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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의 스탈린 유파에 대한 재고찰_4부 인민전선[국제공산주의동맹 팜플렛]

가디언에 대한 응답

왜곡의 스탈린 유파에 대한 재고찰

 

국제공산주의동맹[http://www.icl-fi.org의 팜플렛]

[  ]속의 내용은 해석자의 첨가

 

전체 내용 및 앞으로 계속될 내용

 

1부 영구혁명

2부 일국에서의 사회주의

3부 "제 3기"

4부 인민전선

5부 제4 인터내셔널을 위한 투쟁

6부 3차 중국혁명

7부 모택동의 중국: 스탈린으로부터 닉슨까지

8부 트로츠키주의 대 SWP 수정주의

 

 

4부 인민전선

 

 

“인민전선”으로의 전환은 스탈린화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이 자신의 초좌익적 “제 3기” 정책들로부터의 재빠른 선회를 이루었던 1933년 말이 가까워져서 나타났다. 히틀러의 승리와 재개된 제국주의 공격의 위협과 함께, 소비에트 조국의 방어를 위한 동맹들과의 줄짓기를 시작하였다. 러시아는 국가연합에 가입했고, 불러 군사원조 조약을 체결했다. 이 기간 동안 줄곧 코민테른은 유럽에서의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 운동들에 대한 억제를 통하여 민주주의적 제국주의 열강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노력했다. 그 방법은 부르주아지 계급 정부와의 계급 협조적 동맹들과 그런 정부들에 대한 참여였다. 파시즘에 맞서는 투쟁이 그 구실이었다.

 

인민전선은 1935년 8월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7차 대회에 대한 조지 디미트로프[Georgi Dimitrov]의 보고에서 이론적 표현을 찾았다. 디미트로프에 따르면, 현재 노동자들을 위협하는 주요한 위험은 파시즘이었다. 그러나 파시즘은 노동계급을 위협했을 뿐만 아니라, 농민들, 전체적인 소부르주아지 계급, 그리고 심지어 부르주아지 계급의 일부들도 위협했다. 그 결과,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와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은 현재의 시기 동안에는 실천해야 할 의무로부터 제거된다.

 

“다수의 자본가 국가들에 있는 노동 대중들은 현재 분명한 선택을 해야 할 필요성에 직면해 있고, 오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와 부르주아지 민주주의 사이에서가 아니라 부르주아지 민주주의와 파시즘 사이에서 그것을 할 필요성에 직면해 있다.”

 

부르주아지 민주주의를 방어하기 위하여, 프롤레타리아트는 광대한 “인민의 전선” 속에서 부르주아지 계급의 “반(反)파시스트” 부위들을 포함하여 파시즘에 의하여 위협받는 다른 모든 사회 그룹들과 동맹을 맺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만 한다.

 

“특정 조건들 하에서는, 우리는 이들 정당들과 조직들, 혹은 그들의 특정 부위들을, 그들의 부르주아지 지도부에도 불구하고, 반파시스트 인민의 전선의 편으로 끌어당기는 임무에 우리의 노력을 기울일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 예를 들면, 급진당을 가진 프랑스의 현 정세가 그렇다....”

-G. 디미트로프, “7차 코민테른 대회 보고”, 1935년

 

제 3기 동안, 공산주의자들은 히틀러에 맞서는 공동전선에서 독일 사회민주당과 연합하는 것을 그들을 “사회-파시스트들”이라고 칭하면서 거부했다. 이제 공산주의자들은 사회민주당과 진행하는 동맹들을 기꺼이 맺고자 할 뿐만 아니라, 기꺼이 부르주아지 계급의 반파시스트 부위들과 함께 정부를 형성하고자 하기도 한다! 계속해서, 이탈리아에서는 1930년대 후반 동안에 이 “광범위한 동맹”이 “정직한” 파시스트들에 대한 호소들을 포함하는 훨씬 더 광범위한 것이었다!

 

부르주아지 민주주의에 대한 방어라는 공동강령의 기초에 입각한 다양한 계급들을 대표하는 조직들과 정당들의 연합인 인민전선은 계급 협조라는 이론들과 실천들의 표현에 불과하다. 비록 이름은 새로운 것이었으나, 내용은 그렇지 않았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1920년대 내내 (중도당의 형식으로) 민주주의적 부르주아지 계급과 함께하는 “좌익 연합” 연립정부들을 형성했다. 공산주의자들은 가끔씩 혁명적인 척했던 반면, 사회민주당은 자신들의 개량주의에 대하여 보다 공개적이었다는 점이 유일한 차이였다.

 

스탈린주의자들은 인민전선이 단순히 공동전선의 보다 높은 수준으로의 논리적 연장이라고 주장하려고 시도한다. “노동계급 공동전선”은 “계급 대 계급”이라는 기치 하에서 형성되며, 사회민주당의 끊이지 않는 “민주주의적” 부르주아지 계급과의 계급 협조주의적 동맹들로부터 그들을 분리하기 위하여 정확하게 제기되었다.

 

“공동전선이라는 전술은 부르주아지 계급에 맞서 노동계급의 기초적이고 지극히 중요한 이해관계에 대한 방어를 위한 공산주의자들과 다른 정당들이나 그룹들에 속하건 혹은 어떤 정당에도 속하지 않건 다른 모든 노동자들의 통일된 투쟁에 대한 호소이다.”

-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집행위원회(ECCI), "공동전선에 대한 테제들“, 1922년

 

공동전선은 다양한 노동자 조직들의 세력들을 실천으로 합류시키는 것과 또한 자신들의 기초로부터의 압력에 의해서 그렇게 하도록 강제될 때에만 노동계급의 이해관계를 위한 투쟁에 합류할 것이고, 가능한 가장 빠른 순간에 탈주하게 될 개량주의자들을 폭로하는 것 모두에 복무했다. 볼셰비키 당 혼자만이 노동계급의 진정한 역사적 이해관계를 대변했기 때문에, 개량주의자들과의 공동의 강령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핵심적인데, 그것은 이것이 레닌주의 강령에 대한 포기를 의미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전선에 대하여 다른 정당들을 비판할 권리에 대한 어떠한 제한도 또한 있을 수 가 없었다. 그러므로 트로츠키가 말 했듯이, 공동전선의 2번째 주요한 구호는 “비판의 자유, 행동의 통일” 혹은 “행진은 따로, 파업은 함께”이다.

 

하지만, 인민전선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 정당들이 자신들의 계급적 독립성을 포기하고, 자신들의 노동계급 강령을 포기한다. 얼 브로우더[Earl Browder]는 1936년 12월 4일 그의 CPUSA 중앙위원회 보고에서 간결하게 이것을 요약했다.

 

“우리는 우리가 그들이 우리의 사회주의적 강령에 동의할 것을 그들에게 요구한다는 조건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 또한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그들의 강령의 기초에서 그들과 단결한다는 조건에서 (“인민”의 다수인) 그들을 조직하고 일깨울 수 있다.”(!)

 

인민전선은 “2단계 혁명”이라는 멘셰비키의 이론에 적합했다. 첫째, 부르주아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 그러고 나서 자본주의의 타도를 위한 투쟁. 스탈린주의자들은 기본적인 사회적 갈등이 부르주아지 민주주의와 파시즘 사이에 존재한다는 절대적으로 잘못된 개념으로부터 나아갔다. 파시즘은 심각한 경제적 쇠퇴의 시대에 부르주아지 지배의 필연적 결과로서 1차 세계대전에 뒤이어 유럽에서 나타났다. 파시즘은 정상적인 의회적 방책들을 통하여 자신들의 체제를 보존하는 것이 더 이상은 가능하지 않을 때에 그것을 보존하기 위한 자본가들의 마지막 수단이다. 스탈린주의자들은 한 때 파시즘이 실제로는 자본주의가 아니라 봉건주의에 그것의 뿌리를 둔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신들의 2단계 도식을 정당화하려고 시도하기까지 했다!

 

사실, 인민전선은 간단히 파시즘으로 귀결되었던 조건들에 대한 또 다른 부르주아지적 해법이었다. 기존의 어떠한 부르주아지 의회적 조합으로도 다루기 힘든 노동자들과 농민들 대중을 효과적으로 지배할 수 없는 조건들 하에서 공산당들과 사회민주당들이 자본가 정부에 참여하도록 초대를 받는다. 연합의 대가는 자신들이 참여하는 정부들에 의한 파업 파괴와 그와 비슷한 방책들에 대한 공산당의 지지이다.

 

1930년대 동안에 인민전선 정부들은 프랑스와 스페인의 준혁명적 시기들 동안에 실현되었다. 거기서 “민주주의적” 부르주아지 계급과의 연합은 총파업들과 심지어 봉기들을 부르주아지 민주주의를 방어한다는 가망 없는 길로 전환시킴으로써 강력한 대중적 고조를 가로막을 수 있었다. 베트남과 같은 식민지 나라들에서는, 인민전전 정책들이 독립을 위한 요구를 내려놓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파시스트들을 분쇄하기 위한 노동계급 공동전선을 스탈린주의자들의 계급협조에 대치시켰다. 공화주의 장군들과 경찰에 의지하는 대신, 그들은 노동조합들에 기초한 노동자 민병대들의 형성을 주장했다. 수적인 열세와 코민테른에 의한 사악한 중상비방 캠페인이라는 조건에서,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노동자 운동에 대한 개량주의적 억누름을 분쇄할 충분한 영향력을 획득할 수 없었다. 유력한 혁명적 정세들의 치욕스러운 패배에 의하여 볼셰비키-레닌주의자들의 입장들은 몇 번이고 올바른 것으로 증명되었지만, 부정적인 방식으로였다. 스탈린은 패배들의 위대한 조직자라는 트로츠키가 그에게 주었던 별명을 확실하게 얻었다.

 

 

1934년-1936년의 프랑스

 

프랑스에서는 파시스트 선동이 다른 어느 “대(大) 민주주의 국가들”에서보다 더 진척이 있었다. 파시스트 동맹들이 이탈리아와 독일의 파시스트 조직들을 공개적으로 모방하여 등장했다. 수 년 동안 파시스트의 위험을 무시하거나 경시한 후, 공산당(PCF)과 사회당(SFIO) 지도자들은 1934년 2월 불십자가단(Cross of Fire)의 의회 공격 후에 갑작스런 공포에 휩싸였다. 평조직원들로부터의 엄청난 압력 하에서, 사회당과 공산당이 주도하던 노동조합 연맹들은 2월 12일에 그 규모 자체가 수개월 동안 파시스트들을 뒤로 물러나도록 하는 것에 효과적으로 기여했던 대규모 공동시위를 개최했다. 파시즘에 대항하는 노동자 공동전선을 위한 트로츠키의 4년 동안의 투쟁이 제 3기라는 종파적-패배주의적인 백치적 행위들에 대하여 그 올바름이 입증되었었다.

 

1934년 6월에, PCF 지도자 모리스 토레즈[Maurice Thorez]는 SFIO와의 공동전선을 제안했다. 그 공동전선은 “행진은 따로, 파업은 함께”라는 레닌주의적 슬로건을 수용했던 것이 아니라, 대신에 “불가침 조약”의 형식을 취했다. 양쪽 정당 모두가 자신들의 강령적 독립성을 포기했고, 각자에 대하여 비판하는 것을 중지했다. 의회적 책략과 선거 연합들로 자신의 행동들을 제한했고, 파시즘에 맞서는 의회외적 투쟁,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위한 전망을 열어젖혔을 수도 있었을 투쟁으로 노동자들을 일깨우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트로츠키는 공동전선을 비판했다.

 

첨예한 사회적 위기, 대중 파업의 물결들, 그리고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한 자발적 의지의 한가운데에서, PCF는 정세가 “혁명적이지 않다”는 것에 기초하여 권력을 위한 투쟁을 거부했다. 대신, PCF는 프롤레타리아트 혼란시키고 파괴하는데 복무했고, 자본가들이 노동계급으로부터 커지는 위협을 느꼈기 때문에 파시즘의 성장을 빠르게 했던 “즉각적인 경제적 요구들”의 강령을 내밀었다. PCF는, 터무니없게도 무장봉기의 즉각적인 사전조건인 “모든 곳에 소비에트들”을 주장하는 것으로 혁명주의의 무화과 잎사귀를 보존하려고 시도하는 한편으로, 국유화를 위한 투쟁을 거부했고, 도발을 유발하는 것이라며 노동자 민병대들을 위한 주장에 반대했으며, 노동자들에 대한 무장을 거부했다.

 

1935년 7월에, 프랑스 스탈린주의자들은 부르주아지 급진사회당을 포함하는 것으로 연합을 확대했다. 도시와 농촌의 소부르주아지 계급에 기초한 급진사회당은 진보적인 사회적 변화들을 주창하였으나, 사적 기업과 사적 소유에 굳건하게 전념했다. 급진당과의 단결을 확보하기 위하여, PCF는 인민전선 강령이 파시즘에 대항하는 공화국에 대한 방어와 불황에 대한 방책들, 그리고 노동개혁들에 제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민전선이 1936년 3월 선거를 휩쓸었다. SFIO는 의회[Chamber of Deputies]에서 지도 정당이 되었고, 그들의 수장 레온 블룸[Leon Blum]은 사회당과 급진사회당의 연합 내각의 수상이 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은 부르주아지 계급을 놀라게 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정부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했지만, 의회에서는 정부를 지지했다.

 

인민전선 정부의 시작에서 자주 발생하는 것처럼, 대중들은 선거들을 노동계급의 승리로 보았고, 5월-6월 총파업에서 절정을 이루었던 엄청난 전투성의 파도를 풀어 제쳤다. 15% 임금인상을 중심으로 한 처음의 요구들이 주로 방어적이었던 반면, 파업들은 거의 전적으로 전투적인 공장점거 전술을 포함했다. 부르주아지 계급은 블룸 정부가 파업을 억제하기 위하여 즉각적으로 취임할 것을 요구하면서 공포에 휩싸였다. 블룸과 CGT의 노동관료들은 몇 가지 성과들을 쥐어주었던 최초의 타결을 협상했으나, 공장들로부터의 즉각적인 철수를 조건으로 하는 것이었다. 협상안은 파리 금속노동자들에 의하여 확고하게 부결되었다.

 

트로츠키가 썼듯이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었다”라는 것을 두려워하던 PCF는 자신의 투사들에게 그 협약을 지지할 것을 명령했다. 토레즈는 “현재로서는 권력을 장악하는 것에 관한 문제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사람들은 파업을 어떻게 끝내는지를 알아야만 한다”라고 선언했다. 사회당-진보당 정부는 트로츠키주의 신문(Lutte Ouvriere)의 파업을 확대할 것을 주장했던 판을 압수하는 것으로 자신의 몫을 했다. 6월 중순이 되어 개량주의자들의 융합된 노력들은 저항을 가라앉히는데 성공했다.

 

블룸 정부가 혁명으로 향하는 것을 멈추기라는 부르주아지 계급에 의하여 부과된 기본적인 임무를 성취했던 1936년 총파업을 파괴하고 있던 때였기 때문에, 이것은 인민전선의 중대한 시점이었다. 주당 40시간과 같은 몇 안 되는 중요한 사회적 개혁들이 곧 뒤집어졌다. 1937년, 집권 1년이 지나고 노동계급의 신뢰를 상실했던 블룸 정부는 상원에 의하여 무너졌다. 1938년 중반에 급진사회당은 에도와드 달라디어[Edouard Daladier] 하의 보수내각을 형성했다. 그해 가을 달라디어의 주당 48시간으로의 복귀 선언이 새로운 대중파업 물결을 야기했다. PCF의 반응은 일일 항의 파업을 위한 호소였다! 달라디어는 계엄법을 선포했고 공장들에 군대를 보냈다. 노동운동은 붕괴했고, 수백만 명의 노동자들이 역겨움에 자신들의 노동조합 카드를 찢었다. 1월이 되자 PCF는 금지되었고 모든 공산당 주도 노동조합들이 UGT 노동연맹으로부터 금지되었다. 1940년 6월에 일부 SFIO 대표들뿐만 아니라 부르주아지 정당들도 비쉬[Vichy] 정권을 창출하는 투표를 했다. 이렇게 해서, 파시즘을 멈추기는커녕, 인민전선은 야만주의로 가는 한 가지 더 “평화로운 길”이라는 것만 증명했다.

 

 

스페인에서의 인민전선, 1936년-1939년

 

스탈린-디미트로프 인민전선 정책들의 결과들은 스페인에서도 마찬가지로 반혁명적이었다. 1931년 왕조의 타도가 부르주아지 공화국의 수립으로 귀결되었지만, 급진/사회당 연합정부의 사회정책들은 1920년대 후반 동안의 (또한 사회당에 의하여 지지를 받았던) 장군 프리모 리베라 군사독재의 그것들보다 더 자유주의적이라고 하기 어려웠다. 1934년 10월에 정부의 우익적 정책들에 대한 반등으로 아스투리아스 광산지역에서 봉기가 발생했다. 유혈 진압에도 불구하고 (수천 명의 광산노동자들이 군대의 기관총 세례를 받았다), 영웅적인 봉기는 스페인 노동계급을 일깨웠고, 공동전선 노동자 위원회들(Alianzas obreras)들의 광범위한 형성으로 귀결되었다.

 

[이에] 응하여, 주요 노동자 정당들의 지도자들은 프랑스에서와 비슷한 사회당(우익과 좌익들), 공산당, 그리고 또한 POUM(맑스주의 통합 노동자당)을 포함하는 인민전선을 형성하는 것으로 움직였다. POUM은 공산당으로부터의 우익적 분리세력 (트로츠키가 “스페인의 국민당”, 즉 두 계급 정당으로 불렀었던 마우린(Maurin)의 “노동자 농민 연합”)과 닌(Nin)에 의하여 지도되던 공산주의 좌익의 통합으로 형성되었었다. 마우린과의 비원칙적 연합의 형성과 인민전선 협정을 조인한 결과, 닌과 트로츠키주의 운동 사이의 유대들은 깨졌다.

 

1936년 1월에 조인되었던 인민전선 협정은 노동계급 정치의 포기의 고전적 문서였다.

 

“공화주의자들은 토지의 국유화와 그것의 농민들에게로의 무상 분배의 원칙을 수용하지 않는다.... 공화주의 정당들은 사회당 대표들에 의하여 주장되었던 은행들의 국유화와 ... (그리고) 노동자 통제를 수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공화/노동자 연합은 1936년 2월 선거들에서 과반을 획득했고, 부르주아지 변호사인 아자나[Azana] 하의 정부를 형성했다. 프랑스에서처럼, 대중들은 이것을 승리로 해석했고, 그 정부가 억제할 수 없었던 토지와 공장 점거들의 물결을 시작했다. 그 결과로, 7월 17일 장군 프랑코와 지도적인 군 장교들의 그룹은 귄위주의적 카톨릭 국가를 위한 선포를 발표하고 반란에 돌입했다. 아자나 정부의 대응은 대중들을 무장시키는 것을 거부하는 한편으로 반란 장성들과 협상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이 타협은 만약 노동자 대중들이 자신들 스스로 일을 추진하려고 하지 않았다면 성공했을 지도 모른다. 무정부주의자들과 POUM의 본거지였던 바르셀로나에서는, 노동자들이 수많은 공장들을 접수했고, 권총들로 군 주둔지들을 공격했다.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 그들은 도시에 대한 완전한 통제력을 장악했다. 이것이 다른 곳에서의 비슷한 반란들을 고무했고, 공화정부는 스스로를 되돌려 대중들을 무장시키고 프랑코에 맞서는 마음이 내키지 않는 투쟁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순간에도 가능했던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 대안이었다. 카탈로니아에서는 운송과 산업이 거의 전적으로 CNT(무정부주의자) 노동자 위원회들의 수중에 있었던 한편, 북동쪽(카탈로니아와 아라곤)의 많은 [지역에서는] 농민조합들과 농업노동자들의 노동조합들이 집산농장을 세웠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비록 부르주아지 구성원들을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완전하게 노동자 조직들에 의하여 지배되었던 카탈로니아 반(反)파시스트 민병대의 중앙위원회였다. 그러나 이것의 꼭대기에는 또 다른 부르주아지 변호사인 컴패니스(Companys)에 의하여 지도되던 카탈로니아 인민전선 정부, “부르주아지 계급의 그림자”가 있었다. 1917년 2월부터 10월까지의 러시아에서처럼, 이중권력의 정세 그러나 위태위태한 부르주아지 정부에 대한 전술적 지지를 여전히 제공하던 노동자들을 가진 [정세]가 있었다.

 

이 정세 속에서, 레닌과 볼셰비키들은 “임시정부를 타도하라,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들로”를 요구했었다! 하지만, 스탈린주의자들로부터 POUM 그리고 심지어 (노동자 정부조차도 반대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던!) 무정부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스페인의 노동자 정당들은 1936년 9월에 부르주아지 정부에 합류했다. 스탈린주의자들은 자신들은 노동자들을 권력으로 이끌고자 하는 어떠한 의도도 없다는 점을 그들의 부르주아지 친구들에게 보장했다. 1936년 8월에 PCF 신문 L'Humanite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스페인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 스페인 인민들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수립을 열망하는 것이 아니라 사적소유를 존중하는 가운데 공화적 질서의 방어라는 하나의 목표만을 알고 있다는 것을 공화국에 알려줄 것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스탈린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의 지지가 보장된 상태에서, 아자나와 컴패니스는 부르주아지 법과 질서의 재수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첫 번째 행보가 노동자 언론에 대한 검열이었다. 카탈로니아 정부는 7월에 등장했었던 혁명 위원회들을 해산하는 포고를 이것 뒤에 추가 했고, 10월 하순에는 후방의 노동자들의 무장해제를 명령했다. 이와 더불어 비록 POUM과 CNT 지도자들이 모든 이들 반(反)노동자 방책들에 협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내각으로부터 축출되었다. 스탈린주의자와 소련 GPU 요원들의 통제 하에 비밀경찰이 조직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노동자들의 저항의 척추를 부러뜨리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도발이 필요했다. 스탈린주의자들이 CNT 노동자들에 의하여 장악되어 있던 바르셀로나 전화교환소를 공격했던 1937년 5월 3일에 이 일이 벌어졌다. 수 시간 만에 도시 전역에 바리케이드들이 세워졌고, 노동자들은 다시 한 번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POUM과 무정부주의 지도자들은 어떠한 보복들도 없을 것이라는 아자나의 맹세를 신뢰하면서 중앙 정부에 항복했다. 이틀 후에 강습부대들이 도착했고, 수백 명을 살해하고 수만 명을 감옥에 보내면서 교전에서 승리했다. 공산당은 곧 집산농장들과 노동자 민병대들을 해산시키는 것으로 그 강습부대들을 이끌었다. 비록 전쟁이 일 년 반을 더 끌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 노동자들과 농민들이 투쟁해야 할 더 이상의 어떠한 것도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급격하게 사기가 저하되었고 파시스트들의 무장에서의 우월함이 승리를 거두었다.

 

이 모든 것에서 스페인 공산당은 무정부주의자들과 POUM, 집산 농장들, 그리고 노동자 민병대들에 맞서는 공세를 주도하면서 부르주아지 질서의 보증인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민주주의적” 제국주의 열강들과의 연합을 성취하고자 하는 필사적인 열망 속에서, 스탈린은 스페인에서의 혁명을 절대적으로 반대했다 - 이것이 양자택일의 결과가 파시스트의 승리라는 것을 의미했음에도 불구하고. 패배들의 위대한 조직자는 또한 스페인 혁명의 도살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패주의 책임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닌과 다른 공산주의 좌익들은 한 때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 독립을 위하여 투쟁했다. 한 때는 그들이 스페인 공산당 자체보다 더 큰 정당이었다. 그러나 인민전선에 굴복함으로써, 이들 중도주의자들은 스탈린만큼이나 스페인 혁명의 패배에 대하여 책임이 있었다. 인민전선이 대중적 지지를 받았던 순간들에 그들이 어떻게 물결을 거슬러 헤엄치는지를 알았더라면, 대중들이 그 이 후에 자신들이 배신당했던 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 노동자 운동의 지도력을 획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POUM은 오직 때가 너무 늦었을 때에만 항의하면서 배신자들에게 협조하였다.

 

 

2차 세계대전에서의 인민전선

 

대이비드슨의 트로츠키주의에 대한 공격에서,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과 독일에서의 스탈린의 정책들의 굴욕적인 패배를 사실상 무시하는 것에 더하여, 그가 스페인과 프랑스에서의 스탈린의 정책들에 관하여 언급하지 않는 것은 주목할 만 하다. 그리고 훌륭한 이유와 함께! 그러나 훌륭한 스탈린주의자로서 그는 어떻게 해서든 되도록 보다 더 인기 있는 예를 들면서 인민전선을 방어해야만 한다. 그는 2차 세계대전을 선택했다. 스탈린주의자들에 의하면, 2차 세계대전은 파시즘에 맞서는, 그리고 소비에트 조국을 지키기 위한 전쟁이었다. 그들의 정치적 결론은 “심지어 부르주아지-민주주의적 자본주의 정부들의 진영에서 발견되어야 했던 일시적이고 동요하는 동맹들까지도 포함하는” 광범위한 인민전선이었다(가디언, 1973년 5월 9일).

 

반혁명적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제외한 누구도 위대한 반파시스트 성전에 반대할 수 없었다고 추정하면서, 대이비드슨은 전쟁에 대한 트로츠키주의의 입장에 대한 일정정도 정확한 평가를 제공한다. 스탈린주의자들의 정책이 당시에는 분명히 더 인기가 있었기는 했지만, 미국 제국주의의 “민주주의적” 성격에 관하여 훨씬 더 적은 환상들을 가지고 있는 노동자-투사들의 새로운 세대들에게는 그렇게 쉽게 통하지 않을 것이다. 전쟁에 대한 트로츠키주의의 입장은 이 제국주의 사이의 전쟁에서 자본가 국가들에서의 혁명적 패배주의였다. 동시에 그들은 소련에 대한 군사적 방어에 대하여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냈다. 소련에 대한 방어를 반대했고, 결국 스스로와 함께 40%의 당원을 데리고 SWP를 떠났던 (당시까지 트로츠키주의적이었던 사회주의 노동자당 안에서 있던) 샤흐트만[Shachtman] 그룹과의 첨예한 투쟁을 트로츠키가 벌였던 것은 학문적 문제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전쟁 동안에, 수적으로 취약한 트로츠키주의 중핵들은 일부 지부들에서의 사회-애국주의의 강세에도 불구하고 대체적으로 국제주의적 노선을 수행했다. 예를 들면, 프랑스 지부는 독일 해군에서 트로츠키주의 세포를 조직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제4 인터내셔널의 많은 지도자들이 나찌들에 의하여 혹은 스페인에서의 닌과 마찬가지로 스탈린주의자들에 의하여 처형되었다. 미국에서 SWP는 CIO 지도부와 CP에 의하여 지지를 받았던 무파업 협정에 맞서 투쟁하는 것에 자신의 활동을 집중했다.

 

스탈린주의자들은 반대의 정책을 가지고 있었다. CPUSA 지도자 얼 브로우더에 따르면,

 

“미국에서 우리는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전쟁에서 이겨야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자본주의 체제가 작동하게 만들 것인지를 알아내야만 한다.... 우리는 자본가들이 그들의 체제를 어떻게 운영하는지를 배우도록 도와주어야만 한다.”

 

1941년 12월 25일자 일간 노동자(Daily Worker)는 CIO의 무파업 맹세를 “민족적 단결에 대한 분명한 기여”로서 환영하는 것으로 이 정책을 이행했다. 이것이 실제적으로 의미했던 것은 파업파괴였다. 1943년 광산 노동자들의 파업 동안에, CP 노동자 지도자 윌이암 포스터(William Z. Foster)는 파업파괴자들과 “작업 복귀” 운동을 조직하려고 시도하면서 펜실베니아를 돌아다녔다. 웨스트 코스트에서는 ILWU의 CP 동조자 브리지즈(Bridges)가 작업속도 증가를 주장했다.

 

이렇게 해서, 1930년대와 1940년대 동안 내내, 인민전선 정책은 파업파괴와 반혁명이라는 동일한 실제적인 결과를 낳았다. 스페인 혁명에 대한 교살, 프랑스 총파업의 패배, 미국 광산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한 파괴 - 이것들이 계급 협조의 결과들이다. 논리적 결론을 도출하면서, 스탈린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단결된 노력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1943년에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을 해산함으로써, 그의 부르주아지 친구들에게 또 다른 양보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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