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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 권 소개합니다

걸어서 20분쯤 가면 작고 아담한 도서관이 있습니다.
요즘은 비교적 한가한 때라서 도서관에서 책을 자주 빌려서 읽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읽었던 책 한 권이 가슴에 남아서 소개하려고 합니다.

 

‘1995년 서울, 삼풍’이라는 책입니다.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를 되살려놓은 책입니다.
당시 사고를 목격했던 사람, 구조작업을 했던 사람,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사람, 가족이 주검으로 돌아온 유가족 등 그때 현장과 관련한 사람들의 기억을 되살리며 처참한 현장의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목격자도, 구조대원도, 생존자도, 유가족도
20여 년이 지났지만
그 지옥의 모습을 다시 떠올리는 것이
너무 끔찍했습니다.
‘흐느낀다’ ‘통곡한다’ ‘말을 잊지 못한다’ ‘울먹인다’ 이런 표현들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읽는 저도 울먹울먹하며 읽어나가야 했습니다.

 

참사의 현장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끔찍하고 무질서했습니다.
재난영화에서 볼 수 있었던 장면들은 오히려 로멘틱할 정도였습니다.
그 지옥의 한복판에서 사람들이 보여준 모습 역시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헌신적으로 구조에 매달리는 사람, 우왕좌왕 정신없는 사람, 백화점 물건을 도둑질하는 사람, 유언비어에 흥분하는 사람, 차분하게 질서를 잡으려 노력하는 사람, 보상금 때문에 눈이 뻘개진 사람, 조심스럽게 유가족들을 돌보는 사람, 발뺌하려는 사람
20여 년이 지난 지금, 사람들의 상처 역시 여전했습니다.
살려달라는 얘기를 들으며 열심히 구조했지만 시체로 돌아온 사람에 대한 기억 때문에 힘들어하는 구조대원, 아직도 악몽에 시달리고 사람들 많은 곳에 가지 못하는 생존자, 죽은 자식이 생각날까봐 부모님 칠순잔치도 못하는 유가족, 사위가 보상금만 챙기고 인연을 완전히 끓어버려서 화병을 안고 살아가는 유가족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은 사람들의 위치에 따라서 조금씩 뉘앙스가 달랐습니다.
극도로 무질서했음을 강조하는 사람과 무질서한 속에서도 열심히 체계를 잡아갔음을 얘기하는 사람, 헌신적인 시민들의 모습을 감동적으로 묘사하는 사람과 이중적인 인간의 모습을 경멸스럽게 강조하는 사람, 20년이 흘렀는데도 바뀌지 않은 한국의 모습을 비판하는 사람과 예전에 비해서는 나아지고 있음을 주장하는 사람
한편의 장엄한 다큐멘터리이고,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다양한 모습을 그린 지옥도이고, 상처입은 인간과 사회가 살아가는 방식을 얘기한 교리집이었습니다.

 

그 끔찍한 기억을 다시 떠올린다는 것 자체가 상상하기 어려운 고문이었습니다.
그렇게 잔인한 짓인줄 알면서도 애써 끄집어내서 기록하는 일도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 고통의 기억을 읽어나가는 일 역시 힘들기는 마찬가지이고요.
기억을 끄집어내는 분중에 많은 분들이 세월호에 대한 얘기를 합니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어떤 심정일지 이해가 된다고요.
고통이 뭔지 아는 사람은 남의 고통을 자연스럽게 이해합니다.
고통스럽기에 더욱더 기억하고 기록해야 하는 이유를 그들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책을 읽고나서 1995년에 나는 뭘하고 있었나 하고 기억을 더듬어봤습니다.
그때 저는 학생운동을 정리하고 노동운동을 막 시작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서울에서 노동자들의 투쟁현장을 찾아다니면서 정신없이 보내고 있었지요.
뉴스에서 성수대교가 무너지고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지나치듯이 듣기는 했었는데 관심은 별로 없었습니다.
오직 노동자의 투쟁과 혁명에 대한 것에만 모든 에너지를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와서 그때의 제 모습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할 수 있기야 하겠지만
별로 비판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때 저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세월호가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 날 저는 공연을 보러갔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 대한 배신감으로 똘똘 뭉쳐있던 저는 자꾸 이준석 선장의 얼굴이 제 모습과 오버랩됐습니다.
그 이후 제 얼굴에서 이준석 선장의 모습을 지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건 세상에 대한 배신감을 제 마음에서 지워나가는 노력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책은 제 마음 속에 채워넣어야 할 것은 보여줍니다.

 

남의 고통을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무관심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
자기연민과 타인에 대한 연민이 같이 가야한다는 것
슬플 땐 슬퍼하고, 분노할 땐 분노하고, 기쁠 땐 기뻐해야 한다는 것

 

누군가의 얘기를 귀기울여 듣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준 정말 값진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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