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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의 스탈린 유파에 대한 재고찰_6부_3차 중국혁명[국제공산주의동맹의 팜플렛]

가디언에 대한 응답
왜곡의 스탈린 유파에 대한 재고찰

국제공산주의동맹[http://www.icl-fi.org의 팜플렛]
[  ]속의 내용은 해석자의 첨가

전체 내용 및 앞으로 계속될 내용

1부 영구혁명
2부 일국에서의 사회주의
3부 "제 3기"
4부 인민전선
5부 제4 인터내셔널을 위한 투쟁
6부 3차 중국혁명
7부 모택동의 중국: 스탈린으로부터 닉슨까지
8부 트로츠키주의 대 SWP 수정주의

 

6부 3차 중국혁명

 

“트로츠키의 유산”에 관한 가디언 시리즈의 핵심은 “역사가 모[택동]이 옳았음을 증명해왔다”이다. 대이비드슨에 따르면 중국 혁명은 후진적인 식민지 나라들을 위한 모델이다. 모[택동] 사상의 위대한 봉화가 길을 비춘다. 그런가?

 

 그를 방해하려고 시도하던 유기소와 같은 배신자들과는 반대되는 것으로서, 언제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위하여 투쟁해 온 위대한 프롤레타리아트 지도자 모[택동]이라는 신화를 먼저 살펴보자. 앞선 한 기사에서, 대이비드슨은 1927년에 “코민테른은 모[택동]에 의하여 독자적으로 실행되었으며, 진독수(당시 중국 공산당의 수장)와 장국도 모두에 의하여 무시되거나 반대되었던 정책을 주장했다”고 썼다. 어떠한 것도 진실로부터 더 멀어질 수는 없을 것이다. 우선, 진[독수]는 불행하게도 자신이 첨예하게 의견을 달리했을 때조차 모스크바로부터의 명령들을 수행하기만 했고, 그는 그들이 글자그대로 수천 명의 중국 동지들을 무덤들로 보냈을 때에 조차 이들 명령에 복종할 것을 거부할 프롤레타리아트의 기풍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둘째, 모스크바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대중 투쟁들을 억제하기를 원했던 때인 1926-27년 장군 장개석의 북벌 동안 모[택동]이 공산주의 인터내셔널로부터의 지시들을 수행할 것을 거부했던 것은 그의 공적이다.1926년 10월 26일에 스탈린은 농민 운동이 종종 스스로가 결국은 지주들이었던 국민당 장성들을 소외시키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농민 운동이 억제되어야 한다고 명령하는 전보를 보냈었다. 모[택동]은 중앙위원회에 의하여 후난이라는 핵심적인 성(省)에서 이 억제의 명령을 수행할 임무를 부여받았다. 모[택동]은 즉시 고향 성(省)으로 돌아가 농민연합을 형성하기 위하여 수만 명의 농민들을 일깨우고, 명문가에 속한 토지를 접수하여 재분배하면서, 반대의 일을 진행했다. 이 광대한 농민의 불안정의 물결은 국민당 군대들의 급속한 북진에 엄청난 도움을 주었다. 쉽게 상상될 수 있듯이, 이것은 또한 장군들을 “불안하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 시기 모[택동]의 정책들이 공산당 지도부의 정책들보다 항상 더 전투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1924년 가을에, 그는 국민당 우익과의 너무도 가까운 유대들을 이유로 당 정치국으로부터 해임되었다. 그러나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정칙에 대한 모[택동]의 가장 일반적인 “항의”의 패턴은 이탈하여 자신이 옳다고 믿는 정책들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1927년 3월 31일 의 코민테른 전보가 상하이 당과 노동조합들에게 장[개석]의 군대들이 앞에 있는데 무기를 감출 것을 명령했고, 그 불가피한 결과는 수만 명의 투사들에 대한 대량학살이었다. 진[독수]는 자살적인 명령들에 항의했고 그것을 수행했고, 모[택동]은 결코 항의하지 않았다.

 

 1930년 동안에 모[택동]은 “농민 소비에트” 지역에서의 토지개혁 정책을 둘러싸고 다시 한 번 당 지도부와 충돌하게 되었다. 모택동이 부농들의 모든 토지들에 대한 몰수가 아니라 그들에게 단순히 균등한 몫을 제공하는 토지에 대한 단순한 균등 재분배를 주장했기 때문에, 당시 당수였던 왕명은 “부농 노선”을 가지고 있다고 모[택동]을 비난했다. 부농들(러시아에서의 쿨락들)은 일반적으로 자신들에게 토지와 자본을 축적할 보다 더 큰 기회를 허용하는 점진적인 해결책들에 찬성하면서 격렬한 격변들에 반대하기 때문에, 그것을 중농노선으로 부르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봉건 지주 계급의 일소로부터 가장 많은 것을 얻는 것은 중농이며, 역사적으로 토지의 “철저한 분배”를 위한 그러한 계획들을 제출했던 것이 중농들이었다. 1917년 여름과 가을의 러시아 농민 폭동의 지도자들이 이들이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이 농촌을 완전히 파괴하는 것 없이 취해질 수 있는 가장 급진적인 토지개혁이라는 것이다. 고립되고 장비가 부족한 유격전은 배신에 극도로 취약하기 때문에, 게릴라 전쟁은 단지 가장 가난한 부위만이 아니라 전체 농민으로부터의 지지에 의존한다. 그리고 현대적인 무기들에 맞서는 농민들의 유일한 무기는 다시 한 번 단결을 가정하는 압도적인 숫자이다. 모든 게릴라 운동들이 계급투쟁을 농촌으로 가져가기 보다는 중농 혹은 부농 정책을 선택한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리고 혁명적 맑스주의자들이 프롤레타리아트가 유일하게 일관된 혁명적 계급이라고 주장하며, 게릴라주의에 반대하는 한 가지 더 [추가적인] 이유가 [이것이다].

 

 

“반(反)일 공동전선”의 기간

 

 그러나 모[택동]은 단순히 빈틈없는 게릴라 지도자는 아니었다. 점차적으로 그는 노동자들과 빈농들에 대한 관료적 통제권을 유지하는 한편에서 부르주아지 계급에 대한 굴종이라는 스탈린주의의 본질에 대한 매우 분명한 이해에 도달했다. 이렇게 해서, 대장정에 뒤이어, 그가 결국 CP 중앙위원회에서의 우위를 성취했을 때, 그것은 국민당과의 2차 “공동전선”에 대한 가장 정력적인 지지자였다. 이것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7차 대회에서의 노선 변화와 인민전선 시기에 조응했다.

 

 그 직후인 1935년 8월 1일에, CCP는 일본에 대항하여 투쟁하기 위하여 공산당에 합류할 것에 대한 모든 애국적 계급들에 대한 호소를 발표했다. 새로운 인민전선 정책과 조화를 이루어, 모[택동]은 부농들과 중농들로부터의 지지를 얻기 위하여 온건한 농업정책을 위한 새로운 가이드라인들을 발표했다. 1935년 12월 25일의 정치국 선언은 [다음과 같다]

 

 “소비에트 인민 공화국은 부농들을 향한 자신의 정책을 바꿀 것이다. 즉, 봉건적 착취에 있는 부분을 제외한 부농 토지는 그것이 스스로의 경작 하에 있건 고용된 노동자에 의하여 경작되건 몰수되지 않을 것이다. 농촌에서 토지가 균등하게 분배될 때, 부농들은 빈농과 중농들과 같은 몫의 토지를 받을 권리를 가질 것이다.”

 

이제 진정한 부농 정책이 여기에 있었다. 6개월 후에, “모든 반일 병사들과 반일 기업들에 관계된 자들의 토지들은 몰수되어서는 안 된다”는 중앙위원회 선언에 의하여 그것은 확장되었다. 이것은 심지어 대지주들이 적군의 병적에 아들을 편입시키는 간단한 장치로 그들의 토지를 보유하는 것을 허용했다.

 

 이 토지 정책은 정치적 수준에서도 그것에 상당하는 것을 가지고 있었다. “노동자와 농민의 소비에트 정부”는 “소비에트 인민 공화국”이 되었고, [다음과 같이] 선포했다.

 

 “그것(“인민공화국”)은 광범위한 소부르주아지 계급이 자신의 영토 안에 있는 대중들과 단결하도록 하고자 한다. 모든 소부르주아지 혁명적 계급 인자들은 투표할 권리와 소비에트에서 선출될 권리를 부여받을 것이다.”

 

 한편, 1936년 가을에는, 공산당 명칭을 “반일 민족구제 협회”로 대체하면서, 지구 이하 단위에서의 “공산당”이라는 명칭의 사용을 금지하는 명령들이 발표되었다.

 

 굴복하려는 자신의 의지를 보여주면서, CCP는 1937년 2월 10일에 공동전선을 제안하는 전보를 KMT[국민당]에 보냈다. (최근 몇 해 동안, 모[택동]주의자들은 공동전선만을 강조하고 당은 충분히 강조하지 않았던 자들에 맞섰던 “위대한 조타수의” 글들을 대단한 것으로 만들어왔다. 비록 모든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민족해방을 위한 이 투쟁이 2차 세계대전에 의하여 덮어 가려지게 되었던 지점까지 분명하게 일본에 맞서 중국을 지지하기는 했지만, 이 “애국적 공동전선”이라는 용어를 고려한다면, 이 전선에 들어가는 것은 대중들에 대한 명백한 배신이었다.) CCP의 제안에 대한 응답으로, 국민당은 만약 적군과 소비에트 정부가 폐지된다면, 모든 공산주의 선전이 종식된다면, 그리고 계급투쟁을 위한 호소들이 기각된다면 화해에 동의한다는 “빨갱이 위협의 완전한 근절을 위한 결의”를 채택했다. CCP는 그것을 받아들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산당 근거지들의 국민당 지배로의 실질적 통합뿐만 아니라 공산당 군대의 흡수는 현실화되지는 않았다.

 

 2차 대전의 시작과 함께, 모[택동]의 계급협조는 가능한 한 더 더욱 뻔뻔스러워졌다. 그는 스탈린의 “4개의 계급들의 연합”을 “반혁명분자들과 배신자들에 대한 모든 혁명적 계급의 독재”로 정의되었던 “신민주주의”라는 슬로건으로 개명했다. 대이비드슨은 신민주주의의 달콤한 버전을 들려주는데, 그것에 따르면 이 중간적 단계는 단지 내전의 종결까지만 지속될 것이고, 내전의 종결 이후에 “혁명은 즉각적으로 그리고 중단 없이 사회주의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라는 그것의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갈 것이다”(가디언, 1973년 4월 25일). 모[택동]은 그런 종류의 어떠한 것도 말하지 않았다. 이것보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국 혁명의 과정은 2개의 단계들로 나누어져야만 한다. ⑴ 민주주의 혁명, 그리고 ⑵ 사회주의 혁명.... 이 식민지, 그리고 반식민지 혁명에서의 첫 번째 단계 혹은 첫 번째 스텝에 관하여 말하자면, 그들의 사회적 성격에 따라서, 그것은 근본적으로 객관적 필요조건이 여전히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적 발전의 길에 있는 장애물들을 일소하는 것인 부르주아지 민주주의 혁명이다...

 

 “중국 혁명은 두 가지 스텝들 속에서만 오직 성취될 수 있다. 즉, 첫 번째는 신민주주의라는 스텝이고, 두 번째는 사회주의 스텝이다. 게다가, 첫 번째 스텝의 기간은 상당히 긴 기간이 될 것이고, 결코 하룻밤에 성취될 수 없다.”
-“신민주주의에 관하여”, 1940년 1월

 

 이 기간의 다른 문서 속에서, 모[택동]은 요점을 훨씬 더 분명히 했다.

 

 “왜 우리는 혁명의 현재의 단계를 ‘부르주아지-민주주의 혁명’이라고 부르는가? 왜냐하면 혁명의 타겟이 부르주아지 계급 전반이 아니라 제국주의와 봉건적 억압이고, 혁명의 강령은 사적소유의 철폐가 아니라 사적소유 전반을 보호하는 것이며, 이 혁명의 결과가 자본주의의 발전을 위한 길을 개척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토지를 경작자에게’라는 정책은 부르주아지-민주주의적 정책이지 프롤레타리아트적인 그리고 사회주의적인 것이 아니다....

 

 “신민주주의 정부 체제 하에서는, 자본과 노동 사이의 관계들의 재조정이라는 정책이 도입될 것이다. 한편으로는, 노동자들의 이해관계가 보호될 것이다. 8시간에서 10시간 노동일 체제 ... 그리고 노동조합들의 권리들.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 사적, 그리고 협동조합 기업들의 적정한 이윤들이 보장될 것이다... 만약 외국 투자들이 중국의 경제에 도움이 된다면, 우리는 외국 투자들을 환영한다....”
-“연합 정부에 대하여”, 1945년 4월

 

 대이비드슨 형제의 사회주의로의 “방해받지 않는 넘어감”은 정말 대단하다. 사회적, 그리고 경제적 의미들에서 이 “신민주주의”의 뜻에 관해서 말하자면, “반일 공동전선” 동안에 집행되었던 다음과 같은 “진보적” 방책들을 포함했던 토지정책을 보기만 하면 된다.

 

 “대부분의 지주들이 반(反)일이라는 것을, 일부 계몽된 계층 또한 민주주의적 개혁들에 호의적이라는 것을 승인하라. 이에 따라서, 당의 정책은 봉건적 착취를 완전히 청산하는 것이 아니라 봉건적 착취를 줄이는 것에서 농민을 돕는 것이다....

 

 “... 농민들이 임대료와 이자를 지불할 뿐만 아니라 지주의 시민권, 정치적 권리, 토지와 경제적 권리들을 보호하도록 조언 받아야 한다.”
-“반일 근거지들에서 토지정책에 대한 중앙위원회의 결정”, 1942년 1월

 

 모든 혁명적 계급들의 공동의 혁명적 독재라는 이 공상적이고 반(反)맑스주의적 개념에 관하여 말하자면, 모[택동]은 매우 특별한 무엇인가를, 즉 두려움을 모르는 반제국주의 애국자 장개석과의 실질적인 연합정부를 마음속에 두고 있었는데, 그 정부 하에서는 KMT가 정부의 다수와 군사 부대들의 광대한 다수를 통제하게 될 것이었다. 이러한 배치는 결정되었고, 1946년 1월 “정치 협의회”에서 CCP에 의하여 받아 들여졌다. 정부는 절반은 국민당으로부터 그리고 절반은 (CCP를 포함하는) 다른 정당들로부터, 전적으로 장[개석]에 의하여 선택된 40명으로 구성될 것이었다. 국민당 군대들은 90개의 지구로 제한될 것이었고, 상대적으로 공산당의 부대들은 18개 지구들로 제한될 것이었다. 이 동의가 결코 실행되지 않았던 것은 단지 국민당의 특정 구역들, 특히 군대의 일부에서의 모든 타협에 대한 적대감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192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 후반까지 20년의 기간에 걸쳐, 모[택동]은 2단계 혁명이라는 멘셰비키 이론의 고전적 표현들인 교의들을 신봉하는 한편으로, 반복적으로 중국 부르주아지 계급, 그리고 때때로 심지어 봉건적 인자들의 환심을 사려고 애썼다. 당의 청산과 수십만 명의 투사들에 대한 살해라는 인도네시아 형태의 재앙이 없었던 것은 오로지 KMT 정부가 너무도 부패하여 장[개석]이 연합정부의 위험을 무릅쓸 여유가 없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러나 부르주아지 계급이 항상 허약했던 것은 아니었다. 상하이 학살 이후에, 장[개석]은 국민당 지배를 안정화할 수 있었고, 1927년-36년의 시기 동안 그는 공산당 근거지들의 대부분을 체계적으로 쓸어버릴 수 있었다.

 

 

신민주주의인가 아니면 영구혁명인가?

 

 이것은 중국 혁명의 두 번째 측면, 즉 누가 역사에 의하여 올바른 것으로 증명되었는가? 로 귀결된다. 대이비드슨은 레닌이 1917년 4월에 분명하게 기각했던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의 정책을 되살리려는 스탈린의 시도는 중국에 대하여는 완전히 부적절하다는 트로츠키의 발언(이 시리즈의 1부를 보시오)을 인용한다.

 

 “민주주의 독재라는 정식은 절망적으로 그것의 유용성을 잃었다.... 중국의 엄청난 후진성에도 불구하고, 보다 정확하게는, 러시아와 비교했을 때 이 엄청난 후진성 때문에, 3차 중국혁명은 ‘민주주의적’ 시기를 가지지 않을 것이며, 10월 혁명이 가졌던 6개월이라는 기간(1917년 11월에서 1918년 7월까지) 조차 가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중국혁명은 바로 그 시작으로부터 도시와 농촌에서 부르주아지 소유에 대한 가장 결정적인 대쇄신과 폐지를 실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레닌 이후의 제3 인터내셔널, 1928년

 

 대이비드슨은 모[택동]의 신민주주의가 트로츠키의 이 예측에 반하는 것으로서 올바른 것으로 증명되었다고 주장한다. 사실들을 살펴보자. 첫째, 모[택동]의 반복적인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는 장[개석]과의 연합정부를 결코 성취하지 못했다. 둘째, 내전의 끝나고 공산당이 중국 전체를 휩쓸고 있을 때, 대부분의 중국 부르주아지 계급은 “신민주주의”에서 결정적인 부르주아지적 요소를 제거하면서 장[개석]과 함께 타이완으로 도주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에 뒤이었던 소유관계들에서의 변화들이었다. 1947년 10월이 될 때까지 모[택동]이 KMT 정권의 타도를 위한 슬로건을 제기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 CCP로 하여금 스탈린의 분명한 명령들에 반하여 국가권력을 위하여 전진하도록 강제했던 것은 국민당 군대들에 의한 예난 근거지의 점령과 어떠한 타협도 가능하지 않다는 것과 “신민주주의 형태”의 정부는 몽상이었다는 것에 대한 모[택동]의 깨달음이었다. 공산당은 장[개석]을 타도하겠다고 결정했던 동시에, 1930년에 모[택동]이 따랐었던 “부농 정책”과 비슷하지만, 1942년-47년 기간의 소심한 지대 인하 (그리고 적군이 강제하는 지대 징수) 보다는 훨씬 더 급진적인 농업개혁 계획을 발표하면서 논리적으로 당연한 행보를 취했다.

 

 더 나아가,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 선포에 뒤이어, CCP는 몇 몇 “민주주의적” 소부르주아지 정치인들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정부권력은 분명하게 공산당의 수중에 있었던 “연합정권”을 수립했다. 국가권력이 적군의 의문의 여지가 없는 군사적 우위에 기초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대부분의 부르주아지 계급은 타이완으로 도주했었다.

 

 소비에트의 도움을 받아, 공산당은 국가 통제와 감독 하에서 일부 산업 회사의 사적 소유의 지속을 조정하는 한편으로, 중공업의 국가부문[화]에 착수했다. 결국, 이 정책은 중국의 한국전쟁 개입으로 더욱 강화되었는데, 이것은 1952년 초에 시작되었던 국내 자본가들에 대항하는 일련의 방책들로 귀결되었다.

 

 대이비드슨 형제여, 당신은 우리에게 확장된 민주주의적 단계가 어디에 있는지 제발 말해주겠는가? 이 모든 진화는 모[택동]의 이론들이 이르게 된 완전히 환상적인 공상적 이상주의의 극적인 증거이다. CCP는 거듭해서 민주주의적 부르주아지 정권을 수립하겠다는 자신의 열망을 선포했지만, 결과로서 생겨난 소유관계들은 노동자 국가의 그것들이었다.

 

 

 농민이 노동자 국가를 수립할 수 있는가?

 

 1949년에 노동자들은 중국공산당 당원의 5%가 넘지 않았다고 추측되었다. 즉, 당시 중국공산당은 압도적으로 농민들과 소부르주아지 지식인들의 당이었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오직 노동계급만이 혁명적 지도부 하에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수립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3차 중국 혁명”을 설명하는가? 우선, 우리는 이것이 트로츠키에 의하여 예언된 패턴이 아니었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만 한다. 맑스주의는 각각의 혁명적 시기에 발생하는 첨예한 계급의 양극화에서, 농민은 부르주아지 계급을 따르는 인자들과 프롤레타리아트를 따르는 인자들 사이에서 분열될 것이며, 농민 단독으로는 자본가 착취자들의 결연한 저항을 타도할 사회적 힘을 가지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적 소유 형식들을 수립하기에 필요한 통일된 계급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는 것을 보여 주어왔다. 하지만, 1949년의 중국혁명은 농민이 압도적인 정당과 소부르주아지 군사 관료들의 지도하의 군대에 의하여 성취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비록 트로츠키의 예측들과는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심지어 후진국들에서도 부르주아지 혁명의 민주주의적 임무들을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으로서 농민에 의하여 지지를 받는 노동계급이 자기 자신의 지배를 수립할 것을 주장하는 핵심적인 맑스주의 강령에 모순되지 않았다.

 

 농민에 기초했던 중국 공산주의자들의 성공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의당 권력을 위하여 투쟁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부재였다. 중국 노동계급은 2차 중국 혁명(1925-27년) 동안의 계속적인 패배들로 인하여 의기소침해졌고 많은 수가 죽었다. 그리고 그 이후 계속된 CCP의 정책은 프롤레타리아트의 행동에 대한 계획적인 방해였다. 1949년 CCP의 군사적 승리의 결과가 1917년 러시아 혁명에 의하여 창출되었던 것과 같은 건강한 노동자 국가가 전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속에서 권력을 쥐고 있지 않는 관료적으로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였다는 것이 두 번째 근본적인 지점이다. 그렇기 보다는, 1949년 이후로 국가권력은 CCP, 인민해방군, 그리고 국가 관료의 상층으로 구성된 빈틈없는 스탈린주의 관료적 군인 계층의 수중에 있고, 그래왔다. 중국 정권의 경제 정책들의 반복되는 실패와 노동자들의 지배의 민주주의적 형식들을 창출하는데 있어서의 무능력(현저하게는 “대약진”)에 의하여 증명되는 것처럼, 중국에서 사회주의, 즉 계급들의 완전한 철폐로의 길이 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 군사-관료 계층을 내쫓기 위한 정치혁명을 통하는 것이다.

 

 (추가적으로, 1940년대 후반에 장[개석] 정권은 너무나도 절망적으로 부패하여 사실상 스스로에 의하여 와해되었다. 내전의 끝에서 선양[묵던-Mukden] 북경[페킹-Peking], 그리고 광동[캔톤-Canton]은 총 한방 쏘지 않고 모두 항복했다. 게다가 미국 지배계급은 KMT 정부에 너무나도 실망해서 1948-49년 기간 동안에 자신의 물자지원을 본질적으로 철회했다. 결국, 무기에 굶주렸던 공산당 군대는 러시아의 만주 점령에 뒤이어 갑작스럽게 많은 양의 현대화된 일본 무기들을 공급받았다. 이들 특수한 환경들을 이해하는 것이 핵심적이다. 달리 생각해보면, 만약 중국 프롤레타리아트가 자기 자신의 기치, 제4 인터내셔널의 기치 하에서 투쟁하고 있었고, 부르주아지 정권이 쉽게 붕괴되지 않았다면, 모[택동]의 농민 군대들의 승리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문화혁명”에 대한 신비화가 점차로 사라졌고, 관료집단이 중국정권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를 재주장해 온 이후, 오늘날 중국이 소련, 동유럽 나라들, 쿠바, 북 베트남 등과 같은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훨씬 쉽다. 그러나 오직 정통 트로츠키주의자들만이 모[택동]정권의 바로 그 초기 단계들부터 이 입장을 고수해왔다. 중국 혁명에 대한 1955년 SWP 전국대회의 결의안은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혁명 내내, 모[택동]과 그 동료들은 계속해서 혁명의 경로에 독단적인 제한들과 한계들을 강요했다. 농업개혁은 ‘단계들 속에서’ 수행되었고 미국 제국주의의 공격이 한국[전쟁] 동안과 그 이후 지주들의 반대를 자극했을 때에야 비로소 완수되었다.... 2차 중국 혁명 동안과 그 이후 고통 받았던 계속적인 패배에 의하여, 그리고 도시들, 무엇보다도 프롤레타리아트를 농촌에서의 군사적 투쟁에 종속시켰고, 그렇게 해서 노동자들의 독립적인 정치적 세력으로서의 부상을 막았던 CCP의 계획적인 정책에 의하여 중국 노동계급이 사기가 저하되었었기 때문에 중국 스탈린주의자들은 권력에 오를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CCP는 대중들의 눈에 정치적 중핵들과 지식을 가진, 더욱이 군사 세력의 지지를 받는 유일한 조직으로 보였다.”
-“3차 중국혁명과 그 여파”, 1955년 10월

 

 필요한 것은 심지어 인기가 없어 보일 때에 조차도 대중들에게 이 진실을 말해 줄 용기를 가진, 그리고 영구혁명의 동학을 이해하여 제국주의 공격으로부터 이들 성취들을 방어할 수 있고 사회주의를 향한 투쟁을 수행할 수 있는 정당이다. “진보적 부르주아지 계급”과의 “공동전선들”이라는 자신들의 반동적 꿈들을 가진, 그리고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소위 “문화혁명”에 분별없이 열광하는 모[택동]주의자들은 그들 스스로가 이 임무를 수행할 수 없음을 증명해왔다. 그 임무는 맑스, 레닌, 그리고 트로츠키의 전통의 진정한 후계자들인 제4 인터내셔널의 열성적인 지지자들에게 주어진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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