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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의 스탈린 유파에 대한 재고찰 1부 영구혁명[국제공산주의동맹 팜플렛]

가디언에 대한 응답

왜곡의 스탈린 유파에 대한 재고찰

 

1부 영구혁명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투쟁들을 배신하기 위한 지칠 줄 모르는 노력들 와중에서, 스탈린주의자들은 혁명주의라는 겉치레를 계속해서 고수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들의 교의들은 맑스주의 노선과 대치되는 지점에 있다. 이것이 그들에게 딜레마를 제공하는데, 그들은 이 딜레마를 오로지 트로츠키주의자들에 대한 체계적인 거짓말들에 의존함으로써만 해결할 수 있다. 이것은 (맑스와 레닌은 물론) 트로츠키의 정치적 입장들에 대한 왜곡들로부터, 10월 혁명의 군사적 조직자로서의 트로츠키의 지도적 역할을 부정하고, 그가 천황(!)을 위한 간첩활동을 수행했다고 비난하는 것으로 나가간다. 모스크바 재판 동안에 트로츠키주의로 기소된 지노비에프, 카메네프, 그리고 다른 지도적 볼셰비키들에게 퍼부어진 혐의들의 다수가 완전한 날조들이었음이 1956년 후르시쵸프에 의하여 인정되었던 반면, 그 방식은 남아 있다. 오늘날 우리는 특히 다양한 모택동주의 그룹들 쪽에서의 “왜곡의 스탈린 유파”의 광범위한 부활을 목격하고 있다. 스탈린이 자신의 시대에 노동계급에 대한 자신의 범죄들을 정당화하기 위한 덮개를 필요로 했던 것처럼, 오늘날 모택동주의자들은 방글라데시, 인도네시아, 그리고 다른 곳에서 그들의 반혁명적 정책들을 덮어 가리기 위하여 사악한 중상비방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 시리즈는 이들 거짓말들에 대한 응답과 지난 50년 동안 스탈린주의 개량주의에 맞서는 투쟁 속에서 발전되어 온 트로츠키주의의 기본적 개념들의 일부에 대한 소개의 의도로서 써진 것이다.

 

스탈린주의라는 개량주의 노선과 맑스, 레닌, 그리고 트로츠키의 혁명적 정책들 사이의 투쟁은 역사가들에게나 그러한 어떠한 학문적 관심의 문제도 아니다. “패배들의 위대한 조직자”(스탈린)의 반혁명적 정책들은 스탈린의 GPU 요원에 의한 트로츠키 암살과 시베리아의 집단 유배지들에서의 수만 명의 러시아 좌익반대파들에 대한 살인뿐만 아니라, 중국(1927년), 독일(1933년), 프랑스(1936년), 스페인(1937년), 인도네시아(1965년), 그리고 프랑스(1968년) 혁명들에 대한 교살들로, 그리고 또한 1946년과 1954년의 베트남 스탈린주의자들의 배신적인 “평화 협정들”로도 귀결되었다. 스탈린주의와 트로츠키주의 사이의 투쟁은 글자 그대로 혁명적 운동을 위한 생과 사의 문제이며, 맑스주의로 가는 길을 추구하고 있는 투사들의 가장 밀착된 관심이 주어져야만 한다.

 

영구혁명은 무엇인가?

트로츠키주의의 영구혁명의 이론이 이 충돌의 중심에 있다. 1905년 러시아 혁명의 시대에 처음 제기되었던 이 이론은 1939년에 써진 그의 글 “러시아 혁명의 세 가지 개념들”에서 트로츠키에 의하여 요약된다:

 

“... 러시아에서의 민주주의 혁명의 완전한 승리는 농민에 기대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형식 속에서만 오직 생각할 수 있다. 민주주의적 임무들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적 임무들도 또한 불가피하게 일정에 올리게 될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동시에 국제 사회주의 혁명에 강력한 추진력을 제공할 것이다. 서구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만이 부르주아지적 복구로부터 러시아를 보호할 수 있었을 것이고, 러시아가 사회주의의 수립의 마지막을 잘 마무리 할 가능성을 보장해 줄 수 있었을 것이다.”

 

대이비드슨과 스탈린주의자들이 “멘셰비키들의 그것들과 마찬가지로 러시아 혁명의 경로에 대한 트로츠키의 관점들은 역사에 의하여 논박되었다”고 말할 때 그들이 거부하는 것이 이 이론이다(가디언, 1973년 4월 4일). 실제로 트로츠키의 이론은 실천적으로 확증되지 않았는데, 그것은 오로지 봉기가 권력의 장악에 결코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의 경로는 이 이론을 완전하게 입증했다. 소비에트 권력에서 구현되었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만이 짜르 지배로부터 피억압 민족들의 해방뿐만 아니라 토지와 평화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게다가, 1905년과 1917년 레닌의 관점들에 대한 주의 깊은 분석은 그가 트로츠키의 정식화의 모든 핵심적 측면들과의 합의로 옮겨갔으며,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라는 자신의 초기의 슬로건을 단념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레닌이 1917년에도 여전히 “민주주의” 혁명을 고수했고, “일국에서의 사회주의”를 주장했다는 스탈린주의의 주장은 순전한 날조이다. 마찬가지로, 트로츠키의 슬로건이 추정상 농민을 무시하는 것으로 보이는 “짜르를 타도하라, 노동자 정부를 위하여”였다는 그들의 비난은 트로츠키에 의하여 반복적으로 부인되었다. 영구혁명의 슬로건은 이것보다는 농민에 의하여 지지를 받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였다.

 

트로츠키의 관점에서는, 세계경제의 불균등 결합발전 때문에, 후진국들의 부르주아지 계급은 그들로 하여금 부르주아지 혁명, 즉 민주주의, 농업혁명, 그리고 민족 해방이라는 근본적 임무들을 수행하는 것을 막는 봉건적, 그리고 제국주의적 이해관계들에 긴박하게 묶여 있다. 행동으로 일어선 농민과 전투적 노동계급의 존재 속에서, 이들 각각의 목적들은 자본가 계급의 정치적, 그리고 경제적 지배를 직접적으로 위협하게 된다. 부르주아지 혁명의 임무들은 오직 농민과 프롤레타리아트의 동맹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맑스주의는 국가에는 오직 하나의 지배적인 계급만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공산주의자 선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프롤레타리아트가 유일한 일관되게 혁명적인 계급이기 때문에, 이 동맹은 농민에 의해 지지를 받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다. 혁명의 민주주의적 임무들을 수행함에 있어서, 프롤레타리아트 국가는 불가피하게 “부르주아지적 소유의 권리들을 독재적으로 침해해” 들어가야만 하며(예를 들면, 지주들에 대한 몰수), 이렇게 해서 혁명은 어떠한 임의의 “단계들”에서 멈추는 것 없이, 혹은 레닌이 말했던 것처럼, 부르주아지적 국면들과 프롤레타리아트 국면들 사이에 서 있는 “만리장성” 없이 직접적으로 사회주의적 임무들로 넘어간다. 이렇게 해서 혁명은 궁극적으로 계급들의 완전한 폐지(사회주의)로 귀결되면서 영구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적 발전의 가장 높은 단계에 있는 생산력들의 해방의 산물이다. 즉, 계급들은 궁핍 다시 말해 결핍을 제거하는 것에 의해서만 오직 폐지될 수 있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하나의 고립되고 후진적인 나라에서 수립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사회주의는 적어도 몇 개의 선진국들의 공동의 성취일 수밖에 없다. 이들 보충적인 이유들 때문에, 혁명은 그것 자체를 확대하고 깊게 만들어야만 하며, 그렇지 않다면 사라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트로츠키의 “영구혁명”과 스탈린의 “일국에서의 사회주의” 사이의 대립은 현실에서는 세계적 규모에서의 사회주의와 부르주아지적-봉건적 반동의 가장 무자비한 통치(야만주의) 사이의 대립이며, 중간의 길은 없다.

 

영구혁명의 이론이 레온 트로츠키의 성취였기는 하지만, 그 개념은 1850년에 칼 맑스에 의하여 소개되었다. 대이비드슨은 맑스주의의 외투로 스탈린의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이론을 덮어 가리기 위한 그의 노력 속에서, 맑스의 “영구혁명”이라는 구절의 사용은 사회주의까지 계속되는 계급투쟁에 대한 단순히 일반적인 주목이라는 점을 고수한다:

 

“그래서 혁명은 두 가지 방식들에서 ‘영구적인’ 것이다. 우선 미래를 바라봄에 있어서, 그것의 경로는 계급들 그 자체가 폐지될 때까지의 연속된 계급투쟁의 하나이다. 둘째로, 역사적으로 뒤를 돌아보면, 일단 계급들이 철폐되면, 더 이상 계급투쟁과 권력의 장악, 그리고 한 계급에 의한 다른 계급에 대한 지배가 없다는 의미에서 혁명은 영구적인 것이다.”

-가디언, 1973년 4월 4일

 

이런 추상수준에서, 대이비드슨이 차이들은 오직 “문제의 상세한 내역에서”만 생겨난다고 결론 내리는 것이 놀랍지 않다. 그러나 맑스가 실제로 무엇을 말했는지를 우선 살펴보자.

 

“민주주의적 소부르주아지 계급은 가능한 빨리, 그리고 기껏해야 위의 요구들의 성취를 가지고 혁명을 결론으로까지 가져가기를 원하는 반면, 모든 일정정도 소유하고 있는 계급들이 그들의 지배라는 지위로부터 축출되어 있을 때까지,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가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하나의 나라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의 모든 지배적인 나라들에서 프롤레타리아트들의 연합이 멀리 전진하여 이들 나라들의 프롤레타리아트들 사이의 경쟁이 중지되고, 적어도 결정적인 생산력들이 프롤레타리아트들의 수중에 집중되어 있을 때까지 혁명을 영구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의 이해관계이고 우리의 임무이다. 우리에게는 사적소유의 개조가 아니라 그것의 절멸이, 계급 적대들의 완화가 아니라 계급들의 폐지가, 기존 사회의 개선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의 건설이 주제가 될 수 있을 뿐이다.”

-칼 맑스, “공산주의 동맹 중앙위원회 연설”, 1850년

 

실제로 이것은 스탈린의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에 대한 궤변에 대한 75년을 앞선 강력한 논박이다. 트로츠키의 이론은 자본주의가 후진 지역들 전반에 침투하였고, 세계적 규모에서 사회주의를 위한 객관적 필요조건들이 이미 존재하는 (이것으로 해서 구 식민지 나라들의 젊은 부르주아지들조차 위태롭게 하는) 제국주의 시대에서 이들 근본적인 명제들의 더한 발전이다.

 

 

 

단계들에 의한 혁명: 1848년 독일

 

스탈린주의자들에 따르면, 트로츠키주의의 주된 오류는 혁명의 “단계들”, 특히 사회주의적 단계에 대립되는 것으로서의 민주주의적 단계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대이비드슨의 보다 저명한 선배들 중의 하나는 (스탈린이 “트로츠키 추종자!”라는 이유로 그를 죽이기 몇 년 전에) 다음과 같이 썼다.

 

“트로츠키 동지는 노동계급의 독재를 과정의 시작에 두기는 하지만, 이 독재로 귀결되었던 단계들과 이행들을 보지는 않았고, 그는 세력들의 구체적 관계를 무시했[고] ... 그는 혁명의 단계들을 보지 않았다 ...”

-N 부하인, “영구혁명의 이론에 관하여”, 1925년

 

이 2단계혁명의 “이론”, 영구혁명의 “상세한 내용”에 관하여 고려해 보자. 아마도 맑스는 그런 이론을 가지고 있었을까? 물론 맑스는 부르주아지 혁명과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 역사상 발전의 다른 시대들을 대변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엄격하게 구별했다. 그러나 심지어 19세기 중반에 조차, 부르주아지 혁명과 프롤레타리아트 혁명들 사이에 “만리장성”이 존재하기에는 부르주아지 계급이 너무도 약하고 프롤레타리아트가 너무도 강했다는 것이 분명해지고 있었다. 사회적 내용에서는 구별되지만, 그것들은 역사적으로 밀접하게 연관될 것이었다. 1848년 독일혁명은 이 연관을 특히 분명하게 했다. 공산주의자 선언에서, 맑스와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공산주의자들은 독일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둔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도, 독일은 부르주아지 혁명의 전야에 있다. 두 번째로, 일반적인 유럽의 문명과 관련되는 한, 이 혁명은 상대적으로 진전된 조건들에서, 독일 프롤레타리아트가 17세기 영국의 프롤레타리아트나 18세기 프랑스의 프롤레타리아트가 그랬던 것보다 훨씬 더 발전한 때에 발생할 것이다. 그 결과, 19세기 독일에서는, 부르주아지 혁명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즉각적인 전조가 될 수 있을 뿐이다.”

 

맑스는 1848년에 노동계급이 직접적으로 승리를 성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은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 계급과 소부르주아지 계급이 봉건-절대주의적 반동에 맞서 투쟁하는 한 그들을 지지하도록 강제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가 매우 허약하고 정치적으로 숙련공과 민주주의적 소부르주아지의 이해관계에 의하여 지배되던 이 제국주의 이전 시대에서 조차, 그는 노동자들에게 그들의 과거의 동맹에 반대하기 위하여 뿐만 아니라 “전체 프롤레타리아트의 무장”을 이루기 위하여 “새로운 공식적인 정부의 곁에 그들 자신의 혁명적 노동자 정부를 동시에 굳건하게 세울 것을” 조언했다.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 1848년 부르주아지 혁명들의 뒤를 바로 이을 것이라는 맑스의 예측은 입증되지 않았다. 그러나 성공적인 부르주아지 혁명들도 없었는데, 그것은 정확하게 만약 대중들을 일깨우기 위한 최소한의 스텝이라고 취해진다면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 발발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자유주의자들을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반동의 품속으로 몰아넣었기 때문이었다. 사회혁명이라는 공통의 공포에 의하여 봉건주의자들에게 매여 있던 자유주의자들은 (1789년 프랑스의 부르주아지 계급이 그랬던 것처럼) 왕조를 타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봉건주의자들과 권력을 공유하기 위하여 노력했다. 독일 부르주아지 계급은 엥겔스가 말했던 것으로서의 “소매상점 주인”의 수준을 극복하지 못했다.

 

 

단계들에 의한 혁명: 1905년 러시아

 

1905년의 러시아 혁명은 영구혁명의 문제를 다시 재기하였으나, 훨씬 더 날카로운 형태에서 [그렇게 했다]. 러시아 부르주아지 계급은 독일 부르주아지 계급보다도 훨씬 더 유약했다. 수세기 동안, 러시아의 발전의 주요한 성격은 러시아의 불리한 지리적 위치와 분산된 인구로부터 기인하는 러시아의 원시성과 뒤늦음이었다. 북부 제국에서의 자본주의 발전은 전제적인 국가에 의하여 서구로부터 주로 수입되었고, 단순하게 기존의 봉건적 경제에 이식되었다. 이렇게 해서, 현대적 산업 프롤레타리아트가 주요 도시들에서 형성되고 있었고, 가장 선진화된 기술들을 활용하는 대공장들에 집중되었던 반면, 서구에서 부르주아지 계급의 경제적 기초를 형성했었던 지방중심지 수공업자와 제조업의 초기 형태들은 발전할 시간이 전혀 없었다. 유럽의 자본과 국가은행들의 수중에 주로 있던 거대 산업이 있었지만, 러시아 자본가 계급은 수적으로 소수로 남아 있었고, 고립적이며, 절반은 이질적이었고, 역사적 전통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러시아 자본가 계급은 수천가지의 요소들에 의하여 봉건적-절대주의적 국가와 토지소유 귀족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민주주의, 농업 혁명, 그리고 민족 해방의 과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부르주아지가 주도하는 혁명은 완전히 논외였다. 그리고 여전히 부르주아지 혁명의 과제들이 남아 있었다.

 

이러한 현실에 직면하여,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노동자 당의 두 세력들은 상반되는 입장을 가졌다. 학구적 형식주의를 가진, 그리고 철저하게 줏대가 없던 멘셰비키들은 혁명의 최초의 과제들의 민주주의적 성격으로부터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와의 동맹이라는 “전략”을 도출했다. RSDLP 통합 당대회(1906년)의 한 연설에서, 지도적 멘셰비키인 악셀로드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러시아의 사회적 관계들은 단지 부르주아지 혁명을 위해서 성숙했을 뿐이다 ... 이 일반적인 정치적 무법성이 존속하는 반면, 우리는 정치권력을 위한 다른 계급들에 맞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직접적인 투쟁에 대하여 너무 많은 언급을 하지 말아야만 한다 ... 그것은 부르주아지적 발전의 조건들을 위한 투쟁이다. 객관적인 역사적 조건들이 우리의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우리의 공동의 적에 맞서는 부르주아지 계급과의 어쩔 수 없는 동맹을 선고한다.”

 

이 결론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은 여러 수십 년의 자본주의적 발전 이후에나 올 수 있는 것이라는 암시들과 함께, 유럽의 (보다 특수하게는 프랑스의) 전통적인 발전 도식을 러시아적 조건들에 단순히 기계적으로 갖다 붙임으로써 도출되었다. 멘셰비키 입장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우리는 비-프롤레타리아트 정당들의 지지를 소중히 해야만 하며, 분별없는 행동으로 그들이 우리로부터 멀어지도록 해서는 안 된다”라는 플레하노프의 언급에 의하여 포착되었다. 이것에 대하여, 레닌은 “... 토지를 소유한 신사양반들 가운데 자유주의자들은 수백 만 번의 ‘분별없는’ 행동들에 대하여 당신을 용서할 것이지만, 그들은 그들의 토지를 빼앗기 위한 선동들은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응수했다.

 

플레하노프의 부르주아지 계급과의 동맹에 반대하면서, 레닌은 농업혁명을 수행하기 위한 농민과의 블록을 주장했다. 이것은 그의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민주주의 독재”라는 공식에서 명문화되었다.

 

“우리는 현실의 어떤 사회적 세력들이 ‘짜리즘’에 반대하는지에 대하여 우리의 생각으로 완전하게 확신하고 있어야만 한다.... 대 부르주아지계급, 지주들, 공장주들, 그리고 오스보보즈데니예를 따르는 ‘사회’(자유주의자들)는 그러한 세력이 될 수가 없다.... 자신들의 계급적 지위 때문에, 그들은 짜리즘에 맞서는 결정적인 투쟁을 수행할 수가 없다. 즉, 그들은 결정적인 투쟁 속으로 들어가기에는 사적 소유, 자본과 토지에 의하여 너무도 막중하게 속박되어 있다. 그들은 짜리즘이 파괴되기를 바라기에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들에 대항할 용도의 관료적 세력들과 경찰, 군사 세력들을 가진 짜리즘에 대한 너무도 큰 필요성을 걸치고 있다. 아니다, ‘짜리즘에 대한 결정적인 승리’를 획득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민주주의 독재의 수립을 의미한다.”[강조는 원문]

-V.I. 레닌, “민주주의 혁명에서 사회민주당의 두 가지 전술들”, 1905년

 

이 정책은 멘셰비키들의 무미건조한 자유주의와 화해할 수 없이 대립했고, 농민 반란의 불길에 부채질을 하고 프롤레타리아트를 짜르주의 전체에 대한 “무분별한” 공격으로 지도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농민의 수중에 놓여야 하는 권력과 자본주의적 발전의 성숙으로 열려 있는 미래를 가지는, 부르주아지적인 것으로서의 혁명에 대한 성격규정화를 주장했다.

 

“맑스주의자들은 러시아 혁명의 부르주아지적 성격에 대하여 절대적으로 확신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정치체제에서의 민주주의적 개혁들, 그리고 러시아를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것이 된 사회적, 그리고 경제적 개혁들은 그것 자체로 부르주아지적 질서에 대한 침해를 의미하지 않으며, 처음으로 그것들은 자본주의의 광범위하고 빠른, 아시아적이 아닌 유럽적인 발전을 위한 기초를 진정으로 분명하게 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들은 처음으로 부르주아지 계급이 계급으로서 지배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만들 것이다.”

-같은 책

 

이 글의 시작에서 인용되었던 트로츠키의 관점은, 비록 후자의 것에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더 가깝기는 했지만, 멘셰비키들과 볼셰비키들의 것들과는 달랐다. 그가 나중에 썼듯이,

 

“1905년에 기원을 두었던 영구혁명의 이론은 ... 우리의 시대에는 후진 부르주아지 국가들의 민주주의적 과제들은 직접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로 귀결되며,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사회주의적 과제들을 일정에 올린다는 것을 지적했다.

-“영구혁명”, 1929년

 

대이비드슨에 따르면, 레닌은 “혁명이 단계에 따라서 발전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던 반면, 트로츠키는 아마도 부르주아지-민주주의 단계를 완전히 무시했다. 이것은 간단히 연막이다. 트로츠키는 그것의 즉각적인 역사적 과제들이라는 의미에서는 혁명의 첫 번째 국면들의 부르주아지적 성격을 결코 부인하지 않았지만, 그것의 추진 세력들과 전망들의 의미에서는 그랬다.

 

“1905년에 이미, 페테르스부르크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소비에트를 프롤레타리아트 정부라고 불렀다. 이 명명은 당시의 일상 언어로 변했고, 권력을 위한 노동계급의 투쟁이라는 강령에 완벽하게 구현되었다. 동시에, 우리는 잘 다듬어 낸 정치적 민주주의의 강령 (보통선거, 공화국, 민병대, 등)을 짜리즘에 맞서 대항시켰다. 우리는 다른 어떤 방식으로는 활동할 수 없었다. 정치적 민주주의는 노동 대중들의 발전에 있어서 필수적인 단계이다 - 하나의 경우에, 이 단계는 수십 년을 지속하는 반면, 다른 경우에는 심지어 그 기관들이 현실화되기도 전에 혁명적 정세가 대중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정치적 민주주의의 선입견들로부터 해방시키도록 허용한다는 고도로 중요한 단서를 가지는.

-L.D. 트로츠키, 1905년에 대한 “서문”, 1922년

 

대이비드슨은 또다시 트로츠키는 “농민에 적대적”이었던 반면, “레닌의 관점은 정반대이다”라고 주장함으로써 주제를 흐리려고 시도한다. 이것은 순전한 날조이다. 전체로서 농민이 노동계급의 “사회주의의 동맹”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트로츠키가 즉시 기각했다는 것은 진실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 장악 이후의 바로 첫 번째 순간부터, 프롤레타리아트는 농촌의 빈민과 부자들 사이의, 농업 프롤레타리아트와 농업 부르주아지 사이의 적대들 속에서 지지를 찾아내야만 할 것이다.”

-L.D. 트로츠키, “결과들과 전망들”, 1905년

 

그러나, 이 측면에서, 레닌의 관점은 동일했다.

 

“관료와 지주에 맞서는 투쟁은 모든 농민들, 심지어 부유층과 중간층의 농민들과 함께 수행될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 반면, 부르주아지에 대항하는 투쟁, 그리고 그래서 부유층 농민들에 맞서는 투쟁도 또한 오로지 지방의 프롤레타리아트와 함께만 적절하게 수행될 수 있다.”

-V.I. 레닌, “소부르주아지 사회주의와 프롤레타리아트의 사회주의”, 1905년

 

레닌과 트로츠키 사이의 논쟁은 혁명의 부르주아지-민주주의적 단계가 건너뛰어질 수 있는지 여부, 혹은 노동자들과 농민들 사이의 동맹은 필수적인 것인지 여부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협조의 정치역학, 농민의 독립성의 정도에 관한 것이었다. (맑스와 엥겔스의 저작들뿐만 모든 과거의 혁명적 경험이 보여주었던 것처럼) 트로츠키는 그들의 중간적인 지위와 사회적 구성의 이질성 때문에, 하나의 계급으로서의 농민은 독립적인 역할을 하거나 자기 자신의 독립적인 정당을 형성할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농민은 부르주아지 계급이나 프롤레타리아트 둘 중 하나의 지도를 따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단계들 속의 혁명: 1917년

 

대이비드슨의 글들이 1917년 10월 혁명은 거의 언급을 하지 않고, 그 대신 농민의 역할을 둘러싼 1905년의 논쟁들로부터 곧바로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의 문제로 나아가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정말이지, 대이비드슨이 이 시기로부터 레닌의 저작들을 재연했다면, 그는 1905-1907년의 레닌의 관점과는 철저히 다른 선언들을 출판해야만 했을 것이다. 4월 4일 레닌의 유럽으로부터의 도착 이전에는, 볼셰비키 당의 다수가 짜르를 타도했던 2월 혁명 이후 권력을 잡았던 르보프 공의 부르주아지 임시정부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주장했다. 스탈린은 1917년 3월 볼셰비키 당대회에서 이 관점의 수석 대변인이었다. 그는 자신의 임시정부에 대한 태도에 관한 보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임시정부는 사실상 혁명적 인민들의 성취들을 강화하는 역할을 해왔다.... 미래에 어쩔 수 없이 우리로부터 철수할 부르주아지 계층들을 밀쳐내는 과정을 서두르는 사태들을 강제하는 것은 지금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다. 우리에게는 중간-부르주아지 계층을 분리시켜내는 것에 제동을 거는 것으로 시간을 벌 필요가 있다.... 임시정부가 혁명의 발걸음들을 강화하는 한, 그 정도까지는 우리가 임시정부를 지지해야만 하지만, 임시정부가 반혁명적인 한, 임시정부에 대한 지지는 허용될 수 없다.”

-“1917년 전 러시아 당 일꾼 대회의 원안 초안”

 

당 지도부의 대부분이 “부르주아지-민주주의 혁명을 완수할 것”을 주장했던 반면, 레닌은 유일한 혁명적 정책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주장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입장을 취함에 있어서, 레닌은 트로츠키의 영구혁명의 이론 쪽으로 바뀌었으며, 우익으로부터 트로츠키주의로 비난당했다. 이것은 당의 이데올로기적 재무장을 필요로 했고, 한 때 레닌은 처음에 그의 “4월 테제들”이 지도부에 의하여 기각되자 평당원들에게로 투쟁을 가져가기 위하여 중앙위원회로부터 사임하겠다고 위협했다. 이들 테제들의 핵심적인 부분은 [아래와 같이] 선언했다.

 

“러시아의 현정세의 특수한 성격은 나라가 프롤레타리아트의 불충분한 계급의식과 조직으로 인하여 부르주아지의 수중에 권력을 놓아주었던 혁명의 첫 번째 단계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가장 가난한 부위들의 수중에 권력을 놓아야만 하는 그것의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V.I. 레닌, “현재의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들”, 1917년

 

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스탈린의 입장과는 정반대로, 레닌은 “임시정부에 대한 지지는 안 되며, 임시정부의 약속들의 완전한 기만성이 분명해져야 한다...”(같은 책)고 주장했다. 레닌에 대한 반대는 “부르주아지 민주주의 혁명은 완수되지 않았다.... 레닌 동지의 일반적 도식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것이 부르주아지-민주주의 혁명이 완수되었다는 가정으로부터 나아가고, 이 혁명의 사회주의 혁명으로의 즉각적 변형에 의거하는 한, 우리로서는 그것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던 Y. 카메네프에 의하여 주도되었다. 레닌은 이 비난에 대하여 그의 “전술에 관한 편지들”에서 [다음과 같이] 응수했다.

 

“(1917년 2월-3월의) 혁명 이후, 권력은 다른 계급, 새로운 계급, 다시 말하자면 부르주아지 계급의 수중에 있다....

 

“이러한 한에서, 부르주아지 혁명 혹은 부르주아지 민주주의 혁명은 완수된 것이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우리는 기꺼이 자신들을 ‘고참 볼셰비키들’로 부르는 사람들로부터 항의의 아우성을 듣는다. 우리는 항상 부르주아지-민주주의 혁명은 오로지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민주주의 독재’에 의해서만 완수된다는 것을 고수하지 않았는가? 라고 그들은 말한다 ... 나의 대답은 이렇다. 볼셰비키 슬로건들과 사상들은 전체적으로는 역사에 의하여 확증되어 왔지만, 구체적으로는 일들이 다르게 풀려왔다....

 

“‘노동자들과 병사들의 대표들의 소비에트’ - 동지들은 현실에서 이미 성취된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민주주의 독재”를 여기에 가지고 있다.

 

“이 공식은 이미 낡아빠진 것이다....

 

“이제 우리는 독재 내부에서 프롤레타리아트 인자들과 소소유 혹은 소부르주아지 인자들 사이의 분리를 발생시키기 위한 새롭고도 다른 임무에 직면한다....

 

지금 오직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민주주의 독재’만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시대에 뒤쳐진 것이며, 그 결과 그는 사실상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에 맞서 소부르주아지 계급으로 넘어간 것이며, 그 사람은 ‘볼셰비키’ 준 혁명적 유물들 보관소에 위탁되어야 한다....

 

“카메네프 동지는 ... 파리 코뮌에 대하여 사회주의를 ‘즉각적으로’ 도입하기를 원했다는 부르주아지적 편견을 반복해왔다. 그렇지 않다. 불행하게도 코뮌은 사회주의를 도입하는데 있어서 너무 느렸다. 코뮌의 실제 핵심은 ... 특수한 형태의 국가의 창출이다. 그러한 국가는 이미 러시아에서는 등장했는데, 그것이 노동자들과 병사들의 대표들의 소비에트들이다!”

-V.I. 레닌, “전술에 관한 편지들”, 1917년 4월

 

그리고 파리코뮌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였다, 대이비드슨 형제여. 이 시기 즈음 프라우다를 위한 한 기사에서, 레닌은 트로츠키의 그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문제를 정식화했다.

 

“우리는 강력한 혁명정부를 지지한다.... 어떤 계급이 이 혁명을 만들고 있는가?가 문제이다. 누구에 대항한 혁명?

 

“짜리즘에 대항하는? 그 의미에서는, 오늘날 러시아의 토지 소유자들과 자본가들의 대부분이 혁명가들이다....

 

“지주들에 대항하는? 이 의미에서는, 농민의 대부분, 심지어 부유한 농민의 대부분조차, 즉 러시아 인구의 아마도 10분의 9가 혁명가들이다. 자본가들의 일부도 또한 지주들이 어떤 식으로건 무사할 수 없다는 기초들에서는 혁명가들이 될 준비가 되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자본가들에 대항하는? 이제 그것이 진짜 논점이다. 그것이 문제의 핵심인데, 그것은 자본가들에 맞서는 혁명이 없이는, ‘합병들 없는 평화’와 그러한 평화에 의한 전쟁의 신속한 종식에 관한 모든 실없는 소리가 고지식함과 무지 혹은 멍청함과 사기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소부르주아지의 지도자들 - 지식인들, 부유한 농민들, 나로드니크들의 현재 정당들... 그리고 멘셰비키들 - 은 현재 자본가들에 맞서는 혁명에 찬성하지 않는다....

 

“결론은 명백하다: 반(半)프롤레타리아트들에 의하여 지지를 받는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권력의 장악만이 그 나라에 진정으로 강력하고, 진정으로 혁명적인 정부를 제공한다.”

-V.I. 레닌, “강력한 혁명정부”, 1917년 5월

 

레닌이 이 때와 이 때 이후 모두에서 가끔씩 1917년 2월-10월 기간에 있었던 소비에트들을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민주주의 독재”의 이름으로 불렀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소비에트들은 국가권력을 잡고 있지 않았다. 레닌이 말했듯이,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들로”를 위한 투쟁은 자본주의에 맞서 투쟁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소부르주아지에 대한 투쟁이었다. 그리고 10월 혁명으로부터 유래했던 국가는 농민의 지지를 받던 노동계급의 독재였다. 1917년부터 레닌은 스탈린과 모택동에 의하여 구상된 것과 같은 두 계급들의 국가와 같은 피조물이 있을 수 있음을 결코 암시하지 않았다. 그의 카우츠키에 대한 논박에서 그가 썼듯이, “소비에트들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러시아적 형식이다”(“프롤레타리아트 혁명과 변절자 카우츠키”, 1918년).

 

혁명정당들의 슬로건들과 강령들은 계급투쟁 속에서 진정한 의미를 가진다. 즉, 그것들은 특정 실천의 방침들을 주장하고 다른 것들에는 반대한다. 4월에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민주주의 독재”의 슬로건을 계속 사용하기 위한 투쟁을 주도했던 카메네프는 10월에는 혁명적 봉기에 반대했고, 성공적인 봉기 이후에는 항의의 표시로 중앙위원회와 인민위원들의 위원회로부터 실제로 사임했다. 이런 행동 속에는 일관성의 외관은 있었다.

 

그러나 대이비드슨과 모든 곳의 스탈린주의자들은 “고참 볼셰비키” 강령이 10월 혁명에 의하여 확증되었음을 우리로 하여금 믿게 하려고 한다! 이 사기의 뒤에는 소위 스탈린주의의 반혁명적 정책들을 정당화하려는 하나의 목적이 있다. 그것은 늘 사회주의적 요구들을 위해서는 “너무 이르”며, 우리는 농민들이 토지를 장악하고, 프롤레타리아트가 빼앗은 자들을 몰수할 수 있기 전에 “민주주의적 단계”를 통과해야만 한다. 진정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가로서 레닌은 과거의 강령의 불충분함이 분명하게 드러났을 때 새로운 강령을 제기하면서, 1917년 혁명의 경험으로부터 배웠다. 그러나 이들 교훈들을 이해할 것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검은 것을 희다고 선포할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무슨 말을 할 수 있는가? 1927년 스탈린의 입속에 있던 “민주주의 독재”의 슬로건은 장개석이 수천 명의 공산주의자들과 전투적 노동자들에 대한 학살을 준비했던 바로 그 때에 중국 공산당에게 그들의 무기들을 포기할 것을 명령했던 것에 대한 변명이었다. 오늘날, 똑같은 슬로건이 캄보디아의 시아누크 공과 같은 “반(反)제국주의자들”에 대한 지지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사용된다면, 그것은 혁명가들에 대한 절멸과 혁명에 대한 교살이라는 똑같은 결과를 낳을 것이다. 선택이 전 세계적으로 제기된다. 즉, 사회주의 혹은 야만주의 중 하나이지, 중간의 땅은 없다!

 

1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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