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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라디오 ‘내가 우스워 보이냐?’ (13회)
요즘 낮에는 조금 덥기는 하지만, 해가 지고 나면 선선한 기운이 느껴져서 봄의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방송은 과감하게 야외 공개방송으로 진행하려고 합니다.
읽는 라디오인데 공개방송이라니 좀 황당한가요? 히히히
어차피 혼자서 이것저것 해보는 방송이기 때문에 이번에도 혼자서 놀아보려고 합니다.
아무리 혼자서 진행하는 방송이라고 하지만, 눈과 귀로 즐겨야 하는 공개방송을 글로만 써야하다 보니까 살짝 고민이 되기는 합니다.
상황을 설명하면서 진행해야 하는데, 그러다보면 방송이 재미없게 늘어지겠더라고요.
그래서 전적으로 이 방송을 보시는 여러분의 상상력에 많은 것을 맡기려 합니다.
여러분의 상상력이 풍부하다면 감동적인 공연이 되겠지요. ㅋㅋㅋ
또 하나의 문제는 출연자와 대화를 해야 하는 점입니다.
제가 상황을 연출하면서 대화를 만들어도 되기는 하는데...
출연자 중에는 상상으로 만든 분도 있지만, 실제 인물도 있거든요. 상상의 인물이야 크게 상관없겠지만, 실제 인물의 경우 제가 질문 하고 제가 답변을 만들어내는 것은 그 사람의 생각을 왜곡할 수 있는 위험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에게 연락을 해서 얘기를 준비해달라고 할 수도 없고...
고민하다가 과감하게 대화 없는 공연만으로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억지스럽게 누군가의 생각을 왜곡하는 것보다는 무미건조하더라도 대화 없이 공연으로만 진행하는 것이 진실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결국, 진행자 혼자만 줄곧 떠드는 최악의 방식으로 공연을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물론 관객들의 반응도 표현되지 않습니다.
이쯤 되면 정말 최악의 공개방송이긴 한데...
방송을 진행하는 이곳은 마을 근처의 조용한 공원입니다.
지금 시간은 저녁 8시
자그마한 무대에 화려하지 않게 조명이 달려 있고, 좌우로 크지 않은 앰프가 설치돼 있습니다. 타원형으로 의자가 띄엄띄엄 있고, 그 주변 풀밭 위로도 둘러앉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함께 즐기고 싶은 이들이 많지도 않고 적지도 않게 두런두런 모여서 간단한 먹을거리에 맥주도 한 잔씩 하고 있습니다.
그럼, 공개방송을 시작하겠습니다.
오래간만에 이렇게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자리를 만드니까 개인적으로 느낌이 남다릅니다.
제가 아는 분들도 있고, 모르는 분들도 있는데,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어색하지 않군요.
지금 이 시간에도 일을 하시고 계신 분들과 이런 저런 사연으로 이 자리에 같이 하고 있지 못하신 분들도 마음속으로 이 방송이 들렸으면 합니다.
오늘 공연은 저 혼자만 계속 떠들 거니까 처음부터 말을 많이 하지 않고 바로 첫 순서를 진행하겠습니다.
해가 많이 길어져서 저녁 8시인데도 어둡지는 않지만, 하루가 저물고 있는 이 시간에 이런 노래가 어울리지 않을까 해서 준비했습니다.
가수 분을 직접 초대하고 싶지만, 워낙 유명한 분이라서 이 분의 노래를 직접 듣는 것은 어렵겠고, 아쉬운 데로 뮤직비디오로 대신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보내시고 계신 요즘의 삶과 오늘 하루를 돌아보면서 음악을 들어보시면 어떨까요?
뮤직비디오의 내용은 여러분이 직접 구성해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공개방송의 첫 곡으로 이상은의 ‘삶은 여행’을 듣겠습니다.
의미를 모를 땐 하얀 태양 바라봐
얼었던 영혼이 녹으리
드넓은 이 세상 어디든 평화로이 춤추듯 흘러가는 신비를
오늘은 너와 함께 걸어왔던 길도 하늘 유리 빛으로 반짝여
헤어지고 나 홀로 걷던 길은 인어의 걸음처럼 아렸지만
삶은 여행이니까 언젠가 끝나니까
소중한 너를 잃는 게 나는 두려웠지
하지만 이젠 알아
우리는 자유로이 살아가기 위해서 태어난 걸
용서해 용서해 그리고 감사해
시들었던 마음이 꽃 피리
드넓은 저 밤하늘 마음속에 품으면 투명한 별들 가득
어제는 날아가 버린 새를 그려 새장 속에 넣으며 울었지
이젠 나에게 없는 걸 아쉬워하기보다 있는 것들을 안으리
삶은 계속되니까
수많은 풍경 속을 혼자 걸어가는 걸 두려워했을 뿐
하지만 이젠 알아
혼자 비바람 속을 걸어갈 수 있어야 했던 걸
눈물 잉크로 쓴 시
길을 잃은 멜로디
가슴과 영혼과 마음과 몸이 다 기억하고 있어
이제 다시 일어나 영원을 향한 여행 떠나리
삶은 여행이니까 언젠간 끝나니까
강해지지 않으면 더 걸을 수 없으니
수많은 저 불빛에 하나가 되기 위해 걸어가는 사람들 바라봐
여러분 각자의 멋진 뮤직비디오 하나씩 만드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다음은 네 명의 여중생이 우리들의 일상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서 짧은 슬라이드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여중생의 눈으로 바라본 일상의 모습을 감상해보겠습니다.
사진1 : 지하철에 40대 후반의 남성이 다리를 벌린 채 팔짱을 끼고 앉아 있고, 그 옆에 20대 여성이 몸을 움츠리고 앉아 있다.
사진2 : 공원 벤치에 40대 중반의 남성이 담배를 피우면서 누워서 두 개의 벤치를 차지하고 있다.
사진3 : 30대 후반의 남성이 탁자가 있는 의자에 앉아서 전화를 받고 있다. ‘여긴 도서관’이라는 자막이 있다.
사진4 : 추리닝 차림의 50대 초반의 남성이 소파에 앉아서 다리를 쫙 벌리고 입을 벌린 채 자고 있다. ‘여기도 도서관’이라는 자막이 있다.
사진5 : 밤늦은 시간 어느 주택가 담 옆에서 양복 입은 남성이 발을 벌리고 고개를 숙인 채 서서 소변을 보고 있다.
사진6 : 40대 중반의 남성이 인상을 쓰면서 손가락질을 하고 있고, “너 몇 살이야? 새파란 게 말이야!”라는 말풍선이 달려 있다.
사진7 : 야구장 응원석에서 30대 중반의 남성이 일어서서 운동장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고 있고, “야! 씨발! 그것 밖에 못해!”라는 말풍선이 달려 있다.
사진8 : 남자 화장실 소변기 앞에 “황제 마사지, 여대생 상시 대기, 1:1 2:1 릴레이”라고 쓰인 광고 명함이 붙어 있다.
사진9 : “잇단 청소년들의 자살, 어른들은 뭐했나?” “성추행 현장, 도와달라는 여중생 호소 외면한 어른들”이라는 인터넷 기사가 편집돼 있다.
사진10 : 검은 바탕 위에 흰색 글자가 하나씩 쓰여진다. “아저씨... 쫌!”
잘 보셨습니까?
저도 40대 중반의 아저씨 입장이어서 이 영상에 대해서 뭐라고 얘기하기가 어렵습니다.
제목이 “아저씨... 쫌!”이군요.
이 영상을 만든 여중생들이 노래를 하나 준비했다고 합니다.
가슴이 뜨끔하신 분들, 더 크게 박수를 쳐 주시겠죠?
여성 그룹 쥬얼리가 불렀던 ‘니가 참 좋아’를 여중생들의 목소리로 듣겠습니다.
온종일 정신없이 바쁘다가도 틈만 나면 니가 생각나
언제부터 내 안에 살았니 참 많이 웃게 돼 너 때문에
어느새 너의 모든 것들이 편해지나봐
부드러운 미소도 나지막한 목소리도
YOU 아직은 얘기할 수 없지만
나 있잖아 니가 정말 좋아
사랑이라 말하긴 어설플지 몰라도
아주 솔직히 그냥 니가 참 좋아
친구들 속에 너와 함께일 때면 조심스레 행복해지고
어쩌다가 니 옆에 앉으면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드는 걸
우연히 눈만 마주쳐도 괜스레 발끝만 보게 되고
조금씩 내 마음이 너에게 가고 있는 걸
이 세상에 두 사람 너랑 나만 몰랐나봐
YOU 얼마나 잘 할지는 몰라도
나 니 곁에 서고 싶어 정말
하루하루 점점 더 커져가는 이 느낌
다른 말보다 그냥 니가 참 좋아
손잡을 때는 어떨까 우리 둘이 입 맞춘다면
YOU 아직은 얘기할 수 없지만
나 있잖아 니가 정말 좋아
사랑이라 말하긴 어설플지 몰라도
아주 솔직히 그냥 니가 참 좋아
좀 전의 영상과는 아주 다르게 밝고 상큼한 노래를 해주셨습니다.
이 노래가 10년쯤 전에 나온 것 같은데 “어떻게 해서 이 노래를 선곡하게 됐냐”고 물어봤더니 “아저씨들이 좋아 할 것 같아서 골랐다”고 하더라고요.
하하하
아저씨들을 어르고 달래고 하는 능력이 대답합니다.
어린 애들 앞에서 가오 잡는 아저씨들, 어리다고 우습게보면 어떻게 되시는지 아시겠죠?
다음에 나오실 분이 50대 후반의 아저씨인데, 이런 분위기 뒤에 나오는 게 좀 부담스럽겠군요.
이번 순서는 시낭송입니다.
시를 낭송해주실 분은 현대중공업에서 일을 하고 계시는 노동자시인 안윤길씨입니다.
안윤길 시인은 두 권의 시집을 내신 현장노동자이신데요, 오늘 낭송해주실 시는 ‘삶이란 게 별건가’라는 시입니다.
한 30년 노동자로 살다보니
깨우치는 게 있더라구
아득바득 산 놈이나
느긋하게 산 놈이나
그놈이 그놈이더라구
아득바득 살며
뼈빠지게 모은 재산이라는 것도
하루에도 수십억씩 챙기는
재벌놈에 견주면 조또 아니더라구
그러게 비굴하단 소리 들으며
뭐 빠지게 모아봤자
삶의 짐만 무거울 뿐이란 말이시
산다는 거, 그거 별게 아니더라구
하루세끼 밥 먹고 똥 잘 싸면 그만 이여
노동자는 그저
자본에 맞서 내 할말 할짓 다하며
당당하게 사는 게 땡인 기라
노동자 시인답게 짧고 선이 굵은 시를 낭송해주셨습니다.
이 분은 제가 개인적으로 잘 아는 분이라서 특별히 모셨는데요, 마이크를 잡으면 말을 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 하시는 분인데, 그냥 시만 읽고 들어가시라고 하셔서 죄송합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겠지만,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은 87년 노동자대투쟁의 출발을 알렸던 분들입니다.
그 이후 몇 년 동안 군사정권과 독점재벌의 모진 탄압을 받으면서도 제일 앞에서 민주노조를 지켜왔었는데, 어느 순간 현장이 무너지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민주노총에서 제명돼서 어용노조의 철옹성이 되 버린 사업장이기도 합니다.
요즘 안성기 씨가 방송에서 광고하는 것처럼 10년이 넘게 노사분규 한 번 없는 아주 모범적인 회사가 됐지요.
20~30대 청년 노동자들이 피 흘리면서 만들고 지켜온 노동조합이 무너지고,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는 늙은 노동자가 돼 버렸군요.
자본에 맞서 당당하게 할 말은 하던 노동자들이 나이가 들어 정년퇴직을 하게 되면, 또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까요?
한번쯤 이 늙은 선배노동자들의 삶을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다음 모실 분도 50대 노동자이십니다.
철도 노조에서 수 십 년을 활동해 오신 이철의 씨인데요, 사람들 앞에 나와서 하실 얘기가 없다고 완강하게 버티시는 걸, 몇 년 전에 썼던 글이라도 읽어주시라고 어렵게 설득을 해서 모셨습니다.
오늘 읽어 주실 글은 KTX 여승무원들이 투쟁이 힘겹게 이어지던 2006년 겨울쯤에 쓰셨던 글이라고 합니다.
지부장이 경찰에 출두했다. 싸움을 이긴 뒤에 보내고자 했으나 그렇지 못하였다. 파업 300일 동안 몸도 마음도 많이 상했기에 가슴이 아프다. 지부장에게 ‘선의 나침반’을 권했더니 품에 꼭 안고 경찰서로 갔다. 더 따뜻하게 대하여 줄 것을 너무 냉정하게 지도력만 원하였다. 시련 속에서 더 단단해져 나오기를....
내년이면 오십인데 건강은 그럭저럭하고 아직도 잘 버티고 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말을 되새기며 한 해를 보냈다. 전망이니 변혁이니 그런 표현은 쓰지 않지만 고집은 아직도 남았다. 많은 후배들은 전망이 없다 한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저 쉬고 싶다 한다. 점점 더 말을 하는 게 부담스럽다. 논쟁은 무조건 사양이다. 그저 네 할 일이나 쉬지 말고 해라. 가끔씩 쉬고 싶거든 하루쯤은 푹 쉬거라. 남에게 혹은 운동에 폐만 끼치지 않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내년 한해도 이런 심정으로 보냈으면 좋겠다.
네 시간 정도 청소를 하였다. 묵은 쓰레기를 치우는데 한 시간 반, 창고 두 개를 정리하는데 두 시간 가량, 그리고 침실로 쓰는 창고를 정리하는데 삼십분 정도, 도중에 배가 고파서 막걸리를 한 사발 마셨다. 한 달쯤 묵은 술인데 겨울이라 그런지 먹을 만하다. 부산 부지부장에게 권했더니 먹는 시늉만 한다. 성실한 친구다.
창고를 치우다 보니 파업을 그만둔 조합원들 물건을 보게 된다. 승무원 정복을 세벌 정도 버렸다. 처음에는 망설였으나 어차피 버릴 물건이다. 집회 때 나누어준 손수건, 엑스표를 친 마스크, 뿔나팔 등 여러 가지 물건이 주머니에서 나왔다. 잠시 쓸쓸해졌다. 이 물건의 주인은 파업을 포기하기 전에 얼마나 망설였을 것인가? 기초 화장품, 옷가지, 장갑, 모자 등 소지품을 그대로 두고 떠나 버렸다. 전태일 평전을 두고 간 친구도 있다. 파업 300일에 희망도 절망도 두고 간 친구들, 그 친구들이 한때 가졌을 분노나 감동조차 두고 간 것 같아 쓸쓸하기 그지없다.
은행잎이 모두 떨어지기 전에 싸움을 이기자고 하였건만 끝날 날은 요원하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단 한 개의 은행잎도 남아있지 않다. “은행잎을 실로 묶어 놓으면 되지요.” 농담을 했던 친구는 아직도 남아 있다. 94년 처음 해고되었을 때 펄펄 떨어지는 은행잎을 보고 유달리 스산했던 기억이 새롭다. 300일이 넘는 파업기간동안 고참 간부인 나는 조합원들에게 무엇일까?
상황실장이 방송 차 나팔을 깨먹었다. 모레쯤 집회를 해야 하니 수리를 해야 할 것이다. 나팔 값은 9만 원 정도, 조합 봉고차 세대를 주로 수리하고 있다. 급한 사람이 고쳐야 하니 그렇게 되었다. 갈수록 늙어가는 기분이다.
기름을 네 통 넣었다. 부산 조합원들은 이틀에 한번, 서울 조합원들은 4일에 한번 넣어 주어야 한다. 연휴 때 귀가를 하지 않은 조합원들이 있다. “기름 안 떨어졌나?” “그러잖아도 걱정하고 있었어요.” 겨울 날 일이 걱정이더니 그럭저럭 한 달은 지나갔다. 감기나 폐렴 같은 병에 걸려 아픈 친구나 없었으면 좋겠다.
“약골처녀, 이번 주는 한 번도 아프지 않았네.” 일주일에 한번은 반드시 쓰러지는 친구가 있다. 되도록 집회에 오지 말라고 해도 굳이 와서 실신한다. “저 이제 안 아파요.” “그래그래 아프지 말아야지.” 귀가 때 집에 가서 푹 쉬고 오라 했더니 할아버지가 편찮으시다고 병간호를 했다 한다. 아니나 다를까 또다시 병원신세. 파업을 이겨도 차를 제대로 탈지 걱정이다.
약간 땡땡이를 치던 친구들이 조장회의에 걸렸다. 조합원들 가운데 가장 무서운 게 조장들이다. 좋게 무마하려고 몇 마디 거들었는데 자기들끼리 회의하는 게 추상같다. 조장회의에는 원래 개입하지 못하는데 상황이 복잡하다고 참관하라고 했다. 조장회의에서 잘못된 결정을 한 일은 거의 없는 것 같다. 파업 300일을 버틴 중요한 회의 중 하나이다.
세월은 흐르고 나는 늙어간다. 많은 사람을 알게 되었고 많은 사람을 잊게 되었다. 변절한 사람, 떠나간 사람, 탈퇴한 조직, 깨진 조직, 그리고 잊혀진 사람들.... 한때 가졌던 열정을 아쉬워하는 사람이라도 있다면 일 년에 한번쯤 못 마시는 소주라도 한잔 마시고 싶다.
옛말에 이르기를 만나면 헤어지고 헤어지면 만난다고 하였으니.
가슴이 싸해지는 글입니다.
다들 기억하시죠? KTX 여승무원들의 정말 눈물 나는 그 투쟁들...
그렇게 치열하게 투쟁했었는데, 어느 순간 조용히 잊혀지기 시작했습니다.
설레는 마음을 안고 KTX 승무원이 됐던 그들이 화려한 겉모습과 다른 처참한 노동 현실을 접하면서 분노하고, 그 분노를 모아 노동조합을 만들고, 그 힘으로 투쟁에 나섰지만, 현실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강했습니다.
그렇게 20대를 보냈던 그들이 지금은 30대가 됐습니다.
그들의 30대는 또 어떤 삶일까요?
그리고 철옹성 갔던 어용노조를 무너트리고 모진 탄압 속에 민주노조를 지켜왔지만, 비정규직 투쟁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한 채 50대가 되버린 정규직 노동자는 왜 이렇게 할 말이 없어지는 것일까요?
이번 순서는 초등학교에서 방과 후 수업으로 초등학생들에게 악기 연주를 가르치시고 계신 강사님 한 분을 모시고 바이올린 연주를 듣겠습니다.
이제 해가 완전히 져서 밤의 정취를 만끽 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눈을 감고 아름다운 바이올린 연주 속에 빠져서 따뜻하고 아련한 기억을 어루만져 보는 것은 어떨까요?
조용한 숲 속에 새소리가 들려옵니다.
살며시 바람이 불어서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소리도 들려오는군요.
새소리와 바람소리에 어울려 바이올린 소리가 주위를 감싸옵니다.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습니다.
바이올린 소리가 살며시 심장으로 스며듭니다.
가볍게 심장이 두근거립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달이 떠있습니다.
보름달에서 반달로 되어가는 하현달이군요.
바이올린 소리와 달빛이 서로를 쓰다듬고 있습니다.
그 속에 한 사람의 얼굴이 희미하게 비칩니다.
그 얼굴이
사랑하는 이의 얼굴이나
지금 너무도 보고 싶은 간절한 이의 얼굴이라면
잠시 뒤로 미뤄두고
바이올린 소리와 달빛을 따라서 좀 더 기억 속으로 들어가 보세요.
기억 저 끝에서 누군가의 얼굴이 희미하게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아직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은 그 사람의 얼굴이...
잘 살고 있겠지요?
이제 분위기를 좀 바꿔보려고 합니다.
이번에 모실 분은 정차식 씨라는 분입니다.
모르시는 분들이 많으실 텐데, 벌써 두 장의 앨범을 내고 여러 곳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계신 가수이십니다.
이 분의 음악을 어떻게 설명해야 될지 난감하기는 한데, 본의의 표현대로 하면 “나오는 대로 지껄이고, 불리는 대로 부르는 노래”라고 합니다. 솔로 활동을 하기 전에 밴드에서 록음악을 했던 분이라서 그런지 솔로 활동을 하면서도 밴드음악처럼 노래를 하십니다. 오늘도 드럼, 전자 기타, 베이스 기타, 전자 바이올린, 건반까지 풀 옵션으로 준비돼 있습니다.
인디음악을 좋아하시는 분들 사이에서는 어느 정도 알려지신 분이지만, 대중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분을 읽는 라디오에 초대한다는 것이 난감하기는 하지만, 자유롭게 상상력을 발휘해 보시라고 모셨습니다.
본인 스스로 마초냄새를 풍기면서 킥킥거리는 음악을 해보고 싶다기에 마음대로 해보라고 그랬습니다. 지금까지의 분위기와는 완전히 다른 정차식 씨의 노래 ‘옷깃을 세우고’를 듣겠습니다.
쓸쓸한 이 계절에는 이상하게 당신이 땡겨 그냥 나랑 삽시다
당신도 언젠가는 늙어간다오 오 늙어가오 기운도 없구요 사랑은 더 없어요 나 어떡해 나 어떡해요
오늘같이 비오는 밤엔 지독하게 소주가 땡겨 그냥 나랑 잡시다
당신도 저 달처럼 꺾어진다오 오 휘어지오 기운도 없구요 사랑은 더 없어요 나 어떡해 나 어떡해요
나는 너의 사랑을 먹고 사는 철부진가 봐 나는 너의 사랑을 갈구하는 황무지요
바바리에 성냥하나 꼬나물고 유유히 도시를 걷던 나의 영웅은 사라졌다
영원히 죽지 않고 살아있을 거야 옷깃을 세워 돌진하는 나의 형제여
팍팍한 이 삶에서는 아무래도 당신이 좋아 그냥 나랑 삽시다
당신도 언젠가는 늙어간다오 오 늙어가오 기운도 없구요 사랑은 더 없어요 괜찮아요 난 괜찮아요
영웅은 죽지 않았어 이 가슴팍에 살아 있다오 그냥 나를 냅두오
언젠가는 그들처럼 멋져질테오 오 멋져져라 시간은 많구요 사랑은 찾을테요 기다려요 기다려줘요
나는 너의 사랑을 먹고 사는 철부진가 봐 나는 너의 사랑을 갈구하는 황무지요
(옷깃에 불어오는 바람처럼 그 마음을 떨어뜨린 노래들과 함께 하는 시간들이 더없이 배고팠던 나의 나날들 후줄근한 냄새마저 곱게 빗어 넘긴 바람 엄습하듯 다가오는 그대 기억 속에 날 묻어줘 남겨진 채 아픔 잊고 그다지도 높지 않던 가을 벽을 지나오는 따스함은 이제 잊었소 피 끓는 청춘이어라 매정한 기운이어라 부딪치는 열망이어라 몰아치는 광경이어라)
재미있으셨나요?
읽는 라디오로 이 분의 노래를 들어야 하는 것이 많이 아쉽습니다.
보시다시피 짙은 색 마의에 하얀 쫄티를 받쳐 입을 정도로 나름대로 세련된 패션을 보여주시려고 하는데, 왠지 촌스러운 분위기가 풍기는 패션입니다. 선글라스를 벗고 나니까 얼굴도 별로이지요? 하하하. 이 분이 나이가 30대 후반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주 팔팔한 청춘은 지난 나이이고요. 음악도 멋있고 세련되기 보다는 뭔가 허접한 느낌을 주고, 후반에 보여주는 막춤은 저도 출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춤입니다. 그런 노래를 정말 열심히 부르시는 모습이 좋았습니다. 노래 하나 하고 나서 저렇게 땀을 뻘뻘 흘리시는 거 보세요.
마초 노래를 부르는데 허접한 마초라는 느낌이 들어서, 각설이 같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나름대로 인디음악계에서 알려지신 분인데 노래를 하는 걸 보면 잘난 척 하지 않으면서도 열심히 부르는군요. 그런 모습이 참 좋습니다. ‘나는 가수다’에서처럼 아주 화려하고 세련되게 뛰어난 가창력을 자랑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정차식 씨처럼 무게 잡지 않고 자유롭게 열심히 부르는 노래도 좋습니다.
이제 마지막 순서입니다.
처음 해보는 공개방송이라서 좀 짧지요?
다음에 또 공개방송을 하게 되면 좀 더 길게 준비해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모실 분은 얼마 전에 있었던 저의 개인적 경험과 관련된 분이십니다.
동네 공공도서관에 책을 보러 갔었던 적이 있었는데, 열람실에서 책을 몇 권 골라서 보고 있다가 잠시 화장실을 다녀왔더니 책이 없어진 것이었습니다. 그 도서관 책이라면 별 상관이 없는데, 그 중에는 다른 도서관에서 빌려왔던 책이 같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도서관에서 일하시는 분에게 책을 치웠냐고 물어봤더니 한 분이 아주 당황해 하는 모습으로 서가를 뒤치더니 제 책을 다시 찾아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얼굴에 진짜로 미안해하는 모습이 생생한 표정을 지으면서 “죄송합니다”라고 두 번이나 얘기하는데, 제가 오히려 미안해 질 정도였습니다.
40대 후반이나 50대 초반으로 보이시는 그 분은 여성분이셨는데, 나중에 보니까 도서관 직원이 아니라 공공근로 일을 하시는 분이었습니다. 공무원 신분인 도서관 직원들은 약간 도도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데, 그 분은 전혀 그렇지 않았거든요. 뭐랄까... 워낙 찌들려 있어서 사소한 것에도 겁을 먹는 그런 모습이라고 할까요? 자세히 보니 몸도 좀 뚱뚱한 편이었는데, 얼굴이 푸석한 것으로 봐서 아파서 그런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제 책을 찾아달라는 아주 간단한 부탁이었는데, 그 한마디 때문에 그 분의 마음이 불편해지는 모습을 보니까 괜히 제가 죄를 지은 것 같아서 안타깝고 미안하고 그랬습니다.
나중에 이 공연을 준비하다가 그 분을 아는 분을 만나게 됐습니다. 임대아파트에서 혼자 사시는 분인데 이런 저런 일들을 열심히 하시면서 살아가시는 분이라고 하더군요. 그 분이 노래를 그렇게 잘한다고 동네에서 소문이 났다는 말을 듣고, 이 공연에 나와서 노래 한 번만 불러달라고 여러 번 설득을 했습니다.
쉽지 않은 과정이었는데요, 오늘 마지막 순서로 모시게 됐습니다.
지금 많이 떨고 계시니까 여러분이 따뜻한 마음으로 격려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름은 밝히지 말아달라고 해서 그냥 공공근로 아주머니라고 하겠습니다.
공공근로 아주머니가 불러주실 노래는 예전에 한경애 씨가 불렀던 ‘옛 시인의 노래’입니다. 이 노래를 마지막으로 오늘 공개방송도 마치겠습니다. 저는 재미있는 시간이었는데, 여러분도 재미있는 시간이었기를 바랍니다.
마른 나무 가지에서 떨어지는 작은 잎새 하나
그대가 나무라 해도 내가 내가 잎새라 해도
우리들의 사이엔 아무 것도 남은 게 없어요
그대가 나무라 해도 내가 내가 잎새라 해도
좋은 날엔 시인의 눈빛 되어 시인의 가슴이 되어
아름다운 사연들을 태우고 또 태우고 태웠었네~~~
뚜루루루 귓전에 맴도는 낮은 휘파람 소리
시인은 시인은 노래 부른다
그 옛날의 사랑얘기를
좋은 날엔 시인의 눈빛 되어 시인의 가슴이 되어
아름다운 사연들을 태우고 또 태우고 태웠었네~~~
뚜루루루 귓전에 맴도는 낮은 휘파람 소리
시인은 시인은 노래 부른다
그 옛날의 사랑얘기를
그 옛날의 사랑얘기를
뚜루루 뚜루루루
마지막 인사까지 드렸는데 또 나오게 됐습니다.
이렇게 끝나는 게 너무 아쉬운가요? 앵콜을 부탁하는 소리가 장난이 아닙니다.
저도 아주머니 노래가 너무 감동적이어서 살짝 눈물이 흐르기도 했습니다.
초반에 떨려서 음정이 약간 불안하기는 했는데, 정말 대단한 실력이죠?
앞에서 노래 불렀던 정차식 씨가 기립박수를 치면서 자기 공연 때 초대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평소에 부르시던 노래로 하나만 더 불러달라고 했더니 주저하지 않고 그러겠다고 해주셨습니다.
이번에 부르실 노래도 오래 전에 나왔던 노래입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를 앵콜곡으로 들으면서 오늘 공개방송을 진짜로 마치겠습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나 지금 가는 이 길이
정녕 외롭고 쓸쓸하지만
내가 가야할 인생길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나 지금 가는 이 길이
정녕 고난의 길이라지만
우리가야 할 인생길
아무도 몰라도 좋아
내 주님 가신 이 길은
나의 꿈 피어나는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아무도 몰라도 좋아
내 주님 가신 이 길은
나의 꿈 피어나는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저 높은 곳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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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방송에도 누군가의 참여를 기다립니다.
방송에 대한 의견도 좋고
전하고 싶은 얘기도 좋고
광고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해도 됩니다.
아니면 쓸데없는 얘기 주절거려도 되고요. ㅋㅋㅋ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문을 열어 놓고 있겠습니다.
제주도 제주시 애월읍 고내리 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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