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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츠키_스페인의 교훈: 마지막 경고

  • 분류
    트로츠키
  • 등록일
    2013/05/30 02:27
  • 수정일
    2013/05/30 02:27
  • 글쓴이
    얼치기 공산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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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교훈

마지막 경고

 

트로츠키 1937년 말

 

 

스페인의 멘셰비키주의와 볼셰비키주의

 

모든 군 참모들은 거대한 미래의 전쟁을 준비하면서 에티오피아, 스페인, 그리고 극동에서의 군사작전에 관하여 면밀하게 연구하고 있다. 혁명의 참모들도 다가오는 세계혁명의 뜨거운 번개 섬광과도 같은 스페인 프롤레타리아트의 전투들을 면밀하게 연구해야 한다. 이러한 조건에서, 그리고 이러한 조건에서만 오로지 우리는 다가오는 사태들로부터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기습을 당하지 않게 될 것이다.

 

멘셰비키주의, 볼셰비키주의, 그리고 무정부주의라는 서로 다른 힘을 가진 3개의 이데올로기들이 소위 공화 진영에서 투쟁했다. 부르주아지 공화 정당들에 관하여 말자하면, 그들은 독립적인 사상이나 독립적인 정치적 중요성 어떤 것도 없었으며, 단지 개량주의자들과 무정부주의자들의 등에 올라타는 것을 통해서만 스스로를 유지할 수 있었다. 또한, 스페인 무정부주의-생디칼리즘의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주의(主義)를 거부하고, 그것의 중요성을 실질적으로 무(無)로까지 축소시키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는 것은 과장이 아니다. 실제로는 멘셰비키주의와 볼셰비키주의라는 2개의 주의(主義)가 스페인 공화 진영에서 투쟁했었다.

 

사회주의자들과 스탈린주의자들, 다시 말해 첫 번째와 두 번째 멘셰비키들에 따르면, 스페인 혁명은 단지 자신의 "민주주의적" 임무들만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그것을 위하여 "민주적인" 부르주아지와의 공동전선은 필수 불가결한 것이었다. 이러한 관점으로부터는, 부르주아지 민주주의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던 프롤레타리아트의 모든 시도들, 어떠한 시도들도 성숙되지 못한 것뿐만 아니라 치명적인 것이기도 했다. 게다가, 아젠다에는 혁명이 아니라 반란에 나선 프랑코에 맞서는 투쟁이 있었다.

 

그러나, 파시즘은 봉건적 반동이 아니라 부르주아지적 반동이다.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세력들과 방책들을 가지고서만 오직 부르주아지적 반동에 맞서는 성공적인 투쟁을 수행할 수 있다. 그 자체로 부르주아지 사상의 일부인 멘셰비키주의는 이러한 사실들을 인식하지 않으며, 인식할 수도 없다.

 

오직 제4 인터내셔널의 청년 지부들에 의해서만 명확하게 표현되는 볼셰비키의 관점은 반(半)봉건적 토지소유의 청산과 같은 순전히 민주주의적인 문제들조차도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권력의 장악 없이는 해결될 수 없으며, 이 점이 이번에는 사회주의 혁명을 일정에 올리게 된다고 하는 영구혁명의 이론을 자신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더욱이, 혁명의 바로 첫 번째 국면 동안에, 스페인 노동자들은 실천적으로 스스로에게 단지 민주주의적 문제들뿐만 아니라 순전히 사회주의적인 문제들까지 제기했다. 부르주아지 민주주의의 경계를 넘어서서는 안 된다는 요구는 실천적으로 민주주의 혁명에 대한 방어가 아니라 민주주의 혁명에 대한 거부를 의미한다. 농경적 관계에서의 전복을 통해서만 오로지 인구의 절대다수였던 농민은 파시즘에 맞서는 강력한 보루로 바뀔 수 있었다. 그러나 지주들은 상업 부르주아지, 산업 부르주아지, 그리고 은행 부르주아지, 그리고 이들에 의지하는 부르주아지 지식인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당은 농민대중들과 함께 나아갈 것인가 혹은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와 함께 나아갈 것인가의 선택에 직면하게 되었다. 농민과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를 동시에 같은 연합에 포함하키는 것에는 오직 한 가지 이유만이 있을 수 있을 것인데, 그것은 부르주아지가 농민을 속여서 노동자들을 고립시키는 것을 돕고자 함이다. 농민혁명은 오로지 부르주아지에 대항해서만, 따라서 오로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라는 대중들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었다.

 

이론의 관점에서, 스탈린의 스페인 정책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레닌주의의 가나다에 대한 전적인 무시이다. 수십 년 후에 - 정말이지 수십 년! - 코민테른은 멘셰비키주의의 교조를 완전하게 복권시켰다. 그것에 더해서, 코민테른은 멘셰비키주의 교조를 더욱 "일관적으로" 표현했고, 이 측면에서 멘셰비키주의 교조를 더욱 우스꽝스럽게 표현했다. 1905년이 시작되던 짜르 시대 러시아에서는 어쨌든, 1937년 스페인에서보다 비교할 수 없이 많은 "순전히 민주주의적 혁명"의 정식에 관한 논쟁들이 있었다. 현대의 스페인에서 멘셰비키주의라는 "자유주의적 노동자 정책"이 스탈린주의라는 반(反)노동자 정책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거의 놀라운 일이 아니다. 동시에, 맑스주의에 대한 어설픈 모방이라는 멘셰비키들의 교조가 그 스스로에 대한 어설픈 모방으로 변했던 것이다.

 

 

 

인민전선이라는 "이론"

 

하지만, 스페인에서의 코민테른의 정치들이 이론적 "실수"로부터 기인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순진한 것일 것이다. 스탈린주의는 맑스주의 이론, 이 측면에서는 어떠한 이론에 의해서도 지배되지 않으며, 소비에트 관료의 경험적 이해관계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소비에트의 냉소적인 사람들은 자신들의 절친한 써클들 내부에서는 디미트로프의 인민전선의 "철학"을 조롱한다. 그러나 그들은 대중을 속이기 위이기 위하여 이 신성한 정식에 대한 선전가들, 충실한 자들과 사기꾼들, 얼간이들, 그리고 허풍쟁이들이라는 중핵을 자신들의 수중에 보유하고 있다. 무지하면서 잰 체하는, 그리고 조야한 합리주의자이면서 혁명에는 전적으로 귀를 막고 있는 로이스 피셔(Louis Fischer)가 이 매력 없는 형제들의 가장 불쾌한 대표이다. "진보세력 단결!", "인민전선 사상의 승리!" "반파시스트 대오의 단결에 대한 트로츠키주의자들의 공격!" .. 누가 공산당선언이 90여 년 전에 쓰였다고 믿겠는가?

 

인민전선의 이론가들은 본질적으로 산수의 첫 번째 규칙, 즉 덧셈을 넘어서지 않는다. "공산주의자" 더하기 사회주의자 더하기 무정부주의자 더하기 자유주의자는 각자 고립되었을 때의 개별 숫자들 보다 더 큰 총합을 만든다. 이것이 그들 지혜의 모두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산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적어도 기계적인 것 또한 필요하다. 힘의 평행사변형 법칙이 정치에도 적용된다. 그러한 평행사변형에서, 힘을 구성하고 있는 부분이 서로에게서 더욱 벌어질수록 합력은 더욱 작아진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만약 정치적 동맹세력들이 정반대의 방향으로 당길 때, 그 결과는 0이 됨이 증명된다.[해석자의 첨가 - 벡터의 합에 관한 공식. 방향이 서로 다른 두 힘에 해당하는 평행사변형의 이웃하는 두 변의 길이가 길어도, 두 변 사이의 각이 커질수록 합력에 해당되는 평행사변형의 대각선의 길이는 더 짧아지게 되며, 방향이 정반대인 두 힘의 합력은 힘의 크기가 같다면 0이 되어 버린다. 줄다리기에서 양쪽 팀의 힘이 같은 경우 각 팀이 아무리 힘을 크게 주어도 줄은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있게 된다.]

 

때로는 다양한 노동계급의 정치적 그룹들의 블럭이 공동의 실천적 문제들의 해결을 위하여 꼭 필요한 때가 있다. 특정 역사적 환경들에서, 그러한 블럭은 자신들의 이해관계가 프롤레타리아트의 이해관계에 근접해 있는 피억압 소부르주아지 대중들을 끌어당길 수 있다. 그러한 블럭의 합력은 각자의 힘의 합계보다 훨씬 더 강력한 것으로 판명될 수 있다. 반대로, 현 시기에 기본적인 문제들에 있어서 180도 다른 이해관계를 가지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정치적 동맹은 일반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힘을 무력화시킬 수 있을 뿐이다.

 

벌거벗은 압제의 힘이 거의 효과가 없는 내전에서는, 참가자들에게 최고의 자기희생의 정신이 요구된다. 노동자와 농민들은 자기 자신의 해방을 위한 투쟁을 수행할 때에만 오로지 승리를 보장할 수 있다. 이러한 조건들 하에서, 프롤레타리아트를 부르주아지의 지도하에 종속시키는 것은 사전에 내전에서의 패배를 분명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간단한 진리들은 순전한 이론적 분석의 결과가 결코 아니다. 반대로, 그것들은 적어도 1848년으로부터 시작되는 역사 속에서의 전체 경험으로부터 나온 이론의 여지가 없는 추론을 의미한다. 현대 부르주아지 사회의 역사는 온갖 종류의 인민전선, 즉 노동인민들을 속이기 위한 가장 다양한 정치적 조합들로 가득하다.

 

 

 

부르주아지의 그림자와의 동맹

 

정치적으로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실제로 스페인 인민전선에는 힘의 평행사변형조차 부족했다는 것이다. 부르주아지의 자리는 그들의 그림자에 의해 장악되었다. 스탈린주의자, 사회주의자, 그리고 무정부주의자들이라는 매개를 통하여, 스페인 부르주아지는 인민전선에 참여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조차 없이 프롤레타리아트를 자기 자신들에게 종속시켰다. 모든 정치적 색조의 착취자들의 압도적 다수가 프랑코 진영으로 넘어갔다. '영구 혁명'에 대한 어떠한 이론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부르주아지는 처음부터 혁명적 대중운동은 그것이 어떻게 시작되든 간에 토지와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에 대항하는 방향이 될 것이며, 민주주의적 방책들로는 이 운동을 다루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것이 소유계급들 중에서 오직 하찮은 떨거지들(아자나(Azana)씨와 그 외의 부르주아지가 아닌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대리인들)만이 공화 진영에 남아 있었던 이유이다. 군사적 독재에 모든 것을 걸면서, 동시에 소유계급들은 '공화국' 영토의 대중들의 사회주의 운동을 무력화시키고, 해체하고, 결국 교살시키기 위하여 과거의 그들의 대표자들을 활용할 수 있었다

 

눈곱만큼도 스페인 부르주아지를 대변하지는 않았지만, 좌익 공화주의자들은 여전히 노동자와 농민들을 보다 덜 대변했다. 그들은 그들 자신 이외의 누구도 대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동맹자들인 사회주의자, 스탈린주의자, 그리고 무정부주의자들 덕택에, 이들 정치적 유령들이 혁명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어떻게? 아주 간단하게. "민주주의 혁명", 즉 사적소유의 신성불가침의 원칙을 실현함으로써.

 

 

 

인민전선의 스탈린주의자들

 

스페인 인민전선과 그것의 내부 기제들의 등장의 이유는 더할 나위 없이 명확하다. 좌익 부르주아지의 일선에서 물러난 지도자들의 임무는 대중들의 혁명을 저지하는 것과 착취자들이 스스로 잃어버린 자신감을 회복시키는 것에 있었다. "우리, 공화주의자들이 똑같은 일을 할 수 있는데 당신들은 왜 프랑코를 필요로 하는가? 이러한 중심적인 지점에서, 아자나와 컴패니스(Companys)의 이해관계는 "무질서"에 맞서 "질서"를 보존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실천으로 증명함으로써 프랑스와 영국의 신뢰를 획득할 필요가 있던 스탈린의 이해관계와 완전히 일치했다. 스탈린은 노동자들 앞에서의 위장막으로서 아자나와 컴패니스가 필요했다. 즉, 물론 스탈린 자신은 사회주의를 지지하지만, 공화파 부르주아지를 축출하지 않도록 주의해야만 한다! 아자나와 컴패니스는 무기를 공급했던 고매하고 강력한 외국의 후원자라는 것 때문이 아니라 감히 노동자들을 공격하겠다는 것 때문에 혁명적 시기의 권위를 가지는 경험 있는 사형집행자로서의 스탈린을 필요로 했다.

 

오래 전에 계급투쟁의 경로에서 이탈했던 제2 인터내셔널의 고전적 개량주의자들이 모스크바의 지원 덕분에 새로운 확신의 물결을 느끼기 시작했다. 첨언하면, 이 지원은 모든 개량주의자들에게 주어졌던 것이 아니라 가장 반동적인 개량주의자들에게만 주어졌다. 카발레로(Caballero)가 노동자 귀족들을 향해 돌아섰던 사회당의 얼굴을 대표했다. 네그린(Negrin)과 프리에토(Prieto)는 항상 부르주아지에 기대를 걸었다. 네그린은 모스크바의 도움으로 카발레로를 획득했다. 인민전선의 포로였던 좌익 사회주의자들과 무정부주의자들은 구할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민주주의를 구하기 위하여 애썼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이 인민전선의 헌병들에 맞서 감히 대중을 동원하려하지 않았던 까닭에, 결국 그들의 노력은 비탄과 울부짖음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해서 스탈린주의자들은 사회당의 공공연한 극우 부르주아 세력과 동맹을 맺었다. 그들은 POUM, 무정부주의자, "좌익"사회주의자들과 같은 좌익, 다시 말해 가장 관계가 먼 정도이기는 했지만 혁명적 대중의 압력을 반영하기는 했던 중도주의 조직들에 대한 억압을 지휘했다.

 

그 자체로 굉장히 중요했던 이 정치적 사실은 동시에 마지막 몇 해 동안 코민테른의 퇴행의 척도를 제공한다. 나는 한때 스탈린주의를 관료적 중도주의로 정의했고, 사태들이 이 정의의 올바름에 대한 일련의 확증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것은 명백하게 쓸모없는 것이다. 보나파르트적 관료의 이해관계는 더 이상 중도주의적 망설임, 동요와 조화를 이룰 수 없다. 부르주아지와의 화해를 추구하는 스탈린주의 도당은 국제 노동 귀족들 중에서 가장 보수적인 조직들과의 동맹만을 맺을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이 국제적인 영역에서 스탈린주의의 반혁명적 성격을 확실히 고착시켜왔다.

 

 

 

스탈린주의의 반혁명적 우월함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그리고 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했던 사회주의자들과 무정부주의자들의 조직들에도 불구하고 수적으로 보잘 것 없었고, 지도부도 능력이 없었던 스페인 공산당이 모든 권력의 지배권을 자신의 수중으로 모을 수 었었던 것으로 판명되었는가라는 수수께끼의 답으로 거의 다가서게 한다. 단순히 스탈린주의자들이 권력을 위하여 소비에트 무기들을 거래했다는 평범한 설명은 지나치게 피상적인 것이다. 무기의 대가로 모스크바는 스페인의 금을 받았다. 자본주의 시장의 법칙에 따르면, 이것으로 모든 것이 커버된다. 그러면 스탈린은 어떻게 물건을 팔면서 권력 장악을 획책했을까?

 

소비에트 정부가 군사적 지원을 제공함으로써 대중들의 입장에서 권위를 올리면서 자신들의 "협조"의 조건으로 혁명가들에 대항하는 철저한 방책들을 요구했고, 그렇게 해서 자신의 길로부터 위험스러운 반대파들을 제거했다는 것이 흔한 대답이다. 이 모든 것이 논쟁의 여지는 없지만, 이것은 사물의 한 측면, 그리고 가장 덜 중요한 측면일 뿐이다.

 

소비에트의 지원이 만들어주었던 "권위"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공산당은 작은 소수파에 머물렀고, 노동자들 쪽에서 어느 때보다도 커지는 증오에 직면했다. 반면, 모스크바로서는 조건을 만들어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발렌시아가 그 조건들에 동의해야만 했다.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자모라(Zamora), 컴패니스, 네그린뿐만 아니라 수상으로 재직하던 동안의 카발레로 또한 모두가 얼마간은 모스크바의 요구들에 기꺼이 동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왜였을까? 왜냐하면 이들 신사양반들 스스로가 혁명을 부르주아지적 한계 내에서 유지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모든 노동자들의 혁명적 공세를 극도로 두려워했다.

 

무기와 궁극적으로는 반혁명적 원리의 소유자였던 스탈린은 이들 모든 조직들의 구원자였다. 그들의 희망처럼, 스탈린은 그들에게 프랑코에 대한 군사적 승리를 보증해주었고, 동시에 혁명의 경로에 대한 모든 책임을 면해 주었다. 그들은 모스크바가 자신들을 위하여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재수립한 이후에 사용할 요량으로 자신들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가면들을 서둘러 옷장 속에 넣었다. 이후 자신들의 안락함에 대한 대미를 장식하면서, 이들 신사양반들은 스탈린과의 군사적 협약의 필요성을 가지고 노동자들에 대한 자신들의 배신을 정당화할 수 있었다.

 

오직 이러한 폭넓은 관점으로부터만, 우리는 아자나, 네그린, 컴패니스, 카발레로, 가르시아 올리버(Garcia Oliver) 등과 같은 정의와 자유의 옹호자들이 GPU의 범죄에 대하여 보여주었던 천사와도 같은 관용에 대한 분명한 그림을 얻을 수 있다. 만약 그들이 확언하듯이 그들에게 다른 선택이 없었다면, 그것은 그들이 혁명가들의 머리와 노동자들의 권리 이외에는 비행기와 탱크를 지불할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순전히 민주주의적", 즉 반사회주의 강령이 테러 이외의 방책으로는 실현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노동자와 농민들이 공장과 부동산들을 점거하고, 과거의 주인들을 내쫓고, 지방에서 권력을 장악하면서 혁명의 길에 들어서자, 민주주의자, 스탈린주의자 혹은 파시스트까지 부르주아지 반혁명에게는 거짓말과 속임수에 의해 보충을 받는 피비린내 나는 압제를 통하는 것 말고는 이 운동을 저지할 다른 방책이 없었다. 이 길에서 스탈린주의 도당들의 우월함은 아자나, 컴패니스, 네그린, 그리고 다른 좌익 동맹들을 넘어서는 방책들을 즉각적으로 적용할 수 있던 그들의 능력에 있었다.

 

 

 

스탈린이 자기 자신의 방식으로 영구혁명의 이론의 정확성을 확증하다

 

이렇게 해서 스페인 공화국 영토에서는 2개의 화해 불가능한 강령들이 서로 대결했다. 한편으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 사적 소유를 지켜내고, 프랑코로부터 가능한 많은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한 강령과 다른 한편으로,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권력장악을 통하여 사적소유를 폐지하고자 했던 강령[이 그것들이다.-해석자의 첨가]. 첫 번째 강령은 노동귀족, 최고의 소부르주아지 부위들, 그리고 특히 소비에트 관료라는 매개를 통하여 자본주의의 이해관계를 표현했다. 두 번째 강령은 완전하게 의식적이지는 않았지만 강력했던 혁명적 대중운동의 경향들을 맑스주의의 언어로 바꾸었다. 혁명을 위해서는 불행하게도, 한 줌의 볼셰비키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 인민전선이라는 반혁명적 장벽이 서 있었다.

 

또한 인민전선이라는 정책은 결코 무기 제공자로서의 스탈린의 공갈에 의해 결정되지 않았다. 물론 적지 않은 공갈이 있었다. 그러나 이 공갈의 성공 이유는 혁명의 내부적 상태 그 자체에 본래적으로 있었다. 6년 동안, 혁명의 사회적 환경은 반(半)봉건적 부르주아지 소유관계의 정권에 대한 증가하는 대중의 공세였다. 가장 극단적인 방책으로 이 소유관계를 지켜야 할 필요성이 부르주아지를 프랑코의 품으로 내 던졌다. 공화파 정부는 "민주적" 방책으로 소유를 방어하겠다고 부르주아지에게 약속했지만, 1936년 7월에 특히 자신의 완전한 파산을 드러냈다. 소유 전선에서의 상황이 군사 전선에서의 상황보다 훨씬 더 위협적으로 되자, 무정부주의자들을 포함하는 모든 색조의 민주주의자들은 스탈린 앞에 조아렸다. 그리고 스탈린은 자신의 병기고에 프랑코의 방책들 말고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트로츠키주의자들", POUM주의자들, 혁명적 무정부주의자들, 그리고 좌익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박해, 추악한 중상비방, 가짜 서류들, 스탈린주의자들의 감옥에서의 고문들, 습격에 의한 살인들, 이런 모든 것들이 없었다면 공화국 깃발 아래의 부르주아지 정권은 채 2달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GPU가 이 정세의 지배자임을 증명했는데, 그것은 GPU가 다른 누구보다도 단호하게, 다시 말해 가장 비열하게 그리고 가장 피에 굶주린 채,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항하여 부르주아지의 이해관계를 방어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혁명에 맞서는 투쟁 속에서, "민주적" 케렌스키는 처음에는 코르닐로프의 군사독재에 대한 지지를 보냈고, 나중에는 전제주의 장군 크란스노프(Kransnov)의 화물열차로 페트로그라드에 들어가려고 했다. 반면, 볼셰비키들은 민주주의 혁명을 완전하게 수행하기 위하여 "민주적" 허풍쟁이들과 수다쟁이들의 정부를 타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군사(혹은 "파시스트") 독재에 대한 모든 종류의 시도를 끝장냈다.

 

스페인 혁명은 다시 한 번 파시스트 반동의 방책에 맞서 민주주의를 방어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증명했다. 그리고 거꾸로 말하면,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방책을 통하는 것 말고는 파시즘에 맞서는 진정한 투쟁을 수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스탈린은 GPU의 보나파르트적 방책들을 가지고 민주주의를 파괴하면서, "트로츠키주의"(프롤레타리아트 혁명)에 대항하는 전쟁을 벌였다. 이것은 다시 한 번 단호하게 코민테른에 의해 수용된 민주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은 시간적으로 서로 별개인 2개의 독립적인 역사의 장들로 바뀐다는 과거의 모든 멘셰비키 이론을 논박한다. 모스크바의 사형 집행자들의 활동은 자기 자신의 방식으로 영구혁명의 이론의 올바름을 입증한다.

 

 

 

무정부주의자들의 역할

 

스페인 혁명에서 무정부주의자들은 어떠한 종류의 독립적인 입장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들이 했던 모든 것들은 볼셰비키주의와 멘셰비키주의 사이에서의 동요였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무정부주의 노동자들은 (1936년 7월 19일과 1937년 5월의 나날들에서) 본능적으로 볼셰비키의 길에 들어서고자 열망했던 반면 그들의 지도자들은 반대로 자신들의 모든 힘을 다해서 대중들을 인민전선, 즉 부르주아지 정권으로 강제했었다.

 

무정부주의자들은 스스로를 자기 자신의 노동조합에, 즉 평화적 시기라는 일상에 지배적인 조직들에 제한하기 위하여 애씀으로서, 그리고 노동조합의 틀 밖에서, 대중들 사이에서, 정치적 정당들 사이에서, 그리고 정부 기구에서 벌어지는 것들을 무시함으로서 혁명의 법칙과 임무에 대한 치명적인 이해의 부족을 드러냈다. 무정부주의자들이 혁명가들이었다면, 그들은 무엇보다도 결코 노동조합에 합류하지 않았던 가장 억압받던 계층을 포함하여 도시와 지방의 모든 노동인민들의 대표자들을 통합시키는 소비에트의 수립을 호소했을 것이다. 혁명적 노동자들이 자연스럽게 이들 소비에트들에서 지배적인 지위를 장악했을 것이다. 스탈린주의자들은 하찮은 소수로 남아있게 되었을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무적의 힘에 대하여 확신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부르주아지 국가기구는 허공에 매달린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한번의 강력한 타격으로도 이들 기구를 박살내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사회주의 혁명이 강력한 추진력을 받았을 것이다. 프랑스 프롤레타리아트가 레온 블룸이 오랫동안 피레네 산맥 너머의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봉쇄하도록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스크바 관료들도 스스로에게 그러한 사치를 허용하지 못했을 것이다. 가장 힘든 문제들이 소비에트가 등장하면서 해결되었을 것이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정치"로부터 노동조합 속에 숨고자 애쓰던 무정부주의-생디칼리스트들은 전 세계와 그들 자신에 대단히 놀랍게도 부르주아지 민주주의라는 수레의 5번째 바퀴인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그리 오래지 않아 5번째 바퀴는 불필요해진다. 가르시아 올리버와 그의 동류들이 스탈린과 그의 똘마니들이 노동자들로부터 권력을 빼앗는 것을 도와준 이후, 무정부주의자들 자신이 인민전선 정부로부터 쫓겨났다. 그리고 나서조차 그들은 승리자를 지지하면서 그들에게 자신들의 헌신적인 애정을 확인해주는 것 이외에는 하지 않았다. 그들은 대 부르주아지 앞에서의 소 부르주아지의 두려움, 대(大)관료 앞에서의 소관료의 두려움을 (희생자와 사형 집행자들 사이의) 공동전선의 신성함과 자기 자신의 것을 포함하여 어떠한 종류의 독재도 허용할 수 없음에 대한 애절한 표현들로 덮어 가렸다. "결국, 1936년 7월에 우리가 권력을 잡을 수 있었는데..." "결국, 1937년에 우리가 권력을 잡을 수 있었는데..." 무정부주의자들은 자신들의 혁명에 대한 배신을 이해하고 칭찬해 달라고 스탈린-네그린에게 애원했다. 구역질나는 장면!

 

"권력을 장악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권력을 장악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우리가 모든 종류의 독재에 반대했기 때문이었다"는 등의 자기 정당화에는 완전히 반혁명적인 이론으로서의 무정부주의에 대한 결정적인 비난이 본래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권력의 장악을 비난하는 것은 그 권력을 휘두르는 자들, 즉 착취자들에게 자발적으로 권력을 남겨두는 것이다. 모든 혁명의 본질은 새로운 계급이 권력을 장악하여 자기 자신의 강령을 현실에서 실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에 있었고, 그러한 것에 있다. 전쟁을 수행하면서 승리를 거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권력장악을 준비하는 것 없이 대중들을 봉기로 이끄는 것은 불가능하다.

 

누구도 권력 장악 이후에 무정부주의자들이, 물론 그들의 강령이 실현 가능한 것이라고 가정하면서, 자신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종류의 정권을 수립하는 것을 막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무정부주의 지도자들 스스로가 그것에 대한 신념을 잃었다. 그들은 권력으로부터 숨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모든 종류의 독재"를 반대하기 때문이 아니라(실제로는 그들은 투덜대고 푸념하면서도 스탈린-네그린의 독재를 지지했고, 여전히 지원한다), 그들이 만약 그들이 가지고 있었다면 어떤 것이건 원칙과 용기를 완전히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고립", "개입", "파시즘" 모든 것들을 두려워했다. 그들은 프랑스와 영국을 두려워했다. 무엇보다도 이들 빈말꾼들은 혁명적 대중들을 두려워했다.

 

권력 장악에 대한 포기는 필연적으로 모든 노동자 조직들을 개량주의의 늪으로 내 던지고, 그 조직들을 부르주아지의 노리개로 바꾼다. 계급적 구조를 가지는 사회라는 관점에서 이것은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권력의 장악이라는 목적에 반대하던 무정부주의자들은 결국에는 혁명이라는 수단에 반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CNT와 FAI의 지도자들은 1936년 7월에 부르주아지가 계속해서 권력의 그림자를 붙들 수 있도록 도와주었을 뿐만 아니라, 한번의 타격에 의해서 그들이 잃어버렸던 것들을 조금씩 복구할 수 있도록 그들을 도와주었다. 1937년 5월에 CNT와 FAI의 지도자들은 노동자들의 봉기를 사보타지했고, 그럼으로써 부르주아지의 독재를 구원해주었다. 따라서 단지 반(反)정치적이기를 원했던 무정부주의는 실제로는 혁명에 반대하는 것으로 드러났으며, 보다 결정적인 순간에는 반(反)혁명적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1931-37년에 있었던 커다란 시험 이후에도 크론슈타트에 관한 과거의 반동적 난센스를 되풀이하며, "스탈린주의는 맑스주의와 볼셰비키주의의 필연적 귀결임"을 단언하는 무정부주의 이론가들은 이것으로 간단하게 자신들이 혁명을 위해서는 영원히 쓸모가 없음을 드러낸다.

 

맑스주의는 본래적으로 타락했고, 스탈린주의는 그것의 합법적인 후계자라고 말하는가? 그러나 우리 혁명적 맑스주의자들은 왜 전세계적으로 스탈린주의와의 생사를 건 투쟁을 벌이고 있는가? 왜 스탈린주의 깡패집단은 트로츠키주의에서 최고의 적을 발견하는가? 왜 우리의 관점이나 우리의 실천의 방책들에 대한 모든 접근(두루티(Durruti), 안드라데(Andres), 닌(Nin), 랜도(Landau) 등등)이 스탈린주의 깡패들로 하여금 피비린내 나는 보복에 의존하도록 강제하는가? 반면, 왜 스페인 무정부주의자들의 지도자들은 GPU에 의해서 모스크바와 마드리드에서의 범죄가 자행되던 동안에 부르주아지와 스탈린의 하인으로서, 카발레로-네그린 하에서 장관으로 복무했는가? 왜 심지어 지금도 파시즘에 맞선 투쟁을 핑계로 무정부주의자들은 파시즘에 맞선 투쟁에서 자신들의 무능력을 증명했던 혁명에 대한 사형집행자인 스탈린-네그린의 자발적 포로로 남아 있는가?

 

무정부주의자들은 크론슈타트와 마크노(Makhno)의 뒤에 숨는 것으로는 아무도 속이지 못할 것이다. 크론슈타트 사건과 마크노와의 투쟁 속에서, 우리는 농민 반혁명으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를 방어했다. 스페인 무정부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으로부터 부르주아지 반혁명을 방어했고 계속해서 방어하고 있다. 어떠한 궤변도 스페인 혁명에서 무정부주의와 스탈린주의가 바리케이드의 같은 쪽에 있었던 반면, 혁명적 맑스주의자와 함께 노동 대중들은 바리케이드의 다른 쪽에 있었다는 사실을 역사의 연보로부터 지우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 속에 영원히 남아 있게 될 진실이다!

 

 

 

POUM의 역할

 

POUM에 관한 기록이 그렇게 나은 것은 아니다. 이론의 측면에서, 확실히 POUM은 영구혁명의 정식에 스스로를 기초하려고 노력했다(이것이 스탈린주의자들이 POUM주의자들을 트로츠키주의자들로 불렀던 이유이다). 그러나 혁명은 이론적 언명들에 만족하지 않는다. 무정부주의자들을 포함하는 개량주의 지도자들에 대항하여 대중을 동원하기는커녕, POUM은 자본주의에 대한 사회주의의 우월성에 대하여 이들 신사양반들을 확신시키려고 노력했다. 이런 소리굽쇠가 POUM 지도자들의 모든 기사들과 발언들에서 울렸다. 무정부주의 지도자들과 논쟁하기 않기 위해서 그들은 CNT 내부에서 자기 자신들의 중핵을 형성하지 않았으며, 일반적으로 그곳에서 어떠한 종류의 활동도 수행하지 않았다. 격렬한 분쟁을 피하기 위하여 그들은 공화 진영의 군대에서 혁명적 활동을 수행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들은 "그들 자신의" 기구들을 지키거나, 전선에서 "그들 자신의" 구역을 장악했던 "그들 자신의" 노동조합을, "그들 자신의" 민병대를 건설했다.

 

계급으로부터 혁명적 전위를 고립시킴으로서, POUM은 전위를 무기력하게 했고 계급을 지도부가 없는 상태로 내버려두었다. 정치적으로 POUM은 내내 볼셰비키주의 보다는 자신들이 그 좌익세력에게 가리개를 제공해 주었던 인민전선에 훨씬 더 가까운 채로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POUM이 피비린내 나고 비열한 억압의 희생자로 전락했다는 것은 인민전선이 자가 자신의 좌익을 조각조각 잘라내는 것을 제외하고는 스스로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 것, 즉 사회주의 혁명을 교살시킨 것에서 기인했다.

 

자기 자신의 의도들과는 반대로, 결국 POUM은 혁명정당 건설의 길에 있는 최고의 걸림돌이었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어정쩡한 방식으로, 우유부단하고 분명하지 않은 방식으로, 간단히 말해서 중도주의적으로 POUM을 감정적으로 지지했던 네덜란드 혁명적 사회주의 노동자 당 지도자 스니블리에트(Sneevliet)와 같은 제4 인터내셔널의 이상주의적이고 책략에 능한 지지자들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었다. 혁명은 중도주의를 혐오한다. 혁명은 중도주의를 폭로하고 절멸시킨다. 내친걸음에 혁명은 중도주의의 동지들과 대리인들에게 치욕을 준다. 이것이 스페인 혁명의 가장 중요한 교훈들 중의 하나이다.

 

 

 

무장의 문제

 

원칙적으로 그리고 의식적으로 모스크바의 무기에 대한 지불의 필요성으로 스탈린에 대한 자신들의 굴종을 정당화하려고 애쓰는 사회주의자들과 무정부주의자들은 간단히 말해서 능숙하지 못한 거짓말쟁이들이다. 물론 그들 중 다수는 살인이나 누명과의 인연을 끊는 쪽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목적은 그에 상응하는 수단을 필요로 한다. 1931년 4월로부터 시작하여, 즉 모스크바의 군사적 개입보다 훨씬 더 전부터, 사회주의자들과 무정부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방해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다했다. 스탈린은 그들에게 이러한 작업을 어떻게 끝까지 수행하는지를 가르쳤다. 그들이 단지 스탈린과 정치적으로 생각을 같이 했다는 이유 때문에, 그들은 스탈린의 범죄의 공범이 되었다.

 

만약 무정부주의 지도자들이 조금이라도 혁명가들을 닮았더라면, 그들은 모스크바로부터의 첫 번째 공갈에 대하여 사회주의적 공세를 지속하는 것뿐만 아니라 세계 노동계급 앞에 스탈린의 반혁명적 조건들을 폭로하는 것으로 답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사회주의 혁명과 프랑코 독재 사이에서 공개적으로 선택하도록 모스크바 관료들 강제했을 것이다. 테르미도르 관료들은 혁명을 두려워하고 증오한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파시스트의 밧줄에 교수형 당하는 것 또한 두려워한다. 이외에도 테르미도르 관료들은 노동자들에 의존한다. 아마도 모스크바가 보다 합리적인 가격으로 무기를 공급하도록 강제되었을 것이라는 징후가 농후하다.

 

그러나 세상이 스탈린주의 모스크바의 주변을 도는 것은 아니다. 1년 반의 내전 동안, 스페인 전쟁산업은 몇 개의 민간 공장들을 전쟁 생산으로 바꾸는 것을 통해서 강화되고 발전될 수 있었고 그래야 했을 것이다. 이 작업은 오로지 스탈린과 그의 스페인 동맹들이 공히 노동자 조직의 주도성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수행되지 않았다. 강력한 전쟁산업은 노동자들의 수중에 있는 강력한 기구가 되었을 것이다. 인민전선의 지도자들은 모스크바에 의존하는 것을 택했다.

 

정확하게 이 문제에 관하여 인민전선의 배신적인 역할이 아주 충격적으로 폭로되었다. 인민전선은 스탈린의 부르주아지와의 배신적인 거래에 대한 책임을 노동자들의 조직들에 강제로 떠넘긴다. 무정부주의자들이 소수파로 남아 있었던 한, 당연히 그들은 그것이 무엇이건 지배 블럭이 모스크바와 모스크바의 지배자들인 런던과 파리를 기쁘게 할 책임을 떠맡는 것을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선에서 최고의 투사들이기를 멈춤이 없이, 그들은 배신과 배신자들로부터 공개적으로 자신들을 분리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랬어야 했을 것이다. 그들은 대중들에게 실제 상황을 설명하고, 대중들을 부르주아지 정부에 대항하여 조직하며, 결국에는 권력을 장악하기 위하여 자신의 세력을 확대하고, 그것을 가지고 모스크바의 무기를 장악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랬어야 했다.

 

그리고 만약 인민전선이 없는 가운데 모스크바가 무기를 제공하는 것을 완전히 거부해야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우리는 이것에 대하여 만약 소련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면 이라고 대답한다. 혁명들은 이때까지 승리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결코 혁명들에 무기를 공급했던 고매하고 강력한 외국의 후원자들 덕분이 아니었다. 일반적으로는 반혁명이 외국의 후원의 덕을 본다. 우리가 반드시 소비에트에 대항했던 프랑스, 영국, 미국, 일본, 그리고 기타 군대들의 개입의 경험을 다시 상기해야만 하는가?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외부의 군사적 도움이 없이 국내의 반동과 외국의 개입세력들을 패퇴시켰다. 혁명은 첫째로 영토에 있던 무기를 장악할 가능성과 적들의 무기를 파괴할 가능성을 대중들에게 제공했던 강력한 사회적 강령의 도움으로 성공했다. 적군은 프랑스, 영국, 미국 군대의 장비들을 장악했고, 외국 파견 군대를 바다로 내 몰았다. 진정으로 이것을 잊었단 말인가?

 

만약 무장한 노동자와 농민들의 선두에, 소위 공화국 스페인의 선두에 비겁한 부르주아지의 대리인들이 아니라 혁명가들이 있었다면, 무장의 문제는 결코 주요한 것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식민지 모로코인들과 무쏠리니의 병사들을 포함하는 프랑코의 군대는 결코 혁명의 역병에 대한 면역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에 군대와 군사적 "천재들"이 부족했던 것이 아니다. 부족했던 것은 혁명적 정당이었다!

 

 

 

승리를 위한 조건들

 

착취자들의 군대에 맞서는 내전에서 대중들의 승리를 위한 조건들은 그 본질에서 매우 단순하다.

 

1. 혁명군대의 투사들은 과거의 ("민주주의적") 착취의 양식의 재수립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완전한 사회적 해방을 위해서 투쟁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어야만 한다.

 

2. 혁명군대의 후방뿐만 아니라 적의 후방에 있는 노동자와 농민들도 똑같은 것을 알고 이해하고 있어야만 한다.

 

3. 자기 자신의 전선뿐만 아니라 적의 전선, 그리고 양 진영의 후방에서의 선전은 사회혁명의 영감으로 완전히 충만해야만 한다. "우선 승리, 이후 개혁들"이라는 슬로건은 성서주의적 왕들로부터 스탈린에 이르기까지 모든 억압자와 착취자들의 슬로건이다.

 

4. 정치는 투쟁에 참여하는 계급들과 계층에 의해 결정된다. 혁명적 대중들은 자신들의 의지를 직접적으로 그리고 즉각적으로 표현하는 국가 기구를 가져야만 한다. 오로지 노동자, 병사, 그리고 농민의 대표들의 소비에트들만이 그러한 기구로 기능할 수 있다.

 

5. 혁명군대는 그들에 의해 획득된 지방들에서 사회혁명의 보다 긴급한 방책들을 선포해야만 할뿐만 아니라 현실에서 즉각적으로 실현해야만 한다. 당장 있는 식량, 공산품들, 그리고 다른 비축물의 몰수와 이것들의 궁핍한 사람들에게로의 이양, 노동인민들과 특히 전투원들의 가족들의 이해관계에 입각한 숙소와 주거의 재분배, 농민의 이해관계에 입각한 토지와 농경 물품의 몰수, 과거 관료를 대신하여 노동자 통제와 소비에트 권력의 재수립.

 

6. "민주주의자", "공화주의자", "사회주의자" 그리고 "무정부주의자"로 위장했을 지라도, 사회주의 혁명의 적들, 즉 착취분자들과 그들의 대행자들은 군대로부터 가차없이 쫓겨나야만 한다.

 

7. 각각의 군 단위의 수장에는 혁명가로서 그리고 병사로서 이론의 여지가 없는 권위를 가지는 인민위원들이 배치되어야만 한다.

 

8. 각각의 군 단위에는 노동자 조직에 의해 추천 받은, 굳건하게 단련된 가장 자기 희생적인 중핵이 있어야만 한다. 이 중핵의 성원들은 단지 하나의 특권만을 가지는데, 그것은 적들의 포화에 맞서 선두에 서는 것이다.

 

9. 지휘부대는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전체 성원들 중에서 이질적이고 신뢰할 수 없는 인자들을 포함한다. 그들에 대한 검증과 재검증, 그리고 가려냄은 전투경험, 위원들의 추천들, 그리고 일선 병사대오의 증언에 기초해야만 한다. 이와 동시에 혁명적 노동자들로부터 뽑힌 지휘관들에 대한 치열한 훈련이 진행되어야만 한다.

 

10. 내전의 전략은 군사적 기예의 법칙들을 사회혁명의 임무들과 결합시켜야만 한다. 선전에서뿐만 아니라 군사 작전에서도 역시 적의 다양한 군사 단위들의 사회적 구성(자발적으로 지원한 부르주아지, 동원된 농민들, 혹은 프랑코의 경우에서처럼 식민지 노예들)을 고려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작전의 노선을 정함에 있어서, 해당되는 지역들의 사회 체계(산업지역, 농민지역, 혁명적 혹은 반혁명적, 억압받는 민족들의 지역 등등)를 엄격하게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다. 간단히 말해, 혁명의 정책이 [내전의-해석자의 첨가] 전략보다 우위에 있다.

 

11. 혁명정부와 노동자와 농민들의 집행위원회는 모두 어떻게 군대와 노동인민들의 완전한 신뢰를 획득하는지 알고 있어야만 한다.

 

12. 외교 정책은 전 세계의 노동자, 피착취 농민들, 그리고 피억압 민족들의 자각을 자신의 주요한 목적으로 가져야만 한다.

 

 

 

스탈린은 패배의 조건을 보장했다

 

우리가 보듯이 승리를 위한 조건들은 아주 분명하다. 전체로서 이것들은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다. 스페인에는 이것들 중 어느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기본적인 이유는 혁명적 정당의 부재이다. 스탈린이 정치국, 인민위원, 세포, GPU 등등의 볼셰비키주의의 외견상의 관행들을 스페인의 토양에 이식하려고 시도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이들 형식들의 사회적 내용을 비워버렸다. 그는 볼셰비키 강령을 거부했고, 그것으로 대중들의 혁명적 주도성을 위해 필수적인 형식으로서의 소비에트들을 거부했다. 그는 볼셰비키주의의 기능을 부르주아지적 소유에 유용하게 배치했다. 자신의 관료적 편협함으로부터 그는 "인민위원들" 그 자체가 승리를 보장할 수 있다고 상상했다. 그러나 사적소유의 인민위원들은 단지 패배를 보장할 수 있었을 뿐이었음이 드러났다.

 

스페인 프롤레타리아트는 최고의 군사적 자질들을 보여주었다. 나라의 경제생활과 정치적 문화적 수준에서의 특별한 무게감으로 인해, 스페인 프롤레타리아트는 혁명의 첫 번째 날에 1917년의 시작에서의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보다 낮은 곳이 아니라 높은 곳에 서 있었다. 승리를 향한 길에서, 그 자신의 조직들이 주요한 걸림들로 서 있었다. 자신들의 반혁명적 기능과 일치하게, 스탈린주의의 지도적 도당은 돈으로 고용된 자들, 출세주의자들, 낙오한 인자들, 그리고 전반적으로 모든 종류의 사회적 인간쓰레기들로 구성되었다. 구제불능의 개량주의자들, 무정부주의 허풍쟁이들, POUM의 가망 없는 중도주의자들을 포함하는 다른 노동자 조직들의 대표자들은 투덜거리면서, 괴로워하면서, 동요하면서 책략을 부렸으나, 결국에는 스탈린주의자들에 순응했다. 그들의 합동 실천의 결과 노동자와 농민들의 사회혁명 진영은 부르주아지에, 혹은 보다 정확하게 부르주아지의 그림자에 종속되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사회혁명 진영은 짜내질 대로 다 짜내졌고, 그것의 성격은 파괴되었다.

 

대중들 차원에서의 영웅적 자질과 개인적인 혁명가들 차원에서의 용기가 부족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중들은 자기 자신의 자원들에 버려졌던 반면, 혁명가들은 강령도 없고 실천의 계획도 없이 분열된 상태로 있었다. "공화파" 군 지휘관들은 군사적 승리를 획득하는 것 보다 사회 혁명을 분쇄하는 것에 더 신경을 썼다. 병사들은 자신들의 지휘관에 대한 신뢰를 잃었고, 대중들은 정부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 농민들은 옆으로 비껴 섰다. 노동자들은 지치게 되었다. 패배가 패배의 뒤를 이었다. 사기저하가 급속하게 증가했다. 이 모든 것을 내전의 시작부터 예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자본주의 정권을 구출하는 임무를 스스로에게 설정함으로서, 인민전선은 스스로에게 군사적 패배의 운명을 선고했다. 볼셰비키주의를 거꾸로 돌림으로서, 스탈린은 혁명의 무덤을 파는 자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완벽하게 성공했다.

 

스페인의 경험이 다시한번 스탈린은 10월 혁명이나 러시아 내전을 이해하는데 완전히 실패했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것을 부연해야 하겠다. 그의 느림보와 같은 조야함은 1917-21년에 있었던 사태들의 폭풍우와 같은 행진에 절망적으로 뒤쳐졌다. 그가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던 1917년의 그의 연설들과 글에서, 이후 그의 테르미도르 "주의"가 완전하게 착상되었다. 이 측면에서, 1937년 스페인에서의 스탈린은 볼셰비키의 1917년 3월 대회의 스탈린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1917년에 그는 단지 혁명적 노동자들을 두려워했을 뿐이었지만, 1937년에 그는 노동자들을 목졸라 죽였다. 기회주의자가 사형집행자가 되었던 것이다.

 

 

 

"후방에서의 내전"

 

그러나 결국 카발레로와 네그린 정부들에 대한 승리는 공화파 군대 후방에서의 내전을 수반했을 것이다! - 민주주의적 속물이 공포에 질려 외친다. 이것과는 별도로 마치 공화국 스페인에서 내전, 그것도 가장 비열하고 배신적인 내전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노동자와 농민에 대항하는 소유자와 착취자들의 전쟁도 없었을 것이라는 것처럼. 이 계속되던 전쟁은 혁명가들에 대한 체포와 살해, 대중운동의 파괴, 노동자에 대한 무장해제, 부르주아지 경찰의 무장, 전선에 있던 무기도 없고, 도움도 받지 못하던 노동자 부대들에 대한 포기, 그리고 최종적으로 전쟁산업의 발전에 대한 인위적인 제한에서 발견된다.

 

이들 각각은 전선에 대한 잔혹한 타격, 부르주아지의 계급적 이해에 의해 지시되는 직접적인 군사적 배신으로 기능 한다. 그러나 스탈린주의자, 사회주의자, 그리고 무정부주의자들을 포함하는 "민주주의적" 속물들은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항하는 부르주아지의 내전을, 심지어 전선에 가장 인접한 지역들에서조차, "인민전선의 단결" 보호를 자신의 임무로 가지는 자연스럽고 피할 수 없는 전쟁으로 간주한다. 반면, 똑같은 속물들의 눈에는, "공화주의적" 반혁명에 맞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내전은 "반파시스트 세력들의 단결"을.... 파괴하는 범죄적인 "파시스트"적인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전쟁이다. 노만 토마스(Norman Thomas), 메이저 아틀리(Major Atlee), 오토 바우어(Otto Bauer), 지롬스키(Zyromsky), 말록스(Malraux), 그리고 듀란티(Duranty)와 로이스 피셔(Louis Fischer)와 같은 거짓말쟁이 소인배들이 전 세계적으로 이 비열한 격언을 퍼뜨린다. 그 동안 인민전선 정부는 마드리드로부터 발렌시아로, 발렌시아에서 바르셀로나로 움직인다.

 

사실들이 증명하듯이, 만약 사회주의 혁명만이 파시즘을 분쇄할 수 있다면, 다른 한편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성공적인 봉기는 지배계급들이 가장 커다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에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적 속물들은 프롤레타리아트 봉기의 예민함에 대한 증거로서 정확하게 이러한 어려움을 인용한다. 만약 프롤레타리아트가 민주주의적 속물들이 자신들에게 해방의 시간을 말해주기를 기다린다면, 프롤레타리아트는 영원히 노예로 남아 있을 것이다. 모든 가면을 뒤집어 쓴 반동적 속물들을 인식하고, 가면과 무관하게 속물들을 경멸하도록 노동자들을 가르치는 것이 혁명가들의 첫 번째요 가장 중요한 임무이다!

 

 

 

결과

 

공화 진영에 대한 스탈린주의자들의 독재는 본질적으로 오래가지 못한다. 만약 인민전선이라는 정치로부터 발생하는 패배들이 스페인 프롤레타리아트를 다시한번 혁명적 공세로 나아하게 한다면(이번에는 성공적으로), 스탈린주의 도당은 철 빗자루로 쓸려나갈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쪽의 가능성이 높은데) 스탈린이 혁명의 무덤을 파는 자로서의 작업을 끝까지 수행하는데 성공한다면, 그는 이 경우에도 감사의 말을 듣지는 못할 것이다. 스페인 부르주아지는 사형집행인으로서 스탈린을 필요로 하지만, 그를 후원자나 혹은 스승으로서 필요로 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한편으로 런던과 파리, 다른 한편으로 베를린과 로마는 모스크바 보다 훨씬 더 용해력이 있는 국가들이다. 스탈린 자신이 최종적인 파국 이전에 스페인에서의 자신의 흔적들을 덮어 가리기를 원할 수도 있다. 그래서 스탈린이 패배에 대한 책임을 자신의 가장 가까운 동맹들에게 지우려 하지 않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리트비노프(Litvinov)가 외교적 관계의 재수립을 프랑코에게 간청하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여러 번 보아온 것이다.

 

그러나, 장군 프랑코에 대한 소위 공화 군대의 완전한 군사적 승리조차 "민주주의"의 승리를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노동자들과 농민들은 1931년 4월과 1936년 2월에 부르주아지 공화주의자들과 그들의 좌익 대행자들을 2번에 걸쳐 권력에 앉혀 주었다. 2번 모두, 인민전선의 영웅들은 인민들의 승리를 부르주아지의 가장 반동적이고 가장 진지한 대표자들에게 갖다 바쳤다. 인민전선의 장군들에 의해 획득되는 3번째 승리는 노동자와 농민들의 등에 올라 탄 파시스트 부르주아지와의 필연적인 협정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한 정권은 아마도 군주 없는, 그리고 카톨릭 교회의 공공연한 지배가 없는 군사독재의 형식과 전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결국, 공화주의자들의 부분적 승리가 투쟁하고 있는 진영들을 화해시키기 위하여 "이해관계가 없는" 영국과 프랑스의 조정자들에 의해 활용될 가능성이 있다. 이런 여러 경우에, "민주주의"의 마지막 잔재들은 장군 미아자(Miaja)(공산주의자!)와 장군 프랑코(파시스트)의 우호적인 포옹 속에서 질식되어 죽에 될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시한번 반복하도록 하자. 승리는 사회주의 혁명이나 혹은 파시즘에게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비극이 희극에게 양보를 할 수도 있다는 것이 배제되지는 않는다. 인민전선의 영웅들이 자신들의 마지막 밑천을 소진해야만 할 때, 배와 비행기를 타기 전에, 아마도 인민들에게 "좋은 기억"을 남기기 위하여 일련의 "사회주의적" 개혁들을 선포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 것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세계의 노동자들은 영웅적인 혁명을 파괴했던 정당들을 증오하면서 경멸적으로 기억할 것이다.

 

스페인의 비극적 교훈은 세계의 모든 선진노동자들에 대하여 선언되는, 더 큰 사태들에 앞선 끔찍한(아마도 마지막) 경고이다. 맑스는 "혁명들은 역사의 기관차들이다"라고 말했다. 혁명들은 반정도 혹은 4분의 1정도 혁명적인 정당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빨리 움직인다. 뒤에 처지는 자는 누구라도 기관차의 바퀴로 떨어지며, 결과적으로 (그리고 이것이 가장 큰 위험인데) 기관차 자체도 또한 희귀하게는 파괴된다.

 

혁명의 문제를 끝까지, 그것의 궁극적인 구체적인 결론으로까지 숙고할 필요가 있다. "인민" 전선, 그리고 기타 모든 종류의 전선으로 부르는 피상적인 소부르주아지 그룹들의 편견과 두려움이 아닌 전투 중에 있는 계급들의 운동, 즉 혁명의 기본적인 법칙들에 정책을 맞출 필요가 있다. 혁명 중에 최소저항의 노선은 최대의 재앙의 노선이다. 부르주아지로부터의 "고립"을 두려워하는 것은 대중으로부터의 고립을 초래하는 것이다. 노동귀족의 보수적인 편견들에 순응하는 것은 노동자와 혁명에 대한 배신이다. 과도한 "신중함"은 신중함의 가장 치명적인 부족이다. 이것이 스페인에서 중도주의 POUM이라는 이름의 가장 순수한 정치 조직의 파괴의 중요한 교훈이다. 런던 사무국의 정당들과 조직들은 바로 직전의 역사의 교훈으로부터 필요한 결론들을 도출하고 싶어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할 수도 없는 것이 분명하다. 이것으로 그들은 스스로에게 사망선고를 내리는 것이다.

 

이에 대한 보상으로, 현재 새로운 세대의 혁명가들이 패배의 교훈을 통해서 교육을 받고 있다. 이 세대는 제2 인터내셔널의 굴욕적인 평판을 실천으로 입증했다. 이 세대는 제3 인터내셔널의 추락의 깊이를 측정했다. 이 세대는 아나키스트들을 그들의 말이 아니라 그들의 행동으로 어떻게 판단할 것인지를 배웠다. 이것은 수많은 투사들의 피로 값을 치른 헤아릴 수 없이 값진 훌륭한 학교이다! 이제 혁명적 중핵들은 오로지 제4 인터내셔널의 기치 아래에만 집결하고 있다. 패배의 울부짖음의 한가운데에서 태어난 제4 인터내셔널은 노동인민들을 승리로 이끌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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