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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우리 입을 열어 주소서”-투쟁 현장에서 ‘이야기’가 갖는 의미에 대하여- 여정훈(혁명기도원)

“주여, 우리 입을 열어 주소서”

-투쟁 현장에서 ‘이야기’가 갖는 의미에 대하여-

 

 

여정훈(혁명기도원)

 

 

1. 들어가며

 

혁명기도원은 여성가족부 앞 농성장에서 2011년 7월 7일 금요일부터 시작하여 12월 14일 까지, 매주 수요일 저녁 7시에, 20주를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매주 수요일 기도모임을 가졌습니다. 이전까지 명동 3구역 카페마리에서 기도모임을 갖고 있던 저희는 그 곳에서 현대차 해직자 농성장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마침 향린교회에서 명동 3구역으로 매주 수요일 저녁예배를 함께하러 오고 계셨고, 여가부 앞 현장에 계신 분이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혹시나 현장에 도움이 될 까 하는 생각으로 연대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식상한 표현처럼 되어 버린 말입니다만, 농성장에서의 수요일 저녁기도를 시작한 후 도움을 얻은 쪽은 저희들 이었습니다. 모임에서 읽었던 시편과 복음서, 전통적인 기도문들은 매 시간 새로운 의미로 저희에게 다가왔습니다. 정해진 순서대로 매주 읽어내려 간 성서 구절들과 매주 변화하는 농성장의 환경과 맞물릴 때에, 저희는 기독교 전통의 봉인되었던 층들을 하나씩 재발견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오늘 제가 들려 드릴 이야기는 22주간의 저녁기도를 통해 다시 발견하게 된 기독교 신앙에 대한 것입니다.

 

 

2. 우리는 이야기 속에서 산다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질문을 하나 던져 볼까 합니다.

 

"여러분이 네 살 때쯤 가장 많이 했던 질문은 무엇이었습니까?"

 

잘 기억 나지 않으신다면, 자녀가 있으신 분들은 아이가 네 살 때쯤 가장 많이 던졌던 질문을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사실 옆에서 지켜보다 보면 짜증이 나기도 하는데요, 아이들은 어른들이 보기엔 지겨울 정도로 "왜? 왜?" 하고 묻습니다. 하나 예로 들어 볼까요?

 

"엄마 왜 달이 우리 따라와?"

 

이 질문에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보통 우리는 "달이 우리 수정이 좋아서 그런가 보다" 라는 식의 대답을 하지, 천문학적 대답을 들려 주지는 않습니다. 사실 저는 천문학적 답이 뭔지도 잘 모릅니다. 제 변명같이 들릴 지도 모르겠지만, 일상 생활에서 우리는 천문학, 물리학, 열역학 등에 대해 몰라도, 심지어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있다 해도 무리 없이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우리 삶에 더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상황, 등장인물, 시간과 그에 따른 상호작용을 포함하는 ‘이야기’ 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 상황을 이해하고, 예측하고, 자신의 역할을 인식합니다.

 

앞의 상황에서 주어진 대답 또한 일종의 이야기 입니다. 거기엔 ‘달’과 ‘수정이’라는 등장인물들이 있고, 두 인물은 시간과 공간의 변화에 따른 상호작용을 갖습니다. 나아가 '달이 수정이를 좋아한다'는 짧은 문장은 전형적인 사랑 이야기의 구조를 불러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순식간에 저 짧은 이야기를 과거와 미래까지 가진 완결된 이야기로 만들 수 있습니다. 일정한 단위를 가진 시간, 그리고 그 안에서 등장인물들이 일으키는 사건. 이것들은 우리 마음속에 매우 쉽게 자리 잡고, 아주 빠르게 소환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대상에 대한 우리의 감정 또한 규정합니다. 앞의 수정이 이야기를 생각 해 봅시다. 엄마의 대답이 위의 것이 아니라 “수정이 못된 짓 하나 지켜보려고 따라온다" 였다면 어땠을까요? 분명히 그 아이는 자기를 따라오는 달에 대해 다른 감정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감정은 상황에 대한 대응 방식과 연결됩니다. 좋은 감정을 가진 대상에게는 가까이 다다가고, 그렇지 않은 대상은 멀리 하거나 제거하는 것, 이것은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할 만한 과정입니다. 이렇듯 이야기는 아주 효과적인 방식으로 상황에 대한 이해부터 그에 대한 대응까지의 과정을 인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야기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여성가족부 앞에서 함께 기도 하면서 저희가 깨달은 사실 중 하나는, 성서 또한 그러한 종류의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시편은 억울한 처우를 당한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고, 복음서는 새 세계를 만들기 위해 싸우던 예수와 그 제자들의 꿈, 성공, 실패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성서가 이야기로 가득하다는 것은 그 책이 더이상 구원을 위해 믿어야 하는 교리들의 목록도, 지켜야 하는 법규들의 목록도 아니라는 의미 입니다. 성서는 우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 이야기 안으로 초대하며, 그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볼 수 있게 하고, 자신과 타인을 대하는 방식까지 변화 시키기 위해 우리 앞에 던져진 책이라는 것입니다.

 

 

3. 이야기와 기독교 신앙

 

처음 농성장을 찾았던 7월 7일에 권수정 동지는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언니는 하느님이 이 싸움을 꼭 이기게 해 주실 거라고 믿는다.”

 

‘싸움을 승리로 이끄시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은 독실한 감리교 신자인 박사랑 집사가 농성장에서의 삶을 버틸 수 있게 하는 힘이었습니다. 이 힘을 얻게 한 신앙 역시 이야기의 형태를 갖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세상을 만드신 선하신 하느님이 있고, 그 하느님은 정의를 추구하신다.

그 하느님은 자신을 믿는 이들을 사랑하시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신다.

결국 하느님은 그 기도에 응답하셔서 정의에서 어긋난 상황을 바로잡으신다.

 

이것은 우주적 스케일의 거시적 이야기 이면서, 동시에 기독교 신앙인이 자신의 삶이라는 미시적 영역을 이해하는 틀 이기도 합니다. 혁명기도원의 성서 읽기가 새로울 수 있었던 이유는 위에서 제시한 큰 이야기가 성서의 개별적 구절들을 읽는 해석학적 틀지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이전까지 막연히 ‘이스라엘 찬양 시들의 집대성’이라고 알고 있었던 시편이 죄 없이 고통당하는 이들의 탄원으로 가득 찬 책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수요 기도회에서 가장 인상깊게 읽었던 시편 중 하나인 119편의 경우 “주님의 법”을 찬양하는 구절들과 “나를 건져 주십시오”라고 탄원하는 구절들이 교차해서 나타나는데요, 이 시편을 읽으면서 저희는 시편 저자의 이야기를 재구성 해 내고(삼천년 전의 그 또한 억울한 일을 당하고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한 사람이다), 그것을 통해 성서 화자와의 동질감을 얻고, 저자와 함께 “나를 붙들어 살려 주시고, 내 소망을 무색하게 만들기 말아 주십시오"(시편 119:116) 라는 기도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 기도를 통해 저희는 지속적으로 자신을 설득하고, 시대를 뛰어넘는 연대감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사실 거의 모든 신앙인들이 자신과 이야기의 등장인물을 동일시하는 방식으로 성서를 읽기는 합니다. 어쩌면 우리의 “장로대통령” 께서는 모세나 요셉의 이야기에 비추어 자신을 이해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한창일 때에 어떤 기독교인들은 그 것이 여호수아의 ‘거룩한 전쟁(聖戰)’과 같은 것이라고 말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에서 이야기가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히 큽니다. 어쩌면 그것은 논리적 명제들로 구성된 교리들보다 더 실제적으로 개인 신자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4. 이야기와 투쟁

 

저는 22주간의 기도모임 끝에 기독교 신앙에서와 마찬가지로 다른 투쟁의 현장에서도 이야기가 중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맑스의 사상에서 자본의 증식 과정에 대한 논리적 이해는 상당이 중요한 것이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이해한 상태로 사회주의적 실천에 뛰어드는 것은 아닙니다. 더 쉽게 이해되고, 투쟁의 실천에 더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일종의 이야기 아닐까요? 맑스주의 역시 일종의 큰 이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류 역사의 초창기에 대한 서술로부터 시작됩니다.

 

과거 어느 시점에, 자기가 생산한 것을 자신이 누리는 평등한 사회가 존재했다

그러나 생산수단을 독점한 이들의 등장으로 최초의 사회는 파괴되었다.

실제로 생산을 담당하는 이들이 세상을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바로잡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위에서 말씀드린 기독교 신앙의 한 형태처럼 이 이야기 역시 우리의 정체를 규정하고, 그에 따른 마땅한 대응 방식으로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여러 종류의 투쟁들에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존재합니다. 그 이야기들은 어떨 때는 문자화된 상태로, 어떨 때는 무의식적인 층위에 문자화되지는 않은 상태로 우리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바보 노무현”의 이야기가 그것 입니다. 그들은 노무현의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규정하고 자신의 위치를 설정합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크레인에 오른 김진숙의 이야기가 중요할 것입니다. 노무현, 김진숙, 정봉주 등의 영웅과 그의 독재정권, 한나라당, 이명박 등 구체적 적대자를 가진 이야기 형태의 담론이 수치와 이론으로 이루어진 것들보다 더 강렬한 인상으로 남고, 더 오래 기억되며, 등장인물에게 감정이입을 하기도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천으로 연결되기도 더 쉽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문제점 또한 있습니다. 종교적 근본주의처럼 ‘한 종류의 이야기만이 현실을 바르게 반영한다’는 주장이 등장하게 되면, 이야기는 독선으로, 투쟁은 동지에 대한 폭력으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5. 투쟁을 위한 이야기 만들기

 

앞에서 쓴 것 들을 요약하자면, ‘혁명기도원은 여가부 앞에서 보낸 시간들을 통해 이야기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기독교인의 신앙에서 출발점이 되기도 하고, 길이 되기도 하고, 목적지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 깨달음에 덧붙여, 종교색을 띠지 않는 투쟁에서도 이야기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물론 통계와 같은 객관적이고 수치적인 자료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들 없이는 어떤 싸움도 승리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자료들이 적절한 이야기 구조 속에 들어 있지 않다면, 아무도 자료의 의미를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영향력 있는 발언이나 선전 문구 역시 그것의 맥락이 되는 큰 이야기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저희는 두 여성이 들려준 이야기 속으로 들어갔고, 그 이야기 속에서 기독교 신앙의 의미를 새로 발견했습니다. 우리는 한 싸움에서 이겼지만, 아직 많은 싸움들이 우리 앞에 남아 있습니다. 노동, 환경, 이주, 주거 등의 영역에서 여전히 우리는 남은 싸움을 계속해야 합니다.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하는 이들, 우리가 보통 “수구세력"이라 부르는 이들은 나름의 일관적인 이야기 체계 - 대한민국이라는 가정, 아버지인 이승만, 적대자인 공산주의자 등으로 구성된 - 안에서 생각하고 움직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설득하기 위해, 그리고 연대를 만들어내기 위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야기들을 발굴하고 다시 쓰는 작업을 계속 해야 할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세계의 본질에 대한 것, 그 안에서 우리의 위치에 대한 것,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하는 이들에 대한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그 이야기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마음과 마음 사이에서 공명하여 세계의 현실을 바꿔 놓는 행동으로 이어지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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