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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의 스탈린 유파에 대한 재고찰_7부 모[택동]의 중국: 스탈린으로부터 닉슨까지

가디언에 대한 응답

왜곡의 스탈린 유파에 대한 재고찰

 

7부 모[택동]의 중국: 스탈린으로부터 닉슨까지

 

금단의 궁전 속에 있는 명과 만주의 귀신들이 황제에 반대하는 것이 명백한 불충스러운 후계자의 음모에 대하여 스스럼없이 낄낄거리면서 웃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들은 북경에서 자신들의 것과 꽤나 비슷한 새로운 왕조가 지배를 하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맑스주의자들은 모[택동]의 궁전에 있는 음모들이 결국에는 자본주의 체제로부터 벗어났던 고립되고 후진적인 국가에 대한 제국주의 세계질서의 압력에 의하여 발생되고 모양이 형성된다는 것을 인지하는데 있어서 그러한 고전적 망령들보다 이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들의 가장 기괴하고 개인적인 표현에서 조차, 모[택동]주의 관료집단 안에서의 내부투쟁들은 중국혁명과 인류의 사회주의적 미래의 운명과 뒤엉킨 상태로 섞여 있다.

 

 

중국에서 자본주의를 파괴하고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를 수립했던 대중적 농민 봉기를 통하여 권력에 오르면서, 모[택동]에 의하여 지도되던 소부르주아지 민족주의 엘리트는 열강으로서의 중국의 지위를 복구하기로 결정했다. 1950년대 동안에, 제국주의의 압력은 모[택동]주의 관료집단에게 소련이 주도하는 진영 내부에 머물도록 강제했다. 하지만, 크레믈린의 지배자들이 단호하게 중국이 양지바른 곳에서 자신의 자리를 확보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것이 점점 더 분명해지자, 중국 관료집단은 소비에트 블럭과 관계를 끊었다. 일단 중국이 소련에 자신을 묶어 두었던 관계를 끊자, 중국의 물질적 후진성과 중국 지배자들의 열강에 대한 열망 사이의 충돌이 1960년대 후반에 있었던 발작적인 분파투쟁(문화혁명)을 낳았다. 그 투쟁의 결과는 모[택동]의 중국의 미국 제국주의에 맞서는 소련의 동맹으로부터 소련에 맞서는 미국 제국주의 외교의 반(半)동맹으로의 변형이었다.

 

 

 

공상적 모험주의의 경제학

 

 

문화혁명은 대약진(1958-60년)의 실패와 그것의 모[택동]의 당내 입지에 대한 충격에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었다. 대약진은 또한 중국의 제1차 5개년 계획(1953-58년) 동안 정통 스탈린주의적 산업화 정책들을 강제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것으로부터 생겨났다. 스탈린 모델의 산업화는 대부분의 경제적 잉여를 대규모 현대적인 중공업 단지들에 전적으로 충당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늘어난 도시 노동계급을 위한 식량과 농업 원료들은 강제적인 징수를 통하여 농민들로부터 추출되었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늘어나는 도시 인구에 필요한 농업 공급을 늘리기 위하여 전체 농업 생산과 식량 소비를 희생시키는 것을 수반했다. 1930년대 동안에는 러시아의 식량 소비가 15% 하락했고 농민들 사이에서, 특히 우크라이나에서는 광범위한 기근들이 있었다.

 

 

하지만, 중국은 급격한 경제성장을 위한 소비에트의 방책을 적용하기에는 간단하게 나무도 가난했다. 1929년의 소련과 비교하면, 1953년에 중국은 일인당 약 절반의 식량을 생산했다. 1930년대 동안에 러시아에서 발생했던 것에 필적하는 식량 산출의 감소는 글자 그대로 중국에서는 대량 기아를 만들어 낼 것이었다. 급속하게 팽창하는 투자가 물가인상을 야기하면서 소비재와 원재료의 부족들을 만들어 내자, 중국의 빈곤과 정통 소비에트-스탈린주의적 산업화 사이의 충돌이 1956년 전면에 곪아터질 지경에 이르렀다. 스탈린이 했던 것처럼 힘들여 헤쳐 나가는 대신에 중국 관료집단은 제1차 5개년 계획을 포기하고 긴축을 했다. 1957년에 투자는 실제로 줄었고, 노동자들은 정리해고 되어 농촌으로 복귀되었다.

 

 

스탈린 정권들 하에서 종종 발생하듯이, 경제의 긴축은 정치적 자유화와 연계되었다(이번 경우에는 백화운동). 하지만, 활짝 피는 꽃들의 향기는 관료들이 좋아하는 것이 전혀 아니었다. 백화운동이 드러냈던 불만의 범위와 깊이가 모[택동] 정권에 경고를 했다. 관료집단은 자신의 권위를 재주장하고, 대중들에게 더 큰 규율과 민족적 목표라는 강요된 개념을 강제할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대약진 정책의 또 하나의 중요한 원천은 농업 집산화의 모순적 상태로부터 나왔다. 스탈린의 러시아와는 반대로, 1956년 내내 농업 생산의 집산화는 거대한 자발적인 구성요소를 가졌다. 이것은 중국공산당(CCP)가 지주들에 대한 그들의 승리와 토지의 균등 재분배를 통하여 농민들 사이에서 상당한 도덕적 권위를 향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농민들이 협동조합들에서의 생산의 규모와 패턴에 대하여 실제적인 영향력을 가졌다. 하지만, 협동조합을 운영하던 지역 당 중핵들은 산출을 최대한으로 하도록 기대되었는데, 이것은 수입의 더 많은 몫을 재투자하고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동의하는 것보다 많은 노동시간을 투여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렇게 해서 지방의 당 중핵들은 그렇게 할 힘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농업 생산을 확대할 것을 요구받았다. 그 결과 협동조합들을 농민들이 명령을 받게 될 수 있는 사실상 국영농장들로 변형할 것에 대한 당 대오들로부터의 압력이 있었다.

 

 

이 압력들은 1958년의 대약진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대약진 정책의 핵심은 협동조합들의 수천가구들의 거대한 자급자족적 생산단위들(코뮌들)로의 합병이었다. 코뮌 체제는 수공업적 방책들로 산업을 확대하기 위하여, 원시적 기술들(예를 들면 뒷마당의 철로들)로 중공업 재화를 생산하기 위하여, 그리고 거대한 담수 프로젝트들을 수행하기 위하여 사용되어질 엄청난 양의 노동을 해방시킬 것으로 기대되었다. 자신들의 토지나 직접적인 생산물들에 대한 소유의 권리들이 없는 임금 노동자들로 사실상 농민들을 변형하면서, 코뮌 성원들은 투여된 노동에 기초해서만 지급을 받아야 했다. 대약진은 종교적인 천년왕국으로 다가가는 방식으로 농민들에게 팔렸다. 중국은 수년 내에 서구를 따라 잡을 것이며 15년 내에 완전한 공산주의를 성취할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농민들은 수년의 영웅적 희생 후에 그들이 지구상의 파라다이스에 살고 있을 것이라고 들었다.

 

 

경제성장을 가속화하는 것에�듓底� 그것의 실제적 결과들이 무엇이건, 대약진 뒤에 있는 “공산주의적 전망”은 하나의 반동적 공상주의였다. 몇 개의 선진화된 노동자 국가들의 국제적인 노동의 분할(그리고 궁핍의 제거)로부터 결과하는 공산주의는커녕, 중국식 “공산주의”는 수백만의 농민들의 원시적 노동에 의하여 생겨나야 했다(즉, 빈곤의 균등공유). 그러나 대규모 빈곤이 있는 한, 기생적 관료집단의 창출을 위한 경제적 기초가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반혁명을 통한 자본주의적 착취로의 복귀가) 남아 있을 것이다.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라는 자신들의 엉터리없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사무실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는 새로운 “범죄에 몰두하는 흑심을 가진 반(反)당 도당 배신자들” 각각이 자본주의로의 복귀를 위한 길을 준비하고 있어 왔다고 주장되고 있기 때문에, 중국의 지도자들이 사실을 모르고 있지는 않다. 사회주의는 경제적 궁핍이라는 계급 착취를 위한 물질적 기초의 폐절에 의한 계급들의 폐절을 의미한다. 맑스주의자들에게는 프롤레타리아트는 단순히 그들이 약탈과 억압의 희생자이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진정한 문화혁명을 위한 물질적 기초인 인류의 최상의 기술적 성취들을 체현하기 때문에 사회주의의 담지자이다. 맑스주의자들에게 있어서 공산주의는 한 대의 트랙터에 의한 백 명의 농민들의 대체를 의미하지만, 모[택동]주의자들에게 있어서 공산주의는 (사용 가능하지 않은) 한 대의 트랙터의 백 명의 농민의 노동으로의 대체를 의미한다.

 

 

실제로, 대약진은 군사화된 노동에 대한 전례가 없는 시도였다. 관료집단은 농민들을 육체적 인내의 한계들에 이르기까지 일을 시켰다. 강제 입안된 생산속도에 의해 창출된 지옥 같은 조건들은 중앙위원회가 지역 당 중핵들에 대한 다음의 명령을 발표할 필요가 있었다는 사실에서 발견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8시간의 수면과 4시간의 식사와 휴식, 도합 12시간은 보장되어야만 하며 이것이 줄지 않아야만 한다.”

     -북경 평론, 1958년 12월 3일

 

 

이제 대약진이 중국 소비에트 국가들의 역사에서 유일한 경제적 붕괴로 귀결되었다는 것은 보편적으로 인정된다. 생산저하의 정확한 강도는 알려져 있지 않은데, 이것은 정권이 그 자체로 경제적 참상의 현저한 표시인 1960-63년 동안의 어떠한 통계도 결코 출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1959-62년 사이에 산업생산은 30-40% 하락했던(계간 중국, 1970년 4월-6월) 한편으로 1958-60년 사이에 곡식생산은 15-20% 하락했다(시사 현장, 1964년 1월)는 것이 합리적인 예측들이다.

 

 

대약진에 의하여 야기되었던 참상의 구체적인 이유들은 수없이 많다. 비록 모[택동]주의자들이 나쁜 날씨를 전체 알리바이로 만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나쁜 날씨는 참으로 하나의 요소였다. 1959년에는, 절망적으로 부풀린 자기 자신의 통계들을 믿으면서, 정권은 실제로 파종용 곡물토지 면적을 줄였다. 코뮌의 운영자들은 너무도 적은 노동을 기초적인 농경에 충당하면서, 노동을 매력적인 뒷마당 철 제련과 관개(灌漑) 프로젝트들로 분산시켰다. 산출 통계를 만들어내기 위한 병적인 흥분 속에서, 질에 대한 통제는 완전히 포기되었다. 대부분의 공동체 철강은 쓸모가 없었고, 새롭게 관개가 되었다고 보고되었던 토지의 절반 이상은 경작할 수 없었다. 자급자족 공동체를 위한 돌진은 불가능한 지리적 조건 하에서 작물을 키우기 위한 시도들(예를 들면 면화)로 귀결되었다.1960년 소비에트 원조의 갑작스러운 중단은 중공업 생산의 쇠퇴를 야기한 중요한 요소였다.

 

 

하지만, 농민들의 소유에 대한 이해관계에 대한 총체적인 침해와 노동에 대한 완고한 군사화가 경제적 파국의 근본적인 원인이었다는 것이 압도적 진실이다. 농민들은 그들이 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식, 즉 생산에 대한 거부로 코뮌 체제에 맞서 저항했다. 농민에 대한 양보가 대도약의 실패의 핵심이었다는 것은 관료집단 그 자체에 의하여 증명되었다. 후퇴하면서 정권은 개인주의적인 농민적 기호에 주요한 양보들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측면에서 대도약은 결정적이었다. 그것은 내전에서, 그리고 토지의 균등분배를 통하여 공산당이 성취했던 도덕적 밑천을 날려버렸다. 1960년 이후에는 농민들이 사회적 이상들이나 미래의 풍요라는 약속들에 의해서는 더 이상 동기 부여될 수 없었고, 오직 현금에 기초해서만 그렇게 될 수 있었다.

 

 

 

 

모[택동]의 좌천과 절름거리는 대 후퇴

 

 

모[택동] 혼자만 대도약의 책임을 졌다. 그리고 모든 당 지도자들 중에서 모[택동] 혼자서만 계속해서 그것을 방어했다. 모[택동]은 중국의 철도 부족이 생산된 금속괴들을 유용한 목적을 위하여 활용하는 것을 힘들게 만들었다고 주장하면서, 심지어 뒷마당 금속 제련소들까지도 방어했다. 나머지 당 지도부가 대도약이 농민들의 자기 이해관계를 총체적으로 침해했기 때문에 실패했다는 것을 깨달았던 반면, 모[택동]은 실패는 지역 중핵들의 “실책들”과 “과도함”에 의하여 야기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해서, 모[택동]는 대도약의 근저에 있는 원칙들을 결코 거부하지 않았다.

 

 

모[택동]이 중국을 거대한 기아의 절벽으로 몰아갔었던 정책을 계속해서 방어했기 때문에, 모[택동]이 관료집단의 다른 부위들에 의한 공격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 1959년에 정통 친 러시아 스탈린주의자인 국방장관 팽덕회가 대중을 소외시키고, 경제적 혼란을 조성하고, 소련과의 불필요한 마찰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모[택동]에 대한 직접적 공격을 개시했다. 원수 계급의 팽[덕회]의 정면공격은 실패했고, 그는 숙청되었지만, 이것은 모[택동]의 고매함을 약화시켰다.

 

 

1959-61년 동안, 대도약의 재앙적인 결과들이 점점 더 명확해지면서, 모[택동]은 지도적 중핵들 사이에서 자신의 권위의 상당 부분을 잃었다. 그는 중앙 지도부에서 조금씩 멀어졌고, 유소기(오랜 기간 모[택동]의 2인자), 주은래, 등소평(공산당 총서기), 그리고 팽진[彭眞]에 의하여 주도되던 그룹에 의하여 대체되었다. 모[택동]과 그의 지지자들(임표와 진백달[陳伯達])은 더 폭 넓은 당 지도부 내에서 좌익-비판 경향으로 전락했다. 임표의 부하(오함[吳晗-북경시 부시장]과 등척[鄧拓-북경 시당위원회 서기]) 2명이 빈약하게 가장된 모[택동]에 대한 공격을 출판했고, 이후 이것이 문화혁명 시작을 위한 구실로 복무했음에도 불구하고, 중앙 지도부에서의 변화들은 국민으로부터 감춰졌다.

 

 

대도약으로부터 회복하기 위하여, 유[소기] 정권은 농업과 산업 생산 모두에 대하여 부하린의 경제 정책을 채택했다. 코뮌들은 해체되고 가장 낮은 수준의 집산화인 약 20가구들의 “생산소조”로 대체되었다. 작은 규모의 사유지들과 가축에 대한 사적 소유가 권장 되면서, 자유시장이 권장되었다. 1962년에는 운남[雲南]에서는 사적 곡물수확이 집단 수확보다 많았다. 1964년에는 귀주(貴州, 구이저이)와 사천(四川, 쓰촨)에서는 집단 경작보다 사적 경작이 더 많았다.

 

 

1961년에 정부는 새로운 산업의 건설을 전면 금지했다. 산업적 팽창의 속도는 농민들과 생산소조들로부터의 자유로운 시장 공급에 의하여 조정되어야 했다. 중국의 조건들 하에서, 농민 시장의 성장에 의하여 산업의 발전이 결정되도록 허용하는 것은 가장 기초적인 의미에서 심대하게 반(反)프롤레타리아트적인 것이었다. 1964년 중국의 지도적 경제계획가인 박일파[薄一波] 안나 로이스 스트롱에게 정권이 도시 인구를 2천만 명으로 줄이려고 한다고 말했다(스트롱, 중국으로부터의 편지).

 

 

CCP의 국민적 권위의 급격한 하락과 융합되었던 시장경제로의 복귀는 관료집단 자체 내부에서 강력한 해체적 경향들을 만들어냈다. 개인적 이기주의, 출세주의, 편협한 기득권에 대한 방어, 그리고 지역적인 군벌주의가 충만했다. 문화혁명 동안, 1962년에는 상하이와 다른 지역 당들이 몇 안 되는 잉여 농산물 지역인 절강(浙江)으로부터 곡물을 요구했다고 보도되었다. 절강의 제1 서기는 “절강은 상하이의 식민지가 아니다.... 나는 먹여야 할 돼지들이 있다”(계간 중국, 1972년 10월-12월)라고 대답했다고 보도된다. 이 대응은 이 기간 관료집단의 서로 다른 부문들 사이의 관계들의 전형을 나타낸다.

 

 

모[택동]은 관료집단의 민족의 구세주적 공상주의 세력을 대표해왔다. 그래서 그는 당 중핵들 내부에서의 규율, 단결, 그리고 민족적 목적이라는 개념의 심화되는 쇠퇴에 의하여 깊이 마음이 어지러웠다. 1962년에 그는 당 중핵들의 열정을 회복하고, 경제정책에서의 농민 개인주의를 향한 경향을 제한하려는 이중의 목적을 가지고 사회주의 교육위원회라는 압력그룹을 조직했다. 사회주의 교육위원회의 노력들은 관료적 천편일률의 강력함에 무기력했음을 드러냈다.

 

 

문화혁명을 고려하면, 모[택동]의 정책들과 1961-65년 유[소기]가 주도했던 당 중앙의 정책들 사이의 상당한 공통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모[택동]이 더 많은 농업 집산화를 찬성했던 반면, 그는 도시 인구의 농촌으로의 이동과 같은, 노동계급에 대한 농민의 사회적 비중을 강화했던 정책들을 굳건하게 지지했다. 모[택동]은 하나의 구별되는 사회적 그룹으로서의 중국 프롤레타리아트를 청산하여 그들을 지방의 대중들 속으로 해산시키려고 항상 시도했다.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둘러싸고 모[택동]과 유[소기] 사이에는 어떠한 중요한 차이도 없었다. 그것이 대단히 인기가 없었고, 그것의 부정적인 경제적 결과들에도 불구하고, 문화혁명 동안 모[택동]이 “노동자-농민”체제를 방어했던 것이 이것을 증명했다. (유[소기]에 의하여 1963년 제정된 이 악의적인 반(反)프롤레타리아트 정책은 농민들에게 불경기 동안 공업 활동을 할 것을 요구했다. 그들은 정규직 노동자들보다 낮은 임금을 받았고, 정규 노동자들에게 가능했던 확대된 사회보장 혜택들을 받지 않았으며, 노동조합 가입이 허용되지 않았다. 이번에는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정규직 노동자들이 “노동자-농민들”로 대체되었고, 강제로 농촌으로 보내졌다! “노동자-농민” 체제는 공산주의 사회에 대한 모[택동]의 “이상”에 잘 순응하며, 국가 축적을 증대시키기 위하여 임금을 억제하는 것을 위한 효과적인 메카니즘이다. “노동자-농민” 체제는 문화 혁명 동안 노동 불안의 단 하나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다. 모[택동]주의자들은 그 체제를 방어했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농민들”을 방어하기 위하여 동시에 등장했던 계약 노동 조직들을 억압했다.

 

 

또한 1965년 이전에는 외교 정책을 둘러싸고 모[택동]과 나머지 CCP 지도부 사이에 중요한 차이들이 있었다는 어떠한 증거도 없다. “후르시쵸프의 수정주의”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조직했던 사람들은 모[택동]이 아니라 유[소기]와 등[소평]이었다. 오늘날의 모[택동]주의자들의 많은 수는 자신들이 유[소기]와 등[소평] 등이 모[택동]을 중앙 지도부로부터 밀어낸 이후 주도했던 “반 수정주의” 캠페인에 의하여 중국 노선으로 획득되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미국으로 가는 길에 있는 인도네시아와 베트남

 

 

1962년 당 전체회의 동안, 모[택동]은 스탈린이 1940년대 후반에 중국 공산당이 잠재적인 티토주의라고 의심하면서 CCP를 신뢰하지 않았다고 폭로했다. 스탈린의 신뢰를 획득하려고 애쓰는 한편으로, 모[택동]은 더 나아가 CCP는 결코 자신의 독립성을 희생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냉전 대립, 특히 한국 전쟁이 소비에트 주도의 블록의 일부가 되는 것 이외에는 중국에 선택지를 거의 남겨두지 않았다. 1950년대 중반 동안, CCP는 적극적으로 동유럽 정당들 사이에서 모스크바 노선으로부터의 더 많은 독립성에 관한 책략을 쓰면서 소비에트 블록 내부에서 자기 자신의 경향을 발전시키려고 애썼다. 이런 활동들의 중요한 산물의 하나로서, 모[택동] 정권은 러시아가 1956년 헝가리 봉기를 분쇄하도록 밀어 붙이고, 그런 다음 이것을 국제적으로 합리화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캠프 데이비드 정신”(아이젠하워-후르시쵸프의 평화공존)의 일부는 크레믈린이 중국의 국가적 힘의 확장을 단속하겠다는 협약이었다. 이것의 주요한 사례들, 마찬가지로 중소의 결별로 귀결되는 주요한 사건들이 1958년 중국으로 하여금 타이완 열도 섬들에 대한 군사적 압력을 포기하도록 하기 위한 후르시쵸프의 시도, 소비에트가 중국에 핵무기들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하겠다는 약속을 어긴 것, 1960년 중국-인도 국경 전쟁 동안 소련의 친 인도적 “중립”이다. 소비에트에 대한 중국의 증대되는 거슬리는 정치적 공격들이 1960년 소비에트로 하여금 모든 경제 원조를 중단하는 것으로 보복하도록 했다. 아마도 공식적인 결별의 날로 이 날을 잡을 수도 있겠다.

 

 

소비에트 진영으로부터의 분리에 뒤이어, 중국 외교정책은 양대 열강들에 대항하는 “제3 세계” - 드골주의 프랑스를 포함하여 정의되는 용어! - 에 줄을 서려는 시도로 이루어졌다. 이 기간 동안, 중국 외교정책은 몇 가지 우연적인 외교적 성과들을 기록했다. 하지만, 1965년에 제3 세계는 갑자기 중국 외교관들에게 출입금지 지역이 되었다. 다수의 “중국의 친구들”이, 그 중에서도 특히, 당시 그 곳에 어울리게도 북경을 방문하고 있던 크루마[Kwame Nkrumah]가, 군사 쿠데타들로 전복되었다. 이들 우익 쿠데타들의 결과, 중국이 반(反)소비에트 포럼으로 변할 것으로 예상했었던 제2차 아프리카-중국 대회가 취소되었다. 하지만, 당시 국가권력을 잡고 있지 않던 최대의 스탈린주의 정당이었던 친 중국 PKI에 대한 피비린내 나는 육체적 제거로 귀결되었던 인도네시아에서의 수카르노의 전복이 진정으로 파괴적인 타격이었다.

 

 

1965년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휩쓸었던 우익 쿠데타들은 미국 제국주의의 강력함은 단순히 그들의 군사력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소유계급들과의 유기적인 연대에도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계급투쟁이 특정 강도에 도달할 때 마다, 식민지 부르주아지 계급은 북경이나 모스크바와의 자신들의 분탕질을 깨뜨리고 이 시대의 자본주의 질서의 주요한 수호자로서의 미국 지배계급을 옹호한다.

 

 

중국의 원대한 제3 세계 전략이 인도네시아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참수된 시신들 아래에 파묻힌 조건에서, 베트남에서의 미국의 전쟁규모 확대라는 새로운 위험이 중국을 위협했다. 중국을 보호하는데 있어서 “제3 세계”의 명백한 무기력이 중국의 현관 계단에 대한 미국 제국주의의 폭격과 융합되어 관료집단 내부에서의 첨예한 차이들을 야기했다. 유[소기], 팽진, 그리고 라서경(Lo Jui-ching/羅瑞卿) 인민해방군 참모총장 주변의 한 그룹은 소련과의 관계 악화를 중단할 것과 베트남에 대하여 크레믈린과의 일종의 군사적 공동전선을 맺을 것을 원했다. 모[택동]-임[표] 세력은 소련과의 결별의 수준을 계속해서 강화하고, 무엇보다도 또 하나의 한국전쟁 상황을 피하고 싶어 했다.

 

 

어떤 점에서는 문화혁명의 첫 번째 전투가 PLA 고위 사령부에서 벌어졌다. 이것은 “전문가주의” 대 “정치”라는 구실 하에서 실제로는 베트남과 소비에트 군사동맹에 대한 정책을 둘러싼 투쟁이었다. 라서경은 있을 수도 있는 베트남에 대한 대대적인 지상군 개입을 적극적으로 준비하고 싶어 했다. 실제로, “인민의 전쟁”에 대한 요구는 실제로는 중국이 또 다른 한국적 상황으로 말려들어갈 위험을 피하기 위한 저강도 게릴라 투쟁으로의 베트남 전쟁의 축소의 요구였다. 자신의 참모총장에 대한 임[표]의 승리는 중국 우선의 군사적 고립주의의 승리였다.

 

 

공식적으로 친 중국적이었던 일본 공산당이 베트남 전쟁을 둘러싸고 공산당 권력들과의 군사적 공동전선 형성을 시도했던 1966년 초에 결정적인 순간이 왔다. 베트남에 대한 중국-일본 공산당 공동 선언은 러시아를 “수정주의”로 공격하지 않고, 그래서 중국-소비에트 협동을 위한 문을 여는 것으로 협상되었다. 막판에 모[택동]은 협정을 사보타지하고 공개적으로 당 지도부, 특히 이것에 책임이 있는 팽진을 공격했다. 모[택동]은 러시아와의 연대를 보임으로써 미국의 의심을 유발하는 것을 확고히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수정주의”에 대한 투쟁이라는 구실 하에, 모[택동]은 적어도 중국이 직접적으로 공격당하지 않는 한, 중국은 다른 나라들의 노동자들과 농민들에 대한 가장 살인적인 공격들에 직면하여서 조차 개입하지 않을 것임을 미국 제국주의에 알렸다. 그러므로 미국과의 데탕트는 단순히 문화혁명으로부터의 후퇴를 의미하는 우선회가 아니었다. “소비에트 사회-제국주의”와의 투쟁을 보다 더 잘 수행해 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미국 제국주의와의 동맹에 대한 모[택동]의 “주요 모순”을 가진 갈망이 실제로는 “문화혁명”의 하나의 본질적인 토대였다.

 

 

국내 정책과 외교정책들을 둘러싼 분파적 진용들 사이에는 분명한 연관이 있었다. 유[소기]가 주도했던 중앙은 관료집단이 차츰 출세주의적 천편일률과 순응하는 앞잡이가 되도록 기꺼이 하려했고, 경제가 농민 수레의 속도로 확대되도록 하려했기 때문에, 당 중앙은 오직 전체적인 소비에트 군사 영역 내부에서만 중국을 방어하는 것을 계획할 수 있었다. 모[택동]과 임[표]는 중국이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열강이 될 것이라는 것에 확고부동했기 때문에, 그들은 가능한 빨리 중국의 물질적 후진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관료집단과 대중들을 조직화하고 훈련시키는 것에 확고부동했다.

 

 

 

 

반(反) 프롤레타리아트적, 반(反) 문화적 혁명

 

 

간단하게, 문화혁명은 민족의 구세주적 열정에 기초하여 중국 열강 정치를 위한 물질적 조건들을 창출하기 위하여 대중들을 동원하기 위한 시도였다. 이것을 하기 위하여, 모[택동]주의자들은 점점 더 보수적이고 이기적인 행정 관료세력을 숙청해야만 했다. 이 임무를 위하여, 모[택동]은 PLA 장교들과 하층계급 학생들에게 호소했다. 일단 당에서 친 러시아 화해주의적 경향들이 숙청을 당하고 나면, 군 장교들이 모[택동]주의 진영에 있는 자신을 알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장교들의 사회적 지위가 그들로 하여금 지역적 기득권에 전념하기 보다는 중국 국가의 장기적인 강력함에 더 많은 관심을 갖도록 했다. 게다가, 그들은 중국 대중들의 직접적 압력으로부터 떨어져 있었고, 자연스럽게 군수산업을 위해서 더 큰 경제적 잉여를 축출하는 것을 선호했다. 중국 청년 학생들은 대체로 미래의 관료집단이었다. 그들은 중국 정부의 상속자들이었고, 정부가 위대하고 강력하기를 원했으며, 열심히 일하는 것과 근검절약에 대한 정부의 복종을 원했다. 교육을 받은 야심만만한 소부르주아지 청년의 기득의 이해관계는 소부르주아지 계층의 미래에 있었다. 그러한 이유로 그들은 유토피아적인 이상들을 쉽게 받아들이고, 무미건조한 염려들로 이상들이 실현되는 것을 방해하는 자들을 공격한다.

 

 

임[표]와 PLA 지휘관의 지지를 받은 모[택동]은 문화혁명이 거리로 옮겨지기 전에 그의 주요한 분파적 반대자들을 쫓아낼 수 있었다. 관료집단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은 더욱 어려운 것으로 판명되었다. 결국, 그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기반을 확고히 한 관료들이 어떻게 문화혁명에 저항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홍위병 “프롤레타리아트 혁명가들”이 바리케이드의 반대편에 있던(!) 중국 프롤레타리아트에 직면하였을 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볼 필요가 있다.

위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문화혁명이 무엇을 의미했는지에 대하여 중국 대중들이 어떤 환상들을 가지고 있었건,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 빠르게 분명해졌다. “경제주의”에 대한 전투라는 슬로건 하에서, 급진 모[택동]주의자들은 그들이 임금을 억제하고 노동을 강화하려고 했음을 매우 분명히 했다. 1966년 동안, 중국 프롤레타리아트와 스탈린주의 정부 사이의 당시까지 가장 거대한 충돌이었던 1967년 1월 상해 총파업과 전국적인 철도 파업에서 절정을 이루었던 다수의 노동자 투쟁들이 있었다.

 

 

철도 노동자들은 자기 자신의 주택 센터들과 학교들을 가진, 중국 사회의 가장 자기의식적인 프롤레타리아트 부위들 중의 하나였다. 철도 노동자들은 거대한 홍위병 군대들을 전국으로 수송해만 했기 때문에, 문화혁명은 특히 철도 노동자들에게 힘든 것이었다. 게다가, 장시간 노동을 마친 후에 그들은 모[택동] 의장의 사상을 학습해야 했다. 추가된 수송량 때문에, 기존의 안전규정들이 위반되었다. 노동자들이 불평을 하면, 홍위병들은 “모택동의 사상에 적합하지 않은 과거의 [안전] 규정들”을 공격했다(시사 현장, 1967년 5월 19일). 홍위병들은 모[택동]의 사상이 물리법칙 보다 더 강력하다(!)고 믿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상해의 철도 노동조합은 더욱 길어진 노동시간의 단축이나 그들에 대한 임금 지급을 중심으로 하는 협상들에서 다른 노동자들을 조직했다. 12월에, 상하이 지역 당국자들은 전반적인 임금 인상을 제공했다. 북경에 있는 모[택동]주의 중앙이 임금인상을 뒤집자, 상하이와 중국의 철도들이 운행을 중단했다.

 

 

홍위병들과 PLA는 상해 지방 정부를 타도하고 파업을 분쇄하는 것으로 나아갔다. 유명한 “모든 상해 인민들에게 보내는 편지”(상해 해방일보, 1967년 1월 5일)는 “혁명을 움켜쥐어라, 생산을 고무하라”는 명령으로 시작되었다. 그 “편지”는 노동자들을 그들의 일자리를 벗어나 북경으로 몰려들게 선동했다는 이유로 반(反)당 분자들을 비난하는 것으로 나아갔다. 이것은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들에 맞서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지도자라고 생각되었던 자들에게서 나오는 기묘한 선전이었다. 철도파업을 진압하는데 더 많이 걸렸고, 대학교 학생들이 비숙련 철도 파업파괴 노동자로 이용되어야만 했다.

 

 

1967년 1월 사태들 이후, 홍위병들에 의한 공격 하에 있던 관료들은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하여 노동자들로 구성된 그들 자신의 “홍위병들”을 조직하는데 거의 어려움이 없었다. 노동자들은 만약 홍위병들이 접수를 하면 자신들은 일주일에 7일 동안 하루에 12시간 노동을 하고 있을 것이고, 또 다른 8시간 동안 모[택동]의 사상을 학습하고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중국 도시들 전역에서 분출했던 가투들에서, 그 급진 모[택동]주의자들은 이기고 있지 않았다.

 

 

대중들의 “참여”에도 불구하고, 문화혁명은 관료집단 내부의 투쟁으로 남아 있었다. 그것은 모[택동]-임[표] 분파와 원자화되고 보수적인 당 기구 사이의 전투였다. 주로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관료 그룹들에 의하여 조직되었고 냉소적으로 조종되었다. 혁명적 맑스주의자들은 모[택동] 분파의 공상적-군국주의적 민족주의나 혹은 자신들의 일자리를 지키기 위하여 투쟁하는 다양한 출세주의자들 누구도 지지할 수 없었다.

 

공산주의자들의 관점에서, 문화혁명은 자신들이 관료주의에 맞서 투쟁하고 있다고 믿었던 주관적으로 혁명적이었던 청년 학생들을 함정에 빠뜨림으로써 스스로의 생활수준을 방어하는 노동자들에게 맞서게 하는 잘못된 노선들을 따라서 중국사회를 양극화했다. 만약 중국 트로츠키주의 조직이 개입을 할 수 있었다면, 그들의 임무는 이들 잘못된 분열의 노선들을 가로질러 관료집단 전체에 대한 진정한 공산주의 반대파를 건설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홍위병들에 대해서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해야 했을 것이다: 첫째, 노동자들 사이에서의 공산주의적 의식성은 종교적 신비주의라는 방책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모[택동]의 영혼이 당신들의 넋을 사로잡았는가?), 오직 노동자들이 민주주의적 기관들을 통하여 중국 사회를 통치하는 것에 진정으로 책임을 질 때에만 창출될 수 있다. 둘째, 사회주의의 개념이 군사병영 금욕주의로부터 벗어나야만 한다. 공산주의자들은 대중들의 물질적 풍요에 대하여 진정으로 관심을 가지며, 가난과 끝없는 노동을 찬미하지 않는다. 그리고 아마도 가장 중요하게는, 중국에서 공산주의 사회는 단순히 중국 인민들의 의지력과 희생들을 통하여 건설될 수 없다. 이것은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에서의 승리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들(스탈린주의 중국 외교정책에 의하여 가로막히고 있는 혁명들)의 지원을 필요로 한다. 중국 공산주의자들의 중심적인 임무는 중국 국가의 힘과 권위를 더 나아가 세계 사회주의 혁명에 사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반(反)프롤레타리아트 민족주의 부르주아지 정권들을 지지하는 정책으로부터의 분리뿐만 아니라, 비록 소련이 관료적 지배하에 있지만, 가장 긴급하게는 인도차이나에서, 소련과의 군사적 동맹을 즉각적으로 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급진 모[택동]주의자들에 맞서 현직 전임관료들을 방어하는 것으로 끌려 들어온 노동자들에 대하여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노동자들의 물질적 이해관계는 관료집단 내부의 “유연하”고, 타락한 인자들을 지지함으로써 진전될 수 없다. 그러한 물질적 이해관계는 보수적인 관료집단의 무감각한 통제를 대체하면서 노동자 정부가 중국 경제를 통제할 때에만 만족될 수 있다. 정치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노동자 정부는 군사적 목적들에 필요한 잉여를 발생시키고, 농민들을 산업 노동력으로 흡수시키기 위하여 정말이지 임금 인상들을 억제해야만 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빈곤한 농민들의 바다에 둘러싸인 소수의 귀족적 노동계급으로는 생존할 수 없다. 하지만, 중국 인민들의 물질적 조건들에 있어서의 근본적인 개선은 오직 보다 앞선 노동자 국가들에 의하여 공급되는 자원들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국제혁명을 통한 중국에 대한 경제적 원조는 장기간의 전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중국에서의 노동자 혁명은 고도로 의식적인 프롤레타리아트와 깨지기 쉬운 사회 구조를 가진 아시아의 산업 강국인 일본에서의 사회주의 혁명에 엄청난 추진력을 제공할 것이다. 일본과 중국의 상호 보충적인 계획된 발전은 중국 인민들의 빈곤 극복을 향하여 잘 진척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이 문화혁명 동안 한창 전투 중에 있던 중국 노동자와 학생들에게 트로츠키주의 운동이 제출했어야 하는 정치들이다.

 

 

 

 

누가 승자들인가?

 

현직 관료들이 홍위병들에 맞서 투쟁하기 위하여 노동자들의 그룹들을 동원할 수 있었다는 조건에서, 급진 모[택동]자들은 수가 막혔다. 그러자 모[택동]주의 중앙은 문화혁명의 경로를 근본적으로 바꾸었고 결국에는 그것의 청산으로 귀결되었던 행보를 취했다.1967년 2월, “권력 장악”에서 홍위병들을 지원하기 위하여 군대가 불려나왔다. 이제 PLA 장교 부대가 관료집단의 피와 살이고, 무수한 개인적 사회적 우호관계에 의하여 나머지 중국 관료와 제휴한다. 홍위병들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위한 조건으로, PLA 사령부는 현직 행정관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없어야 하고, 그들이 그들 자신을 복권하는 것이 허용되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것이 소위 “관대한 중핵 정책”이었다. 관료집단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PLA의 역할은 문화혁명의 공식적인 강령에서의 변화로 명문화되었다. 1966년 그것이 시작되었을 때, 문화혁명은 파리 코뮌을 모델로 하는 정치 시스템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1967년 초에 이것은 “혁명적 반란자들”(홍위병들), PLA, 그리고 “혁명적 중핵”(현직 관료들)의 소위 “삼각 동맹”으로 변했다. 장교 부대들이 분명하게 지휘를 했다.

 

 

PLA와 호위병들의 실제 관계는, 비록 군사령관이 너무 멀리까지 나아갔음에도 불구하고, 1967년 8월 무한[武漢] 사태에서 드러났다. 두 개의 홍위병 그룹들 사이의 분파 투쟁에서, 군 사령관은 자연스럽게 보다 우익인 쪽을 지지했다. 몇 명의 모[택동]주의 밀사들이 보다 급진적인 분파를 지원하기 위하여 북경에서 오자, 사령관은 그들을 체포했다. 거의 반란에 가까운 이 행위 때문에, 그는 면직되었다. 하지만, 무한 사태에 연루된 주동자들의 운명이 매우 의미심장하다. 반란에 가까운 행위를 했던 사령관, 진재도[陳再道, Chen Tsai-tao]는 현재 권력으로 돌아왔고, 2명의 모[택동]주의 밀사들은 “초-좌익들”로서 숙청되었다.

 

 

무한 사태는 일시적으로 모[택동]주의 중앙을 PLA 사령부에 반발하게 했고, 문화혁명은 영국 대사관 사무국 방화를 포함하여 무정부주의적 폭력의 절정에 이르렀다. 1967년 말까지는 홍위병들을 탄압하기 위한 PLA 사령부로부터의 압력이 저항불가능이 되었다. 1968년 1월 28일 자 해방군 일보는 PLA는 “좌파를 지원하되 어떤 특정 분파도 지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홍위병들을 분쇄하겠다는 별로 감춰지지 않은 위협). 그 기사는 “소부르주아지 분파주의”를 공격하는 것으로 나아갔다. 비슷한 때에, 주은래는 문화혁명의 지도부가 학생들과 청년들로부터 노동자들, 농민들, 그리고 병사들로 넘어갔다고 주장했다. 1968년 내내, “소부르주아지 분파주의”, “무정부주의”, 그리고 “종파주의”에 대한 공격들이 “자본주의 복구주의”와 “수정주의”에 대한 공격들을 압도했다.

 

 

그리고 그것은 망고로 끝이 났다. 모[택동]이 개인적으로 최초의 홍위병 그룹이 형성되었던 북경의 청화대학[清華大學, 칭화대학] 학생 홍위병들 사이의 분파투쟁을 해결하기 위하여 개입했던 1968년 8월에 문화혁명의 막이 내렸다. 자신이 원하던 대로 분쟁을 해결하지 못하자, 아마도 모[택동]은 “당신들은 나를 저버렸으며, 더군다나 당신들은 노동자들, 농민들, 그리고 병사들을 실명시켜왔다”(극동경제 평론, 1968년 8월 29일)고 말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48시간이 안되어, PLA 장교들에 의하여 명령을 받은 “노동자-농민 모택동 사상 선전단”이 청화대학에 도착하여 홍위병들을 해산시켰다. 이 공로로, 의장은 몸소 그 그룹에게 망고 선물을 보냈다. 홍위병들은 전국적으로 비슷한 방법들로 진압되었다. 보다 더 저항적인 활동가들은 농민들과 함께 노동하는 것을 통하여 그들의 사상을 “개조”하도록 시골로 보내졌다 - 모[택동]을 “실망”시킨 사람들의 일반적인 운명.

 

 

모[택동]분파는 문화혁명에서 승리하지 않았다. 모[택동]은 행정 관료집단을 열성 청년 당원들 사이에 산재해 있는 자신에게 분명하게 충성하는, 그리고 그렇게 하면서 대중적 열의를 발생시키는 중핵들로 대체할 것을 예상했다. 그렇기는커녕, 문화혁명에 대한 대중적 반발이 현직 관료집단의 저항을 강화시켰다. 일단 군대가 간접적으로 호출되자, 모[택동]은 관료적 보수주의를 대변하는 PLA 장교들과 급진적 청년 학생들 사이에서 보나파르트의 역할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관료집단이 대부분 보존되었다는 것은 소위 “승리자들의 대회”였던 1969년 9차 CCP 대회에서 선출되었던 중앙위원회의 구성에서 증명된다. CC의 평균연령이 61세였고, 당에 있었던 기간은 25년이었다. 1945년 선출되었던 (문화혁명 전에 죽거나 숙청되지 않았던) CC의 3분의2가 1969년 중앙위원회에 재 선출되었다! 1969년 CC는 장정[長征]에 있었던 사람들(모[택동]의 오랜 옹호자들)의 비율 증가와 PLA 장교들의 비율증가(45%)를 보여주었다. 이 얼마나 모[택동]에 열광하는 순진한 자들로서는 소위 반(反)관료 “혁명”의 결과로서 기대하기 힘든 일이겠는가 !

 

 

문화혁명의 최종적 청산은 임[표] 분파의 몰락과 함께 왔다. 임표는 일련의 명백하게 파산한 정책들과 관련이 있었다. 국내 경제 전선에서, 그는 1969년에 생산 운동을 시작하기를 원했으며, “농민들이 그들의 정당한 수입을 빼앗기도록 허용했”(극동경제 평론, 1973년 연감)다고 비난 받았다. 임[표]는 분명히 또 다른 대약진을 추진하고 있었다. 하지만, 문화혁명은 엄청난 경제적 불평과 자신들의 생활수준을 보존하기 위하여 정권에 투쟁하려는 노동자들의 의지를 드러냈다. 1969년의 대약진 운동은 자살적인 것이 될 수 있을 뿐이었다. 실제로, 문화혁명 이래로, 중국 경제는 1965년 때 보다 더욱 시장 지향적이고, 더욱 불평등하고, 더욱 지역화 되었다. 모[택동]/주[은래] 정권은 거대한 경제적 희생들이 그들에게 요구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대중들에게 확신시키려고 열망했다. 경제정책에 대한 거의 모든 공식적인 선언이 사적농지에 대한 농민의 권리를 주장한다.

 

 

외교정책에서는, “세계의 농촌지역이 세계의 도시들을 점령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했던 사람이 마찬가지로 패자였다. 1960년대 후반에는 오로지 정치적 바보만이 중국이 미국과 러시아에 맞서는 “세3세계”를 성공적으로 이끌고 있다고 믿을 수 있었다. 문화혁명은 중국을 외교적으로 고립된 채 남겨두었다. 베트남 전쟁에도 불구하고, 1968년 전체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외교정책은 계속해서 중국에 대항하는 러시아와의 블록을 향했다. 객관적 조건들이 외교적, 경제적 성과들에 유리한 조건에서, 외교정책에서의 우선회는 필연적인 것이었다. 아마도 거의 임[표]는 닉슨과의 화해에 반대하여 분리했을 것이다.

 

 

의심의 여지없이, 군대에서의 자신의 기반을 가지고, 임[표]는 떠오르는 모[택동]/주[은래] 축에 대한 분파투쟁을 시작했다. 그는 졌다. 현재의 모[택동]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가 군사 쿠데타를 계획했다는 것은 매우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임[표]가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어떤 곤경을 빌었을 지라도, 그의 시체는 그것을 벌충하고도 남았다. 그는 문화혁명 때문에 잘못되었던 모든 것들을 위한 완벽한 희생양이다. 숙청되었던 “자본주의를 좇는 자”가 권력으로 복귀할 때마다, 그를 날조한 자는 임[표]였다. 주[은래]가 영국에 그들의 대사관 사무국 방화에 대하여 사과할 때, 그는 임[표]를 비난했다.

 

 

날이 감에 따라, 문화혁명의 희생자들이 승자들을 대체하는 것으로 보인다. “자본주의적 길을 택하던 권력의 2인자”, 등소평 조차 모[택동]과 함께 하는 길에 복귀한다. 하지만, 문화혁명은 분명히 뚜렷하게 분열된 당을 남겼다. 10차 당대회의 비밀주의와 극단적인 간결함이 격심한 내부 상황을 지적한다. 당내 민주주의에 대한 최소한의 의례상의 양보가 살인적인 분파주의를 만들어낼 것 같아 보인다. 무명의 왕홍문[王洪文]의 넘버 3로의 상승은 아마도 납득할만하게 주[은래]를 믿지 못하는 급진 모[택동]주의자들에 대한 환심 사기일 것이다. 하지만, 왕[홍문]은 아마도 당 중핵들 가운데 아무른 실질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지 않은 간판일 것이다. 모[택동]이 죽으면, CCP는 문화혁명을 공식적인 논쟁처럼 보이게 할 후계 위기에 빠지게 되어 있었다. 물론, 중국 프롤레타리아트가 자기 자신의 민주주의적 계급지배를 수립함으로써 어떤 관료 후보자가 모[택동]을 역사의 아젠다에서 지우는 것에 성공할지에 대한 문제를 거론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모[택동]과 브레즈네프를 타도하라! 중국-소비에트의 공산주의적 단결을 위하여!

 

 

문화혁명 이래 가장 중요한 발전은 중국의 외교 관계에 있었다. 소련과의 국가관계들은 1970년에 실제 무장충돌로 불붙으면서 극적으로 악화되었다. 중소[中蘇] 국경이 세계에서 가장 군사화된 국경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모[택동]/주[은래] 정권의 리차드 닉슨과의 새로운 염문은 명백하게 이 정권이 자신의 주적으로 보던 대상인 소련에 대한 대항력으로서 기획된 것이다. 지난해에는 소련에 대항하여 서방 제국주의를 줄 세우려는 중국의 시도가 새로이 낮은 수준에 이르렀다. 중국은 시베리아로부터 소련군대를 분산시키기 위하여 나토의 강화를 주장하고 있다. 예를 들면, 8월 3일자 북경 평론은 찰폰트 경이 런던 타임즈로 보낸 나토의 확대를 요구하는 편지를 찬성적으로 인용한다:

 

 

     “찰폰트는 최근 유럽 안보에 대한 소련의 위협을 폭로하고, 서유럽 나라들에 의한 방어협력을 강화할 것을 주장하는 다수의 글들을 타임즈에 실어왔다.”

 

 

외교적 분위기에서 어떤 우연적인 변화들이 생기건, 소련에 대한 미국 제국주의의 객관적인 관계는 중국을 향한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소련은 경제  적으로, 군사적으로 중국보다 질적으로 우위에 있으며, 미국과 군사적으로 지위가 동등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세계 반(反)자본주의 정권들의 핵심이며, 미국 제국주의의 주요한 객관적인 장애물은 소련이다. (중국이 미국에 의하여 봉쇄된 쿠바를 지원할 수 있을까?) 거꾸로, 중국은 다른 열강과의 연합으로만 오직 승리를 기대할 수 있는 반면, 소련은 제국주의의 개입이 없다면 주요한 전쟁에서 중국을 패배시킬 수 있다. 그래서 삼각 열강의 당연한 결과는 소련에 대항하는 미국-중국 연합 쪽이다. 하지만, 열강의 정치는 역사적으로 합리적이지 않은 것이며, 미국-소비에트의 중국에 대한 공격도 가능성으로 남아 있다.

 

 

어떠한 환경에서라도, 러시아와 중국 사이의 전쟁은 사회주의의 대의를 위해서는 엄청난 후퇴가 될 것이다. 1970년대 국경 충돌의 확대된 판과 같이, 만약 중소 전쟁이 제국주의의 직접적인 개입과 독립적으로 발발한다면,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양쪽 모두에서의 혁명적 패배주의를 요구해야만 한다. 하지만, 만약 미국이 그 결과가 제국주의 승리를 통하여 자본주의의 복귀가 가능할 정도로 중소전쟁에서 한 쪽과 연합을 한다면,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직접적으로 미국 제국주의의 공세 하에 있는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군사적 방어를 본질적으로 요구해야만 한다.

 

 

러시아-중국 분쟁의 초점은 시베리아 국경이다. 의미심장에게, 분쟁을 일으키고 있는 주장들을 위한 법적인 기초는 로마노프 왕조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민족적 권리와 관련하여 빈틈이 없었던 만주[청나라]에 의해 조인된 18세기 조약이다! 사회주의 운동에 새로이 진입한 사람들은 왜 기형적 노동자 국가의 지도부가 희박한 인구의 영토 쪼가리를 두고 다른 기형적 노동자국가와 전쟁을 벌이려 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자본주의 열강들과 친구가 되려하는지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할 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노동자 국가들이 그저 자본주의 열강들처럼 제국주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두 개의 스탈린주의가 지배하는 국가들 사이에서 불가피하게 전쟁을 야기하고 있는 경제적 동인이 있는가? 전혀 아니다.

 

 

사실은, 경쟁하는 양 강국들은 노동자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한다고는 주장하지만, 사실 프롤레타리아트의 모든 정치적 삶을 강제로 억압하는 것에 의해서만 스스로를 권력에서 유지할 수 있는 고립된 관료집단의 도구이기 때문에, 모스크바와 북경 정권들은 각자의 존재 자체에 의하여 정치적으로 위협을 받는다. 후르시쵸프와 브레즈네프는 스탈린이 티토(티토에 대해서는 스탈린은 어떠한 영토적 주장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왼쪽의 트로츠키로부터 오른쪽의 부하린에 이르기까지 모든 내부 반대파, 그리고 자기 자신의 분파에서도 모든 잠재적으로 독립적인 성원들을 다루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유[소기]와 모[택동]을 취급해 왔다. 노동자들을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자신의 관점들을 선전하기 위한 국가권력의 자원들을 가진 경쟁하는 경향은 이들 반(反)프롤레타리아트 정권들의 불안한 안정에 두 배로 위협이 된다.

 

 

트로츠키가 지적하였듯이, 소련에서 관료적 퇴행의 기원들은 러시아혁명의 후진국 안에서의 민족적 제한과 고립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이것은 지배 관료계층을 위한 필연적으로 잘못된 자각인 “일국에서의 사회주의”라는 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이렇게 해서 이들 소위 “공산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 국제주의를 젠체하며 떠들지만, 동시에 조국을 확대하는 것이 자신들의 신성한 의무라고 진심으로 믿는다. 그리고 모스크바에게 진실인 것은 똑같이 북경이나 혹은 소피아[불가리아], 티라나[알바니아] 등에 있는 2류 민족주의 관료들에게도 진실이다.

 

 

시베리아를 둘러싼 분쟁에서, 지금 러시아인들이 압도적인 이점을 가지고 있다. 절대적인 핵 우위에 더하여, 소비에트 군대는 중국의 더 많은 예비 병력으로 상쇄되지 않는 재래전에서의 이점을 가지고 있다. 러시아 쪽 국경은 훨씬 더 인구가 많다. 그리고 중국의 북쪽 국경 지역들에 살고 있는 투르크어 사용 인민들은 수세기의 대한(大漢)[족] 배외주의에 분노하며, 러시아 사람들에게 보다 호의적일수도 있다. 게다가, 크레믈린은 또한 자본주의 열강들의 지원을 조직하는데 열심이다. 순전히 재정적인 고려들에 더하여, 브레즈네프가 시베리아의 석유와 가스 유전들에 있는 외국자본에 그렇게도 안달인 주요한 이유는 미국과 일본에게 혜택을 주어 러시아가 시베리아를 유지하는 것에 있다.

 

 

하지만 소비에트의 군사적 이점은 중국의 핵능력 발전에 의해 급속하게 침식이 된다. 그래서 지금 브레즈네프 정권 내부에는 중국이 훨씬 더 향상된 보복 능력을 개발하기 전에 중국에 대한 예방적 핵 타격에 대한 압력이 있다. 소비에트 당국들은 현재 최악의 종류의 “황색 위험”에 기초하여 특히나 시베리아 주민들 사이에서 주요한 전쟁 공포를 만들어내고 있다. 런던 이코노미스트(8월 25-31일)의 한 특파원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시베리아의 한 학교 선생님을 인용했다:

 

“러시아어로 방송되는 중국 라디오가 중국이 시베리아 남부를 점령할 것이고, 모든 러시아 남자들을 죽일 것이며, 러시아 소녀들은 결혼을 위하여 붙들어 둘 것이라고 위협했었다.”

 

 

만약 모스크바와 북경에서 혁명적 노동자 정부들이 권력에 있다면, 시베리아를 둘러싼 분쟁은 러시아와 중국 노동자들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쉽게 해결될 것이다. 시베리아는 중국으로부터의 이주에 문호를 개방할 것이고, 급속한 경제적 발전을 보장하기 위하여 공동으로 행정업무를 볼 것이다. 게다가, 러시아와 중국이라는 단결된 혁명적 노동자 국가들의 존재는 시베리아뿐만 아니라 중국의 발전을 위하여 일본의 경제적 자원들을 풀어내는, 일본의 사회주의 혁명에 쉽게 불꽃을 튈 수 있을 것이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스탈린주의 관료집단들이 근본적으로 모순적인 지위에 잡혀 있다고 이해한다. 한편으로 그들은 제국주의의 공격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려고 애쓰며,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주의 열강들과의 불가능한 화해를 위하여 애를 쓰며, 무엇보다도 필연적으로 자신들의 기생적 정권을 전복시킬 세계혁명의 확산을 무엇보다도 두려워한다. 장기적으로는, 기형화된 노동자국가들 (관료적으로 지배되는 집산화된 소유형식에 기초한 국가들)은 노동자 권력의 국제적 확장을 통해서만 생존할 수 있다. 민족주의적 정책들을 추구함으로써, 중국과 러시아의 스탈린주의 관료집단들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침식하며, 국내의 반혁명이나 제국주의의 정복에 의한 자신의 타도를 위한 길을 열고 있다. (러시아에서의 10월 혁명 이후 제국주의에게 가장 중요한 패배인) 중국혁명은 현재 핵전쟁에 의하여 치명적으로 위협받고 있다. 그것은 제국주의 열강과의 전쟁이 아니라 다른 강력한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인 소련과의 전쟁이다.

 

 

오로지 반동적인 모[택동]과 브레즈네프 정부들을 타도함으로써만, 러시아와 중국 노동 대중들은 상호간 전쟁으로 가는 것을 막을 수 있으며, 대신 세계 자본주의에 맞서는 중소[中蘇] 국가들의 정치적, 군사적, 그리고 경제적 통합을 가져올 수 있다.

 

 

 

 

중소[中蘇] 국가들에서 프롤레타리아트 정치 혁명을 통한 제국주의에 맞서는 공산주의적 단결을 위하여!

국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통한 러시아와 중국 혁명들의 방어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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