계엄령이 전격 단행되면서 시민들의 육탄 저지와 설득에도 불과하고 6월 4일의 대학살은 감행이 된다.

당시 CNN을 비롯한 서방 언론에의해 보도된 사진과 화면을 보면 진압하려던 탱크를 가로막은 비닐 봉지를 든 용감한 시민을 볼 수 있었다. 오래 기억되는 장면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누구인지 그리고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아는 사람은 현재까지 없다고 한다.

급속도로 천안문은 잊혀졌다. 빛나는 경제 성과로 기록되는 90년대를 지나면서 사회의 경제적 모순과 적대는 쇼비니즘으로 포장되었으며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최고조로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아우르는 아(亞)제국주의국가로 발돋움을 하려하고 있다.

 

 

붉은 천안문의 성벽과 허무한 구호

다가오는 10월 1일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60주년이 되는 날이다. 아마도 여름부터 준비된 성대한 기념식이 바로 피로 얼룩졌던 천안문 광장에서 열릴 것이다. 중산복 대신 양복을 입은 중국공산당의 지도자들과 관료들은 천안문 정면의 단상에 서서 호기롭게 인민들을 너그러이 보면서 광장과 천안문을 사이로 지나는 장안대가에는 각종 신무기들과 자동소총을 든 ‘인민해방군’들이 지나갈 것이며 북경의 상업가인 조양구의 호텔은 기념 특식으로 노동자의 몇 달치 월급에 해당하는 메뉴를 내걸고 중국의 자본가들을 유혹할 것이다.

혁명기간 산화한 이름없는 혁명가들을 위해 백옥과 대리석 등으로 조각한 천안문 광장의 인민영웅기념탑은 여전히 조명을 받으며 군인들에 의해서 엄격히 출입이 통제될 것이며 바로 뒤 마오 기념관에 유리관 안에 누워있는 마오는 소리없이 중국 각지에서 온 가난한 농민과 노동자들을 눈을 감고 환영할 것이다.

광장 너머 중남해에 은거하는 새로운 상위 자본가들은 군대와 경찰들의 호위속에 한달 월급만큼 비싼 고급 담배를 태우며 ‘인민공화국’ 수립 60주년 기념사를 준비하지 않을까?

 

행사를 위해서 천안문 광장은 물론 북경 시내의 통행에 대한 검문 검색은 물론이고 남루한 복장의 인민들에 대한 대테러 작전 수행이라는 명목의 무자비한 인권 탄압은 자행될 것이다. 10월 10일 행사 당일 날 수 백만의 잘 차려입은 북경의 시민들은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북경의 가을 하늘 아래에서 최신식 미사일과 탱크로 무장한 ‘인민해방군’의 사열식을 값싼 민족주의와 패권적 애국주의와 자기파괴적 민족주의에 기대어 환호할 것이다.

 

잘못 끼워진 단추

중국의 20세기의 현대사는 아마도 ‘잘못 끼워진 단추는 중간에 아무리 제대로 채우려해도 채워지지 않고 처음부터 다시 채워야 한다’ 라는 지극히 단순하면서도 당연한 명제의 실례일 것이다.

애초에 ‘고소영’, ‘강부자’로 조롱받으면서 출범한 이명박 한나라당 정권은 우려와 염려에 부응하여(?) 반 서민, 반 민중적 정책으로 일관하고 있다.

유모차를 끌고 거리에 나선 가정주부들에 대한 무차별적 기소와 살권리를 인정해 달라는 세입자들에게는 불세례를 서슴치 않았다.

어디 뿐인가? ‘학교자율화’라는 명목으로 학교를 통째로 사교육 시장의 먹이감으로 내던지더니 급기야 시국선언을 한 교사들에 대한 이메일 압수수색은 물론이고 은행계좌에 대한 금융 거래 내역까지도 조사하면서 전방위 압박을 전개하고 있다.

환경파괴를 염려하는 국민들의 여론을 개무시하고 삽하나로 경제를 살리겠다는 헛된 망상에 사로잡혀 토건공화국으로 나라를 공사판으로 만들고 있으며 친정부, 친정권, 친한나라당의 나팔수로 모든 언론을 단일화(?)하기 위한 사전포석으로 미디어법 날치기 감행을 하면서 흡사 조지오웰의 1984에 나온 ‘빅브라더’가 되려고 하고 있다.

 

 

처음부터 다시 채워야

최근들어 ‘친서민정책’을 내세우면서 유화적 인물로 총리를 갈아치우는 등 양의 탈을 쓴 늑대마냥 둔갑을 해서 여론을 호도하려고 하지만 그 본질을 벗어날 수 있을까?

잘못 채워진 단추의 우화를 통해서 결국 해결책은 하나 밖에 없으며 중간은 없다라는 것은 자명하다. 처음부터 다시 채워야 한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중간적 타협점은 없는것 같다. 결국 잘못 채워진 단추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피해는 모든 피해는 사회 구성원 전체의 몫이 될 수 밖에 없다라는 또 하나의 역사적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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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림(陳淋)의 사랑은 사랑일뿐.....

10월 마지막날

 

북경에서 내나이 비슷한 여가수가 투신자살을 했다.

 

그녀의 대표곡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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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지미르 비소츠키의 야생마

영화 백야에 삽입곡

 

영화는 80년대 전두환 정권의 반공 영화였지만

 

중간 주인공이 옛애인과 마린스키 극장에서 관객없는 무대에서

 

강렬한 발레를 할때 나왔던 이 노래는

 

영화의 외면적 주제와는 상관없는 인간의 자유를 그리는 듯 했다.

 

바르시니코프는 죽었다.

 

야생마(뒷걸을 치는 말)

 

블라지미르 비소츠키

 

나는 벼랑과 아슬아슬하게 맞닿은 협곡을 지나간다.
나는 내 말에 박차를 가하고 매섭게 채찍질한다.
숨이 가빠 바람을 마신다. 안개를 삼킨다.
나는 길을 잃고 죽음의 황홀경에 빠질 것 같다.
말아, 천천히, 조금만 천천히 가자꾸나.
너는 내 채찍 소리가 듣기 싫겠지.
내 운명의 말은 자기들 기분 내키는 대로 움직인다.
내겐 생명의 시간이, 일을 마칠 시간이 없다.
나는 내 말에게 물을 먹이고 내 노래를 마치리라.
그리고 잠시나마 그 강가에 머물며 숨을 돌리리라.
나는 죽어간다. 한 포기 이삭처럼 폭풍우는 나를 쓰러뜨리리.
새벽에 썰매가 나를 눈 속으로 끌고 가리.
말아, 부탁하자, 조금만 그 걸음을 늦출 수 없겠니.
마지막 피난처에 도달할 때까지는 내 최후의 날을 늦춰다오.
말아, 천천히, 조금만 천천히 가자꾸나.
너는 내 채찍 소리가 듣기 싫겠지.
내 운명의 말은 자기들 기분 내키는 대로 움직인다.
내겐 생명의 시간이, 일을 마칠 시간이 없다.
나는 내 말에게 물을 먹이고 내 노래를 마치리라.
그리고 잠시나마 그 강가에 머물며 숨을 돌리리라.
신에게 초대받으면 우리는 지체하지 않고 도착해야 한다.
천사들은 왜 그토록 적의에 찬 분노를 노래하는가?
종은 왜 끝없이 오열하는가?
나는 내 말에게 울부짖는다, 속도를 좀 늦춰줄 수 없느냐고.
말아, 천천히, 조금만 천천히 가자꾸나.
너는 내 채찍 소리가 듣기 싫겠지.
내 운명의 말은 자기들 기분 내키는 대로 움직인다.
내겐 생명의 시간이, 일을 마칠 시간이 없다.
나는 내 말에게 물을 먹이고 내 노래를 마치리라.
그리고 잠시나마 그 강가에 머물며 숨을 돌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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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ors 의 Strange Days

 

 

 

Strange days have found us
Strange days have tracked us down
They're going to destroy
Our casual joys
We shall go on playing
Or find a new town

Yeah!

Strange eyes fill strange rooms
Voices will signal their tired end
The hostess is grinning
Her guests sleep from sinning
Hear me talk of sin
And you know this is it

Yeah!

 


Strange days have found us
And through their strange hours
We linger alone
Bodies confused
Memories misused
As we run from the day
To a strange night of stone

 

파리의 페르라셰즈 묘지에 가면

 

1871년 파리 쿄뮨 당시의 코뮤나르들이 학살당한 벽이 서있다.

 

그 벽에 가기 전

 

유난히 꽃들이 떨어지지 않고 놓여 있는 무덤이 있는데 바로

 

짐 모리슨의 무덤이다.

 

마약의 환각을 빌어

 

뭔가 모른 위험, 고통, 낯설음의 압도를  표현한 곡

 

갑자기 복고 풍이 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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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본 오늘날의 중국의 초상

영화로 본 오늘날의 중국의 초상

은하철도

 

올해 8월은 무더운 날씨만큼이나 힘들고 짜증이 났다. 장마철과 더불어 시작된 ‘촛불’의 주춤거림에 기다렸다는 듯이 시작된 정권의 촛불 탄압, 그리고 베이징 올림픽의 시작과 더불어 불붙은 올림픽 광풍은 마치 14억 중국에서는 올림픽이외에는 다른 사건들이 일어 나지 않는듯 그리고 매일매일의 올림픽 출전 선수가 획득하는 메달의 갯수와 색깔만이 남한에서의 모든 사람들의 관심과 존재 이유인 듯 했다. 천억의 돈을 들여 연출했다는 장이모우(張藝謀)감독의 개막식은 엄청난 물량공세와 거대한 스케일에 따른 화려함으로 압도하였고 이 압도와 경탄의 이면에 중국의 전세계를 향한 중화주의의 선전포고를 보여 주었다.

2008년 현재 중국은 북경 올림픽 주경기장의 화려함이 보여주듯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힘찬 기세가 누그러들지 않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과연 대다수 인민들의 삶은, 북경을 포함한 중국 대륙의 모습 역시 그러할까?

이러한 소박한 의문과 질문에서 중국영화 몇 편에 대한 얘기를 하려고 한다.

 

 

 

 

 광활한 대륙의 황토고원

중국 민족은 흔히 黃帝의 후손이라고 한다. 그래서 인지 붉은색만큼이나 누런색을 좋아한다. 수 천년 중국의 봉건 전제 군주를 칭하는 天子를 대표한 색도 황색이다. 장이모우 감독이 우리에게 그 이름이 알려지게 된 작품은 80년대 후반에 개봉된 붉은색이 스크린을 압도한 ‘붉은 수수밭’이라는 영화였다. 중국의 산동성 한 시골마을을 배경으로 일본제국주의 침략기의 한 가족사를 소재로 웅혼하면서도 호쾌한 작품으로 감독과 더불어 주인공이었던 공리를 일약 세계적 스타로 알려지게 한 영화이다. 아울러 ‘중국 고량주에는 오줌이 들어간다’라는 잘못된 우스개소리도 회자되었던 기억이 난다.

이번에 소개하려는 장이모우 감독의 영화는 북경 주변의 끝없이 펼쳐진 황토고원에 위치한 낙후한 산골 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현대극인 ‘책상서랍속의 동화’이다. 수입 개봉되었을 때 붙여진 제목이고 원제목은 一個都不能少(Not one less) 번역하면 ‘하나도 모자라면 안된다’이다.

한 산골마을의 초등학교 선생님이 멀리 고향에 급히 다녀올 일이 있어 임시교사를 들이게 된다. 한 달간 임시로 아이들을 맡아 가르치면서 받게 되는 돈은 50위안. 옆마을의 초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하지 않은 여학생이 지원하고 30여명의 크고 작은 아이들을 가르치게 된다. 선생님이 고향으로 출발하려고 하자 이 어린 임시교사는 한달 간의 임금을 요구한다. 그러자 선생님은 돌아오면 주겠다고 약속하고 추가로 학생이 학교를 떠나지 않아 더 이상 학생이 줄지 않게 된다면 추가로 돈을 더 주기로 약속을 한다. 자기 친구의 언니인 몇 살 많지 않은 임시교사에게 교육을 받는 학생들은 임시교사를 깜보고, 임시교사 역시 돈을 바라고 하는 일이라서 건성건성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러다 한 달리기 잘하는 학생이 도시의 체육학교로 스카웃되어 나가고 또 학교의 말썽꾸러기 한 남학생이 병든 어머니와의 생활에 지쳐 돈을 벌기위해 가출하면서 임시교사인 주인공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다. 가출한 학생을 다시 데리고 돌아오기 위해 마을의 벽돌공장에서 막무가내로 학생들과 아르바이트를 해 돈을 벌어보지만 마을에서 도시로 가는 버스비에 턱없이 부족하다. 결국 먼지 나는 길을 걸어서 도시에 도착하고 학생을 찾지만 행방이 묘연하다. 얼마 남지 않은 돈을 모두 털어 먹과 붓 그리고 종이를 사서 구인광고를 일일이 손으로 써보지만 자신의 생활에 바쁜 사람들이 과연 얼굴도 모르고 전화번호도 없는 구인 광고에 관심이나 가져줄까? 최후의 수단으로 방송국 광고를 하기로 하고 방송국에 가서 관리자와 어렵게 연결이 되어 방송을 타게 된다. 한편 가출한 학생은 도시의 혹독함에 하루하루 구걸과 노숙으로 연명하다가 우연한 기회에 선생님이 자신을 찾는 방송을 보게 되고 결국 선생님과 학생은 눈물의 재회를 한다. 방송덕분에 전국 각지에서 답지한 성금과 학용품을 가득 싣고 마을로 학생과 선생님은 금의환향한다.

간단하게 줄거리만 살펴보면 그리고 출연한 배우 전원이 직업적인 배우가 아니라 마을 주민이고 학생들인 점을 생각하고 본다면 ‘책상서랍 속의 동화’라는 개봉시의 제목만큼이나 감동을 주는 잔잔한 영화이다. 다 허물어져가는 학교 교사(校舍)며 남루한 옷의 천진난만한 학생들 그리고 끝없이 펼쳐지는 황토고원 등등 콘크리트와 아스탈트로 뒤덮인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목가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영화이다. 그러나 이면의 이들의 삶을 살펴 본다면 현재 중국이 안고 있는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부가 포기한 공교육정책으로 마을의 주민들에 운영되는 낙후한 학교 교육, 우리내처럼 대도시를 중심으로 입시중심의 기숙형 학교와 외국어 학교들이 세워지면서 교육에 있어서의 공공성은 오늘날 급격하게 사라지고 있고 교육의 국가의 책무성은 빛바랜 오래된 카렌다처럼 되어 버렸다. 육체노동자의 형편없는 저임금과 농촌의 상대적 빈곤의 댓가로 상해, 북경 같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하루가 다르게 고층빌딩과 주상복합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으며 사회보장제도의 축소로 인한 사회안전망의 부족으로 발생하고 있는 빈곤층의 확대와 공동체의 실질적 붕괴와 가치관의 파괴가 우회적으로 - 임시교사로 한 달간 받는 돈이 50위안(한화로는 약 7천원)이고 2000년 당시 청소년의 하루 날품팔이 임금은 1위안을 약간 상회하였다 - 그려지고 있다.

 

청소년의 삶이자 소망인 자전거

2001년 제작된 북경의 오늘의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하는 ‘북경자전거’라는 영화를 소개한다. 원제목은 ‘17세의 자전거(十七歲的 單車)’ 로 자전거 한 대를 소재로 두 명의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이다. 시골에서 돈을 벌기위해 상경한 주인공은 어렵게 자전거를 이용하는 택배회사에 취직을 하고 월급에서 자전거 값을 까는 것으로 하고 하루하루 힘차게 페달을 밟는다. 회사에서 지급한 유니폼에 신형 자전거를 타고 중국의 심장 북경 시내를 힘든줄 모르고 누비면서 자전거가 온전하게 자신의 것이 될 그 날을 고대하면서 열심히 일을 한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인지 자전거 값을 다 물게 되는 그날 도난을 맞는다. 한편 명문 상업계 고등학교에서 우등생으로 있는 다른 한 주인공은 북경 뒷골목의 가난한 집에서 살면서 자전거 갖기를 소망한다. 가정 형편상 아버지는 자전거 구입 약속을 번번이 지키지 않고 급기야 새엄마와 같이 집에 온 의붓 여동생의 학비부담으로 자전거의 꿈이 사라지자 몰래 집의 돈을 훔쳐서 장물 자전거를 구입한다. 자전거의 소유권을 둘러싼 다툼으로 두 주인공 사이의 갈등이 계속되고 자전거가 두 주인공 사이에서 왔다갔다 반복하다 결국 하루씩 번갈아 타는 것으로 합의를 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화해도 마지막에 가서 두 주인공은 자전거로 인해 다른 청소년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하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같은 17세의 두 소년에게 있어서 자전거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하루하루 일을 해서 생활을 이어 나가야 하는 노동하는 청소년에게 있어서 자전거는 삶이요 목숨이라고 한다면 집에서 살면서 학교에 다는 학생 청소년에게 있어서는 등하교 때 여자친구와 같이 하기 위한 탈 것이고 친구들과 자전거 묘기를 하기 위한 매개물이다.

개혁 개방 이후 20여년 만에 세계의 공장으로의 지위를 차지한 중국은 하루가 다르게 경제 성장을 이룩하고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올림픽을 기회로 삼으려는 듯 과거의 모든 것을 파괴하고 현재를 저당 잡혀 미래로 매진하고 있다. 수 백년 베이징 시민의 삶이 어린 뒷골목이 하루아침에 재개발이라는 명분으로 파괴되고 또 거기에 살던 수많은 서민들은 보금자리를 잃고 외곽으로 외곽으로 떠밀리고 있다. 수출산업 중심의 공업화 정책으로 농촌 경제는 붕괴를 하고 있으며 수 많은 중국의 농민들이 일자리와 돈을 벌기 위해 도시로 몰려들고 있다. 가까이 살펴보면 7,80년대 우리의 모습이고 멀리 보면 인클로져 운동으로 농토를 빼앗기고 도시에서 노동력을 팔 수 밖에 없게 되는 영국의 농민들의 모습들이다. 이른바 자본의 ‘시초축적’이 중국 전역에서 무자비하게 대규모로 진행이 되고 있다.

현실같은 영화, 영화 같은 현실

무심히 지나가는 자동차와 자전거의 물결 속에서 주인공 소년은 체인이 빠지고 바퀴축이 휘어진 자전거를 어깨에 메고 무심한 인파들 속을 걸어가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면서 ‘북경자전거’는 끝난다. 하루하루 삶에 지쳐서 주변을 살펴볼 여유마저 잃어버린 오늘날 우리들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크게 과장하지 않고 커다란 서사(敍事)가 없어도 그냥 있는 그대로의 삶을 보여주어도 ‘영화’가 되는 것이 오늘날 중국의 영화의 저력인 듯 하다.

반면에 우리네의 영화는 어떠한가? 괴기, 공포 요소를 첨가하거나, 황당무개한 액션, 아니면 성과 폭력으로 의례히 포장해야만 영화가 된다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현실이 너무 영화나 소설 같아 차마 영화의 영역이 쪼그라든것은 아닌가? 최근 사채와 관련된 연예인의 자살,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 자살한 대학생, 그리고 사교육비와 관련한 고등학생의 부모 자해와 자살 등의 얘기를 들을 때 마다 현실이 영화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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쁘띠의 영원한 안식처 내쇼날리즘과 올림픽

쁘띠의 영원한 안식처 내쇼날리즘과 올림픽

 

들어가면서

벌써 몇 년전 일이다. 임지현 교수의 ‘민족주의는 반역이다’이다라는 책이 출간되어 화제를 몰고 왔었다. “5000천년 단일민족, 순수혈통...”의 대한민국에서 이 책의 출판은 지금까지도 논란이 벌어지고 있으며 민족주의 진영으로부터 따가운 질시를 받고 있는 실정이다.

2008년 8월 8일 베이징 시간 오후 8시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화려한 불꽃 놀이로 올림픽이 시작되었다. 1000억원 이상의 막대한 예산이 투입된 개막식에는 수 만의 인원이 동원되어 중국이라는 국가의 탄생과 현재까지의 모습을 ‘장려’하게 표현하였다. 화려함과 웅장함과 더불어 더운 한여름임에도 돋아나는 한기는 나만이 느끼는 것일까?

올림픽 성화 봉송이 서울을 지나갈 때 우리는 두 번 놀랐다. 우선 엄청나게 많은 중국 학생들이 남한에서 유학을 하고 있었다. 어디서 무엇을 배우고 있을까? 그리고 두 번째 2002년 붉은악마를 벤치마킹했는지 빨간 옷과 붉은 오성홍기의 물결들.... 실은 붉은색은 중국을 상징하는 색이 아닌가?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2002년 서울은 시청과 광화문을 중심으로 붉은 물결이 넘실거렸다. 티셔츠에서 두건, 심지어 얼굴에도 붉은 칠을 한 붉은악마들에 의해 남한은 점령되었다. 때마침 축구팀의 선전도 있어서 예선전으로 끝나지 않고 길게 붉은 물결이 짧은 여름의 서울을 메웠다.

‘대한민국’을 목이 터져라 외치는 붉은악마에게 국가대표팀이 경기 선전에 대한 요구 조건은 ‘군면제’였다. 붉은악마들은 대한민국을 생각하면서 응원을 했지만 정작 선수들은 군대 면제를 통한 해외 리그의 진출이 목적이었다. 기막힌 동상이몽(同床異夢)!

6년후 2008년 봄 서울시내에 베이징 올림픽 성화가 도착했다. 전국각지에서 공부하고 있던 중국의 유학생들과 이주 노동자들이 중국의 국기인 붉은 오성홍기를 들고 서울 시내로 쏟아져 나왔다. 19세기 중반이후 제국주의 열강에 의해 고통 받고 신음 했던 중국인민들의 올림픽 개최에 대한 희망과 기쁨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기쁨의 표현에 대한 한국인의 반응은 싸늘하다 못해 남의 잔치에 재를 뿌리고자 하는 심산을 노골화 하였다. 원래 남의 민족주의와는 양립하지 못하는 것이 민족주의의 생리인가 보다.

 

 

올림픽의, 올림픽에 의한, 올림픽을 위한

올림픽 개최지가 결정되면서부터 베이징은 대대적인 개조 작업에 들어갔다. 명나라, 청나라를 거치면서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문화와 멋을 가지고 있었던 시가지 중심부에 위치한 수많은 후통(胡同)에 대한 ‘근대화’라는 이름의 철거가 시작되었다. 실은 후통은 사합원이라고 해서 전통적인 ㅁ 자 모양의 집들이 모여 있는 거리이자 동네이다. 20세기 격랑을 지내오면서 베이징의 거대해지고 인구가 밀집하면서 이 사합원이 단독주택에서 공동주택으로 변신을 하게 된다. 한 집에 많게는 10세대 이상 사는 공동주택이 되면서 쇠락을 하게 되었다. 좁고 냄새나는 거리, 칸막이도 없는 공중변소, 연탄을 이용한 난방문화 등등이 현대화를 상징하는 올림픽에 맞지 않다고 생각되었나 보다.

철거된 이 자리에는 수 십 층에 이르는 초현대식 빌딩과 주상복합 아파트가 들어서고 베이징의 스카이라인을 바꾸고 있다. 그 많던 후통에 살던 베이징의 민중들은 어디서 새로운 보금자리를 잡고 정착할 것인가?

베이징의 대기는 악명높다. 이른 봄에 시작된 황사와 한여름의 스모그 그리고 겨울의 화석연료의 연소로 인한 대기오염으로 1년 내내 가을철 며칠을 빼고는 파란 하늘을 보기 힘든 실정이다. 이에 중국정부는 특단의 조처를 내렸다. 베이징을 포함한 인근 주변의 모든 공장의 가동을 중지시킨 것이다. 온실가스를 많이 배출하는 중화학 공장은 물론이고 관계없는 중소규모의 경공업 공장에도 적용이 되어 많은 원성을 샀다. 공장주야 세금을 감면해주고 나름대로의 해택을 통해 살아가기에 별 문제는 없지만 이 공장들에서 일을 하는 노동자들에게 있어서 정부의 조처는 가뜩이나 힘든 생활에 짐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올림픽이 있기에 참아야 한다.

중국인들은 8자를 좋아한다. 8의 발음이 재물을 불러온다는 의미의 發財(파차이)의 파와 같다고 해서 8자가 많이 들어있는 핸드폰 번호는 엄청난 프리미엄을 붙여서 거래가 이루어진다. 그래서 인지 2008년 8월 8일 8시에 개막식을 하였다. 날씨가 좋은 10월 달도 아니고 한참 무더운 한여름에 올림픽! 그래서 특단의 조처를 정부는 취했다. 수 조원을 쏟아 부어 베이징 주변의 구름을 향해 요오드 성분의 인공 강우 약품을 박격포와 항공기를 이용하여 뿌렸다고 한다. 덕분에 베이징 시민들은 올림픽이 열리기 전 한 여름에 매일 저녁 규칙적으로 내리는 비 덕분에 여름인데도 덥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베이징 주변의 농민은 비가 오지 않아 거북이 등짝마냥 갈라진 농토를 보면서 한해 여름 농사를 포기해야 했지만....

올림픽의 정치화 그리고 신화화

올림픽을 국가주의, 민족주의와 본격적으로 접목한 국가는 히틀러의 독일이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을 통해 1차 대전의 패전국의 이미지를 벗고 세계만방에 독일민족의 우수성을 선전하였다.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새롭게 건설된 백색의 스타디움에서 나찌식 경례를 하면서 입장하는 선수들에게 무한한 은혜(?)를 베푸는 지도자의 모습! 그리고 강인한 체력과 균형 있는 몸매를 보여주면서 전세계에 독일 민족의 우생학적 우월성을 과시하였다. 이 모든 사실을 우리는 레니 리펜슈탈이라고 하는 희대의 다큐멘타리 영화 감독의 ‘올림피아’라는 영화를 통해 볼 수 있다.

출전한 선수들에 대한 영광이 원조 올림픽의 전통이라면 이에서 벗어나 출전선수의 출신국이 도드라지게 되는 올림픽의 시작이 베를린 올림픽이다.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사건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이후 70년대와 80년대를 거치면서 올림픽은 국가주의, 민족주의의 대결장을 넘어서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진영의 이념의 대결장이 되었다. 덕분에 남한의 사람들에게 적국이었던 소연방에서 열렸던 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은 이름만으로 존재한다.

유난히 스포츠를 좋아한 대통령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처음 추진한 일이 올림픽 유치였다. 08년 베이징올림픽과 관련한 중국에서 일어난 일들이 20년 전 이미 서울에서 일어났었다. 서울 시내의 보신탕집이 철퇴를 맞고 서울시 외곽으로 쫓겨났다. 당시 대규모 빈곤층이 밀집되어 살고 있었던 상계동 지역이 주거 환경 개선이라는 이름으로 주민의 눈물겨운 투쟁에도 불구하고 폭력적으로 철거되면서 88년 서울 올림픽은 잠실과 더불어 ‘상계동올림픽’으로 기억된다.

고대로의 회기와 과거에 대한 노스탈지아

히틀러의 제3제국이 붕괴될 때 수상이었던 괴벨스가 선전상으로 나찌즘을 선동하였다고 한다면 제3제국의 이상을 건축물로 구현하려 했던 히틀러에게는 제3제국 붕괴당시 군수상이었던 건축가 슈페어(A. Speer)가 있었다. 유명한 뉘른베르크 전당대회의 무대 세트를 기획했고 베를린 히틀러 총통부를 건축했던 히틀러가 아꼈던 건축가이다. 석재로 조성한 베를린의 웅장한 총통부는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시작된 베를린 재건축의 시작이었다. 마지막 전승기념탑과 거대한 돔의 건설은 수포로 돌아갔지만 도면과 모형으로 우리는 그 거대한 규모와 웅장한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만약 건축되었더라면 엄청난 폐건축물로 환경을 엄청 파괴했겠지만 다행이 건축되지 않아 다행이다. 아리안 족의 우수성을 철의 법칙으로 믿었던 히틀러와 나찌들도 고대 그리이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의 기둥과 , 고대 로마의 판테온의 주랑, 그리고 가까이 중세 시대 피렌체와 로마의 산타마리아 델 피오리 성당과 산 파올로 성당의 거대한 돔 양식의 짬뽕을 그들의 정신을 구현하려 했던 건축물의 원형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중국 고대의 신화와 전설 그리고 수천년 전의 전제 왕정시대의 일들을 소재로 한 베이징 올림픽의 개막식 연출도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현재의 비루하고 고통스런 모습에 대한 거울 이미지로 잊혀진 그리고 허구의 검증 불가능의 고대를 삼는 것은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의 공통의 고향이다.

우리의 경우는 어떠한가? 미국식 기업경영, 미국식 은행 운영, 어메리칸 스타일의 의식주 문화가 판을 치고 영어 몰입교육까지 시도되고 있지만 민족주의 진영의 영원한 고향은 고조선 단군이요, 고구려 주몽이다. 저 인도 아대륙 북쪽 히말라야 골짜기의 석가모니도 고대 한민족의 일족인 고리족의 왕자라는 말에는 ‘논어를 쓴 공자도 동이족 이다’는 깜찍한 애교로 보인다.

중립적인 거대한 자아로서의 민족과 국가

 

19세기 민족주의 발흥의 원인과 유래를 개인적 심리적 측면에서 찾아보면 니체의 경구가 떠오른다.

 

“ ‘원한의 인간’은 숨는 것, 비밀통로들 그리고 뒷방을 좋아한다. 그는 어떻게 침묵하는지를 ,어떻게 잊지 않는지를, 어떻게 기다리며 그리고 어떻게 임시변통적 자기 비난과 자기 비하를 하는지를 이해함으로써 모든 가려진 것들에 의해 그는 그만의 ‘세계’, ‘안정’, ‘상쾌함’이 전부인양 주술에 걸린다. ” (니체 ‘도덕의 계보’에서 )

 

라고 하면서 19세기에 도래한 시민사회와 시민사회의 ‘시민들’을 폄하하면서 아울러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이런 인간은 ‘삶을 긍정하는데’에는 거의 관심이 없는 본능적인 자기 확신과 자기 보존에 의해 추동된 자기 중립적이고, 독립적인 ‘주체’- 자아-의 믿음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니체 ‘도덕의 계보’에서 )

 

니체의 나찌즘과의 연관성은 지난한 논쟁거리이다. 니체를 옹호하는 쪽은 뇌혈관 문제로 쓰러져 식물인간으로 병석에 누워 있을때 그의 누이에 의해 국가주의로 왜곡되었다고도 하니까 논쟁은 접어두어야만 한다. 그리고 시민사회의 문제 이전에 자본주의적 사회 경제적 구조를 도외시 한 부분도 접어두자. 단지 우리는 여기서 나찌즘에 이용되기 전 젊은 철학자 니체가 본 이른바 시민사회에서의 일반적인 시민들의 의식 경향과 멘탈리티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과 비관적인 판단을 엿볼 수 있다.

‘원한의 인간’들로 구성된 사회에서 삶의 긍정과 주체성은 거세되고 본능적인 자기 확신과 보존의 원칙만 강조된 상태에서 자신만의 ‘세계’, ‘안정’ 그리고 ‘상쾌함’의 주술 속에서 안주하지만 자신의 짐승적인 비루함에 갈증을 느끼고 결국 자기중립적이고 자기독립적인 주체나 자아를 필요로 하는데 바로 이 주체나 자아가 민족 내지는 국가가 되는 것이다.

즉, 시민사회에서 민족이나 국가는 도덕과 가치관의 까다로운 기준과 잣대에서 벗어나서 오직 경제적 동물로만 살아가는 인간에게 있어서 부족한 그 무엇(인간다움?)의 대체물로서 만들어지고 이것을 중립적이고 독립적인 자아와 동일시한다고 볼 수 있다.

매일같이 반복적인 삶 속에서 주체성과 삶의 긍정은 어느덧 사라지고 매일매일의 노동과 의식주 해결이라는 동물적인 욕구만이 강요되는 상황에서 거대하고 웅장한 커나란 또다른 나의 모습을 국가와 민족에서 찾고 여기에 속절없이 희망을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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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혁명과 청계광장( 68혁명 40주년에 부쳐)

68혁명과 청계광장

은하철도

 

들어가면서

5월 초부터 시작된 촛불 시위가 한 달여를 넘게 계속되고 있다. 시위는 청소년들이 교복을 입고 초 한 자루 들고 현 대통령의 서울시장 시절 유일한(?)치적이라고 할 수 있는 유형의 토대인 청계천 광장에서 시작되었다. ‘우발적이고 일회적일 것’ 이라는 대다수 운동세력의 분석을 뛰어넘어 즉자적이고 감성적인 ‘미친소 ’반대를 넘어, ‘미친교육’, ‘대운하 반대’ 그리고 ‘미친 사유화(공공부문의 사유화와 공기업 사유화)’ 이슈로 까지 확대 고양되고 있다.

지난해 프랑스에서는 헝가리 이민 출신의 우파 사르코지가 시라크의 후임으로 선거에서 승리를 하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새로운 프랑스’ 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상대적으로 신자유주의의 외곽지대인 프랑스에 신자유주의 정책을 강행하려 하고 있다. 주35일 근무제등 기존의 투쟁을 통한 사회적 합의물을 효율성과 경쟁 그리고 ‘프랑스적’ 인 사회 규범을 내세워 무효화함으로써 대대적 사회개조(?)를 역설하고 있다. 이에 대한 민중의 저항도 청소년과 교사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전면적 조직 노동자들의 투쟁은 보이지 않고 있다.

이데올로기 공세도 시작되었다. 사르코지 정권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과 정치권은 ‘68혁명’의 40주년을 맞는 올해 전면적 68혁명에 대한 폄하를 주 내용으로 하는 재평가를 획책하고 있다. 각종 미디어를 동원해서 폄하를 확대 재생산함으로써 신자유주의 드라이브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하고 있다. 우리네의 청와대와 조중동을 중심으로 하는 부르주아 세력의 현 상황에 대한 ‘음모론’과 ‘배후세력’의 프랑스판 버젼을 보는 듯 하다.

40여년 전의 전세계적 차원에서 벌어졌던 68혁명에 대한 양상과 전개 과정을 간략하게 살펴보는 가운데 현 시점에서의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촛불 정국과의 차이점과 공통점 그리고 전개 방향에 대한 시사점을 찾고자 한다.

68혁명의 조건과 양상 그리고 전개 과정

베트남에서 연초에 시작된 ‘설날 공세’에 뒤를 이어 대학 기숙사 문제라는 사소한(?)문제에 대한 대학생들의 저항으로 시작된 5월의 파리는 베를린과 로마 그리고 체코에서의 봉기로 이어졌고 대서양을 넘어 미국의 컬럼비아 대학 점거 사태와 부에노스 아이레스와 우루과이의 학생들과 노동자들의 파업 시도로까지 이어졌다. 전후 안정적인 지배 체제를 구축했다고 여겨졌던 ‘브레턴 우즈’체제를 골간으로 하는 세계적 자본주의 체계와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냉전체계의 1세계와 3세계의 파쇼정권들은 최악의 정치적 위기를 맞게 된다.

45년 종전과 냉전체계의 구축이라는 우산 아래에서 자본주의 축적은 눈부신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유럽도 미국의 마샬 플랜의 덕으로 전쟁의 피해를 복구하고 전쟁 전 이상의 경제 능력을 갖출 수 있게되었고 미국의 경우는 케인즈주의 통한 대량소비 시스템 하에서 ‘세계의 공장’, ‘세계의 시장’역할을 하면서 황금기의 60년대를 지나오고 있었다.

맑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은 다른 측면에서는 자신의 무덤을 파는 국면을 양산한다고 했다. 최초로 현대화된 전쟁인 베트남 전쟁( 중세까지 왕조와 봉건 제후간의 갈등의 양상이었던 전쟁이 민족과 국가간의 갈등 국면으로 전환된 것이 나폴레옹의 정복전쟁이었다면 베트남 전쟁은 미사일과 전투기로 상징되는 최첨단의 과학전의 시작이요, 돈의 위력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게 만드는 현대전의 시작이다)은 제국주의의 주축인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달러 본위체계의 본질적인 위기를 만들었다. 냉전의 체제의 충실한 우방이었던 유럽과 일본의 경제 부흥은 도리어 화살이 되어 미국의 수출 감소와 수입의 확대를 초래했고 결과적으로 미국 내의 금의 유출을 가져오면서 복지국가로 대변되는 케인즈주의의 종언을 고하게 한다. 이러한 전세계적인 경제 위기 국면에서의 결정적으로 닉슨 독트린을 통해 파산 선언을 하게 된다.

경제적 위기의 전개에도 불구하고 상대적 ‘안정’ 된 조건 속에서의 삶을 누리던 노동계급과는 달리 달라진 환경과 열악한 조건 속에서 삶을 시작해야 하는 학생들은 당시의 암담한 자기 현실과 현실의 모순을 포착하였다. 프랑스의 경우 50년대 말 알제리 위기의 해결자로 나서면서 장기 집권에 들어선 ‘드골’의 억압적이고 탐욕스러운 ‘부르주아의 비루함’의 모습을 기성세대의 낡은 가치관과 결합시켜 그것들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와 저항의 상을 투사하면서 거리로 그리고 바리케이트로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나선다.

심성적 측면의 조건을 살펴본다면 미국에 의해 대량 학살로 확대된 베트남전의 진행과 이에 대한 베트남 민중들의 영웅적인 저항은 전세계적인 반전 운동을 만들어냈으며 중국에서 시작된 이른바 ‘문화대혁명’은 정보의 부족과 주관적 해석상의 문제를 지적할 수도 있지만 의식과 생활에서의 즉 미시적 차원에서의 또 다른 ‘대안’에 대한 공감과 필요성을 확산시켰다.

50년대 말 불붙은 미국의 흑인 인권 운동은 68년 킹 목사의 암살사건으로 체재 내화적 개혁과 사회 진보의 지체에 대한 전면적인 회의를 가져왔고 체제 외적, 체제 전복적 운동(블랙 팬더 당 운동 등)으로 확대 고양되었다.

일본의 경우 2차 대전 당시 불구대천의 숙명의 적이었던 미국과의 군사동맹으로 전범국에서 자신을 점령한 국가와의 동등한 우방국(?)으로의 격상을 꾀함과 동시에 세계 자본주의 안에서의 우월적 위치를 보전확대하기 위해서 정권과 자본에 의해 이루어진 미일방위조약등의 제반 조처를 감행한다. 이에 대해서 미시마 유키오로 대변되는 일본 극우 민족주의자들은 발악에 가까운 저항을 하였고 ‘도쿄대 전공투’ 로 대변되는 대학생들의 반정권 반체제 투쟁을 가져왔다. 바야흐로 반자본주의를 위시한 민족주의, 인종주의, 여성주의 , 성소수자 문제, 인권 문제 등 다양한 대안과 가치관의 분출의 시작을 알리게 된다.

 

 

68혁명 포스트 모던의 시작?!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저녁의 황혼 빛깔이 오고 나서 나래를 펴고 날아오르듯이 철학은 현상과 운동 너머를 보지 못하고 대체로 추수적인 입장에서 후일담을 정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중세 길드체계에서의 폐쇄적 생산체계의 붕괴와 괘를 같이 하면서 시작된 수공업적 매뉴팩쳐 경제에서의 인간의 혼란을 분석한 칸트의 철학, 산업 자본주의의 시작과정에서 소영주 국가의 붕괴와 민족국가의 수립기에 이데올로기의 부재에 혼란을 겪던 독일의 상황에서의 부르조아 국가와 부르주아 사회의 철학적 토대를 정리한 헤겔이 증명하듯이.

1848년의 2월 혁명, 1871년의 파리콤뮌, 그리고 1917-19년의 사회주의 혁명의 고양기를 지나고 두 차례의 미증유의 세계 대전을 겪게 되면서 노동계급과 민중들은 복지국가 케인즈주의의 안온한 대량소비 사회 속에서의 삶을 지속하면서 기존의 투쟁과 저항의 정신은 거세당하게 된다. 군대폭력에 시달렸던 신임병사가 고참이 되면 다른 신임병을 폭력의 대상으로 삼듯이 오히려 체제와 구조의 거대함에 질식한 민중들은 전면적인 연대 투쟁을 포기하고 또 다른 권력과 구조의 하부가 되어 부분적으로 존재하는 다종다양한 운동(주택점거 투쟁, 성소수자 문제. 이주 노동자문제 등)에 탄압의 주체가 되곤 하였다.

50년대 시작되고 풍미되었던 ‘인간’이라는 이름을 지우고 등장하던 ‘구조주의’ 물결의 최대 고양은 아마도 66년 푸코의 [말과 사물]과 같이 한다. 푸코는 책 마지막에 바닷가 모래사장에 그려진 얼굴마냥 소리 소문 없이 지워지는 인간의 말소를 얘기했고 72년에 출간된 들뢰즈와 가타리의 [앙티외디푸스]에서는 정신분석학적 차원에서의 자본주의 분석을 통해 당시 자본주의 사회의 분석과 모순의 원인을 밝히고자 하였다. 자신들이 폐기한 ‘인간’, ‘주체’,‘의식’의 차원이 부재한 상태에서의 모순과 분석은 역시나 자신들의 선배 철학자들처럼 별다른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고 속절없는 후일담이 될 수 밖에 없었다. 1917-19년의 혁명의 고양기에 뒤이은 20년대 파씨즘의 출현으로 혁명의 전망이 보이지 않았던 시기의 그람씨의 고민과 분석은 오히려 절박하고 현실적으로 보이는 대목이다.

앞에서 서술했듯이 68혁명의 시작과 전개에 있어서 세계적 차원에서의 자본의 위기는 분명히 존재했다. 그리고 그 모순과 위기는 명백했으며 치명적이었다. 68혁명의 진전 없이 체제 내화로 마무리 되면서 조우하게 된 70년대. 새로운 모습의 자본주의 - 신자유주의와 신보수주의가 그들 철학의 유효성 폐기를 보여주고 있다. 세계 자본주의 위계 속에 최상위에 속한 제1세계 제국주의 국가와 사회 속에서 전개 발전된 포스트 모던 류의 철학은 성급하게 모던(근대)를 정리하고 포스트 모던을 주장하면서 본의 아니게 자본주의 체계에 복무하게 된다.

 

68혁명의 연장 아니면 새로운 시작

 

68혁명의 세대들은 이제 육십 줄에 들어선 중늙은이가 되었다. 우스개 소리로 “파리의 노인들이 젊은 세대보다 더 진보적이고 급진적이다” 라고 한다. 당시 대학가인 카르티에 라탱에 바리케이트를 쌓고 공권력에 폭력으로 대치를 하면서 ‘모든 금지를 금지한다’와 ‘상상력에게 권력을!’이라는 구호를 외치고 성의 자유와 모든 금기와 억압에 대해 저항하였던 그들은 오늘날 프랑스 젊은 세대 사이에 늘어나고 있는 르펜으로 대변되는 프랑스 국가주의자들이나 네오 나치등의 인종주의자들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몇 년전 서울광장을 붉게 물들인 붉은 악마와 태극기의 물결을 보았던 우리는 오늘 저녁 서울 시청 앞과 광화문 사거리의 촛불 소녀들을 붉은 악마와 같게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다르게 보아야 하는가?

심야에 차도를 메우고 행진을 하고, 밧줄로 전경차를 밀어내면서 ‘비폭력’과 ‘평화시위’를 외치는 시위대를 보면서, 80년대와 90년대 곤봉과 방패의 세례 속에서 파이프들 들고 보도블럭을 깨고 화염병을 던지면서 시위를 했던 세대들에게 있어서 진압을 하는 전경의 방패 진압에 경찰의 폭력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요즘의 젊은 시위대와 전경들의 약간의 폭력의 전조에도 카메라를 들이대는 청소년과 시민을 보면서 80년대와 90년대 한국사회에 살았던 사람으로써 ‘늙었음’ 절실히 느낀다.

또 다른 잘못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우선 68혁명 이후 40여년이 지난 지금의 현실은 ‘과연 어떠한가’ 에서 출발하여야 한다. 신자유주의의 발전과정에서 투자 없는 투기의 전지구화로 인한 수십, 수백조 달러에 달하는 갈곳 없는 투기 자본의 유례없는 축적과 쌀값의 폭등으로 쌀 대신 진흙을 구워먹어야 하는 아이티의 어린이들이 병존하고 있는 21세기의 지구는 하늘에서 쏟아지는 수백 수만의 네이팜탄을 소총하나로 막아내야 하는 베트남의 정글유격대의 현실과 과연 차이가 있는가?

선진 제국주의 국가에서 케인즈주의에 의한 축적의 한계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발생한 최초의 ‘위험사회’화의 징후를 안정된 정규직 노동계급은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사회에 나가게 될 새로운 세대는 차분한 고민과 분석 이전에 본능적 위기감으로 모순의 파열점을 포착하고 거리로 광장으로 나왔다. 대한민국에 있어서 10여년간 착실하게(?) 진행되어온 신자유주의 시장화의 피로와 모순은 어쩌면 여론 주도를 하는 기성세대 정규직 노동계급에게 있어서 보다 오히려 대학생들에게 아니 오히려 살인적인 입시제도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미래의 ‘88만원 세대’인 청소년에게 더 위협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68년 5월의 사태가 발생하자 프랑스의 공산당과 CGT로 대변되는 노조단체들은 대학생들의 저항에 대해 ‘부르주아적 우발적 행동’으로 규정짓고 초반에 연대하지 않는 우를 범했다. 오늘날 청계광장에서의 청소년들의 저항에 대한 우리네의 안이한 분석과 비관주의적 평가와 큰 차이점이 없다. 이러한 평가는 바로 우리들의 둔감함과 상대적인 안온함 그리고 치열한 모순에 대한 고민의 부족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나가면서

프랑스에 있어서 68혁명 당시의 주체들의 요구와 이슈에 대한 평가는 당시에 철저하게 반동적 이데올로기에 오염된 결과라는 평가를 받았었다. 내부적으로 공산당의 의회정치의 역할이 중요한 힘을 가지고 있었고 사회보장에 의한 정규직 노동자들의 기본적 욕구가 보장되고 있었으며 외부적으로는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권이 건재하였던 상황에서의 객관성이 결여된 그들만의 주관적인 분석이었다. 그러나 당시 세계적 차원에서의 자본주의의 위기가 시작되었었고 제3세계 특히 아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변화와 저항의 운동이 전후 활발하게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현재 대한민국의 경우는 어떠한가? 아니 전지구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한민국은 어떠한가? 하루하루 늘어만 가는 홈리스, 폐업이 되어 또 다른 폐업 사장을 기다리는 가게들의 확대, 외부적 요건이라고 하지만 월급만 빼고 올라가는 물가들..... . 우리가 부지불식간에 간과했던 모순이 여기저기서 허연 뼈다귀를 내보이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도래와 더불어 68이 시작되었다면 신자유주의의 몰락과 더불어 새로운 그 어떤 것의 시작과 더불어 촛불은 타고 있지는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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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적 사랑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가?

일상적 사랑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가?

은하철도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1972년도 작품, 이하 ‘파마탱’ )는 우리 시대 우리에게 있어서 금기(禁忌) 그 이상이었다. 실비아 크리스텔의 ‘엠마뉴엘부인’은 이미 초등학교때 개봉이 되어 선배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전설이었다면 베르툴루치의 ‘파마탱’은 개봉조차 금지당한 금단의 그 무엇이었다. 80년대 말, 지금은 허물어 호텔이 되어 버린 서울의 국도극장에서 개봉되었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놀랐었는데 마구 삭제 되어 개봉되었다는 그 이후에 소문을 들으면서 이유없이 분개했었다. 인터넷 초고속망의 세상 속에서 손쉽게 파일로 구해 볼 수 있는 요즘에 비하면 ‘예술이냐 외설이냐’의 영화에 대한 개봉 당시의 논란 자체는 불과 20년 전이지만 옛 시절의 아득한 얘기인 듯하다.

프란시스 베이컨의 초상화들

필림이 돌아가고 색소폰 소리가 애절하게 테마음악을 연주하는 가운데 아일랜드 화가 프란시스 베이컨의 일그러지고 찌그러진 뭉개진 인물 상(像)이 타이틀로 올라간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사람인지 아닌지 조차 구별이 힘든, ‘과연 인간의 것인가’ 라는 의문이 드는 처참하게 난도질당하고 총알로 뭉개진 듯한 얼굴이 그리고 눈, 코 그리고 입이 과연 제대로 기능을 할지 의아한 얼굴을 가진 군상들이 나른한 듯 카우치(긴 장의자)에서 누워서 번들거리고 뭉퉁한 몸둥이를 그대로 보이면서 흘러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인간의 정신을 기괴한 형태의 얼굴과 육체로 표현한 베이컨의 작품들은 안락한 의자에 나른하게 누워있는 인간의 위태로움과 기괴스러움 그리고 정신 분열을 보여주고 있다. 본질적으로 노동을 해야 하지만 그러나 노동을 천시하고 하기 싫어 발버둥 치는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의 인간의 정신의 양립 불가능성 그리고 그 결과로 발생하는 필연적인 분열증세!

 

 

 

 

 

 

 

파씨(Passy)에서의 첫 만남

영화의 첫 장면에서 주인공 폴(마론 브란도)와 잔느(마리아 슈나이더)가 파리의 파씨 지역의 세느강을 가로 지르는 비르아켕(Bir Hakem)철교의 지하철 밑으로 지나간다. 20세기 초에 만들어져 낡은 지하철은 굉음을 내면서 철교를 지나고 소음에 주인공 폴은 하늘에 대고 욕을 한다. 나폴레옹 3세 이후 부르주아지를 위한 신흥 주택지역으로 급부상한 파씨의 고풍찬연한 아파트의 안에서 둘은 우연히 만나고 사랑(?)을 나누고 서로의 신분 확인도 안하고 헤어진다. 그 둘이 각각 걸어가는 길가에는 방탄차와 무장 전투경찰이 시위대에 맞서고 있다. 주인공 폴은 미국인이지만 정체를 알 수 없다. 세계 각국을 떠돌아 다녔으며 복싱선수에서 기자 그리고 남미의 혁명단원으로 그리고 지금은 파리의 어느 싸구려 여인숙의 여사장에게 기생하는 남편에 이르기까지... 분명한 것은 과거에 뜨거웠던 열정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지금은 심하게 좌절하고 체념하고 돈 많은 부인에게 더부살이 하고 있다는 것이다

폴은 이런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싶지만 그 부정의 방법으로는 단지 모르는 여인(잔느)의 끊임없는 질문에 대해서 끈질기게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기를 거부하거나 아니면 가학적 성행위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반면 잔느는 대령인 아버지를 둔 그리고 시골에 저택을 상속한 부르주아 계급의 젊고 희망에 찬 아가씨이다. 자신의 얘기를 들어주기를 거부하는 폴에게 끊임없이 자신의 얘기를 하면서 정체성 확인을 요구하고 폴과의 위험한 줄다리기를 한다.

폴의 아내는 여인숙에 장기 투숙하고 있는 한 남자의 정부로서 남편인 폴이 모르게 오랫동안 이중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 폴은 아내와의 부부관계를 통해 과거의 자신의 정체성과의 단절과 혼란을 겪고 있었다. 그리고 자본주의에서의 금전적 종속의 전도(부자인 부인과 무일푼 기생하는 남편)로 인한 마초적 불만을 가지고 있다. 그 만큼 폴의 아내 역시 아무런 조건 없는 남녀 관계(정부와의 관계)를 통한 지금의 남편과의 관계(일반적 남녀 관계에서의 주도권은 남성이 가지지만 이 경우에는 역전되어 있다)에서의 해방을 느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잔느는 젊은 영화감독을 지망하는 남자친구를 두고 있다. 모범적 남녀관계와 시간이 지나게 된다면 안락한 부부생활로 이어지는 안전하고 넓은 길에서 이탈하여 정체모르는 폴과의 관계를 끊지 못하고 위태한 만남을 이어간다.

폴에게 있어서 아내와의 관계는 철저하게 자본주의적인 관계였었다. 아니 어쩌면 일상적인 남녀의 역할(일상적인 자본주의에서 남자는 사회에서 여자는 집안에서)이라는 것 자체가 가정에 들어온 자본주의적 관계 그 이상도 그이하도 아니다. 역전된 역할(돈 있는 아내와 백수인 남편, 돈 때문에 결혼했다라는 주위의 시선)과 결혼이라는 법적 제도로 엮어진 틀에서 폴은 다층적인 원인에의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으리라.

폴에게는 새로운 관계의 맺음(잔느와의) 아니 관계없는 관계, 전인격적인 관계, 사회경제적 조건이나 정체성을 괄호 안에 넣은 상태의 관계를 희구했었고 그 대상이 잔느였으리라.

그러나 잔느에게 있어 폴과의 관계는 일시적이고 충동적이었기에 그간의 단조로운 안정된 생활과 관계에서의 ‘악센트’나 ‘별미’ 정도에 불과했다. 오히려 계속적인 관계와 만남 속에서 만들어지는 그리고 늘어나는 불안과 고통 어색함은 일상적 관계맺음의 방식으로 되돌아 가고자 하는 충동을 확대한다. 끊임없는 상대방에 대한 물음과 존재 확인을 요구하는 잔느는 자본주의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영원히 처음으로, 제자리로 되돌아가는 나침반 같은 방식을 버릴 수 없었다. 결국 두 연인은 파국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68혁명: 자본주의적 관계 맺기의 회의

‘모든 금지를 금지한다’라는 슬로건이 생각나는 68혁명의 좌절과 더불어 ‘파마탱’은 만들어졌다. 영화가 만들어지던 바로 그해에 들뢰즈와 가타리는 [자본주의와 정신불열- 앙띠 외디푸스](1972)를 통해 ‘탈주’를 하나의 방책으로 제시했다. 벗어날 수 없는 편집증적 사회의 망(網)들 속에서 개인은 편집증내지는 분열증을 띌 수 밖에 없다. 체제에 순응하는 순간 편집증에 사로잡히고 벗어나려는 순간 분열증에 빠질 수밖에 없다. 편집증과 분열증은 구분할 수 없는 동전의 양면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개인의 상태이다. 들뢰즈와 카타리는 융이나 라이히라는 선구자가 있지만 무의식이라는 것이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이라고 주장하면서 우회적인 자본주의 비판을 수행한다. 영화에서 폴은 자본주의적 관계 맺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분열증적 모습을 보인다면 잔느는 자본주의적 관계 맺기에 집착하는 편집증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탈리아의 유명한 좌파 작가의 아들인 베르톨루치는 영화와 인연을 아버지와 절친했던 좌파 감독인 파솔리니 감독의 조수로서 시작하였다. 파씨즘 체제의 음모를 폭로하는 ‘거미의 계략’과 ‘1900’이란 영화를 통해 좌파 감독의 대열에 들어섰다. 그러나 ‘마지막 황제’등으로 그간의 평가를 배신하는 듯하더니 최근 68혁명을 소재로한 영화(몽상가들)로 논란을 만들었다.

‘파마탱’ 곳곳에 감독 자신의 전력과 회한 그리고 불같이 시작되었다가 급격히 사라진 68혁명의 좌절이 영화 여기저기에서 짙은 패배의식으로 묻어나고 있다.

20세기 초반 아르헨티나에서 이민자들에 의해 만들어져 유행된 ‘탱고’는 오늘날 가장 퇴폐적인 춤 형식의 하나이다. 남녀가 밀착되어 녹아내리는듯 우수 짙은 선율에 몸을 맡기는 춤에서 과거는 없고 미래에 대한 전망은 발견할 수 없으며 오직 현재만 있는 듯하다.

탱고를 추는 무도장에서 마지막으로 폴은 잔느와의 관계의 진전을 시도하지만 이미 ‘기괴함’의 거북함을 감지하고 ‘편안함’에 마음을 둔 잔느를 되돌릴 수는 없다. 과거를 버리고 현재에 충실하려고 하는 폴에 비해서 현재에 충실했던 잔느는 이제 미래를 본다.

마지막 잔느의 아파트까지 쫒아온 폴은 이름 없는 강도로 주인의 정당방위에 의해 사살 당한다.

미시적 혁명, 거시 담론

68혁명은 전세계 차원에서의 운동이었는가? 아니면 봉기이었는가?

전자에 대한 평가는 주로 자유주의자들의 평가이다. 이전의 각종의 금기와 고래의 가치관에 대한 근본적인 반대와 회의가 시작되는 계기라는 것이다. 실제로 ‘반전’과 ‘평화’가 전세계적으로 확산되었으며 환경문제와 소수자 문제 여성문제 등이 중요한 이슈가 되어 때로는 자본주의의 근본적 모순(착취관계의 재생산)을 능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68혁명은 현재 진행형이면서 실패하지 않은 혁명이다.

그러나 봉기의 차원에서 보자면 미쳐 횃불도 들기 전에 꺼져버린 횃불이다.

미시적 권력관계에 초점을 두고 투쟁했던, 지도부와 핵심 없는 수많은 리좀적 투쟁과 구호속에서 권력과 자본은 성적 자유와 문화적 차원에서의 허용의 확대는 허락했지만 자신의 양태를 케인즈주의 자본주의에서 신자유주의로 확대 강화하면서 본질은 굳건하게 지키고 개인과 사회의 조작과 통제를 오히려 고도화하였다. 허용할 듯 하면서도 핵심은 꽉 쥐어 잡고 변죽만 울리는 형국!

언제든지 국가와 자본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동원하여 개인들에게 또 다른 방식으로 기존의 가치관과 이데올로기를 강제한다. 미시적 차원의 허용을 용인하는 듯 하다가도 어느 순간 일거에 회수해버린다. 현재 각종의 사회운동 분야가 일정정도 진지를 구축하고 있다.

그러나 그 진지는 대륙이 아닌 섬이 아닌지.......고립되어 있으면서 다른 진지와의 연결점 없는 수 많은 산개한 섬들.....

그렇기 때문에 봉기여야 한다. 아직 끝나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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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벳 유랑기

 

 

 티벳 유랑기 

靑藏열차를 타고 티벳으로 

 12월 대선이 끝나고 어수선한 연말연시를 뒤로하고 07년 마지막 날 북경행 비행기에 올랐다.

중국도 그렇지만 한국도 이제 양력의 설은 무의미한가 보다. 오후에 떠나는 비행기에 자리가 헐렁하게 비어있다. 한 시간 남짓 승무원이 주는 밥을 먹고 맥주 두 병을 마시고 나니 북경 수도 공항이라고 한다. 1000킬로미터 남짓이니 가깝기는 가깝다. 어둠이 내린 북경은 늘 그렇듯이 스모그가 낮게 깔려 있고 연탄이 탈 때 나는 냄새가 코를 찌른다.  8월에 올림픽이 열리니 여기 저기 새로운 건물들이 무서운 속도로 들어서고 있었다. 40여분 만에 북경 시내에 도착을 하고 천안문 근처의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근처 가게에서 독한 빼갈을 큰 병으로 하나 사고 택시를 타고 북경서역으로 향한다.

  중국에서 가장 큰 역중에 하나라서 그런지 항상 사람으로 붐볐다. 원칙적으로 외국인의 경우는 티벳으로 가기 위해서는 중국 당국의 허가서를 받아야 한다. 긴장을 하고 표를 내미니 역무원이 개찰을 하면서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성공이다’ 초록색의 육중한 북경발 라사행 T-27열차에 오른다. 9시 반에 출발해서 이틀을 달려 46시간여 만인 저녁 8시에 라싸에 도착한다고 한다. 장시간 기차여행의 경험이 한국에 태어나 살아온 나로서는 없었으니 걱정이 앞선다. 예상대로 출발 전 이미 기차는 꽉 차있었다. 같은 칸의 승객들과 인사를 나누고 양치를 하기 전에 술을 마신다. 빼갈의 장점은 빨리 술기운이 몸전체에 퍼진다는 점이다. 양치를 하는데 몸이 휘청인다. 창 밖으로 불빛이 빠르게 지나가고 한 두 시간 간격으로 잠을 깨고 다음날 새벽 서안을 지나고 저녁에는 란주에 그리고 3일째 아침에 서녕에 도착한다. 정차한 틈을 이용하여 기차 밖으로 나와 대륙의 찬 공기를 한껏 폐속에 집어넣는다. 청해성의 성도인 서녕을 지나니 6명이 정원인 침대칸에 달랑 승객은 나와 세 살배기 아이를 둔 엄마만 있다. 올해 28살의 ‘스이’의 엄마는 서안 주변의 농촌에서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는데 남편이 3년째 라싸에서 노동일을 한다고 한다. 다시 10여시간을 달려니 거얼무 자정이 한참지나 새벽에  꺼얼무에 도착한다. 靑藏(칭짱)철도가 놓이기 전까지는 선로는 꺼얼무에서 멈추고 꺼얼무에서 라싸까지는 靑藏공로를 이용해서 15시간을 가야만 했었다. 지금은 철로가 놓여서 10여시간만에 라싸에 다다를수 있게 되었다. 자리에 누워 불면의 밤을 보내니 어느덧 새벽이 다가 오고 있었다. 하늘의 별들의 빛이 약해지고 지평선 저 너머로 희뿌연 가느다란 빛이 올라오고 있었다. 집들도 보이지 않고 저 멀리 산들이 보이는 평원 한 가운데를 기차는 쉼 없이 달린다. 기차에 있는 전광판에는 해발 고도가 이미 4000미터를 넘고 있었다.  투통과 소화불량 그리고 심장 박동의 이상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같은 칸의 스이 엄마는 고산증 증세가 심하게 나타나나 보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맥을 놓고  누워만 있다. 나도 식욕이 없어 맥주만 마시게 된다. 환한 아침이 되자 순정무구한 티벳의 대지가 눈에 확 들어온다. 저 멀리 만년설이 덮힌 설산이 보이고 간혹 야생 당나귀와 야크 무리가 기차에 놀라 뛴다. 라싸 중심지에서 남서쪽에 위치한 역에 도착 하고  티벳 사람의 자가용을 얻어 타고 시내로 향한다. 광장에서 조명을 받은 포탈라 궁전이 궁전 건너편 중국이 연못을 메우고 만든 광장을 굽어보고 서있었다.


(조캉 사원 근처 바코르에서 설날을 맞아 라싸로 온 순례객들이 점심을 먹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 그리고 사람들

  동이 트기 전인 7시 즈음 티벳 각지에서 온 순례객들만이 바코르를 순례하고 조캉사원에 있는 당나라 태종때 문성공주가 가져 왔다는 12살 석가모니불을 친견하기 위해 줄을 길게 서고 있었다. 티벳의 순례객들에게서는 어른이나 아이나 할 것 없이 같은 냄새가 난다.  불교 사원에서 염원을 하면서 사르는 향냄새와 젖먹이 아이들에게서 나는 우유냄새. 두 냄새가 티벳 사람들의 삶을 대강 설명한다고 할 수 있다. 티벳 사람들의 종교적인 면과 유목 생활을 통한 쇠고기와 우유를 즐겨 먹는 그들의 식생활이 녹아 있다. 티벳이라는 나라를 알게 되고 티벳의 역사와 현재 상황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티벳의 독립’이 절대 절명의 진리처럼 여겨졌던 적이 있었다. 중국의 강제적 점령과 티벳 문화의 말살을 통한 중국으로의 동화. 수백만 티벳인들을 학살하고 중국 한족의 대량 티벳 이주로 인한 티벳의 중국화. 이 모두는 티벳이라는 성스러운 나라와 성스러운 민족에 대한 절대악이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유일한 대책으로는 티벳의 독립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티벳 사람들과의 대화 그리고 티벳 현지에서 본 티벳의 현실이 다가오면서 조금씩 생각이 변하기 시작했다.

  현재 티벳의 공식적인 명칭은 西藏(시짱)자치구로서 중국의 행정 구역상 하나의 省(성)에 속한다. 59년 중국인민해방군의 점령이후 50여년 간 지속된 중국화 정책으로 티벳의 인구의 절반은 한족이 차지한다. 실제 티벳의 수도(성도)인 라싸의 경우 포탈라 궁과 조캉 사원 근처 지역을 제외하면 다른 지역은 티벳인 보다 한족이 숫적으로  우세한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라싸시내는 물론이고 시골에서도 한자로 쓰여진 간판들과 한족의 문화는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티벳 고유의 것들을 빠른 속도로 사라지게 하고 있다. 게다가 인적이 드문 오지에까지 설치된 군부대를 보면 티벳의 얼마남지 않은 고유성 조차도 시간 문제인 것 같아 보인다.

 

(포탈라 궁전 앞 광장의 중국공산당이 세운 기념비를 경비하는 중국 인민 해방군)



철도가 개통되면서 한족의 티벳 이주는 가속화되고 있다. 현재 사천성의 충칭이나 청뚜는 물론이고 수도인 북경에서 그리고 저 남쪽 홍콩의 옆인 광쩌우와 상하이에서 티벳의 라싸까지 직통열차가 연결되면서 새로운 신흥개발지인 티벳으로의 가난한 한족 농민들의 이주는 간편해졌다. 새로이 건설되는 건물이나 대단위 아파트 단지에서 힘겹게 일하는 한족 이주 노동자들과 저 멀리 야크를 방목하다가 또는 농사를 짓다가 추수를 마치고 설날에 즈음하여 라싸로 성지순례를 온 때묻은 티벳 전통 복장의 유목민들과 농민들을 보면 얼굴과 체격의 차이가 있을 뿐 힘겨운 삶의 무게는 차이가 없는 듯 하다.


2002년 처음으로 티벳에 갔을 때만 하더라도 관광객의 대부분은 한국인을 포함한 서양의 외국인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중국의 경제 성장과 더불어 관광수요의 폭증은 티벳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몇 몇 서양 단체 관광객들을 제외하고는 광동지방이나 북경에서 오는 중국인 배낭여행객들의 숫자가 두드러지게 늘어난 것으로 보였다. 그들의 기호에 맞는 식당이나 술집이 포탈라 궁전을 조금 벗어난 지역에 즐비하게 들어서면서 조캉사원 주변의 바코르가 맡았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티벳인들이 밀집한 이 지역은 저녁이 되면 용량 문제로 자주 정전이 되었지만 새로운 한족의 환락가는 정전을 모르고 밤이 되면 각종 식당과 유흥업소의 네온사인이 여타의 중국 대도시와 다르지 않게 화려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티벳의 과거와 티벳의 미래

  티벳의 한족화는 5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지금도 중국 당국이 세운 학교를 통해서 티벳어와 문자는 잊혀지고 한자와 한문이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티벳의 정치적, 종교적 유일한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의 망명과 더불어 새로운 티벳 세대들의 세속화는 학교 교육이라는 미명하의 한족화와 중첩되어 가속화 되고 있다. 이전에 할리우드 영화를 통한 서구화는 한류라는 이름의 한국 영화와 드라마의 유입이 더해져  급속히 티벳 청소년들 사이에 확산되고 있다. 이들 새로운 티벳의 젊은 세대들은 과거의 전통과 종교 그리고 티벳의 독자성을 부정하기에 앞서 잊은 상태로 태어나 성장하고 있었다. 

우연히 티벳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다. 중국의 북경에서 대학들을 마치고 공무원으로 그리고 교사를 하는 소위 ‘인텔리’라고 할 수 있는 친구들이었다. 그들의 공통적인 점은 서구화에 경도 되었지만 여전히 티벳의 전통적 종교에 대한 신심은 두터웠다. 몰래 조그만 목걸이를 만들어 달라이라마의 사진을 지니고 다닐 정도로 현 달라이 라마에 대한 존경심도 대단했다. 그러나 그들의 달라이 라마의 세속적 권력에 대해서는 대단히 부정적이었다. “중국이 침공하지 전에 티벳은 소수의 특권층이 지배하는 계급사회”였다라고 분명히 비판하고 있었다. 그리고 중국으로부터의 “자치와 독립은 원하지만 과거처럼 신권정치 형태는 반대한다”라고 말을 했다. 아울러 중국이 티벳을 침공할 당시의 “200만명의 양민학살을 잊지 않고 있다”라고 말하면서 80년대 이전까지의 중국 공산당의 티벳에 대한 내치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90년대 이후 특히 89년 천안문사태 이후의 중국공산당의 티벳에 대한 더 나아가 중국 전체에 대한 정책에 대해서는 비판을 삼가지 않았다. 자리에 함께 늘 했었던 한족의 중국인 친구도 상당부분 티벳의 자치와 독립에 공감을 표명하면서 중국 공산당의 무늬만 사회주의 슬로건에 대한 심한 혐오감과 나날이 확산되는 계급간의 그리고 민족간의 모순과 분열 그리고 갈등을 우려하고 있었다.

독립과 자치의 가능성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한결같이 “중국의 문화와 교육을 통한 한족화로 인한 티벳인들의 자치 능력의 저하를 우려”했으며 서부대개발이라는 명목하에 벌어지는 티벳의 부존자원에 대한 무분별한 개발과 티벳  제의 중국 의존성 심화를 이유로 들면서 상당기간 능력을 배양하기 위한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민족을 넘어 People로

티벳에 머무는 기간 많은 서구인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수 있었다. 대개는 관광객이었지만 많은 수의 서구인들은 영어권 나라에서 온 중국 현지의 학교의 영어 교사들이었다.  그중에 미국 오레곤중에서 온 A라는 친구는 홍콩 옆의 션쩐의 외국어 학교에서 작년 여름부터 초등학생을 상대로 영어를 가르치는 신출내기 교사 였다. 나름 영어를 모국어로 둔 덕분(?)에 세계 곳곳을 누비며 돈도 벌고 여행도 하는 그가 부럽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가 중국에서 한국돈 60여만원을 받고 영어를 가르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들으니 세계 최고의 부자나라라는 미국의 일반 시민들의 사상누각의 삶이 안타깝기도 하였다.

A는 백남준과 같은 비디오 아티스트가 꿈이라고 한다. 당연히 전공도 비디오 아트이고 졸업후 당장의 일자리를 구할 수 없어 중국영어교사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대형 마트의 매니져 였으나 50세 이후 정리해고 상태이고 바로 밑의 동생은 소아당뇨병으로 18세에 돌연사망했으며 중국에 있는 동안 여동생도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고 하면서 자신도 “올해 6월 말 미국으로 돌아가면 의료보험 혜택이 없는 상태”라고 하면서 걱정을 하고 있었다. 꾸준히 지속되어온 미국의 신자유주의 정책은 단란하고 평범한 한 미국의 가정의 가장 큰 고민거리를 만들어 주고 있었다. 낙천적이고 너그러운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얼핏 보면 걱정없는 미국의 20대 청년으로 보였지만  커다란 여행용 배낭보다 더 무거운 제도적 모순을 어깨에 짊어지고 살아가야 하는 친구의 뒷 모습을 보면서 그 날 저녁 남은 친구들과 만취를 할 수 밖에 없었다.

티벳의 억압받는 티벳인들, 하루 하루 먹고 살기가 버거운 티벳에 온 한족 이주노동자들, 그리고 세계 최고의 부자나라 미국에서 온 영어 선생. 모두들 얼굴과 언어 문화 그리고 핏줄과 인종은 다르지만 하나로 묶을 수 있었다. 바로 억압받고 고통받는 ‘인간’이라는 틀이었다. 따지고 나누고 분류할 필요없이 ‘인간’이라는 점을 술 기운을 빌어서 토로를 했고 친구들도 선선히 수긍했었다. 그 날 술집 창문 밖으로 새벽 하늘에 초승달은 맑은 티벳의 대기 덕분에 밝았고 그리고 창백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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