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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의 스탈린 유파에 대한 재고찰 3부 "제 3기"_국제공산주의동맹의 팜플렛

가디언에 대한 응답

왜곡의 스탈린 유파에 대한 재고찰

 

3부 “제 3기”

 

1926-27년 동안 스탈린의 일관된 우익적 방침은 그를 국내에서는 쿨락(부농들)들에, 영국 총파업 동안에는 노동조합 관료들에, 중국에서는 장개석에 대한 투항으로 이끌었다. 그는 “당신들 스스로를 부유하게 하시오”라고 농민들에게 부탁했고, “달팽이의 걸음걸이로” 사회주의를 건설할 것을 호소했던 부하린과의 정치국에서의 연합으로 이 정책을 뒷받침했다. 트로츠키에 의하여 지도되던 좌익반대파는 그것은 수천 명의 외국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대량학살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바로 소비에트 국가 그 자신의 기초들을 위협한다고 경고하면서 이 노선에 반대했다. 스탈린은 15차 당대회(1927년 12월)에서 즉석에서 반대파를 축출함으로써, 그리고 “반대파에 대한 충실한 지지와 반대파 관점들의 선전은 당 안의 당원자격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공식적으로 선포함으로써 “응답했다”.

 

트로츠키의 예측들은 1928-28년 쿨락의 반란으로 극적으로 확증되었다. 국가 곡물창고는 절반이 비었고, 기아가 도시들을 위협했다. 즉, (통화 팽창의 보답으로, 공산품으로는 거의 손에 넣을 수 없었던) 농민들이 국가가 규제하는 가격들로 팔기를 거부하면서, 곡물 징수들은 농촌들에서의 폭동들을 야기했다. 1928년 1월에 곡물 비축분들을 징발하기 위한 무장 원정을 명령하면서 스탈린은 갑작스럽게 강화된 노선으로 바꿨다. 그러나 이것으로조차 충분하지 않았다. 5월에 그는 여전히 “쿨락에 대한 몰수는 어리석은 행동이 될 것이다”(레닌주의의 문제들, 221쪽)라고 주장하고 있었지만, 그해 말이 되면서 그는 “우리가 쿨락들에 대한 몰수를 허용할 수 있는가...? 어리석은 질문이다.... 우리는 공개적인 전투에서 그 계급의 저항을 무너뜨려야만 한다”(레닌주의의 문제들, 325쪽)라고 주장했다.

 

1924년 이래로 트로츠키는 산업화와 집산화를 위한 운동을 벌여왔고, 스탈린에 의하여 “농민의 적”과 “초산업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혔다. 그러나 1928년 반(反)소비에트 농민 폭동에 직면하자, 스탈린은 완전한 공황상태에서 맹목적인 보수주의로부터 맹목적인 모험주의로 바뀌면서 뒤로 물러섰다. 1927년 공동반대파의 정강에서, 트로츠키와 지노비에프는 1차 5개년 계획의 성장률을 두 배로 할 것을 주장했는데, 이제 스탈린은 노동자들에 대한 엄청난 고통을 희생으로 하여 그것을 세배로 했다. 반대파는 협동조합들을 위한 국가 신용의 도움을 받는 자발적인 집산화와 쿨락의 영향력에 대한 투쟁을 주장했는데, 이제 스탈린은 4달 소련의 모든 농장들의 절반에서 강제적인 집산화를 성취했다! 농민들은 나라에 있는 말들의 50%를 절멸시키면서 사보타지로 반응했고, 다음 몇 해 동안의 내전으로 3백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트로츠키는 극악무도함으로서 기관총의 총구를 겨눈 집산화에 반대했다. 맑스주의자들은 언제나 설득에 의한 소부르주아지 계급에 대한 점진적 획득과 공동생산을 통한 사회주의로의 자발적 이행을 주장 했었다. 하지만, 비록 관료적 계획에 의하여 초래되었던 엄청난 혼란과 불필요한 어려움들에도 불구하고, 그는 산업화를 칭찬했다.

 

“산업발전에서의 소비에트의 성공은 전 세계적인 역사적 중요성을 획득하고 있다.... 그 속도가 안정적이지도 견고하지도 않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주의적 경제 방책들에 고유한 거대한 가능성들에 대한 실제적인 증거를 제공한다.”

-L.D. 트로츠키, “경제적 무모함과 그것의 위험들”, 1930년

 

집산화와 산업화 모두가 반대파 정책들의 올바름을 완전하게 입증했다. 하지만, 레닌주의로의 복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것들은 소비에트와 당 민주주의의 재수립이라는 보완이 필요했다. 위기에 의하여 첨예하게 드러났던 그의 이전 정책들의 파산[에 직면하여], 스탈린은 자신의 관료적 독재를 강화하고 트로츠키를 소련으로부터 축출하면서 반대의 방침을 택했다.

 

 

스탈린이 “제3기”를 발견하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CI)에서 스탈린의 정책들은 그의 국내에서의 갈지자 행보들의 복사판이었다. 중국 공산주의자들에게 도살자 장개석에게 자신들의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명령했던 1927년 상하이 봉기의 재앙 이후, 스탈린은 급격하게 방침을 거꾸로 뒤집었고, 노동자들에 대한 비슷한 대량학살로 끝났던 모험주의적 캔톤[광동] 코뮌을 명령했다. 1928년 여름에 스탈린은 이 무분별한 초좌익주의의 패턴을 제국주의의 “제3기”라는 교의로 일반화했다.

 

이 “이론”에 따르면, 1923년에 끝났던 전후 혁명적 파도가 있었고, 1928년까지의 안정화 기간이 있었으며, 그리고 나서는 자본주의의 임박한 최후의 붕괴의 새로운 시기가 있었다. 오늘날의 파국론자들과 마찬가지로, 스탈린은 경제적 위기가 자동적으로 혁명적 정세를 창출할 것이라고 추론했다. 실제로는 위기의 초기 국면들은 자주 노동계급 속에서의 급격한 사기저하를 동반한다. 1928-32년 동안의 어떤 때에도 세상의 어떤 공산당도 권력 장악을 시도하지 않았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 결과로 스탈린은 오른쪽으로 급격하게 선회하면서 자신의 과장된 이론을 조용히 포기했다.)

 

공황의 시작과 코민테른의 초좌익 정책들이 공산당들을 사정없이 파괴했다. 서유럽의 핵심적인 나라인 독일에서는, 대량 정리해고들과 공산당의 노동조합들에 대한 포기 정책의 융합은 공산당을 노동자들의 전위이기 보다는 사실상 실업자들의 전위로 바꾸면서, 당 내 공장 노동자의 백분율이 1928년 62%에서 1931년의 단지 20%로 하락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자본가 정부들로부터 금지 당했었던 1929년 메이데이 시위들이 “제3기” 모험주의의 가련할 정도의 전형적인 결과들이었다. 즉, 파리에서는 경찰이 4월 30일에 모든 활동적인 공산당원들을 간단하게 체포했다(3일 후에 그들을 풀어주면서). 영국에서는 사회민주주의 경찰국장 조에르기에벨[Zoergiebel]이 공산주의자들을 잔혹하게 공격했는데, 그들의 총파업 호소는 어이없이 끝이 났다.

 

개량주의자들이 주도하던 대중적 기관들에 대치되는 작은 “혁명적 노동조합들”의 설립이라는 실행이 "제3기“ 정책들의 또 다른 측면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노동조합의 단결에 찬성하지만, 모든 분리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대량생산 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위하여 제한적인 장인 노동조합들과 결별하는 것은 필요할 수 있다. 또한, 좌익적 고조가 오직 관료적이고 깡패적인 방책들에 의하여 방해받을 때, 구 기관과의 분리가 패배에 대한 유일한 대인일 수 있다. 핵심은 노동조합을 대중조직으로서 생존할 수 있도록 해 주는 노동자들의 압도적 다수의 지지이다.

 

원칙의 문제를 고려해 보았을 때, “제3기”의 이중 노동조합주의는 매우 달랐다. 그것은 별도의 노동조합 연맹들(미국에서의 노동조합 통합동맹(TUUL), 그리고 독일에서의 혁명적 노동조합 반대파[RGO])의 형성과 소수의 조합원을 가진 수 없이 많은 작은 “적색 노동조합들”로 나아갔는데, 그것들은 결코 어떠한 성공의 기회도 잡지 못했다. "적색 노동조합“ 정책은 기존의 대중적 노동자 조직들의 공산주의적 지도부를 위한 투쟁이라는 레닌주의 정책과 정반대이며, 소수의 고립적인 상황들을 예외로 하면, 그것은 패배할 운명이었다.

 

 

“사회-파시즘”

 

개량주의적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사회-파시스트”, 즉 “말로는 사회주의, 행동으로는 파시스트”들이라는 스탈린의 발견이 이 정책의 일반화였다. 따라서 (사회민주당이 지도했던 노동조합들처럼!) 그들은 더 이상 노동자 운동의 한 부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공동전선 전술은 적용될 수 없었고, 공산주의자들은 기껏해야 “아래로부터의 공동전선”, 즉 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의 평조직원들에게 그들의 지도자들을 버리라고 호소하는 것을 제안할 수 있었다.

 

사회민주당 지도자들은 파시즘을 위한 길을 준비했고, 이것과 관해서는 어떠한 의구심도 있을 수 없다. 1919년 1월에 사회민주당의 노스케는 베를린에서 독일 공산당의 최고 지도자들인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가 희생되었던 “스파르타쿠스 봉기”를 진압하면서 수백 명의 독일의 혁명적 노동자들에 대한 대량학살을 개인적으로 조직했다. 1929년에 사회민주당 조에르기에벨[Zoergiebel]은 공산당의 메이데이 시위를 피로 물들였다. 권력을 향한 히틀러의 모든 단계마다에서, 개량주의자들은 싸우기 보다는 항복했다. 심지어 히틀러가 이미 권력을 장악한 이후에조차, 자신들이 약속했었던 대중적 저항을 조직하는 대신, 사회민주당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당을 파괴로부터 구원하겠다는 헛된 희망 속에서 나찌 정부의 외교정책을 지지할 것을 제안했다! 그들은 때가 너무 늦었을 때까지 결코 싸우지 않았고, 결국 그들은 혁명보다 히틀러를 선호했다.

 

그러나 이것은 스탈린이 그랬던 것처럼 사회민주당이 단지 “파시즘의 좌익”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이 속물적인 선언은 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 조직들 자신들이 파시스트의 승리의 결과로 파괴될 것이었다는 사실을 무시했다. 트로츠키가 말했듯이:

“파시즘은 단지 강탈들의, 잔인한 세력의, 그리고 경찰 테러의 체제는 아니다. 파시즘은 부르주아지 사회 내부의 프롤레타리아트 민주주의의 모든 요소들을 근절하는 것에 기초한 특정한 정부체제이다. 파시즘의 임무는 공산당 전위를 파괴하는 것에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독립적인, 그리고 자발적인 조직들을 분쇄하는 것, 프롤레타리아트의 모든 방어적인 보루를 파괴하는 것, 그리고 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들에 의하여 한 세기의 4분의 3만큼 동안에 성취된 모든 것들을 근절하는 것 또한 필수적이다.”

-“다음에는 무엇?”, 1932년 1월

 

여기에 공동전선 정책을 소리 높여 외쳤던 사정이 있었다. 지도자들은 싸우기를 원했던 것이 아니라 물러서기를 원했다. 하지만, 평조합원들은 물러설 수 없었는데, 그들은 싸워야만 했거나 혹은 절멸에 직면해야만 했다. 사회민주당 지도부에 나찌스에 대항하는 공동의 공세를 개시할 것을 요구하라! 만약 그들이 받아들인다면, 파시스트의 위협은 파괴될 수 있을 것이고, 혁명을 향한 길이 열릴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들이 거부한다면, 그들의 배신이 노동자들 앞에서 분명하게 폭로될 것이고, 공산주의자들이 유일하게 일관된 프롤레타리아트 지도부라는 것을 투쟁 속에서 증명함으로써 노동계급에 대한 혁명적 투쟁으로의 조직화가 촉진될 것이다.

 

“노동자-공산주의자들이여, 당신들은 수십 수백만 명이다. 다시 말해, 당신들은 어느 곳으로도 떠날 수가 없다. 당신들을 위한 여권은 충분하지가 않다. 만약 파시즘이 권력을 잡는다면, 파시즘은 무시무시한 탱크처럼 당신들의 두개골과 척추위로 올라탈 것이다. 당신들의 구원은 가차 없는 투쟁에 있다. 그리고 사회민주주의 노동자들과의 단결투쟁만이 승리를 가져다 줄 수 있다.”

-“파시즘에 맞서는 노동자 공동전선을 위하여” 1931년 12월

 

 

"히틀러 다음은 우리다“

 

히틀러의 권력 장악 때까지, 스탈린은 계속해서 “제3기”라는 종파주의적-패배주의적 논리를 철저하게 추구했다. 나찌의 득표가 80만으로부터 600만으로 상승했던 1930년 9월 선거들 이후, 독일 공산당 수장 에르네스트 텔만[Ernest Thaelmann]은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서 “... 어떤 의미에서는 9월 14일이 스탈린의 최고의 날이었는데, 그 이후에는 오로지 더 좋지 않은 날들만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스탈린주의자들은 트로츠키의 파시즘에 대한 분석을 조롱했고, 브뤼팅 정권과 나찌스 사이에는 어떠한 차이도 없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그들은 노동자들의 조직들이 존재하건 말건 전혀 관심이 없었다! 공산당 지도자 레멜레는 의회에서 “히틀러가 사무실을 차지하게 하자 - 그는 곧 파산할 것이고, 그리고 나면 우리의 시대일 것이다”라고 선포했다. 이 범죄적이고 완전히 비겁한 정책에 따라서, 공산당은 사회민주주의적 프러시아 국가 정부를 낙마시키려는 (성공적이지 못했던) 시도하던 나찌스에 합류했다.

 

트로츠키의 공동전선 호소에 대한 독일 노동자들 사이에서 폭넓은 지지에 대응하여, 텔만은 1932년 9월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국가사회주의를 어떻게 이겨낼 것인지에 관한 그의 팜플렛에서, 트로츠키는 오직 한 가지 대답만을 제공하는데, 그것은 이렇다: 독일공산당은 사회민주당과 존을 잡아야만 한다....공산당이 사회민주당과 공동의 대의를 만들어내던지, 아니면 독일 노동계급이 10년 내지는 20년 동안 패배하던지 [중에 하나라고] 그는 말한다. 이것은 완전히 파산한 파시스트의 이론이며 한 혁명적 이론이다.... 당연히 독일은 파시스트로 가지 않을 것이다 - 우리의 선거승기라 이것을 보증한다.(!).”

 

9개월 후에 텔만은 히틀러의 감옥 속에 있었다. 나중에 그는 수천 명의 공산주의자들과 사회민주주의 투사들과 마찬가지로 나찌스에 의하여 처형되었고, 노동자 정당들과 노동조합들은 파시즘의 철굽에 의하여 분쇄되었다. 트로츠키의 분석들과 정책들은 완전하게 입증되었고, 독일 프롤레타리아트가 스탈린의 범죄적 맹목성의 대가를 치렀다.

 

그러나 이것이 스탈린의 배신들의 끝이 아니었다. 트로츠키는 보다 일찍이 “우리는 선진노동자들에게 분별없음과 허풍떨기라는 ‘제3기’가 지나고, 패닉과 항복이라는 제4기가 시작되었다”라고 가능한 크게 말해야만 한다(“독일, 국제정세의 열쇠”, 1931년 11월)고 경고했다. 비극은 시계태엽과 같은 정확도로 계속해서 전개되었다. 히틀러의 권력 장악에 뒤이어, 패닉에 휩싸인 코민테른은 공산당들 내부에서 독일 사태들에 대한 어떠한 토론도 금지했고, 사회-파시즘에 관한 모든 언급을 중지했다. 대신에, “만국의 노동자들에게”(1933년 3월 5일)라는 한 선언에서, 집행위원회는 (그들이 지난 5년 동안 거부했었던) 사회민주주의 지도자들과의 공동전선을 주장했고, 공산당들에게는 “공동행동 동안에는 사회민주주의 조직들에 대한 모든 공격들을 단념할” 것을 주장했다“!

 

 

공동전선

 

가디언에 있는 “트로츠키의 유산”에 관한 칼 대이비드슨의 시리즈는 “일국에서의 사회주의”, “평화공존”, “2단계 혁명” 등의 스탈린주의 정책들을 위한 사례를 만들어 내려는, 스탈린의 노동자 운동에 대한 범죄들에 대한 일관된 속임수이다. 히틀러의 권력 장악 즈음의 사건들을 다루면서, 대이비드슨은 “트로츠키주의자들이 파시스트들을 위하여 권력으로 가는 길을 닦아주었던 사회세력-독일 사회민주당-의 과오를 덮어 가려 주었다”(가디언, 1973년 5월 9일)고 주장한다. 독자들은 단지 누가 파시즘을 위한 길을 닦아주었는지 위의 내용으로부터 스스로 판단할 수 있다! 대이비드슨은 “이것이 독일 사회민주당이 과오들을 저지르지 않았거나 그들의 실책들이 중요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들 또한 비록 공동전선이 거절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민주당 지도자들과도 단결하기 위한 더 완고한 노력보다는 ‘아래로부터의 공동전선’에 대한 일방적 강조를 포함하는 몇 가지 초-‘좌익적’ 실책들을 범했다”라고 언급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대이비드슨은 독일 공산당의 정책이 언제나 스탈린 그 자신에 의하여 명령되었고, 코민테른 모임들에 의하여 확정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을 무시한다!

 

스탈린주의자들은 (그의 주요 슬로건이 “계급 대 계급”이었던) 레닌의 공동전선 정책과 스탈린의 “민주주의적” 부르주아지 계급과의 “인민전선”을 헷갈리게 하기 위하여 레닌의 공동전선 정책의 노동 계급적 내용을 흐리기 위하여 시종일관 시도한다. 그들은 계급동맹의 전술이면서 사회민주주의 지도부에 대한 항복의 전술로서 공동전선을 묘사하려고 애쓴다. 이것이 진보노동당(Progressive Labor Party/PL)과 같은 일부 그룹들로 하여금 공동전선 전술 전체를 거부하도록 했었다.

 

“우리가 반복해서 지적하였듯이, 우리는 사장들과의 공동전선이라는 개념을 거부한다. 우리는 트로츠키주의자들과 좌익에 있는 다양한 가짜 떼거리들과의 공동전선을 거부한다....

 

“우리는 좌익중심의 연합의 형식을 취하는 아래로부터의 공동전선을 믿는다.”

-“혁명을 향한 길 Ⅲ”, PL, 1973년 11월

 

평조합원들에게 개량주의적 지도자들을 버리라고 호소하는 것과 같은 아래로부터의 공동전선은 항상 적절하다. 그러나 우리는 전위를 척박한 고립으로 이끌지 않으면서, 이들 잘못된 지도자들을 간단히 무시할 수는 없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초기 동안에 공동전선을 반대하던 자들에 답하면서,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이] 썼다.

 

“공동전선은 단지 노동 대중들에게로만 확대되는가 혹은 그것은 기회주의적 지도자들 또한 포함하지는 않는가?

 

“이 문제의 제기 바로 그것이 오해의 산물이다.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의 기치 주변으로 혹은 우리의 실천적인 즉각적 구호들 주변으로 노동 대중들을 간단하게 단결시킬 수 있고, 당이건 혹은 노동조합이건 개량주의 조직들을 건너뛸 수 있다면, 그것이 당연히 세상에서 최고일 것이다....

 

“... 노동자들에 대한 자신들의 영향력을 잃지 않기 위하여, 개량주의자들은 그들 자신의 지도자들의 가장 깊숙한 열망들에 반하여, 착취자들에 대항하는 피착취자들의 부분적 운동을 지지하지 않을 수 없다....

 

“... 모든 다른 고려들은 별도로, 우리는 개량주의자들을 그들의 은신처로부터 끌어내는 것에, 그리고 투쟁하는 대중들의 눈앞에서 그들을 우리들 주변에 데려다 놓는 것에 관심이 있다.”

-“공동전선에 대하여”, 1922년

 

이들 테제들은 소련 공산당 정치국과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집행위원회에 의하여 승인되었다. 초좌익들에 대한 자신의 논박(좌익 공산주의, 유아적 혼란)에서, 레닌은 “아무리 일시적이고, 동요하며, 믿음직스럽지 못하고, 우연적일 지라도, 대중적 동맹을 획득하기 위한 모든 기회”를 활용할 것을 주장했다.

 

사회민주당 지도자들과의 단결들을 5년 동안 거부한 이후, 스탈린은 1933년 3월에 완전히 반향을 바꾸고 비판의 자유를 금지하는 “공동전선”에 동의했다. 이것은 마치 영국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1926년 총파업을 분쇄했을 때 스탈린이 그들을 비판하고 그들과 결별하는 것을 거부했던 것처럼, 공산주의자들이 개량주의자들에 의한 불가피한 배신들에 직면하여 침묵을 지키겠다고 스스로에게 미리 맹세한 것을 의미했다. 이것이 볼셰비즘과 얼마나 관계가 없는지는 공동전선에 대한 코민테른의 원래 결의안을 읽음으로써 이해될 수 있다.

 

“그들 스스로에게 행동의 규율을 강제하는 가운데, 공산주의자들은 행동이 개시되기까지와 그 이후뿐만 아니라, 만약 필요하다면 행동 중에라도 예외 없이 모든 노동계급 조직들의 정책에 대한 자신들의 의견을 표현할 권리와 가능성을 스스로를 위하여 보존해야 한다는 것은 필수적인 것이다.”

-“공동전선에 관한 테제들”, 1922년

 

 

 

소련 - 퇴행화된 노동자 국가

 

독일에서 스탈린에 의한 명백한 배신, 그리고 새로운 공산당들과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주장할 것에 관한 필연적인 결론이 소련 그 자체의 내부에서의 새로운 정당의 문제로 귀결되었다. 이번에는 이것이 소비에트 국가의 계급적 성격과 그것을 지배하는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성격에 관한 문제를 제기했다. 트로츠키는 스탈린에 의하여 축출되었던 많은 구 공산당원들이 그랬던 것처럼, 소련을 “국가자본주의”로 간주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렇게 하는 것은 평화적 반혁명, 소위 “개량주의의 필름을 거구로 돌리는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었다. 근본적으로 국가는 특정 계급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소유형식들에 기초한다. 소련에서의 사회주의적 소유관계들은 본래대로 남아 있었고, 10월 혁명의 이 엄청난 성취는 가볍게 포기되지 말아야만 했다. 관료적 스탈린주의 지도부에 반대하는 한편으로, 볼셰비키-레닌주의자들은 제국주의의 공격으로부터 소련을 무조건적으로 방어해야만 했다.

 

동시에, 이것은 건강한 노동자 국가가 아니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정치적으로 착취당했었다. 소비에트들은 총서기의 결정들을 승인하기 위한 단순한 행정기구들이었다. 스탈린 한 명을 제외한 1917년의 지도부 전체가 축출되거나 눈 밖에 나 있었던 볼셰비키 당은 관료집단의 잡이였다. 모든 반대파들에 대한 제명들, 체포들과 유배들[과 같은] 근자의 사태들을 볼 때, 이 기생적 관료집단이 혁명 없이 제거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범죄적인 경솔함이다. 이것은 새로운 소유 형태들로 귀결되는 사회혁명이 아니라 정치혁명일 것이다. 소련은 퇴행화된 노동자 국가였다.

 

“...관료집단이 하나의 “계급”으로서 그들에게 고유한 어떠한 특수한 관계로부터가 아니라, 10월 혁명에 의해 수립되었고, 근본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 적절한 그러한 소유관계들로부터 자신들의 특권들을 획득하기 때문에, 관료집단의 특권들 하나만으로는 소비에트 사회의 기초들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분명히 하자면, 관료집단이 인민들에게 강도질을 하는 한(그리고 이것은 모든 관료들에 의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행해진다), 우리는 단어의 과학적 의미에서 계급착취가 아니라, 비록 매우 거대한 규모에서라고 하더라도 사회적 기생주의를 다루어야만 한다....

 

“최종적으로, 완벽한 명확성을 위하여 우리는 다음을 추가할 수 있겠다. 만약 오늘날 소련에서, 맑스주의 당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면, 그들은 정치적 사회조직 전체를 쇄신할 것이다. 그들은 관료집단을 재편하고 숙청하여 관료집단을 대중들의 통제하게 있도록 할 것이다. 그들은 모든 행정적 업무들을 변형하고, 경제의 운영에 있어서 일련의 중대한 개혁들을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그들은 소유관계들에서의 전복, 즉 새로운 사회혁명을 수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소비에트 국가의 계급적 성격”, 1933년 10월

 

스탈린주의자들은 즉각적으로 “반혁명”이라고 절규했다. 트로츠키는 채임벌린, 히틀러, 미카도 등의 첩자였고 자본주의를 재수립하기 위하여 노력했다. 그러나 스탈린주의자들은 트로츠키가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소련을 지지하는 것을 거부했다거나 사회주의적 소유형식들을 포기할 것을 주장했다는 한 하나의 사례도 지적할 수 없었다. 1939년 2차 세계대전의 전야에 그는 막스 샤흐트만[Max Shachtman]에 의하여 주도되던 히틀러에 맞서서 러시아를 방어할 것을 거부했던 미국 사회주의 노동자 당 내부의 한 그룹에 맞서는 가차 없는 투쟁을 지도했다. 트로츠키는 소련이 아무리 심하게 퇴행화 되었어도 노동자 국가로 남아 있는 한, 소련을 방어하는 것은 원칙의 문제라는 것을 반복적으로 강조했다. 정말 필요할 때에, 볼셰비키-레닌주의자들은 기꺼이 자신들의 전투지점들에 서 있을 것이다.

 

1960년대 초에, 모택동은 1956년 이후 소련의 후르시쵸프-브레즈네프 지도부는 “사회-제국주의자”였고, 소련은 더 이상 노동자 국가가 아니라 “붉은 부르주아지 계급”에 의하여 관장되는 새로운 제국주의라고 선언했다. 모[택동]주의적 관점으로부터 트로츠키에 대한 최근의 공격인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위한 동맹의 마이클 밀러의 “트로츠키주의로부터 사회제국주의까지”라는 제목의 팜플렛에서 이 입장이 트로츠키의 입장에 대립하고 있다.

 

“1956년 후르시쵸프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면서, 그리고 모든 곳에 소부르주아지 이데올로기와 문화를 퍼뜨리면서 장면에 등장했다....

 

“트로츠키주의는 소련과 중국 국가들의 계급적 성격에 관하여 이론적으로 결코 이해하지 못했고 실천으로부터 배우지 못했다. 경제적 기초가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로부터 사회적 소유로 변형되고 있었던 소비에트 역사의 기간 동안, 트로츠키주의자들은 항상 정치구조, 즉 상부구조를 강조했다.... 경제적 기초는 정치구조와 별도로는 결코 고려될 수 없다. 소련에서는, 정치구조의 심장인 공산당이 부르주아지류의 정치인들의 도당에 의하여 접수되었고, 대 부르주아지적 정치 정당의 한 변형체로 변형되었다. 이제 그들은 사적소유와 시장을 위한 사적 생산을 복구하는, 그리고 거대한 규모로 이에 조응하는 자본주의적 사회적 관계들을 재생산하는 사회주의적 경제기초를 뒤집는 경제 정책들을 이행하느라 바쁘다.”

 

이 인용문은 모[택동]주의자들의 기초적인 맑스주의에 대한 거부를 증명한다. 그들이 고수하듯이, 만약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평화적 사회적 반혁명이 러시아에서 발생하였다면, 논리적으로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평화적인 사회주의 혁명도 또한 가능하다(레닌이 국가와 혁명에서 논박했던 고전적 사회민주주의 입장). 게다가, “소부르주아지 이데올로기”를 가진 지배그룹의 등장으로 그러한 혁명이 완수되었다는 것을 고수하는 것은 사회혁명은 소유관계들에서의 전복에 의해서만 오직 성취될 수 있다는 맑스주의적 유물론적 이해와 완전히 대립하는 이상주의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정책의 실제적인 결과들이다. 모[택동]에 따르면 소련은 “제국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에 맞서서 소련을 방어할 필요가 없다. 실제로, 모[택동]은 소련에 대항하는 중일동맹을 강요했고, 유럽에서 소비에트 제국주의에 맞서는 보루로서 나토의 유지를 독려 할 만큼 멀리 나아갔다! 이것들이 “국가자본주의”입장이 실행에 옮겼던 반혁명적 결과들이다. 그것들은 소련과의 제국주의 사이의 전쟁의 망령을 불러내고, 중국은 적대적인 자본주의 열강들의 편에 섰다-기형화된 노동자 국가의 사회주의적 소유형식들을 즉각적인 위험에 빠뜨리게 될 사태. 모스크바의 브레즈네프 도당이 중국에 대항하는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동맹에 그렇게 노골적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미국과의 동맹을 성취할 희망에서 노동자국가들에 대한 방어를 포기하려는 그들의 자발성은 미국의 비행기들이 북베트남에 집중폭격을 가하고 있던 바로 그 순간에(!) 닉슨이 “평화공존” 선포에 서명하기 위하여 모스크바에 초대를 받았던 작년에 명백하게 드러났다.

 

반대로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제국주의에 맞서는 중소의 단결과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방어를 주장한다. 동시에 우리는 그러한 방어를 사보타지하는 기생적 관료집단들을 무자비하게 비판한다. 선진노동자들은 이 원칙적인 계급적 입장의 올바름을 인식하고 노동자들의 성취들에 대한 방어를 범죄적으로 포기하는 모[택동]주의자들과 친 모스크바 스탈린주의자들과 같은 자들을 거부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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