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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의 스탈린 유파에 대한 재고찰_ 2부 일국에서의 사회주의

국제공산주의동맹[http://www.icl-fi.org의 팜플렛]

[  ]속의 내용은 해석자의 첨가

 

 

가디언에 대한 응답

왜곡의 스탈린 유파에 대한 재고찰

 

2부 일국에서의 사회주의

 

역사상 최초의 노동자 국가의 꼭대기에 있던 관료층에 의한 권력의 찬탈이 “일국에서의 사회주의”라는 스탈린주의 교의의 기원들에 관한 이야기의 하나이다. 이 특권화된 계층은 후진적 농민 국가에서 10월 혁명의 성취들을 방어하는 필수적인 수단으로서 형성되었고, 내전으로 파괴되었으며, 제국주의의 봉쇄와 독일에서의 3차례의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패배(1919년, 1921년, 그리고 2923년)로 고립되었던 소비에트 국가 기구 속에서 스스로를 공고히 했다. 이들 불리한 조건들은 혁명의 맹목적인 “확장”보다는 “타협”과 강화의 정책을 요구했다. 부르주아지지 전문가들에 대한 산업 재건에 있어서의 조력자로의 견인, 기아를 끝내기 위한 중간 농민들에 대한 보장들, 자본주의 나라들에서의 대중들을 향한 길을 찾기 위한 노동운동의 개량주의 지도자들과의 공동전선 정책 - 이것들은 당시 필수적인 임무들이었다. “좌익 공산주의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원칙에 대한 “타협들”을 거부하는 것, 원칙적으로 부르주아지 전문가들에 대한 활용에 반대하는 것, 그리고 “노동자 반대파”가 그랬던 것처럼, 산업에 대한 국가경영의 노동조합 통제로의 대체를 주장하는 것은 단지 패배로 귀결될 수 있을 뿐이었다. 항상 그렇듯이, 모든 타협은 위험들을 수반한다.

 

레닌은 처음부터 이들 위험들에 대하여 알고 있었고, 관료적 남용들에 재갈을 물기기 위하여 일찍이 1919년에 “노동자 농민 감찰[기관]”(라브크린)을 설치했다. 하지만, 라브크린은 스탈린에 의하여 지휘되었고, 사실상 그의 사적 경찰력이 되었다. 1922년 11차 당대회 즈음이 되어서,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우리가 책임 있는 직위들에 있는 4700명의 공산주의자들이 있는 모스크바를 고려한다면, 그리고 만약 우리가 그 거대한 관료기구, 그 거대한 덩어리를 고려한다면, 우리는 누가 누구를 지도하고 있는지?를 물어보아야만 한다. 나는 공산주의자들이 그 덩어리를 지도하고 있다는 것을 들을 수 있을 지 진실로 굉장히 많이 의심스럽다.”

 

그리고 그의 최후의 글, “더 작지만 더 훌륭한 것이 더 좋다”(1923년)에서, 그는 관료주의와의 전면전을, “라브크린은 현재 최소한의 권위도 향유하지 않는다“는 것에 주목하면서 라브크린의 철저한 축소와 그것의 통제위원회와의 통합을 주장했다. 자신의 ”유언장“ 발문에서, 레닌은 스탈린의 당 총서기직 해임을 주장했다.

 

 

3인 동맹 대 트로츠키

 

그러나 단순한 행정적 행위들은 개인적이거나 조직적인 실패에 의한 것이기 보다는 역사 그 자체에 의하여 던져진 현상을 철폐할 수 없었다. 나라는 5년의 기아와 내전에 지쳐 있었고, 오지 않았던 유럽 혁명을 기다리는데 지쳐 있었다. 레닌의 죽음 직후에 스탈린, 지노비에프, 그리고 카메네프의 3인 동맹의 수중으로의 권력의 강화와 중앙 지도부로부터 트로츠키의 실질적인 축출이 이러한 분위기와 광대한 관료집단의 보수적인 이해관계를 반영했다.

 

1923에서 1924년 사이의 겨울에, 당 내부에서의 첨예한 위기가 당 민주주의와 산업화라는 융합된 주제들을 둘러싸고 발생했다. 농민과의 협력이라는 “신 경제 정책”이 농촌에서 소비에트 정부에 반대하는 자신의 부르주아지적 이해관계를 점증적으로 인식했던 강력한 쿨락(부농) 인자의 부상으로 귀결되었었던 반면, 산업은 “달팽이의 걸음걸이”로 성장하기를 계속했고, 동시에 스탈린은 지명되는 비서들의 체계를 통하여 당을 사적인 봉토로서 운영하고 있었다. 트로츠키는 중앙 집중화된 계획과 산업화를 향한 재빠른 전환과, 쿨락들에 대한 공세, 그리고 당 내부에 민주주의적 규범의 복귀를 요구했다. 3인 동맹은 이것에 반대했다. (1년 후에, 스탈린의 정책들을 지지했던 부하린은 “달팽이의 걸음걸이로 사회주의를 건설하기”와 농민들에 대한 “스스로를 부유하게 하라”는 호소에 관한 유명한 연설을 했다!). 거기에 더하여, 그들은 자신들의 노선이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확실하게 승리하도록 만들기 위하여 움직였다. 즉, 1924년 2월과 3월 동안에, 적어도 24만 명의 신규 당원들이 “레닌 소집” 중에 당으로 들어왔고, 그들을 당에 들어오자마자, 총서기(스탈린)의 노선을 지지하기 위한 거수기로서 정렬되었다. 이것에 의하여, 그리고 다른 다양한 관료적 책략들로, 스탈린은 반(反)트로츠키 집회로 바뀌어 버렸던 1925년 5월 당대회로부터 거의 모든 반대자들을 제거할 수 있었다.

 

그 전투에서의 두 번째 교전은 트로츠키가 현재 당 지도자들이 혁명 동안 했던 역할을 폭로했던, 그의 1917년 그의 글들에 대한 서문인 “10월의 교훈들”을 둘러싼 “문필 논쟁”으로 시작되었다.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가 봉기에 반대했었고, 그들의 정부와 당 직책들로부터 사임했었으며, 멘셰비키들과의 연합을 요구했었다는 사실이나, 스탈린이 1917년 3월에 르보프 공의 임시정부에 대한 지지를 주자했었다는 사실은 보다 젊은 세대에게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었고, 지배 그룹에게는 극도로 난처한 것이었다.

 

그들은 볼셰비키주의의 우익이 있어 본적이 있다는 것을 부정함으로써, 트로츠키가 봉기 동안에 하찮은 역할을 했다고 주장함으로써, 그리고 10월 혁명과 적군의 조직자였던 트로츠키가 멘셰비키들과의 연합이라는 1917 이전의 그의 관점들과 결코 결별하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캠페인을 시작함으로써 반격했다. 또한 그들은 트로츠키가 농민에 적대적이며, “농민과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민주주의 독재”라는 레닌의 정식에 맞섰던 “영구 혁명”의 이론을 계속해서 고수하고 있다고 그를 비난했다. 후자의 비난은 올바르지만, 그들은 레닌이 1917년 그의 “4월 테제들”에서 영구혁명의 모든 핵심적인 측면들 쪽으로 바뀌었다는 사실, 그가 자신의 이전 정식들을 분명하게 버리고, 이 점에 관하여, 특히 카메네프에 맞서 격렬한 투쟁을 수행했었다는 사실을 무시해야만 했다. 그 밖의 것들에 대해서는, 그들은 단지 거짓말과 중상비방에 의지할 수만 있었다.

 

1914년까지 트로츠키가 부당하게도 멘셰비키들과의 화해를 주장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1차 세계 대전에서 개량주의 사회민주당의 배신으로, 그는 분리가 불가피하며 필수적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레닌 그 자신이 “오래 전에 트로츠키는 재통합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트로츠키는 이것을 이해했고, 그 때 이후로는 더 훌륭한 볼셰비키는 없었다”고 말했다(“볼셰비키 당의 페트로그라드 위원회 의사록”, 1917년 11월 1일[14일]). 반면, 스탈린은 그 이슈가 첨예하게 제기되던 1917년 4월까지도 멘셰비키들과의 통합을 주장했고, 체리텔리(멘셰비키 지도자)는 곧 부르주아지 임시정부에 들어갔다!

 

“순서: 체리텔리의 통합을 위한 제안

 

“스탈린: 우리는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통합의 조건들에 대한 제안들을 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통합은 짐머발트-키엔탈의 노선들(1차 세계대전에서의 반전 대회들)을 따라서 가능합니다.”

- “1917년 3월 당 일꾼들의 전 러시아 대회의 원안 초안”

 

3인 동맹의 다른 두 구성원들이며 트로츠키에 맞서는 레닌주의의 옹호자라고 생각되었던 카메네프-지노비에프에 관해서 [말할 것 같으면], 그들은 봉기 그 자체 동안과 그 이후에 화해를 주장했고 (멘셰비키들과의 공동정부에 대한 주장), 봉기에 반대했다! 볼셰비키 당 안에는 우익이 없었다고? 레닌은 그들을 “혁명의 파업파괴자들”이라고 불렀고, 만약 그들이 자신들의 직위로 복귀하지 않으면, 그들의 축출을 주장했다.

 

혁명적 투쟁의 그렇게 중요한 에피소드들에 대한 “망각”을 위해서는 역사에 대한 계획적인 재 서술이 필요하다. 그래서 1917년의 볼셰비키들의 페트로그라드 위원회의 의사록들이 출판되고 있을 때, 편집자들은 레닌이 트로츠키보다 “더 훌륭한 볼셰비키는 없었다”고 말했던 모임을 간단히 잘라버렸다! 하지만, 인쇄공들 중 한 명이 교정쇄를 트로츠키에게 전해주었고, 그것은 후세를 위하여 보존되어 왔다. 10월 혁명에서 트로츠키의 역할과 관련해서는, 존 리드의 세상을 뒤흔들었던 10일들이 봉기의 조직자로서의 트로츠키의 역할을 아주 자세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에, 일들이 좀 더 곤란했다. 그래서 “트로츠키주의”에 반대하는 캠페인이 시작되었을 때, 스탈린은 리드가 사실들을 왜곡했다고 간략하게 선언했는데, [이것은] 지난 7년 동안 모든 사람의 눈을 벗어나 있었던 발견이었다. 레닌의 “유언장”도 또한 발표되지 않았다(하지만 후르시쵸프는 이후 그것의 정당성을 인정했다).

 

 

스탈린이 “일국에서의 사회주의”를 발견하다

 

심지어 꾸준한 거짓말들이라는 요법에도 불구하고, 왜곡과 중상비방은 새로운 지배도당의 권력을 확고히 하는 것까지만 나아갈 수 있었다. 1917년 이후의 볼셰비키주의의 이론적 병기고,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결의안들이나 러시아 공산당의 강령에는 3인 동맹의 증가하는 보수적 기호를 “정당화 해 줄”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스탈린-지노비에프-카메네프는 현저히 취약했다. 그들은 트로츠키의 영구혁명에 대한 분명한 대안이 될 새로운 이론이 필요했다. 이것이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의 교의 속에서 발견되었다.

 

트로츠키주의에 대한 현재의 가디언 시리즈 속에서, 칼 대이비드슨은 그것이 볼셰비키의 양화(良貨)라는 주장으로 이 스탈린주의 이론을 방어한다.

 

“반면, 트로츠키는 프롤레타리아트는 사회주의 건설 동안에 농민들의 광범위한 대중들과의 ‘적대적 충돌’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으며, ‘유럽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의 직접적 국가지원이 없다면’ 러시아의 노동계급은 스스로를 권력에 유지 시킬 수 없고, 그들의 일시적인 지배는 장기간의 사회주의 독재로 변형된다고 주장하면서 볼셰비키들에 대한 반대의 입장에 고수했다.”

-가디언, 1973년 4월 11일

 

이것은 처음부터 끝가지 꾸며낸 신화이다. 1924년 12월까지는 볼셰비키 당 안에서 누구도, 스탈린조차도, 유럽에서 승리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으로부터의 직접적인 국가적 도움 없이 하나의 국가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일국에서의 사회주의”는 무엇보다도 역사의 논리로부터 벗어나고 계급투쟁으로부터 고립된 편안한 둥지를 짓기를 열망하는 기생적 관료도당에게 복무하는, 맑스주의에 대한 완전한 곡해이다. 엥겔스의 공산주의자 선언 첫 번째 초안에서, 이 “이론”은 분명하게 거부당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19번째 질문: 그러한 혁명이 오직 하나의 나라에서만 발생할 수 있습니까?

 

“답: 아닙니다. 세계시장을 창출함으로써 대규모 산업은 그들 각자가 다른 땅들에서 무엇이 벌어지는가에 의존할 정도로 지구의 인민들, 특히 문명화된 지구의 인민들을 연결해왔습니다.... 따라서 공산주의 혁명은 비단 하나의 국가적 혁명이 아닐 것이며, 그것은 모든 문명화된 나라들이나 혹은 적어도 영국, 미국, 프랑스, 그리고 독일에서 아주 동일하게 발생할 것입니다.”

-F. 엥겔스, “공산주의의 원리들”, 1847

 

어떤 의미에서는, 이 선언은 지나치게 단언적이며, 역사는 하나의 나라에서 혁명이 승리할 수 있으며,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수립될 수 있음을 보여주어 왔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하나의 나라에서는 건설 될 수 없다는 근본적인 명제는 계속 유지된다.

 

레닌은 이것을 인지했으며 일찍이 1906년에 [다음과 같이] 썼다.

 

“러시아 혁명은 승리하기 위한 충분한 힘들을 스스로 가지고 있다. 그러나 거대한 소규모 생산의 발전, 소규모 상품 생산자들, 그들 중에서도 러시아 혁명이 자유로부터 사회주의로 나아가면 불가피하게 프롤레타리아트에 반대하게 될 농민들을 가진 하나의 나라에서 러시아 혁명은 자신의 승리의 과실들을 유지하기에는 충분한 힘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 복구를 막기 위해서는, 러시아 혁명은 러시아에 비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세상에는 비축되어 있는 그러한 것이 있는가? 그렇다. 서구의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트이다.”

 

1917년 초까지는 레닌이 후진적인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최초의 실현의 가능성에 관하여 쓰지 않았지만, 그는 결코 고립된 궁핍한 “사회주의” 사회를 암시하지 않았다. 볼셰비키들에게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서구에서의 혁명으로 가는 가교를 의미했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창출하는) 사회주의 혁명의 조건들과 사회주의(계급들의 철폐)를 위한 조건들은 동일하지 않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러시아에 최초로 오는 것이 러시아가 가장 먼저 사회주의에 도달하리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전혀 아니었다.

 

스탈린 그 자신이 1924년 초에 [다음과 같이] 썼을 정도로 이 구별은 명백했다.

 

“그러나 한 나라에서 부르주아지 계급 권력의 타도와 프롤레타리아트 권력의 수립은 아직까지는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가 보장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의 주요한 임무(사회주의적 생산의 조직)는 여전히 완수되어야만 한다. 몇 개의 선진국들의 프롤레타리아트들과의 공동의 노력들 없이 하나의 나라에서 이 임무가 완수될 수 있고 사회주의의 최종적인 승리가 성취될 수 있을까? 아니, 그럴 수 없다. 부르주아지 계급을 타도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나라의 노력들로 충분하고, 이것은 우리 혁명의 역사에 의하여 증명된다. 사회주의의 최종적인 승리를 위해서는, 사회주의적 생산의 조직을 위해서는, 하나의 나라, 특히 러시아와 같은 농민국가의 노력들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몇 몇 선진국들의 프롤레타리아트들의 노력들이 필요하다.”

-J.V. 스탈린, “레닌주의의 기초들”, 1924년 5월

 

이 이후의 판들에서는 이것이 반대의 테제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완전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로 대체되었다!

 

볼셰비키의 전망이 프롤레타리아트 국제주의였고, 일국에서의 사회주의라는 교의에는 완전하게 그리고 바뀔 수 없이 대립되었다는 것은 더 이상 명백할 수가 없을 것이다. 스탈린주의자들은 레닌도 또한 일국에서의 사회주의라는 교의를 믿었다는 것을 “증명해” 줄 따로 떨어진 인용들을 집어내기 위하여 많은 레닌 저작들을 샅샅이 뒤진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여러 번 레닌이 이것을 부정했다는 것을 무시하면서 조차, 스탈린은 왜 1924년 5월에 정확하게 반대의 것을 썼을까? 만약 “일국에서의 사회주의”가 정통의 볼셰비키주의였다면, 왜 누구도 1924년 후반까지 이것을 발견하지 못했을까?

 

대이비드슨에 의하여 인용되는 스탈린주의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증거”는 1915년 레닌의 글인 “유럽합중국을 위한 슬로건에 대하여”로부터이다.

 

“하지만, 하나의 분리된 슬로건으로서 세계 합중국 슬로건은 옳은 것이라고 거의 말할 수 없을 것인데, 왜냐하면, 첫째로 그것은 사회주의와 융합되기 때문이고, 둘째로 그것은 하나의 나라에서 사회주의의 승리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잘못 해석될 수도 있기 때문이며, 그것은 또한 그러한 나라의 다른 나라에 대한 관계에 관한 오해들을 만들어 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불균등한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발전은 자본주의의 절대적인 법칙이다. 그래서 사회주의의 승리는 최초 몇 개의 혹은 심지어 하나의 자본주의 나라 혼자에서도 가능하다. 자본가들을 몰수하고 그들 자신의 사회주의적 생산을 조직한 후에, 그 나라의 승리한 프롤레타리아트는 다른 나라들의 피억압 계급들을 자신의 대의로 끌어들이면서, 그 나라들에서, 그리고 착취계급들과 그들의 국가들에 대항하여 무장된 힘까지도 사용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 자본가들에 맞서는 봉기들을 선동하면서, 세상의 나머지(자본주의 세상)에 맞서 일어설 것이다.”

 

이 기간 그의 모든 다른 글들의 전후관계를 보면, 레닌은 여기서 “사회주의 사회”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 절대적으로 분명하다. 게다가, 그는 명백하게 유럽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은 1915년에 레닌은 서구에서의 사회주의 혁명 이전에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가능성을 인정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탈린주의자들의 다른 주요한 “증거”는 레닌의 1923년 글 “협동에 관하여”로부터의 인용이다.

 

“참으로, 모든 대규모 생산수단에 대한 국가의 권력, 프롤레타리아트 수중에 있는 정치권력, 이 프롤레타리아트와 수백만 명의 소규모 그리고 아주 소규모인 농민들의 동맹, 농민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확고한 지도력 등. 이것이 완전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필요한 전부가 아닌가...?”

 

이 글은 사회주의를 위한 정치적 그리고 법적 필요조건들에 한정된다. 다른 곳에서 (“우리의 혁명”, 1923년) 레닌은 “러시아의 생산력들의 발전은 사회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수준을 확보하지 않았다”는 진술을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언급했던 반면, 이것으로부터 혁명은 무익하다고 결론 내렸던 멘셰비키들에 반대하여 논박했다.

 

 

생산력들

 

1930년대 동안에, 높은 물가인상이라는 환경, 공산당 안에서의 테러통치, 그리고 스탈린의 강제 집산화 프로그램에 의하여 야기된 농민들과의 내전이라는 환경 속에서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가 선언되었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7차 대회(1935년)의 한 결의안은 산업의 국유화, 집산화 그리고 하나의 계급으로서의 쿨락들의 일소와 함께, “사회주의의 최종적이고 되 돌이킬 수 없는 승리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국가의 모든 방면에서의 강화가 소련에서 성취되었다”고 선언했다. 1936년 공산주의 청년[Communist Youth]의 강령은 "나라의 전체의 전국적인 경제가 사회주의적이 되었다“고 선언했다. 새로운 강령에 찬성하던 한 연사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구 강령은 ‘러시아는 오직 세계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통해서만 사회주의에 도달할 수 있다’는 취지의 깊이 잘못된 반(反)레닌주의적 주장을 담고 있다. 강령의 이 점은 기본적으로 잘못되었다. 그것은 트로츠키주의적 관점들을 반영한다.”

 

1921년 부하린에 의하여 써진 구 강령은 레닌이 참석한 정치국에 의하여 승인되었다!

 

그의 글에서, 대이비드슨은 “맑스-레닌주의자들은 물론 사회주의의 최종적 승리(무계급 사회)가 하나의 나라에서 가능하다는 점을 결코 고수하지 않았다”고 말함으로써 정통의 가면을 유지하려고 시도한다. 그 자신의 시인에 의하면, 1930년대 스탈린 치하의 러시아 공산당은 맑스-레닌주의적이지 않았다!

 

대이비드슨은 또한 일국에서의 사회주의라는 슬로건에 대한 반대를 위한 기초로서 “우익 기회주의의 ‘생산력 이론’”을 고수했다고 트로츠키를 비난한다. 그러나 이 “생산력 이론”은 실로 맑스주의의 유물론적 역사 분석의 기초이다! [다음과 같이] 썼던 사람이 맑스 그 자신이었다.

 

“첫째로 그것[생산력의 발전]이 없이는 궁핍만이 일반화 될 뿐이며, 궁핍과 함께는 필수품들을 위한 투쟁과 모든 과거의 배설물이 필연적으로 재생산되게 될 것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리고 둘째로는 오직 생산력들의 이 보편적인 발전과 함께만 사람들 사이의 보편적 교통이 수립되기 때문에, 생산력들의 이러한 발전은 ... (사회주의를 위한) 실제적인 전제로서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것이 없다면, ⑴ 공산주의는 오직 지역적 사건으로만 존재할 수 있을 것이며 ⑵ 교통의 힘들 그 자체가 보편적인, 그래서 견딜 수 없는 권력들로서 발전하지 못해 있을 것 ..., 그리고 ⑶ 각각의 교통의 확장은 지역적 공산주의를 폐지할 것이다. 경험적으로, 생산력들의 보편적 발전과 그것들과 이해를 같이 하는 세계적 교통을 전제로 하는 공산주의는 오직 지배적인 인민들의 ‘모두 한꺼번에 [이루어지는]’ 혹은 동시의 실천으로서 가능할 뿐이다.

-K. 맑스와 F.엥겔스, 독일 이데올로기, 1847년

 

대이비드슨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면서 이들 기본적인 맑스주의적 명제들을 (대신 그것들에 대하여 후르시쵸프와 류샤오치를 비난하면서) 비웃는다.

 

“세상에 일어났던 대부분의 사회주의적 건설은 상대적으로 후진적인 나라들에서였다. 그러나 트로츠키의 관점에서는 그것을 ‘사회주의’로 부르는 것은 ‘노동 대중들의 관점에서의 사회주의 사회라는 사상을 절망적으로 깎아 내리게’ 될 뿐이다.”

 

대이비드슨에 따르면, 이 관점은 “명백하게 어리석은” 것이다.

 

도대체 1930년대에 소련은 얼마나 “사회주의적”이었는가? 러시아가 스탈린의 관료적 지배에 의해 강요되는 소름끼치는 제한들과 함께임에도 불구하고 생산의 사회주의적 조직화의 우월성을 명백하게 증명하면서 산업화에서 거대한 진전들을 이루었었지만, 러시아는 여전히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보다 훨씬 뒤쳐져 있었다. 가장 기본적인 필수품들(그럴듯한 주택, 충분한 음식과 의류)은 여전히 국민 대중들에게는 입수되지 않았다. 물가인상이 만연했고 암시장은 계속 존재했다. 반면 관료집단은 자기 자신의 복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자신의 권력을 사용했는데, 이것들은 구체적으로 높은 임금들, 특수 상점들, 자동차들, 별장들과 많은 다른 특권들을 의미했다. 레닌은 국가의 사멸은 권력 장악 바로 그 날에 시작될 것이라고 말했다. 여전히 계급지배의 기관인 프롤레타리아트 국가는 사회 위의 별도의 권력이기를 멈추게 될 것이지만, 그들의 의지를 수행하고 스스로를 자신들의 적극적 참여에 기초하는 광대한 다수의 기구일 것이다. 1935년의 소련에서 국가는 사멸하기 시작했던 것이 아니라, 대신에 억압과 강제의 거대한 기구로 성장했었다.

 

대이비드슨 형제여, 이것이 사회주의란 말인가? 심지어 스탈린의 정치적 반혁명 이후에 조차, 소련은 여전히 짜르주의와 자본주의의 조건들에 대한 거대한 진보였다. 소련은 사회주의적 소유 형식들을 보존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대단히 퇴행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 국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1936년 스탈린의 소련의 헌법에 의하여 선언된) 무계급 사회, 그것은 아니었다.

 

 

1926년 영국 총파업에 대한 배신

 

“일국에서의 사회주의”라는 교의의 반혁명적 의미의 가장 파멸적인 증거는 스탈린의 외교정책 분야와 혁명이 위협했던 다양한 나라들의 부르주아지와의 동맹을 위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체계적인 경시와 최종적인 폐지(1943년)에 있었다. 스탈린주의적 “국제주의”의 실제 내용의 즉각적이고도 생생한 실례가 1926년 영국 총파업에 의하여 제공되었다.

 

1925년에 영국 광산업자들은 1924년 협약을 끝내고 그것을 광부들을 최저 생활수준 밑으로 떨어뜨리게 될 새로운 협약으로 대체하려고 했다. 산업에 대한 공식적인 조사 이후, 정부는 석탄 산업 현대화의 주요한 부담을 광부들에게 전가하게 될 보고서를 내 놓았다. 광부들의 대답은 1926년 5월 3일에 시작된 파업이었다. 사기를 유지하기 하고, 긴급 작업이나 특별 수송을 위한 허가들의 발행을 통제하기 위하여 실천위원회들이 설치되었다. 이것은 단순히 산업 분쟁이 아니라 사장들의 국가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었다.

 

파업 집행을 위임받았던 노동조합회의 최고위원회[The General Council of the Trades Union Congress]는 파업의 혁명적 함의에 놀라서 9일 후, 그리고 파업의 효과가 절정에 있을 때 파업 중지를 명령했다. 작업에 복귀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블랙리스트에 올라있거나 임금 삭감과 장기근속 우대의 실종, 혹은 노동조합을 떠날 것을 포함하는 조건들에서만 오직 복귀가 허용됨을 알았다. 5월 13일에 입은 피해들을 둘러싸고 2차 총파업이 발생했지만, TUC 지도자들의 회유하는 연설들 이후에 (다른 어떤 대안적 지도부도 없던) 사람들은 다시 작업에 복귀했다. 광부들은 12월 23일과 29일 사이에 일련의 별도 계약들이 이루어질 때가지 파업을 계속했지만,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배신에 의하여 그들은 혼자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 소유주들이 모든 점에서 승리했다. 즉 전국적 협약을 잃었고, 광부들은 더 적은 임금을 위하여 더 긴 시간을 일해야만 했다.

 

1924-25년 동안 유럽에서의 일시적인 계급투쟁의 후퇴 동안에, 스탈린은 아마도 적색 노동조합 인터내셔널을 포기하면서 개량주의 노동조합 지도자들과 화해하려고 시도할 것을 결정했다. 이 정책의 쐐기돌이 1925년 5월에 형성되었던 소비에트 노동조합들과 영국 TUC 최고위원회 사이의 연합인 영러 노동조합위원회였다. 최고위원회가 1926년 총파업을 배신한 이후, 트로츠키는 이들 파업파괴자들과의 즉각적인 결별을 요구했다. 스탈린과 부하린은 거부했다. (당시 지노비에프는 반대파에 합류했었지만, 그는 2년 후에 스탈린에 굴복하게 되어 있었다.) 1926년에 최고위원회는 영국 제국주의의 중국 혁명에 대한 진압을 지지했다. 트로츠키는 다시 영러 위원회의 폐기를 요구했다. 스탈린은 다시 거부했다.

 

1927년 영러 위원회가 최종적으로 수명을 다하자, 위원회를 내다버렸던 것은 영국 지도자들이었다. 그것의 주요한 목적은 필경 러시아에 대한 영국의 개입에 반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국에서의 사회주의라는 교의의 논리적 확장으로서, 노동자 협잡꾼들로부터의 이 공상속의 도움은 1926년 총파업을 희생시키기 위한 충분한 근거들이었다.

 

 

스탈린이 중국 공산주의자들에게 그들의 무덤들로 가라고 명령하다

 

1925-27년 중국혁명에서 스탈린의 정책이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의 또 다른 심지어 훨씬 소름끼치는 예이다. 일찍이 1924년에 중국 공산당은 모스크바의 명령을 받고 손문의 민중주의적 부르주아지 국민당에 입당했었다. 트로츠키는 당시 정치국에서 문제가 토론되었을 때 반대했다. 진독수 하의 중국 공산당 지도부도 마찬가지로 반복해서 반대했다. 1925년 10월 그들은 국민당을 떠날 것을 준비하는 제안을 했는데, 그 계획은 스탈린의 지시들을 받은 코민테른 집행부에 의하여 거부되었다. 스탈린의 노선은 혁명은 민족 부르주아지계급, 도시 소부르주아지 계급, 노동자들과 농민들을 포함하는 “4계급들의 연합”의 지도하에서 부르주아지-민주주의 혁명으로 제한되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이 연합의 정치적 표현이 국민당이었고, 이 당에 중국 공산주의자들은 스스로를 종속시켜야 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모든 반(反도)제국주의 세력들의 단결을 유지하면서, 도시들에서는 “반(反)제국주의적 부르주아지계급”에 대항하는 계급투쟁을 자제할 것을, 농촌에서는 그들과 농민운동 사이의 균형을 추구할 것을 명령받았다.

 

당시 중국에 대한 스탈린의 최고의 관심사는 혁명을 촉진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당 정부와의 외교연합을 성취하는 것이었다. 1926년 초 이 부르주아지 정당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에 준회원 당으로서 승인받았고, “세계 혁명의 최고 스태프”인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집행위원회는 손문의 후계자인 장군 장개석을 명예 회원으로 선출했다! 불과 수주일 후인 3월 20일에 장[개석]은 중국 공산당 당원들을 국민당의 모든 지도부 직책으로부터 쫓아내고, 국민당에 입당했던 중국 공산당 당원명부를 요구하는 자신의 첫 번째 반(反)공산주의 쿠데타를 했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대표자들로부터의 명령 하에, 중국 당 지도부는 동의했다! 1926년 10월 스탈린은 실제로 광동성에서의 농민봉기를 중지할 것을 중국 공산당에 주장하는 전보를 보냈다. 트로츠키는 이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코멘트 했다.

 

“공산당의 부르주아지 지도부에 대한 공식적인 종속, 그리고 소비에트들을 형성하는 것에 대한 공식적인 금지(스탈린과 부하린은 국민당이 소비에트들을 “대신 한다”고 가르쳤다)는 1905-1917년에 멘셰비키들이 했던 모든 것들 보다 더 크고 더 명백한 배신이었다.”

-L.D. 트로츠키, “영구혁명”, 1928년

 

이것으로 충분히 나빴지만, 트로츠키와 지노비에프에 의하여 지휘되던 좌익반대파로부터의 도전 이후, 그리고 1927년 3월에 시작되었던 상하이 봉기의 결정적인 나날들 동안에, 스탈린은 다시 또 다시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굴종의 정책을 재차 단언했던 반면, 민족주의자들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일소를 준비하고 있었다. 1927년 3월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한 사설은 중국에서의 주요한 임무는 “국민당의 한층 더한 발전”이라고 말했다. 4월 5일에 트로츠키는 장개석이 노동자들에 대항하는 보나파르트적 쿠데타에 준하는 것을 준비하고 있다고 경고했고, 이 목적을 좌절시키기 위한 노동자 위원회들의 형성을 주장했다. 같은 시간에 스탈린은 모스크바의 당 모임에서 “우리는 중국 부르주아지 계급을 활용하고, 그것을 다 짜낸 레몬처럼 던져 버릴 것이다”라고 떠벌렸다. 또한 당시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이 아시아에서 가장 거대한 노동자들의 봉기였던 상하이 사태들의 중요성을 인식하도록, 그리고 국민당과의 분리의 필요성을 인식하도록 시도하면서 모스크바에 호소하고 있었다. 그들은 장[개석]의 군대들에게 상하이를 넘겨줄 것을 명령 받았고, 4월 12일에 국민당 군대는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서 자신들의 무리들을 내려놓았던 수만 명의 공산주의자들과 전투적 노동자들의 목숨들을 앗아갔던 대량학살을 자행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여전히 자신의 정책을 단념하지 않았으며, 이제 장개석과의 동맹은 소멸했다고 선언하면서 그는 우한에 정부를 세웠던 국민당 좌파와의 동맹을 이제 명령했다. 다시 중국 공산주의자들은 “반(反)제국주의” 부르주아지 계급에 적대하지 않기 위하여 농민운동을 자제할 것을 명령 받았다. 그리고 다시 부르주아지 민족주의자들은 공산당을 갑자기 공격했다. 그해 말에 스탈린은 패배할 수밖에 없는 전술적인 정세에서 캔톤[광동]에서의 봉기를 전보로 명령함으로써 좌익반대파로부터의 그의 중국 정책에 대한 비판을 회피하려고 했는데, 봉기는 캔톤 노동자들에 의한 “소비에트 정부”에 대한 영웅적인 방어에도 불구하고 패배했다.

 

대이비드슨에 따르면, “코민테른은 모[택동]에 의하여 독자적으로 실행되었으며, 진독수와 장국도 모두에 의하여 무시되거나 반대되었던 정책을 주장했다.” 실제 사실에서는, 모[택동]은 이 기간에 진[독수]가 따랐던 노선을 비판하지 않았다. 한 시점(1924년 가을)에서 그는 우익 국민당 지도자들과의 너무도 가까운 협력 때문에 공산당 중앙위원회로부터 축출되었다!

 

중국에 대한 반대파의 노선이 철저하게 관료화되었던 러시아 공산당과 코민테른에서 확실하게 패배하였지만, 소비에트 수도에 자유로운 상태의 트로츠키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스탈린에게는 여전히 위험스러웠다. 그 결과로 그는 10월 혁명의 조직자이며 적군의 창설자에 대한 체포를 명령해서, 그를 중앙아시아의 알마아타로 유배 보냈고, 2년 후에는 그를 소련으로부터 추방했다. 볼셰비키 당은 세상의 지도적인 혁명적 세력으로부터 스탈린의 관료집단의 부속기관에 불과한 것으로 변형되었다. 오늘날 대이비드슨과 모[택동]주의자들이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의 교의를 지지할 때, 그들이 방어하고 있는 것은 이 배신들의 역사이다.

 

2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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