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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통 동수의 세월호 증언 9 – 너덜해진 차량과 함께 더욱 너덜해져버린 마음


이번 모임은 서로의 감정이 춤을 추는 자리였습니다.
얼마전 국민훈장을 받은 것에 대해 축하를 하며 즐겁게 시작한 자리는 힘든 얘기를 이어가던 김동수씨가 처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곧 감정을 추스른 김동수씨가 이후 상황을 얘기하면서는 참가자들이 폭소를 터뜨리며 웃기도 하는 등 서로의 감정들이 자유롭게 넘나드는 그런 자리가 만들어졌습니다.


2017년 3월 24일 드디어 세월호가 바다 위로 올라왔다.
그 배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보기 위해 김동수의 가족들은 4월 9일 목포신항으로 향했다.
김동수는 먼저 세월호가 바다에 가라앉고 1년쯤 지났을 때 세월호 생존자와 함께 침몰현장을 찼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 가서 보니까 배가 원래 사고가 났던 지점보다 1km 정도 흘러내려가 있어서 놀랐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건가했다.”
그리고 다시 뭍으로 올라온 세월호를 보고 또 한 번 놀랐다.
“앞부분이 찢겨 있고 뒷문을 나가 떨어져 있는 걸 보면서 내몸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배가 저렇게 망가지도록 놔뒀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하지만 김동수의 마음을 찢어놓은 것은 처참한 배의 모습만이 아니었다.
“목포신항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유족과 미수습자 가족 외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해서 ‘내가 세월호에서 나온 생존자다’고 얘기를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담당자에게 전화를 해서 겨우 들어가게 됐다.”
세월호가 인양된 후 어느 누구로부터도 연락을 받지 못했던 그는 현장을 찾아가서도 철저히 소외됐던 것이다. 유족과 미수습자 가족들은 자유롭게 드나드는 그곳을 그는 생존자임을 누차 밝히며 매번 신분증을 제시하며 들어가야했던 것이다. 모든 언론과 관계자와 봉사자들은 온통과 유족과 미수습자 가족에게만 매달려 있고 생존자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렇게 마음의 상처를 받으며 목포신항 안으로 들어갔는데 이번에는 유족측에서 폐찰을 착용하지 않았다면서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미 유족들과의 관계가 틀어져있기는 했지만 이런 상황은 그에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상처를 다시 안겨줬다.


우여곡절 끝에 배의 모습을 둘러본 후 잠시 쉴 곳을 찾던 그의 가족들은 마땅한 공간을 찾을 수 없었다. 각종 상황실과 유족, 미수습자 가족 등을 위한 콘테이너들이 즐비했지만 생존자들을 위한 공간은 없었던 것이다. 이에 김동수가 관계자에게 항의를 했지만 “생존자는 세월호 인양과 관련이 없어서 별도의 공간을 마련하지 않았다”는 답변을 들어야했다.


그렇게 마음의 상처만 안고 돌아온 후 동료 화물기사들과 함께 4월 22일 다시 목포신항을 찾았다.
그때도 역시 생존자들에 대한 무관심과 차별은 여전했다. 생존자 동료들과 함께 배를 둘러보고 있는데, 안전모를 착용하지 않은 문제로 실랑이가 벌어지면서 감정이 격해진 김동수가 거칠게 항의를 하자 관계자들이 사진과 동영상을 촬영하면서 현행범 취급을 했다. 이에 흥분한 김동수가 아주 거칠게 항의하며 상황이 심각해지자 유족측에서도 김동수의 거친 태도에 문제제기를 하며 감정의 골이 더욱 넓어져갔다.
간신히 상황을 정리한 후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 휴식을 취하려했지만 생존자들을 위한 공간은 여전히 마련되지 않았다. 시멘트 바닥에 앉아서 관계자들에게 항의를 해봤지만 역시나 돌아오는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다시 시간이 흘러 세월호 내부 수색이 진행되는 가운데 김동수의 차량과 물품이 발견됐다는 연락을 받게됐다. 착찹한 마음을 안고 세 번째로 목포신항을 방문한다. 8월 22일이었다.
걸레처럼 심하게 망가진 자신의 차를 바라보면서 어의가 없고 답답한 마음만 들었다. 차를 살펴본 후 개인물품을 확인하고 수령하기 위해 보관실로 갔다.
길게 펼쳐져있는 옷과 신발 등을 바라보며 여러 가지 복잡한 마음이 엉켜있었는데 물품을 수령하고 인수증을 써야하는 과정에서 유족측과 다시 실랑이가 벌어졌다. 절차의 문제를 제기하는 유족에게 화가 나서 항의도 하고, 사진을 찍으려는 것에 대해 딸이 막아서기도 하는 등 언성이 높아졌던 것이다.
그 당시 상황을 얘기하던 김동수는 감정이 복받쳐 결국 펑펑 울고 말았다.
“세월호에서 내가 본 것들이 있는데, 자기들 편이 아니라고 그렇게 대하는 걸 보면서 싸우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 더 이상 세월호 관련된 일을 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어쩌면 가장 고통스러웠을 수 있는 상황에 대한 얘기를 들으며 참석자들은 서로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깊이 가둬두었던 감정을 밖으로 꺼낼 수 있었다는 것이 이 모임의 성과이지 않을까싶다.”


“어제 부부싸움을 아주 심하게 했는데 있는 그대로 알아주는 게 정말 어렵다는 생각을 한다. 서로의 다른 입장 속에서 ‘내가 안다’고 착각하는 게 문제인 것 같다.”


“대한민국에서 내가 제일 힘들고 아프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세상에 우리 같은 사람이 너무 많더라. 그렇게 힘든 사람들이 쏟아내는 얘기들을 듣다보면 짜증이 날 때 있다. 내가 쏟아내는 얘기들에도 다른 사람들이 그런 감정을 느낄 것이라고 생각하니 내 고통을 감수할 것은 감수하면서 주위를 돌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모임이 세상을 바꾸는 하나의 주춧돌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김동수씨는 잘못된 것에 대해 분노하고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인정받는 세상이 되어야 하지 않나?”


“매번 얘기들을 들으며 되풀이되는 얘기인 듯 하지만 매번 다른 감정과 얘기들이다. 상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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