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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츠키-레닌 이후의 제3 인터[수정 후 재 게시]

  • 분류
    트로츠키
  • 등록일
    2009/02/01 10:09
  • 수정일
    2009/02/01 10:09
  • 글쓴이
    얼치기 공산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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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온 트로츠키 1928년 레닌 이후의 제3 인터내셔널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강령 초안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 서문 앞으로 여러 해 동안 코민테른의 전체 활동을 결정하게 될 기초적인 문서인 강령 초안이 5차 대회 이후 4년만에 열릴 예정인 대회의 소집 수주일 전에야 출판되었다. 첫 번째 초안이 이미 5차 대회 이전에 출판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언급으로 때늦은 이번 출판이 정당화될 수 없는데, 이것은 그때 이후 수년이 흘려버렸기 때문이다. 두 번째 초안은 무엇보다도 그것의 전체 구조에서 다르며, 지난 수년 동안의 발전들을 총괄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사전에 신문에서의 어떠한 진중하고 과학적 비판이나 혹은 코민테른[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모든 정당들에서의 폭넓은 토론 없이, 명백하게 조급하고 심지어 부주의한 작업을 드러내고 있는 이번 초안을 6차 대회에서 채택한다는 것은 더 없이 분별없고 경솔한 짓일 것이다. 초안을 받고 이 편지를 보내는 사이 며칠 동안, 우리는 강령에서 반드시 다루어져야 하는 몇 가지 가장 중요한 문제들에 관하여만 생각할 수 있었을 뿐이다. 시간이 부족한 관계로, 우리는 지금 당장 초미의 문제는 아니지만 미래에는 예외적으로 중요해질 수 있는 초안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몇 가지 가장 중요한 문제들에 관하여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완전히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그것들을 비판하는 것이 현재의 작업이 집중하고 있는 초안의 다른 부분들을 비판하는 것보다 덜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또한 우리는 반드시 필요한 정보를 획득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새로운 초안에 대한 작업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추가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강령의 첫 번째 초안조차 구할 수 없었으며, 초안을 다루는데 있어서, 그리고 2-3가지 다른 경우들에서 우리의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모든 인용들은 원문으로부터의 것들이며 신중하게 검사된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Ⅰ. 국제 혁명의 강령인가 한 국가에서의 사회주의의 강령인가? 6차 대회의 아젠다에 관한 가장 중요한 문제는 강령의 채택이다. 채택된 강령의 본성이 오랫동안 인터내셔널의 특색을 결정하고 확정시킬 것이다. 강령의 중요성은 강령이 일반적인 이론적 개념들을 정식화하는 방식에 그다지 많이 있지 않다. 강령의 중요성은 지난 기간의 세계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경험들의 평가를 수행하는 문제, 특히 많은 사태들과 실수들이 있었던 지난 5년 동안의 혁명적 투쟁의 경험들에 대한 평가를 수행하는 문제에 훨씬 더 많은 정도로 있다. 앞으로 몇 년 동안,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운명은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 이들 사태들, 실수들, 그리고 논쟁들이 강령에서 어떻게 해석되고 판단되는가에 달려 있다. 1. 강령의 일반적 구조 제국주의 시대, 즉 금융자본의 헤게모니하에 있는 세계 경제와 세계 정치의 시대인 우리 시대에는 어떤 하나의 공산당도 유일하게 혹은 주로 자기 자신의 나라의 발전 조건들과 경향들로부터 나아가는 것으로는 자신의 강령을 수립할 수 없다. 이것은 또한 소련의 국경 내부에서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당에게도 완전하게 타당하다. 1914년 8월 4일, 단일 국가적 강령들의 영원한 죽음의 조종이 울렸다.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당은 스스로를 자본주의의 최고 발전과 붕괴의 시대인 현재의 시대의 성격에 조응하는 국제적 강령에만 오로지 기초할 수 있었다. 국제 공산주의 강령은 단일 국가적 강령들의 총합이나 공통 부분들의 합성물이 결코 아니다. 국제 강령은 각각 별개의 부분들의 적대적인 상호 의존성을 가지는 모든 연관들과 모순들 속에서 하나의 전체로서 취해진 세계 경제와 세계 정치 체제의 상태와 경향들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현재의 시대에는 과거보다 훨씬 더 많은 정도로 프롤레타리아트의 민족적 방침은 오직 국제적 방침으로부터만 나와야하고 그렇게 될 수 있을 뿐이지, 그 역은 아니다. 바로 여기에 공산주의적 국제주의와 모든 형태의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의 기본적이고 일차적인 차이가 있다. 이러한 고려들에 기초하여, 우리는 올해 1월에 "우리는 코민테른 강령 초안 작업을 시작해야만 한다(부하린의 강령은 코민테른의 민족주의적 부문의 나쁜 강령이며 세계 공산주의 당의 강령이 아니다.)"라고 썼다.) 프라우다, 1928년 1월 15일 우리는 미국에 관한 문제가 세계 정치의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유럽 정치의 문제로서 가장 활발하게 제기되었을 때인 1923-24년이래 이러한 고려들을 계속해서 주장해왔다. 새로운 초안을 추천하면서, 프라우다는 공산주의 강령은 "그것의 중심적인 원리의 실체에서뿐만 아니라 그것의 구조의 국제주의적 성격에서도 국제사회민주주의의 강령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프라우다 1928년 5월 29일 고 썼다. 이 다소 애매한 정식화에는 우리가 위에서 언급했던 그리고 과거에는 완강하게 거부되었던 사상이 명백하게 표현되어 있다. 사람들은 단지 심지어 진중한 의견 교환도 유발하지 않았던 그리고 그 문제에 관하여는 의견교환을 위한 어떠한 기초도 제공하지 않았던 부하린이 발표했던 첫 번째 초안과의 결별을 환영할 수 있을 뿐이다. 첫 번째 초안은 하나의 관념상의 국가의 사회주의를 향한 발전에 관한 매우 도식적인 설명을 제공했던 반면, 개별 부분들의 운명을 결정하기 위한 기초로서 하나의 전체로서의 세계 경제를 다루고자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리고 우리가 보게 될 것처럼 일관성도 없고 성공적이지도 않았다. 각기 다른 발전 수준에 있는 나라들과 대륙들을 상호 의존적이고 적대적인 하나의 체제로 연결하면서, 그들의 발전의 다양한 단계들을 고르게 하면서, 동시에 즉각적으로 그들 사이의 차이를 늘리면서, 그리고 무자비하게 한 나라를 다른 한 나라에 대치시키면서, 세계 경제는 개별 국가들과 대륙들의 경제적 삶을 지배하는 강력한 현실이 되었다. 이 기본적인 사실 하나만으로도 국제 공산당에게 최고의 현실성을 부여한다. 초안이 그 서문에서 아주 정확하게 언급하고 있듯이, 전체로서의 세계 경제를 사적 소유의 기초에서 달성 가능한 최고의 발전 단계로 이끌면서 제국주의는 "세계 경제의 생산력 성장과 민족 국가적 국경들 사이의 모순을 극단의 긴장으로까지 악화시킨다." 지난 제국주의 전쟁 중에 처음으로 인류에 생생하게 드러났던 이 명제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는, 우리는 세계 정치와 혁명적 투쟁의 주요한 문제들의 해결을 향하여 일보도 내딛을 수 없다. 유일하게 올바른 입장인 이것을 완전히 반대 성격을 가지는 경향들과 화해시키기 위한 노력이 초안을 그것의 근본적인 측면에서 문제에 접근하는 새로운 방식의 원칙적인 중요성을 완전히 무효화하는 가장 비참한 모순의 영역으로 바꾸는 것으로 귀결되었다는 사실만 아니라면, 새로운 초안에 있는 강령의 축 그 자체의 근본적인 변화를 환영할 수 있을 뿐이다. 2. 미국과 유럽 다행스럽게도 폐기가 되었던 첫 번째 초안을 성격 짓기 위해서는 우리가 기억하는 한 미국이라는 이름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첫 번째 초안에서는 시대 성격 그 자체 때문에 그것들의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면에서뿐만 아니라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측면에서도 검토되어야만 하는 제국주의 시대의 본질적인 문제들이 자본주의적 국가 "일반"이라는 생명력 없는 도식으로 용해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초안은 이제 - 분명히 이것은 중대한 일보 전진인데 - "세계 경제의 중심의 미국으로의 이동"과 "'달러 공화국'의 세계 착취자로의 이행"에 관하여, 그리고 마침내 북미와 유럽 자본주의, 일차적으로 영국 자본주의 사이의 경쟁(초안은 막연하게 "분쟁"이라고 말하고 있다)에 관하여 말한다. 세계 정세의 이들 기초적인 사실들과 요소들에 대한 명확하고 적확한 정의를 담고 있지 않는 강령은 국제 혁명정당의 강령과 어떠한 공통점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은 오늘날 이미 아주 분명하다. 불행하게도, 우리가 방금 언급했던 현대 시대의 세계 발전의 가장 중요한 사실들과 경향들이 초안의 내용에서는 단지 이름만 언급되고 있을 뿐이며, 마치 초안의 전체 구조와 어떠한 내부적 연관도 가지지 않는, 그리고 전망이나 전략에 관한 어떠한 결론으로도 귀결되지 않는 것처럼 이론적으로 결론으로부터 출발하여 구체적인 사실로 나아가는 방식으로 초안에 이식되어 있을 뿐이다. 1923년 독일 공산당의 굴복과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의 패배 이후 유럽에서 미국의 역할은 전혀 평가되고 있지 않은 채 있었다. 사회민주주의의 "소생"뿐만 아니라, 유럽의 "안정화", "정상화", 그리고 "화해"의 기간이 유럽에 대한 미국의 개입의 첫 번째 발걸음과의 긴밀한 물질적, 이데올로기적 관련 속에서 진행되었다는 것에 관하여 설명하려는 시도가 전혀 없었다. 게다가, 불가피하게 더욱 더 전개될 미국의 팽창과 유럽 시장 자체를 포함하는 유럽 자본 시장의 축소가 과거의 모든 격변과는 비교되지 않을 최고의 군사적, 경제적, 그리고 혁명적 격동을 수반한다는 것이 지적되지 않았다. 다시, 미국의 더욱 냉혹한 압력이 세계 경제에서 자본주의 유럽을 항구적으로 더욱 제한된 몫으로 떨어뜨릴 것이라는 것이 분명하게 제시되지 않았다. 물론 이것은 유럽에서의 국가간 관계의 완화가 아니라 반대로 군사적 분쟁의 격렬한 격발에 수반되는 국가간 관계의 거대한 격화를 의미하는데, 이것은 계급들뿐만 아니라 국가들도 풍부하고 증가하는 몫을 위해서 보다는 불충분하고 감소하는 몫을 두고 더욱 격렬하게 투쟁하기 때문이다. 초안은 유럽에서의 국가간 적대라는 초기의 혼란이 변함없이 더욱 중앙집중화된 북미 공화국에 대한 어떤 종류의 중대하고 성공적인 저항을 제공하는 것도 가망 없게 한다는 것을 설명하지 않는다. 유럽 합중국을 통한 유럽의 혼란의 해결이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첫 번째 임무들 중의 하나라는 것을 설명하지 않는다.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은 (정확하게 국경의 존재 때문에) 미국에서 보다 유럽에서 훨씬 더 가까이 와 있으며, 따라서 필시 북미 부르주아지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해야만 할 것이다. 다른 한편, 세계 전체의 화약고, 즉 모든 동양과 서양 사이의 적대, 구 유럽에서의 계급투쟁, 식민지 대중들의 봉기들, 그리고 모든 전쟁과 혁명들을 미국 사회구조의 기초 속에 포함하도록 강제하는 것이 미국의 국제적인 힘과 이것으로부터 발생하는 저항할 수 없는 미국의 팽창이라는 사실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그리고 이 사실은 똑같은 세계 문제의 국면만큼 중요한 것이다. 한편으로, 이것은 미국자본주의를 변함없이 지구 전체 모든 구석에서의 "질서" 유지에 더 큰 관심을 가지는 현대의 근본적인 반혁명적 세력으로 변형시켰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이것은 이미 지배적이고 여전히 팽창하고 있는 이 세계 제국주의 열강에서 거대한 혁명적 폭발을 위한 기초를 준비한다. 세계 관계들의 논리는 이 폭발의 시간이 유럽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폭발보다 그렇게 많이 뒤쳐지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미국과 유럽 사이의 상호관계에 관한 우리의 변증법적 설명은 유럽의 모순들의 존재에 대한 평화주의적 거부로, 카우츠키의 초제국주의 이론의 수용으로 우리를 비난하는 등 우리를 가장 다각적인 비난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여기에서는 기껏해야 실제 사태의 전개와 그것들에 대한 우리의 입장에 대한 완전한 무지에서 비롯된 이러한 "비난들"에 관하여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문제에 대한 우리의 정식화에 반대하는 그들의 작은 투쟁에 (우연하게도 강령 초안의 저자들에 의해서) 허비된 것보다 이 가장 중요한 세계 문제를 혼란스럽게 하고 망쳐버리는데 더 많은 노력을 허비하기는 힘들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의 정식화는 사태의 전개에 의하여 완전히 확증되었다. 심지어 최근에는 미국에서 닥쳐오고 있는 상업과 산업 위기를 언급함으로써 미국의 헤게모니의 중요성을 최소화하기 위한 (서류상의) 노력들이 공산주의의 지도적 기관들에서 이루어져왔다. 우리는 여기서 미국 위기의 존속기간과 위기의 가능한 심각성에 관한 특별한 문제에 대한 검토에 들어갈 수 없다. 이것은 강령의 문제가 아니라 상황의 문제이다. 우리의 의견으로는 위기의 불가피성에 의심의 여지가 없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현재 미국 자본주의의 세계적 규모를 고려할 때, 우리는 바로 다음의 위기가 극도로 심각할 것이며 격렬할 것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으로부터 북미의 헤게모니가 제한되거나 혹은 약화될 것이라고 결론 내리려는 시도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러한 결론은 최대의 전략적 오류들로 귀결될 수 있을 뿐이다. 사태는 정확하게 반대가 될 것이다. 위기의 기간에 미국의 헤게모니는 호황 때보다도 더 완벽하게, 더 공공연하게, 그리고 더 가차없이 작용할 것이다. 미국은 희생이 아시아, 캐나다, 남미, 호주, 혹은 유럽 자신에게서 벌어지건 상관없이, 혹은 희생이 평화적으로 벌어지건 아니면 전쟁을 통해서 벌어지건 상관없이 일차적으로 유럽을 희생시켜 자신의 어려움과 병폐를 극복하고 이것들로부터 벗어나려고 할 것이다. 만약 첫 번째 미국 개입의 기간이 유럽에서의 안정화와 평화의 효과를 거두었었고, 이것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상당한 정도로 유효하며, (특히 프롤레타리아트의 새로운 패배들의 경우에) 일시적으로 되살아나고 더 강령해지기도 하겠지만, 특히 미국 자신의 경제적 어려움과 위기의 시기에, 미국의 일반적 정책 노선은 유럽에서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최악의 격동을 야기할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분명하게 이해해야만 한다.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향후 10년 동안에도 지난 10년에 버금가는 혁명적 정세가 있을 것이라는 중요한 결론을 도출한다. 이것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발전의 주요 동기들의 움직임에 낚아채이지 않도록 그것들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지난 10년 동안에 혁명적 정세의 주요한 원천이 제국주의 전쟁의 직접적인 결과들에 있었다면, 전후 두 번째 10년 동안에는 혁명적 격변의 가장 중요한 원천은 유럽과 미국의 상호관계일 것이다. 미국에서의 주요한 위기가 새로운 전쟁들과 혁명들을 위한 경보를 울릴 것이다. 반복하건대, 혁명적 정세의 부족은 없을 것이다. 전체 문제는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의 당, 코민테른의 성숙성과 투쟁력, 그리고 코민테른의 전략적 입장과 전술적 방책들의 올바름에 달려있다. 코민테른의 강령초안에서는 이러한 경향의 사상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세계 경제 중심의 미국으로의 이동" 처럼 굉장히 중요한 사실을 가벼운 잡지기사와 같은 언급으로 둘러대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공간의 부족으로 이것을 정당화하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한데, 만약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강령 속에 공간이 허용되어야 하는가? 이외에, 만약 강령에서 제외된다면 강령의 적어도 3분의 1을 줄일 수 있을 만큼의 일반적인 문구의 느슨함과 수많은 반복들은 말할 필요도 없고, 강령에서 너무나 많은 공간이 2차적이고 3차적인 중요성을 가지는 문제들에 투여되었다는 것이 부언 되어야 한다. 3. 유럽 소비에트 합중국 슬로건 다소 시간을 끌었던 투쟁 이후 1923년에 코민테른에 의해 채택되었던 슬로건인 유럽 소비에트 합중국 슬로건의 새로운 강령 초안으로부터의 누락은 정당화될 수 없다. 혹은 아마도 초안의 저자들이 이 문제에 관하여 정확하게 1915년 레닌의 입장으로 "되돌아가"고 싶어하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그들은 우선 반드시 그것을 올바르게 이해해야만 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레닌은 유럽 합중국 슬로건에 관하여 전쟁 초기에는 주저했다. 슬로건은 원래 사회민주주의(당시 당의 중앙기관)의 테제들에 포함되었고 나중에 레닌에 의해 거부되었다. 이것은 그 자체로 여기에서 관련된 문제는 슬로건의 일반적인 수용에 관한 원칙상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슬로건에 대한 전술적 평가, 즉 주어진 정세의 관점으로부터 슬로건의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측면들을 평가하는 문제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레닌이 자본주의적인 유럽 합중국이 현실화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부인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것은 또한 내가 유럽에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가능성 있는 국가 형태로서 단독으로 유럽합중국 슬로건을 제기했을 때 문제에 대한 나의 접근이었다. 당시 나는 "자본주의 정권들 사이의 합의를 통하여 위로부터 성취된 유럽의 다소간 완전한 경제적 통합은 유토피아이다. 이런 방식을 따라서는 일들이 부분적 화해와 어정쩡한 정도로까지 밖에 진행되지 못한다. 그러나 생산자와 소비자 양쪽 모두에게 그리고 전체적으로 문화의 발달에 엄청난 이점을 발생시킬 유럽의 경제적 통합은 제국주의적 보호주의와 제국주의의 군사주의 기관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유럽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임무가 되고 있다.") 트로츠키, 평화강령, 저작집 3권 part 1, 85쪽, 러시아어 판 고 당시 썼다. 여기에 더해서 "유럽 합중국은 무엇보다도 유럽에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형식 -유일하게 생각할 수 있는 형식- 을 의미한다.") 같은 책 92쪽 고 썼다. 그러나 당시 레닌은 문제에 대한 이런 정식화에서조차 분명한 위험을 인식했다. 단 한 개의 국가에서도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경험이 전무한 가운데, 그리고 당시 사회민주주의 좌익에게서조차 이 문제에 관한 이론적 명확성이 부재한 가운데, 유럽 합중국의 슬로건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 동시에 혹은 적어도 유럽 대륙 전체에서 시작되어야만 한다는 사상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다. 바로 이러한 위험에 대하여 레닌은 경고를 발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점에 관하여 레닌과 나 사이에 어떠한 미미한 차이도 없었다. 당시 나는 다음과 같이 썼다. "어떤 나라도 자신의 투쟁에서 다른 나라들을 '기다려'서는 안 된다. 이러한 기본적인 사상을 반복하는 것은 국제적인 실천의 부재에 대한 영합이 국제적인 공동의 실천을 대체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유용하며 필요하다. 다른 나라들을 기다릴 것 없이, 우리는 우리의 선도적인 실천이 다른 나라들에서의 투쟁에 대한 자극을 제공할 것이라는 완전한 확신을 가지고 민족국가적 단위에서의 투쟁을 시작하고 계속해야만 한다.") 같은 책 89-90쪽 그리고 나서 스탈린이 코민테른 중앙집행위원회 7차 대회간 회의에서 "트로츠키주의"의 가장 사악한 표현으로서, 즉 혁명의 내적인 힘에 대한 "신념의 부재"와 아무 것도 없는 것으로부터의 원조에 대한 희망이라고 주장했던 나의 표현들이 나온다. "그리고 만약 이것[다른 나라들에서의 혁명의 발전-트로츠키 자신의 주]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예를 들면 혁명 러시아가 보수 유럽에 직면하여 버티어낼 수 있다는 것, 혹은 사회주의 독일이 자본주의 세계에서 고립된 채 남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할 가망이 없을 것이다.") 같은 책 90쪽 주장에 따르면 이 "근본적인 문제"에 관하여 천착하고 있었다는 7차 대회간회의에 의하여 "트로츠키주의"에 반대하여 선언되었던 "레닌주의와는 어떠한 공통점도 없는" 입장이라는 비난은 이 인용과 다른 2-3개의 비슷한 인용들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므로 잠깐 멈추고 레닌 자신으로부터 들어보도록 해보자. 1918년 3월 7일 레닌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에 관하여 "이것은 우리에게 교훈인데, 그것은 독일에서의 혁명이 없이는 우리는 사라질 것이라는 것이 절대적인 사실이기 때문이다.") 레닌, 저작집 15권 132쪽, 러시아어[구]판 일주일 후에 그는 "세계 제국주의는 승리하여 전진하는 사회주의 혁명과 나란히 공존할 수 없다.") 같은 책 175쪽 고 말했다. 몇 주가 지난 4월 23일에 레닌은 "우리의 후진성이 우리를 앞으로 나서게 했으며, 만약 우리가 다른 나라들의 봉기에 나선 노동자들의 강력한 지원을 만날 때까지 버티지 못한다면 우리는 사라질 것이다.") 같은 책 187쪽 [트로츠키의 강조] 그러나 아마도 이것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위기의 특별한 영향하에서 언급된 것은 아닌가? 그렇지 않다! 1919년 3월에 레닌은 다시 "우리는 단순히 하나의 국가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들의 체제에서 살고 있으며, 그 시간의 길이와 무관하게 제국주의 국가들과 소비에트 공화국의 나란한 병존은 생각할 수 없다. 종국에는 둘 중에 하나가 승리할 것임에 틀림없다.") 저작집 16권 102쪽 일년이 지난 후인 1920년 4월 7일에 레닌은 "만약 국제적인 규모에서 생각한다면 자본주의는 심지어 현재에조차 군사적으로뿐만 아니라 경제적 의미에서도 소비에트 권력보다 더 강력하다. 우리는 이러한 근본적인 고려로부터 진행해야 하며, 이것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고 되풀이했다.) 저작집 17권 102쪽 1920년 11월 27일에 양보의 문제를 다루면서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이제 전쟁의 장을 지나서 평화의 장으로 넘어왔으며, 전쟁이 다시 올 것이라는 것을 결코 잊지 않고 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나란히 존재하는 한, 우리는 평화롭게 살아갈 수 없다 - 둘 중의 하나가 종국에는 승자가 될 것이다. 부고를 알리는 노래가 세계 자본주의의 죽음에 대하여 혹은 소비에트 공화국의 죽음에 대하여 울릴 것이다. 현재 우리는 전쟁 중에 잠깐의 휴식을 취하고 있을 뿐이다.") 같은 책 398쪽 그런데 아마도 소비에트 공화국의 계속적인 존재가 레닌으로 하여금 "그의 실수를 인정'하도록 강제하고, 그의 10월 혁명의 "내부적 힘에 대한 신념의 부재"에 관하여 비난하고 있는 것인가? 1921년 7월 코민테른 3차 대회에서 레닌은 러시아 공산당의 전술에 관한 테제에서 "비록 극단적으로 불확실하고 불안정함에도 불구하고, 물론 장기간 동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공화국이 자본주의의 포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는 균형이 창출되었다."고 선언했다. 다시 1921년 7월 5일에 레닌은 대회의 회의들 중 하나에서 노골적으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국제적인 세계 혁명으로부터의 원조가 없다면,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승리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명백했다. 혁명 이후뿐만 아니라 심지어 혁명 전에도, 우리는 다른 후진국들과 보다 선진화된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즉각적으로 혹은 적어도 매우 빠른 시일 안에 혁명이 역시 발발할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확신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떠한 환경 하에서도 어떠한 대가를 치러서라도 소비에트 체제를 보존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국제 혁명을 위해서 실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저작집 18권 part 1 321쪽 그 단순함에서 뛰어나고 국제주의 영감으로 충만한 이들 문구들이 원조보다 못한 아류들의 현재의 그럴듯한 날조에서는 얼마나 많이 제거되었는가! 어쨌든, 우리는 이들 모든 레닌의 언급들이 러시아에서 다가오는 혁명 혹은 다가오는 사회주의 독일이 만약 혼자서 "자본주의 세계 속에서 고립된다면" 버틸 수 없을 것이라던 1915년 당시 나의 신념과 어떤 점에서 다른가?라고 물어볼 권리가 있다. 시간적으로 나 자신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레닌의 예측들에서 단정되었던 것과 다를 뿐이지, 근저에 있는 사상은 심지어 오늘날, 아마도 주어진 순간에 과거 어느 때 보다도 더 완벽한 위력을 가지고 있다. 7차 코민테른 중앙집행위원회 대회간 회의가 부적절하고 파렴치한 연설에 기초하여 했던 것처럼 이 사상을 비난하기는커녕, 이것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강령에 포함되어야 한다. 유럽 소비에트 합중국의 슬로건을 방어하면서, 1915년 우리는 다른 국가들과 대륙들에서의 역사적 발전의 불균등성은 그 자체로 불균등하기 때문에, 불균등 발전의 법칙은 그 자체로 이 슬로건에 반대되는 주장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유럽 국가들은 서로 불균등하게 발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검토되고 있는 역사 시대 동안에는, 이들 국가들 중에 어느 하나도 미국이 유럽을 앞서 나갔던 것처럼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 속에서 더 멀리 앞서갈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은 절대적인 역사적 확실성을 가지고 고수될 수 있다. 아메리카 쪽에는 한 규모의 불균등성이 있고 유럽에는 또 다른 불균등성이 있는 것이다. 지리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조건들이 그 긴밀한 결합으로부터 유럽 국가들을 떼어놓을 방도가 없는 긴밀한 구조적인 결합을 미리 예정했다. 유럽의 현대 부르주아지 정부들은 하나의 카트에 묶여 있는 살인자들과 같다. 이미 이야기되었던 것처럼, 유럽에서의 혁명은 결국 미국에게도 결정적으로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역사의 즉각적인 경로에서, 독일에서의 혁명은 미국보다 프랑스에게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중요성을 가질 것이다. 이 역사적으로 발전된 관계로부터 정확하게 유럽 소비에트 연합이라는 슬로건의 정치적 생명력이 도출된다. 우리는 그것의 상대적인 생명력을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 연합이 소련이라는 거대한 가교를 지나 아시아로 확대될 것이며, 이후 세계 사회주의 공화국들의 연합으로 귀결될 것이라는 것이 사리에 맞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제국주의 시대라는 두 번째 시대 혹은 그 다음의 거대한 장을 이룰 것이며 우리가 그것에 보다 가까이 다가가게 될 때, 우리는 그것을 위해 조응하는 정식들을 또한 발견할 것이다. 유럽 합중국의 문제를 둘러싼 1915년 레닌과 우리의 차이가 제한적이고 전술적이며 그 본질에 있어서 일시적인 성격이었다는 것은 더 많은 인용들을 가지고 어렵지 않게 증명될 수 있지만, 사태의 이후 경로가 이것을 가장 잘 증명해준다. 1923년,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 슬로건을 채택했다. 지금 초안의 저자들이 주장하고자 하는 것처럼, 유럽 합중국의 슬로건이 1915년에는 원칙적인 측면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는 슬로건이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아마도 그것을 채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불균등 발전의 법칙은 당시에는 유효성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위에서 개괄했던 바와 같이 문제들에 대한 전체 정식화는 하나의 전체로서 고려되는 혁명적 과정의 동학으로부터 도출된다. 국제 혁명은 그것의 모든 구체성에서, 그리고 즉 그것의 발생 순서에서 예측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호연관된 과정으로서 고려되지만, 이것은 그것의 일반적인 역사적 개형에서는 절대적으로 명확하다. 일반적인 역사적 개형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올바른 정치적 방침은 완전히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의 국가에서 발생하고 있고 심지어 완성되고 있는 사회주의적 발전으로부터 나아간다면 문제는 크게 달라진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의 국가에서 사회주의를 완전하게 건설하는 것이 가능하고 그 국가의 자본주의 세계와의 상호관계가 세계 부르주아지를 "중립화"하는 것에 기초하여 성립될 수 있다는 "이론"(스탈린)을 접한다. 만약 이 본질적으로 민족-개량주의적이고 혁명적 국제주의의 관점이 아닌 관점이 채택된다면, 유럽 합중국 슬로건의 필요성은 사라지거나 혹은 적어도 줄어든다. 그러나 우리의 관점에서는 이 슬로건은 중요하고 반드시 필요한데, 그것은 이 슬로건 속에 고립적인 사회주의적 발전이라는 사상에 대한 논박이 있기 때문이다. 국제적 연대라는 추상적인 동기들로부터가 아니라 국제혁명으로부터의 시기 적절한 원조가 없다면 우리는 버틸 수 없을 것이라고 레닌이 말 그대로 수백 번을 정식화했던 그 절대적으로 필요한 동기들 때문에 무기를 들고 혁명을 이웃 국가들로 확산시키고 그곳에서의 봉기를 지원하는 것이 모든 유럽 국가의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소련의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보다 더욱, 가장 필수적으로 필요한 것일 것이다. 소비에트 합중국 슬로건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동학에 조응하는데, 이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은 모든 국가들에서 동시에 발발하지는 않지만, 한 국가에서 다른 국가로 확산되며 유럽에서 특히 가장 강력한 적들에 맞서 방어하기 위한 관점과 경제 건설에 대한 관점 모두를 가지고 있는 이들 국가들 사이의 가장 긴밀한 결합을 필요로 한다. 분명히, 유럽합중국 슬로건의 채택을 위한 최근의 자극을 제공했던 루르 위기의 시기에 뒤이어, 이 슬로건이 유럽 공산당들을 위한 선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고, 즉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고 주장하면서 반대를 제기하려고 시도할 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은 노동자 국가, 소비에트 등과 같은, 즉 혁명적 시기 이전 시기의 모든 슬로건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진실이다. 1923년 말 이후, 5차 대회의 잘못된 정치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유럽대륙에서 혁명적 운동이 쇠퇴했다는 사실이 이것을 설명해 준다. 그러나 이것이 단지 그 시기 동안에 받았던 인상들에 전체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강령을 기초하는 것이 치명적인 이유이다. 모든 편견들에도 불구하고 혁명적 폭발이 독일에서 예견되었고, 유럽에서의 국가간 상호관계의 문제가 극도로 중요한 성격을 가졌던 때인 1923년에 정확하게 소비에트 유럽 합중국 슬로건이 채택되었던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유럽과 참으로 세계 위기의 모든 새로운 악화가 주요 정치 문제들을 전면으로 이동시키기에, 그리고 유럽 합중국의 슬로건에 매력적인 힘을 부여하기에 충분하게 뚜렷하다. 따라서 이 슬로건을 거부하지는 않으면서 침묵 속에 강령에서 빼먹는 것, 즉 "비상용으로" 쓰기 위하여 어딘가에 보관해두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원칙의 문제들이 관련되어 있을 때에는 유보조항을 두는 정책은 무익하다. 4. 국제주의의 기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초안은 그 구성에서 세계 경제의 관점과 그것의 내부적 경향들로부터 나아가려고 하는데, 이것은 인정할만한 시도이다. 우리와 민족주의적 애국주의 사회민주주의와의 사이의 원칙에서의 기초적인 차이가 여기에 있다고 프라우다가 말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올바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세계정당의 강령은 오로지 자신의 개별 부분들을 지배하고 있는 세계경제가 출발점으로 고려될 때에만 만들어질 수 있다. 그러나 정확하게 세계 발전의 주요한 경향들을 분석함에 있어서, 초안은 위에서 이미 지적된바와 같이 초안의 가치를 평가절하 시키는 불충분함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총체적으로 한쪽으로 치우쳐있으며 이것이 초안으로하여금 중대한 큰 실수를 저지르도록 한다. 초안은 자본주의의 불균등 발전의 법칙을 자본주의 발전의 주요하고도 거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법칙으로서 몇 번이고 언급하는데, 언제나 적절한 자리에서 그렇게 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의 근본적인 오류를 포함하여 초안에 있는 수개의 실수들은 불균등 발전의 법칙에 대한 한쪽에 치우친 그리고 잘못된 비맑스적이고 비레닌주의적인 해석에 이론적으로 기초하고 있다. 첫 번째 장에서, 초안은 "경제와 정치 발전의 불균등성은 자본주의의 무조건적인 법칙이다. 이 불균등성은 제국주의 시대에 더더욱 두드러지고 심해진다."고 말한다. 이것은 옳다. 이 정식화는 부분적으로 문제에 대한 스탈린의 최근 정식화를 논박하는데, 스탈린의 정식화에 따르면 맑스와 엥겔스 모두가 레닌에 의해 최초로 발견되었다고 하는 불균등 발전의 법칙을 인식하지 못했다. 1925년 9월 15일에 스탈린은 엥겔스가 "자본주의 국가들의 불균등한 발전의 법칙에 대한 지식에 관하여는 한마디 말도 있을 수 없었던 때"에 글을 썼기 때문에, 트로츠키는 엥겔스에 관하여 무엇이라도 언급할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썼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안의 저자들 중의 하나인 스탈린은 그들을 한번 이상 반복한다. 우리가 보았던 것처럼, 초안의 문구는 이 측면에서 일보 전진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이러한 기초적인 실수에 대한 정정을 제쳐둔다면, 불균등 발전의 법칙에 관하여 초안이 말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한쪽에 치우쳐있고 불충분한 채로 있다. 우선, 인류 역사 전체가 불균등 발전의 법칙에 의해 지배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올바른 것이었을 것이다. 자본주의에서는 각자 자신의 심오한 내적 모순들을 가지고 있는 다른 발전 단계에 있는 인류의 다양한 부문들이 발견된다. 획득된 수준에서의 극도의 다양성과 다양한 시대 동안에 인류의 서로 다른 부문들의 발전의 정도에서의 예외적인 불균등성이 자본주의의 출발점으로서 기능한다. 자본주의는 그것을 깨뜨리고 바꾸면서, 자가 자신의 수단과 방식을 그것에 적용하면서 단지 점차적으로 물려받은 불균등성에 대한 지배를 획득한다. 자본주의에 선행했던 경제 체제와는 반대로, 자본주의는 본성적으로 그리고 항구적으로 경제적 팽창, 새로운 영역으로의 침투, 경제적 차이들의 극복, 자기 충족적인 지역적이고 민족국가적인 경제들의 금융적인 상호관계의 체제로의 변경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통해 자본주의는 그들의 친교를 발생시키고, 가장 선진적인 나라와 가장 후진적인 나라들의 경제적, 문화적 수준을 고르게한다. 이 주요한 과정 없이, 우선 영국과 유럽, 그리고 나서 유럽과 미국의 상대적인 평준화를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식민지의 산업화, 인도와 영국 사이의 차이의 감소,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강령뿐만 아니라 코민테른의 존재 그 자체가 기초하고 있는 열거된 과정들로부터 발생하는 모든 결과들을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국가들을 서로간에 경제적으로 보다 가까이 끌어당김으로써, 그리고 그들의 발전의 단계들을 평준화함으로써, 자본주의는 자기 자신의 방식으로, 즉 스스로의 활동을 항구적으로 침해하는 무정부적인 방식으로 작동하며, 세계 경제의 일부는 발전시키는 한편으로 다른 일부의 발전은 방해하고 저지하면서 한 국가를 다른 국가에 대치시키고, 산업의 한 영역을 다른 영역에 대치시킨다. 오로지 자본주의의 성격으로부터 발생되는 이들 두 가지 근본적인 경향들의 상호관계가 역사적 과정의 생생한 본질을 우리에게 설명해준다. 보편성, 침투성, 기동성, 그리고 엄청난 속도의 제국주의의 추진력으로서의 금융자본의 형성으로 인해 제국주의는 이들 경향들에 힘을 불어넣는다. 제국주의는 개별 민족국가들과 대륙적 단위들을 서로에 대하여 가장 가깝게 그리고 가장 긴요하게 의존하게 하면서, 그리고 그들의 경제적 수단들, 사회적 형식들, 그리고 발전의 수준을 보다 동일하게 하면서 하나의 통일체로 비교할 수 없이 빠르게, 그리고 깊게 연결시킨다. 동시에, 제국주의는 적대적인 방식들, 호랑이의 도약, 후진적인 국가와 지역들에 대한 습격을 통해서 이 "목적"을 성취하는데, 제국주의 자신이 낳은 세계 경제의 통합과 평준화가 이러한 방책들에 의해 선행했던 시대들 보다 훨씬 격렬하고 격동적으로 전복된다. 불균등 발전의 법칙에 대한 순전히 기계적인 이해가 아닌 이러한 변증법적인 이해만이 6차 대회에 제출된 강령 초안이 피할 수 없었던 근본적인 오류들을 피할 수 있도록 해준다. 우리가 불균등발전의 법칙에 대하여 한쪽에 치우쳐 있다는 초안의 성격을 지적한 바로 다음에, 강령 초안은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따라서 국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은 반드시 하나의, 동시적인, 그리고 보편적인 행위 등으로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사회주의의 승리는 몇 개의, 혹은 심지어 한 개의 고립된 자본주의 국가에서 승리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트 국제 혁명이 동시적인 행위가 될 수 없다는 것에 관해서는 역사적 필요라는 압력 하에서 적어도 선진국들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전선으로 나오는 것조차" 기다리는 것 없이 후진국의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 성취되었던 10월 혁명을 경험한 성인들 사이에서는 당연히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이들 한계들 내에서, 불균등 발전의 법칙에 대한 언급은 절대적으로 올바르고 매우 적절하다. 그러나 사회주의의 승리가 "한 개의 고립된 자본주의 국가"에서 가능하다고 하는 공허한 주장을 하고 있는 결론의 마지막 절반에 관해서는 완전히 다르다. 자신의 요점을 증명하기 위하여 강령 초안은 "그러므로 ... 이러저러하게 된다."라고 간단히 말한다. 사람들은 이것이 불균등 발전의 법칙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전혀 반대되는 어떤 것이 "나오게 된다". 만약 역사 과정이 일부 국가들이 불균등하게 뿐만 아니라 각자로부터 고립된 채 서로 독립적으로 발전한다는 것과 같은 것이라면, 불균등발전의 법칙으로부터 하나의 자본주의 국가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할 가능성이 의심의 여지없이 나올 것이다. 가장 먼저 가장 선진화된 국가에서 그리고 후진국들이 성숙하게 되면서 보다 후진국들에서. 이런 것은 통상적인 것이며, 즉 전쟁 이전 사회민주주의 대오 내부의 사회주의로의 이행에 관한 평균적인 생각이었다. 이것은 정확하게 사회애국주의의 이론적 기초를 만들었던 사상이다. 물론, 강령초안은 이러한 관점을 유지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그쪽으로 기울어 있다. 초안의 이론적 오류는 초안이 불균등 발전의 법칙으로부터 법칙이 의미하지 않는 어떤 것, 법칙이 의미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추론하려고 한다는 사실에 있다. 다양한 국가들의 불균등하고 산발적인 발전은 4년 동안의 지옥과 같은 살육 바로 직후에 석탄, 빵, 석유, 화약과 suspenders를 교환하도록 강제되는 그런 국가들 사이의 증가하는 경제적 결합과 의존성을 뒤집기는 하지만 결코 제거하지는 않는다. 이점에서, 초안은 마치 역사 발전이 산발적인 도약들의 기초에서만 진행되는 것처럼 문제를 단정하는 한편, 이러한 도약을 있게 하는 경제적 기초는 초안의 저자들에 의해 시선에서 완전히 사라진 채 있거나 혹은 강제적으로 제거된다. 그들은 방어될 수 없는 일국에서의 사회주의 이론을 방어하기 위한 단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이렇게 한다. 이것을 듣고 나서는, 문제에 대한 유일하게 올바른 정식화라면 심지어 제국주의 시대 이전에 맑스와 엥겔스가 한편으로 뷸균등성, 즉 산발적인 역사발전이 그 과정에서 국가들이 하나씩 혁명의 홍수에 젖게 될 전체 시대에 걸쳐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 이어지도록 하며, 다른 한편으로 노동에 대한 국제적 분할을 향해 발전하는 몇몇 국가들의 유기적 의존성이 일국에서의 사회주의 건설 가능성을 배제한다는 결론에 도달했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것은 사회주의 혁명은 오직 민족국가적 기초에서 시작될 수 있는 반면, 일국에서의 사회주의 건설이 불가능함을 단정하는 맑스의 이론이 무엇보다도 제국주의가 이 두 가지 적대적인 경향들을 발전시키고, 심화시키며, 격화시켜 온 현대 시대에 이중 삼중으로 진실되게 표현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점에서, 레닌은 단지 이 문제에 대한 맑스 자신의 정식과 맑스 자신의 답을 발전시키고 구체화했을 뿐이다. 우리의 당 강령은 10월 혁명과 사회주의 건설의 기초가 되는 국제적 조건들에 완전히 기초하고 있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 강령의 전체 이론적 부분을 옮겨 쓰기만 하면 된다. 여기서 우리는 단지 우리 당의 8차 대회 동안에 고 보드벨스키가 강령의 일부 정식화가 러시아에서의 혁명에 대한 언급만을 가지고 있다고 넌지시 말했을 때, 레닌은 당 강령 문제에 관한 그의 결론적인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답했다(1919년 3월 19일)는 것을 지적하는 것으로만 한정할 것이다. "포드벨스키는 현안의 사회 혁명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문단에 대하여 반대를 제기했다.... 그의 주장은 명백하게 사실 무근인데 이것은 우리의 강령이 세계적 규모에서의 사회혁명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저작집 16권 131쪽 거의 동시에 레닌이 우리 당이 국제 혁명의 당이라는 것을 더욱 강조하기 위하여 러시아 공산당에서 공산당으로 이름을 변경해야 한다고 제안했다는 것을 여기서 지적하는 것이 부적절한 것은 아닐 것이다. 중앙위원회에서 레닌의 제안에 찬성표를 던진 사람은 내가 유일했다. 그러나, 레닌은 제3 인터내셔널이 창립될 것이라는 전망 속에서 대회로까지 이 문제를 가져가지는 않았다. 이와 같은 입장이 당시에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에 대한 어떤 암시조차 없었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이다. 이것이 당 강령이 이 "이론"을 비난하지 않고 단순히 배제하는 유일한 이유이다. 그러나 2년 후에 채택되었던 청년 공산주의 동맹의 강령은 국제주의의 영감으로 청년들을 훈련시키기 위하여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의 세상물정 모르는 순박한 착각과 민족주의적인 편협함에 대한 직접적인 경고를 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차후에 우리는 이점에 관하여 더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다. 코민테른의 새로운 강령 초안은 문제를 매우 다르게 제기한다. 1924년 이후 초안의 저자들의 수정주의적 진화와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우리가 보았듯이 초안은 직접적으로 반대의 길을 선택한다.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에 관한 문제가 설명되는 방식이 전체 초안의 성격을 맑스주의적 문서인지 아니면 수정주의적 문서를 결정한다. 물론 강령초안은 문제에 대한 공산주의적 정식화와 개량주의적 정식화 사이의 차이에 관하여 세심하게, 고집스럽게, 그리고 개별적으로 표현하고, 강조하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들 보증들이 문제를 해결하지는 않는다. 수많은 맑스의 기구들과 장치들이 장착된, 심지어 과도하게 장착된 배가 있는데, 그 배의 가장 큰 돛대의 돛은 정작 모든 수정주의적이고 개량주의적인 바람에 의해 의도적으로 부풀어오르도록 올려져 있는 상황이 이 상황과 비슷할 것이다. 지난 30년 동안의 경험으로부터, 그리고 특히 최근 중국에서의 예외적인 경험으로부터 교훈을 얻은 사람은 누구든지 계급 투쟁과 강령적 당 문서들의 강력한 변증법적 상호 의존성을 이해할 수 있으며, 새로운 수정주의적 항해가 맑스주의와 레닌주의라는 안전장치의 모든 것을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릴 수 있음을 이해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오랫동안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발전과 운명을 결정하게 될 이 초미의 문제에 관하여 훨씬 더 자세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5. 당의 이론적 전통 전술한 인용에서 강령초안은 자신의 원문과 일국에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문제에 관한 논쟁 동안에 범죄적으로까지는 아니더라도 너무나도 무자비하게 잘못 활용되었던 레닌의 1915년 글 사이의 외적이고 순전히 어구상의 유사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일국에서 사회주의의 승리"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초안은 다른 곳에서도 하나의 확증으로서 레닌의 어구들을 "조회"하는 똑같은 방식에 의지한다. 이러한 것이 "초안의 과학적 방법론"이다. 레닌이 말했고, 썼으며 그가 했던 모든 것들을 직접적으로 무시하면서, 당강령과 청년공산주의 동맹의 강령을 무시하면서, 모든 당 지도자들이 이 문제가 분명하게 제기되었을 때(얼마나 분명했었나!)인 10월 혁명의 시대 동안에 예외 없이 주장했던 의견들을 무시하면서, 강령의 저자인 스탈린과 부하린 스스로가 1924년까지 말했던 것을 무시하면서, 수많은 맑스의 문헌과 레닌 저작의 보고 중에서 레닌으로부터 나왔던 2개의 인용들, 즉 1915년의 유럽합중국에 관한 글과 1923년에 썼으나 사후에 출판된 미완성 저작으로부터의 인용들이 1924년 말 혹은 1925년 초에 소위 "트로츠키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의 긴급성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만들어졌던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의 이론을 지키기 위하여 사용되어왔다. 각각 몇 줄에 불과한 이 두개의 인용구들과 모순되는 모든 것들이, 맑스주의와 레닌주의 전체가 간단하게 한쪽으로 치워졌다. 이들 인위적으로 추출되고, 총체적으로 그리고 아류적으로 잘못 해석된 2개의 인용들이 그것의 정치적 중요성이라는 관점으로부터 자유로운 새로운 그리고 완전히 수정주의적 이론의 기초로서 활용된다. 우리는 맑스의 줄기에 완전히 생소한 가지를 이식하려는 노력들을 목격하고 있는데, 만약 이식된다면 이것은 나무 전체를 냉혹하게 중독시켜 죽일 것이다. 코민테른 중앙집행위원회 7차 대회간 회의에서 스탈린은 "일국에서 사회주의 경제 건설의 문제는 1915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레닌에 의해 처음으로 당에서 제기되었다") Minutes, 코민테른 중앙집행위원회 7차 대회간회의, 14쪽 고 선언했는데 이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이렇게 해서 여기서 1915년 이전에는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에 관한 문제가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는 것이 승인된다. 어고[Ergo], 스탈린, 그리고 부하린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국제적 성격의 문제에 관하여 맑스주의와 당의 전통 전체를 침해하려는 모험을 하지는 않는다. 이것을 새겨두도록 하자. 그러나, 레닌이 맑스, 엥겔스, 그리고 레닌 자신이 과거에 말했었던 것과 모순되게 1915년에 처음으로 무슨 말을 했는지 보자. 1915년에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불균등한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발전은 자본주의의 절대적인 법칙이다. 따라서, 사회주의의 승리는 우선 몇 개의 혹은 심지어 한 개의 자본주의 국가에서 가능하다. 자본가들을 몰수하고 그들 자신의 사회주의적 생산을 조직한 이후에, 그 국가의 승리한 프롤레타리아트는 다른 나라들의 피억압 계급들을 자신의 대의로 이끌면서, 이들 국가에서 자본가에 맞서는 봉기를 선동하면서, 그리고 필요한 경우 착취계급과 그들의 국가들에 대항하여 무장력을 사용하면서까지 세상의 나머지 자본주의 세계에 대항하여 일어설 것이다.") 저작집 13권 133쪽, 1915년 8월 23일 레닌은 무엇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까? 레닌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수립이라는 의미에서 사회주의의 승리가 하나의 국가에서 우선 가능하며, 바로 이 사실 때문에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국가는 자본주의 세계와 대치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공격에 저항할 수 있기 위하여, 그리고 그 자신의 혁명적 공세를 취할 수 있기 위하여 프롤레타리아트 국가는 우선 "국내에서 사회주의적 생산을 조직"해야만 할 것인데, 다시 말해 프롤레타리아트 국가는 자본가들로부터 몰수한 공장의 운영을 조직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전부이다. 살펴본 바와 같이 이러한 "사회주의의 승리"는 러시아에서 처음으로 성취되었으며 세계 [자본주의의] 개입에 맞서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하여 최초의 노동자 국가는 무엇보다도 "국내에서 사회주의적 생산을 조직"해야만 했거나 혹은 "일관되게 사회주의적 형태"의 기업을 설립해야만 했다. 따라서 레닌은 일국, 그리고 후진국에서의 사회주의의 승리라는 것을 가지고 자급자족의 사회주의 사회라는 환상을 품었던 것이 아니라 훨씬 더 현실적인 어떤 것 즉, 최초의 존재 시기에 우리 나라에서 10월 혁명이 성취했던 것을 소중히 했다. 아마도 증거가 필요할까? 너무도 많은 증거들이 예시될 수 있어서, 그 중에 가장 좋은 것을 고르는 것이 어려울 뿐이다. 그의 전쟁과 평화에 관한 테제(1918년 1월 7일)에서, 레닌은 "러시아에서 사회주의의 승리를 위해서는 일정 기간, 적어도 수개월의 시간이 필요하다...") 저작집 15권, 64쪽 고 말했다. 1918년 같은 해 초에, "좌익의 유아성과 소부르주아지 경향들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글에서 레닌은 "이를테면, 만약 국가자본주의가 6개월 안에 우리 나라에서 수립될 수 있다면, 그것은 엄청난 성취가 될 것이며 1년 안에 사회주의가 확실하게 수립될 것이며, 사회주의는 불가침의 것이 될 것이다.") 저작집 15권 2부, 263쪽 라면서 부하린을 겨냥했었다. 어떻게 레닌은 "사회주의의 명백한 수립"을 위하여 그렇게도 짧은 기간을 설정할 수 있었을까? 그는 이들 문구들 속에 어떤 필수적인 생산적, 그리고 사회적 내용을 넣었을까? 1918년 4월 29일에 레닌이 소비에트 정부 전 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에 대한 그의 보고에서 "보다 고도로 발전하게 될 우리의 다음 세대들이 사회주의로의 완전한 이행을 성취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매우 힘들다.") 같은책, 280쪽 고 말했다는 것을 다시 생각해 본다면, 이 문제는 곧바로 달라지게 된다. 1919년 12월 3일, 지방자치체와 협동조합 대회[Congress of Communes and Artels]에서, 레닌은 "우리는 우리가 현시점에서 사회주의적 질서를 수립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만약 우리 다음 세대, 그리고 아마도 그 다음 세대들이 사회주의적 질서를 수립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더 좋을 것이다.") 저작집 16권, 398쪽 라고 훨씬 더 퉁명스럽게 말했다. 레닌은 이 두 가지 경우 중에서 어디에서 옳았는가? 12개월 안에 "명백한 사회주의의 수립"에 관하여 말했을 때가 옳았는가, 아니면 "사회주의적 질서의 수립"을 우리 다음 세대가 아니라 그 다음 세대에 남겨두었을 때인가? 두 가지 경우 모두에서 레닌은 옳았는데, 이것은 그가 두 개의 완전히 다른, 그리고 동일한 척도로는 측정할 수 없는 사회주의 건설의 단계들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경우의 "명백한 사회주의의 수립"에 관해서는, 레닌은 1년 혹은 심지어 "수개월"이라는 기간 이내의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을 의미했던 것이 아니라, 즉 레닌은 계급이 사라질 것이라는 것, 도시와 농촌 사이의 모순이 제거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했던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 국가의 수중에 있는 제분소와 공장에서 생산의 복구와 이렇게 해서 도시와 농촌 사이의 생산물의 교환 가능성의 확보를 의미했다. 기간의 짧음 바로 그 자체가 전체 전망의 이해를 위한 분명한 핵심이다. 물론, 이런 기초적인 임무를 위해서조차, 1918년 초에는 너무도 짧은 기간이 설정되었다. 레닌이 코민테른 4차 대회에서 "당시 우리는 지금의 우리보다 더 바보 같았다."라고 말했을 때 레닌이 조소했던 것이 이 순전한 실천적인 "오측"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일반적인 전망에서는 올바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으며 한 순간도 12개월의 과정에서, 그리고 후진국에서 완전한 '사회주의적 질서'를 수립할 수 있다고 한 순간도 믿지 않았다."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이라는 이 주요하고도 최종적인 목적의 성취를 레닌은 3대, 즉 우리 자신의 세대, 우리의 다음 세데, 그리고 그 다음 세대에게 남겨 두었다. 1915년 레닌의 글에서 "사회주의적 생산"의 조직화가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이 아니라 소련에서 우리가 이미 현실화시켰던 이루 헤아릴 수 없이 기초적인 임무를 의미했다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면, 레닌에 따르면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프롤레타리아트 당은 혁명적 전쟁을 3번째 세대까지 "연기"한다는 말도 안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것이 1915년에 대한 인용과 관련되어 있는 한 새로운 이론의 주요한 논거의 빈약한 입장이다. 그러나 더욱 슬픈 것은 레닌이 이 글을 러시아에 적용하기 위하여 쓰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러시아에 대비시켜 유럽에 관하여 말하고 있었다. 이것은 유럽합중국 문제에 집중하고 있는 인용된 글의 내용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당시 레닌의 전체 입장으로부터도 도출되는 것이다. 몇 달 후인 1915년 11월 20일에 레닌은 러시아에 관하여 특별히 아래와 같이 썼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는 이 실제 상황으로부터 명백하게 도출된다. 이 임무는 왕조에 맞서는 용감하고, 영웅적이며 혁명적인 투쟁(1912년 1월 총회의 슬로건들-3 마리 고래들의 것), 모든 민주주의적 대중들, 즉 무엇보다도 농민들을 끌어당길 투쟁이다. 동시에, 배외주의에 대항하는 무자비한 투쟁, 유럽의 프롤레타리아트와 동맹하여 유럽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투쟁이 수행되어야만 한다. 전쟁의 위기가 농민을 포함하는 소부르주아지를 좌익 쪽으로 향하게 하는 경제적, 정치적 요소를 강화해왔다. 이 속에 러시아에서의 민주주의 혁명 승리의 절대적인 가능성의 객관적인 기초가 있다. 서유럽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객관적 조건들이 완전히 성숙했다는 것은 모든 선진적인 국가들의 모든 영향력 있는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전쟁 전에 인식되었다.") 저작집 13권, 212쪽 이렇게 해서, 1915년에 레닌은 러시아에서의 민주주의 혁명과 서유럽에서의 사회주의 혁명에 관하여 분명하게 말했다. 내친김에 레닌은 마치 자명한 어떤 것을 말하는 것처럼 러시아와는 달리, 러시아와는 대비되게 서유럽에서는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조건들이 "완전히 성숙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새로운 이론, 즉 강령초안의 저자들은 마치 그들이 레닌의 모든 저작들을 무시하는 것처럼, 정면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러시아에 관하여 언급하는 이 인용문(많은 것들 중에 하나)을 간단하게 무시한다. 그들은 이것을 주목하기는커녕, 우리가 보았듯이, 서유럽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는 또 다른 문구를 낚아채고는, 그것이 포함할 수도 없고, 포함하고 있지도 않은 의미를 그것에 부여하며, 이렇게 부여된 의미를 그 문구가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는 러시아에 가져다 붙이고는, 이것을 "기초"로 해서 그들의 새로운 이론을 정립한다. 10월 혁명 직전 이 문제에 대한 레닌의 입장은 무엇이었을까? 1917년 2월 혁명 후 스위스를 떠나면서, 레닌은 스위스 노동자들에게 한 장의 편지를 낭독했는데, 그 속에서 레닌은 아래와 같이 선언했다. "러시아는 농민 국가이며 유럽에서 가장 후진적인 국가들 중의 하나이다. 사회주의는 러시아에서 즉각적으로 승리할 수 없지만, 봉건 귀족과 지주들의 수중에 있는 거대한 토지를 가지고 있는 국가의 농민적 성격이 1905년의 경험의 기초 위에서 러시아에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에 대한 거대한 진전을 제공하며 우리의 혁명을 세계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전조, 그것을 위한 일보로 만든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는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승리하여 사회주의 혁명을 완수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가장 우호적인 정세들의 창출과 어떤 의미에서는 사회주의 혁명의 시작과 같은 특징을 러시아 혁명에 부여할 수 있다. 이것은 러시아 혁명의 주요한 그리고 가장 믿을만한 동맹인 유럽과 아메리카의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트 쪽에서의 결정적인 전투 돌입을 위한 문제들을 촉진할 수 있다.") 저작집 11권 2부, 407쪽 문제의 모든 요소들이 이 몇줄 속에 포함되어 있다. 만약 전쟁과 반동의 시기였던 1915년에 레닌이, 그들이 지금 우리를 납득시키려고 시도하는 것처럼,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 국가에 대한 전쟁을 선언할 수 있을만큼 스스로의 힘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었다면, 러시아가 이러한 작업을 완수한 이후인 1917년 초 2월 혁명 이후에 레닌은 후진적인 농민 국가인 러시아가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이 불가능함에 관하여 그렇게도 분명하게 말할 수 있었을까? 사람들은 적어도 어느 정도는 논리적이어야만 하며, 어느 정도는 레닌을 존경해야만 한다. 더 많은 인용들을 추가하는 것은 불필요할 것이다. 사회주의 혁명의 국제적 성격에 의해 결정되는 레닌의 경제적, 정치적 관점들의 완전한 윤곽을 제공하는 것은 많은 주제들을 다루는 하나의 독립적인 작업을 필요로 할 것이지만, 한 개의 국가에서 자족적인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한다는 주제는 아닐 것인데, 이것은 레닌이 이런 주제에 관하여 알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레닌의 또 다른 한 글인 '협동조합에 관하여'에 관하여 고찰해봐야 할 의무감을 느끼는데, 이것은 강령 초안이 이 레닌 사후에 출판된 글을 폭넓게 인용하고 있으며, 즉 이 글의 일부 표현들을 이 글과는 완전하게 어울리지 않는 목적을 위하여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소비에트 공화국들의 노동자들이 "사회주의의 완전한 건설을 위한.... 모든 필요하고 충분한 물질적 선행조건들을 보유하"고 있다고 선언하는 강령초안의 5장을 염두에 두고 있다. 만약 레닌이 병을 앓고 있을 때 레닌에 의해 구술되고 그의 사후에 출판된 글이 정말로 소비에트 국가가 완전한 사회주의의 독립적인 건설을 위한 모든 필수적이고 물질적인, 즉 무엇보다도 생산성의 선행조건을 보유하고 있다고 말했다면, 레닌이 구술을 시키면서 얼떨결에 틀렸거나, 혹은 속기사가 자신의 속기문을 옮겨 쓰다가 실수를 했다고 단지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두 가지 상황 모두가 어쨌든 레닌이 두 번의 갑작스런 발작 속에서 맑스주의와 자기 자신의 평생의 가르침을 포기했다는 것보다는 더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러한 설명을 해야할 조금의 필요도 없다. 이 글 만큼이나 훌률한 레닌의 마지막 시기의 다른 글들과 사상의 통일성으로 결합되어 있는 비록 완성되지는 못했지만 훌륭한 글인 협동조합에 관하여는 정확하게 서양과 동양에서의 연쇄적인 혁명들 속에서 10월 혁명이 차지하고 있는 지위를 다루고 있는 미완성 책의 한 장을 구성하고 있다. 협동조합에 관하여라는 이 글은 레닌주의에 대한 수정주의자들이 그렇게도 경솔하게 레닌주의에 속한다고 말하는 것들에 관하여는 전혀 말하고 있지 않다. 이 글에서 레닌은 "상거래" 협동조합들이 노동자 국가에서는 자신들의 사회적 역할을 완전히 바꿀 수 있으며 바꾸어야만 하며, 올바른 정책에 의하여 그들이 사회주의적 경로를 따라서 사적 농민의 이해관계와 전체 국가의 이해관계를 융합시키게 될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레닌은 이 논쟁의 여지가 없는 생각을 다음과 같이 구체화한다. "사실상, 모든 대규모 생산 수단에 대한 국가권력의 지배,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에 있는 국가권력, 수백만 소소유 농민들과 프롤레타리아트의 동맹, 농민에 대한 관계에서 프롤레타리아트 지도력의 확보 등이 우리가 이전에 단순히 상인들로서 취급했으며, 어떤 관점에서는 현재의 신경제정책 하에서도 여전히 그렇게 취급할 권리를 가지고 있는 협동조합, 협동조합 하나만을 위해 필요한 전부가 아닌가? 이것은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은 아직 아니지만, 이러한 건설을 위해 필요하고도 충분한 모든 것이다.") 저작집 18권 2부, 140쪽 "협동조합 하나만"(?)이라는 미완성의 문구를 포함하고 있는 인용문의 본문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구술되어 쓰여진 수정되지 않은 초안이라는 것을 반박의 여지가 없게 증명한다. 글의 전체적인 사상을 취하고자 시도하는 것보다는 내용의 몇 안되는 분리된 단어들에 매달리는 것은 더더욱 수용될 수 없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인용된 구절의 형식과 내용 모두가 누구에게도 이것을 강령초안의 저자들에 의해 오용되고 있는 것처럼 오용할 권리를 부여하고 있지 않다. "필요하고도 충분한" 선행조건들에 관하여 말하면서, 레닌은 자신의 주제를 이 글 속에 엄격하게 한정한다. 그 속에서, 레닌은 우리가 우리의 기초로서 소비에트 통치라는 선행조건을 보유하면서 새로운 계급 격변 없이 원자화되고 흩어져 있는 농민 기업들을 통하여 사회주의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과 수단들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을 뿐이다. 이 글은 전체적으로 소규모 사적 상품경제로부터 집산화된 경제로의 이행의 사회조직적 형식들에 집중하고 있지, 그러한 이행을 위한 물질적-생산 조건들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유럽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오늘날 승리를 증명하고, 자신의 기술을 가지고 우리를 돕기 위해 온다면, 사적이고 사회적인 이해관계들에 조응하는 사회조직적 형식으로서 레닌에 의해 제기되었던 협동조합이라는 문제는 그것의 중요성을 더욱 완전하게 유지하게 될 것이다. 협동조합은 일단 소비에트 통치가 존재한다면, 전기를 포함하는 선진화된 기술이 수백만의 농민 기업들을 재조직하고 통합할 수 있는 길을 지적한다. 그러나 협동조합은 기술을 대체할 수 없으며 그러한 기술을 창출하지 않는다. 레닌은 단순히 일반적으로 필요하고 충분한 선행조건에 관하여 말하고 있지 않고 우리가 보았던 것처럼 분명하게 그것들을 열거한다. 그것들은 ⑴"모든 대규모 생산수단에 대한 국가권력의 지배"(완결되지 않은 문구) ⑵ "프롤레타리아트 수중에 있는 국가권력" ⑶ "농민에 대한 관계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력의 확보"이다. 레닌은 이들 순전히 정치적인 조건들을 열거한 이후에서야 비로소 "이것"(즉 모든 전술한 것들)이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을 위해 "필요하고 충분한 모든 것이다."라는 자신의 결론에 도달한다. "정치적 수준에서 필요하고 충분한 모든 것", 그러나 그 이상은 아니다. 그러나 레닌은 바로 그 다음에 "이것은 아직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은 아니다."를 첨가한다. 왜 아닌가? 정치적 조건들 하나만으로는, 비록 그것들이 충분하다고 할지라도 문제를 풀지 못하기 때문이다. 문화의 문제가 여전히 남는다. 레닌은 우리가 부족한 선행조건들의 막대한 중요성을 보여주기 위하여 "오직"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면서 "오직" 이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뿐만 아니라 레닌도 문화가 기술과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문화적이 되기 위해서는 특정한 물질적 기초가 필요하다."면서 레닌은 수정주의자들을 현실세계로 불러들인다.) 같은책, 185쪽 레닌이 부수적으로, 의도적으로 국제사회주의 혁명의 문제에 연결시켰던 전기화의 문제를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만약 쇠퇴기에 있으나 기술적으로는 강력한 세계 자본주의에 맞서서 후진국이라는 기초에서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에 착수한 국가의 부단하고, 화해할 수 없는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그리고 문화적 투쟁의 문제가 아니라면, 주어진 "필요하고 충분한" 정치적(그러나 물질적인 것은 아닌) 선행조건들 하에서 문화를 위한 투쟁이 우리의 모든 노고들을 흡수하게 될 것이다. "[레닌은 이 글의 말미에 특별한 강조점을 둔다] 만약 국제적 규모에서 우리의 현재의 상태를 위해 투쟁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가 아니라면, 우리의 무게중심은 문화적 작업으로 이행하게 될 것이다라고 기꺼이 선언한다.") 같은책, 144쪽 만약 우리가 심지어 거의 모든 다른 저작들을 따로한 채, 협동조합에 관하여라는 글을 분석한다고 해도, 이러한 것이 레닌의 진짜 생각이다. 이것은 단지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며, 우리가 "국제적 규모에서 우리의 현재의 상태를 위한" 우리의 투쟁, 즉 국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과 관련하여 반드시 성취해야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레닌이 분명하게 물질적 선행조건들에 관하여 괄호 속에서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우리가 "필요하고 충분한" 선행조건들을 보유하고 있음에 관한 레닌의 어구들을 취하여 그것들을 기초적인 물질적 선행조건들에 가져다 붙이는 강령초안의 저자들의 정식을 왜곡이 아니라면 어떻게 달리 부를 수 있는가? 이것이 새로운 이론의 두번째이자 마지막 인용구의 모습이다. 우리는 여기에서는 레닌이 세계 혁명의 승리 없이는 우리가 실패할 운명이라는 것, 하나의 국가에서 특이나 후진국에서 경제적으로 부르주아지에 승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임무는 바로 그 본질상 국제적인 임무라는 것을 주장하고 가장 분명하게 반복하고 있는 1905년부터 1923년까지의 수많은 글들과 연설들에 관하여는 의도적으로 다루지 않았다. 레닌은 이것들부터 새로운 민족주의적인 반동적 유토피아를 선포한 자들에게는 "비관적"일지 모르지만 혁명적 국제주의의 관점으로부터는 충분히 낙관적인 결론들을 도출했다. 여기서 우리는 초안의 저자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유토피아를 위한 "필요하고 충분한" 선행조건들을 만들어 내기 위하여 선택해온 문구들에만 우리의 주장을 집중하도록 한다. 그리고 그들의 전체 구조가 손을 대는 순간 부서지는 것을 본다. 그러나, 우리는 논란이 되고 있는 문제에 관하여 어떠한 코멘트도 필요하지 않은, 그리고 어떠한 잘못된 해석도 허용하지 않을 레닌의 직접적인 선언들 중에서 최소한 하나를 적절한 자리에 보여주려고 생각한다. "우리는 러시아 상황이 선진화된 자본주의 국가들의 상황과 같지 않다는 것과 러시아에서는 우리가 소수의 산업 노동자들과 압도적 다수의 소농경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의 모든 연설들, 그리고 우리의 모든 매체 등 우리의 많은 저작들에서 강조해왔다. 이러한 나라에서 사회 혁명은 오직 두개의 조건에서만 최종적으로 승리할 수 있다. 첫째, 하나 혹은 그 이상의 선진국에서의 사회혁명에 의한 시기 적절한 지원을 받는 조건..... 둘째, 독재를 수립하거나 혹은 국가권력을 자신의 수중에 장악하고 있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다수의 농민 사이에 합의가 있는 ... "우리는 다른 나라들에서의 혁명이 도래하지 않는 한, 농민과의 합의만이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지켜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저작집 18권 1부, 137쪽 우리는 이 구절이 충분히 교훈적이기를 희망한다. 우선, 레닌 그 자신이 이 구절에서 자신에 의해 제기된 사상들이 "우리의 많은 저작들에서, 모든 우리의 연설들에서, 그리고 우리의 모든 매체에서" 발전되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둘째, 이러한 전망은 10월 혁명 2년 전인 1915년에 레닌에 의해 구상된 것이 아니라, 1921년 10월 혁명 4년 후에 구상되었다. 레닌과 관련되는 한, 우리는 문제는 충분히 분명하다고 감히 생각한다. 의문이 남는다. 현재 우리 앞에 있는 기초적인 문제에 관한 강령초안의 저자들의 과거 의견은 무엇이었을까? 이 점에 관하여 1926년 11월에 스탈린은 "당은 한 나라에서의 사회주의의 승리는 그 나라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할 가능성을 의미하며, 이 임무가 하나의 국가의 힘으로 완수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상을 언제나 출발점으로 삼았다.") 프라우다, 1926년 11월 12일 고 말했다. 우리는 이미 당이 이러한 사상을 결코 출발점으로 삼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반대로, 레닌이 말한 것처럼, "우리의 많은 저작들에서, 우리의 모든 연설들에서, 그리고 우리의 모든 매체에서" 당은 반대 방향으로부터 나아갔으며, 이것은 소련공산당의 강령에서 그 최고의 표현에 도달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적어도 스탈린 그 자신은 "항상" "사회주의가 하나의 국가의 힘으로 건설될 수 있다"는 잘못된 관점으로부터 나아갔다고 상상할지 모르겠다. 한번 점검 해보자. 우리는 1905년 혹은 1915년 이 문제에 관한 스탈린의 관점이 무엇이었는가에 관하여 결코 알 수가 없는데, 이것은 이 주제에 관한 어떠한 문서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1924년에 스탈린은 아래와 같이 사회주의의 건설에 관한 레닌의 관점을 개괄했다. "일국에서의 부르주아지 권력의 타도와 프롤레타리아트 정부의 수립은 아직은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보장해주지 않는다. 사회주의적 생산의 조직화라는 사회주의의 주요한 임무는 여전히 미래를 향해 남아 있다. 수 개의 선진국 프롤레타리아트의 공동의 노력 없이 일국에서 이 임무가 완수되고 사회주의의 최종적 승리가 쟁취될 수 있는가? 아니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부르주아지를 타도하기 위해서는 일국의 노력으로는 충분하다. 우리의 혁명의 역사가 이것을 입증한다. 사회주의의 최종적인 승리를 위해서는, 사회주의적 생산의 조직화를 위해서는, 일국, 특히 러시아와 같은 농민국가의 노력으로는 불충분하다. 이것을 위해서는 수개의 선진국 프롤레타리아트의 노력이 필요하다... "전체적으로 이러한 것이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에 관한 레닌주의 이론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스탈린, 레닌과 레닌주의, 40쪽, 러시아어 판, 1928년 사람들은 "레닌주의 이론의 전형적인 특징"이 여기서 아주 정확하게 개괄되었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스탈린 책의 나중에 나온 판에서는 이 구절이 정확히 반대 방향으로 바뀌었으며, "레닌주의 이론의 전형적인 특징"은 1년이 안되어... 트로츠키주의로... 선포되었다. 코민테른 중앙집행위원회 7차 대회간회의는 1924년 판에 기초해서가 아니라 1926년 판에 기초해서 이 결정을 통과시켰다. 이것이 스탈린이 한 짓이다. 어떠한 것도 더 통탄스러울 수는 없을 것이다. 만약 코민테른 중앙집행위원회 7차 대회간회의에 관해서 그렇게도 통탄스럽지 않다면, 분명히 우리는 이것을 단념하고 받아들일지 모르겠다. 적어도 강령초안의 실제 저자인 부하린은 일국에서 사회주의의 현실화 가능성으로부터 "항상 나아갔다"는 한 가지 희망이 남아있다. 한번 확인해보자. 여기에 부하린이 1917년에 이 주자에 관하여 썼던 것이 있다. "혁명은 역사의 기관차이다. 심지어 후진국 러시아에서조차, 이 기관차의 대체할 수 없는 엔지니어는 오로지 프폴레타리아트일수 밖에 없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지 사회의 소유관계의 틀 내에는 더 이상 남아 있을 수 없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권력을 향해, 그리고 사회주의를 향해 진군한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일정에 올라 있는' 이러한 임무는 '민족국가의 경계 내에서는' 성취될 수 없다. 여기서 노동계급은 국제 노동자 혁명이라는 공성망치에 의해서만 오직 파괴될 수 있는 극복할 수 없는 장벽[주목:"극복할 수 없는 장벽"-트로츠키]과 만난다.") 부하린, 러시아에서의 계급투쟁과 혁명, 3쪽, 러시아어 판, 1917년 그는 그 자신을 이 보다 더 분명하게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1915년 소위 레닌의 "변화" 2년 후인 1917년에 부하린이 견지하고 있던 관점이다. 그러나 아마도 10월 혁명이 부하린을 다르게 가르쳤치지는 않았을까? 다시 한번 검토해보자. 1919년에, 부하린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이론적 기관에서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와 세계혁명이라는 주제에 관하여 아래와 같이 썼다. "현재 존재하고 있는 세계 경제와 그 구성부분들 사이의 관계 하에서, 다양한 민족 국가적 부르주아지 그룹들의 상호 의존성으로 인해 일국에서의 투쟁은 수개의 문명화된 다른 국가들의 결정적인 승리 없이는 끝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당시 이것은 심지어 "자명하기"까지 했다. 그는 아래와 같이 계속한다. "맑스주의 문헌에서, 그리고 전쟁 이전의 유사 맑스주의 문헌에서, 사회주의의 승리가 일국에서 가능한가 여부에 관한 문제가 여러 차례 제기되었다. 대부분의 저자들은 이 문제에 관하여 부정적[1915년에 레닌은 어떠했는가?-트로츠키]으로 답했으며, 이것으로부터 사람들은 일국에서 혁명을 시작하고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허용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지는 않았다." 정확하게 그렇다! 똑같은 글에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다. "생산력 상승의 시대는 수개의 주요 국가들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와 함께야만 시작될 수 있다. 그러므로 세계 혁명의 전면적인 발전과 산업 국가들의 소비에트 러시아와의 강력한 경제적 동맹의 형성이 필요하게 된다.") 부하린, 러시아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와 세계 혁명,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5호, 614쪽, 1919년 생산력 상승 즉, 진정한 사회주의적 발전은 유럽의 선진국들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 이후에야만 비로소 우리 나라에서 시작될 것이라는 부하린의 주장은 코민테른 중앙집행위원회 7차 대회간회의에서의 고발을 포함하여 "트로츠키주의"를 고발하는 모든 조항들의 기초로 사용되었던 주장들과 참으로 아주 똑같은 것이다. 유일하게 기이한 것은 자신의 짧은 기억력에서 자구책을 찾고 있는 부하린이 기소자의 역할을 하면서 더 나아간다는 것이다. 이 우스운 상황과 나란하게 또 다른 하나의 비극적인 것이 있는데, 즉 고발당한 사람들 가운데에는 아주 똑같은 기초적인 사상을 수십 차례나 표현했던 레닌도 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레닌의 소위 1915년 변화로부터 6년 후, 그리고 10월 혁명 4년 후인 1921년에, 레닌이 지도했던 중앙위원회는 부하린에 의해 지도되었던 위원회에 의해 입안되었던 청년공산주의동맹의 강령을 승인했다. 이 강령의 4번째 문단은 다음과 같다. "소련에서 국가권력은 이미 노동계급의 수중에 있다. 세계 자본주의에 맞서는 3년 동안의 영웅적인 투쟁의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소비에트 정부를 고수하고 강화했다. 비록 엄청난 천연자원을 보유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산업의 관점에서는 소부르주아지가 우세한 후진국이다. 러시아는 우리가 현재 돌입해 있는 발전의 시대인 세계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통해서만 오직 사회주의에 도달할 수 있다." 청년공산주의동맹의 강령(우연한 글이 아니라 강령!)에 있는 이 하나의 문단이 당이 "항상" 일국에서, 그리고 더 나아가 정확하게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이 가능함을 고수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초안 저자들의 시도들을 어리석고 정말로 수치스럽게 만든다. 만약 "항상" 그랬다면, 왜 부하린은 청년공산주의동맹의 강령에 그런 문단을 정식화했는가? 당시 스탈린은 어디를 보고 있었는가? 어떻게 레닌과 전체 중앙위원회는 그러한 이단을 승인할 수 있었는가? 어떻게 당내에서 아무도 이것이 "하찮은 일"이라는 것을 눈치챘거나 혹은 이것에 반대하는 의견을 제기하지 않았는가? 이것이 당, 당의 역사, 그리고 코민테른에 대한 노골적인 조롱으로 바뀌고 있는 사악한 농담으로 보이지는 않는가? 이것을 그만둘 적당한 때는 아닌가? 수정주의자들에게 감히 레닌과 당의 이론적 전통의 뒤에 숨지 말라고 말할 적당한 때는 아닌가!? 코민테른 7차 중앙집행위원회 대회간회의에서, 짧은 기억력 밖에 믿을 것이 없는 부하린은 "트로츠키주의"를 비난하는 결의안을 위한 기초를 제공하기 위하여 아래와 같이 주장했다. "트로츠키 동지의 영구혁명의 이론에는, 그리고 트로츠키 동지는 이 이론을 오늘날까지도 제출하고 있는데, 우리의 경제적 후진성 때문에 우리는 세계 혁명이 없다면 불가피하게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주장 또한 발견된다.") Minutes, 115쪽 7차 대회간회의에서 나는 1905-1906년에 내가 정식화했던 영구혁명의 이론에 있는 결함에 관하여 말했다. 그러나 물론 이것이 근본적이었고, 내가 레닌에게로 가까이 가도록 했으며, 내가 오늘날의 레닌주의에 대한 수정주의를 완전히 받아들일 수 없도록 만들었던 이 이론에 있는 어떠한 것도 결코 포기하도록 하지 않았다. 영구혁명의 이론에는 두개의 근본적인 명제들이 있다. 첫째, 러시아의 역사적 후진성에도 불구하고, 혁명은 선진국의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장악할 수 있기 전에,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으로 권력을 이전시킬 수 있다는 명제이다. 둘째, 자본가 적들의 세계에 둘러싸인 후진국에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발생시킬 모순들들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세계 혁명의 장에서 발견될 것이다라는 명제이다. 첫 번째 명제는 불균등 발전의 법칙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기초하고 있다. 두 번째 명제는 자본주의 국가들 사이의 경제적, 정치적 결합의 확고불변함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기초하고 있다. 오늘날에조차 내가 이들 2개의 영구혁명 이론의 기본적인 명제들을 고수하고 있다고 말하는데 있어서는 올바르다. 오늘날,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왜냐하면, 내 의견으로는, 그것들이 이론에서는 맑스와 레닌의 저작들에 의해서, 실천에서는 10월 혁명의 경험에 의하여 완전하게 입증되고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6. "사회민주주의적 일탈"은 어디에 있는가? 예증으로 든 인용들은 과거와 현재의 스탈린과 부하린의 이론적 입장들을 특징짓기에 충분한 것 이상이다. 그러나 그들의 정치적 방책들의 성격을 결정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스탈린과 부하린이 그들 자신이 1925년까지는 (이 경우 레닌에 완전히 동의하여) 했던 것들과 절대적으로 유사한 선언들을 반대파가 썼던 문서들로부터 골라내면서, 이들 인용구들에 기초하여 우리의 "사회민주주의적 일탈"의 이론을 만들어냈다는 것을 상기해야만 한다. 10월 혁명과 국제 혁명 사이의 관계의 중심적인 문제에 있어서 반대파가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건설의 가능성을 수용하지 않는 오토 바우어와 똑같은 관점을 고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은 정말 인쇄 매체가 1929년에야 비로소 발명되었으며, 그 이전에 발생했던 모든 것들은 잊혀질 운명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판에 걸고 있는 모든 것이 짧은 기억력뿐이다! 그러나, 10월 혁명의 성격의 문제에 관하여, 코민테른은 4차 대회에서 오토 바우어와 기타 제2 인터내셔널의 속물들과는 모든 것을 청산했다. 중앙위원회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신경제정책과 세계혁명의 전망에 관한 나의 보고에서, 오토 바우어의 입장은 당시 우리의 중앙위원회의 관점을 표현했던 방식으로 평가되었고, 대회에서 어떠한 반대도 없었으며, 나는 이것이 오늘날에도 완전하게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부하린 그 자신과 관련되어 있는 한, "레닌과 트로츠키를 포함하여 많은 동지들이 이미 그 주제에 관하여 말했"기 때문에 그 문제에 대한 정치적 입장을 분명히 할 것을 정중히 거절했는데, 달리 말해서 당시 부하린은 나의 연설에 동의했다. 아래에 내가 4차 대회에서 오토 바우어에 관하여 말했던 것이 있다.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한가로운 글들에서 자본주의는, 특히 유럽에서 자신의 유용성을 잃었으며 역사발전의 걸림돌이 되었다고 인정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소비에트 러시아의 발전은 불가피하게 부르주아지 민주주의의 승리로 귀결된다는 신념을 표현하는 사회민주주의 이론가들은 이들 멍청하고 젠체하는 혼동스러워하는 자들에게 완전히 어울리는 가장 처량하고 진부한 모순에 빠진다. 신경제정책은 한정된 특정한 시간과 장소라는 조건을 위하여 계획된 것이다. 신경제 정책은 자본주의의 포위 속에 존재하고 있으며, 유럽의 혁명적 발전에 기대를 걸고 있는 노동자 국가의 책략이다... 시간과 같은 요소는 정치적 타산에서의 고려로부터 버려질 수 없다. 만약 우리가 자본주의가 유럽에서 향후 100년 혹은 50년을 계속 실제로 존재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소비에트 러시아가 자신의 경제 정책에서 그것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면, 문제는 저절로 풀리게 되는데, 이것은 이 것을 허용함으로써 우리가 유럽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붕괴와 자본주의의 부활의 새로운 시대의 등장을 전제로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기초에서 이것이 허용되어야 하는가? 만약 오토 바우어가 오늘날 오스트리아의 삶 속에서 어떤 기적적인 자본가들의 부활의 노래를 발견했다면, 만약 유럽 부르주아지가 수십년 동안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면, 오늘날 세계 정세 하에서 그것은 새로운 자본주의의 만개가 아니라 유럽의 경제적 침체와 문화적 쇠퇴를 의미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이러한 과정이 소비에트 러시아를 심연으로 끌어당기게 될 것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러시아가 '민주주의'의 단계를 통과해야 할 수밖에 없는가 혹은 다른 어떤 형태로 붕괴할 것인가는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스펭글러의 철학을 수용해야 할 어떤 이유도 알지 못한다. 우리는 명백하게 유럽에서의 혁명적 발전을 기대한다. 신경제정책은 단지 그 발전의 속도에 맞추기 위한 것이다.") 트로츠키, 사회민주주의적 비판에 대하여, 코민테른 5년, 491쪽 문제의 이러한 정식화는 우리를 우리가 강령초안에 대한 평가를 시작했던 지점 즉, 제국주의 시대에는 자신의 모든 민족국가적 특수성들을 가진 개별 국가가 그 속에 포함되는 그리고 개별 국가가 그것에 종속되는 전체로서의 세계 발전의 경향들을 출발점으로서 취하는 것 이외의 다른 방법으로 한 국가의 운명에 접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제2 인터내셔널의 이론가들은 세계의 단위와 제국주의 시대로부터 소련을 제외하며, 하나의 고립된 국가로서의 소련에 대하여 경제적 "성숙"이라는 단조로운 기준을 적용하며, 소련은 독립적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할 만큼 성숙하지 않았으며, 이렇게 해서 노동자 국가의 자본주의적 퇴행의 불가피성이라는 결론을 도출한다. 강령초안의 저자들은 똑같은 이론적 근거를 받아들이며, 사회민주주의 이론가들의 형이상항적 방법론 전부를 물려받는다. 그들은 또한 존재하는 세계와 제국주의 시대로부터 "추상한다." 그들은 고립적인 발전이라는 허구로부터 나아간다. 그들은 세계 혁명의 민족국가적 단계에 단조로운 경제적 기준을 적용한다. 그러나 그들이 내리는 유죄평결은 다르다. 초안 저자들의 "좌익주의"는 그들이 사회민주주의적 평가를 뒤집는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제2 인터내셔널 이론가들의 입장은. 그것이 개조되더라도, 아무런 가치가 없는 채로 있다. 사람들은 유치원 실습과도 같은 바우어의 평가와 예측을 간단하게 제거하는 레닌의 입장을 택해야만 한다. 이것이 "사회민주주의적 일탈"에 관한 실제 이야기이다. 우리가 아니라 초안의 저자들이 그들 스스로가 바우어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에 관하여 생각해야 한다. 7. 세계 경제에 대한 소련의 의존성 현재 민족국가적 사회주의 사회를 제창하는 자들의 선구자는 다름이 아닌 헤르 폴마르[Herr Vollmar]였다. 자신의 글인 고립된 사회주의 국가라는 제목의 글에서 독일에서의 독립적인 사회주의 건설의 전망과 독일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선진화된 영국의 프롤레타리아트 보다 훨씬 더 발전되었음을 서술하면서, 폴마르는 1878년에 분명하고 매우 명백하게 몇 군데에서 스탈린에 따르면 맑스와 엥겔스가 잘 모르던 불균등발전의 법칙에 관하여 언급한다. 이 법칙을 기초로 해서 폴마르는 1878년에 논박의 여지가 없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미래에도 역시 자신들의 힘을 유지하고 있을 지배적인 조건하에서, 모든 문명화된 국가들에서의 동시적인 사회주의의 승리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 예견될 수 있다." 폴마르는 이 사상을 더욱 발전시키면서 "그래서 비록 유일하게 가능한 길은 아니지만, 가장 가능성 있는 것으로 내가 증명했다고 희망하는 고립된 사회주의 국가에 도달하게 되었다."로 말한다. 우리가 여기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하에 있는 국가라고 이해할지도 모르는 "고립된 국가"라는 용어에 관한 한, 폴마르는 맑스와 엥겔스에게 잘 알려진, 그리고 레닌이 1915년의 위에서 인용된 글에서 표현했던 논박의 여지가 없는 생각을 표현했다. 그러나 그리고 나서는 뭔가 폴마르 자신의 사상이 뒤따르는데, 아무튼 이것은 우리의 일국에서의 사회주의 이론의 후원자들의 정식화만큼 한쪽으로 치우치고 잘못 정식화되지는 않았다. 자신의 글 속에서, 폴마르는 훨씬 더 발달한 기술과 훨씬 낮은 생산비용을 동시에 보유하고 있다는 이점을 가지고 있는 사회주의 독일이 활발하게 세계 자본주의 경제와의 경제적 관계를 가질 것이라는 명제를 출발점으로서 잡았다. 이러한 구상은 사회주의 체제와 자본주의 체제의 평화공존의 전망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가 진보하면서 부단하게 자신의 거대한 생산적 우월성을 드낼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세계 혁명의 필요성 자체가 사라진다. 사회주의는 시장에 보다 값싼 상품을 파는 것으로 자본주의에 승리할 것이다. 첫 번째 강령초안의 저자이며 두 번째 초안의 저자들 중 하나인 부하린은 자신의 일국에서의 사회주의라는 그의 구상에서 전적으로 고립된 자족적인 경제로부터 나아간다. 궤변에 의해 배가된 스콜라주의의 최후의 변인 우리 혁명의 성격과 소련에서 성공적인 사회주의 건설의 가능성에 대하여) 볼셰비크, 19-20호, 1926 라는 제목의 부하린의 글에서는 모든 추론이 고립된 경제라는 한계 내에서 이루어진다. 유일하게 원칙적인 주장은 아래와 같다. "우리가 사회주의의 건설을 위해 '필요하고 충분한 모든 것'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따라서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바로 그 과정에, 사회주의의 더욱 진전된 건설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것과 같은 점은 있을 수 없다. 만약 우리가 우리 나라 내부에 전년에 비하여 우리 경제의 사회주의적 부문의 더욱 큰 우위를 확보하면서 우리가 나아가고 있으며, 우리 경제의 사회화된 부문들이 사적 자본주의적 부문보다 빨리 성장하는 힘의 조합을 보유하고 있다면, 우리는 힘의 우위에 바탕하여 계속해서 새로운 해를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이 논거는 흠잡을 곳이 없다. "우리가 필요하고 충분한 모든 것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있다. 증명해야만 하는 지점으로부터 출발하면서, 부하린은 그것으로 들어가는 어떠한 입구나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출구도 없는 자족적인 사회주의 경제의 완전한 체제를 건설한다. 스탈린뿐만 아니라 부하린도 외부환경 즉 세계 전체에 대해서는 개입이라는 각도로부터만 그것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부하린이 자신의 글에서 국제적 요소로부터 "추상할" 필요성에 관하여 말할 때, 그는 세계 시장을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군사적 개입을 고려하고 있다. 부하린은 세계 시장으로부터 추상할 필요가 없는데, 이것은 그가 간단하게 그의 체계 전반에서 그것에 관하여 잊고 있고 있기 때문이다. 이 도식과 조화를 이루어, 부하린은 14차 러시아 당대회에서 만약 우리가 개입에 의해 방해받지 않는다면 우리는 "비록 거북이의 속도일지라도" 사회주의를 건설할 것이다라는 생각을 주장했다. 두 체제 사이의 부단한 투쟁의 문제, 사회주의는 최고의 생산력에만 오직 기초할 수 있다는 사실, 한마디로 성장하는 생산력에 기초하여 한 사회적 형식의 다른 것으로의 대체라는 맑스주의적 동학, 이 모든 것들이 완전히 제거되었다. 혁명적, 그리고 역사적 변증법이 낮은 기술에 기초한, 민족국가적 국경 내부에서 "거북이의 속도"로 발전하는, 외부 세계와는 오로지 개입이라는 공포에 의해서만 연결되어 있는 자족적인 사회주의라는 인색한 반동적 유토피아에 의해 대체되었다. 맑스와 레닌의 이론에 대한 이 비참한 모방을 채택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사회민주주의적 일탈"로 선언되었다. 인용된 부하린의 글에는, 우리 관점에 대한 이러한 성격 규정이 처음으로 일반적으로 제기되고 "구체화되었다." 역사는 우리가 폴마르의 일국에서의 사회주의 이론의 더욱 저열한 재탕을 채택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우리가 "사회민주주의적 일탈"로 빠져들었다고 적을 것이다. 만약 러시아가 세계 경제의 사슬 - 가장 약한 고리지만 그래도 하나의 고리이다 - 속에 있는 고리에 있지 않았다면, 짜르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는 10월에 권력을 장악하지 못했을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권력의 장악은 결코 소비에트 공화국을 자본주의가 창출한 노동의 국제적 분할의 체제로부터 제외시키지 않았다. 오직 황혼에만 나는 현명한 부엉이처럼,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의 이론은 과거 고정 자본을 어느 때보다도 많은 비율로 소진하고, 고정 자본의 3분의 2에서 세계 산업에 대한 의존성이 구체화되어 있는 우리 산업이 그것의 소생과 세계 시장과의 연결 확대의 긴급한 필요성의 징후를 드러내고 있었을 때, 대외무역의 문제가 우리 경제 지도자들 앞에 최고로 부각되었던 순간에 느닷없이 나타났다. 레닌이 당에서 발언할 기회를 가졌던 마지막 대회인 11차 당대회에서 그는 당이 또 다른 시련을, 즉 "... 러시아와 우리가 종속되어 있고, 우리가 연결되어 있으며, 우리가 벗어날 수 없는 세계시장이 우리에게 제기하는 시련"을 견뎌야만 할 것이라는 시기 적절한 경고를 발했다. 우리의 대외무역 지수들이 가장 최근에 우리 경제계획 지수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는 단순한 사실이 고립적인 "완전한 사회주의"의 이론에 최대의 치명타를 날린다. 우리 산업을 포함하여 우리 경제에서 "가장 신통치 않은 지점"이 수입인데, 이것은 우리의 수출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그리고 사슬의 저항력은 항상 그것의 가장 약한 고리로 측정되기 때문에, 우리의 경제계획의 규모는 우리의 수입 규모에 적합하게 만들어진다. 우리는 잡지 계획경제(국가계획위원회의 이론적 기관)에 있는 계획의 체제를 위한 글을 알고 있는데, 이 글에는 "... 올해 우리의 통제 수치들을 도출하면서 우리는 방법론적으로 우리의 수출과 수입을 전체 계획을 위한 출발점으로 잡아야만 했다. 그리고 우리는 다양한 산업 부문들을 위한, 그리고 결과적으로 산업 전반을 위한, 그리고 특히 새로운 산업기업의 건설을 위한 우리의 계획을 그것에 맞추어야만 했다,") Jan. 1927년 27쪽 등이 있다. 국가계획위원회의 이 방법론적 접근은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모든 이들에게, 우리가 더욱 강해지면서 고립이라는 그릇된 순환으로부터 벗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통제위원들이 우리 경제 발전의 방향과 속도를 결정은 하지만, 이들 통제 위원들이 세계 경제에 의해 이미 통제되고 있다고 딱 잘라 선언한다. 자본주의 세계는 자신이 군사적 개입과는 다른 종류의 도구를 가지고 있음을 수출과 수입 지수들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준다. 노동생산성과 전체로서의 사회체제의 생산성이 가격의 상호관계에 의해 시장에서 측정되는 한, 소비에트 경제에 대한 가장 즉각적인 위협을 구성하는 것은 군사적 개입보다는 아마도 보다 값싼 자본주의 상품들의 개입일 것이다. 이것 하나로도 단순히 "자기 자신의" 부르주아지에 대한 개별적인 경제적 승리의 문제가 결코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세계 전체에 임박해 있는 사회주의 혁명은 결코 단순히 자기 자신의 부르주아지에 대한 개별 국가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에 있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관련되어 있는 것은 후진적인 생산력에 기초하여 이제 막 건설을 시작한 하나와, 오늘날 여전히 헤아릴 수 없이 강력한 생산력에 기초하고 있는 다른 하나라는, 두 사회 체제 사이의 경쟁과 생사를 건 투쟁이다. 세계 시장에 대한 우리의 의존성을 수용하는 것에 있어서 (레닌은 세계시장에 대한 우리의 종속에 관하여 퉁명하게 말했다) "비관주의"를 드러내는 사람은 누구라도, 그것에 의해서 세계 시장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자기 자신의 지엽적인 소부르주아지적 소심함과 세계 경제로부터 피하여 풀 숲 뒤에 숨어 자기 자신의 자원으로 어떻게든 해나가기를 원하는 세상 물정 모르는 낙관주의라는 가엾은 특징을 드러낸다. 새로운 이론은 소련이 군사적 개입에 의해 사라질 수 있지, 자신의 경제적 후진성 때문에는 결코 사라질 수 없다는 이상한 사상을 주장했다. 그러나 사회주의 사회에는 자기 국가를 방어하기 위한 노동 대중들의 준비가 그 국가를 공격하기 위한 자본주의의 노예들의 준비보다 훨씬 클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왜 우리가 군사적 개입으로부터 파멸의 위협을 받아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생긴다. 왜냐하면 적이 공업기술에서 한정 없이 강력하기 때문이다. 부하린은 그들의 군사 기술적 측면에서만 생산력의 우위를 인정한다. 그는 포드에서 만든 트랙터가 크뢰조[Creusot]가 만든 총만큼이나 위험스럽다는 것을 이해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총은 가끔씩 기능을 할 수 있지만, 트랙터는 항상적으로 우리에게 가해지는 압력을 행사한다는 하나의 차이만을 가진다. 게다가 트랙터는 최후의 수단으로서의 총이 자신의 뒤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최초의 노동자 국가이며,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한 부분이며,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와 함께 세계 자본에 의존하고 있다. "결합"이라는 무관심하고, 중립적이며, 관료적으로 거세된 단어가 이들 "결합"의 극단적으로 부담스럽고 위험스러운 성격을 덮어 가리기 위한 목적만을 가진 채 유포된다. 만약 우리가 세계 시장의 가격에 생산을 하고 있다면, 우리의 세계 시장에 대한 의존성은 의존성이기를 멈추지는 않으면서 현재보다 훨씬 덜 심할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우리의 대외무역 독점 그 자체가 우리의 의존성의 격심함과 위험한 성격에 대한 증거이다. 우리의 사회주의의 건설에서 독점의 결정적인 중요성은 정확하게 우리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세력들의 현존하는 상호관계의 결과이다. 그러나 우리는 대외무역의 독점은 단지 세계 시장에 대한 우리의 의존성을 통제할 뿐이지, 그것을 제거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한 순간도 잊어서는 안된다. "[레닌은 말한다] 우리의 소비에트 공화국이 전체 자본주의 세계에 둘러싸여 고립된 국경의 땅에 남아 있는 한, 우리의 완전한 경제적 독립과 우리가 처해 있는 위험들의 소멸에 관하여 생각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어리석은 공상과 이상주의일 것이다.) 저작집 17권 409쪽 우리에게 적대적인 자본주의 경제 속에 있는 "고립된 국경의 땅"으로서의 소련의 객관적인 지위로부터 결과적으로 주된 위험들이 발생한다. 그러나 이러한 위험들은 감소하거나 증가할 수 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우리의 사회주의의 건설과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주의 경제의 발전이라는 두 가지 요소의 작용에 달려있다. 최종적으로 두 번째 요소, 즉 전체로서의 세계 경제의 운명이 물론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결국은 필연적으로 사회주의 공화국의 멸망으로 귀결될, 우리의 사회주의 체제의 생산성이 자본주의 체제의 생산성에 계속해서 뒤쳐지는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떤 특별한 경우에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만약 우리가 견줄 데 없이 높은 지도력을 가지고 산업적 기초를 독립적으로 창출할 필요가 있게 되는 이 새로운 국면에서 우리 경제를 훌륭하게 운영할 수 있다면, 우리의 노동 생산성은 증가할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국가 혹은 보다 정확하게 지배적인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노동 생산성이 우리나라에서보다 더 빨리 성장할 것이라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인가? 이 문제에 대한 분명한 대답 없이는 우리의 속도("거북이의 속도"라는 황당한 철학은 고사하고)는 "그 자체로" 충분하다는 김빠진 주장을 위한 어떠한 근거도 없다. 그러나 두 체제의 경쟁이라는 문제에 대한 대답을 제공하기 위한 바로 그 시도가 세계 경제와 세계 정치, 즉 소비에트 공화국을 포함하는 혁명적 인터내셔널의 활동과 결정의 장으로 우리를 이끌며, 가끔씩 인터내셔널의 지원을 확보하는 자족적인 소비에트 공화국으로는 결코 이끌지 않는다. 소련의 국가경제에 관하여 말하면서 강령 초안은 소련의 국가경제는 "자본주의 국가들에서의 발전 속도를 능가하는 속도로 대규모 산업을 발전시키고 있다"고 말한다. 두 가지 속도를 병렬하기 위한 이 시도는 강령의 저자들이 분명하게 우리의 발전과 세계의 발전 사이의 비교 상수의 문제 자체를 거부했던 것에 비하면 원칙적으로 일보전진 했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스탈린은 "국제적인 요소들을 밀어 넣을"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부하린은 "비록 거북이의 속도일지라도" 사회주의를 건설하자고 말했다. 정확하게 이 노선을 따라서, 수년 동안에 걸쳐 원칙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형식적으로는 우리가 이 노선을 따라서 승리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경제 발전의 속도들 사이의 비교를 내용 속에 삽입하지 않고, 문제의 뿌리를 통찰한다면, 초안의 다른 부분에서 자본주의 세계에 대한 어떠한 관계도 없이, 오직 국내적 관계만을 출발점으로 삼으면서 "충분한 산업의 최소한"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 허용될 수 없음이 명백해질 것이다. 또한 결정을 통과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특정 국가가 사회주의를 독립적으로 건설하는 것이 "가능한가 아니면 불가능한가"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조차 마찬가지로 허용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질 것이다. 그 문제는 두 체제 사이의, 두 계급 사이의 투쟁의 동학에 의해서 결정되며, 이 투쟁에서는 우리의 회복 시기의 높은 성장 상수와 무관하게 아래와 같은 하나의 명백하고 기본적인 사실이 남게 된다. "만약 국제적 규모에서 생각해본다면, 자본주의는 비단 군사적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경제적 의미에서도 현재 소비에트 권력보다 강하다. 우리는 이 근본적인 고려로부터 나아가야 하며 이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레닌 저작집 17권 102쪽 서로 다른 발전 속도들 사이의 상호관계의 문제는 미래를 향해 공개적인 의문을 남긴다. 이것은 진정으로 "스키츄카[smychka-노동자와 농민, 도시와 농촌의 경제 협력]을 성취하기 위한, 곡물 수집을 보장하기 위한, 우리의 수출과 수입을 늘리기 위한 우리의 능력에, 즉 당연히 이 투쟁에서 대단히 중요한 요소들인 우리의 내부적 성공에 달려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 자본주의의 운명에, 세계 자본주의의 침체와 성장과 붕괴, 즉 세계 경제와 세계 혁명의 경로에도 달려있다. 결과적으로, 문제는 민족국가적 틀 내부에서가 아니라 세계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투쟁의 장에서 결정된다. 8. "일국에서 사회주의"라는 반동적인 유토피아적 이론의 원인으로서의 생산력과 민족국가적 경계 사이의 모순 우리가 본 것처럼,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의 이론을 위한 기초는 한편에서의 레닌의 몇 구절에 대한 궤변적 해석과 다른 한 편에서의 "불균등 발전"에 대한 형식적인 해석으로 요약된다. 문제에 관한 인용문들뿐만 아니라 역사 법칙에 대한 올바른 해석을 제공함으로써 우리는 완전히 반대의 결론 즉, 1925년까지의 스탈린과 부하린을 포함하여 맑스, 엥겔스, 레닌, 그리고 우리 모두가 도달했던 결론에 도달한다. 자본주의의 불균등하고 산발적인 발전으로부터 비동시적인, 불균등한, 그리고 산발적인 사회주의 혁명의 성격이 도출되며, 각자에 대한 여러 국가들의 상호의존성의 극도의 긴장으로부터 일국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에 대한 경제적인 불가능성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불가능성이 도출된다. 이런 각도에서 다시 한번 강령의 내용을 좀더 자세하게 검토해보자. 우리는 서문에서 이미 아래의 내용을 읽었다. "제국주의는.... 예외적인 정도로까지 세계 경제의 민족국가적 생산력의 성장과 민족국가적 국경 사이의 모순을 악화시킨다." 이 명제가 인터내셔널 강령의 핵심이거나 혹은 핵심이라는 것을 의미했다고 이미 말했다. 그러나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의 이론을 반동적 이론으로서 선험적으로 배제하고, 거부하며 일소해버리는 것이 정확하게 이 명제인데, 그것은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의 이론이 생산력의 발전의 근본적인 경향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이 발전에 의해 이미 달성된 물질적 결과에 대해서도 화해할 수 없이 반대되기 때문이다. 생산력들은 민족국가적 경계들과 양립할 수 없다. 이 사실에서 대외무역, 인력과 자본의 수출, 영토의 장악, 식민지 정책과 최근의 제국주의 전쟁뿐만 아니라 자족적인 사회주의 사회의 경제적 불가능성이 도출된다. 자본주의 국가들의 생산력은 훨씬 더 전에 민족국가적 국경을 돌파했다. 그러나 사회주의 사회는 가장 선진화된 생산력에 기초해서만, 농경을 포함하는 생산의 과정에 대한 전기와 화학의 적용에 기초해서만, 현대 기술의 최고의 요소들의 융합, 일반화, 그리고 이것들을 최고의 발전으로 이끄는 것에 기초해서만 건설될 수 있다. 맑스 이래로, 우리는 자본주의는 자신이 낳았고, 1914년의 전쟁이 보여주었던 것처럼 부르주아지의 사적 소유권의 외피뿐만 아니라 부르주아지 국가의 민족국가적 테두리까지 갈기갈기 찢는 신기술의 활기에 대처할 수 없다는 것을 부단히 반복해오고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로부터 최고로 발전된 생산력을 물려받아야만 할뿐만 아니라 즉각적으로 그것을 진전시키고,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자본주의하에서는 알려져 있지 않았던 발전의 단계를 제공해야만 한다. 의문이 생긴다. 어떻게 사회주의가 자신이 자본주의하에서 타도하려고 격렬하게 애썼던 민족국가의 경계 안으로 생산력을 되돌릴 수 있는가? 혹은, "억제할 수 없는" 생산력에 비하면, 민족국가적 경계들뿐 아니라 결과적으로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의 이론의 경계들도 역시 너무나 협소하며, 이를테면 우리 자신을 억제되고 국내화된 생산력들에, 즉 경제적으로 후진적인 공업기술에 제한하기 때문에, 아마도 우리가 "억제할 수 없는" 생산력이라는 사상을 포기해야만 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많은 산업 부문들에서 우리는 지금 당장 발전을 멈추고 현재 부르주아지 러시아가 분리할 수 없는 결합력으로 세계경제에 연결되도록 했고, 부르주아지 러시아를 국경을 넘어 성장했던 생산력을 위하여 자신의 영토 확장하기 위한 제국주의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도록 했던 우리의 가엾은 정도의 현재 기술 수준보다도 더 낮은 수준으로 후퇴시켜야 할 것이다. 이들 생산력들을 물려받고 복구해오면서, 노동자 국가는 수입과 수출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강령 초안이 현대 자본주의적 기술의 민족국가적 경계들과의 양립불가능성이라는 테제를 자신의 내용 속으로 기계적으로 삽입하고는 마치 이 양립불가능성에 관해서는 어떠한 문제도 없는 것처럼 주장을 진행하는 것이 문제이다. 본질적으로 초안 전체는 맑스와 레닌으로부터 취해진 이미 혁명적인 테제들의 조합이며, 이들 혁명적인 테제들과는 절대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기회주의적이고 중도주의적 결론들의 조합이다. 이것이 초안에 포함되어 있는 분리된 혁명적 정식들에 낚이지 않고, 초안의 주요한 경향들이 어디로 귀결되는가를 관찰하는 것이 필요한 이유이다. 우리는 이미 "하나의 고립된 자본주의 국가에서" 사회주의의 승리의 가능성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첫 번째 장의 그 부분을 인용했다. 이 사상은 4장에서 아래와 같이 훨씬 더 노골적이고 날카롭게 정식화된다.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는 오직 개별 국가들에서의 사회주의의 승리[?]의 결과들로서만 현실화될 수 있으며, 이것은 새롭게 형성된 프롤레타리아트 공화국들이 이미 존재하고 있는 프롤레타리아트 공화국들과 연맹을 수립하게 될 때이다." 만약 우리가 "사회주의의 승리"를 단순히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위한 또 다른 표현으로 해석한다면, 우리는 논박이 불가능하고, 덜 다의적으로 정식화되어야 할 일반적인 선언에 도달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초안의 저자들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사회주의의 승리는 권력의 장악과 생산수단의 국유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국가에서의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을 의미한다. 만약 우리가 이 해석을 수용한다면, 우리는 노동의 국제적 분할에 기초한 세계 사회주의 경제가 아니라 무정부주의 풍의 더없이 행복한 자족적인 사회주의 공동체들의 연맹을 획득하게 될 것인데, 여기서 유일한 차이는 이들 공동체들이 현재의 민족국가들의 크기로 확대될 것이라는 것이다. 과거의 관습적인 공식들로 새로운 정식화를 덮어 가리기 위해 심히 애를 쓰면서, 강령초안은 아래의 테제에 의지하고 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완전한 세계적 승리와 프롤레타리아트 세계 권력의 공고화 이후에만 오직 세계 사회주의 경제의 일사불란한 건설이라는 장기간의 시대가 이어질 것이다."(4장) 이론적 방패로 사용되고 있는 이 가정은 실제로는 단지 기본적인 모순을 폭로하는데 기여할 뿐이다. 만약 우리가 이 테제를 진정한 사회주의 건설의 시대가 적어도 몇 개의 선진국들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 이후에만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면, 이것은 간단히 일국에서 사회주의 건설의 이론에 대한 거부이며, 맑스와 레닌의 입장으로의 복귀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강령초안의 여러 부분에 숨어 있는 스탈린과 부하린의 새로운 이론으로부터 우리의 출발점을 잡는다면, 우리는 어린아이들이 이미 만들어진 블록으로 어떤 모양을 만들어내는 방식과 같이,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완전한 세계적 승리까지는, 몇몇 개별 국가들이 각자의 국가에서 완전한 사회주의를 건설하고, 계속해서 이들 사회주의 국가들로부터 세계 사회주의 경제가 건설 될 것이라는 전망을 획득하게 된다. 사실, 세계 사회주의 경제는 민족국가적 사회주의 경제의 총합이 결코 아닐 것이다. 세계 사회주의 경제는 그 근본적인 측면에서 자본주의의 모든 선행한 발전이 창출한 노동의 세계적 분할이라는 토양에서 형성될 것이다. 본질적으로, 이것은 몇개의 개별 국가들에서 "완전한 사회주의"의 건설 이후가 아니라, 수 십년이 요구되는 세계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라는 폭풍과 사나운 비바람 속에서 수립되고 건설 될 것이다. 최초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국가들의 경제적 성공은 그들의 자족적인 "완전한 사회주의"에 대한 그들의 근접 정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독재 자체의 정치적 안정성에 의해서, 그리고 미래의 세계 사회주의 경제의 요소들을 준비하는 데 있어서 성취된 성공들에 의해서 측정될 것이다. 이 수정주의적 사상은 자신들이 왜곡했던 레닌 사후에 출판된 글 중의 1줄 반 뒤에 숨어서 초안의 저자들이 소련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선언하고 있는 5장에서 훨씬 더 명확하게, 그리고 그래서 훨씬 더 총체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소련은] ..... 자신의 내부에 봉건적 지주들과 부르주아지의 타도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의 완전한 건설을 위한 필요하고 충분한 물질적 선행조건들을 보유하고 있다." 환경이 가지고 있는 것 덕분에, 우리가 그런 예외적인 역사적 이점을 확보했는가? 우리는 초안의 2번째 장에서 이 점에 대한 대답을 발견한다. "제국주의 전선은 그것의 가장 약한 고리인 짜르 러시아에서 깨졌다." 이것은 레닌의 빛나는 공식이다. 이것의 의미는 러시아가 모든 제국주의 국가들 중에서 가장 후진적이며 경제적으로 약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국가의 불충분한 생산력에 감당할 수 없는 부담을 지우게 되면서, 러시아의 지배계급들이 가장 먼저 붕괴했던 이유이다. 이렇게 해서 불균등하고 산발적인 발전이 가장 후진적인 제국주의 국가의 프롤레타리아트로 하여금 최초로 권력을 잡지 않을 수 없게 했다. 이전에 우리는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더욱 어렵지만, 우리가 우리의 후진성을 극복하기 훨씬 전에 권력을 장악하여 우리를 앞서갈 뿐만 아니라 세계 최고의 기술과 노동의 국제적 분할에 기초한 진정한 사회주의 건설의 지점을 향하여 우리를 이끌기 위하여 우리와 함께 나아갈 선진국의 프롤레타리아트와 비교해서, "가장 약한 고리"의 노동계급은 사회주의를 향한 진보에서 가장 커다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될 것인데, 이것은 정확하게 바로 위와같은 이유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10월 혁명을 감행했을 때 우리의 사상이었다. 당은 이 사상을 수십번 아니 수천번 언론 매체에서, 모임들에서 정식화했으나, 1925년 이후에는 단지 반대의 사상으로 대체하기 위한 시도들이 있어왔다. 이제 우리는 구 짜르 러시아가 "가장 약한 고리"였다는 사실이 짜르 러시아의 모든 허약함을 물려받은 소련의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더도 덜도 없이 "사회주의의 완전한 건설"을 위한 자기 자신의 민족국가적 선행조건들을 보유할 수 있는 이루헤아릴 수 없는 이점을 부여한다는 것을 배운다. 불운한 영국은 이런 이점을 가지고 있지 않은데, 이것은 필요한 원자재를 공급하고, 자신의 상품을 처분하기 위하여 거의 모든 세상을 필요로 하는 영국의 생산력의 과도한 발전 때문이다. 만약 영국의 생산력이 보다 "적당"하고, 그것들이 산업과 농경에서 상대적인 균형을 유지했다면, 영국 프롤레타리아트는 분명히 자신의 군사력에 의해 외국 개입으로부터 보호 받으면서, 자기 자신의 "고립된" 섬에서 완전한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이다. 4장에서, 강령초안은 자본주의 국가들을 3개의 그룹으로 나눈다. 1. "고도로 선진화된 자본주의 국가들(미국, 독일, 영국, 등)" 2. "중간 수준의 자본주의 발전을 이룬 국가들(1917년 이전의 러시아, 폴란드 등)" 3. "식민지와 반식민지 국가들(중국, 인도, 등)" "1917년 이전의 러시아가 오늘날의 미국보다 오늘날의 중국에 훨씬 가까왔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만약 초안의 다른 부분들과 관련하여 이 부분이 잘못된 결론의 근원으로서 복무한다는 사실만 아니라면, 이 도식적인 분류에 대한 어떠한 진지한 반대도 삼갈 것이다. 초안에는 "중간 수준의" 국가들이 독립적인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충분한 산업적 최소치들"을 보유하고 있다고 선언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높은 자본주의 발전을 이룬 국가들에게는 더욱 더 진실이다. 외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국가들은 오로지 식민지와 반식민지 국가들뿐이다. 이후에 보게 되는 것처럼, 이것이 강령초안의 또 다른 장에서 이들이 성격규정되는 방식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국가의 천연자원, 국가 내부의 산업과 농경 사이의 관계, 세계 경제 체제에서 그 국가의 지위와 같은 다른 조건들을 빼면서, 이러한 기준만을 가지고 사회주의 건설의 문제들에 접근한다면, 우리는 새로운 총체적인 오류와 모순에 빠질 것이다. 우리는 조금 전에 영국에 관하여 말했다. 일고의 의심도 없이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 국가인 영국은 정확하게 이러한 이유 때문에[고도로 발전한 자본주의 때문에] 자기 자신의 섬이라는 한계 내에서 성공적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할 기회를 가지고 있지 않다. 영국은 만약 봉쇄가 된다면 몇 달이 지나지 않아 간단하게 목졸려 죽을 것이다. 분명히, 모든 다른 조건이 같다면, 보다 고도로 발달한 생산력은 사회주의 건설의 목적을 위한 엄청난 이점이다. 고도로 발달한 생산력은 전쟁 동안의 부르주아지 독일에 의해 증명된 것처럼, 봉쇄의 고리에 의해 둘러싸여 있을 때조차도 경제적 삶에 예외적인 유연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민족국가적 기초에서 사회주의의 건설은 이들 선진화된 국가들에게 총체적인 쇠퇴, 생산력의 대규모 감소, 즉, 사회주의의 임무들에 정확하게 반대되는 어떤 것을 의미할 것이다. 한편으로는 낮은 생산력은 일국에서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기초로서 복무하기에 불충분한 반면, 정반대의 이유 때문에 일국에서의 사회주의 건설의 기초는 고도로 발달한 생산력에 부적당한 것으로 증명될 것임에도 불구하고, 강령초안은 현재의 생산력과 민족국가적 경계들 사이의 양립불가능성이라는 근본적인 주제를 망각하고 있는데, 이것으로부터 고도로 발달한 생산력이 일국에서의 사회주의 건설에 대하여 낮은 생산력 보다 결코 작은 장애가 아니라는 것이 이어진다. 불균등발전의 법칙이 정확하게 그것이 가장 필요하고, 가장 중요한 지점에서 망각되고 있다. 사회주의의 건설의 문제는 단지 한 국가의 산업적 "성숙"이나 "미숙"에 의해서 결정되지는 않는다. 이 성숙은 그 자체로 불균등하다. 소련에서는, 산업의 일부 영역은 가장 기초적인 국내적 요구를 만족시키기에도 극단적으로 불충분하며 (특히 기계 건설), 반대로 다른 영역들은 현상태에서는 광범위하고 증가하는 수출 없이는 발전할 수 없다. 농경은 말할 것도 없고, 목재, 석유, 그리고 망간과 같은 가장 중요한 영역들이 후자에 속한다. 반면, 심지어 "불충분한" 영역들조차 만약 (상대적으로) "남아도는" 것들이 수출될 수 없다면, 제대로 발전할 수 없다. 유토피아나 아틀란티스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땅위에 있는 경제라는 구체적인 지리적, 역사적 조건들에서 고립적인 사회주의 사회 건설의 불가능성은 다양한 국가들에게 다른 방식으로, 일부 영역의 불충분한 발전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다른 영역의 "과도한" 발전에 의해서도 역시 결정된다. 전체적으로, 이것은 현대의 생산력이 민족국가적 경계와는 양립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국주의 전쟁은 무엇이었는가? 이것은 소유에 대한 부르주아지적 형식에 대한, 그리고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계들에 대한 생산력의 반란이었다. 제국주의 전쟁은 생산력이 민족국가라는 경계들 속에 견딜 수 없게 속박되어 있다는 사실을 표현했다. 우리는 항상 자본주의는 자기 스스로가 발전시키는 생산력을 통제할 수 없으며, 오직 사회주의만이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계를 넘어서 성장한 생산력을 보다 높은 경제적 실재 속으로 통합시킬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해왔다. 고립된 국가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귀결되는 모든 길은 막혀 있어 왔다...") Minutes, 코민테른 중앙집행위원회 7차 대회간회의, 트로츠키의 연설, 100쪽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의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강령초안은 이중, 삼중, 사중의 실수를 저지른다. 강령초안은 소련에서의 생산력을 과장한다. 강령초안은 산업의 다양한 영역에서의 불균등한 발전의 법칙에 대하여 눈을 감는다. 강령초안은 노동의 국제적 분할을 무시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강령초안은 제국주의 시대에 고유한 가장 중요한 모순인 생산력과 민족국가적 경계 사이의 모순을 망각한다. 단 하나의 분석되지 않은 주장도 남겨두지 않기 위하여 우리에게는 새로운 이론을 지키기 위한 부하린의 또 하나의 명제, 그리고 더욱 일반화된 명제를 상기하는 일이 남아 있다. 부하린은 세계적 차원에서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 사이의 상호관계는 소련에 존재하고 있는 것보다 더 이상 우호적이지 않다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만약 후진성이라는 이유 때문에 소련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세계 경제의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로 현실화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이 주장은 변증법에 관한 모든 교과서에 형식적인 사고의 고전적인 예로서 포함될 만하다. 우선, 세계적 차원에서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 사이의 힘의 상호관계가 소련 내부에서의 상호관계와 굉장히 많이 다르다는 것은 매우 그럴듯하다. 그러나 세계 혁명은 결코 산술적 평균의 방식에 따라서 성취되지 않으며, 민족국가 단위의 혁명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10월 혁명은 노동자와 농민의 상호관계가 전체 러시아의 평균에 조응하는 지역을 선택하지 않고 프롤레타리아트의 페트로그라드에서 우선 발생했고 스스로를 견고히 했던 것이다. 페트로그라드 그리고 나중에 모스크바가 혁명정부와 혁명군대를 수립한 이후에, 이들은 수년에 걸쳐 외곽 지역에 있는 부르주아지를 타도해야만 했다. 그리고 혁명이라고 불리는 이 과정의 결과로서만 오직, 소련의 경계 내부에서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 사이의 현재와 같은 상호관계가 수립되었다. 혁명은 산술적 평균의 방식에 따라서 발생하지 않는다. 혁명이 보다 덜 우호적인 부문에서 시작될 수 있지만, 민족국가적 영역과 세계적 영역 모두의 결정적인 영역들에서 스스로를 견고히 할 때까지는, 자신의 완전한 승리에 관하여 말하는 것은 받아들여질 수 없다. 둘째, "평균적인" 기술 수준이라는 조건에서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 사이의 상호관계는 문제의 해결을 위한 유일한 요소가 아니다.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계급 전쟁이 추가적으로 존재한다. 소련은 노동자와 농민들의 세계로 둘러싸여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세계에 의해서 둘러싸여 있다. 부르주아지가 전세계적으로 타도된다고 해도, 이 사실이 그 자체로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 사이의 상호관계를 여전히 바꾸지 않으며, 소련 내부에서 그리고 전체 세계에서의 평균적인 기술 수준을 변경시키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에서의 사회주의의 건설은 즉각적으로 완전히 다른 가능성들과 다른 비중들을 획득하는데, 이것은 현재의 가능성들과 비중들과는 절대적으로 양립이 불가능하다. 셋째, 부하린에 따르면, 만약 모든 선진국의 생산력이 어느 정도까지 민족국가적 경계를 넘어서 성장했다면, 그래서 모든 국가들의 생산력이 우리 지구의 한계를 넘어서 성장한 것이고, 결과적으로 사회주의가 태양계의 규모로 건설되어야만 한다는 것으로 귀결되어야 한다. 우리는 노동자와 농민의 평균적인 비율로부터 나오는 부하린의 주장이 모든 정치 입문서에 포함되어야만 한다고 반복했다. 이제는 당연히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의 이론을 방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도식적인 궤변과 맑스주의적 변증법 사이의 완전한 양립불가능성의 증거로서 포함되어야 한다. 9. 문제는 세계 혁명의 장에서만 오직 해결될 수 있다 새로운 이론은 개입만 없다면 사회주의가 민족국가적 기초에서 건설될 수 있다고 선포한다. 이것으로부터 개입을 피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는 외국 부르주아지를 향한 화해정책이 나올 수 있으며, 나올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이것이 사회주의 건설을 보장할 것이며, 즉 주요한 역사적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코민테른에 있는 당들의 임무는 보조적인 성격을 띠게 되며, 그들의 임무는 개입으로부터 소련을 방어하는 것이지 권력의 장악을 위한 투쟁이 아니게 된다. 물론 이것은 주체적인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사고의 객관적인 논리의 문제이다. "관점에서의 차이는 당이 이들 [내부적] 모순들과 가능한 대립들이 우리 혁명의 내부적 힘에 기초하여 완전히 극복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반면, 트로츠키 동지와 반대파는 이들 모순들과 대립들이 '오직 국제적 규모에서, 전세계적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장에서만' 극복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에 있다"고 스탈린은 말한다.) 프라우다 262호, 1926년 11월 12일 그렇다. 이것이 정확하게 그 차이이다. 사람들은 민족주의적 개량주의와 혁명적 국제주의 사이의 차이를 더 잘 그리고 더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근본적으로 세계적 모순의 반영인 우리의 내부적 어려움들, 장애물들, 그리고 모순들이 "전세계적인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장"으로 진입하는 것 없이, "우리 혁명의 내부적 힘"에 의해 단순히 해결될 수 있다면, 인터내셔널은 그것의 대회가 4년마다, 10년에 한번, 혹은 아마도 전혀 열리지 않아도 될 부분적으로는 보조적이고, 부분적으로는 장식용 기구가 될 것이다. 비록 우리가 다른 국가들의 프롤레타리아트가 군사적 개입으로부터 우리의 건설을 보호해야만 한다고 추가한다고 해도, 이 도식에 따르면 인터내셔널은 평화주의적 기구의 역할을 해야만 한다. 세계 혁명의 기구의 역할인 인터내셔널의 주요한 역할은 불가피하게 뒤로 밀려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반복하건대, 이것은 어떤 사람의 계획적인 의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반대로, 강령 속에 있는 다수의 요지들이 강령 저자들의 의도를 가장 잘 입증한다), 최악의 주관적인 의도 보다 1000배나 더 위험스러운 새로운 이론적 입장의 내부적 논리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사실상, 코민테른 중앙집행위원회 7차 대회간 회의에서조차, 스탈린은 아래의 사상을 발전시키고 방어할 만큼 과감했다. "우리 당은 노동계급을 우롱할[!] 권리가 없다. 우리 당은 우리나라에서 사회주의 건설의 불가능성에 있어서의 확신[!]의 부족이 권력의 포기와 지배 정당으로서의 우리 당의 입장으로부터 야당의 입장으로 우리 당을 넘겨주는 것으로 귀결된다고 공공연하게 선언해야 한다." ) 저작집 2권 10쪽 이것은 우리가 민족국가적 경제의 불충분한 자원들에 대하여 확신할 권리만 있지, 국제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무진장한 자원에 대해서는 감히 어떠한 확신을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우리가 국제 혁명이 없는 가운데 진행해나간다면, 권력을 포기하고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의 이해에 따라서 정복했던 10월의 권력을 포기하는 것이다. 여기에 만약 우리가 핵심에서 잘못된 정식화로부터 나아간다면 도달하게 될 말하자면, 이론적 붕괴가 있다! 강령 초안은 소련의 경제적 성공들이 전세계적인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분리될 수 없는 한 부분을 구성한다고 말하면서 논쟁의 여지가 없는 사상을 표현한다. 그러나 새로운 이론의 정치적 위험성은 세계 사회주의의 두 가지 목적성취를 위한 방편들, 즉 우리의 경제적 성취들이라는 방편과 전세계적인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라는 방편에 대한 잘못된 상대적 평가 속에 있다.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승리 없이, 우리는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없을 것이다. 유럽 노동자들과 전세계 노동자들은 이것을 분명하게 이해해야만 한다. 경제 건설이라는 방책은 엄청나게 중요한 것이다. 올바른 지도부가 없다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약화될 것이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붕괴는 국제 혁명에 타격을 입힐 것이며, 이 타격으로부터 국제혁명은 여러 해 동안 회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 세계와 자본주의 세계 사이의 중요한 역사적 투쟁의 결론은 두 번째 방책, 즉 세계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에 달려있다. 소련의 거대한 중요성은 소련이 세계 혁명의 기초라는 것에 있지, 소련이 세계 혁명과는 독립적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는 가정에 있는 것이 전혀 아니다. 부하린은 최고로 거만한 어조로 우리에게 두 번 이상 완전히 근거도 없는 아래와 같은 질문을 했다. "만약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작업에서 선행조건들, 출발점들, 충분한 기초, 그리고 심지어 일정한 성공들이 존재한다면, 그것을 넘어설 때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어버릴' 한계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런 한계는 없다.") Minutes, 코민테른 중앙집행위원회 7차 대회간회의, 116쪽 이것은 역사적 변증법이 아니라 저열한 기하학이다. 그러한 "한계"는 있을 수 있다. 국제적인 한계뿐만 아니라 내부적인 한계, 경제적 한계뿐만 아니라 정치적 한계 등 몇 가지 그러한 한계들이 있다. 가장 중요하고, 가장 비참한 "한계"는 세계 자본주의의 중대하고 오랜 기간 동안의 안정화와 새로운 호황인 것으로 판명될 수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문제는 정치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세계의 무대로 이동한다. 부르주아지가 자본주의 성장과 권력이라는 새로운 시대를 스스로 확보할 것인가? 자본주의가 그 자신이 그 속에 있음을 발견하게 될 "절망적인 형세"를 기대하면서, 단순히 그러한 가능성을 부인하는 것은 단지 혁명적 군말일 뿐이다. "절대적으로 절망적인 정세는 없다"(레닌). 유럽 국가들에서 현재의 불안정한 계급적 균형은 정확히 그것의 불안정성 때문에 무한정 계속될 수 없다. 스탈린과 부하린은 현재의 노동대중의 호의가 우리를 개입으로부터 보호해주기 때문에, 소련이 다른 나라들의 프롤레타리아트의 "국가"적 도움, 즉 다른 나라들의 프롤레타리아트의 부르주아지에 대한 승리 없이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할 때, 그들은 그들의 원칙적인 실수의 전체 지류들에서 드러나는는 것과 똑같은 무지를 드러낸다. 사회민주주의가 부르주아지에 반대하는 유럽 프롤레타리아트의 전후 봉기들을 방해했던 이후, 노동대중의 적극적인 호의가 소비에트 공화국을 구해주었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명백하다. 이 동안에, 유럽의 부르주아지는 노동자 국가에 대한 대규모 전쟁을 수행할 수 없다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이러한 세력들의 상호관계가 여러해 동안 계속될 것이라고, 즉 소련에서 사회주의가 건설될 때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발전의 전체 곡선을 그것을 이루는 한 작은 조각으로 판단하려고 하는 것과 같이 완전히 근시안적인 것이다. 너무도 불안정하여 부르주아지는 자기 집의 주인이라는 것을 충분히 느끼지 못하는 반면, 프롤레타리아트는 권력을 장악할 수가 없는 정세는 한가지 혹은 다른 방식으로, 즉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 우호적인 방식이거나 아니면 인민대중의 등짝 위에서, 식민지 인민들의 뼈 위에서, 그리고 아마도 자기 자신의 뼈 위에서 이루어지는 중대하고 오랜 기간 동안의 자본주의의 안정화에 우호적인 방식으로 갑작스레 해결될 것임에 틀림없다. "절대적으로 절망적인 정세는 없다!" 유럽의 부르주아지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패배와 혁명적 지도부의 실책들을 통해서만 오직 자신의 중대한 모순들로부터 벗어나는 영속하는 길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역도 마찬가지로 진실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혁명의 길에서 현재의 불안정한 균형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발견할 수 있게 되는 경우에만 오직 (물론, 위대한 격변의 새로운 시대라는 전망과 함께) 세계 자본주의의 새로운 호황은 없을 것이다. "이제는 혁명적 정당들이 충분히 의식적이고 조직되어 있으며, 피착취 대중들과의 충분한 접촉을 가지고 있으며, 성공적이고 승리적인 혁명을 위하여 위기를 활용할 수 있는 결단력과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혁명적 정당들의 실천활동으로 '증명할' 필요가 있다.") 저작집 17권 264쪽 고 레닌은 1920년 7월 19일 2차 세계 대회에서 말했다. 그러나 유럽과 세계의 투쟁 추세에 직접적으로 달려 있는 우리의 내부적 모순들은 맑스주의적 예지에 기초한 올바른 정책으로 합리적으로 규제되고 완화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들 모순들은 계급 모순들이 극복될 때에만 오직 최종적으로 극복될 수 있으며, 이것은 유럽에서의 혁명의 승리가 없이는 불을 보듯 뻔하다. 스탈린이 옳다. 차이는 정확하게 이 지점에 있으며 이것이 민족주의적 개량주의와 혁명적 국제주의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이다. 10. 사회애국주의적 대실수의 연속으로서의 일국에서의 사회주의 이론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의 이론은 극복되어야만 하는 어려움에 대한 과소평가와 획득된 성취들에 대한 과장으로 귀결된다. 사람들은 "소련에서 사회주의가 이미 90% 현실화되었다"라는 취지의 스탈린의 선언보다 더 반사회주의적이고 반혁명적인 주장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선언은 특히 독선적인 관료들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하여 사람들은 노동 대중들의 관점에서는 사회주의 사회라는 사상을 절망적으로 불신할 수 있다. 소비에트 프롤레타리아트가 성취한 성공들이 획득되어 온 조건들과 소비에트 프롤레타리아트가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낮은 문화적 수준을 감안할 때, 소비에트 프롤레타리아트는 웅대한 성공을 성취했다. 그러나 이들 성취들은 사회주의의 이상의 규모에서는 극히 미량을 이루고 있다. 혁명 11년째 되는 해에 가난, 비참함, 실업, 빵을 위해 늘어선 줄들, 문맹, 집없는 아이들, 알콜중독, 그리고 성매매가 그들 주변에서 줄어들지 않았음을 알고 있는 노동자, 농경 노동자, 빈농들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달콤한 거짓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가혹한 진실이 필요하다. 사회주의가 90% 현실화되었다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의 경제적 수준, 우리의 사회적, 그리고 문화적 상황들이 사회주의에 보다는 자본주의에, 그리고 후진적이고 비문명화된 자본주의에 훨씬 더 가깝다고 말해야만 한다.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는 오직 최선진국들의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장악했을 때에야만 비로소 진정한 사회주의 건설의 길에 들어서게 될 것이라고 말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것을 위하여 우리의 내부적인 경제적 노력들이라는 짧은 방책과 국제 프롤레타리아트 투쟁이라는 긴 방책 두 가지 모두를 사용하면서 끊임없이 활동해야할 필요가 있다. 간단히 말해서, 90%가 이미 성취되었다는 사회주의에 관한 스탈린주의적 문구들 대신에, 우리는 그들에게 레닌의 아래의 문구들을 말해야만 한다. "만약 우리가 모든 비관주의와 미사여구를 떨쳐버린다면, 만약 우리가 이를 악물고 우리의 모든 힘을 모으고 모든 신경과 근육을 꽉 죈다면, 만약 우리가 구원은 우리가 진입했던 국제 사회주의 혁명의 길과 함께 할 때에만 오직 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빈곤의 땅) 러시아는 그러한 땅 (풍요의 땅)이 될 것이다.") 저작집 15권 165쪽 코민테른의 최고 지도자로부터 우리는 당연히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의 이론은 근거가 없다는 주장과, 힘든 조건에서 애를 쓰고 있는 러시아 노동자들에게 전망을 제공하며 용기를 주는 그런 주장을 들었다. 강령 속에서 자신들의 계급 방침을 위한 과학적 기초가 아니라 정신적인 위안을 추구하는 자들의 이론적 붕괴의 깊이를 측정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사실들에 모순되는 위안을 주는 이론들은 과학이 아니라 종교의 영역에 적합하다. 그리고 인민에게 종교는 아편이다. 우리 당은 일국에서의 사회주의가 아니라 국제 혁명을 향한 강령을 가졌던 영웅적 시기를 거쳐왔다. 후진적인 러시아 혼자서, 러시아의 힘만으로는 사회주의를 건설하지 못할 것이라는 강령적 기치하에, 청년공산주의동맹은 내전, 기아, 추위, 힘든 주말노동, 전염병, 부족한 배급에 대한 배려들, 그리고 모든 전진의 발걸음을 위해 바쳐졌던 수많은 희생들을 거쳐왔다. 당과 공산주의청년동맹의 조직원들은 전선에서 투쟁했거나 기차 역에 침목용 나무를 날랐는데, 이것은 그들이 이들 침목들로부터 민족국가적 사회주의를 건설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라 소비에트라는 요새를 지켜내는 것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만들었던 국제혁명의 대의에 복무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하나 하나의 모든 침목이 소비에트 요새를 위해 중요하다. 이것이 우리가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 사용했던 방식이다. 시대가 변했고 세상이 바뀌었지만 (그렇게 철저하게는 아니지만), 원칙적인 접근은 현재에조차 완전한 위력을 가지고 있다. 노동자, 빈농과 유격병, 그리고 청년 공산주의자는 새로운 복음이 처음으로 선포되었을 때인 1925년까지의 그들의 모든 실천으로 그들은 새로운 복음이 필요 없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높은 곳에서 대중들을 내려다보는 관리들, 방해받고 싶어하지 않는 소행정가, 모든 것을 구원하고 위안하는 정식이라는 덮개 아래에서 지배하고자 하는 기관 종사자들이 새로운 복음을 필요로 했다. 무지한 인민들은 "좋은 소식"을 필요로 하며, 위안을 주는 이론들 없이는 인민들을 다룰 수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그들이다. "90% 사회주의"에 관한 잘못된 문구들을 들어올리는 자들이 그들인데, 이것은 이 정식이 그들의 특권화된 지위, 지배하고 명령할 수 있는 권리, "회의적"인 자들과 "신념이 부족한"자들 쪽에서의 비판을 제거하기 위한 그들의 필요성을 허용해주기 때문이다. 일국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할 가능성에 대한 부정이 기를 꺾고 열정을 죽인다는 취지의 불평과 비난들은 비록 완전히 다른 조건에서 기원함에도 불구하고, 이론적으로 그리고 심리학적으로 개량주의자들이 항상 혁명주의자들에게 퍼부어 온 비난들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개량주의자들은 "당신들은 그들이 자본주의 사회의 틀 내에서 자신들의 몫을 진실로 개선할 수 없다고 노동자들에게 말하고 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당신들은 노동자들의 투쟁하고자 하는 동기를 죽인다."고 개량주의자들은 말한다. [그러나] 참으로 노동자들이 진정으로 경제적 성취들을 위하여, 의회적 개혁을 위하여 투쟁했던 것은 혁명주의자들의 지도하에서 였을 뿐이다. 세계 자본주의라는 지옥 속에 있는 오아시스와 같은 사회주의적 파라다이스를 건설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이해하는 노동자, 그리고 소비에트 공화국의 운명과 그래서 그 자신의 운명이 국제 혁명에 전적으로 달려 있음을 이해하는 노동자는 우리가 이미 보유하고 있는 것이 90% 정도의 사회주의라는 것을 듣는 노동자 보다 훨씬 더 정력적으로 소련에 대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사회주의를 향하여 투쟁할 가치가 있는가? 여기서도 역시 개량주의적 방책이 언제나 처럼 혁명을 위해서가 아니라 개량을 위해서 작동한다. 이미 인용되었던 유럽합중국 슬로건을 다루고 있는 1915년에 쓰여진 글에서, 우리는 아래와 같이 썼다. "민족국가적 경계 내부에서 사회혁명의 전망에 접근하는 것은 사회애국주의의 본질을 이루고 있는 똑같은 민족주의적 편협함에 희생되는 것이다. 베이앙[Vaillant]은 그의 말년까지 프랑스를 사회혁명의 약속된 땅으로 생각했는데, 이것은 정확하게 그가 끝까지 민족국가에 대한 방어를 지지했던 이런 관점으로부터 였다. 렌쉬[Lensch]와 그 도당은 (일부는 위선적으로, 그리고 다른 자들은 진지하게) 독일의 패배가 무엇보다도 사회혁명의 기초의 파괴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사회애국주의에는 가장 천박한 개량주의와 나란하게, 자신들의 산업적 수준 때문이건 혹은 '민주주의적' 형식과 혁명적 성취들 때문이건, 자기 자신의 민족국가가 사회주의를 향하여 혹은 '민주주의'를 향하여 인류를 이끄는 것이 요구된다고 생각하는 민족주의적인 혁명적 메시아주의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만약 하나의 보다 발전된 국가의 경계 내에서의 혁명의 승리를 실제로 생각할 수 있다면, 민족국가에 대한 방어의 강령과 함께 이 메시아주의는 일정정도 상대적인 역사적 정당성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이것은 생각할 수 없다.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 결합을 침해하는 방식으로 혁명의 민족국가적 기초를 보존하기 위하여 투쟁하는 것은 실제로 혁명 그 자체를 침식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민족국가적 기초에서 시작될 수는 있지만, 일찍이 현재의 전쟁 동안만큼 강제적으로 폭로된 적이 결코 없었던 유럽 국가들의 현재의 경제적, 군사적, 그리고 정치적 상호의존성 하에서 민족국가적 기초에서는 완수될 수 없다. 직접적으로 그리고 즉각적으로 혁명에서 유럽 프롤레타리아트 쪽에서의 공동 실천을 필요로 할 이 상호의존성은 유럽합중국 슬로건으로 표현될 수 있다.") 저작집 3권 1부 90? 쪽 1915년 논쟁에 대한 잘못된 해석으로부터 나아가면서, 스탈린은 내가 레닌을 "민족주의적 편협함" 하에 있다고 넌지시 비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여러 번 애썼다. 레닌과 나의 논쟁에서, 나는 항상 공개적으로 논쟁을 했는데, 이것은 내가 오직 이데올로기적 고려에만 따랐기 때문이었다. 레닌은 위의 경우에 전혀 관련되어 있지 않았다. 그 글은 그것이 비난을 가하는 자들의 이름 즉, 베이앙, 렌쉬 등을 언급한다. 1915년이라는 해는 사회애국주의적 법석의 해였고 그것에 맞서는 우리의 투쟁이 그것과 충돌하던 해였다는 것을 상기해야만 한다. 이것이 모든 문제를 위한 우리의 시금석이었다. 전술되었던 문단에서 제기되는 근본적인 문제는 의심의 여지없이 올바르게 정식화되었다. 즉, 일국에서 사회주의의 건설의 개념은 사회애국주의 개념이다.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애국주의는 제2 인터내셔널에서 가장 강력한 당인 그들 자신의 당에 대한 본격적인 애국심으로서 시작되었다. 고도로 발달한 독일의 공업기술과 독일 인민들의 우월한 조직적 특성에 기초하여, 독일 사회민주주의는 자기 "자신의"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을 준비했다. 만약 강력해진 관료들, 출세주의자들, 의회적 사기꾼들, 그리고 일반적으로 정치적 도둑놈들을 제쳐둔다면, 사회민주당 평당원의 사회애국주의는 정확하게 독일 사회주의 건설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나온다. 수십만 명의 사회민주당 평당원들(수백만의 평조합원 노동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이 호엔졸레른가나 혹은 부르주아지를 방어하고자 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니다. 그들은 사회주의를 위한 "필요하고 충분한" 민족국가적 선행조건들로서의 독일 산업, 독일 철도와 고속도로, 독일의 공업기술과 문화, 특히 독일 노동계급의 조직들을 보호하고자 했다. 비슷한 과정이 프랑스에서도 역시 벌어졌다. 게드[Guesde], 베이앙, 그리고 그들과 함께 수천 명의 평당원들, 그리고 수십만 명의 평범한 노동자들은 혁명적 전통과 영웅적인 프롤레타리아트, 고도로 문명화되고, 유연하며 능력을 갖춘 인민들을 보유하고 있는 프랑스가 정확하게 사회주의의 약속된 땅이라고 믿었다. 고참 게드와 파리코뮨의 베이앙, 그리고 그들과 함께 수십만 명의 진지한 노동자들은 은행가들과 대부업자들을 방어하기 위해 투쟁하지 않았다. 그들은 진지하게 자신들이 미래 사회주의 사회의 땅과 창조적 힘을 방어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완전히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의 이론으로부터 나아갔으며, 이 사상의 이름으로 그들은 그 희생이 "일시적"인 것이 라고 믿으면서 국제적 연대를 희생시켰다. 물론 사회애국주의자들과의 이러한 비교에 대하여 소비에트 국가에 대한 애국주의는 혁명적 임무인 반면 부르주아 국가에 대한 방어주의는 배신이라는 주장이 답으로 돌아올 것이다. 사실이다. 성숙한 혁명가들 사이에 이 문제에 대한 논쟁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말하게 될 것처럼, 이 논쟁의 여지가 없는 가정이 교묘한 거짓말을 위한 형식적인 차단막으로 점점 더 변모한다. 혁명적 애국주의는 계급적 성격만을 가질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은 당 조직에 대한 충성심, 노동조합에 대한 충성심으로서 시작되어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장악하게 되면 국가에 대한 충성심으로 상승한다. 권력이 노동자들의 수중에 있는 때는 언제나, 애국주의는 혁명적 임무이다. 그러나 이 애국주의는 혁명적 국제주의의 분리될 수 없는 한 부분이어야만 한다. 맑스주의는 항상 노동자들에게 심지어 임금인상과 노동시간 단축 투쟁조차도 만약 국제적 투쟁으로서 수행되지 않는다면 성공적일 수 없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현재 느닷없이 사회주의 사회가 민족국가적 힘만으로도 성취될 수 있다고 하는 이상이 등장한다. 이것은 인터내셔널에 대한 치명적인 타격이다. 근본적인 계급적 목적은 민족국가적 수단을 가지고서는 혹은 민족국가적 경계 내에서는 현실화될 수 없으며, 부분적 목적들을 위해서는 더욱 더 그렇다는 것에 대한 꺾을 수 없는 확신이 혁명적 국제주의의 심장을 이룬다. 그러나 만약 궁극적인 목적이 민족국가단위의 프롤레타리아트의 노력을 통하여 민족국가적 경계 내부에서 현실화된다면, 국제주의의 중추가 깨어지는 것일 것이다. 일국에서 사회주의의 현실화 가능성의 이론은 승리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애국주의와 부르주아지 국가들의 프롤레타리아트의 패배주의 사이의 내부적 연결을 파괴한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여전히 권력을 향한 길에 있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어떻게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권력을 향해 나아갈 것인가는 전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가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임무를 민족국가적 임무로 여기는가 아니면 국제적 임무로 여기는가에 달려있다. 만약 일국에서 사회주의를 현실화는 것이 조금이라도 가능하다면, 사람들은 권력장악 이후뿐만 아니라 권력장악 이전에도 이 이론을 믿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사회주의가 후진적인 러시아라는 민족국가적 경계 내부에서 현실화될 수 있다면, 무엇보다도 사회주의가 선진화된 독일에서 현실화될 수 있다는 것을 믿을 만한 근거가 있을 것이다. 내일 독일 공산당 지도자들은 이 이론을 제출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강령 초안이 그들이 그렇게 할 권한을 부여할 것이다. 다음 날에는 프랑스 당의 차례가 될 것이다. 이것이 코민테른의 사회애국주의 노선에 따른 분열의 시작이 될 것이다. 특정 국가가 "완전한 사회주의 사회"의 독립적인 건설을 위한 "필요하고 충분한" 선행조건들을 갖추고 있다는 사상으로 고취될 어떠한 자본주의 국가의 공산당도,역시 노스케에서 시작하지는 않았으나, 1914년 8월 4일에 결정적으로 바로 이 똑같은 문제에 관하여 실책을 저질렀던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와 본질적인 어떠한 측면에서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노동자 공화국과 관련하여 애국주의는 혁명적 임무이기 때문에, 소련의 존재 자체가 사회애국주의에 맞서는 보증이라고 선언될 때, 올바른 사상의 이러한 일면적인 적용에는 민족주의적 편협함이 표현되어 있다. 세계 전체의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하여는 눈을 감은 채, 그렇게 말하는 자들은 오직 소련만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이 중심적인 문제에 관하여 강령 속에 있는 국제주의적 방침에 의해서만 오직, 그리고 아직까지는 가려져 있지만, 레닌의 인터내셔널의 강령 속에 스스로 이론적 둥지를 틀려고 하는 사회애국주의에 대한 가차없는 거부를 통해서만 오직 부르주아지 국가와 관련하여 패배주의의 입장으로 프롤레타리아트를 지도하는 것이 가능하다. 맑스와 레닌의 길로 복귀하는 것이 아직 너무 늦은 것은 아니다. 이러한 복귀는 진보를 향한 유일하게 생각할 수 있는 길을 열어제치는 것이다. 우리는 구원이 존재하는 이러한 복귀의 현실화를 가능하게 만들기 위하여 코민테른 6차 대회에 강령초안에 대한 이 비판을 제출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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