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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바뀌어 진행된 김동수씨의 여섯 번째 증언에서는 진산규명과 치유, 그리고 배·보상문제를 놓고 정부 및 자치단체와의 힘겨웠던 싸움에 대한 얘기가 이어졌습니다.
자리가 계속 이어지면서 얘기는 점점 힘들어지고, 당사자인 김동수씨뿐 아니라 그 얘기를 듣는 사람들까지 고스란히 그 힘겨운 상황을 몸으로 느끼는 과정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세월호 사고 이후 극심한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진상규명을 위한 활동을 벌이고 있던 김동수는 안산에 마련된 ‘치유공간 이웃’에서 트라우마 치료를 진행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가게 된다.
‘치유공간 이웃’을 통해서 희생자들에게 지원되는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접하고, 단원고를 찾아가서 그곳에 마련된 여러 자료와 프로그램을 살펴보고, 안산온마음센터도 찾아가 상담과 함께 세세한 치유프로그램에 대한 얘기를 듣게 된다.
안산에서 진행되고 있는 여러 가지를 살펴본 김동수는 “우리는 완전히 방치되서 본인이 알아서 하고 있는데, 안산에서는 왠만한 것들이 무료로 진행되고 있어서 부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고 느낌을 얘기했다.
안산에서 보고 들었던 얘기들과 자료들을 모아 제주도청을 찾아갔지만 도청의 답변은 검토해보겠다는 식의 형식적인 얘기였다.
세월호 사고 직후 새로운 도지사가 들어선 제주도는 사고 직후에는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는 듯 하다가 생존자들에게는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김동수씨가 수차례 찾아가 건의도하고 항의도 했지만 도청에서는 “미수습자 문제로 정신이 없어서 그러니 이해해달라”면서 생존자들의 문제는 뒤로 미뤄두기만 했다.
타지역에서는 희생자들에 대해 해당 지자체가 1:1로 공무원을 전담시켜 멘토링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제주도는 전혀 그런 노력을 보이지 않았다. 지역구 국회의원을 통해 어렵게 중앙부처 담당자와 면담을 갖고 논의의 진전을 이뤄냈어도 그 내용을 들고 제주도청을 찾으면 다시 원점에서 벽에 막히기 일쑤였다. 심지어 생계문제가 막막해서 공공근로형태의 일자리를 주선해달라고도 요청을 했지만 도청의 답변은 ‘어렵다’라는 것이었다.
생존자들의 문제에 대해 관심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한다고 판단한 김동수는 그럴수록 더욱 적극적으로 도청을 찾아가 목소리를 높여야했다. 그런 일이 잦아지가 도청의 대응은 김동수를 압박하는 것이었다. 공무원으로 있던 친척을 통해 자제해줄 것을 요구하는가하면, “악성민원인 오셨네” “김동수씨 적당히 하세요” “아직도 영웅인줄 아느냐?” 등 막말도 들어야 했다.
배·보상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심리적 경제적 압박도 점점 심해지고, 트라우마로 인해 병원치료를 반복하면서 병원과의 갈등도 높아지는데, 생계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김동수 가족은 부인인 김형숙이 오롯이 생계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김형숙은 “건강이 좋지 않은 남편도 챙겨야하고, 각종 서류도 챙기고, 공무원들에게 민원도 넣고, 여기저기 쫓아다니고, 집에 돈이 모자라서 일은 일대로 더 많이 해야 했다. 주위에 도와주는 사람없이 혼자서 그걸 다해야 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여러 가지 법적인 문제들을 도움받기 위해 세월호가족협의회를 통해 변호사를 지원받을 수 없느냐고 물어봤지만, “가족협의회에 가입하지 않는 경우는 어렵다”는 답변을 들어야했다.
제주지역 몇몇 사회단체에서 지원에 나섰지만 단체들의 이름을 앞에 내걸고 세월호 활동을 하는 방식에 대해 김동수가 문제제기를 하면서 단체들과의 관계도 소원해지고 말았다.
결국 그 모든 것을 오롯이 김동수의 가족들이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2015년 1월 세월호 희생자들의 배·보상문제 등에 대한 법률이 국회를 통과하게 되면서 숨통이 트이는 듯 했지만 힘겨움은 여전했다.
보상기준과 보상액 산정을 놓고 보험사를 비롯한 관련부처와 또다시 밀고당기기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전문가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는 김동수 가족은 다시 몇 달을 지루한 밀고당기기에 매달려야 했다.
그렇게 해서 2015년 6월경에 배·보상에 대해 합의를 하고 싸인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나중에 또 발목을 잡았다.
합의안에서 병원치료비로 간병인문제로 제외된데다가 상급병실료 등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실제 소요된 병원비에서 한참 모자라는 금액이 지급되는가 하면, 의료비 지원기간도 4년으로 한정돼 있어서 4년이 지난 지금은 또다시 풀어야할 숙제가 됐다.
김형숙씨는 “그때는 배·보상문제로 압박이 너무 심했고, 동수씨의 상태가 이렇게 오래갈 것이라고 생각도 못했다. 4년 치료받으면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랬던건데...”라며 당시 심경을 얘기했다.
그러나 김동수에게 더욱 큰 마음의 상처를 안겨준 일은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일어났다.
2015년 2월 세월호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도보행진이 안산에서 진도까지 진행됐다. 그곳에 세월호 생존자의 한 사람으로 참석한 김동수는 유가족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프로그램에서 완전히 소외되기 시작했다.
생존자들은 유족들과 별도 단위로 편성돼서 도보행진이 이뤄지는 가운데 생존자들의 증언은 뒤로 밀리고 철저하게 유족들 위주로 모든 발언과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김동수는 자신이 직접 봤던 세월호의 참상과 해수부와 해경들의 무책임·무능력을 얘기하고 싶었지만 그럴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유족들에게는 주최측에서 옷과 신발들이 지급되고 숙소도 별도로 마련됐지만, 생존자들에게는 그런 것들이 없었다. 심지어 식사 때에는 유족들은 식당을 잡아서 배려를 했지만 생존자들은 본인들이 알아서 해결해야 했다. 생존자들이 밥도 제대로 못먹고 추위에 덜덜떠는 상황에 대해 주최측에 항의도 해봤지만 “자식 잃은 부모님들 심정을 우리가 이해해주자”는 답변만 들어야했다. 그런 가운데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원진 유족들이 생존자들에게 날카로운 언행을 하기도 하면서 김동수는 심한 모멸감을 느끼기도 했다.
김동수는 “진도체육관에 있을 때도 그랬는데, 우리는 유족들 앞에서는 항상 죄인 취급 받고, 필요없는 존재로 느껴졌다”며 서운함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다 이런 문제가 계속 이어지가 김동수는 “이렇게 하면서 진상규명을 하러 다녀야 하냐?”고 반발해서 중간에 이탈하게 된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 마음을 추슬러서 다시 도보행진에 참석한다. 김동수는 다시 합류하게 된 이유에 대해 “배 안에서 그렇게 위급한 상황에서 사람들이 보여줬던 희생적인 모습이 자꾸 떠올라서 계속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팽목항에 도착해 마지막 행사를 가지며 참가자들을 소개할 때, 가족협의회에 가입하지 않은 김동수는 제외됐다. 다른 유가족과 생존자들이 모두 앞으로 나가 인사를 할 때 김동수는 자리에 앉아 있어야했다.
도보행진에서의 경험은 김동수에세 생각보다 심한 심리적 상처를 줬다.
도보행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김동수는 두 달 동안 어두운 방안에서만 지냈다.
“내가 뭐하러 이렇고 있나?” “나는 완전히 버림받았다”는 자괴감이 좀처럼 그를 풀어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 이후 김동수는 대인기피증까지 생기게 됐다.
김동수는 “유족들에게 양보하고, 미수습자들에게 양보하고, 조직에 속한 사람들에게 양보하고, 계속 양보해왔다. 그러다보니까 그 모든 짐은 나와 가족들에게 다 돌아가고 있었다”며 무겁게 얘기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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