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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짓는다는 것 - 글 쓰기의 어려움.

'글을 짓는다'..는 말은, 적어도 내게는, 꽤나 엄숙하고 묵직한 느낌이다. '짓다'라는 동사를 쓰는 가장 흔한 경우는 '농사'일 것이다. '피땀흘려 지은 농사'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은 것은 그만큼 농사짓기가 어렵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글을 '짓는 것'도 어려울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 작가들도 책을 내는 일을 출산의 고통에 비유하곤 하지 않는가. 기껏해야 회의문서나 성명서, 보도자료 등 기사형태의 사실전달을 위한 문서작업이 글 쓰기의 전부인 내가 글짓기에 대해 운운한다는 것이 어이없는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글짓기가 어떤 것인지는 좀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 예전에 작가 김훈의 '칼의 노래'를 보면서 한 선배가 그의 통찰력에 대해 칭찬한 적이 있었다. 기억은 잘 안나지만 책 속의 한 문장을 언급하면서 그 문장에 드러난 무력/권력에 대한 속성을 아주 정확하게 표현한 그의 문장을 칭찬했던 것 같다. 난 어렸을 때부터 외국소설(주로 영미권이지만)의 번역체에 길들여져서인지 한국작가들의 소설을 거의 안 읽기도 하지만, 선배의 말을 듣고나니 김훈의 책은 더더욱 읽고 싶지 않아졌다. 아마도 그 문장의 내용들을 이해(했다고 착각)하는 순간, 그로인해 밀려올 나 자신의 초라함을 견디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특히 다른 의사소통의 방법들(음악, 미술, 춤등 비언어적 방법들)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으로서, 내가 가진 말과 글의 표현력이 일천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게 꽤나 무서웠던 모양이다. 정말 말도 안되는 이유이지만. 말이나 글이 갖는 일차적 목표는 결국 어떤 단어들을 적재 적소에 정확하게 배치하여 정확한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결국 일차적 목표일 뿐이고, 사전적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문장을 완성했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화자/필자의 의도까지 정확하게 전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가령 '평화사진작가 이시우씨의 국보법반대 단식이 30일을 넘기고 있다'라는 문장과 '한 예술가이며 운동가인 이의 장엄함'이 다른 것 처럼 말이다.


'이것도 인권이에요?' - '당연하지!'라는 공감을 끌어내기 위해서 내가 해야 할 것은 글 '쓰기'가 아니라 글 '짓기'라는 생각이 문득 드는 것이다. 짓는다는 것은 단순히 없던것을 새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주 과학적인 과정을 통한 재창조인 것이다. 볍씨를 뿌려 벼를 거두는 농사처럼, 내가 알소있는 사실과 느낌을 종합하여 언어라는 비료를 통해 하나의 글을 완성하는 것. 달마다 닥쳐오는 마감에 어지러이 쫓기는 것만 생각하다보니 내가 뭘 하고 있었는지를 몰랐었다. 출산의 고통까지는 아니더라도 고통을 감내하면서 내 글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던 것이다. 내 글에 대한 애정을 내가 쏟지 않으면 누가 쏟아주겠는가. 좀 더 열심히, 지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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